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未安

 

남에게 대하여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움.

미안을 끼치다 떡을 받아먹으며 고마움보다 미안에 질려 목이 메었다. 진정에서 묻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얼마쯤 미안을 느낀 경애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출처 <<김말봉, 찔레꽃>> 그 젊은이는 미안 이상의 모욕감으로 얼굴이 빨개져서 천장만을 쳐다보며 이따금 한숨을 지었다. 출처 <<최명익, 장삼이사>>

 

미안하다. 아주 대표적으로 잘못 정의된 말이야 이게. 

 

아직 미. 편안 안. 편하지 않다는겨. 그래서 부끄럽다.는 완전한 건너뛰기 해석이고. 

 

이땅바닥 사전은 일본사전 뻬끼기 중국사전뻬끼기 더하기 영영사전 뻬끼기. 에 더해서. 거기 없는 건 지들 개 주작 정의걸랑 저게. 

 

마음이 편하지 않아. 저건 미안한 쪽의 감정이야. 저게 말이 돼?

 

내가 잘못해서 내가 편치 않다. 그래서 미안하다. 야 이 그게 상대에게 니 감정이 편치 않은게 먼상관이냐 그게. 

 

우리말이 끽해야 15세기때의 글자로 어원을 알수 있다고 15세기의 글자표현을 절대시 할 순 없어. 참고할 뿐이야. 저 예문이란 것도 20세기 에야 예문이고. 

 

편치 않다. 하면 무안. 이라 하던지. 불안 이라 하던지 해야지. 미안 은 머야. 

 

무안감 느끼는 무안.은 편안 안이 아니라 얼굴 안.이야. 그야말로 얼굴을 못드는겨 쪽팔려서. 차라리 저게 맞아. 사과의 표현으로. 내가 무안해. 아 내가 얼굴이 없을 지경이야. 너에게 얼굴을 못들겠어 쪽팔려서.

 

 

 

미안.은 저 정의대로라면, 이건 상대가 듣고는 불쾌한 말이야. 니가 잘못해서 니 마음이 편치 않은게 대체 나에게 먼상관이냐 이새꺄 하며 욕처먹을 말이야 저건. 없을 무 .도 아니고 아니불 도 아니고. 아직 미. 야. 그럼 곧 편해질 마음이네? 

 

 

저건. 한문 아직 미. 에 편안 안. 이 아냐. 완전 조작질 해석이야.

 

 

중국애들은. 抱歉 빠오 치엔. 하는겨. 미안해. 真抱歉 젼빠오치엔. 정말 미안해. 抱歉哦 빠오치엔오. 아, 미안해 歉意 치엔이. 유감입니다. 

 

겸. 歉 이란 말이. 

,既是声旁也是形旁,表示收割  

欠,叹息

 

收割 수할. 쇼우꺼. 우리네는 수확 한다하고. 쟤들은 수할 한다고 해. 가을에 벼베는겨 이게. 가을 수확시기에. 탄식 하는 소리야. 흉년이어서. 쟤들은 흉년을 겸년. 이라해. 

 

겸허히 겸허하다. 할때. 저 겸이란 글자에 말씀언.이야. 이건 뒤에 탄식이 생략이 된겨. 부족함을 말하는겨. 

 

겸직의 겸.의 저 겸은 두개고 동시라 여럿 의미를 더하지만 원뜻은 부족한거야 저게. 한글자가 양단의 뜻을 취해

 

중국도. 미안할땐 자기가 부족하다. 란 걸 인정하는 상태야. 

 

ごめんなさい[御免なさい] 済みません

 

일본애들은 고멘나사이. 스미마셍. 저건 정중체. 丁寧体 얘들말은 테이네이. 정녕체. 반말로 고멘. 스미나이. 

 

고메나사이 할때. 免 면. 이 면하게 해줘. 사면해줘. 란겨. 갑골에 사람에게 모자를 씌워주는 형상이야. 군주가 씌워주는 고급모자야. 투명인간이 되는겨. 죄를 사해줘. 사면하는겨 저게. 고멘나사이. 내 죄를 씻어주세요. 

 

스미마셍. 스미. 済み 이건 끝. 이야. 마셍. 나이. 끝이 없습니다요 끝이없넹. 반어야 이건. 아 왜 난 이리 잘못을 계속 하냐 이거. 반어적 표현으로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하는겨. 

 

 

他人に対して義理がたつ。申し訳がたつ。多く打ち消し反語の形で用いる。 「謝って-・むことではない」 「これで-・むと思ったら大まちがいだぞ」 〔「済ます」に対す自動詞〕 → すまない ・ すみません

 

고멘나사이. 나 스미마셍. 이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겨 저건. 저게 미안하다는 거야. 사과하는거고.

 

 

謝る 아야마루. しゃざい[謝罪]  샤자이. 陳謝 친샤. 

 

문어체로 저걸. 아야마루. 샤자이. 친샤. 하는겨. 샤. 아야마. 라는게. 뒤에 죄. 라는 걸 염두해둔. 샤. 아야마.야. 

 

사. 謝 라는건. 씨에. 씨에씨에 감사하다 할때 중국가 쓰지만. 고대에 군주에게 벼슬자리 받고 떠나는 관리가 인사하는 말이야. 감사 하다로 우리네는 쓰는겨. 벼슬 줘서 고맙다는 느낌의 말.로 쓸때의 사. 아야마. 씨에. 가 있고. 죄지어서 중앙관직에서 지방 먼 곳으로 갈때의 느낌은 사죄.의 사.야. 한 단어에 양단의 의미가 있는겨.

