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antine-Silvanus (died 684) was the founder of the Paulicians, a Christian movement in 7th century Armenia,
They flourished between 650 and 872 in Armenia and Eastern Anatolia and since then in Theme of Thrace of the Byzantine Empire.
폴리시언.의 창업자 콘스탄틴-실바누스.가 서기 684년에 죽어. 폴리시언들이 2백년간 아나톨리아.와 비잔틴의 트라키아.에 많이 있었다는건데.
이 이단의 역사를 보면. 정말 찐하걸랑. 이 절정이 카타르파와 발도파(부데스)들인겨 13세기부터. 아주 잔혹하게 죽어. 카타르파.는 20만명이 학살당하고 부데스들은 16세기에 메린돌 학살로 수천명이 죽어. 헌데 저들이야말로 진짜 그리스도 일 수 있걸랑. 저들이 지금 현대 그리스도 보다 훨 진보적이야 사상과 삶이.
저들과 맥락이 같은게 저 폴리시언.이야 그리고 보고밀들이고. 저들 자료들이 다 사라지고 일방의 이야기만 남아서 지금 악마화 된건데 말야. 그렇지도 않아.
폴리시언들이 2백년간 있었어.
저 창업자가 한창 전도할때가, 비잔틴 콘스탄스2세와 이 아들 콘스탄티노스4세.야. 아들때 죽어.
Constans II (Greek: Κώνστας Β', Kōnstas II; Latin: Heraclius Constantinus Augustus or Flavius Constantinus Augustus; 7 November 630 – 15 September 668), also called Constantine the Bearded (Κωνσταντῖνος ὁ Πωγωνάτος Kōnstantinos ho Pogonatos), was emperor of the Byzantine Empire from 641 to 668.
페르시안 사산.이 무함마드 등장으로 갑자기 사라져.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 통일하고 다음 아부 바크르.가 2년 재임때 바로 유프라테스로 진출해서 거슬러올라가 티그리스의 테시폰(크테시폰)을 점령해버려. 우마르 때인 서기 639년.엔 아르메니아 까지 점령해. 그러면서 비잔틴과 동쪽 비스듬히 경계선을 근겨. 5년여만에 저걸 한방에 한겨 갓 생겨난 무슬림들이.
비잔틴에서 저걸 상대하던 사람이 이클라리오스.조.의 시작인 이클라리오스.여. 콘스탄스2세의 할아버지야. 이 다음이 콘스탄티노스 3세.와 헤라클로나스.가 둘다 즉위년인 641년에 죽어. 콘스탄티노스.가 정부인 아들이고. 두번째 부인이 쟬 독살로 죽이고 아들을 세우고 이들은 원로원에서 쫓겨나고. 독살로 죽은 콘스탄티노스3세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겨. 얘가 11세에 갑자기 황제로 오른건데. 그리고 27년간 재임한겨. 38세 까지. 콘스탄틴-실바누스.가 저사람 아들인 콘스탄티노스4세에 죽는건데.
저사람이 서기 653년에 아르메니안 사람을 만나서 복음서와 사도바울 서신들을 받고 감동하고.
Silvanus founded his first congregation, who became known as Paulicians, in Kibossa, near Colonia, in Armenia. For thirty years he traveled extensively, along the Euphrates valley, across the Taurus Mountains, and into the western parts of Asia Minor, making converts on the way.
아르메니아의 콜로니아 의 키봇사.에서 신도들을 만들은거야. 저기가 Koloneia 콜로네이아.야. 저게 소 아르메니아.의 수도 니코폴리스.야. 흑해 동남부 아래여. 당시 아르메니아 테마.라는 비잔틴땅이야. 여긴 경계가 애매한곳이야. 아랍 이슬람이 바로 아래야. 이사람 고향 사모사타.는 이미 아랍땅이 된거고 아르메니아 킹덤도 아랍에 들어간거고.
