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antine IX Monomachos, Latinized as Constantine IX Monomachus (Medieval Greek: Κωνσταντῖνος Θ΄ Μονομάχος, romanized: Kōnstantinos IX Monomachos; c. 1000 – 11 January 1055), reigned as Byzantine emperor from 11 June 1042 to 11 January 1055.
동서교회 분리 1054년의 상황이.
비잔틴.은 마케도니아 조.의 2백년 마지막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고. 이 다음이 콤네노스 Komnenos 조.야 근위대 출신들이야 다들. 이후 두카스 Doukas 조.에 잠깐 가지만 콤네노스 들이 다시 받아 1백년을 가. 이 다음이 앙겔로스 Angelos 조.야 이전 십자군썰. 탄압당한 가문의 아빠와 형은 쫓겨다니고. 콤네노스의 황제가 사냥으로 비운사이 비잔틴 황제 오른 앙겔로스.의 이삭2세. Issac 고 이사람이 형한테 당해서 눈깔 뺏기고 아들이 피신나와서 십자군 4차 가는길을 비잔틴으로 틀어버리고 베네치아의 엔리코 할배가 나이 90에 오시고 비용정산 안해서 십자군 프랑크와 베네치아들이 비잔틴을 다 먹고. 쫓겨난 비잔틴은 보스포로스 해협 건너 니카이아로 옮기고 이들이 Laskaris 라스카리스 조.이고 이들이 60년 지나 다시 콘스탄티노플. 회복하는게 팔라이올로고스 조 Palaiologos 의 미카엘.이고 이 미카엘 조.가 마지막 비잔틴 2백년 하고 메메드2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하고 마지막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목짤린 몸뚱아리의 전투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프랑스.는 저때 카페 시작 위그카페.의 아들 로베르2세.의 아들 앙리1세.여.
Henry I (4 May 1008 – 4 August 1060) was King of the Franks from 1031 to 1060.
이 앙리1세.보다 유명한건 이전 아키탄 엘레오노르 썰할때 언급했던. 엄마 아를.Arles 의 콘스탄스 Constance. 프로방스의 콘스탄스야. 파리 문화와 전혀 달라 프로방스는. 또한 전혀 다른게 이 왼쪽의 아키탄이야. 프랑스 란 나라도 이게 남부와 북부가 전혀 다른 언어족이야 이게. 더하여 프로방스.는 프랑스 보다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가까운 나라야 정체성이. 더하여 아키탄은 스페인과 잉글랜드에 가까와 정체성이. 저 프랑스란 나라는 애매한 나라야 이게. 지금도 그래 이 프랑스란 나라는.
프랑스는 저 이전 150여년 전에. 대머리 샤를.의 직계가 끊기고 저 샤를의 배다른 형 게르만 루이. 동쪽땅.의 아들 뚱땡이 샤를.이 프랑스땅도 겸하면서 이때 바이킹이 쳐들어 와서 파리.가 포위가 되고. 이때 협상을 해서 노르망디 땅을 롤로 Rollo 에게 주는겨 듀크. 공작령 덧치로. 이 롤로.는 그리고 러시아땅 슬라브 요청으로 류릭.이 되었다는 썰이 있는거고.
150년이 지나도 저 노르망디.는 형식적 하미지 만 카페에 하는거지 이게 앙리1세 에 아직도 순종을 안하던 시기야. 앙리1세가 그래서 초혼이 플랑드르.의 마틸다.야. 그리고 노르망디를 쳐들어가지만 패해.
이 앙리1세.의 엄마가 프로방스 백작. 윌리엄1세 (프랑스어 기욤)의 딸이야. 프로방스 백작 시작이야 이 사람이. 당시 프로방스.는 부르고뉴 킹덤(아를 킹덤) 이야. 이전 썰. 이전 저 롤로 쳐들어 올때 즈음에. 이 프랑스 남부.는 킹덤이 두 개가 서. 대머리 샤를.의 휘하들 중 루돌프.가 부르고뉴 백작령.에 고지대 부르고뉴 킹덤.을 세우고. 보소.가 프로방스에 저지대 부르고뉴킹덤(프로방스 킹덤)을 세워. 이 두개가 합쳐져서 부르고뉴 킹덤(아를 킹덤)이 되고 이건 신성로마 황제.에 하미지.를 하는겨. 14세기까지. 그리고 쪼개지는 거고. 여긴 원래 지금 독일땅이어야 해 이게. 월드워 원투.로 프랑스가 갖고 간겨.