 

 

사과. 한다는건. 과.를 인정하는겨. 지나침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말이 사과.야. 저 씨에. 아야마. 

 

영어 sorry 쏘리.는 이게 달라 어법들이

 

predicative Feeling sad or distressed through sympathy with someone else's misfortune.

‘I was sorry to hear about what happened to your family’

predicative Feeling regret or penitence.

‘he said he was sorry he had upset me’

 

 

 

attributive In a poor or pitiful state.

 

 
 

 

‘he looks a sorry sight with his broken jaw’

 

세가지야. 쏘리 쓸때는. 남의 불행에 공감의 안타까운 감정. 상대가 안좋은 상황의 표현. 그리고 우리말의 미안하다 사과의 쏘리. 

 

너의 가족의 불행을 듣고서 난 마음이 아파.의 쏘리.

그사람 턱이 다쳐서 표정이 안 좋아. 의 쏘리.

그가 나를 당황케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의 쏘리.

 

쏘리.란 말을 크게 두가지로 쓰는겨. 미안하다 에 더하여. 마음이나 상태가 안좋다.여. 미안하다.는 주 감정이 아냐. 불편하다 에서 그 다음에 쓰기 시작한거야.

 

남에게 사과할때 쏘리. 하는건. 내가 마음이 슬픈겨. 이 바닥감정엔 내가 잘못했다 라는 인정.을 상대에게 인식을 시키는거야. 

 

Origin

Old English sārig ‘pained, distressed’, of West Germanic origin, from the base of the noun sore. The shortening of the root vowel has given the word an apparent connection with the unrelated sorrow.

 

쏘리.란 말이. 쏘로우 sorrow 란 슬픔에서 왔을 꺼다. 라고 추정을 하는데. 근거는 없어 이건. 둘다 게르만 표현이야. 로마 그리스는 저따위 단어는 안써

 

 

 

Origin

Mid 16th century (denoting a formal defence against an accusation): from French apologie, or via late Latin from Greek apologia ‘a speech in one's own defence’, from apo ‘away’ + -logia (see -logy).

어팔러지. apology 라는게 그리스 로마 말이야. 마폴로기아. 아포. 가 떨어져나간거고. 로기아. 가 학문 할때 접사 로지. 로기아. 라는건. 신탁이야. 신의 말이야 원뜻이. 이게 학문.이라는 접사가 되는겨. 로고스 logos 가 로기아. logia 와 상통하는거고. 로고스.가 말. word 이고 이성. 이 되는겨. 이성을 벗어난겨. 정상을 벗어난겨. 

 

 

 

 

‘we apologize to him for our error’

 

아주 공식적인 사과야. 내가 이성을 벗어나고 신의 잣대를 벗어났소. 가 어팔러자이즈. 하는겨. 

 

 

 

세상의 모든 미안함.의 표현들은. 내가 잘못했다. 를 포함해서. 그래서 용서를 구합니다. 의 바램이 있는 감정이야. 우선 가장 큰건. 내가 잘못했다.라는걸 상대에게 인지를 시키는겨.

 

 

 

 

아직 미. 편안 안. 제가 아직 편치 못합니다.

 

 

 

 

이게 먼 개소리냐 이게. 

 

 

내가 잘못해서 아직 편치 못하다? 이런 해석도 웃긴겨. 그럴려면 아니 불. 없을 무. 를 썼겠지. 하필 아직 미. 를 써왔겠니.

 

 

미련. 이 있다. 할때 말야. 저게 아직 미.에 단련 련. 이야. 아직 단련이 안된겨. 그래서 미련 이 있는겨. 이전 감정의 끌림에. 

 

미안. 은 전혀 저따위 아직 미 에 편안 안 이 아냐. 

 

 

 

 

 

우리가 미안해. 하면 상대가 인정하고 끄덕 하는 이 감정의 교감이 이천년 된 말이야 이 미안해. 란건. 

 

이전 썰한 고마와 고맙습니다 와 함께.  고마. 라는 말은 높은 말이야. 해서 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 감사.하던 것과는 좀 달라 이게. 저건 정확히 한문을 그냥 소리발음 갖고 온거고. 중국와 쪽빨이도 쓰는 말이야. 헌데 우리네는 고맙습니다. 고마.가 우리네만 쓰던 말이야 이건.

 

 

미안. 이란것도. 정확하게. 내가 잘못했다. 부족하다. 라는 뜻으로 저걸 정의를 해야해. 그 범위에서 어원을 찾아야 해.

 

 

저건 아직 미. 가 아냐. 

 

미미 하다. 미세 하다.의 작을 미야. 

 

 

안. 이란건. 아니다.의 안. 이야. 안해. 안 좋아. 아니.라는 말을 우리네는 안. 으로 줄여서 쓴거야 저럴. 

 

미안. 하다는 건. 미. 하고 안. 하다는 겨.

 

 

내가. 미미했어 부족했어. 내가 아니였어. 옳은게 아니였어. 란 말이야. 내가 부족하고(중국어 겸.치엔) 아니였어.

 

내가 미했어. 내가 안했어. 이게 미안했어 가 미안해 하고 미안. 하는거야 이건. 그래서 저 미안.을 들으면 상대가 마음이 풀어지는겨. 우리네는 이천년 이상을 저 단어의 감정으로 저 단어를 쓴거야. 저걸 . 잘못한 이가 "내맘이 아직 편치 않아" "니가 용서해주면 내마음이 편해져" 저따위 해석으로 저걸 써왔겠냐. 

