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Jacques Rousseau (UK: /ˈrs/, US: /rˈs/;[1] 

French: 

[ʒɑ̃ʒak ʁuso]; 28 June 1712 – 2 July 1778) was a Genevanphilosopher, writer and composer. Born in Geneva, his political philosophy influenced the progress of the Enlightenmentthroughout Europe, as well as aspects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development of modern political and educational thought.

 

장 자크 루쏘. 얜 제네바 인간이야. 프랑스와 원래 상관이 없어. 

 

The Republic and Canton of Geneva (French: République et canton de Genève; Arpitan: Rèpublica et canton de Geneva; German: Republik und Kanton Genf; Italian: Repubblica e Cantone di Ginevra; Romansh: Republica e chantun Genevra) 

 

스위스 의 제네바.의 정식명칭은 지금. 제네바 공화국 이자 캔톤. 이야. 

The Old Swiss Confederacy (Modern German: Alte Eidgenossenschaft; historically Eidgenossenschaft, after the Reformationalso République des Suisses, Res publica Helvetiorum "Republic of the Swiss")

 

c. 1300 – 1798
스위스.가 이전에 연합했던걸 분리해서 올드 스위스 연합. 이게 서기 1300년에서 1798년 프랑스 혁명때까지야. 5백년간. 
저기가 프랑스와 신성로마의 사이에서. 애매하걸랑. 이들은 원조 갈리아. 켈트여. 게르만에 치이다가. 카이사르때 게르만때문에 이동하다가 카이사르한테 혼나고 다시 왔걸랑. 그러다 중세시작때 게르만 이동하면서 서로마망할때 왼쪽에 선게 부르고뉴족의 킹덤이야. 그리곤 클로비스의 메로빈지언 프랑크족들이 통일하면서 샤를마뉴 손자에 세개로 분리될때 장남 로타르땅 가운데지역이걸랑. 그리곤 막내 대머리 샤를과 둘째 게르만 루이 사이에서. 서기 879년에 프로방스의 보소.가 저지대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의 킹덤. 세우고. 직후인 서기 888년에 부르고뉴의 루돌프1세가 고지대 부르고뉴 킹덤 세우고. 50여년 후에 이게 아를킹덤.으로 묶여서리 4백여년을 가. 신성로마제국에 하미지를 하고. 그러면서 아를킹덤은 짝아지고 다들 영주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서기 1300년에 스위스쪽에 캔톤들이 연합.을 만들고 직접 임미디어시. 황제와 다이다이 협상하는체제로 가는거지. 
올드 스위스 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스위스 서남부 지역이 있어.

The République des Sept-Dizains (German Republik der Sieben Zenden "Republic of the Seven Tithings") was a state in the Upper Valais, in what is now the Swiss canton of Valais, during the Early Modern period.

 

1571–1798
이들은 저기 가입을 안하고 올드 스위스연합 생기고 150여년 지난 후에. 레부블리케 디 쎄트 디장. 일곱개 지역으로 된 공화국. 세븐 타이딩즈. 로 역시 1798년까지 가는겨. 얘들은 올드스위스 연합이 아냐. 지금 여기가 발레 캔톤.이란 곳이야.

The Three Leagues was the alliance of 1471 of the League of God's House, the League of the Ten Jurisdictions and the Grey League, leading eventually to the formation of the Swiss canton of Graubünden. Most of the lands of Graubünden were part of the Roman province Raetia in 15 BC. The area later was part of the lands of the Bishopric of Chur.

 

15th century–1799
세 리그들. 이란게 또한 저들과 병행해서 같이 가는 연맹체제여. 

In Swiss history, the Helvetic Republic (1798–1803) represented an early attempt to impose a central authority over Switzerland, which until then had consisted of self-governing cantons united by a loose military alliance (and ruling over subject territories such as Vaud).

