In 1220, Count Thomas I occupied the towns of Pinerolo and Chambéry (Kamrach), which afterwards became the Savoy capital.
사보이.가 샹베리.를 차지하는게 서기 1220년 이고. 사보이 백작령의 수도가 되는게 서기 1295년.이야. 몽블랑 걸쳐서 알프스 아래길목을 좌우로 차지하고 얘들 수도는 서쪽 샹베리.가 되는거야. 이들은 로마황제와 임미디어시. 즉 직접 로마황제를 만나는 지위가 아냐 이때는. 이들이 하미지 하는 곳은. 아를 킹덤이야. 아를.은 아비뇽 아래 혼느강 하류에 있고. 수도.도 그래서 이쪽 근처로 오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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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샤를.이 877년에 죽어. 둘째형 게르만 루이가 876년에 죽어서 샤를이 동프랑키아 까지 일년 겸하는겨. 그리고 동쪽은 뚱땡이 샤를.이라는 게르만 루이의 자식이 잇는거고. 서쪽은 말더듬이 루이.가 2년하고 죽어서 두형제 루이와 카를로맨이 하다가 얘들도 5년만에 다 죽어 884년. 그래서 게르만 루이 아들 뚱땡이 샤를.이 887년 까지 동서를 다 지배한 황제가 된거걸랑.
고지대 부르고뉴 킹덤. 저지대 부르고뉴 킹덤.이 합해져서 아를 킹덤.이 되는데.
저지대 부르고뉴.가 프로방스.이고 내륙까지 들어간. 혼느강 오른쪽. 여긴 보소. Boso 가 만든겨. 얜 원래 로타르.쪽에 하미지 하던 집 자식이고. 결혼으로 대머리 샤를.과 처남매부가 된겨. 샤를이 아빠뻘이야. 로타르에 하미지 하지만 대머리샤를 밑에서 일을해. 대머리 샤를이 그 힘으로 로타르지역 땅을 다 먹으려 하는거고 이탈리아 침입하려는거고. 여기에 보소.가 반기를 들어. 그러다 대머리 샤를이 죽고. 저지대 부르고뉴에서 바로 킹.이 되는겨. 878년.이야.
고지대 부르고뉴.는 부르고뉴백작령.지역이야. 여기도 로타르 땅이야. 창업자 루돌프.는 보소 보다 훨 어려 십년 이상. 얜 대머리 샤를 자식들 세대야. 말더듬이 루이.가 죽고 자식들 두형제 죽고. 뚱땡이 샤를이 동서를 다 황제할때 고지대부르고뉴 킹덤.의 킹이 된겨. 서기 888년.
이 두 킹덤이 합쳐. 이게 서기 933년.이야. 아를.에 수도를 정하고. 1378년 까지 445년을 간 킹덤이야 이게. 신성로마황제에 하미지를 해. 저 직전에 사보이.가 아를킹덤을 벗어나서 직접 로마황제에 하미지를 하는거고.
The Duchy was created in 1416
사보이.가 더치. 공국이 되는게 서기 1416년 이야. 수도를 토리노.로 가는게 1562년.이야. 이전에 샹베리.에서 270년간 있던거고. 이탈리안 전쟁.이 끝나고 토리노.로 옮긴거야. 즉 이전까지는 말야 밀라노 왼쪽의 토리노.는 중심이 아냐. 이들의 중심은 아를킹덤의 프로방스 북쪽 인거야. 제네바와 아래 도피네(도팽)의 사이인 이곳이 비중이 있는거야. 여기가 프랑스의 이탈리안 전쟁 시 입구 길목인거고. 65년간의 이탈리안 전쟁의 프랑스 전초기지인거고. 이들은 프랑스 킹덤과 더 가까울 수 밖에 없던거야. 전쟁이 끝나고 토리노.로 가면서, 프랑스랑 이미 이별을 했던거야. 그러면서 사보이.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손잡으면서 근대사의 실세가 돼.