저때 콘스탄스.는 합쳐진 부르고뉴 킹덤.의 프로방스 백작.의 딸인거야. 앙리1세 아빠 로베르2세. 즉 위그카페의 아들.에게 시집갔는데. 문화가 전혀 달라서 코트에서 안좋아하걸랑. 따 당하고 폐위시키려하고. 자길 비난하는 관료의 눈깔을 이여자가 짝대기로 찔러. 쎄. 그리곤 원래 왕위 자리를 자기 둘째 아들에게 주고 싶어해. 승계권자 앙리1세.가 반발하고 얘가 엄마랑 전쟁을 하는겨. 엄마가 지고 병 걸려 죽고 나서 프랑스 카페의 3대 킹이 돼.
콘스탄스.가 킹으로 밀던 앙리의 동생 로베르 Robert 가 형으로 부터 부르고뉴 땅을 받는거야. 이 앙리1세의 동생 로베르가 부르고뉴 공작령의 부르고뉴 가문.의 시작이야. 그래서 부르고뉴의 로베르1세.가 되는겨. 이 부르고뉴 가문이 3백년이 가서 끊기고 이걸 장2세.가 갖고 이 아들이 이걸 받아. 얘가 용감공 필립.이야. 이때부터 발루아 부르고뉴 하다가 이게 마리.까지 가서 마리 신랑 합스부르크 막시밀리안.에게 가는거고.
콘스탄스.는 저지대 부르고뉴 킹덤.을 세웠던. 보소 Boso 의 핏줄이야. 보소 가문이야. 고지대 부르고뉴 킹덤을 세운 루돌프.는 Welf 괼피 가문이야. 이 괼피가 역사가 쎈겨. 나중 괼피 기벨리니.의 조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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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 프랑스.도 별볼게 없는겨. 위에 노르망디도 남이고. 브리타뉴.는 전혀 얘들과 상관없어. 로타르 땅이었던 로렌 지역도 남이고 아래 아를킹덤도 신성로마황제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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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성로마 황제는
Henry III (28 October 1017 – 5 October 1056), called the Black or the Pious, was Holy Roman Emperor from 1046 until his death in 1056. A member of the Salian Dynasty, he was the eldest son of Emperor Conrad II of Germany and Gisela of Swabia.
하인리히 3세. 잘리어 살리안 조.를 세운 콘라트2세.의 아들이야. 작센의 오토1세의 먼 방계들이고 이들은 작센과 다른거야. 이 사람 아들이 카놋사.의 굴욕 하인리히4세.고 작센들 반란하고. 로렌땅도 반란하고. 오른쪽 아래 헝가리애들도 들어와서 전쟁하고 보헤미아.는 이사람때 들어와 신성로마에. 그러다 이탈리아로도 가서 정리하지만. 여전히 혼돈의 시대야. 이 와중에 지중해 무슬림해적은 득실득실 한거야.
로마 카톨릭.은 저 하인리히3세의 보호하에 있지만 이 보호벽이 두텁지 않아. 저러다가 뒤에 카놋사의 굴욕.에 로마 약탈 당하고 우르바누스2세.가 신이 그걸 바라신다. 하면서 십자군 레반트가 시작되면서야 로마 카톨릭이 힘을 갖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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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비잔틴.이 오히려. 마케도니아 조.의 마지막 이지만. 왼쪽과 위에 막 세르비아.랑 불가리아.들은 비잔틴에 하미지 하는겨. 즉 콘스탄티노플.의 교구로 들어오는거야 이들은. 러시아도 블라디미르 대제.에 시집간 안나.로 인해서 다시 이 비잔틴 교구의 영향력으로 들어온거야 교회세력은.