 

 

말이란건 서로들의 감정이 긴 세월간 납득이 서로 되서 써온거야. 저따위 의미의 단어는 쓰여질 수가 없어.

 

 

저게 아주 대표적인 국어사전.의 잘못된 정의야 저게. 미안. 이란 말은. 

 

 

우리네 국어사전은 아주 매우 끔찍한 수준이야 저 수준 이하의 해석들이 말야. 

 

 

아주 아주 창피해. 국어사전만 보면. 헌데 저게 이땅빠닥의 지쩍 수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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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이란게 재밌어 이게.

 

사과.도 사과할께. 가 한문이랑 섞여서 쓰지만. 상대에게. 내가 사과했어. 라고는 쓰지않아. 내가 사과할께. 하는거야이건 의도적 어감이 들어가면서. 과함을 말할께 하걸랑. 

 

미안했어. 이건. 미안해. 도 말이 되걸랑. 내가 보잘것 없고. 아니였어. 지금도 보잘것 없는 미.한 존재고. 아니.한 존재야. 라는 현재진행형으로도 말이 통하는겨 이건. 우리네는 저런 정서로 말을 쓰는거야.

 

저건 절대 말야. 내가 아직 편치 않아. 라는 정서로 저걸 쓰는게. 말이 되냐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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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적폐판사 놀이. 야 정말 이땅빠닥은 정말 너무나 너무나 개후진겨 이게. 

 

이 조선 이란 두 글자는. 전 세계사 전 인류사.에서 가장 너무나 너무나 개후진 역사.를 조선건국이래 7백년째 갖고 있는 땅이걸랑. 아 정말 인종사에서 이따위 개그지 들의 나라가. 이썼던 적이 없어. 앞으로도 유일무이할껴. 아 정말 너무나 창피한겨 이게. 저 절정이 북조선.이란 정말 세계사에서 가장 기괴한 집단이고. 저따위 들이 우리네 한민족 해대면서 우리민족 끼리 하는거고. 아 증말 끔찍한 땅빠닥이다 여기가. 

 

미세먼지로 짱께한텐 아무소리도 못하고. 중국야 지들의 중국몽의 님들이니.

 

어찌 이 지구란 땅빠닥에 조선 이란 두글자에 목메고 해 대는 들이 여전히 있는지. 저따위 상징들을 지폐와 동전으로 모시고 동상으로 쳐 모시고 . 고려가 운다 고려가 울어 서기 1100년 전의 고려가.

 

 

The Ottoman–Hungarian Wars were a series of battles between the Ottoman Empire and the medieval Kingdom of Hungary

1366–1526
오스만 헝가리 전쟁을 1366년부터 모하츠 전투 1526 까지 160년.으로 보는데. 헝가리가 오스만이랑 직접 붙는건 니코폴리스 십자군 전투 1396년. 이야. 이 십자군단의 중심은 헝가리여. 여기에 불가리아의 마지막 짜르. 비딘.의 스트랏시미르.가 합세하는거고. 이 전쟁후 이 짜르는 바예지드1세에게 잡혀서 죽으면서 불가리아는 끝 난거고.

Louis annexed Moldavia in 1352 and established a vassal principality there, before conquering Vidin in 1365. The rulers of Serbia, Walachia, Moldavia, and Bulgaria became his vassals. They regarded powerful Hungary as a potential menace to their national identity. For this reason, Hungary could never regard the Serbs and Wallachians as reliable allies in subsequent wars against the Turks.

 

헝가리 카페 앙주. 루이 대제.가 몰도바.를 지배한게 서기 1352년. 이때부터 몰도바.는 헝가리의 바쌀. 임차인이 된겨. 바쌀은 사람.이고. 피프.가 권리포함 영지.이고. 바쌀이 맹세하는게 필티 fealty 이고. 이 맹세하는 의식.이 하미지. homage 

 

몰도바.는 저 이후 다음에 야기에워의 시작 요가일로.의 폴란드에 하미지를 하고. 다음에 오스만에 하미지 하는데. 오스만이 비잔틴 넘어 들어올때 발칸 북쪽에서 헝가리가 쳐 내려오는겨.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도바 불가리아는 오스만이 오기전에 헝가리 루이에게 하미지를 했던거야. 헝가리는 마갸르족이야. 세르비아 불가리아는 슬라브고 왈라키아 몰도바는 블라크라는 왈라키안이라는 로망스야. 얘들은 서로 달라 태생부터가. 헝가리도 쟤들을 동맹으로 생각을 안했다는거야 투르크를 상대할때. 

 

In the spring of 1365, Louis headed a campaign against the Bulgarian Tsardom of Vidin and its ruler Ivan Sratsimir. He seized the city of Vidin on 2 May 1365; the region was under Hungarian rule until 1369

 

불가리아.는 1368에 타르노보의 짜르가 점령되고 죽었어. 나머지 왼쪽 위 비딘.의 스트랏시미르.만 남아. 여길 함락한게 1365년이야 헝가리가. 니코폴리스 전투까지 3년간 헝가리 땅이었다는거지. 그러다 패하고 오스만이 여기까지 다 지배한거야. 

 

1365년에 비딘.을 함락하고. 이 다음해 1366년 부터 오스만이랑 전투를 한겨 불가리아 땅에서. 해서 시작이 1366년 부터야.