 

올드스위스 연합과. 자잘 일곱개 공화국.이 합한게. 헬베틱 공화국.이야 나폴레옹이 황제 오르기 전에. 지금 스위스.의 라틴어 공식명칭이 콘페더라티오 헬베티카. 여. Helvetii 헬베티이. 족이라는 켈트들 이란걸 라틴어로 남기는겨. 스위스가 헬베틱 공화국.으로 아래 발레 캔톤까지 합해서 지금 스위스.가 된건데. 결국 고지대 부르고뉴와 저지대부르고뉴와 프로방스.가 합한 아를킹덤이 서기 1300년 지나면서 쇠퇴하고 이들이 연합 동맹체제 맺으면서 이 정체성이 7백년이 된거야. 

 

저때 각각의 캔톤은 자기들 나름 체제가 있던겨. 제네바 캔톤은 리퍼블릭.을 지금까지 하는거고.

 

할때말야. 제네바.는 장 칼뱅.이 기욤파렐.의 협박질로 제네바.에 벌벌 떨면서 있었을때, 아 쪽팔리. 하민서리. 제네바.를 얘가 공화국.체제로 만들은거야. 

 

 

저때 장칼뱅.이 제네바 갈때. 위그노들이 카톨릭의 프랑스를 피해다닐때. 같이 움직인 이들 중에. 바로 장자크 루소.의 선조들이 제네바로 오는겨. 루쏘가 그래서 제네바에서 태어나.

 

 

루쏘는 프랑스에서온 이민자야. 제네바는 공화국 체제야. 공화국 이란건. 투표 하는겨. 선거권가진 시티즌.이. 시티즌 이란건 투표하는 사람이야. 헌데 제네바애들이 이민해서 온 이들에겐 투표권을 안줘. 

 

Geneva, in theory, was governed "democratically" by its male voting "citizens". The citizens were a minority of the population when compared to the immigrants, referred to as "inhabitants", whose descendants were called "natives" and continued to lack suffrage. In fact, rather than being run by vote of the "citizens", the city was ruled by a small number of wealthy families that made up the "Council of Two Hundred"; these delegated their power to a 25 member executive group from among them called the "Little Council".

 

결국 말만 리퍼블릭.이지 선거권자는 소수 토백이들이란거지. 이민자들의 자식들에게도 선거권이 없는겨. 200인 위원회가 다스리고, 이중에 25명이 소위원회 해서 얘들이 메이저가 되는거지. 이민자들이 이에 비웃으면서 반발하고. 

 

 

말만 리퍼블릭이지. 걍 독재야 저건. 

 

제도라는건. 의미가 없어. 인간 자체가 노빌리티.가 되는게 중요한거야. 리퍼블릭이던 킹덤이던 상관이 없어.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은 킹덤이야 킹덤. 영국도 킹덤이야 지금. 그딴 단어들은 무의미 한거걸랑. 

 

만인.이 평등한게 아냐. 법 앞에 평등 할 뿐이야. 

지들 입맛 아니면 사법이 적폐고, 지들 입맛 판결이면 당연한 판결이고. 저건 야만 들이지 저게. 저게 먼 정의고 민주고 평등이고 이니. 저런거 보면 정말 개무식한 홍위병 들의 바닥을 봐. 저건 문명이 아냐. 걍 개돼지 들의 동물농장이야 저게. 


댓글로 여론 조작하는 짓은. 저건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거걸랑. 저건 내란죄에 역모죄야. 먼 구형을 오년밖에 안하냐. 저건 구형을 사형 시켜야 하는겨. 해서 선고를 무기.로 때려야 해. 저걸 어드래 이년만 때리냐. 말도 안되는겨 저건.


지들 같은 편 가 성추행 폭행으로 3년 몇개월 처먹은건 또 잠잠 해요. 사법적폐 왜 안하나 몰라.

아 정말 진짜 이땅바닥은. 너무나 너무나 후져.

,해서. 장자크 루쏘.네가 정치적 탄압 비슷하게 받아. 이민자들이 상대적으로 살기 깝깝한거고. 


