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아. Bavaria (/bəˈvɛəriə/; German and Bavarian: Bayern [ˈbaɪɐn]), officially the Free State of Bavaria (German and Bavarian: Freistaat Bayern [ˈfʁaɪʃtaːt ˈbaɪɐn])
독일에서 가장 큰 주.야. 바바리아 스와비아.란건 영어식 표현이고. 독일어론 슈바벤. 바이언. bayern. 이걸 바이에른 쓰는데. 바이언.해. 저런게 다 일본애들이 메이지때 익힌 독일발음기호야. バイエルン州(標準ドイツ語・バイエルン語:Freistaat Bayern) 일본애들이 바이에룬. 으로 쓴걸 살짝 바이에른. 하는거걸랑. 우리네는 이런게 정말 너무나 심각한데. 일본애들 소리발음이. 우리네 모든 외국어 표준 번역어야. 아예 빼낄러면 걍 그대로 뻬껴쓰던가. 이 조선족은 말야. 존심을 세우려면 중국처럼 세우던가. 안세우려면 인정하고 그대로 쓰던가. 이건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그러면서 반일놀이. 참 정신병동인데 이땅이.
바바리아. 란 땅이. 독일에선 좀 독특한거야. 왼쪽 슈바벤.은 자잘하게 쪼개진 체 여기서 어찌보면 근대를 출발한거걸랑. 농민전쟁은 슈바벤이야. 요 바로 북쪽이 라인팔라틴.이고 여기도 자잘한 라인강 접한 도시들이걸랑. 먼가 통합적으로 묶인 곳이 아냐 라인강 중상류는.
바바리아.는 달라. 가장 크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로 긴 세월을 온 곳이 바바리아.야.
여긴 좀 독특해 시작이. 주요시작 줄기 부족 다섯 중 하나지만.
The Bavarians emerged in a region north of the Alps, previously inhabited by Celts, which had been part of the Roman provinces of Raetia and Noricum. The Bavarians spoke Old High German, but, unlike other Germanic groups, they probably did not migrate from elsewhere. Rather, they seem to have coalesced out of other groups left behind by the Roman withdrawal late in the 5th century. These peoples may have included the Celtic Boii, some remaining Romans, Marcomanni, Allemanni, Quadi, Thuringians, Goths, Scirians, Rugians, Heruli. The name "Bavarian" ("Baiuvarii") means "Men of Baia" which may indicate Bohemia, the homeland of the Celtic Boii and later of the Marcomanni. They first appear in written sources circa 520
바바리안.이란건 서기 520년에 처음 등장해 문헌으로. 뒤에 프랑크에 하미지 하는거야. 이때 이들은 게르만.이야. 헌데 온갖 잡종 게르만.이고 이 중심은 켈트. 갈리아 사람들인겨. 여긴 갈리아들이 게르만에 쫓겨나지 않아. 그냥 여기저기서 온 게르만이랑 뭉쳐 산겨. 워낙 땅떵어리가 넓어. 여기 갈리아.인들을 보이이 Boii 라고 해.
이 보이이.라는 갈리안들이. 기원전 390년. 첫 로마 약탈을 한 갈리아 부족이야. 아주 로마.를 반년을 약탈하고 로마는 저때 망했어야 하지만. 저 폐허의 로마.에서 오히려 저기서 일어나서 진짜 로마.를 만들기 시작하걸랑.
우리 조선 인간들 같았으면. 수천년 가실때까지. 저 보이이. 갈리아 적폐. 보이이 적폐. 보이이.여 사과해라 배상해라. 이짓만 해대면서 살았을 텐데 말이지.
참 끔찍한 땅빠닥이야 이 조선 땅빠닥이란 곳은. 전 세계에서. 저런 짓들을 하는 애들은 . 인류사 8천년 이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3백만년 동안도 없었어.
세상에 이따위 조선 족. 스런 인간들은 . 그 어디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업을것이고. 이 조선 오백년은 정말 너무나 끔찍한 인간들을 양산을 한건데.
바바리아.땅엔. 고대 보이이. 에 로마. 마르코마니. 알레마니. 콰디. 투링기안. 고쓰. 스키리안. 루기. 헤룰리. 로마인빼고 모~두 딴데서 온 게르만애들이야.
