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xios!" (Greek ἄξιος, "worthy of", "deserving of", "suitable") is an acclamation adopted by the early Eastern Orthodox church and made by the faithful at the ordination of bishops, priests and deacons. The acclamation may also be made when a bishop presents an ecclesiastical award to a clergyman during the Divine Liturgy.
악시오스! 초기 오소독시에서, 비숍 사제 디콘 에 서임될때 사람들이 내는 외침이야. 또는 오소독시.의 디바인 리터지.에서 비숍이 성직자에게 잘했다며 하는 소리.
악시오스. 워디 오브 디저빙 오브 수터블.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 받을 만 하다. 그자리에 맞다. 상받을 만하고 그 자리를 맡을만 하다. 라는 칭찬의 말이야.
디바인 리터지. 라는건. 카톨릭의 유카리스트.의 오소독시 표현이야. 우리말로 성찬. 성찬성사. 하는겨. 일본애들은 새크러먼트.를 성사.라고 하지 않아. 비적. 秘跡 히새키. 라고 해. 선교사가 중국애들 번역한 성사.를 우리가 받아 쓰는겨 이건.
The biblical participation of the laity in the ordination is still fulfilled, when the newly ordained is being vested and presented to the people by the bishop, they will exclaim, "Axios! Axios! Axios!" to show their approval.
오어디네이션. 이란건. 불교식으로 보면 계를 받는 수계식.이야. 오계를 받던 구족계를 받던 그 종교에 헌신하는 이.에게 승인을 해주는 예식이야. 클러지 clergy 라는건 모든 성직자야. 사제 포함 성직에 들어가기로 한 사람이 정식 과정 절차를 수료하고 인증해주는 예식이이 오어디네이션.이야. 그리고 진급을 할 때도 예식을 할꺼걸랑. 그 인증서를 줄때 사람들이 소리치는겨. 악시오스! 악시오스! 악시오스!
저건 복음서에 나오는게 아니라 사도행전과 디모데서. 에 저런 장면이 나오는데, 사도행전 시작하자마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하걸랑.
23 And they appointed two, Joseph called Barsabas, who was surnamed Justus, and Matthias.
24 And they prayed, and said, Thou, Lord, which knowest the hearts of all men, shew whether of these two thou hast chosen,
25 That he may take part of this ministry and apostleship, from which Judas by transgression fell, that he might go to his own place.
26 And they gave forth their lots; and the lot fell upon Matthias;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eleven apostles.
사도행전 킹제임스 버전. 가룟유다 자리 대신 한사람을 넣는겨. 요셉.과 마티아스.가 추천이 돼. 추첨을 하고 마티아스.가 12사도가 되는겨. 마티아 맛디아.
저때 사람들이, 악시오스! 악시오스! 악시오스! 했을 꺼라는 거야. 악시오스 라는 말은 없어 신약에.
사도행전 6장에.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이 있걸랑.
6 Whom they set before the apostles: and when they had prayed, they laid their hands on them.
그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자기손들을 그 신도들에게 얹으면서 기도를 하는겨. 이게 안수.기도야. 이때 악시오스! 했다는거지. 넌 그리스도인이 될 가치의 사람이다.
안수 라는건. lay one's hands on. impose 도 쓰고. 손들을 올리는겨. 여기서 핸즈. 복수야. 두손을 올리는게 아니라, 여러사람들이 한손씩을 얹어. 머리겠지. 저건 윗사람이 하는 행위야.
저때 받는 사람에게 악시오스 하는겨
14 Neglect not the gift that is in thee, which was given thee by prophecy, with the laying on of the hands of the presbytery.
디모데서. 라는 티모테오스 첫째 편지.에도 저게 나와.
Kerioth (Hebrew: קְרִיּוֹת, Kriyot) is the name of two cities mentioned in the Hebrew Bible. The spelling Kirioth appears in the King James Version of Amos 2:2
크리요트. 히브리어. 영어 케리오쓰. 키리오쓰. 해서
Judas Iscariot (/ˈdʒuːdəs
c.
30 – c. 33AD)
영어 주더스 이스캐리오트. 그리스어 유다스 이스카리오트. 히브리어 예후다.