 

 

무라드1세.가 코소보전투 1389년. 세르비아들이랑 싸우다 죽을때까지. 누비고. 아들 바에지드1세.가 니코폴리스 전투로 불가리아를 지도에서 없애고. 다음에 티무르.랑 동쪽에서 싸우다가 포로되서 잡혀가서 죽고. 아들 메메드1세.가 십년 내전하고 이때 발칸은 비잔틴과 슬라브는 다시 땅들 회복하는거고. 다음 무라드2세때 다시 발칸을 이전 수준으로 다지는거걸랑. 베네치아랑 갈리폴리 텟살로니카 에서 싸우고 북쪽으로 쳐 올라가면서 무라드2세를 막는건 이제 헝가리야. 왼쪽 세르비아는 헝가리에 하미지를 한거야 오스만 내전때. 
무라드2세의 바르나 십자군 전투 1444년의 상대는 헝가리야. 헝가리 킹을 겸한 폴란드고. 1448년 코소보 전투.의 상대 역시 헝가리야. 훈야디 가문 마티아스의 아빠가 상대를 해. 무라드2세가 이겨. 그리고 아래 알바니아 반란 진압하다가 병으로 죽어. 아들 메메드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코소보 위의 베오그라드 까지 쳐 올라가. 베오그라드 전투 1456년.을 상대하는것도 헝가리 훈야디야. 버텨 이걸. 
이때 등장하는 인간이 드라큘라 백작 캐릭 왈라키아의 블라드3세.고 얘가 오스만 병력 2만명을 임페일러시키고. 메메드2세는 쫄아서리 방향 틀어 오른쪽 위 몰도바 점령길 다녀오고. 블라드3세는 자기 코트에서 쫓겨나서 마티아스의 감옥에 있다가, 다시 쳐들어오는 오스만 막아야 한다고 몰도바의 위대한 스티브가 마티아스에 청원넣어서 드라큘라 나오고. 메메드2세는 몰도바 너머 크림 타타르 애들이랑 연합해서 몰도바까지 점령하고. 이게 1476년.까지야. 여기 참전했던것도 헝가리야.
메메드2세가. 베오그라드.를 다시 가는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틀어서 다뉴브강을 건너서 트랜실베니아로 향하는겨. 브레드필드 전투 1479년. 마티아스가 병력 보내서 이걸 막아. 하미지한 세르비아 군대랑 함께. 다음해 이탈리아 뒷굽 오트란토 침입해 점령하는것도 마티아스가 병력 보내서 싸워주는겨. 마티아스는 이 와중에 이전 보헤미아 킹덤과 십년 전쟁하고, 아래로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리 나중 비엔나까지 점령해. 이 마티아스는 엄청난 인간이야.
다음 바에지드2세.는 마티아스.랑 10년 휴전을 해. 형제와의 내전에. 오른쪽 이집트 맘룩이 레반트 너머까지 침입하걸랑. 이거 막고 흑해쪽 몰도바.와 크림 타타르.들이 항상 문제야. 여기 진압에. 다음 셀림1세.는 동쪽으로 가는겨 이집트까지. 그러면서 50년 정도가 서쪽이 좀 편했던거야 오스만이 쉬면서 오른쪽 신경쓰느라.
다시 티나온게 다음 위대한 술레이만 이야. 1520-1566. 
이전에 저긴 베오그라드에서 막혔걸랑 1456년 메메드2세때. 1522년.에 여길 함락을 해. 70년 만에 와서 얘가 먹은겨. 베오그라드.가 세르비아.의 중부 맨 위야. 여기의 다뉴브강 따라 쭉 올라가면 서북쪽에 모하츠. 모하치.가 있는겨 접경 헝가리 안쪽에. 여기서의 전쟁이 1526년 모하츠 전투야. 그리고 40년 후 1566년. 술레이만 이 죽는 시게트바 전투.가 여기 바로 왼쪽이야. 모하츠 아래 오른쪽 접경이 세르비아고 왼쪽접경이 크로아티아야. 
모하츠 전투때 헝가리 루이2세가 죽으면서 야기에워 핏줄 끊기고 매형인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나중 황제.가 와서 이제 합스부르크.의 이름으로 오스만이랑 싸우게 되는데.

Ferdinand I (SpanishFernando I) (10 March 1503 – 25 July 1564) was Holy Roman Emperor from 1558, king of Bohemia and Hungary from 1526, and king of Croatia from 1527 until his death in 1564

 

페르디난트1세.가 황제에 오르는건 1558년.이야 형 카를5세 다음에. 루이2세 야기에워가 죽고 헝가리 킹에 보헤미아 킹한건 1526년이야. 이때부터 육지에서 합스부르크가 오스만을 상대를 하는겨. 이게 2백년이야. 이와 동시에 바다에선 신성로마황제 이름으로 카를5세가 지중해에서 오스만이랑 전쟁인거고. 

 

Mediterranean

 

