后汉书·西域传·安息传》记载:和帝永元九年,都护班超遣甘英使大秦,抵条支。临大海欲度,而安息西界船人谓英曰:“海水广大,往来者逢善风三月乃得度,若遇迟风,亦有二岁者,故入海人皆赍三岁粮。海中善使人思土恋慕,数有死亡者。”英闻之乃止  

 

后汉书》是记载东汉历史的纪传体史书,由南朝刘宋时的范晔(398年-445年)

 

반고.가 한서.를 쓰고 백년이 안되서 동한이 망해. 삼국지 다음 사마염의 진晉 서진 동진 오호16국.

 

 

조조가 서기 220년.에 죽어 나이 65세. 

 

建安十三年六月癸巳日(208年7月9日),曹操恢复三公制度,被任命為丞相

五月丙申日(6月16日),汉献帝册封曹操為魏公,其领地广及魏郡河东郡河内郡等十个 

建安廿一年四月甲午日(216年5月29日),曹操被封为魏王,加九锡,立曹丕为世子  

 

조조.가 관도지전 하고 원소 치고 북쪽 통일해서. 서기 208년.에 승상.이 돼. 53세에. 그리고 5년 후 213년.에 위공.이 되서리 땅을 받아. 위군 하동군 하내군 등 10개땅을. 저기가 낙양 옆 산먼샤 시에서 황하 죽 하남 하북 경계 가며 하류로 흐르는 지금 하남 하북 경계의 아주 걍 노른자 땅이야. 그리고 3년 후.에 조왕.이 되는데. 서기 216년. 4년 후 220년.에 죽고. 당해 말에 아들 조비.가 한헌제.를 내리고. 위나라.의 황제.를 자칭해. 나이 33세.에 

 

저 소식을 듣고, 유비가 다음해 221년.에 자기가 유씨의 한나라를 잇는겨. 자기도 황제.야. 그리고 2년후에 백제성에서 죽어. 

 

오나라 손견.의 장남 손책은 허소.한테 기습당해 부상으로 죽고 서기200년. . 동생 손권.이 받아서, 오.는 222년.에 옆에 위나라와 손을 잡아. 오.는 위나라 황제.에 하미지 하고 왕.을 받는겨. 오왕.이야. 손권의 오.는 오나라 란 타이틀이 이때 붙는거야. 이때 이릉대전.이고 유비가 관우복수한다고 오.를 치는겨. 유비는 이때 백제성에서 죽는거고. 이 후에 손권은 제갈량과 손잡고 위나라와 단교를 하는겨. 그리곤 229년.에 황제.를 칭해. 

 

삼국지.의 위촉오 라는 나라 국.이 붙은건 서기 220년 부터 이어이어 붙이는겨. 손견 손책 죽고. 조조 죽고 유비 막 죽을때 부터 삼국이야. 이전은 걍 한나라의 군.이야 

 

삼국지 이야기.의 대부분.은 한나라 라는 이름의 울타리에서 싸우는겨. 조조 조차. 말년에 조왕.으로 죽기 4년 전에 오르지만. 이 조왕 조차도 한나라.의 일부야. 한나라.는 조비.가 서기 220년 12월에 황제를 칭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나는겨.

 

즉 저 이전.엔 감히 유비.나 손권.도 공.이나 왕.이니 못해. 천명을 거스르는겨 이건. 이들은 서기 220년 까지 열후.니 제후.니 하는 후.도 아니야. 얘들은 걍 촉군. 오군.의 짱일 뿐이야 한나라에서 임명한. 걍 도시자일분이야 우리식의.

 

白馬之盟是漢太祖劉邦在位時以殺白馬的方式與藩王、功臣等訂立的盟約,第一條,「國以永存,施及苗裔」。意思是只要國家政權還在,就保障功臣後人的爵位。第二條,「非劉氏而王者,天下共擊之,若無功上所不置而侯者,天下共誅之。」也就是說,非劉姓宗室成員,不得封諸侯王;沒有立下功勞,就不能封列侯。對於這樣的王侯,天下人可以一同討伐他[1]

劉邦消滅異姓王之後,只有長沙吳臣因力量太小而倖免於難,劉邦不願意千辛萬苦的成果,被後代的外戚權貴毀滅,刻意訂下此約定,希望劉氏江山長存。殺馬立誓,此為古代盟誓的方式之一,要殺牲取血,並用手指蘸血來塗在嘴上,以示恪守盟約。  

 

백마지맹. 유방이 건국을 하고. 어떻게 나라를 이끌것인가를 고민하는겨. 

 

이게 모든 건국자의 고민이야. 통일 진나라가 15년 만에 끝났어. 근본적으로, 전쟁 없는 평화야. 이에야스.가 또한 고민하는. 피비린내 전쟁이 지긋지긋한겨. 전쟁없이 평화롭게, 그러면서도 부국이 되는가.가 항상 건국자.의 절대적 고민이걸랑 이전왕조 복습을 하면서. 그래서 주원장.은 아주 강력한 공안왕조 시스템을 세팅을 하고. 얘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안정을 시켜, 문제는 강력한 공안으로 곧 멸망해서 문제지 아무런 힘메가리도 없이 걍 청나라에 준겨. 유교로 걍 인간들을 세뇌를 시켜버려. 조용하긴 조용하지. 그상태로 강시들만 사는 나라가 되는거지. 저게 조선이고.

 

第一條,「國以永存,施及苗裔」 

 

유방이 만든 한나라 헌법 제1조야 저건. 국이영존 시급묘예. 나라가 영원히 존재해야해, 묘예에게도 시.해야해. 베풀다 시.란 글자는. 군기 깃발.이 旖旎招展 인이짜오짠. 펄럭펄걱 거리는겨. 저건 오랑캐 땅들도 한나라로 편입하겠다는 의지야. 가장 문제는 저들이 규정한 사방의 오랑캐들이걸랑. 특히 흉노. 흉노가 나라를 영존하는데 가장 큰 방해여. 중국은 춘추전국부터 저 묘예들과의 싸움이 가장 커. 