니코폴리스.란 도시가 그리스 에피로스지역에 해변에도 있고 불가리아에도 있어. 나이키 시티여. 승리의 도시.
이사람이 30년을 전도하는거야 저 터키 북동쪽 부터. 아래 유프라테스강 따라 내려가고 아랍 무슬림 지역으로. 그리고 토러스 산맥쪽으로 서진을 하는겨 서쪽으로 들어가.
콘스탄스2세.가 재위오른지 십년이 지나고 이십대에서 삼십대 될때 저당시 비잔틴의 아나톨리아 분위기야 저게.
할아버지.가 사산이랑 전쟁하고 바로 이슬람이 와서 사산애들 돌아가고 이걸 쫓아들어가서 이슬람이랑 싸우면서 동쪽을 다시 회복한거걸랑. 그리고 아버지와 삼촌이 죽고 당해 황제가 되서 십여년을 보내고 난 후야.
The Umayyad Caliphate (661–750 CE; UK: /ʊˈmaɪjæd, uːˈ-/,[3] US: /uːˈmaɪ(j)əd, -aɪæd/;[4][5][6] Arabic: اَلْخِلافَةُ ٱلأُمَوِيَّة, romanized: al-Khilāfatu l-ʾUmawiyyah)[7] was the second of the four major caliphates established after the death of Muhammad. The caliphate was ruled by the Umayyad dynasty
아랍 무슬림도 아부 바크르 2년. 다음 우마르가 대부분 점령하고 이어 우스만이 암살당하고 알리.가 칼리프가 되지만 내전 분위기걸랑 우스만 암살사건으로. 내전 찐하게 하고 들어선게 우마이야. 칼리프야. 서기 661년. 콘스탄스2세.가 즉위하고 20년이 지난거야.
헌데 무아위야.가 세운 우마위야 조.이지만.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 의 짱이야. 3대 우스만.과 핏줄이 같아. 우스만때 이사람 중심으로 저 경계선 넘어 비잔틴을 쳐들어가. 이집트 서쪽의 북아프리카도 쳐들어가는겨. 내전 하기 전에 무아위야.가 터키땅 가운데까지 들어가. 이미 비잔틴의 터키땅은 아랍 무슬림들이 여기저기 다 들어오면서 난리가 나는 상황이야. 쟤 어릴때 비잔틴은 우스만의 핏줄 무아위야.와 계속 전쟁중인겨. 땅을 반이상 뺏기는 상황이기도 하고. 해변에도 쳐들어오는거고.
저때 비잔틴이 여전히 서쪽은 슬라브와 불가르라는 투르크 천지에 동쪽은 갓 경계그은 아랍무슬림들이 쳐들어오는거고. 아주 어수선한 상황이야.
In 648 the Arabs raided into Phrygia, and in 649 they launched their first maritime expedition against Crete. A major Arab offensive into Cilicia and Isauria in 650–651 forced the Emperor to enter into negotiations with Caliph Uthman's governor of Syria, Muawiyah. The truce that followed allowed a short respite and made it possible for Constans to hold on to the western portions of Armenia.
경계선 긋자마자 10여년을 계속 다시 쳐들어오는겨. 프뤼기아.까지 들어와. 여긴 터키땅 서쪽 내륙이야. 터키 아래해변 킬리키아.에 서쪽 해변내륙 이사우리아.도 들어와. 서기 651년 즈음에 조약 다시 맺아서 휴전을 하지만. 이후 바다로 크레타 섬에 로도스섬으로도 들어오고, 우스만이 콘스탄티노플.를 침략하려다가 암살당해서 끝난거야. 그러다 내전하면서 잠잠해진겨 아랍애들이. 그리곤 서기 661년에 저 무아위야.가 우마이야. 조.를 세운건데.
폴리시언의 시작 실바누스.가 막 저때, 조약 맺고 좀 잠잠해질때 돌아다닌겨. 저게 재수야 역사적으로.
