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mpire of Nicaea or the Nicene Empire[1]  Founded by the Laskaris family,[3] it lasted from 1204 to 1261, 

 

 

 

Palaiologan dynasty (restored to Constantinople, 1261–1453)

 

 

 

이전 앙겔로스 Angelos 조. dynasty 가 실재는 이삭2세.와 그 형 알렉시오스3세.와의 내전아닌 내전으로, 십자군 4차 오면서,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 니카이아.에서 사위 핏줄인 귀족 라스카리스. 조.로 57년.간 있어. 사위.로도 가서리 4대.때는 8세에 황제가 돼. 섭정하는 가문이 팔라이올로고스. 섭정하면서 공동황제.로 

 

 

 

John IV Doukas Laskaris (or Ducas Lascaris) (Greek: Ἰωάννης Δ΄ Δούκας Λάσκαρις, Iōannēs IV Doukas Laskaris) (December 25, 1250 – c. 1305) was emperor of Nicaea from August 18, 1258, to December 25, 1261.

 

 

 

니카이아. 갔을 때의 마지막이 요아네스 4세. 8세에 즉위해. 

 

 

 

Michael VIII Palaiologos or Palaeologus (Greek: Μιχαὴλ Η΄ Παλαιολόγος, Mikhaēl VIII Palaiologos; 1223 – 11 December 1282) reigned as the Co-Emperor of the Empire of Nicaea from 1259 to 1261, and as Byzantine Emperor from 1261 until his death. 

 

 

 

섭정을 미카엘8세. 27세 많은겨. 35세에 섭정을 해. 미카엘 8세.가 바다건너 십자군 라틴제국을 다시 재점령 하면서 57년만에 콘스탄티노플.로 온거야. 1261년. 이때 말야. 이 미카엘.이 저 당시 꼬마 공동황제 오하네스4세.의 11세 생일때, 눈깔을 빼서리 봉사로 만들고 얘가 단독황제가 되는거야. 그러면서 비잔틴을 서기 1261년부터 1453년 까지. 2백년 가까이를 팔라이올로고스 조.가 잇고 가는건데. 

 

 

 

꼬마 요하네스4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30년 후에 아들 황제가 여길 찾아와. 아빠 눈깔 뺀 짓 미안하다고. 얘들은 이전 앙겔로스.때도 형이 동생 황제 봉사만들고, 하는게, 죽이는 건 차마 못하고, 성경 구절 때문에, 봉사를 만드는거지. 

 

 

 

 

 

팔라이올로고스 조.가 22명의 황제야. 마지막 콘스탄티노스 11세 황제까지.

 

 

 

 

 

비잔틴 황제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라틴어 회복하려 애쓰지만. 이후에는 그리스어가 비잔틴 공식어가 되서리. 뒤로 가면 다 그리스어 발음으로 해주는게 맞아. 

 

 

 

 

 

The Imperial University of Constantinople, sometimes known as the University of the Palace Hall of Magnaura (Greek: Πανδιδακτήριον τῆς Μαγναύρας), can trace its corporate origins to 425 AD, when the Eastern Roman (Byzantine) emperor Theodosius II founded the Pandidakterion (Πανδιδακτήριον).[1]

 

with 31 chairs for law, philosophy, medicine, arithmetic, geometry, astronomy, music, rhetoric and other subjects, 15 to Latin and 16 to Greek. The university existed until the 15th century.[5]

 

 

 

 

 

콘스탄티노플 제국대학. 서기 425년 으로 봐. 테오도시우스2세. 같은 이름 1세가 서로마 통합해서 작은아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큰아들 아르카디우스.는 원래 동로마황제. 이 아들이야. 이때 세워. 판디다케리온. 팰리스의 대학교. 

 

 

 

마그나우라. Magnaura 가 마그나 아울라. 큰 홀.이야. 마그나브라. 

 

 

 

 

 

저 대학에 학문이. 법. 철학. 의학. 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수사학. 등 31개였고. 얘들이 니케아로 쫓겨나서 쇠퇴했다가. 마카엘 8세.가 와서리 다시 재설립하고. 이게 메메드2세 올때까지 있던 대학이야. 얘가 와서리 이 대학을 바꿔

 

 

서로마가 망하고, 문명의 중심은 여기 비잔틴 콘스탄티노플이걸랑. 세계최고古이자 최高의 대학도 여기가 될 수 있었던거야. 그걸 저들이 못한겨. 서로마는 이탈리아 중북부가 끄집어내고 알프스 너머 게르만들이 복원하고 업그레이드하는 사이에 얘들은 그 이상의 진도를 못나가고 내전하면서 끝이난거야. 

 

 

Phanar Greek Orthodox College or Phanar Roman Orthodox Lyceum (Turkish: Özel Fener Rum Lisesi), known in Greek as the Great School of the Nation (Greek: Μεγάλη του Γένους Σχολή, Megáli toú Genous Scholí), is the oldest surviving and most prestigious Greek Orthodox school in Istanbul, Turkey. The school, like all minority schools in Turkey, is a secular school.

 

 

 

파나르 그리스 오소독시 칼리지. 가장 오래된 현존 그리스 정교학교. 지금도 있어 이스탄불에. 이슬람땅에서 게우 지금 명맥을 유지한거지 사립 신학교로.