Five generations before Rousseau, his ancestor Didier, a bookseller who may have published Protestant tracts, had escaped persecution from French Catholics by fleeing to Geneva in 1549, where he became a wine merchant.
[4][page needed][5]

 

원래 선대가 프랑스에서 출판업을 했다. 프로테스탄트 쪽도 출판했을지도 모른다. 하튼 제네바로 도망와서 포도주 상인이 되었다. 

 

The trade of watchmaking had become a family tradition by the time of Rousseau's father, Isaac Rousseau. Isaac followed his grandfather, father and brothers into the business, except for a short stint teaching dance as a dance master.[4][page needed] Isaac, notwithstanding his artisan status, was well educated and a lover of music. "A Genevan watchmaker", Rousseau wrote, "is a man who can be introduced anywhere; a Parisian watchmaker is only fit to talk about watches".[6][a]

 

 

루쏘의 아빠는 시계제조 무역.을 받아 했다. 즉 포도주에서 어느덧 시계로 바꾼겨. 아빠가 저 정치권에 야당 지지하다가 핍박받는거고. 그래도 중산층 이상은 된거지 집안이. 얘가 교육을 잘 받아. 제네바의 시계제조공은 어디든 환영받는다. 파리의 제조공.만이 비슷한 수준이 될까.

 

그러다 정치적으로 안좋아져. 아빠가 개입을 해서. 얘는 1712년 생이야.

 

 At age 13, Rousseau was apprenticed first to a notary and then to an engraver who beat him. At 15, he ran away from Geneva (on 14 March 1728) after returning to the city and finding the city gates locked due to the curfew.

 

어릴때 일을 배우는겨. 노타리. 는 시민법 행정공무원이고. 13세에 여기 심부름하며 배우고, 인그레이버.판화가 냐. 거서도 배우다가 제네바를 뜬거야. 15세에. 도망인지 나와서 제네바를 벗어났다가 다시 와보니 성문이 잠겼다는거지 야간통행금지로. 해서 아예 뜬겨. 저때 사보이. 즉 아래로 가는겨. 

 

Françoise-Louise de Warens, born Louise Éléonore de la Tour du Pil, also called Madame de Warens (31 March 1699[1] – 29 July 1762[2]), was the benefactress and mistress of Jean-Jacques Rousseau.

 

여기서 만난 여자가. 마담 드 바렌스.여 13살 정도 더 많아. 소개로 이여자에서 있는데. 사보이의 스파이.다 말이 많고. 하튼 배운거에 이쁘기도 핸나봐. 이여자는 카톨릭이야. 루쏘를 카톨릭으로 바꿔나 세뇌시켜서. 둘이 애인이야. 루쏘가 고백. 컨패션에서 지가 말을 해. 이 여잔 나중에 가난 속에 죽어. 죽고 훨 나중에 루쏘는 그 소식을 알게 되고.

 

When Rousseau reached 20, De Warens took him as her lover, while intimate also with the steward of her house. The sexual aspect of their relationship (a ménage à trois) confused Rousseau and made him uncomfortable, but he always considered De Warens the greatest love of his life. 

 

. At 25, he came into a small inheritance from his mother and used a portion of it to repay De Warens for her financial support of him. At 27, he took a job as a tutor in Lyon.

In 1742, Rousseau moved to Paris in order to present the Académie des Sciences with a new system of numbered musical notation he believed would make his fortune. 

 

루쏘가 16세에 드 바렌스.29세 일때 만나서리. 여길 계속 있는거지. 4년 지난 20세에 교미를 했다는겨. 여자는 33세고. 

 

 

이 루쏘앤. 문제 많은 앤데 이거. 하튼 저여자가 자기 그레이티스트 러브래. 그러다가 7년 지난 27세에 리옹.으로 가서 가정교사 자릴 잡은거지. 즉 말야. 10여년을 저 드 바렌스.여자와 같이 지낸겨 이게. 이여자 돈으로. 엄마쪽에서 받은 유산을 얼마 주었다. 엄마가 제네바 본토출신 상류층이야 엄마쪽이 잘 살았어 루쏘는.