Prince Eugene Francis of Savoy–Carignano (French: Eugène François, German: Eugen Franz, Italian: Eugenio Francesco; 18 October 1663 – 21 April 1736) was a member of the House of Savoy and Generalfeldmarschall of the Imperial Army and statesman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the Archduchy of Austria and one of the most successful military commanders in modern European history, rising to the highest offices of state at the Imperial court in Vienna.
유럽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사보이-카리냐노.의 프린스 외젠 프랑스와. 이태리 에우제니오 프란체스코.
사보이의 방계가문인 사보이-카리냐노.가문이 이탈리아 킹덤을 세우는겨. 이 사람은 사보이의 일리짓메이트.라는 비합법자 배스타드.가 아냐. 서열에서 밀릴뿐이야.
Thomas Francis of Savoy, Prince of Carignano (Italian: Tommaso Francesco di Savoia, Principe di Carignano, French: Thomas François de Savoie, Prince de Carignan; 21 December 1596 – 22 January 1656) was an Italian military commander and the founder of the Carignano branch of the House of Savoy, which reigned as kings of Sardinia from 1831 to 1861, and as kings of Italy from 1861 until the dynasty's deposition in 1946
사보이.의 토마스 프란시스. 카리냐노.의 프린스. 이사람이 실질적으로 사보이.가 사르디냐 킹덤.을 세운 방계가문의 창립자야. 외젠 프랑스와.의 할아버지.야.
사보이.는 샹베리 에 수도를 두면서 270년간. 이들은 아를킹덤에서 벗어났지만 아를킹덤이 망하고 여긴 점점 프랑스킹덤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는거야. 신성로마와 프랑스의 사이에 끼면서 프랑스 입김이 쎄지는겨. 이 절정이 루이11세.가 사보이 여자와 결혼하는거야. 루이11세.가 프랑스 킹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냉정하고 거시적 킹이야 얘가. 얜 사보이를 확실히 자기 안으로 넣고 이탈리아.를 먹고자 한거걸랑. 이걸 아들 샤를8세.가 하는거야. 얜 엄마가 사보이야. 사보이의 남매들이 프랑스 코트.를 쥔거야.
그러면서 사보이.가 프랑스의 이탈리아를 넘어가는 길목이 되고. 얘들은 완전히 프랑스킹덤 손아귀로 들어간거야.
Emmanuel Philibert (in Italian: Emanuele Filiberto or Testa di ferro, Piedmontese: Testa 'd fer, "Ironhead", because of his military career; 8 July 1528 – 30 August 1580) was Duke of Savoy from 1553 to 1580, KG. He is remembered for the Italianization of the House of Savoy, as he recovered the savoyard state (invaded and occupied by France when he was a child) following the Battle of St. Quentin (1557) and subsequently moved the capital to Turin and made Italian the official language in Piedmont.
엠마뉴얼 필리버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테스타 디 페로. 철로 된 머리. 이사람이 적극적으로 합스부르크.와 손을 잡고 이탈리아 전쟁 말기에 프랑수아1세.와 앙리2세.에 대든거야 적극적으로.
이사람은 엄마.가 아라곤의 마리아의 딸이야. 이 마리아.는 미친년 후안나.의 여동생이야. 즉 카를5세황제.의 조카인겨. 펠리페2세.와는 사촌인거고. 세컨드 커즌. 그리고 이사람때 이탈리안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와 이별하면서 이사람이 수도를 토리노.로 옮기는거야. 본격적인 사보이의 시대를 만든겨 엠마뉴얼 필리버트.가
Charles Emmanuel I (Italian: Carlo Emanuele di Savoia; 12 January 1562 – 26 July 1630), known as the Great, was the Duke of Savoy from 1580 to 1630. He was nicknamed Testa d'feu ("the Hot-Headed") for his rashness and military aggression
카를로 에마누엘레. 필리버트 아들인 찰스 엠마뉴얼 1세.가 그레이트 딱지가 붙는거야. 이사람이 왼쪽 아래 살루쪼 후작령을 갖고와. 그리고 위의 제네바.를 치러가는겨. 이게 L'Escalade, or Fête de l'Escalade 리스칼라드. 펫 드 리스칼라드 1602 인데.