Cephalonia (1500) Balearics (1501) Pantelleria (1515) Algiers (1516) Tlemcen (1517) Algiers (1529) Formentera (1529) Coron (1532-34) Tunis (1535) Mahón (1535) Preveza (1538) Castelnuovo (1539) Girolata (1540) Alborán (1540) Algiers (1541) Nice (1543) Mahdiye (1550) Gozo (1551) Tripoli (1551) Ponza (1552) Corsica (1553-59) Bougie (1555) Oran (1556) Balearics (1558) Mostaganem (1558) Djerba (1560) Orán and Mers-el-Kébir (1563) Vélez de la Gomera (1564) Malta (1565) Lepanto (1571) Tunis (1574) Fez (1576) Cape Corvo (1613) Malta (1614) Cape Celidonia (1616)
합스부르크.와 오스만의 지중해 전쟁들이야. 카를의 이름으로 합스부르크가 저걸 주도하거나 베네치아를 지원해서 다 한겨 저게. 1515년 알제리 전투. 다음해 Tlemcen 도 알제리. 이건 붉은수염 하이레든 형제들이랑 한겨. 이들이 알제리를 취하고 오스만에 하미지하고 오스만 해군 사령관이 되는거고. 저건 합스부르크.의 카를이 스페인의 돈으로 저걸 한거야. 
저러다가 1526년 부터는 헝가리에서 동생 페르디난트.가 킹이 되면서 이것도 스페인의 돈으로 치루는겨. 오스만 합스부르크 1526년 부터 지만. 서기 1500년 부터야 이게. 카를이 이탈리아 전쟁하면서 오스만을 바다에서 막는겨 동시에. 이런 오스만과 프랑스가 연합을 또 한거고. 지금 서양문명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 만든거야.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금은 돈들이 저기에 다 쓰인거야. 쟤들은 스페인에 빚을 진거야 지금보면. 아니면 오스만 투르크가 저 유럽을 먹은겨. 전 세상은 이슬람이 되는겨. 저건 죽음의 종교야 저건. 문화의 다양성 개소리하고 자빠진거지. 
모하츠 전투 1526년 을 이기고. 바로 북상을 해서 오스만이 비엔나.를 가는겨.

The Siege of Vienna in 1529 was the first attempt by the Ottoman Empire, led by Suleiman the Magnificent, to capture the city of Vienna, Austria.

 

1529년. 즉 모하츠.에서 쭉 올라와서리 헝가리가 얘 손에 들어온겨. 여길 지나서리 위 비엔나를 포위하고는 점령을 못하고 다시 빠꾸를 한거야. 1683년인 150년 후에 다시 와서 대전투를 벌이는겨 비엔나에서. 이때 오스만이 지고 쇠하는건데. 

 

The Eastern Hungarian Kingdom (Hungarian: Keleti Magyar Királyság) is a modern term used by historians to designate the realm of John Zápolya and his son John Sigismund Zápolya, who contested the claims of the House of Habsburg to rule the Kingdom of Hungary from 1526 to 1570. 

 

막시밀리언 황제의 손자녀와 헝가리 브와디스와프의 아들딸과 합동결혼하고. 루이2세가 죽고 누나 앤의 신랑인 페르디난트가 킹을 하려는데. 헝가리의 귀족들은 반대를 하는겨. 사포야이의 존(야노스).을 킹으로 추대해. 얜 슬라보니아 사람이고 트랜실베니아의 보이보드.야 귀족신흥집안이야. 이사람 마누라가 야기에워 핏줄이걸랑. 

 

페르디난트.는 세가 약한겨 헝가리에서. 수도 부다.에서 사포야이 야노스.가 킹을 자처해. 부다페스트.가 다뉴브강이 위에서 아래로 흘르면서 도시를 갈라. 왼쪽이 부다. 오른쪽이 페스트. 이강이 헝가리를 관통해서 쭉 내려가서 베오그라드쪽으로 가는겨. 

 

이때 헝가리 귀족애들과 사포야이 야노스.가 오스만 술레이만.에게 하미지를 하는겨. 우리 헝가리가 니덜 바쌀 임차인이 되겄다고. 페르디난트.를 막아달라고 하는거지. 이때 헝가리가 동서로 나뉘는겨. 해서 사포야이 가문이 있던 사오십년을 동헝가리 킹덤.이라고 불러줘 요즘와서. 해서 이때 오스만이 쉽게 모하츠에서 저 비엔나 까지를 갈 수가 있었던거야.

 

The Habsburgs and their allies and the Ottoman Empire engaged in a series of military campaigns against one another in Hungary between 1526 and 1568

 

이게 오스만 합스부르크의 육지전쟁 시작 1526년부터 저 부자가 킹하면서 배후에 오스만이 싸워준게 리틀워 40여년 전쟁.이라해. 걍 자잘자잘하게 헝가리 전국토에서 싸운거야. 이때 경계는 헝가리 동서 가운데야. 전쟁이 승부가 안나.

 

저 막판에 벌어진게 이전 썰한 크로아티아의 즈링스키.가 싸웠던 1566년 시게트바 전투야. 술레이만이 여기서 죽어. 이전이 몰타 대포위전에서 병원기사단이 버팅기는거고.


저 사오십년 기간은. 1527년 로마약탈.이고 이전해에는 독일 농민전쟁이고. 프로테스탄트 리그 슈말칼텐과의 전쟁이 1546-7이야. 이다음해 또 2차 슈말칼덴 전쟁이고. 저기서 싸우다가 헝가리로도 오는겨 병력이. 카를이 바쁜겨 동생이 헝가리킹 되고부터는 더해.

Peace was finally concluded in Edirne in 1568, and renewed in 1576, 1584, and 1591. War would not again break out between the Habsburgs and Ottomans until 1593, in the Long Turkish War

 

 

슐레이만이 죽고. 페르디난트랑 협정맺아. 1568년. 갱신은 20여년을 하는겨. 

 

이후 터진게 레판토 전투야. 1571년. 최대규모의 해전이야. 스페인이 물자를 대고 베네치아가 주도하고. 오스만이 패하지만 저짝도 손실크고.

 

The Fourth Ottoman–Venetian War, also known as the War of Cyprus (ItalianGuerra di Cipro) was fought between 1570 and 1573. It was waged between the Ottoman Empire and the Republic of Venice, the latter joined by the Holy League, a coalition of Christian states formed under the auspices of the Pope, which included Spain (with Naples and Sicily), the Republic of Genoa, the Duchy of Savoy, the Knights Hospitaller, the Grand Duchy of Tuscany, and other Italian states.