 

 

10년을 사보이에서 드 바렌스.랑 엮이고. 즉 얘는 드 바렌스.란 여자가 만든겨. 서기 1742년. 30세에 파리로 간거야. 음악 악보를 콩나물 표시로 표현하는거 말고 숫자로 표현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해서리 돈벌라고 갔다는거지. 아카데미에서 거절해. 먼 개그지 발명품.

 

From 1743 to 1744, Rousseau had an honorable but ill-paying post as a secretary to the Comte de Montaigue, the French ambassador to Venice. This awoke in him a lifelong love for Italian music, particularly opera

 

바로 다음해 나이 31세에서 32세. 베네치아.에 파견간 프랑스 대사.의 비서자리로 베네치아.를 느끼는겨. 베네치아 는 자유야.

 

 

Returning to Paris, the penniless Rousseau befriended and became the lover of Thérèse Levasseur, a seamstress who was the sole support of her mother and numerous ne'er-do-well siblings. At first, they did not live together, though later Rousseau took Thérèse and her mother in to live with him as his servants, and himself assumed the burden of supporting her large family. According to his Confessions, before she moved in with him, Thérèse bore him a son and as many as four other children (there is no independent verification for this number).[14]

 

그리곤 파리로 다시와. 2년여만에 온거지. 아마 서기 1745년 정도 되겄지. 나이 33세. 이때 파리에서 만난 여자가. 

 

Marie-Thérèse Levasseur (21 September 1721 - 17 July 1801; also known as Thérèse Le Vasseur and Thérèse Lavasseur) was the domestic partner of Genevan philosopher Jean-Jacques Rousseau.

 

마리 테레즈 르배써. 루쏘보다 9살 어려. 저때 테레즈.가 24세. 루쏘는 33세즈음. 이 여자는 오를레앙 출신이야. 아빠가 여기 공무원에 엄마는 상인이면. 걍 중하류 집안이야. 집안에 돈이 없는데 아빠가 자식들은 열라게 낳은겨. 파리.로 옮긴거야 엄마랑 먼저. 돈 벌러. 아빠는 나중에 오고. 공무원자리도 아마 하급 별정직 비슷한 듯 해.

 

 

 

루쏘.는 베네치아 비서를 했지만 월급이 짝아. 얜 번 돈도 없어. 그지야. 아마 엄마로 부터 받은 유산도 다 쓴듯. 그지가 파리로 간겨 나이 33세에. 여기서 테레즈.를 만난거야. 테레즈 집에 들어가서 살아. 테레즈.는 심스트레스. 바느질 하는겨. 여관에 세탁부하고 가정부하면서 엄마와 형제들을 이 여자가 먹여 살려. 여기에 이도 빌붙는거고. 

 

 

 She was 24 years old at the time, he was 33. According to Rousseau, Thérèse bore him five children, all of whom were given to the Enfants-Trouvés foundling home, the first in 1746 and the others in 1747, 1748, 1751, and 1752.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이 다섯명이야. 1752년이면 루쏘 40세 테레즈 31세. 

 

저 다섯아이들을. 모~두 파운들링 홈. 저게 중세에 교회에서 만든 탁아소여. 지 딴에는 자기가 키우면 교육을 못받으니 저기에 보내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꺼야. 

 

하면서 애들 낳는 족 족. 탁아소에 버린겨 저앤.

 

 

 

나중에 찾으러갔대. 알 수 없대. 애들 다섯은 비참하게 자란거지. 

 

 

저걸. 저는 콘패션.이라는 고백.에 지가 쓴겨.

 

The Confessions is also noted for its detailed account of Rousseau's more humiliating and shameful moments. For instance, Rousseau recounts an incident when, while a servant, he covered up his theft of a ribbon by framing a young girl—who was working in the house—for the crime. In addition, Rousseau explains the manner in which he disposes of the five children he had with Thérèse Levasseur.

 

 

어릴땐 이가 지가 도둑질을 하고, 어린 꼬마 여자애에게, 저년이 도둑년이예요. 집에서 일하는 여자애한테 누명을 씌워. 

 

저걸 지가 쓴겨.

 

 

 

저따위 가. 프랑스 혁명.에서 영웅님 이신거지.