The Boii (Latin plural, singular Boius; Ancient Greek: Βόιοι) were a Gallic tribe of the later Iron Age, attested at various times in Cisalpine Gaul (northern Italy), Pannonia (Hungary), parts of Bavaria, in and around Bohemia(after whom the region is named in most languages; comprising the bulk of the Czech Republic), parts of Poland, and Gallia Narbonensis.
원래의 보이이. 라는 켈트.는 저기서 로마약탈하러 알프스를 넘어가고 그리곤 이탈리아북쪽에도 남지만. 이들이 나중 카이사르가. 게르만때메 대이동하는 스위스의 헬비티.따라서 이 보이이.도 이동하는걸 카이사르가 진정시키고 다시 보내걸랑 살던데로. 해서 헬비티.는 스위스.의 바닥이 되고. 지금도 스위스.는 라틴어로 헬비티.야 국가 이름이. 보이이.도 바바리아에 그냥 여러 게르만인간들에 묻혀 사는겨. 그래서 특히나 여기가 가장 다양한 게르만 가지부족들이 있고 이민족도 같이 있는거걸랑. 어찌보면 짝은 프랑스여.
보이이.가 보헤미아.의 어원이고. 이들이 보헤미아 서남부 숲에서 이리 넘어오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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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hut 란트슈트.가 바바리아 저지대.인데. 이전에 지나면서 본. 란트슈트 후계자 전쟁.이 14세기 지나면서 있걸랑.
대개 독일땅들이 12세기 를 지나면서 공작령 백작령들이 쪼개지면서 타이틀도 같이들 쪼개지고 아주 다양해지면서 1250년 프리드리히2세 황제가 죽고 13세기 말에 8000여개 영지들로 나뉘걸랑. 시장이 활발해지고 부르즈와지.가 급증하고 도시들이 난립하면서 기존 다섯 줄기.의 귀족들이 그 속에서 분열들을 하는겨.
헌데 말야. 이 바바리아.는 이게 극히 짧으면서도 분열이 약해. 저 1250년. 이 가장 중요한 시기야 독일당은. 프리드리히2세 죽음의 시기. 독일과 이탈리아.
이때 바바리아. 가 고지대 저지대. 분리역시 되다가. 이들은 말야. 3백년도 안되는. 서기 1500년에 다시 고지대 뮌헨.이 덧치로. 다 합쳐. 이게 나폴레옹 까지 3백년을 가고. 19세기엔 바바리아 킹덤.으로 나오걸랑. 당시 제일 커.이게.
이 바바리아.가 가장 안정적인 땅이야. 이전 본 그 작은 나싸우.나 헤쎄.를 봐도. 똑같이 12세기에 분리가 막막 되고. 헤쎄는 처음 들고 일어날때 패하곤 더 자잘하게 막막 쪼개지고 이게 근데까지 똑같걸랑. 나싸우도 자잘하게 쪼개진 상태에서 프러시아에 먹힌거고.
슈바벤. 스와비아 지역은 아예 호헨슈타우펜 이후로 걍 자잘하게 나뉘어서리 끝까지 간거고.
거의 유일하게 독일땅에서. 분열 을 다시 합친 지역.이 여기 바바리아.야.
The House of Wittelsbach (German pronunciation: [ˈvɪtəlsbax]) is a European royal family and a German dynasty from Bavaria.
Members of the family reigned as Dukes of Merania (1153–1180/82), Dukes, Electors and Kings of Bavaria (1180–1918), Counts Palatine of the Rhine (1214–1803 and 1816–1918), Margraves of Brandenburg (1323–1373), Counts of Holland, Hainaut and Zeeland (1345–1432), Elector-Archbishops of Cologne (1583–1761), Dukes of Jülich and Berg (1614–1794/1806), Kings of Sweden (1441–1448 and 1654–1720) and Dukes of Bremen-Verden (1654–1719).
The family also provided two Holy Roman Emperors (1328–1347/1742–1745), one King of the Romans (1400–1410), two Anti-Kings of Bohemia (1619–20/1742–43), one King of Hungary (1305–1309), one King of Denmark and Norway (1440–1447) and one King of Greece (1832–1862).