Pope Martin I (Latin: Martinus I; between 590 and 600 – 16 September 655) reigned from 21 July 649 to his death in 655
저당시 서기 655년에 로마 주교 마르티누스1세.를 죽여.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2세가.
이 콘스탄스2세.때에 말야. 로마 교황.이라는 Pope 포프.라는 타이틀을 공식적으로 처음 주는겨 로마 주교에게 비잔틴황제가.
Pope Vitalian (Latin: Vitalianus; died 27 January 672) reigned from 30 July 657 to his death in 672.[2] He was born in Segni, Lazio, the son of Anastasius.
로마 주교에게 Pope 란 타이틀.이 처음 등장하는게 비탈리아누스. 때야. 서기 672년에 죽은.
The word pope derives from Greek πάππας meaning "father". In the early centuries of Christianity, this title was applied, especially in the east, to all bishops[19] and other senior clergy, and later became reserved in the west to the Bishop of Rome, a reservation made official only in the 11th century.[20][21][22][23][24] The earliest record of the use of this title was in regard to the by then deceased Patriarch of Alexandria, Pope Heraclas of Alexandria (232–248).[25] The earliest recorded use of the title "pope" in English dates to the mid-10th century, when it was used in reference to the 7th century Roman Pope Vitalian in an Old English translation of Bede's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26]
포프.라는 교황.이란 타이틀.은. 이게 대단한게 아냐. 동쪽교회에선 모든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다 포프.야. 번역하면 다 교황이야. 이걸 로마 주교.에만 쓰게 된게 겨우 11세기 때에서란 거야. 동서 교회분리할때 전후해서야 로마만 이걸 쓴겨. 동쪽 교회들은 포프가 많은겨 흔해. 3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 주교 호칭에 처음 등장해. 다들 포프야.
로마에선 7세기.에나 이 타이틀이 등장하는거야. 바로 저 비탈리아누스 부터. 그래서, 나중에 사가들이랑 교회에서 이전의 로마 주교들을 포프.라고 다시 쓴거고.
로마 주교를 포프.라고 칭한게 콘스탄스2세야. 헌데 이사람이 저 비탈리아누스 전전 인 마르티누스1세 로마주교를 체포하고 결국 수모속에 죽게 만들어. 아랍무슬림에 재위후 15년간 시달리는 와중에. 휴전도 했지만.
Monothelitism or monotheletism (from Greek μονοθελητισμός "doctrine of one will") is a particular teaching about how the divine and human relate in the person of Jesus. The Christological doctrine formally emerged in Armenia and Syria in 629
4차 공회의 칼케돈. 451년.에서 삼위일체.를 정리하면서 지저스.의 정체도 정리를 하걸랑. 이게 가장 애매한겨 당시. 지저스는 인성과 신성.을 네이쳐 nature 로 갖고 있고 완벽한 인성이자 완벽한 신성을 갖는 거고. 더 웃긴게 그러면서 갓파더와 같다.는거야.
"both fully human and fully Divine, one in being with the Father"
저기서 확실히 구분해서 봐야해. 파더와 같은 하나.일때는 저게 hypostasis 하이포스타시스.가 같다는거야. 같으면서도 각각 아이덴티파이드 identified 구분이. 된다.는게 또한 중요한겨. 여기서 같은건 하이포스타시스.야. 구분이 되지만.
네이쳐.란것이 하이포스타시스.를 라틴어에 영어로 표현하면 저게 네이쳐야. 아이 본성 실재 는 인간이자 신이고. 그런데 하이포스타시스.라는 본성 실재는 또 아빠랑 같아.
이게 대체 먼 개소리냐는거지.
저기서 말하려는 의도.는 네이쳐 nature 란건 본성 이든 실재.로 번역하겠지만. 하이포스타시스.보다는 피상적인겨. 가장 바닥의 실재는 하이포스타시스.인거야 개념 정의가. 오직 저기서만 그리 해석하면 돼. 같은 본성 실재 지만. 가장 바닥은 하이포스사티스.야.