나머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은 압바스 칼리프.에 술탄들 난립에 셀주크투르크가 막 들어서서 세를 갖는 시기고. 압바스 칼리프.는 단지 신을 믿는 자들의 사령관.이야. 이사람이 이슬람의 교황인겨. 술탄들이 이 칼리프.에 정식으로 인정이 되어야 해. 칼리프가 나름 정치적 힘이 있어. 정통 칼리프의 4대 알리.가 신권과 세속권 분리를 거부해서 전쟁해서 시아 수니 로 나뉘었지만 압바스 이후론 말야 이게 분리가 된거야 칼리프가 세속권을 잃어가고 신권만 갖고 가면서. 헌데 교황보다 쎄 힘은. 서쪽에선 황제가 세속을 다 갖고 얘가 황제 대리하면서 교황한테 대관식 받을 뿐이걸랑.
저런 상황에서의 동서교회 분리야.
In 1053, the first step was taken in the process which led to formal schism: the Greek churches in southern Italy were forced either to close or to conform to Latin practices.[9][10][11] In retaliation, the Ecumenical Patriarch of Constantinople Michael I Cerularius ordered the closure of all Latin churches in Constantinople. In 1054, the papal legate sent by Leo IX travelled to Constantinople for purposes that included refusing to Cerularius the title of "Ecumenical Patriarch" and insisting that he recognize the Pope's claim to be the head of all the churches.[2] The main purpose of the papal legation was to seek help from the Byzantine Emperor in view of the Norman conquest of southern Italy and to deal with recent attacks by Leo of Ohridagainst the use of unleavened bread and other Western customs,[12] attacks that had the support of Cerularius. Historian Axel Bayer says the legation was sent in response to two letters, one from the Emperor seeking assistance in arranging a common military campaign by the eastern and western empires against the Normans, and the other from Cerularius.[13] On the refusal of Cerularius to accept the demand, the leader of the legation, Cardinal Humbert of Silva Candida, O.S.B., excommunicated him, and in return Cerularius excommunicated Humbert and the other legates.[2] This was only the first act in a centuries-long process that eventually became a complete schism.[14]
이전까지 교회들은 펜타르키. 다섯교구 체제야. Five Patriarchs.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각각이 오토세펄러스 Autocephalous. 자치적으로 다스려. 저곳의 주교가 각각의 짱이야. 각각이 페이트리아크.야. 아빠다스림.인데 이걸 총주교제 어쩌고 번역하는데 넘어가고. 남부이탈리아에 비잔틴 교회들이 라틴 예식을 따르라고 압박받는거야 로마로 부터. 이탈리아는 서로마 망하고 고쓰족들이 점령한걸 6세기에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에 발리사리우스가 회복할때. 여긴 유너크. 환관.인 Narses 나르세스.가 롱고바르디 들을 용병으로 데리고 와서 고쓰족들을 내몰아. 그리고 이 롱고바르디.들이 반란해서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비잔틴은 남부 해변도시들에 시칠리아섬.을 지배해온 상태야 5백년을. 여긴 비잔틴에 속한 곳이고 콘스탄티노플 교구에 속하고 여기 예배를 따른겨. 비잔틴은 그리스어 로마어를 공용하다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라틴어를 다시 강하게 밀었지만 이사람 죽고 다시 그리스어.가 지배해. 예배도 그리스어.를 따르는거야. 이 언어.가 예배 예식에서 나라마다 분리하는 또다른 가름선이여.
비잔틴은 유카리스트 때의 빵은 leavened bread 레븐드 브레드. 발효한 빵을 써. 유대교의 구약과 차별을 두는거야 이걸로. 로마는 그게 머라며 걍 발효안시킨 빵을 쓰는거고. 더하여 로마는 게르만들이 서유럽을 점령하면서 얘들도 점점 게르만 화 되어가는거야. 언어도 레이트 라틴어.라는게 이게 게르만화 되는겨 결국. 문화가 저기에 섞이고. 비잔틴이 이런걸 걸고 넘어가는거야.
저건 로마.가 정식으로 기독교 공인나고 본격적으로 교회의 최고자리를 달라고 할때부터 쌓여온 7백년간의 문제야. 이름만 첫째 가 아니라 진짜 첫째 자리를 달라고 하는거걸랑.