이 찰스 엠마뉴얼1세.가 자식을 21명을 낳았어 확인된건만. 첫부인이 펠리페2세의 딸이야. 여기서만 열명의 자식들을 낳아. 이중에 아홉번째가 카리냐노 carignano 의 프린스 토마스 프란시스.야. 위에 형들만 네명이야. 카리냐노.는 토리노 왼쪽 변방이고. 이사람은 승계권이 졸 약한겨. 자기 땅에서 할게 없어.
그래서 결혼.을 프랑스 파리 오른쪽의 스와송 백작부인. 부르봉의 마리.와 하는겨. 집안은 반프랑스인데 이사람은 친프랑스로 들어간거야. 사보이 공국령.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편이지만 한쪽은 프랑스에 발도 담근거야.
찰스 임마뉴엘1세.의 자식인 카리냐노의 토마스 프란시스의 자식들은 그래서 프랑스.에 기반을 두는겨. 이 사람의 손자.가 외젠 프랑스와. 인겨. 유럽 근대사 최고의 군인이야. 즉 파리에서 출생이야. 사보이 지만. 커서 프랑스 코트.에서 군인이 되려했지만 루이14세가 엄마의 스캔들로 안받아들여. 이 이야긴 나중에 하고. 그래서 이사람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들어가는겨. 그러면서 사보이 공국령과 연합해서 전쟁을 해. 대표적인게 9년전쟁이야.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치는. 프랑스를 상대로. 그리고 오스만이 다시 비엔나를 포위하는 1683년 전투에 이후 젠타 전투.로 오스만이 질 때 최고의 스타.가 이 사보이의 외젠.이야. 이 가문이 19세기에 사르디냐 킹덤을 만들면서 이탈리아를 통일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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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290, the latter obtained the right of installing the vice-dominus of the diocese, the title of "Vidame of Geneva"[6] was granted by Amadeus V, Count of Savoy in the name of the Holy See (by the Foreign relations of the Holy See) to the counts of the House of Candia under count François de Candie of Chambéry-Le-Vieux a Chatellaine of the Savoy, this official exercised minor jurisdiction in the town in the bishop's absence.
제네바.는 리만 호.라는 제네바 호수 끝에 프랑스 접경 도시야. 여긴 비숍릭. 주교의 땅이야. 이게 서기 1290년.에 사보이 백작령으로 들어와. 사보이가 샹베리.를 1220년에 갖고오고 여기 위에 제네바.를 갖고 오는겨 서기 1290년.에 더하여 제네바 호수 죽 위에 베른.까지 사보이가 갖고와. 그래서 13세기에 저기를 Sabaudia 사부아디아.라고 하면서 사보이.가 되고 사브와.가 돼.
사보이가 이미 13세기 말에 스위스땅 절반을 다 지배한거야. 스위스땅 실세.는 사보이 인거야. 여기는 부르고뉴 백작령.이었고. 고지대 부르고뉴 킹덤이었고. 아를킹덤.에 하미지 하던곳이야 스위스 왼쪽 절반은.
The House of Zähringen (German: Zähringer) was a dynasty of Swabian nobility. Their name is derived from Zähringen castle near Freiburg im Breisgau.
11세기에 이 지역 실세는 제링엔. 가문이야. 스위스 정 북쪽 바젤 취리히 넘어의 슈바벤. 스와비아 의 귀족가문이야. 이들이 여기까지 지배한거고. 이걸 몽블랑쪽의 사보이들이 넘어가면서 다 갖고 온거고 제링엔 가문은 쇠하는거야.
1602년 사보이가 제네바.를 쳐들어가는건. 이전에 제네바.가 3백년의 사보이 힘에서 벗어났다는거고. 이걸 다시 재점령하겠다는겨. 저때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 걸랑. 제네바는 Vaud 보 캔톤.이고. 이 오른쪽 위는 베른 Bern 캔톤 이야. 이 위끝 취리히.는 츠빙글리.의 프로테스탄트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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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라는 나라는 서기 1291년 부터 동맹을 맺기 시작해.