 

그러기 위해선 인사관리야. 조직관리고. 

 

第二條,「非劉氏而王者,天下共擊之,若無功上所不置而侯者,天下共誅之。」

 

유방이 통일 진.의 실패, 춘추전국.의 분열.에서의 전란.의 원인.을 저걸로 본겨. 즉 자기 피.가 아니면 저리 쪼개져서 싸우게 되는거구나. 한나라의 땅들을 한 핏줄이 나눠받아야 한다고 답을 낸거야. 진나라는 군현제 였어. 넓은 땅떵어리를 직접 중앙에서 선정해서 파견하는겨. 15년밖에 유지가 안된거야 이건. 그래서 유방.은 병행해. 군국제.라는 이름으로. 직접 중앙 코트에서 파견해서 관리할 곳. 춘추전국 주나라처럼 봉지.를 주고 그 봉지.에서 자치적으로 인사관리하고 법률제정 시행할 곳.으로 나누는겨. 여기는 법.도 들어가는거야. 그러면서 대게 외곽지역은 봉지로 하사를 하는거야. 유럽식으론 마크 March. Margrave  후작령이여. 후작령들이 에게 왕.이란 타이틀 주면서 이들이 열후.가 되는겨. 

 

이때, 저 땅을 받는 열후들이나 중앙에 관직이나 군현에 파견되는 이들의 정체성이 문제여 이게. 봉지.를 받는 왕.은 유씨 핏줄이어야 해. 여기가 외곽이라거 군대병력도 따라가는거걸랑. 자기 핏줄이 가장 믿음이 가는겨. 

 

유씨 아닌자가 왕이되면, 천하는 함께 격퇴해라, 만약에 공이 없어 윗자리에 둘 수 없는 자가 후.가 되면 천하는 함께 그자를 죽여라. 

 

왕.은 봉지를 받은 후. 候 야. 황제자리가 아니라. 그래서 저 후.가 자격없는 자가 후. 봉지의 왕이 되면 모두 힘을 모아서 죽여라 하는겨. 저 뒷문장이 애매한데, 유씨를 죽이라는게 아니라, 해당 봉지.에 직계가 끊겨 이을 자가 없으면, 저 봉지.의 승상.이 후.를 이어받고, 그 죽은 후.의 여자의 아빠가 이어받으라고 해. 즉 유씨 아닌자가 저렇게 이어받을때 무자격자는 죽여라 하는겨.

 

이걸. 백마지맹.으로 하는겨. 백마.를 죽여서 피를 나눠 먹는 의식을 하는겨 저게. 저런 짓이 곧 한무제 이후에 사라져 저따위 야만 짓은. 저걸 배워서리 15세기에 조선 태종이 피 나눠먹는걸 따라하는거고. 얜 정말 .

 

저런 짓은 유럽에 없어. 있을 수도 없고. 살리크 법 이상이 없어. 재들은 살리크 법과 같은 듯 보이지만 전혀 달라. 그 면면을 보면. 

 

劉邦消滅異姓王之後,只有長沙吳臣因力量太小而倖免於難,劉邦不願意千辛萬苦的成果,被後代的外戚權貴毀滅,刻意訂下此約定,希望劉氏江山長存。殺馬立誓,此為古代盟誓的方式之一,要殺牲取血,並用手指蘸血來塗在嘴上,以示恪守盟約。  

 

저걸 건국 직후에 한게 아냐. 몇년 지나서 정한겨. 이미 어떤 영지는 유씨 아닌 사람들이 봉지를 받고 왕이 되었어. 대표적인 곳이 회남왕 영포.와 장사왕 오예.야. 

 

이 영포 오예. 가 구강왕 영포 하듯이. 이들은 머 저당시 대단한 장군 어쩌고 하지만. 걍 수적.이야 장강 회하.의 도적떼 무리여. 이들은 육지보다 강이야. 남들처럼 초기엔 항우.에 들어가다가 막판에 유방한테 들어가걸랑. 항우가 가장 실패한건 인사관리여. 자기 사람들이 다 떠나고 유방한테 간게 결정적인거지. 영포 와 오예.가 항우 서초패왕 자칭할때 초의제 라 불리던 양치기 아이를 장사.의 강에 배 구멍뚫어 죽이걸랑. 항우가 시켜서. 

 

백마지맹.이 퍼져. 유씨아니면 왕이 안된대. 회남왕 영포.가 떠는겨 아  그럼 죽인다는건가. 왼쪽 아래 장사왕 오신. 오예의 아들이야. 오예는 죽었어 일찍. 나랑 합세해서 반란하자는걸 오신.이 살살 달래서 피하게 하고 영포.는 향민한테 피살당해. 얜 수적이었걸랑. 원래 인망이 없어. 

 

이 장사왕 오씨들만 예외를 인정해줘. 영포 처리한거에, 저 장사 라는 곳이 지금 호남성 저짝 아래걸랑. 장강 아래 지류. 땅도 작고 먼 지역이여. 부담이 없어 여긴. 그래서 오씨들은 5대.를 이어가 장사왕.으로 이것도 대가 끊겨서리, 이후는 유씨들이 왕을 해. 

 

저 초창기 장사왕 오씨.의 장사국.에서 발견된게. 이전 썰했던 마왕퇴 한묘.야. 

 

辛追(前3世纪-前168年),是西漢吳氏長沙國丞相利蒼的妻子,育有一子利豨。父親辛夷,是長沙國的臨湘候。  

 

저 마왕퇴 한묘.가 당시 장사국.의 승상.의 부인과 자식들이걸랑. 이중에 한 사람이 신추.라는 여자고 이여자도 장사국 승상의 부인이었어. 이여자가 죽은게 기원전 168년.이야. 저 묘가  오래된겨. 저 마왕퇴에서 나오는 수두룩한 유물중에 노자 도덕경.과 역경.이 비단글자로 나온겨. 이게 도덕경과 역경.의 가장 오래된 글자야. 아주 중요한 유물이야. 저게 저 오씨 들이었을때의 장사국 시대야.