(Κ-Qrîyôt), meaning "the man from Kerioth" 히브리어 이스크리요트. 크리요트. 의 사람. 해서 이걸 그리스어 발음 이스카리오트. 하걸랑. 유다킹덤 땅의 남부로 봐.
イスカリオテのユダ(יהודה איש קריות)は、新約聖書の4つの福音書、使徒行伝に登場するイエスの弟子のうち特に選ばれた十二人、いわゆる使徒の一人である。「イスカリオテ(イーシュ・カリッヨート)」とはヘブライ語で「カリオテの人」を意味し、カリオテとはユダヤ地方の村の名である。
저걸. 일본애들이. 카리요토, 카리오테. 에서 이걸 가롯. 에서 요즘은 가룟. 하는겨. 일본애들 첫음 격음화는 연음시키는게 법이걸랑.
우리네 성경이란건, 세상에 없는 소리야 저게 ㅋㅋㅋ.
.
빨갱이.가 이젠 하다하다 이것도 친일 적폐 산물이래.
참 머가 풍년이지 저게.
이 조선.애들은 말야. 모~~든 시선의 잣대가 일본야. 오직 해석의 기준은 일본야. 모든 건 일본때메야. 해서 모~든건 일본때에 생긴겨 나쁜건. 모든 해석도 저따위로만 볼 수 밖에 없어.
저건 정신병이야 저게.
프랑스 폭동의 나폴레옹 혁명때. 1789년 부터 나폴레옹이 1799년 권력 잡을때에야 죽음의 프랑스 거리 시대가 끝나는겨. 십년이 공포와 광란의 시대야 저때가.
프랑스 혁명.해 대는게, 이 유럽사가들의 시선이 바닥이 마르크스에 절절하걸랑 이 들이, 저 프랑스 폭동이라는 혁명이 나중에야 저게 공포와 광끼의 시대였다는걸 써내려가는겨 다시. 빅토르 위고.가 공화정 해대민서리 1832년 6월 파리 반란.이 위대한 혁명 이었다고 주장하고픈게 레미제라블.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야 저게. 헌데 말이지. 파리시민들은. 전혀 저기를 참여를 안해. 저 시대에도 말야. 프랑스 1789년은 의미부여를 안해. 1832년 6월 봉기도 의미부여를 안해. 빅토르 위고 시대 조차도. 저걸 혁명 댔던건 1789년 그 당대 뿐이였어. 그러다가 얘들이 말야, 나폴레옹3세 가 프러시아 랑 전쟁하는 보불전쟁 1870년.이후 내려오고 다시 공화정 하면서. 이때부터 다시 1789년과 1832년.을 혁명이었다 라며 의미부여 한거걸랑 저게.
저럴때 빅토르 위고.가 죽으면서 파리 전 시민들이 렬렬하게 찬양하면서 보내는겨 빅토르 위고를.
저런 해석이 20세기 초까지 간거야. 저 해석을 일본들이 받아쓰고 저 시선으로 이땅빠닥이 서양사를 본거걸랑.
지금은 말야. 저리 안봐.
프랑스혁명이란 폭동 공포 광끼의 시대야 저 10년은. 1832년 6월때 그래서 사람들이 파리시민들이 저기에 참여를 안하고 오히려 국민방위대에 참여하면서 재들을 막은겨. 너무너무너무 끔찍한 십년이었어 프랑스인들에겐. 나폴레옹이 위대한 이유고 그리운 이유야. 그 살벌한 공포의 거리를 나폴레옹이 잠재운겨. 나머지 땅먹은 건 덤일 뿐이야.
저때 저들이 왼쪽에 빨간 완장 차면서, 거리 거리 돌아다니면서 십년을 피바다로 만든겨
해서 인민놀이 하는 들의 상징이 레드. 인거고 한편으론. 우리네는 파르티잔 의 빨치산에서 빨갱이하는거에 그 바닥 역시 저 빨강일 뿐이고.
그게 일본 잔재랑 먼 상관이니 그게.
태극기 논란.
논란이 일자, 2008년 5월 27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한시준) 주최로 서울 대우재단빌딩에서 열린 〈국기 원형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는 한철호 동국대 교수,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교수 등이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4시간 넘게 격론을 이어 간 끝에 태극기의 창안자는 이응준이었으며,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공식 제정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3]
태극기.가 누가 만든거냐 이거야. 2008년에 정리를 해. 이응준이 창안자고. 박영효가 이응준 태극기를 좌우로 바꾸어서 제정했다.