Under the Hohenstaufen dynasty of the Holy Roman Empire, the three regions of Uri, Schwyz and Unterwalden (the Waldstätten or "forest communities") had gained the Reichsfreiheit, the first two because the emperors wanted to place the strategically important pass of the St. Gotthard under their direct control, the latter because most of its territory belonged to reichsfrei monasteries. The cities of Bern and Zürich had also become reichsfrei when the dynasty of their patrons, the Zähringer, had died out.
호헨슈타우펜.도 슈바벤 지역이고. 호헨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죽는 1250년.이후 유럽역사는 막 헝클어지는겨. 이때부터 중세.의 중기와 후기가 나뉘어. 이즈음에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이 세 지역이 라이히스프라이하이트. 프라이.가 프리 free 여. 자유. reich 라이히.가 영어 rule 이야. 이건 게르만 말이야. 같은 라틴어.가 레게레 regere 에 regula 레굴라.야. 이건 곧은 잣대. 짝대기야. 이게 권력 이 되고 제국 하는거야. 저건 황제와 임미디어시. 직접 컨택하는 지위야. 위에 다른 봉건영주가 없는 자유도시가 된거야.
rich 부자라는 리치.가 라이히.고 룰.이고 레굴라.야. 권력이 있으면 부자야.
저때 세 지역이 우리. 슈비츠. 운더발덴.이 완전히 스위스 가운데 지역이야. 스위스의 시작은 이 가운데 도시들인겨. 여긴 종교전쟁때 로마 카톨릭.이야. 여기 사람들이 취리히로 가서 츠빙글리.를 죽이는겨.
저 세곳을 중심으로, 베른. 취리히.가 라이히스프라이하이트.를 얻는거야. 저 알프스 가운데 길을 황제 직할로 넣겠다는 의지야.
This time of turmoil prompted the Waldstätten to cooperate more closely, trying to preserve or regain their Reichsfreiheit. The first alliance started in 1291 when Rudolph bought all the rights over the town of Lucerne and the abbey estates in Unterwalden from Murbach Abbey in Alsace.
발트.가 숲.이고 슈태텐.이 지역.이야. 숲지역.이 영어화 되서 저걸 캔톤 이라고 해.
저 세곳이 서기 1291년.에 연합체.를 꾸리는거야. 이게 스위스.의 시작이야.
From Middle French canton, from Old French canton (from the 1240s), from Old Occitan canton (“corner; canton”) (recorded before 1218), adopted in Occitan from North Italian (Gallo-Italic, early Lombard) cantone (“edge, corner; canton”), ultimately representing Latin cant- (“rim (of a wheel)”) with the addition of the -ō (accusative -ōnem) suffix forming augmentatives in Romance.
캔톤.이 불어가 시작이야. 코너. 구석진 곳.이란 뜻이야. 캉통. 스위스라는 정체성도 나중에야 생기는겨 이게. 프랑스 킹덤은 저걸 자기들 땅이라 생각한거야. 자기들 땅 가장 구석진 곳. 나중 볼테르.도 저 스위스 캉통에 사는겨 말년을. 13세기 전에 쓰인 말로 봐. 저걸 굳이 주. 로 번역하는데 걍 캔톤 이라 해.
프리드리히2세 황제.가 1250년에 죽고. 황제 대공위 시대인거야.
Henry VII (German: Heinrich; c. 1274 – 24 August 1313)[2] was the King of Germany (or Rex Romanorum) from 1308 and Holy Roman Emperor from 1312. He was the first emperor of the House of Luxembourg.
저게 60년 후 서기 1308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가 황제 가 되면서 일단락이 되지만.