 

战国时,许多诸侯国废除了春秋时期通行的卿大夫采邑制度,设置郡、县。随之出现了彻侯等具有食邑的封爵。秦国商鞅变法后,采取二十等爵制,彻侯为最高一等,有食邑無封國。彻侯“金印紫绶,功大者食县,小者食乡、亭,得臣其所食吏民。”(《通典》卷三十一),其他诸爵得食俸禄如官吏。汉朝建立後,延續此項制度。  

 

열후.라는건 원래가 철후.여 철저할때 철. 열후.가 나열된 후들.이라는 제후.가 아녀. 열후.는 식읍을 받아. 나라를 받는게 아냐. 세금 받을 땅을 개인이 받는겨. 대공자 식현, 소자식향,정, 큰 공의 열후.는 현.단위를 받고, 작은공의 열후.는 향.이나 정. 의 아랫 크리 마을들을 받아. 저런건 진나라 상앙변법.으로 만들고 이걸 한나라도 이어 썼다는거고. 

 

춘추전국에 제후.라는게 후.가 곧 봉지 받은 사람들.이야. 이들 중에 초창기.에 나라규모의 땅을 받은 사람을 공.에 군.이란 호칭을 쓰다가 오국상왕 하면서 서로 왕왕 거리면서 왕이 된겨. 

 

推恩令,是汉朝汉武帝时期推行的一个旨在减少诸侯封地,削弱诸侯王势力范围的一项重要法令。主要内容是将过去诸侯王只能把封地和爵位传给嫡长子的情况,变更为強制诸侯王把土地採用諸子均分制,把封地分成幾個部份傳給各個儿子,分别形成直属于漢廷的更小的王國與侯国,达到分化、削弱诸侯王国势力的效果。 

 

추은령. 은혜를 베푸는건데. 받는이들에겐 은혜지만. 한무제때. 이전이 문경치지.였고. 

 

七國之亂又稱作七王之亂,發生於中國西漢初期的公元前154年(漢景帝三年)[1]。當時以被封為吳王的劉濞為中心的七個劉姓宗室諸侯由於不滿朝廷實行削藩政策,削減他們的權力,所以興兵引起之內亂,由竇嬰周亞夫所平定。[2]

七王為:吳王劉濞、楚王劉戊、膠西王劉卬、膠東王劉雄渠、淄川王劉賢、濟南王劉辟光、趙王劉遂。  

 

직전 한경제 기원전 154년.에 7국지난. 일곱개의 왕들이 내란을 한거야. 모두 유씨 종실들이야. 

 

한 고조 유방.이 유럽 나중에 하던 살리크 법을 비슷하게 먼저 한거걸랑. 헌데 이때는. 적장자 장남이 그 봉지.를 모두 갖는거야. 춘추전국은 각 지역에서 자기들이 알아서 살리크식을 하든말든. 헌데 저때는 유씨들세상이야. 각 봉지의 유씨.의 자식은 장남이 이어서 계속 받아가. 얘들이 50년을 이삼대 이어오면서 각 봉지에서 세력이 단단해지는거야. 이들이 중앙 코트에 불만을 품고 반란 하는겨 자기들 땅 이익을 위해서. 

 

한무제.가 이어받아서. 같은 종씨지만 저 세력들이 골치아픈겨 이게. 그래서 저 각각 봉지들.을 쪼개는거야. 적장자 올인.에서 모든 형제들에게 균등히 분할을 하게 해. 여자들도 받게해. 이러면서 저 영지들이 아주 걍 조각조각 나는겨. 땅 나눠받는 형제들에겐 은혜인거지. 이러면서 중앙 코트의 힘이 쎄지고 봉지들은 약해지는겨. 한무제 때 장건.이 서역 가는거고. 이광 등 시켜서리 북쪽 만주에 알타이 넘어 흉노 치러 보내는거고, 장강 아래로 넘어가는겨. 한고조 유방의 국이영존 시급묘예.의 시급묘예.를 이때 실행하는거야. 

 

장강 이남.이란 지역이 이 한무제때 진출하는겨. 운남성. 귀주성.에 호남성의 아래. 이전의 초한지 무대는 황하에 회하 위주였어. 구강왕 영포.가 장강 쪽으로 더 가서 장사까지 갔던거고. 여긴 그래서 가장 변두리였던거야 당시.

 

이 장강 이남.이 그리고 다시 버려져. 그러다가 삼국지 제갈량 때에 남벌을 하면서 이때 온전하게 장강.의 아래 중국지역들이 다 들어오는겨. 제갈량.이 중국애들 입장에선 이면에서 대단한 기여를 한거야. 

 

在西漢末年,王莽以外戚身份弄權,被封為皇帝,最後篡漢,將此盟約撕毀。其後漢光武帝重建漢朝,此盟約被重提。直至東漢末年曹操魏王,其後其子曹丕繼任魏王並篡漢稱帝後,白馬之盟才被徹底終止。 

 

기원직후.에 한나라가 망해 한성제. 한애제.다음 한평제.

 

왕망.이 왕씨인데. 이 중국 왕씨들은. 전씨의 제나라.가 망하고, 전씨들이 성을 왕씨로 고쳐. 조선때 고려왕씨들이 전씨된것과 반대지  웃기게도. 왕망.이 당시 큰아부지.가 왕봉. 王凤 이야. 이사람이 제2인자인 대사마.여. 이 왕봉.의 첩.의 누이가 당시 한성제.의 후비여. 백부 왕봉.의 입김으로 왕망이 출세가도를 달려서 얘가 왕봉.이 죽고 대사마.까지 가. 