지저스가 두개의 정체성를 갖는다.란 걸 말하기 위해서 굳이 저리 어거지 개념을 끄집어 낸겨. 저기서만 네이쳐.는 약간 피상적 개념이 돼. 어쨌거난 지저스의 본성.은 신이자 인간이야. 그 본성의 바닥의 진짜 본성이라는 하이포스타시스는 신과 같이 하는거고.
그래서. 지저스가 신과 인간을 합한 하나의 정체성.이다 라는 이들이 Monophysites 모노피사이트. 퓌시스.가 네이쳐.야. 이들이 네스토리우스.로 처치오브더이스트.로 나가는거고.
지저스가 신과 인간을 합해서 "전혀 다른" NEW 하나다. 이들이 Miaphysitist 미아피사이트. 로 오리엔탈 오소독스.로 나가는거고. 미아피사이트는 섞여서 전혀다른 하나란거야. 모노에서는 섞인 퓨전으로 안봐 지저스를.
칼케돈.은 지저스.는 모노.가 아냐 퓌시스.가 미아 도 모노야. 지저스는 두개의 정체성이야. 섞이지도 나누지도 못해. 그냥 고상태에서 합쳐진겨. 퓨전도 아냐.
여기서 시비걸지 말라는겨.
저 상태에서 150년 흐르고 서기 629년에. 즉 무함마드가 막 아라비아 통일하고 사산은 비잔틴 다 먹으러 왔을 즘에 아르메니아 와 시리아 지역 인 동쪽 교회진영에서 저 논쟁이 다시 터진거야.
Monoenergism (Greek: μονοενεργητισμός) was a notion in early medieval Christian theology, representing the belief that Christ had only one "energy" (energeia).
저게 이라클리오스 조.를 세운 이라클리오스.가 비잔틴 황제에 오르면서 서기610년. 콘스탄티노플 주교와 대화하면서. 나는 지저스의 에너지.는 하나라고 믿는다. 면서 촉발된거걸랑.
4차 칼케돈 회의에서 두개 파가 이단되고 나간다는건 저게 무척 이슈가 된거걸랑. 이해가 안되는겨 납득이 안되는거고 반대로 생각하면.
저기서 150년 동안 사람들이 그럼 논쟁을 해온거야. 그럼 지저스가 두개라면. 지저스가 움직이고 행동한 그 힘의 원천은 인간의 에너지를 쓰는거냐 신의 에너지를 쓰는거냐.
지저스가 선택하고 말하는 그런 생각 사유의 것들은 그럼 신성과 인간성 중 어떤거냐.
이런게 논쟁이 되어왔던거야 암암리에. 저걸 이라클리오스.가 전혀 새로운 논제를 만든게 아니라, 당시 까지 온 논쟁에서 자기는 이리 생각한다 는거야. 나는 지저스의 에너지.는 신이든 인간이든 오직 하나.라는겨. 두개를 나눠서 어떨땐 저거 어떨땐 이거 를 쓰지는 않는다. 지저스의 정체가 두개일지언정 지저스의 생활이나 생각 의지는 하나란겨.
ㅋㅋㅋ
이건 칼케돈 때 이야기 된게 아냐. 또 전혀 다른 주제야 저건.
저걸로 교회들에서 또 조오온나리 논쟁이 붙은거야. 야 결국 그건 지저스의 정체성이 결국 하나란 것과 머가 다르냐. 아니다 지저스는 두개 정체고 쓰는 에너지나 의지는 하나 라고 하면 칼케돈을 부정하는게 아니지 않냐.
이걸 조온나리 서로 설전을 한겨 저 이라클리오스.가 황제관 쓰면서. 이게 손자 콘스탄스2세 까지 사오십년 온거야.
저 와중에 슬라브 투르크는 발칸 에 득실대고 아랍 무슬림은 동쪽에서 깊숙히 쳐들어오고.