 

 

 

나폴레옹이 왈. 야 이 루쏘 말글 다 망상. 

 

 

 

저런 애가. 지금 이시대에도. 영웅이야.

 

저따위 의 말글이. 다 걍 망상 소설일 뿐이야 저게.

 

 

 

 

저따위 들이 또한 이땅바닥에. 득실득실 한거고.

 

 

야만이야 야만. 저건. 문명이 아냐.

 

자기들이 분노하는 그 대상을 적폐니 악마니 규정하지만

 

 

저들의 하는 짓은. 정말 조오오온나게 추잡하고 더럽고 역겨운건데. 더한건 말야. 저런 들이. 결국 학살을 부르는겨 대학살을.

 

 

그게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야. 먼 박그네 탄핵때 동물농장이 유행어쩌고 아 정의가 저쩌고. 야, 조지오웰이 동물농장을 쓴건 스탈링 들 라고 쓴거고, 선동 놀이 당하는 니덜 정신 차리라고 쓴겨. 인간 말종들아 좀 개돼지에서 벗어나라. 선동좀 그만당해라. 라고 쓴게 조지오웰 동물농장이여. 저게 을매나 적나라하게 쓴줄 아냐. 저걸 보면 이땅바닥의 현실을 그대로 제대로 느껴. 저 이념놀이 하는 들은 정신병이여 저건. 

 

 

루쏘.는 66세. 1778년.에 죽어. Ermenonville 에르메노빌. 

 

9살 어린 테레즈.는 80세. 1801년.에 죽어. 테레즈.는 루쏘가 죽고 루쏘의 유산. 저작권을 다 물려받아. 57세. 이여자가 완전히 루쏘를 다 먹여 살린겨. 자기 집안 식구들이랑. 쌩 노동을 하면서. 

 

루쏘의 학생이었던 르네 지라르뎅. 집의 하인이랑 결혼을 해. Le Plessis-Belleville 르 플레시벨르빌. 루소 무덤이 있는 에르메노빌 바로 아래 지역이야. 다 오더프랑스.라는 파리 위 의 레죵.의 남부야. 

 

 

그나마 루쏘가. 남들보다 낳은건. 자기 쪽팔린 짓을 다 쓴겨. 콘패션.은 사후에 출판이 돼. 미리 쓰고는. 자식들 어쩌고 변명하는거고 저앤. 

 

 

저건 머냐면. 인간을 떠 받지 말라는겨. 루쏘 나 자신이 대단한 듯 썰 풀지만. 나는 란 걸 언뜻 비추는겨. 저앤 진짜 야 저건. 

 

 

나폴레옹.도 나중에야 느낀거야. 아 루쏘 책들 다 다 읽었는데. 너무나 감동 처묵 했지만, 야 이 다 개소리였어 저건. 하신겨 나폴레옹께서. 

 

나폴레옹.은 자유야.

 

나폴레옹이 죽고. 나폴레옹은 자유의 상징이 돼. 웃긴거지 이게.

 

 

저런 애들 자기 고백 쓰는것과 걍 애들 회고록에 자서전 쓰는거 보믄. 역겹고 토가나와. 디다 보면. 걍 똥떵어리 인생 들이 먼 대단한 이념에 정의 놀이한듯 엄청난 인생 살은듯.

 

 

자기가 대단하다. 라고 성인 인듯이 썰 푸는 일수록

 

똥 냄새가 났던 인생이었소.를 고백하는겨 그게.

 

 

 

걍 이름없는 민초로 사는게 나은겨. 그게 덜 안쪽팔린거지 어찌보면.

 

 

테레비에서 썰 푸는 들 보면. 그리고 머 대선후보 저쩌고 하는 거 보믄.

 

아 불쌍해 재들. 쟤들은 지들이 싼 똥 칠한 똥이. 저 나이 처먹어도 안보이나?

 

 

설날 메세지시다.

 

 

Marie Thérèse Levasseur Veuve de Jean Jacques Rousseau, by Johann Michael Ba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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