 

헌데 한성제.가 죽고 한애제.가 등극하곤 외척이 갈리는거지. 외척으로 출세한 왕망이 바뀐 외척에 도망가는겨. 한애제가 7년 통치하고 기원전 1년.에 죽어. 왕망이 다시 복귀를 해. 그리고 한평제 오르고. 왕망.이 한평제를 독살시키고 두살짜리 아들 유영.을 올리고는 자기가 가황제 하다가

 

新朝(9年[1]-24年),又稱新莽[註 1],是中國歷史上繼西漢之後的朝代,為當時權臣王莽所建立,僅王莽一代,建都西安(即原長安[3]。  

 

서기 9년.에 신. 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정식 황제로 등극을 해. 15년 딱 왕망.에서만 끝나는 왕조야. 서한과 동한을 가르는. 이사람이 외척에 흥하고 외척에 망했다가 다시 진출한거걸랑. 

 

왕망. 이야기가 더 들어가면 재밌는데. 다 넘어가고.

 

西漢居攝三年(8年),「攝皇帝」王莽奏請太皇太后(莽姑母王政君)實行五等爵制,恢復公、侯、伯、子、男等爵位。[8]始建國元年(9年),王莽以古稱「天無二日,土無二王」為由,認為漢之諸侯及四夷稱王有違古制,規定諸侯為王者改稱為公,四夷僭號稱王者改稱為侯。始建國四年(12年),王莽蒞明堂,大封諸侯。他規定諸侯之員額為一千八百。公一國有衆萬戶,土方百里;侯、伯一國有衆五千戶,土方七十里;子、男一則有衆二千五百戶,土方五十里。已受封地者計有公十四人,侯九十三人,伯二十一人,子百七十一人,男四百九十七人,共七百九十六人。[9]

 

 

이사람이 중국사에선 천하의 찬탈자이자 간신의 대명사 지만. 잘한 것도 많아. 헌데 또 어떤 앤 그래서 왕망이  공산주의를 건설하려 한 최초의 혁명가다 하고 말야. 공산주의가  좋은 듯. 참 후짐들 태반인데. 저래서 북조선이 저런 애들의 사고방식으로 생긴 거걸랑 저당시. 

 

백마지맹.을 없앤겨. 이 백마지맹.이란게 한나라의 대명사야 이게. 유씨들로 봉지의 왕들을 삼으라. 자격이 없는 이가 후.가 되면 다 죽여라. 이걸 지워. 그리고 공후백자남.이란 타이틀을 다시 갖고 오면서. 이걸 재정의 하는거야.

 

하늘엔 두해가 없고 땅엔 두왕이 없어. 왕이란 타이틀을 지워. 가장 큰 봉지를 받은 이는 공.이야. 춘추시대로 돌아가는겨. 그러면서 공후백자남 별로 받을 수 있는 땅. 호. 를 규정을 명확하게 해. 또한 오랑캐 나라도 그래서 걘 왕.이 아니고 후.야. 저때 고구려.는 하구려. 下句麗 로 바꾸라캐. ㅋㅋㅋ. 해서 저때 고구려는 하구려여. 고구려 왕.이 아니라 하구려 후.여. 

 

저사람이 짧은 시절  많은 일을 해. 제도들이 업그레이드가 된겨. 그래서 바로 동한.이 서고 오히려 왕망이 만든 제도들을 많이 이어받아 써. 

 

이사람이 한 것 중에. 민들 층에서 가장 문제가 된건. 지명 이름들을 싹 바꾼거야. 군과 아래 현.이름들을 모두 새로 바꾼겨. 이런게 가장 안좋은겨 민심에. 사람들이 새로바뀐 지명에 적응을 못하는거야. 이걸로 부글부글 끓은거야. 이런 지명 바꾸는 짓은 탑다운 식으로 저리 저지레 하는게 아냐 이건. 이전 포르투갈 행정구역 에서 썰했듯이.

 

 

광무제.가 다시 한나라를 세우고. 동한이 되고. 저 백마지맹.의 중요성을 알어. 이걸 다시 하는겨. 유씨들 아니면 왕자리 줘선 안되는거야 유지가 될라면. 

 

이 백마지맹.이 한나라 모든 정책의 맨 위에 서는거야. 이건 그래서 더 건들수가 없게돼 동한 2백년동안은.

 

이게 깨진게 조조가 위공.이란 타이틀 받을 때야. 공. 서기 213년. 그리고 조왕.이 되는 서기 216년. 아주 확실한 배반이야. 백마지맹.의. 봉지를 하달하고 조씨가 왕.이 된거야. 이때부터 조조.는 유비에겐 역모자가 되는겨. 유비나 손권은 저때 자기들이 왕.이라고 자처안해 그래서. 그러다가 한헌제. 내리고 조비가 황제 자칭하면서. 그제서야 유비가 황제.자칭하고. 손권은 새로운 위나라에서 오왕 타이틀을 받은거야.

 

이때부터 삼국시대야. 서기 220년 부터. 그리고 위나라.가 촉한 먹고. 서기 263년. 이걸 사마염.이 진.을 세우고. 진.이란 이름으로 오나라를 먹어. 서기 280년. 이 60년 동안이 삼국시대 일 뿐이야. 

 

 

사마염의 진.이 서기 266년.에 서고. 오나라 흡수해서 통일을 해. 서기 280년. 

 

晉朝(266年-420年)是中國歷史朝代之一,上承三国,下启五胡十六國南北朝,因晉朝皇室姓司馬,所以又稱司马晋[1]。晋朝又分為兩個時期,即西晉(266年-316年)与東晉(317年-420年),合称“两晋”,共154年 

五胡十六国(304年-439年)

 

이 진.나라 가. 160년.이야. 서자마자 50년 만에. 오나라 통일하고 36년 만에 이 진.이 망해. 방계 사마씨가 장강 아래. 건강(남경 난징)에 세우는게 동진.이야. 해서 서진과 동진 하는데. 

 

八王之乱是發生於西晋末年元康元年(291年)

 

통일하자마자 십여년 후에 8왕지란. 똑같아 한나라 7국지난.과. 사마씨들이 싸우는겨. 