콘스탄스2세.가 십년 재위 후에 이십대가 되서리. 얜 이런게 관심이 없어. 싸우지 말자 좀 지금 대외적으로 힘들다. 자기 할배처럼 모노.로 하자. 저게 모노에너지즘.에 모노뗄레티즘 이야. 뗄레티.가 그리스어라 will 윌. 의지. 라고 하는데. 이건 안쓰는 단어여. 모노띠즘.이란 유일신론과 달라. 지저스의 의지.는 하나 라는겨. 모노에너지즘.도 여기로 들어와. 이걸로 정리하고 여기에 토달지 마 한거걸랑.
이걸 로마 주교 마르티누스 1세.가 다시 끄집어낸겨. 공회의를 소집해서 저문제를 정리하잔거걸랑. 모노뗄리티즘.은 말이 안된다 는 거걸랑. 이사람을 체포해서 사형시키려는걸 말리고 감금당하고 걍 쓸쓸히 죽는겨.
요때 직전에 실바누스.가 폴리시언들을 만든거야 아르메니아에서. 30년을 그후로 전도를 하는거고. 아나톨리아 전역에 서쪽으로 들어가는거고. 요때 초창기엔 아랍과 비잔틴이 조용할때고 그나마. 그러면서 비잔틴은 요때 테마타.라는 테마들의 행정구역을 새로 만들면서 수습을 하는겨.
According to Warren Treadgold, the first themes were created between 659 and 661, during the reign of Constans II.[6]
테마.라는 행정구역을 대게 서기 640년대 에 시작한걸로 봐. 어쨋거나 콘스탄스가 11세에 즉위하고 부터야. 얘가 30세 된 전후인 서기 660년 전후에 처음 시작했다고 쓰는 사람이 또한 있지만. 테마 를 이때 시작한겨. 아랍에 우마이야가 막 서기 직전이야. 즉 아랍애들 내전. 1차 피트나. 하느라 동쪽이 조용할때 그나마 시작한겨 테마를.
이와중에 발칸에선 슬라브들이 발칸산맥 옆으로 해서리 다뉴브강과 티사강 사이로해서 발칸 전역에 스미는거고. 불가르 들이 발칸산맥넘어로 들어서면서 막 제국 세우기 직전이야. 테마를 동쪽 터키땅위주로 경계를 나눠 정비하고 발칸은 트라키아만 테마가 되는거야. 전역이 이민족의 땅이 된겨 발칸반도는.
그리고 우마이야 칼리프 서고 다시 재정비해서 쟤들 처들어오는거고.
Constans grew increasingly fearful that his younger brother, Theodosius, could oust him from the throne; he therefore obliged Theodosius to take holy orders and later had him killed in 660. Constans' sons Constantine, Heraclius, and Tiberius had been associated on the throne since the 650s. However, having attracted the hatred of the citizens of Constantinople, Constans decided to leave the capital and to move to Syracuse in Sicily.
이 콘스탄스2세.가 과거 로마로 돌아가자며 저때 행정구역 재정비하면서 세금을 왕창 걷는겨. 이전에 아랍애들 때문에 거의 파탄지경이었걸랑 아나톨리아는. 저때 아나톨리아와 콘스탄티노플에 부근이 전부여 저땐. 이탈리아 해변이랑. 별게 없어 얘들이 7세기까지. 이전 150년동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죽은 서기 565년 부터는 걍 거지여 거지.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안좋아해 얠. 자기 동생이 쿠데타하면 당하는 분위기야. 동생을 죽여. 시민들이 더 싫어해. 수도를 시칠리아로 옮기는겨. 그러면서 로마.를 처음 방문하는거야. 로마에 황제가 온건 서로마 망하고 처음이여. 2백년 만에 로마에 놀러온겨 시칠리아섬에 있단 핑게로. 저때 로마 내륙엔 롱고바르디.라는 게르만들 땅이고. 쟤들이랑 전쟁하다가 패해. 그래도 얘가 로마에서 건축 장식물들을 다 뜯어가는겨 이게. 하도 신기하고 좋아보여서. 사람들 싫어하고. 그리곤 로마 주교.를 포프.라고 주는거야. 로마가 이전에도 계속 징징대면서 교회 최고자리를 달라고 했걸랑. 퍼스트 어몽 이퀄즈.를 줬지만 싫대. 그래도 이때 포프.를 준겨. 이때부터 로마주교는 포프.야
Rumours that he was going to move the capital of the Empire to Syracuse were probably fatal for Constans. On September 15, 668, he was assassinated in his bath by his chamberlain, according to Theophilus of Edessa, with a bucket.