비텔슈바흐 가문. 이들이 1180년 부터 바바리아 듀크.를 하걸랑. 라인 팔라틴.이라는 라인강 중상류 자잘한 도시들이. 이 바바리아의 비텔슈바흐 가문의 땅인겨. 남쪽 접한 슈바벤 이 아니라. 슈바벤.은 독일에서 가장 열세의 지역이야. 여긴 합한적이 없어 프리드리히 대제의 호헨슈타우펜 잠깐 빼곤.
바바리아.가 초기 선제후권.이 없걸랑. 세속영지에. 이상하잖아. 왜냐면. 라인팔라틴.이 바바리아의 비텔슈바흐 가 실세라서 그래. 더하여 쾰른 대주교.자리도 바바리아.가 꿰차게 돼. 그게 퀠른 전쟁.인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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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비텔슈바흐.의 바바리아.가 저기서 엘렉터.가 된건. 바바리아 이름으로. 이건 17세기에 자기들 이름으로 받은겨. 팔라틴도 땅이 좀 떨어져 나가면서 바바리안 서클.의 이름으로 선거권을 갖는거지. 킹덤이 따로 되고. 얘들이 독일 원래 실세야.
독일이 프러시아.때문에. 베를린.이 수도가 되지만. 여기 다음에 큰도시가 함부르크.야. 다 엘베강 줄기야. 세번째 도시.가 뮌헨.이야. 독일 남과 서. 독일 사분의 삼.의 중심은 이 뮌헨인거야. 얘들이 바바리아.라는 이름으로 묵직하게 버텨준겨 뮌헨을 중심으로. 그래서 독일의 정체성의 핵이 이 뮌헨.이야.
The Cologne War (1583–88) was a conflict between Protestant and Catholic factions that devastated the Electorate of Cologne, a historical ecclesiastical principality of the Holy Roman Empire, within present-day North Rhine-Westphalia, in Germany. The war occurred within the context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in Germany and the subsequent Counter-Reformation, and concurrently with the Dutch Revolt and the French Wars of Religion.
Also called the Seneschal's War or the Seneschal Upheaval and occasionally the Sewer War,
쾰른전쟁.이 네덜란드 전쟁. 1568-1648. 프랑스 종교전쟁 1562-98. 때 터진건데. 프랑스는 앙리3세고. 여긴 36년간 계속 피터지는거고. 막판 절정일때 앙리4세가 카톨릭 전향하고서야 끝난거걸랑. 네덜란드는 중심 침묵 오렌지.가 1584년에 암살을 당해. 1580년엔 포르투갈이 스페인께 되고. 여기 네덜란드도 암울한겨 이게.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들은 지형적인 유리함으로 버티는걸랑. 넘어가고.
독일땅은 이미 훨씬 이전.에 루터 대자보 1517 독일 농민전쟁 1524. 로 먼저 했었고. 이게 아우구스부르크 회의 1555.로 각지 영주에 따른 종교.로 1차 정리가 된거걸랑. 그리고 나서 프랑스가 1562에 루터보다 쎈 칼뱅애들이 시작하고. 이걸 받아서 네덜란드에서 1568년 휩쓸린거야.
프랑스.는 물론 저 이전에 메린돌 학살 1545.가 있었고. 이건 부데스.들을 학살한거걸랑. 이때부터 심상치 않은겨.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종교전쟁과 독립전쟁.의 기반은 역설적이게도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가 만들어준건데. 여기서 나름 프로테스탄트.들이 세력을 인정받은 거걸랑. 여기가 프로테스탄트.들의 터전이 된거야. 스위스.에선 츠빙글리가 죽어. 1531. 카펠전투.에서 스위스 카톨릭 캔톤들이랑 전쟁을 하고. 아 이 츠빙글리.가 저 종교개혁 루터니 칼뱅이니 이딴 ,들보다 가장 높이 평가해줘야해. 루터 칼뱅 존녹스. 다 머가튼 애들이야 이게. 저 들이 지금 유럽사에서 프로테스탄트 사가들이 역사를 장악하고 저들을 띄우는거걸랑. 차라리 츠빙글리.와 뮌처.를 더 높게 평가해야해. 저 루터칼뱅녹스 저 들은 츠빙글리 뮌처의 똥보다 못한 이들이야.
The reservatum ecclesiasticum (ecclesiastical reservation) was a measure inserted into the Peace of Augsburg of 1555 to balance the principal proviso of cuius regio, eius religio in ecclesiastical lands. In the hereditary dynastic lands, such as those governed by a prince or a duke, the principle of cuius regio, eius religio (Latin: whose land, his religion) provided that the religion of the people would be the same as that of the territorial ruler.