 

五胡乱华,中國歷史名詞,是指中国西晋时期北边众多游牧民族趁晋政權在八王之乱期间衰弱之际征服漢地北部以建立五胡十六国,与退守漢地南部的晋政权形成對峙之势。 「五胡」指匈奴鲜卑五个胡人的游牧部落联盟。百餘年間,這些內徙的草原各族及漢族在漢地華北地區建立數十個強弱不等、大小各異的政權,其中存在时间较长和具有重大影响力的有五胡十六國。五胡乱华破坏了中原的政权和经济架构,但也使漠北遊牧民族汉地汉族產生文化经济交往。由于汉族人口从黄河流域大规模遷移至汉地南部的长江珠江流域,史称衣冠南渡,进一步促进了南北方经济平衡。  

 

서진.의 수도는 낙양이야. 한나라도 낙양이었고 조조가 한헌제 데리고 허창. 하남 아래로 갔다가 조비가 위나라 세우곤 다시 낙양으로 와서 진나라도 낙양이야. 8왕지난이 터지면서 북쪽이 느슨해진겨. 이때 위에서 쳐내려오는 이들이 흉노 선비 저갈강.이야. 이걸 오호난화. 다섯 오랑캐가. 화하.를 어지럽힌다는거지. 이때 수도를 그래서 다시 장안으로 들어가는겨. 

 

그래도 못 버티고. 진나라가 망해. 같은 사마씨가. 낭야왕. 서주 오른쪽이야. 이사람은 8왕지난에 안 꼈어. 아래 난징으로 내려가서 진.나라를 다시 세워. 동진. 

 

동진 이라지만. 남진이야. 건강.이라는 남경 난징.은 장강 바로 아래야. 이 동진.의 경계는 오른쪽은 회하.까지도 가 왼쪽은 장강 중상류.의 아래인겨. 이 위가 5호의 16개국과 기타 나라들이야. 동시에 존재한게 아니라 저때 흥망한 나라들이 대표적으로 16개 였다는거야. 

 

 

五胡十六国(304年-439年)

东晋(317年4月6日-420年7月10日) 

 

 

흉노 선비 저 갈 강.이들은 모두 북쪽 애들이야. 갈족은 남흉노.로 보고. 흉노.는 몽골이고, 저족.은 하서주랑 감숙성에 있던 이들. 강족.도 서쪽에 하서주랑에 청해에서 내려온 이들로 봐. 지금 강족 자치지역이 사천성에 있어. 사천성 서쪽이 티벳에서 온 장족 자치주.이고 오른쪽 주.가 장족과 강족 자치주. 아래 주.가 이족 자치주.야 이 자치주 들이 사천성에서 땅크기가 가장 큰 세개 자치주.야 . 이 중국의 서남지구.는 이민족들의 자치주들이 절반이상이야. 묘족들의 자치주.가 운남성에 있어. 이민족 이름으로 성규모 크기로 나눈게 자치구.야 내몽골 자치구. 광서장족자치구. 녕하 닝샤에 회족 자치구. 이거 세개일껴 아마. 漢、滿、蒙、回、藏、西南邊疆民族 저 닝샤.의 회족.이 중국의 한만몽회장. 족의 네번째 규모야. 

 

(五凉、四燕、三秦、二赵,成漢、胡夏为十六國) 

 

저들이 오량 사연 삼진 이조 성한 호하. 에서 16개 나라가 흥망을 한겨. 

 

凉. 량 이란 이 서늘한 량.의 지역이름은. 하서주랑.의 하서. 황하 서쪽이야. 섬서성의 왼쪽과 북부여 대개. 중국이름 량주 량나라 하면. 연.이란건 북동쪽 한반도쪽이야. 진. 친은 시안시있는 섬서성 아래가 중심이고. 조.는 낙양 동쪽의 황하 중원이고. 성한.은 저족.이 지배한 촉한땅 사천성이고 호하.는 섬서성 북과 내몽고 왼쪽이야.

 

 

 

北魏(386年-534年)是北朝時期的第一個鲜卑人政權,由拓跋珪所建立,定都平城遗址在今山西省大同市)。439年,魏太武帝统一华北,与南方的汉人政权对峙  

 

저걸 다 통일한게 위.여. 이걸 북위라 해. 선비족이 건립한겨. 이 선비족은 흉노에서 나온거고. 이때 내몽고 에서 시작한거야. 그 산해관.의 직선 쭉 위쪽의 내몽고 고원에서. 이들이 내려와서 서기 439년.에 통일을 한겨 화북을. 그리고 수도를 낙양.에 정해.

 

(420年-479年)史稱劉宋或稱南宋[1] 

 

남쪽엔 북위 이전에 동진.이 사라지고 송.으로 바뀌어. 유유.가 창업을 해서. 이걸 조광윤 송과 구분위해. 유송. 이 또는 남송.이라해. 이 유유.는 한나라 유방의 동생 핏줄이야. 

 

북위.와 와 남송.의 시작으로 남북조.시대를 여는겨. 

 

북위.는 서위 동위 북주 북제.로 가고

남송.은 제 양 후양 진 陳 으로 가. 

 

이걸 통일하는게 수나라 30년 왕조.로 서기 600년 지나는거고 이어 당나라 3백년으로 거기 900년 지나는건데.

 

오호난화.에서 당나라까지 6백년.은 중국땅은 스텝 유목민족 투르크 애들의 시대야 이게. 중국은 이 투르크 들이 만든겨. 몽골 원나라 이전여진 금나라 다음 청나라 만주족. 이게 다 북방 스텝 투르크여. 중국은 투르크가 만든겨. 한족이 주인이 되서 이민족 취급 당하는거고. 