저 혼란의 시기에 등장한게 합스부르크. 가문이야. 취리히 왼쪽의. 루돌프.가 만든겨 지금 합스부르크.는 그리고 이 아들 아돌프1세. 가 스위스 캔톤 지역들을 자기가 직접 가지려는겨. 갓 해방도시가 된 듯 했는데. 1278 Battle on the Marchfeld. 1298 Battle of Göllheim. 이 두 부자.의 전투.가 중요해. 이전 썰. 마르흐펠트 전투.로 루돌프.가 오스트리아를 쥐면서 합스부르크.가 세상에 등장하고. 괼하임 전투.로 아들 아돌프.가 나싸우의 아돌프.를 이기면서 공포를 주다가 얘가 조카에게 암살당하면서 합스부르크.가 잠시 쉰거걸랑.
저 부자.의 사이에서 스위스.가 독립을 선언하려 한거야. 서기 1291년. 가운데 세곳 에서 왼쪽 베른. 위의 취리히.가 들어오고 제네바가 있는 보 캔톤이 들어오면서 올드 스위스 연합.이 나폴레옹 까지 5백년을 가다가 나폴레옹때 헬베틱 공화국.을 세우는겨.
할때 제네바.의 보 켄톤 이나 이 위 베른 켄톤.이나 이미 사보이 땅이 된거야 서기 1300년 지나면서. 즉 막 쟤들 동맹체를 가운데서 구성할때 이들은 사보이의 영향권으로 들어온거지.
그러다가. 사보이가 프랑스 킹덤의 영향으로 들어가면서 이탈리아전쟁 초기에 힘이 쇠해지고 요때 보 캔톤과 베른 켄톤.은 독립을 한 거야. 즉 세금을 안낸다는겨 저건.
저걸 다시 엠마뉴얼 필리버트.가 벗어나서 아들 찰스 엠마뉴얼1세.가 제네바.를 먹으러 가는거야. 교황에겐 저 프로테스탄트 치러간다고 하는거고. 명분이 되는거지. 여전히 종교전쟁의 시기걸랑.
The troops marched along the Arve River at night and assembled at Plainpalais, just outside the walls of Geneva, at 2 o'clock in the morning. The original plan was to send in a group of commandos to open the city gate and let the other troops in. The Geneva citizens defeated the invaders by preventing them from scaling the wall using cannon fire, and by fighting in the streets against the few who managed to climb over (a climb in French is an escalade).
12월 초순에. 새벽 두시에 제네바의 성벽을 타 올라가는겨. 몰래 먼저 몇몇들을 잠입시켜서 얘들이 성문을 열면 처들어가는거걸랑. 헌데 초기부터 들킨겨 얘들이. 그러면서 이게 성벽 타는 함락전이 되버린거야.
The populace fought alongside their town militia and the duke's 2000-plus mercenaries were defeated. The Genevese lost 18 men in the fighting; the Savoyards suffered 54 fatalities and the troops had to retreat.
사보이의 병력은 2천명 이상이었고. 제네바는 18명이 죽고 사보이는 54명이 죽고 물러나고. 제네바.는 시민들이 주축이 된거라 하는거고.
According to Genevese legend, Catherine Cheynel ("Mère Royaume"), originally from Lyon and the wife of Pierre Royaume, a mother of 14 children, seized a large cauldron of hot soup and poured it on the attackers. The Royaume family lived just above the La Monnaie town gate. The heavy cauldron of boiling soup landed on the head of a Savoyard attacker, killing him. The commotion that this caused also helped to rouse the townsfolk to defend the city.
이런거에 전설이 붙는거고. 메르 르와윰. 이라는 리옹 출신 부인인데. 14명의 자식을 둔. 커다란 솥에 뜨거운 물도 아니고 수프.를 들이부었다. 이들은 성벽 대문 근처 마을에 살던 사람들인데. 이 아줌때메 마을 사람들이 도시를 막는데 기여했다는거고.
저 날이 지금 제네바.에서는 축제일이고 말야.
스위스라는 나라는. 그래서. 왼쪽에 부르고뉴. 아래에 사보이. 그리고 오른쪽으로 간 합스부르크.를 다 조지고서 만든 나라야. 하이랜더 용병들이.
쟤들이 그래서. 중립. 선언하면. 주위 유럽애들이 깨갱 하는겨.
중립도 힘이 있는 애들이나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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