그럼 저게 이응준 태극기냐 박영효 태극기냐.
이응준 태극기를 우리가 지금 쓰냐? 괘의 순서가 박영효면 박영효 태극기.가 당근 맞는거지. 왜 저런 말장난을 할까? 저기 보면 말야. 네시간을 격론을 벌였대. ㅋㅋㅋ. 즉 저게. 이응준 이냐 박영효 냐. 감히 박영효 라고 말하기가 싫은겨.
박영효
이 때문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이미 2002년도에 친일파 에 넣었어. 친일파 중에 친일파래 지들이 보기엔. 해서 2008년도에 친일사전에 넣어.
지들이 보기엔 쪽팔리걸랑. 아이 . 우리네 태극기.를 친일파 가 만든걸 써야 하나.
해서 말야. 저때부터. 굳이 누가 만든겨 하면 이응준 하면서 박영효가 순서 바꿨어. 라고 길게 나가는거지.
야,
친일파 가 만든 친일적폐 아니냐 그럼 태극기도 . 태극기 없애. 적폐 청산을 해야지.
한심해도 보통 한심한게 아냐 저게.
국가 상징이. 지아먼시. 괘놀이 점치기 놀이를 국가 상징으로 쓰고 자빠졌으니. 친일파니 머니 적폐니 머니를 떠나서.
믿어달라. 의지를 왜 안믿냐. 정치를 신앙과 믿음으로 하고 자빠졌으니.
아니 우리네 정은이 돼지가 의지가 있다는데 왜 그 의지를 안믿어.
믿어주세요 믿어주세요. 정의를 실현합니다 믿어주세요. 믿습니다 믿어요 정은이가 오면 전궁민이 환영해줄껄 믿습니다.
저게 말야. 주역 괘 놀이하는 그 결과를 믿으라는 거야 저게. 이건 근대가 아냐. 걍 페이거니즘 애들 모임터야 이건.
이 지쩍 수준 낮음의 정도가 음청난겨 이게.
Gnaeus Domitius Corbulo (Peltuinum c. 7 – 67 AD) was a Roman general, brother-in-law of the emperor Caligula and father-in-law of Domitian.[1] Loyal and honorable to the end, Corbulo's devotion towards his country was such that, when his emperor ordered him to commit suicide, he fell on his own sword, saying, "Axios!"[2], meaning "I am worthy!"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줄여서 코르불로. 라고 하는데,
악시오스.란 말은, 신약의 말이 아니라, 악시오스 하면 떠오르는 인간은 코르불로. 이사람이야.
칼리굴라.가 매제야. 코르불로.의 여동생이 칼리굴라.의 네번째 부인이야. 더하여. 도미티우스 황제의 장인.이 돼 죽어선.
네로.가 죽고. 유대전쟁 터질 때 일차 진압하고 온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될때 까지. 1년 동안,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삼황제가 죽고 자살하고 처형당하고. 이 베스파시아누스 두 아들.이 .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 고 다 황제하고. 도미티아누스.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로 역사에서 지워질때. 죽은 코르불로.의 딸이 도미티아누스.에 시집을 가.
Corbulo's early career is unknown but he was suffect consul in 39 AD during the reign of Caligula
칼리굴라 때 수펙트 콘술. 콘술이 임기전에 죽어서 남은 임기 채우는 콘술이야.
After Caligula's assassination, Corbulo's career came to a halt until, in 47 AD, the new Emperor Claudius made him commander of the armies in Germania Inferior, with a base camp in Colonia (Cologne).
칼리굴라 죽고 서기 41년. 줄이 끊겨서 깨갱하다가. 서기 47년. 6년후에 저지대 게르만에 사령관이 돼. 게르만애들을 다 진압하고 라인강 군단병들 군기들을 바짝 잡아 이사람이.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 의 동생.의 손자였걸랑. 이걸 양자로 들였고. 칼리굴라가 아빠따라서 라인강 로마군단병들 속에서 놀았걸랑. 칼리굴라.는 라인강 군단병들의 꿈이야. 쟤를 죽인것도 라인군단 출신 근위대장이 눈물흘리며 죽인거고. 이 라인군단이 저당시 군기가 다 죽을때야. 이걸 코르불로.가 가서 확 잡은겨.