 

魏晋南北朝(220年—589年),又称三国两晋南北朝,是中國歷史上的一段長達三四百年的混亂時期,朝代更迭速度很快,並存在有多个政权並存的局面,有相當長的時間是南北對峙。

這個時期由220年曹丕東漢帝位,自立曹魏開始,到589年隋朝楊堅滅南陳而重新统一结束,共369年。可分為三國時期(曹魏蜀汉孙吴并立)、西晉時期(與東晉合稱晉朝)、東晉與十六國時期、南北朝時期(南朝與北朝對立時期,共150年)。另外位於江南,全部建都在建康(孫吳時為建業,即今天的南京)的孫吳東晉南朝等六個國家又統称为六朝。 

 

서기 220년. 조비.가 황제 자칭할때 부터. 진.때 오호십육국과 동진이 병행하고. 이어 남조 에 진 대신 유유의 남송. 북조에 북위가 통일하면서. 수나라가 저 둘을 합칠때 이전.을 450년 간의 위진남북조.라 해. 5호16국 이 있는겨. 

 

어떤 애는 위진남북조.시기에. 따로 장강 아래 지역의 손권의 오.부터 손오 동진 송 제 양 진.을 6조 라 해. 이 남쪽은 대게 하나의 조.가 바통을 받은거고. 북쪽은 조각조각 난 상태였어 북위가 통일한 150년 시절 빼고.

 

감영의 서역길. 기록이 전하는 후한전.이 범엽이 쓴건데. 이 범엽이 저 짧은 60년 왕조 유유의 남송.때의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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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甘英  간잉.이 장건의 길을 너머서 가는게 서기 97년.이야. 

 

장건.이 박트리아. 대하 까지 갔던 때가 기원전 1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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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서역에 갔을 때의 세계 정세를 보면. 

 

 

로마는 기원전 390년.에 갈리아들의 로마 약탈을 7개월 당하고 지옥에서 버텼어. 고대로마.는 말야. 저 기원전 390년에 버티고 살아남은 직후.에 만들어진거야. 로마는 저 갈리아 가 만든겨. 이때 로마인의 정체성이 생겨. 나라가 약하면 죽는구나. 강한 우리 로마시민들.이란 의식이 저때 생기는겨. 재정비를 하고 이때부터 외곽 민족들과 배틀을 하면서 흡수를 하는거야. 이게 백년 동안 진행되다가 이탈리아 반도 아래까지 간겨. 여기에 마그나 그라이키아.라는 그리스에서 온 도시국가들과 부딪히면서, 이들이 에피로스.의 퓌로스(퓌루스 피루스)를 불러서 얘가 코끼리 몰고 오는게 기원전 280년.이야.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전323년.에 죽어. 후계자 전쟁 디아도코이.야. 퓌로스.가 로마로 갈때인 기원전280년.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가 직전해 전282년. 전281년.에 죽어. 소아시아.와 트라키아를 다 지배했던 뤼시마코스.도 전281년.에 죽어. 

 

저 셋 과 동시대 이지만 저들의 아빠뻘이 캇산드리아의 아빠 안티파트로스.와 알렉산더가 동진하면서 소아시아 사트랍은 안티고노스.에게 맡겨. 이사람도  할배야. 초기 실세.는 본토에선 안티파트로스.이고 동쪽에선 이 안티고노스.여. 저 두 할배가 죽고. 트라키아 만 갖고 있던 뤼시마코스.가 저걸 다 먹은겨. 그런데 뤼시마코스.의 아들들이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상대가 안되고 걍 끝난겨. 저 뤼시마코스.의 땅들을 다시 안티고노스.의 자식들이 회복을 하고 조.를 이뤄. 마케도니아.도 저 세력들 싸움에서 다시 안티고노스.가 이어가.

 

소아시아.는 안티고노스와 뤼시마코스 다음에. 저 땅이 크걸랑.

 

Kingdom of Pergamon 282 BC–133 BC

Kingdom of Cappadocia 320s BC–17 AD

Kingdom of Pontus  281 BC–62 AD

Kingdom of Armenia, 331 BC–428 AD. 

 

크게 서쪽 페르가몬. 가운데 카파도키아. 흑해 아래 폰투스.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뷔티니아 킹덤도 있는데. 

 

비튀니아.는 원래 저땅 인들이 킹덤 하면서 걍 하미지 하는거고. 아케메네스에 했다가 그리스에 고개 숙여. 아르메니아.도 킹덤이 아케네네스 부터야. 저 아르메니아가 참 안타까운 나라면서 대단한 나라야. 

 

저길 안티고노스.가 알렉산드로스 청년한테 사트랍으로 총책임 맡다가. 죽으면서. 부하 사령관 애들이 저기서 킹덤을 세우는겨. 있던 킹덤.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자식들이나 셀레우코스 쪽에 하미지를 하는거고.

 

디아도코이 전쟁들 중심인 할배들 죽고.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뤼시마코스.도 죽고. 이 직후에 퓌로스.가 이탈리아로 간거야. 이러면서 로마.는 이 후에. 아래 카르타고 가 시칠리아.에서 그리스국가들과 부딪히면서 퓌로스가 떠난 힘의 공백을 로마가 대신하는겨. 그리곤 바로 포에니 전쟁을 3차 시기로 또한 from 264 BC to 146 BC. 120년을 하면서. 자마전투에서 한니발 패배후 소아시아로 가서 쓸쓸히 죽고. 로마는 퓌로스에 대한 복수겸 카르타고 동맹했던 저 마케도니아와 동시에 전쟁을 한거야 The Macedonian Wars (214–148 BC)  카르타고 와 마케도니아.가 동시에 로마에 들어온거야.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네개의 러퍼블릭으로 쪼개.  

 

갈리아 약탈 기원전 390년.이 저 로마.를 만든거야.

 

퓔로스.가 로마로 전쟁하러 간게 전280년.이야. 직전에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뤼시마코스.가 죽었어. 뤼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네가 이어가.

 

안티고노스.의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가 먼저 망한겨. 

 

The Seleucid War (192–188 BC) Roman–Seleucid War.

 

로마.가 포에니전쟁 2차 기원전 2백년 직전에 한니발을 이겨 튀니지 가서 자마전투. 이때 이미 끝난겨. 50년 후 카르타고가 계속 반기들고 해서리 아예 도시를 없애. 그러면서 저 승기로 마케도니아와 전쟁하는거걸랑. 이때 마케도니아.는 이미 쇠락할때야. 셀레우코스.가 얘들 배후인겨 셀레우코스.가 마케도니아를 지원하는거고. 마케도니아 전쟁 겸. 이 동쪽 배후 셀레우코스.와 싸우는거야.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는 중립을 선언해.