로마에서 저리 건물들 뜯어가고. 여기서도 민심이 안좋은거야. 시칠리아로 와서도. 목욕하는 중에 체임벌린. 최고집사.가 빠께스.로 죽였대. 빠께스에 물을 채워서 휘둘러서 머리를 깼나.
그리곤 저 암살세력 진압당하고 이사람 아들이 재위에 올라. 콘스탄티노스4세.
이사람때 폴리시언.의 실바누스.가 30년 전도하고 죽은겨. 투석형.으로. 그현장에 파견된 사람이 감동해서 폴리시언이 되고, 실바누스의 양자였던놈이 자기 양부 돌로 쳐죽이곤 저걸 꼰질러서리 다들 죽이라는 명령 내린거고.
할때 저세력이 그래도 저 이후 서기 9세기 후반까지 2백년동안 퍼진거걸랑. 발칸반도까지 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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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antine IV (Greek: Κωνσταντῖνος Δ', romanized: Kōnstantinos IV; Latin: Flavius Constantinus Augustus; c. 652 – 14 September 685), sometimes incorrectly called Pogonatos (Πωγωνάτος), "the Bearded", out of confusion with his father,[1] was Byzantine Emperor from 668 to 685.
아들 콘스탄티노스 4세.가 15년을 하고. 이어서 이 아들이 유스티니아노스2세 코짤린 황제야. 황금코 달고 다닌. 그리곤 이라클리아스 조.가 망하고 20년 아나키 혼란오고 이사우로스 조.가 9세기까지 서는건데.
The First Arab Siege of Constantinople in 674–678
이사람때 서기 674년에 우마이야.세운 무아위야 칼리프.가 자기 아들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쳐들어온걸로 보걸랑. 흑해 해변에서 해협따라 내려가면서 골든 혼.이란 곳으로 해전을 한걸로 본거야. 바다에서 성벽을 타고 올라가려는.
2차 아랍의 콘스탄티노플 전투가 717년.이걸랑. 불가리아가 비잔틴 도와줘서 대승한.
저 1차.를 비잔틴이 해전에서 그리스 불.을 사용해서 승리를 했다는겨. 이 그리스불.이란게 이때 등장하걸랑. 이게 나중 레반트 십자군때 또 나오는데. 항아리 안에 원유를 넣고 불 붙여서 던지는겨. 원유가 길바닥에 있는 애들이니까.
Saint Theophanes the Confessor (Greek: Θεοφάνης Ὁμολογητής; c. 758/760 – March 12, 817/818)
저걸. 훨 나중 8세기에 테오파네스.란 사람만이 쓴 전투야. 1차 아랍 비잔틴의 저게. 헌데 이게 시리아쪽 아랍기록엔 전혀 등장하지 않아. 30만명에 300척의 배가 떳다고 하고. 저걸 대체 저때 비잔틴이 어떻게 이기냐는겨. 당시 비잔틴 상황이 저걸 이길 수가 없걸랑. 우마이야.가 우스만과 알리 있을때 해변을 점령질 했지만 과연 저런 해전력을 갖췄을까도 의문일테고.
The Mardaites (Greek: Μαρδαΐται) or al-Jarajima (Syriac: ܡܪ̈ܕܝܐ; Arabic: الجراجمة / ALA-LC: al-Jarājimah), inhabited the highland regions of the Nur Mountains.