Corbulo returned to Rome, where he stayed until 52 AD, when he was named governor of the province of Asia. Following Claudius' death in 54 AD, the new emperor Nero sent him to the eastern provinces to deal with the Armenian question. After some delay, and reinforced by troops from Germania, in 58 AD he took the offensive, and attacked Tiridates, King of Armenia and brother of Vologases I of Parthia. Artaxata and Tigranocerta were captured by his legions (III Gallica, VI Ferrata, and X Fretensis), and Tigranes, who had been brought up in Rome and was an obedient servant of the government, was installed as king of Armenia.
그리고 클라우디스.죽고 네로.가 황제가 돼. 이때 문제가 아르메니아 킹덤. 로마의 동쪽 문제는 파르티아.야. 이게 다음엔 사산.페르시아가 되는거고. 항상 싸워 저 레반트에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저때 아르메니아가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서 낑기는겨. 친로마파 친파르티아파 로 내전하는거고.
헌데 로마 입장에선, 파르티아와의 전쟁이 문제고, 또한 아르메니아가 문제야. 아르메니아를 프로빈키아.로 넣느냐 마느냐 가 논쟁꺼리야. 프로빈키아.는 자기들이 다스리는거야 직접. 헌데 말야 아르메니아.는 이건 전혀 다른 애들이야. 해서 푀더라티 동맹국으로 두냐 직속넣냐 가 숙제걸랑.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안이 아니지만 스텝기질이 강해. 문화가 파르티아와 비슷해.
저게 네로에게는 골치였걸랑. 이걸 코르불로.가 아시아 프로빈키아.의 거버너.에 임명이 되서 저 숙제를 맡는겨. 아시아.는 비튀니아 폰투스 아래 서남부 땅이야 터키의. 코르불로.가 파르티아 와 전쟁하면서 아르메니아.도 진압하지만, 저길 로마가 갖으면 관리가 안된다고 인식을 해. 오히려
The Roman–Parthian War of 58–63 or the War of the Armenian Succession[2] was fought between the Roman Empireand the Parthian Empire over control of Armenia, a vital buffer state between the two realms. Armenia had been a Roman client state since the days of Emperor Augustus, but in 52/53, the Parthians succeeded in installing their own candidate, Tiridates, on the Armenian throne.
아르메니아.에 후계자 자리를 두고 내전이 일어난거야. 파르티아.가 자기들 핏줄을 심으려는 거고. 로마.는 아르메니아.를 파르티아에게 못줘. 이 전쟁이 서기 58-63년.
코르불로.가 이 전쟁을 이겨. 파르티아.를 물리치고 아르메니아.를 로마로 갖고 왔는데 말야. 오히려 말이지, 저때 아르메니아 킹이 트리다테스.란 킹인데. 이사람은 파르티아 킹덤의 배다른 동생이걸랑. 이걸 내쫓으려고 전쟁을 한거지만, 오히려 코르불로.가 이 사람에게 킹 자리를 그냥 준거야. 그러면서 로마의 동맹이자 친구로서 가는겨 그냥. 바쌀 킹이 된겨 실재는.
네로.도 이걸 승인을 해. 트리다테스.가 로마로 가서 환대도 받아. 해서 나중에 네로.가 죽을때도, 아르메니아.는 네로의 죽음을 안타까와 했어. 어쨋꺼나 자기들에겐 네로가 잘해준거걸랑.
저러면서, 코르불로.가 아시아 레반트에서도 명성이 자자해져 오히려. 평화를 저땅에 준거야.
이전에 라인강 게르마니아 가서도 라인군단들 군기 회복하고 게르만들 내쫓고 더하여 동쪽가서 파르티아 이기고 아르메니아 문제 정리하고.
네로.가. 부담스러운겨 이게. 얘가 열폭질 하는거지.
당시 로마 대 화재.나고 네로에 대한 민심 흉흉하고, 얜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뤼라 치며 노래부르는 짓하고, 이전 칼리굴라가 떠오르는겨 로마 시민들한테는. 암살 음모들 적발되고 실패하고.
코르불로.를 또한 의심하고 미리 죽여야 하는거야.