에클레시아.가 그리스어 모임.이여. 이게 그리스도 교회가 받아서리 교회모임의 교회가 된겨. 교회모임을 리저브.해준겨. 앞으로의 교회.에 대해서 re 리. 강하게. 세바레. 경계그으며 지켜라 한거걸랑.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 이건 외워. 땅의 사람이 그의 종교. 여기서 사람.은 영주.야. 서기 1555년. 카를5세.가 이걸 하고서 은퇴를 해. 그리고 수도원가서 죽어.
저건. 카를 5세가. 진거야. 야박하게 평한다면.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한거걸랑. 로마 카톨릭이 진겨.
The Schmalkaldic War (German: Schmalkaldischer Krieg) refers to the short period of violence from 1546 until 1547 between the forces of Emperor Charles V of the Holy Roman Empire (simultaneously King Charles I of Spain), commanded by Don Fernando Álvarez de Toledo, Duke of Alba, and the Lutheran Schmalkaldic League within the domains of the Holy Roman Empire.
이전 썰한 슈말칼덴 전쟁. 1545-47. 루터의 작센. 헤쎄. 중심의 동맹을 카톨릭동맹인 카를5세.가 이겨 이건.
문제는 말야. 2차 슈말칼덴 전쟁이야.
The Second Schmalkaldic War,[1][2][3] also known as the Princes' Revolt[2] (German: Fürstenaufstand, Fürstenkrieg or Fürstenverschwörung), was an uprising of German Protestant princes led by elector Maurice of Saxony against the Catholic emperor Charles V that broke out in 1552. Historians disagree whether the war concluded the same year with the Peace of Passau in August,[1] or dragged on until the Peace of Augsburg in September 1555.[2][3] The Protestant princes were supported by king Henry II of France, who was a Catholic, but sought to use the opportunity to expand his territory in modern-day Lorraine.[1]
이게 1552년. 5년 후에 벌어진 전쟁인데. 이전 썰 중복 넘어가고. 이전것들을 꼭 읽어야. 다음 모든글들이 제대로 이해가 된다 띠바덜아. 물론 조선족 핏줄들은 보던 말던.
2차.를 얘길 안했는데 말야. 이전 썰햇듯이. 영국 헨리8세와 독일땅 영주들과 북유럽 군주들.의 프로테스탄트.를 취하는건. 종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절대 아녀. 절대절대 아녀. 얘들은 씨바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관시미가 없어 일차적으론. 권력이고 세금이야. 교황한테 넘어가는 자기땅 돈이 아까워. 교황이 임명하는 수도원장 자리도 아깝고. 수도원의 돈은 모두 교황꺼야. 왜 내 땅의 사람들. 내땅의 부.가 저 교황애들에게 가는가.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야. 이에 대한 미끼가. 프로테스탄트.인겨. 루터.니 칼뱅이니 군주들의 일개 무기.일 뿐이야.
저때 가장 핵심인물은 작센의 모리스.여. 이사람은 알베르트 핏줄이야.
작센의 프리드리히.와 동생 요한.과 아들 요한프리드리히 공작들은 에른스트 계열.이야. 셋다. 루터. 지킴이야. 요한부터 스폰한걸 동생과 조카가. 공작에 선제후로 루터를 지킨겨. 오직 작센.의 이익을 위해. 루터.는 마치 저들이 자길 예수 모시듯 망상 착각 짓 하는거고.
모리스.의 알베르트 계열.은 같은 베틴 가문이지만. 땅도 작고. 같은 공작이지만 선제후.권이 없는 허섭한 공작이야.
이 모리스.가 선제후 작센 재들과 영지를 두고 분쟁을 하걸랑. 얘들도 원래 루터파여. 왜? 루터파가 되면 교황 땅이 내땅이 돼. 당근 버리는겨 카톨릭을. 그럼 다른 애들은 왜 못버렸어? 생각의 천장이 두껍꺼나. 그 영지내의 카톨릭 애들이 자기들 가문애들이걸랑. 교황애들께 자기들꺼야. 주교 니 대주교.니 저게 결국 역시 가문 싸움이걸랑.