 

레판토 해전.이 오스만 베네치아 4차전쟁. 시작에 터진겨 

 

The Siege of Famagusta happened in Venetian-controlled Famagusta, the last Christian possession in Cyprus. Famagusta fell to the Ottomans in August 1571 after a siege that lasted nearly a year

 

파마구스타 함락. 키프러스 동쪽해변이야. 키프러스가 9500제곱키로. 오스만이 서고 메메드2세가 아나톨리아땅도 통일하고나서. 이 아들 바예지드2세 부터 여길 쳐들어와 1489년. 80년을 버틴겨 베네치아가. 키프러스 전쟁의 마지막 전장이 파마구스타. 오스만 20만명 베네치아 8500명. 베네치아 군이 싸그리 다 죽어. 900명 포로 외에. 오스만은 5만이 사상자야. 이 베네치아 공화국은 정말 위대한 나라야 세계사에서. 
이걸 뺏기고 복수전하는게 레판토해전이야. 그리스도 연합군에 스페인이 주축이지만 베네치아가 배후에서 지휘를 하는겨 이건.

 

The Long Turkish War or Thirteen Years' War was an indecisive land war between the Habsburg Monarchy and the Ottoman Empire, primarily over the Principalities of WallachiaTransylvania and Moldavia.[4] It was waged from 1593 to 1606 but in Europe it is sometimes called the Fifteen Years War, reckoning from the 1591–92 Turkish campaign that captured Bihać.

 

1593년-1606년 13년 전쟁. 투르크가 보스니아 왼쪽 끝 비하치. 크로아티아와 경계야. 여길 점령하면서의 전쟁. 왈라키아 트렌실베니아 몰도바 전역에서 오스만에 반기를 드는거고 여기에 합스부르크가 지원을 하는겨. 

 

여기서도 오스만이. 헝가리를 벗어나서 넘어가지를 못하는거야 오스트리아로. 헝가리에서도 왼쪽 이상을 더 못가 얘들이. 

 

Stephen Bocskai or Bocskay (HungarianBocskai István; 1 January 1557 – 29 December 1606) was Prince of Transylvania and Hungary from 1605 to 1606. 

 

저때는 사포야이 야노스 의 동헝가리.가 아들대에서 끊겼어. 야노스가 페르디난트에게 자기 죽으면 헝가리 너가 가져. 했는데 그 이후 마침 아들이 생긴겨. 죽고 아기가 킹이 되고 섭정이 들어서. 얘 이후에 끊기고서리 헝가리 귀족애가 트랜실베니아에서 독립해서리 헝가리 킹을 자처해. 그리곤 저 13년 전쟁때 패하고 죽는겨. 이때서야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킹.을 독점하면서 오스만이랑 전쟁하는겨. 

 

The Cretan War (GreekΚρητικός ΠόλεμοςTurkishGirit'in Fethi) or War of Candia (ItalianGuerra di CandiaSerbo-CroatianKandijski rat), is the name given to the Fifth Ottoman–Venetian War, a conflict between the Republic of Veniceand her allies (chief among them the Knights of Malta, the Papal States and France) against the Ottoman Empire and the Barbary States, because it was largely fought over the island of Crete, Venice's largest and richest overseas possession. The war lasted from 1645 to 1669 and was fought in Crete, especially in the city of Candia, and in numerous naval engagements and raids around the Aegean Sea, with Dalmatia providing a secondary theater of operations.

 

오스만 베네치아 5번째 전쟁.이 크레테 섬을 중심으로 에개해.에서 벌어져. 크레테섬은 8천제곱 좀 넘어. 1645-69. 24년. 달마시아 해변을 갖고오지만 크레테.를 뺏기는겨 오스만에게. 베네치아가 멀 더 해보려해도. 물자가 더이상 안되고 기력이 딸려. 저 인구 20만도 안되는 땅의 나라가. 

Transylvania, the Eastern part of the former Hungarian Kingdom, gained semi-independence in 1526, while paying tribute to the Ottoman Empire. In 1657, Transylvania felt strong enough to attack the Tatars to the East (then the Empire's vassals), and later the Ottoman Empire itself, which had come to the Tatars' defence. The war lasted until 1662, ending in defeat for the Hungarians. The Western part of the Hungarian Kingdom (Partium) was annexed and placed under direct Ottoman control. At the same time, there was another campaign against Austria between 1663 and 1664. Despite being defeated in the Battle of Saint Gotthard on 1 August 1664 by Raimondo Montecuccoli, the Ottomans secured recognition of their conquest of Nové Zámky in the Peace of Vasvár with Austria, marking the greatest territorial extent of Ottoman rule in the former Hungarian Kingdom.[12]

 

헝가리는. 사포야이 야노스 1526년 에 오스만에 하미지 하면서. 동쪽 헝가리는 오스만에 들어간겨. 여기에 말야. 왈라키아 왼쪽 카르파티아 산맥 휘감은 안쪽땅지역인 트랜실베니아.도 오스만에 들어간겨. 헝가리를 반반 나눈게 아니라. 삼분의 이 이상이 오스만에게 간겨. 이상태에서 백여년 흐른거야 헝가리쪽은. 