In 67 AD disturbances broke out in Judaea and Nero, ordering Vespasian to take command of the Roman forces, summoned Corbulo, as well as two brothers who were the governors of Upper and Lower Germany, to Greece. On his arrival at Cenchreae, the port of Corinth, messengers from Nero met Corbulo and ordered him to commit suicide. He loyally obeyed, and fell on his own sword, saying, "Axios!".[8], meaning "I am worthy!"
유대땅에 유대인들이 반란해서 예루살렘 성 차지할때, 네로가 베스파시아누스.를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코르불로.를 소환을 하는겨. 코르불로.가 그리스 코린쓰 지협 코린토스 항구에 도착했을때, 네로가 마침 보낸 전령을 여기서 만나. 네로가 명령했다는 거지. 자살하라고.
코르불로.가 이말에 복종을 해.
자기 칼로 찔러 죽으면서, 악시오스!!. 했는데.
네로가 저 다음해 서기 68년에 죽걸랑. 코르불로 대신 갔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전쟁하면서 1년 가만히 동태살피다가, 로마에선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세 황제 죽는거 보고. 여유롭게 황제자리를 꿰차는데. 원래 저 자리는 코르불로.가 차지할 자리였어.
코르불로.가 명령 안듣고 자기 군단 이끌고 네로를 엎을수도 잇었어. 그걸 안한거야 코르불로는.
자기가 명령을 따라 이행하는게, 그게 로마를 위해서 가치있는거야. 멀리보면.
자기가 불복종 해서 엎는다고, 정의가 설까 . 구차한거지.
악시오스!. 저게 애매한겨 저 당시에.
저게 어찌보면. 난 죽어도 싸. 난 이리 죽어야 할 바보였어. 네로를 도와주는게 아니였어. 라고 해석할 수도 있걸랑. 아 저따위 네로를 위해 이따위 로마를 위해 이리 살아왔던가. 함시롱.
아냐. 그건.
난 이리 죽지만, 나는 가치있는 인간이야 지금 현재. 난 제대로 살아온거야. 이리 명령에 따라 자살하는 이 순간 조차도 그래서 더 나는 의미있는 인간이야!
라고 당당히 외치는거야.
Statue of Corbulo in Voorburg, Netherlands
An Ottoman-Mamluk war took place from 1485 to 1491, when the Ottoman Empire invaded the Mamluk Sultanateterritories of Anatolia and Syria. This war was an essential event in the Ottoman struggle for the domination of the Middle-East. After multiple encounters, the war ended in a stalemate and a peace treaty was signed in 1491, restoring the status quo ante bellum. It lasted until the Ottomans and the Mamluks again went to war in 1516–17; in that war the Ottomans defeated and conquered the Mamluks.
오스만 맘룩 전쟁. 1485-91. 바예지드2세.가 유대인 받은 거 외에 딱히 없는 듯 보이는데, 이사람때 전쟁이 오른쪽 카이로 에서 시작해서 당시 레반트 까지 점령한 맘룩 이야. 살라딘은 삼촌이랑 같이 셀주크 투르크 소속의 군단에 있던거고, 삼촌이 거느리는 부대에 같이 파견나가서 파미드 를 동맹 협상 하는 중에 야습하고 아유비드 조.를 세우고서 이들이 십자군 상대하다가, 이게 무슬림들 노예가 아유비드 조.를 잇걸랑 성루이9세 올때에. 그리곤 이집트 맘룩 술탄이 되서. 1250-1517, 이들이 훌라구 몽골애들 상대하는거고. 레반트까지 지배하는겨.
오스만이 선지 2백년 가까이 되고, 발칸은 웬만큼 차지하고, 오른쪽은 신경을 안썼어. 다들 투르크 베이들의 베일리크 들이야. 이들이 대부분 오스만이 아랄해.에서 칭기스칸때메 도망해서 여까지 올때 다 비슷하게 온 이들이 터키땅에서 베일리크 들을 차린거야.
다 동맹들이야. 헌데 여기에 맘룩애들이 침입하는겨. 더구나 오른쪽은 아랍상인 루트야. 스파이스와 메르. 몰약 이 막혔어 또한. 이 맘룩들 때문에.
이 쳐들어오는 맘룩을 맞서서 공격하는게 오스만 맘룩 3년 전쟁이야. 여기서 맘룩애들을 터키와 시리아 경계까지 내모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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