모리스.가 오직 저 선제후 작센.이 싫은겨. 이사람이 루터파 임에도 불구하고. 카를5세편을 들어. 카톨릭 동맹으로 들어가서 저 선제후 작센과 헤쎄.를 진압하는데 결정적 공로를 세워. 헌데 선제후들은 친척이고. 헤쎄도 장인이야. 다 친해.
카를.이 사형을 시킬라는걸. 모리스.가 막아줘. 모리스.가 요한 프리드리히.와 헤쎄 필리프. 이들이 모두 깜빵에 들어갔걸랑. 안심하라며 곧 풀려날꺼라고.
The Capitulation of Wittenberg (German: Wittenberger Kapitulation) was a treaty in 1547 by which John Frederick I, Elector of Saxony, was compelled to resign the electoral dignity. The Electorate of Saxony and most of his territory, including Wittenberg, passed from the elder, Ernestine line to the cadet branch, the Albertine line of the House of Wettin.
비텐베르크 항복. 비텐베르크.가 루터도시여 지금 닉이. 당시 선제후작센 공작령.의 수도야. 요한프리드리히.가 모리스.에게 선제후 꿘을 넘기는겨. 에른스트계열이 지고 모리스.의 알베르트계열.이 갖고오는겨 이때부터. 이 알베르트 작센이 드레스덴.이야. 작센. 주.야. 왼쪽아래의 니더 작센. 작센 안할트 가 아니라. 오직 작센. 비텐베르크. 도시도 갖고 오고. 선제후권이 드레스덴으로 넘어가는겨. 해서 말야. 지금 작센. 하면 이 보헤미아.와 인접한 이 작센.이 된겨. 이게 나폴레옹때 작센 킹덤.이 짝게 여기가 되고. 작센.이란 이름이. 독일 저지대에서 시작해서 진짜 작센이 엘베 상류 여기가 되버린겨 이때부터.
모리스.가 선제후권을 갖고오고 영토도 더 갖고와. 물론 다 뺏지는 않아. 죽이지도 않아. 다 자기 친척이야. 건너건너 다 자기 친구들이고. 얘들은 조선 빠닥 극동 빠닥 처럼. 슬라미 처럼. 안죽여 상대를 적폐 하면서. 이런 짓은 조선 오백년 내내. 이건 오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후로 이 조선 만 유일한겨. 이 따위 조선 ,들을 여전히 21세기에 지폐로 동전으로 모시는겨. 참 땅빠닥이야.
아 헌데 말이지. 카를5세가 저들을 안 풀어주는겨.
모리스. 입장이 난처해지는겨 이게. 그리고 어쨌거나 자긴 프로테스탄트였걸랑. 단지 옆 친척땅 뺏을라고 족보갈아 탄 듯 보일지언정.
모리스.가 2차 슈말칼덴 전쟁.을 한겨. 카를이 잡힐뻔도 해. 튀롤까지 도망가. 이 모리스 엄청난 인간이야. 그리고 두 인간을 다 풀어줘.
모리스.는 기사도의 기사가 된겨. 의리짱. 프로테스탄트도 인정하지만 카톨릭도 모리스.를 인정해. 약속을 지킨거걸랑. 더하여 감옥에서 풀려난 저 두 인간은. 나머지 생애를 걍 즐겨. 카톨릭 과 프로테스탄트 어쩌고. 선동놀이를 안해. 서로 인정합시다. 그러다 죽어. 이 조선 빠닥 가타쓰믄 씨바 나를 감금시킨 카톨릭 적폐 세력 부들부들. 해 댔을텐데 말야.
저 이후. 나온게 아우구스부르크. 1555.의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여.
카를.도 플랑드르 인간이야. 아 씨바 루터 대자보 붙일때 17세. 농민전쟁에 슈말칼덴 두번.에. 이탈리아 전쟁이 자기 일평생이었고 마무리도 안되고 여전히. 지중해 오스만 전쟁에.
몸엔 통풍 오고.
왜사나 했겄지머. 따위 푸념은 좀 씨바 카를5세님 비하하는거고. 이 사람은 위대한 인간이야 어쨌거나.