 

오스만애들이 용병으로 쓰는 애들이 크림반도 타타르족이야. 몰도바 오른쪽 우크라이나 해변. 몽골에서 온 타타르가 아냐. 몽골 올때 서양애들은 쟤들을 타타르 했걸랑. 저때부터 스텝애들은 타타르야. 몽골 떠나고 저기 스텝애들도 걍 타타르야 이름만. 이들이 군사력으론 최고야. 얘들이 나중 폴란드의 용병에 러시아의 용병이 되면서 함부로 못하는 존재들이 돼. 이때는 오스만의 용병이야. 헝가리애들이 독립하려는걸 얘들 내세워서 진압을 하고 아예 서쪽 헝가리도 더 확보를 하는거야. 백년만에 서쪽 헝가리를 먹은겨. 그리고나서. 위의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가는겨. 이 막바지가 1683년 비엔나 전쟁.이야 150년 만에 다시. 여기서 오스만이 대패하면서 오스만은 끝의 시작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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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dred Years' Croatian–Ottoman War (Croatian: Stogodišnji hrvatsko-turski rat,[1][2] Stogodišnji rat protiv Turaka,[3][4] Stogodišnji rat s Osmanlijama[5]) is the name for a sequence of conflicts, mostly of relatively low-intensity, ("Small War", Croatian: Mali rat[2]) between the Ottoman Empire and the medieval Kingdom of Croatia (ruled by the Jagiellon and Zápolya dynasties), and the later Habsburg Kingdom of Croatia.

 

1493 to 1593 (100 years)
크로아티아와 오스만의 백년전쟁.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의 유니온에 합스부르크의 유니온 이었지만. 유니온 이라는게 하미지 하는 속국이 아니야. 식민지 개념이 아니야. 단지 킹 자리만 한사람이 같이 하는겨. 그 땅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유지가 돼. 귀족들도 그대로 그땅 사람들이야. 크로아티아의 반.이란 귀족도 유니온때도 반.이야. 전쟁은 얘들이 다 하는겨. 

The Battle of Krbava Field (Croatian: Bitka na Krbavskom polju, Hungarian: Korbávmezei csata, Turkish: Krbava Muharebesi) was fought between the Ottoman Empire of Bayezid II and an army of the Kingdom of Croatia, at the time in personal union with the Kingdom of Hungary, on 9 September 1493, in the Krbava field, a part of the Lika region in Croatia.

 

시작이 크르바 전투. 크로아티아 프라퍼.라는 가운데 지역의 남부야. 바로 오른쪽이 보스니아야. 오스만의 경기병대 일만명대 크로아티아의 기사들 보병들 1만의 전투야. 모두 크로아티아 귀족과 병력이야. 여기서 크로아티아가 패해. 서기 1493년. 이걸 시작으로 백년간 전역에서 오스만이랑 싸우는겨. 

 

The Battle of Sisak (Croatian: Bitka kod Siska; Slovene: Bitka pri Sisku; German: Schlacht bei Sissek; Turkish: Kulpa Bozgunu) was fought on 22 June 1593 between Ottoman regional forces of Telli Hasan Pasha, a notable commander (Beglerbeg) of the Eyalet of Bosnia, and a combined Christian army from the Habsburg lands, mainly Kingdom of Croatiaand Inner Austria. The battle took place at Sisak, central Croatia, at the confluence of the rivers Sava and Kupa.

 

마지막 전투가 백년 후 시삭전투 1593년. 크르바 전투했던 곳의 오른쪽. 자그레브 아래야. 보스니아 에양레트.의 베이. 파샤. 병력이 1만5천내외.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5천 내외. 8천의 오스만병력이 죽어. 대승을 거둬. 여기도 스튀리아 카르니올라의 귀족이 사령관이지만 반 이상이 크로아티아 귀족이야. 그리고선 1683 비엔나 전쟁으로 시작하는 대 투르크 전쟁때도 가는겨 크로아티아는.

 

 

The Polish-Ottoman War (1620–21) or First Polish-Ottoman War was a conflict betwee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nd the Ottoman Empire over the control of Moldavia. It ended with the Commonwealth withdrawing its claims on Moldavia.

 

오스만이 폴란드.와 직접 부딪치는건 1620년이야. 여기서 가장 문제의 중심이 몰도바.인거야. 몰도바가 왈라키아와 우크라이나 타타르의 사이야. 얘들은 헝가리 루이때 하미지해서 바쌀이 되다가 폴란드 야기에워 때 이쪽으로 들어갔다가. 두곳의 요충지야. 지금은 해변이 없지만 당시는 여기가 흑해로 나가는 통로인겨 헝가리나 폴란드 입장에선. 여길 뺏길수가 없어. 더하여 오스만이 쳐 올라오는겨. 몰도바가 이 세곳 사이에서 피곤했던거야. 그러면서도 가장 드센곳이 또한 이 몰도바였어. 오스만에 항상 반란의 골치가 여기 몰도바였고. 얘들은 저걸 외교력으로 활용을 잘 못한겨.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유니온.이 1569년 부터이지만. 서기 1400년 전후의 야기에워의 시작 요가일로때부터 얘들은 한몸이야. 
몰도바까지는 폴란드가 좁게 흑해까지 뻗어가서리 여기까지 바쌀인겨 요가일로때. 이 위 오른쪽 우크라이나땅은 리투아니아의 바쌀인거고. 이게 오스만이 오고나서리 흔들린거야. 
폴란드와 오스만의 전쟁은. 몰도바와 그 오른쪽 접경 우크라이나 지금 땅.에서의 전투가 대부분이야. 
오스만은 몰도바 위로는 관심이 없어. 몰도바.도 바쌀로 편입을 한거지 여길 에얄레트.라는 행정단위로 넣지를 않아. 감당도 안되고 관리가 안되는겨. 더하여 오른쪽 타타르도 바쌀이야. 용병으로 쓰는겨 저 타타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얘들을 내몰려고 내려오는거야 이건. 여기에 헝가리쪽도 여길 먹으려고 쳐들어오는거고. 15세기 전후에는 그래서 폴란드가 헝가리랑 싸우는거야. 또한 폴란드가 아예 바쌀에서 직접 편입을 하려고 몰도바 귀족을 내몰려고 전쟁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헝가리쪽이랑 연합해서 몰도바 애들과 함께 오스만에 대항을 하는 전략으로 바꾸면서 전쟁을 하는겨.
쟤들은 저러면서 이전에 바르나 십자군에 그리스도 이름으로 참여도 하고. 나중에 비엔나 전쟁때도 대 투르크전쟁에 참여를 하는겨 또한. 헌데 폴란드 오스만 전쟁은 상대적으로 흑해주변에서 벌어져.