마르다이타이. 마르데트.들이 누르 산맥 고지대 사람들인데. 여기가 잇소스. 이스칸데룬. 안티오키아 위야. 자그로스산맥 왼쪽 끝. 여기 사람들을 부추겨서 다마스쿠스에 레반트에서 반란하게 해서 저들이 돌아왔다.란 설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는겨.
저런 전쟁은 없었어. 저 사람이 2차 아랍 침략.이후에 이 기분으로 1차를 만들은걸로 봐. 혹은 저 시절에 아랍애들이 걍 배 몇척 갖고 도적들 처럼 찝쩍대었거나. 이리 보는 시선이 요즘 많은거야.
여하튼 콘스탄티노스4세.가 즉위하고. 아빠는 빠께스로 맞아 죽은거고 시칠리아에서. 그리곤 680년 에 불가리아.가 쳐넘어 내려와서리 고개숙이고 조공까지 바치게 된거야. 불가리아가 이사람때 서. 더하여 저런 1차 아랍 침략 이야기가 진짜인지 몰겄지만 하튼 동쪽의 아랍 무슬림이 우마이야 서면서 여전히 혼란한 상황인거야.
이 와중에 교리 논쟁도 있고. 이걸 서기 681년.에 6차 공회의.를 콘스탄티노플(3차)에서 하면서. 모노뗄리티즘.을 이단.으로 규정해. 죽은 아빠를 반대 하는겨. 이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에 주류인거고. 지저스.는 네이쳐가 두개 듯이 의지.도 두개인겨. 이게 Dyothelitism or dythelitism 다이오. 다이 뗄리티즘(다이 뗄라이오티즘)이야. 이건 의지. 에너지.에 방점이 있는겨. 신과 인간적인 두개의 의지가 동등하고 작동 모드도 같어. 허나 두개야. 토달지 말어.
그리곤. 콘스탄틴-실바누스.를 이단으로 투석형에 처하는겨. 서기 683년. 그리고 저때 감동받은 파견된 시므온.이 티투스로 이름바꾸고 폴리시언이 되었다가 화형을 당해 역시.
불가리아 제국 서고 뿔난겨 비잔틴이. 이러면서 체제 정비하는거야.
The Empress Theodora, as regent to her son Michael III, instituted thoroughgoing persecution against the Paulicians throughout Asia Minor,[13] in which 100,000 Paulicians in Byzantine Armenia are said to have lost their lives and all of their property and lands were confiscated by the empire until 843.
그럼에도 저 폴리시언.들이 창업자 죽고도 여전한거야. 서기 843년 까지. 즉 저이후 160년 동안 비잔틴의 아르메니아 테마에서만. 10만의 폴리시안들이 죽고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했다.
이들이 어마어마한겨 이게.
Paulicians, under their new leader Karbeas, fled to new areas. They built two cities, Amara and Tephrike (modern Divriği).
탄압을 피해서. 카르베아스.가 아마라.와 테프리케. 두도시를 세워. 여긴 아랍과 사선 경계선의 아랍땅이야. 이사람은 비잔틴 군인이었어. 아랍으로 넘어온겨 비잔틴에 분노하고. 이들은 비잔틴이 보낸 병력에 진압되서 이들은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킹덤에 숨어.
The power of the Paulicians was broken. Meanwhile, other Paulicians, sectarians but not rebels, lived in communities throughout the empire. Constantine V had already transferred large numbers of them to Thrace.[1] According to Theophanes, the Paulicians of Armenia were moved to Thrace, in 747, to strengthen the Bulgarian frontier with a reliable population.[20] In 871, the emperor Basil I conquered their stronghold in Tephrike and the survivors fled to the East to the Byzantine-Arab border - in Armenia, in the 10th century emerged Tondrakians sect.[9] In 885, Byzantine general Nikephoros Phokas the Elder had a military detachment of Paulicians serving in Southern Italy.[9] In 970, some 200,000 Paulicians on Byzantine territory were transferred by the emperor John Tzimisces to Philippopolis in Theme of Thrace and, as a reward for their promise to keep back "the Scythians" (in fact Bulgarians), the emperor granted them religious freedom.