헌데 말야. 저기선. 교회령이던 군주령이던. 그 짱이 개종을 하면. 얜 떠나야해. 자기가 개종한걸 그 민들이 역시 개종할 순 없어. 그 지역의 영주와 민들의 종교는 같아야해. 그래야 분쟁이 안생길꺼걸랑. 그리스도가 생긴 이래. 다른 그리스도.를 인정한건 저때가 처음이야. 나머진 이단이었어. 이단 아니다 라며 같이 공존했던 적은 저때가 처음인겨. 해서 분쟁 방지용으로 영주에 따라 민들도 같아라 한거걸랑.
아 헌데 말이지. 쾰른.의 대주교가 말야. 여긴 선제후권이 있는 자리야 더구나. 주교도 아니고 대주교.
아 얘가 말이지. 카톨릭 대주교가 말이지. 바꾼겨.
그것도 말이지. 뜬굼포. 칼뱅이야. 저 조약은 루터.를 인정한거지 칼뱅.을 인정한게 아니걸랑.
그리곤 자기자리에 뻐팅기는겨.
헌데 더 웃긴건 말이지. 또 저건 여자 때메 바꾼겨.
결혼할라고. 대주굔데. 아 씨바 로마 카톨릭은 결혼하면 안되는데 아씨바 루터도 결혼해라 하고 칼뱅은 더 과격한 애들이니 해도 되고. 아 저 여편네 귀족여자가 칼뱅이래. 자기랑 살라믄 칼뱅하래. 그리고 영지를 다 칼뱅으로 바꾸래 저 여편네가.
나중 루쏘.따위 인간,도 말야. 별개 없걸랑. 여자한테. 이모같은 여자 품속에서 이 여자한테 생각이 길들여지고 뜬굼포 루쏘가 된건데. 이 프로테스탄트.가 주도한 사학계가 유럽도 드러워진건데 말야. 루쏘 볼테르. 유치짬뽕이야. 아 증말 얘들 유치해. 물론 이건 당연한 평가야. 쟤들의 시선 폭이 유치할 수 밖에 없어. 지금 시대에 여전히 저따위 애들을 찬양질 배움질 하는건 무시칸겨 그건.
얘 대주교 선거 당시. 후보가 바바리아 공작의 자식이걸랑. 저런 대주교 아이를. 당시 후보 바바리아 사람들이 쳐 없애려는겨. 기가 찬거지. 더군다나 저긴 라인 팔라틴 땅이야. 저긴 바바리아 사람들 이 실세야. 이 바바리아.가 라인팔라틴.은 프로테스탄트.가 많이 되걸랑. 그러면서 떨어져 나가는 시점이걸랑 저때가.
그게 저 쾰른 전쟁.이야.
얘가 볼땐 옆에 프랑스 위그노. 위에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이 도와줄줄 착각을 한거야.
네덜란드.는 저대 가장 치열할때야. 펠리페2세가 포르투갈 먹고. 더 빵빵할때야. 조용 윌리엄도 암살당하고. 가장 본거지 안트베르펜.이 1585년 스페인께 돼. 쾰른전쟁이 1583-88 이야. 프랑스 위그노.도 성 바르텔레미 학살로 지도부 잃고 혼비백산하곤 재정비하까 네덜란드 돕다가 다시 프랑스로 가 위그노들이.
중심은 작센 선제후.야. 모리스. 죽고 다음. 여긴 프로테스탄트가 된겨 슈말칼덴 2차 이기고. 헌데 말야. 저건 명분이 안되는거야. 자기들이 합의하에 만든 조약을 깨는겨 저건. 그걸 자기들이 주도한거고. 얘들이 쟬 도와줄 수가 없어.
Agnes von Mansfeld-Eisleben (1551–1637) was Countess of Mansfeld and the daughter of Johann (Hans) Georg I, of Mansfeld Eisleben. She converted Gebhard, Seneschal of Waldburg, the Prince-Elector of Electorate of Cologne and archbishop of the Diocese of Cologne to the Protestant faith, leading to the Cologne War (1583–1588).
Gebhard Truchsess von Waldburg (10 November 1547 – 31 May 1601[1]) was Archbishop-Elector of Cologne. After pursuing an ecclesiastical career, he won a close election in the Cathedral chapter of Cologne over Ernst of Bavaria.
겝하르트 트루흐세쓰 폰 발트부룩. 여자가 만스펠트.의 아그네스. 네살 어려. 1580년에 만났다고 치고. 33세와 29세. 이사람이 1577 나이 30에 대주교가 되걸랑.