The Norman conquest of southern Italy lasted from 999 to 1139, involving many battles and independent conquerors. In 1130 these territories in southern Italy united as the Kingdom of Sicily, which included the island of Sicily, the southern third of the Italian Peninsula (except Benevento, which was briefly held twice), the archipelago of Malta and parts of North Africa.
로마가 먼저 저리 들이댄 이유. 이탈리아 남부 비잔틴 교회도 로마를 따라라. 하는건. 노르만 귀족들을 부르고 이들이 백년 이상을 여기서 지중해 해적과 롱로바르디와 비잔틴과 전투하면서 시작이 된겨. 저 비잔틴 해변도시들 조차 이제 노르만애들 수중으로 들어온거야 50년 지나면서. 그리고 이 교회들이 로마.를 따라야 한다 는 거지. 여기에 더하여 저런 발효빵 이야기들도 시비꺼리가 되고. 노르만애들이 왜 비잔틴 이탈리아에 침범하냐는 논쟁도 시비가 붙어.
더하여. 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 오이쿠메니코스 파트리아르키스. 비잔틴이 자기들 페이트리아크.를 에큐메니컬.로 부르는거야 6세기부터. 에큐메니컬.이란건 거주하는 곳. 즉 사람들이 사는 모든 땅. 세계 모두 인거야. 자기들이 관리하는 교구가 전세계라는겨. 로마가 이게 제일 싫었던거야. 왜 비잔틴놈들이 지들을 저리 호칭하는거냐며.
이보다 더하여. 필리오케. 문제야.
Filioque (Ecclesiastical Latin: [filiˈokwe]) is a Latin term added to the original Niceno-Constantinopolitan Creed (commonly known as the Nicene Creed), and which has been the subject of great controversy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hristianity. It is not in the original text of the Creed, attributed to the First Council of Constantinople (381), the second ecumenical council, which says that the Holy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without additions of any kind, such as "and the Son" or "alone".[1]
교회용어여. 두번째 공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 나온 문구.로 이게 니카이아 크리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로마에서 첨가한 단어야. 필리오케. 필리오. 가 son 아들.이고 퀘.가 그리고.여. 그리고 아들.
홀리 스피릿.은 파더로 부터 나오는겨. 여기까지만.이야 그리스어로는. 헌데 라틴어로 이걸 추가를 한거야 로마애들이. 필리오케. 즉 성령은 성부에서만 나오는게 아니라 성자.즉 지저스에게서도 나오는거야.
성부성자성령은 선후가 없어 서로. 시작은 솔직히 모르겄고, 코우 이터널 같이영원해. 헌데 니카이아 크리드.에선 성령이 성부로 부터. 프로시드. 이건 나오는거야. 글귀로 보면 성부가 먼저고 성령은 다음이야. 비록 둘이 같은 실재지만. 같은 실재라도 선후가 달라 이건. 칼케돈 크리드때도 여기서만 머문겨. 이런게 12세기 지나서 삼위일체방패 이미지 나온겨. 이건 공식적 이미지가 아냐.
로마.는 지저스.가 지명한 베드로.가 권위야. 아 성령이 성부로 부터만 나오면 지저스.는 머가 돼. 저걸 슬쩍 지저스를 끼어 넣으면서. 그래서 지저스가 지명한 베드로.의 이 로마가 저 성령 홀리스피릿.의 시작이란겨.
In the late 6th century, some Latin Churches added the words "and from the Son" (Filioque) to the description of the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in what many Eastern Orthodox Christians have at a later stage argued is a violation of Canon VII of the Council of Ephesus, since the words were not included in the text by either the First Council of Nicaea or that of Constantinople.[2] This was incorporated into the liturgical practice of Rome in 1014,[3] but was rejected by Eastern Christianity.
저걸 6세기 후반에. 라틴교회들 몇몇이서만 슬쩍 저리 쓴거야. 이건 명백한 조작번역이야. 로마 본부에서는 오히려 손해볼게 없으니 그냥 두는거고, 동쪽교회들이 저게 먼짓이냐 명백히 교회법 위반인거야. 공회의 결과물 크리드가 캐논로의 헌법이야. 헌데 저걸 서기 1014년에 로마 본부 페이트리아크.에서 공식적으로 예배에 저걸 쓰기 시작한거야.