다른 폴리시언들이 한편으로는 트라키아 테마.로 오는겨.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테마야. 여기서 저 불가리아.를 막으란거야. 살려주는 대신에. 서기 747년. 불가리아와 연합해서 아랍 막은 후 30년 지났어. 여전히 불가리아는 불편해 그래도. 885년에는 용병으로 데려가 이탈리아 남부로. 여기 비잔틴 도시들이 있는데 무슬림들이 수시로 해적질 하걸랑.
970년에는 20만 폴리시언들을 필리포폴리스. 여기가 소피아 오른쪽이고 발칸산맥 아래야. 지금 소피아 다음 제2의 도시야. 여기서 불가리아 넘어오는걸 막으란겨. 대신 종교의 자유.를 주는겨.
이들이 나중 오스만 오고서. 이슬람도 되고 오소독시로도 나뉘고 로마카톨릭으로도 가는겨.
According to the historian Yordan Ivanov, some of the Paulicians were converted to Orthodoxy and Islam, the rest to the Roman Catholicism during the 16th or 17th century.[8][21] At the end of the 17th century, the Paulician people were still living around Nikopol, Bulgaria and persecuted due to religious reasons by the Ottoman Empire.[8] After the uprising of Chiprovtsi in 1688, a good part of them fled across the Danube and settled in the Banat region. There are still over ten thousand Banat Bulgarian Paulicians in Romania and Serbia today. However, they no longer practice their original religion since they converted to Roman Catholicism. After Bulgaria's liberation from Ottoman rule in 1878, a number of Banat Bulgarians resettled in the northern part of Bulgaria.
17세기 말에도 여전히 있었어. 니코폴리스.가 불가리아 맨 끝 가운데 도시야. 오스만애들은 이전 아랍이나 페르시안애들의 무슬림같은 관용이 없었어 뒤로 갈수록. 치프로프치 봉기 1688년. 이 도시가 불가리아 서북부 도시여. 발칸산맥너머 북쪽 기슭 인겨. 여기서 오스만에 반란하고 진압되고 이들이 서북쪽으로 피난을 가. 이들중 상당수가 폴리시언.들이었다는겨 로마카톨릭이나 오소독시로 개종한. 이들이 카르파티아 산맥 골뱅이 시작의 안쪽으로 들어가는겨.
The Banat Bulgarians (Banat Bulgarian: Palćene or Banátsći balgare; common Bulgarian: Банатски българи, Banatski balgari; Romanian: Bulgari bănățeni; Serbian: Банатски Бугари, Banatski Bugari), also known as Bulgarian Roman Catholics and Bulgarians Paulicians or simply as Paulicians,[4]
바나트 불가리안. 불가리안 폴리시안. 간단히 폴리시안. 이들이 티사 강 오른쪽 베오그라드에 다뉴브강 위쪽에 자리를 잡아. 살짝 오른쪽 루마니아 경계를 넘어. 치프로프치.에서 저리 간겨. 저긴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땅이걸랑. 저들이 19세기도 보였고. 저길 불가리안들 바나트. 반이 지배한 곳. 반 이란게 남슬라브들의 영주 자리야. ban.
아르메니아 에서 콘스탄티노플 주위로 가서 발칸산맥 아래로 갔다가 산맥 넘어 치프로프치.에서 저기에 정착을 한겨. 천년을 거쳐서.
카르베아스.의 폴리시언들은 비잔틴 병력에 진압되고 아르메니아 킹덤으로 숨고말야. 이들이 조지아에 아르메니아에서도 19세기 기록에 여전히 과거 폴리시안들의 의례를 했다는거야. 불가리아 폴리시안들은 다들 개종했지만.
교리.는 나중에 잠깐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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