아그네스.의 고향 만스펠트.가 루터.가 자란곳이야. 이여자도 카노니스. 수녀여. 프로테스탄트여. 언닌지 여동생인지가 쾰른에 남작한테 시집을 갔어. 아그네스.도 귀족인겨 이게. 미스트리스.란건 대부분 귀족이야. 우리네 처럼 씨바 노예 여자들을 애인으로. 둘 수가 없어. 이런 짓들은 미국 시작할때 크래커.라는 흑인농장관리 하는 백인나 하던 짓이걸랑.
초야권. 아 증말 골때리는겨. 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중세 영주들이 초야권 어쩌고 했다고. 프로테스탄트들이 또한 저걸 퍼뜨린걸 극동 빠닥 양키에 열등감 절절한 애들이 저딴걸로 자위하걸랑. 거짓말이야 저건.
아그네스.가 러블리한 만스펠트 여자.로 소문이 났어. 조오온나리 이뻤나봐. 얘가 보고 뿅 간겨.
이 전에 쾰른 대주교.가 역시나. 프로테스탄트.로 전향을 해. 이 사람은 대주교 자리를 놓고 떠났어.
헌데 얜. 저 사랑스런 아그네스.가 칼뱅으로 바꾸면서 대주교를 하면서 모든 나라를 칼뱅의 나라로 맹글라는겨.
욕정이냐 종교냐.
욕정에 진겨 씨바.
러스트.가 말야. 러스트풀 디자이어.에서 생기는 러브.와 러스트 없는 러브.는 이게 또한 다른데 말야.
강도 가 다르고. 그 파장이 다른데. 아 이런거 좀 길게 파보믄 재밌을텐데. 구찮고.
저걸 단지 욕정 러스트.만의 문제다. 하긴 좀 야박하걸랑.
해서 플라톤이란 애는 저걸 에로스 함시롱 저게 그야말로 사유를 확장시킨다고도 하걸랑. 저건 맞을껴. 넘어가고.
하튼 다 지고. 대주교자리 바바리아에 넘기고. 얜 스트라스부르.로 옮겨서리 아그네스랑 살다 죽고. 아그네스.는 다른 귀족 보호속에 오래 살다 죽고.
쾰른 전쟁.을 독일에선 저사람 이름 트루흐세쓰 전쟁. 이라 하고. Seneschal 세네셜. 전쟁 이라고도 하는데. 이사람이 발트부륵.의 세네셜.이었걸랑. 이건 집사.라 번역하지만. 중세에 저게 영어에서 스투어드.여. 코트.의 패밀리. 집안 살림 책임자야. 이건 귀족이 하는겨. 아주 높은 자리여 이게.
하튼 걍 저런게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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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éloïse (/ˈɛloʊ.iːz/ or /ˈhɛloʊ.iːz/; French: [e.lɔ.iz]; 1090?[1]/1100–1?[2] – 16 May 1164) was a French nun, writer, scholar, and abbess, best known for her love affair and correspondence with Peter Abélard.
Héloïse is accorded an important place in French literary history and in the development of feminist representation. While few of her letters survive, those that do have been considered a foundational "monument" of French literature from the late thirteenth century onwards. Her correspondence, more erudite than it is erotic, is the Latin basis for the bildungsroman and a model of the classical epistolary genre, which influenced writers as diverse as Madame de Lafayette, Laclos, Rousseau and Dominique Aury.
저 이야길 해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엘루이즈.와 피베르 아벨라르.
엘루이즈.가 12세기 사람이야. 프랑스 문학의 초기 기념비작.이 이여자의 편지들이야. 그야말로 최고라는데. 물론 이땅빠닥에선 당연히 번역 된게 없고.
피에르 아벨라르. 이전 썰. 이사람이 스콜라철학.의 시작의 시작이야.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백년 이전 사람이야. 우리네는 이 스콜라철학.이 정리가 된게 없어 이게. 어마어마 한겨. 이걸 모르고서 서양철학자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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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이즈.가 말야. 출생은 몰라. 부모가 죽었나봐. 삼촌 이 키워. 이사람은 캐논.이면 걍 성직자야. 어떤 그리스도 율법속에서 사는 사람. 수도사 일수도 있고. 이여자가 아주 영특하면서 아름다왔나봐. 그러다가 나이 스물 전후에 만난 사람이 피에르 아벨라르.여.