저때 또 등장하는게. 이제 러시아야. 
러시아가. 이반 대제.라는 3세.가 몽골 킵차크 칸국을 러시아에서 내몰고. 노브고로드 공화국.도 갖고와 1462-1505. 
오스만이 이반대제 말때엔 메메드2세 정복자.에 아들 바예지드2세이걸랑. 몰도바까지도 정리가 된겨. 
이 이반대제.의 손자.가 테러블 이반 4세야. 짜르 를 선언하는. 재위 1547-1584. 이제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시대가 오는거야. 이 이반4세.는 엄청난 인간이야. 시베리아개척을 시작한 인간이야. 지금 러시아는 이 테러블 이반이 만든거야. 

The Ottoman–Safavid War of 1532–1555 was one of the many military conflicts fought between the two arch rivals, the Ottoman Empire led by Suleiman the Magnificent, and the Safavid Empire led by Tahmasp I.

 

오스만 오른쪽에 사바피.가 서기 1501년에 들어서. 얘들과 전쟁하는게 오스만 사파비 전쟁. 1532-55. 이십년간 하는겨. 주 전장터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야. 여기서 오스만이 이걸 이기는겨. 술레이만.이 비엔나 까지 쳐들어가고 지중해도 쳐들어갈때 이짓도 한거야. 엄청난거야 얘들이. 그러면서 오스만이 흑해 카스피해 사이를 치고 올라가는거야. 

 

여기서 러시아의 이반 4세와 부딪치는겨. 더하여. 오스만이 몰도바 넘어서 크림반도 까지 바쌀로 넣걸랑. 이반4세가 여기까지 내려가면서 또한 여기서도 부딪치는거야. 흑해를 두고서 오스만과 러시아가 전쟁 시작하는겨 이게.

 

The Russo–Turkish War (1568–1570) or Don Volga-Astrakhan campaign of 1569[5] (referred to in Ottoman sources as the Astrakhan Expedition) was a war between the Tsardom of Russia and the Ottoman Empire over the Astrakhan Khanate. It was the first of twelve Russo-Turkish wars ending with World War I in 1914-18.

 

서기 1568년에 처음으로 전쟁하는거야 러시아와 오스만이. 이반4세 와 셀림2세. 직전에 술레이만이 죽잖오. 

 

In 1556 the Astrakhan Khanate was conquered by Ivan the Terrible, who had a new fortress built on a steep hill overlooking the Volga

 

이반4세가. 볼가강 동쪽 카스피해 접한 아스트라칸.을 점령했어. 이걸 오스만이 사파비를 이기면서 올라오면서 이걸 자기들꺼라 하려는겨. 더하여 왼쪽에 아조브해.에서도 싸워. 러시아가 이겨.

 

이러면서 러시아는 흑해로 내려와서 몰도바쪽으로 가는거야. 중간에 낀 타타르 애들은 이제 폴란드 헝가리 오스만에 더하여 러시아 까지 겪는겨. 오스만이 그래서 다뉴브 넘어 위로 못 뚫을 수 밖에 없어.

 

저때부터 1차 대전까지 350년을 오스만이랑 러시아랑 전쟁을 하는겨. 1차대전때 오스만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러시아가 적이걸랑. 

 

이 오스만은 서쪽 애들과도 전쟁하면서 다 이기면서 만만해 보이고, 오른쪽도 다른 투르크 애들 다 이기고 맘룩 애들도 물리치고 다음 사파비애들도 이기고 하니까 다 만만한겨. 더하여 러시아.도 걍 우습게 보인겨.

 

가운데서 세상 모든게 다 유치해보인겨 저 투르크 허섭한 애들이. 얘들이 러시아랑만 손잡았어도. 러시아를 적으로만 돌리지 않았어도. 지금 세상이 달라졌을껴. 러시아는 특히나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웬수중에 웬수였걸랑 저때 시작에서 끝까지. 

 

 

헌데 하튼 저런 이야기를 쭉 봐도. 발칸의 슬라브나 왈라키아나 허섭 몰도바를 봐도 말야. 불가리아 세르비아애들도 그렇고. 크로아티아의 백년 전쟁도 그렇고. 헝가리애들도 그렇고. 하물며 저 크림반도 타타르들도. 

 

저들의 저 저항의 역사는 어마무시한겨 오스만에 대항한. 결국 삼백여년 전쟁을 통해서 벗어난거야 스스로들. 엄청난거야.

 

 

 

 

자랑스런 저항의 역사. ㅋㅋㅋ.

 

 

 

Battle of Vienna on 12 September 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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