 

이 소아시아의 서쪽 해변의 페라가몬 킹덤.은 로마에 하미지를 하고. 그리스 땅도 편이 갈려. 이때 아테네 애들이 반로마.를 선언해. 이걸로 아테네 라는 도시 역시 로마.가 나중에 확 태워 없애는겨. 

 

로마의 마케도니아 전쟁이 전214-전148로 길어 보이지만. 이미 저 4년간의 셀레우코스 전쟁 승리로. 마케도니아는 끝난겨 저때. 안티고노스.의 자식도 끊겨서 여자들이 셀레우코스.로 시집가면서 전168년에 안티고노스 는 사라져. 마케도니아는 로마와의 전쟁.을 킹 없이 내분하면서 한거야. 걍 개판이 된겨. 

 

소아시아.는 서쪽은 로마에 하미지를 하고 동쪽은 셀레우코스에 하미지 하다가. 저 전168년.에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와의 시리아 백년 전쟁. 결과 협상으로 저 당해에 레반트.가 자기들 것이 확실히 되지만. 여기도 곧 매카비 반란을 시작으로 독립해 나가고. 이미 오른쪽에선 파르티아.가 서진하면서 위협을 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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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서역길 기원전 129년 머물때.

 

로마.는 갑자기 거대해진거야. 카르타고와의 포에니전쟁 마케도니아전쟁.의 결과로 북아프리카 이집트 서쪽과 이베리아반도. 그리스땅과 소아시아 대부분이 로마의 관할로 들어온겨. 로마 제국이 된겨 저때. 이건 의도적 결과물이 아냐. 기원전 390년 갈리아들 침입에 의한 외상후증후군.이여 이건. 맞으면 더 쎄게 돌려주는겨 그러다가 걍 저리 넓어진거야.

 

갑자기 로마가 비대해졌어. 아무런 준비도 된게 없었어 이게. 이상황에서 사회적 문제가 터진거야.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Latin: TI·SEMPRONIVS·TI·F·P·N·GRACCVS; born c. 169–164 – 133 BC)[1][2] 

Gaius Sempronius Gracchus (154–121 BC) 

 

그라쿠스 형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크라쿠스. 십년 텀으로 죽는데. 집안이 로마 최고의 귀족집안이야. 아빠가 콘술이었고. 엄마는 한니발 물리친 스키피오.의 딸이야. 즉 이들은 파트리쿠스.여. 

 

저 형.이 로마 저당시.의 포풀라레스. 민중파 지도자.가 되는겨 로마사에서.  포풀라레스.에 대한 옵티마테스.라는 정치파벌이 이때 다시 불이붙어. 이건 이전 로마 공화정 초창기때부터 이전 2백여년의 대립이였다가 포풀라레스들의 주장을 원로원이 받아들이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티나온겨 제국이 된 이후에.

 

저 형제들 중심의 포풀라레스.들이 다들 죽어. 잠잠해지고 동생이 또 10년 후에 또 나서. 이때 또 이 파벌들이 죽어. 이게 이어져서 

 

The Social War (from socii ("allies"), thus in LatinBellum Sociale;[4] also called the Italian War, the War of the Allies or the Marsic War) was a war waged from 91 to 88 BC  

 

영어 소셜 워.라 하지만. 사회 전쟁 이딴게 아니라. 소키이. 라는게 영어로 저기서 동맹들 이라 번역질 하지만 저게 아니라. 소키.는 로마라는 도시국가.가 계속 위아래로 통일하면서 들어온 다른 도시국가들.이야. 이들을 소키.와 무니키피움.으로 나누는겨. 소키.라는게 로마로 편입된 도시국가들이야. 이들은 로마시민권자가 아냐. 그 소키.의 법을 따르는겨. 

 

저 가이우스 형제들의 포풀라레스.들의 민심.이 퍼져서리 이탈리아반도에 소키.들 소키이.까지 스민거야. 우리가  니덜 포풀라레스 같은 처지의 하등시민이냐 우리네도 로마시민권자 자격들을 달라 하는겨. 이들이 다 뭉쳐서 로마 도시국가랑 싸우는거야. 또한 로마의 민중파들이 쟤들에 합세를 하는거고. 

 

저때 등장하는 이가. 마리우스.야. 카이사르 고모부. 포풀라레스.지만 로마의 레가투스로서 싸워. 그래도 반란은 안되는겨. 이 로마 내전이 카이사르 까지 온거야. 카이사르.가 영구 딕타토르.를 선언한 이유고. 저 모든 문제는.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전쟁 으로 갑자기 비대해진 것에 의해 생긴 정치사회문제로 발생한거야. 우선은 군인들로 생계를 이었던 이들이 모두 실업자가 된겨. 이건 준비되지 않은 뜻밖의 문제였어. 이걸 기존 원로원 체제로는 해결이 안되는거야. 원로원이란게 결국 리더층의 다른 인민놀이야 이게. 결정되는게 없어. 분란만 생기는거고. 이걸 카이사르가 해결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굳힌거야. 이 경험으로 중세 천년 게르만 애들이 이어 간거야. 프랑스는 이걸 잊은거고. 해서 저 프랑스 를 시작으로 이 프랑스를 따랐던 이후 유럽에서 티나오는 민족놀이로 저 유럽이 피바다가 되는겨. 저 피바다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피한게 영국과 북유럽 나라들이야. 얘들은 지금도 킹덤이야. 스페인도 저짓 했다가 걍 이름만 킹덤으로 바꾼거일 뿐이고. 스페인 포르투갈은 저렇게 될 나라들이 아니었어. 