Additional support for this can also be found in one of Héloïse's own letters, in which she says that she was 22 when she and Abelard were parted.[10]
아벨라르.와 헤어질때 엘루이즈 나이가 22세였대. 아벨라르.가 당시 교회계에서 스타였어.
아르메니아 에서 칠팔세기에 시작한 폴리시언. 사도 파울로스.를 따른다는 이들이 유럽으로 퍼지걸랑. 이게 카타르파. 발도파라는 부데스.등등이 생기는겨. 12세기에 특히나 프랑스에 카타리즘.이 생겨. 그래서 이거 보고 생긴게 도미니크 수도회지만 저걸 막을라고. 저때 티나오는 사람이 피에르 드 브뤼. 브뤼의 피터.여. 아이한테 왜 세례하냐 멀안다고. 이미 이따위 말은 12세기에 나온겨 이미. 이걸 16세기에 다시 꺼낸거고.
저때 저런 이단적 시선을 논리로 반박을 해댄 사람이 이. 피에르 아벨라르여. 스콜라 철학이 이때부터 등장하는겨. 저때 이단의 물결에 대한 사색으로 이성적으로 더 확장을 하는겨 이게. 이 초석이 저 피에르 아벨라르.야.
교회에서 이사람을 애지중지 캐리어관리를 하는겨. 이사람은 사제로 안키워. 학자로 가.
헌데 말야. 엘루이즈.를 알게된거야. 둘이 러브러브에 푹 빠져. 얘가 젊은 나이에 성직에서 고위직을 해. 교수여. 사제는 아니지만 고위직도 결혼 금지야. 아벨라르.가 엘루이즈.와 결혼을 하는데. 이걸 비밀로 부치는거야 얘가. 캐리어 문제로.
엘루이즈.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아. 엘루이즈.는 몰래 결혼한 사이야. 이여자가 수녀원으로 들어가는겨. 삼촌이 이걸 알고 아벨라르.에 반감을 무지 갖는거고. 쟤가 내 조카를 수녀 만들었다고. 그 배후 이야긴 잘 몰라. 대부분 엘루이즈 편지 남은거로만 알수 있어. 이여자 서신집이 명문이라지만.
- 『愛の往復書簡 アベラールとエロイーズ』、沓掛良彦・横山安由美訳、岩波文庫、2009。ISBN 9784003211922
- マリアデレーザ・フマガッリ=ベオニオ=ブロッキエーリ『エロイーズとアベラール ものではなく言葉を』
白崎容子・石岡ひろみ・伊藤博明訳、法政大学出版局・叢書ウニベルシタス、2004。 ISBN 4588006304
일본에서도 이천년 넘어서야 엘루이즈의 편지들이 번역이 돼. 사랑의 왕복서신. 우리나라에 아벨라르.와 엘루이즈 이야긴 혹 있는게 있다면. 일본애들 번역한걸 역시나 보고 알려진거고. 우리넨 모~든게 일본애들 통해서 보는겨 지금 조차도. 너무나 너무나 유럽 이야기가 방대해서. 뭐가 중요하고 좋은지 조차 몰라. 일본애들이 선택하면 그걸 일본애들 번역몰래 보고 한글로 퍼뜨리는 수준이야 이땅이. 이게 지금도 여전하다고 보면 돼.
Peter Abelard (/ˈæb.ə.lɑːrd/; Latin: Petrus Abaelardus or Abailardus; French: Pierre Abélard, pronounced [a.be.laːʁ]; 1079 – 21 April 1142) was a medieval French scholastic philosopher, theologian, and preeminent logician.[2] His love for, and affair with, Héloïse d'Argenteuil has become legendary. The Chambers Biographical Dictionary describes him as "the keenest thinker and boldest theologian of the 12th Century".[3]
피에르 아벨라르.가 중요한 인간이야. 긍정과 부정. 이딴 책도 없어 우리넨. 튀레의 포르퓌리오스.를 주석단 아벨라르의 책. 긍정과 부정. 윤리학. 을 일본애들은 이미 번역을 했지만. 우리는 없어 저런것 조차 번역된게.
교회의 교황과 고위직애들의 러브 이야기들이 또한 거대한 분류인데. 보르자 아빠 알렉산더 6세교황 이야기도 교황되기 이전 이야기가 유명하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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