그리고, 프로시드 라는 단어의 의미를 죽여버러는겨. 나오다 라는게 크리에이트 니 프로듀스 가 아니고, 도관 에 출구 도 과한 거고, 의사소통 하는거라며. 여하튼 말 만들어내는건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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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가 나중에야 다 정리가 된겨 저 삼위에 대한 선후문제도 선후가 없어. 이 삼위일체가 천년 만에 정리가 된겨 이게. 세계 논쟁 중에 가장 긴 논쟁이야 저건. 저것조차 지금 교회안에서도 달라. 사도신경.이란건 명백하게 삼위일체를 거부하는겨. 해서 사도신경 하는 애들을 이단으로 보는거고 지금도 어떤이들은.
저런 문제들이 수백년간 쌓이다가. 노르만들이 이탈리아 남부로 와서 비잔틴 해변도시들이 점령들이 되고 비잔틴교회들의 예배에 로마가 관여하는 서기 1053년부터 저게 그냥 터진겨.
They were given friendship and support by the emperor but were spurned by the patriarch. Finally, on 16 July 1054, three months after Pope Leo's death in April 1054 and nine months before the next pope took office,[143] they laid on the altar of Hagia Sophia, which was prepared for celebration of the Divine Liturgy, a bull of excommunication of Cerularius and his supporters. At a synod held on 20 July 1054, Cerularius in turn excommunicated the legates.[142][149] In reality, only Michael may have been excommunicated along with his then-living adherents.[d]
서기 1054년.에 로마 주교 레오.가 죽고. 새 주교가 임명되기 전에,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성당의 재단에 로마에서 파견나간 주비잔틴 대사.가 예배식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를 파문하는 서류를 올려놓는겨. 세달후에 콘스탄티노플에선 저 로마애들을 또한 파면하는거고. 이건 의미없는 짓이야. 왜냐면 서로들은 오토세팔러스인 페이트리아크. 자치적인 각각의 짱들이걸랑. 남의 페이트리아크.의 사람들을 파면 어쩌고 할 수 없어. 형식적인거지만 저걸로 동서교회분리의 본격 시작으로 보는거야 서기 1054년.
저 이후 말야. 비잔틴과 로마가 정치경제적으로 저것때문에 또한 혼란이 생겨. 일단은 저들은 무역으로 서로들 교류하는 사람들이야. 비잔틴은 기본이 그리스여. 여긴 해상무역도시야. 이탈리아와 프랑스땅 사람들이 바다와 육지로 오면서 이들과 섞여 살아 무역으로. 특히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이사람들에 의존을 하는게 비잔틴이야. 비잔틴 시민들도 저리로 무역하는거고. 헌데 이 종교분리 로 서로 분란이 생기는겨 도시들에서 만나면서.
이걸 해결위해서 서로 또 만나서 논쟁 하는거야. 이미 이탈리아의 비잔틴도시들은 물건너 간거고. 무교병 유교병 빵문제에 필리오케 문제에 예배언어와 의식순서들로 논쟁하는겨. 잘 안되는거고 이게. 헌데 이러면서 또한 서로 섞이는거야. 비잔틴에서 고대 그리스와 고대로마의 것들을 많이 갖고 있었걸랑. 이것들이 대륙으로 들어오는겨 저들과 만나서 논쟁하면서. 이게 나중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재료들이 돼. 이미 로마의 서유럽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가 잊혀진 땅이야. 온니 지저스. 온니 그리스도여. 고대의 것들은 신들 포함 다 땅속에 묻고 강바닥에 버렸걸랑. 이단이야. 이게 회복이 되는겨.
그러다가 1453년 메메드2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에 위기를 느낀 비잔틴에서 무조건 고개를 숙여 로마에. 야 우리 합치자. 니네들 의견대로 다 하마. 부디 우리 콘스탄티노플을 살려다오. 메메드2세가 쳐들어온다. 헌데 저기에 또한 반대한 비잔틴의 성직자들은 그냥 콘스탄티노플에 남아서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거나 오스만 제국에서 살아. 모든게 흐지부지되고 이 오소독시의 중심은 러시아가 갖고 가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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