 

로마사.가 중세유럽애들의 가장 기준이 되는겨 이게. 이 로마사에 세상 모든 이슈들이 다 제기가 되고 그 해결책이 여기 다있걸랑. 경제 문제도 화폐개혁이니 그딴 짓의 역사가 로마사에 그대로 있걸랑. 그걸 따르는겨 그폐해를.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이야긴 로마사에 있는겨 그게. 이 로마를 거부한 애들이 인민놀이 하다가 다 쓰레기가 된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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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저럴때 셀레우코스. 는 오른쪽에 파르티아.가 나와. 소아시아쪽은 킹덤들 산재한 곳에 로마와 셀레우코스네가 양분하는거고. 

 

The Parthian Empire (/ˈpɑːrθiən/; 247 BC – 224 AD), also known as the Arsacid Empire  

 

Arsaces I (/ˈɑːrsəsiːz/; from Greek: Ἀρσάκης; in Parthian: 𐭀𐭓𐭔𐭊 AršakPersian: اشک‎ Ašk) was the first king of Parthia, as well as the founder and eponym of the Arsacid dynasty of Parthia, ruling from 247 BC to 217 BC. 

 

셀레우코스.가 기원전 281년에 죽고 다음세대에 바로 나온겨. 

 

파르티아.라는게 이란의 북쪽지역.을 말해 고대에. 이 아래 걸프만쪽 배불룩 지역이 페르시아.라고 하는겨 엄격히는.

 

파르티아.의 오른쪽이 박트리아.야 저 지역별로 사트랍.을 두고. 셀레우코스.가 통치를 하는데. 저 파르티아.는 이란인을 사트랍으로 둬. 원주민을. 이걸 엎은 사람이 아그사키스. 영어 아르서시즈. 전247년.에 창업을 해. 이게 470년을 간거야. 진시황 통일 직전에 시작해서 한나라 망한 직후야. 

 

파르티아.가 동쪽에서 사트랍을 전복하고 얘들이 서진을 하는겨. 이때 셀레우코스.조 는 수도를 티그리스강에 세웠던 셀레우키아.를 버리고 서쪽 안티오키아.로 옮기는겨. 전240년. 이때 이미 동쪽을 버린거야 얘들은. 그러면서 레반트와 소아시아에 집중을 한거야. 이 와중에 레반트 아래 유대땅을 두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와 백년전쟁을 한거고 위쪽으론 마케도니아 배후에서 로마와 전쟁을 한거고. 그러다가 소아시아도 로마세력으로 들어가고 유대땅에선 매카비 반란하고 오른쪽에선 계속 파르티아들이 압박하면서 전63년.에 사라진거야. 

 

그리고 이땅은 파르티아께 되고. 얘들은 수도를. 셀레우코스가 버리고간 셀레우키아.의 강 맞은편에 크테시폰.을 세우는겨. 전120년즈음에. 셀레우키아 있다가 맞은편에 다시 세워서 옮기고 셀레우코스.를 지운겨 서쪽으로 가서. 그리고 위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와 카파도키아.도 얘들에게 하미지를 하면서 이젠 로마와 전쟁을 하는거고.

 

 

장건.이 기원전 129년.에 박트리아에 가있을때.가 저런 상황이야. 로마는 막 포플라레스.가 등장하면서 그라쿠스 형이 죽고. 동생 그라쿠스가 죽기 전.이고. 셀레우코스는 안티오키아로 가있고 이미 파르티아가 메소포타미아를 먹은 상태여. 

 

漢哀帝在位期間,中國人就和佛教有所接觸。據《魏書》等記載元壽元年(公元前2年)博士弟子景盧,從大月氏王使者伊存,受取佛經,是為佛經至中國最早傳授的紀錄[3]

 

이전 불경 들어오는 이야기에서. 불경이 최초로 중국에 들어오는게 기원전2년.이야. 한애제.가 등극하고, 이 외척으로 왕망.이 도망가있을때야. 경노. 라는 사람이 대월씨를 따라사거 갖고 온겨. 이땐 대월씨.라고 했어. 장건이 다녀오고 127년이 지난거야. 장건때도 월씨족들이 소그디아 아래 아모강.유역에 있으면서 아래 박트리아.를 지배했을때야. 이들이 박트리아. 대하 의 아래. 즉 힌두쿠쉬 산줄기.를 넘어가서 인도 북부까지 자리잡은게. 쿠샨왕조야. 

 

貴霜帝国梵语:कुषाण राजवंश;巴克特里亚语:ΧΟϷΑΝ;英语:Kushan; 亦稱「庫沈」或桂霜帝國) 30–375  

 

귀상제국.이라는 쿠샨 인도는 서기 30년 부터여. 이 전이걸랑. 그래서 대월씨 사신.을 따라갔다고 한거야. 저걸 보면. 저당시는 월씨족들이 중국 한나라와 교류를 한겨 장건 이후로. 저건 장건의 힘이야. 맨발로 다녀왔던. 

 

그래서 저때는 월씨.라고 한겨. 이때 티벳에 있던 이들을 소월씨 한거고.

 

 

支婁迦讖(Lokakṣema),又叫支讖,生卒年不詳(大約2世紀)。东汉时來自月支貴霜帝國)的佛教僧人。為最早将大乘佛教典籍翻译成中文的譯經僧[1]

 

최초의 불경한역자.는 지루가참. 로칵세마. 지루지아쳔. 2세기 사람이야. 쿠샨에서 온 월씨족 중이여. 최초의 불경 한역이야. 지루가참.은 월씨들이 힌두쿠쉬 넘어 쿠샨 인도.일때의 사람이야. 그래서 귀상제국. 이라고 해야해. 이 불교가 중국땅 들어온게 육칠백년 지나서야 들어온겨 이게. 

 

동한.의 감영. 이 그리고 서기 97년 에 가는겨. 이때 로마.는  유대전쟁 7년 중에 네로 죽고.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바로 죽고 베스파니우스.와 두 아들 황제. 다음 5현제 시대의 시작 네르바. 때여. 파르티아.도 유프라테스 경계로 로마랑 비등비등할때고. 

 

감영.이 이때 다녀오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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