 

 

이 비잔틴.은 숱한 내전의 역사야 이게. 내부 리벨리온.에 귀족들간의 권력투쟁. 저리 지긋지긋하게 해도 천년을 버틴거야. 그만큼 로마.의 향수는 찐한겨. 다시말해서, 저리 내부적으로 썩는 천년을 해도, 저걸 엎을 만한 문명이 안나온거야. 왼쪽 접경은 슬라브 에 헝가리 마갸르.들 갈리아 게르만 애들보다 더 몰라 로마를. 비잔틴이 아무리 쓰레기라도 비잔틴을 못 이겨, 동쪽은 무함마드가 서기 610년에야 가브리엘 만나는겨. 갉아먹을 정도지만 못이겨 여길. 이걸 오스만.이 먹는거야. 그만큼 비잔틴은 로마.의 기운을 따 쓰고 써서리 힘이 다 닳은거고, 오스만은 반대로 이전의 2천년 쌓인 싸이키를 흡수를 한거야.

 

 

헝가리 마자르.족 이란 말은 일본말이다 저따위 발음 없다. 영어도 마갸르. 헝가리어도 마갸로크. 저딴 개번역된거나 쫌 바꿔라 바꿔. 이 반일에 환장하면서 정작 일본가 만든 단어들로 사는 민족 것덜아.

 

 

 

저따위 비잔틴도 말야. 비잔틴만 보고 비잔틴 전공에 빠진 애들은, 비잔틴 오 위대해. 막막 이런다? ㅋㅋㅋ. 아 짜증나 진짜루.

 

 

저당시의 비잔틴과 그 위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정리를 해보면 말야.

 

 

The Byzantine Empire ca. 1265

 

4년전 1261년.에 미카엘8세.가 다시와서. 4년 지나서의 지도. 십자군 오기직전에 흑해 동남 트레비존드.는 독자 제국이고. 오른쪽 룸 셀주크.는 몽골 일칸국에 하미지 해서리 몽골 땅이고. 아르메니아 킹덤이 아래에 있고. 레반트는 살라딘이 이집트 가서 세운 아유비드 맘룩이고. 

 

그리스땅은. 라틴제국.의 황제타이틀은 플랑드르 등 저지대 귀족들이 쥐었다가 저리 바로 쫓겨난거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아래 텟살로니카 킹덤.은 몬테페라토 후작애들이 킹.하다가 같이 먹힌겨 팔라이올로고스 비잔틴에게. 아래 아테네 덧치.는 뒤에 카탈란 애들이 이어가서 아라곤이 쥐는거고. 그아래 아카이아 자치구는 나폴리 앙주들이 이어받고. 비잔틴이 이 모레아.의 아카이아 지역 아래도 회복을 조금씩 한겨 저때. 

 

아드리아 해변에 에피루스 데스포타트.

Despot or despotes (Greekδεσπότης

translit. 

despótēs, "lord", "master")[1][2][n 1] was a senior Byzantine court title that was bestowed on the sons or sons-in-law of reigning emperors, and initially denoted the heir-apparent of the Byzantine emperor.

 

데스포트. 데스포테스. 비잔틴의 자리 이름이야.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처럼 비잔틴 황제 후계자 에게 주는 자리야. 이러다 이게 신적강하 한 황족애들 영지가 된거지. 십자군이 와서 쫓겨날때 발칸반도에서 버틴 비잔틴땅이 저 에피루스 데스포테스.가 지배하던 땅이야. 여긴 십자군애들에 하미지를 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어 비잔틴 미카엘8세 올때도. 

 

퍼런색으로 텟살로니카 땅에 왈라키안 텟살리. 

wallachian thessaly. 텟살로니카 킹덤의 위쪽을 비잔틴이 다시 먹고. 이 아래 땅이 왈라키안 테살리. 인데. 
왈라키안. 이란건 지금 루마니아.땅의 대부분 사람들이야. 이들이 이민족들 이동할때. 서로마 망하는 그 시절. 이 왈라키안들이 또한 텟살로니아땅에도 내려온겨. 이때부터 자리잡아서리 그리스에 박혀 사는겨 이들이. 이 그리스땅에 사는 왈라키안.들을 블라크. 라고 해.  그래서.

Vlachs (English: /ˈvlɑːk/ or /ˈvlæk/, or rarely /ˈvlɑːx/), also Wallachians (and many other variants[1]), is a historical term from the Middle Ages that designates an exonym—a name that foreigners use—mostly for the Romanians who lived north and south of the Danube.[2]

 

해서. 왈라키안.들을 또한 블라크. 라고 같이 쓰지만 엄격하게는 그리스땅. 즉 발칸 남부 전역에 이전에 온 왈라키안.들을 블라크. 라고 그리스사람들이 칭한거야. 이들을 아로메니안.들이라고 해

 

The Aromanians (AromanianRrãmãnj, Armãnj)[9] are a Romance[10] ethnic group native to the Balkans, traditionally living in northern and central Greece, central and southern Albania, the Republic of Macedonia, Kosovo and south-western Bulgaria. Especially in Greece, Aromanian identity is perceived as a cultural heritage and not as an ethnic identity. The term Vlachs is used in Greece to refer to Aromanians, but this term is internationally used to encompass all Romance-speaking peoples of the Balkans and Tatra Mountains regions.[11]

 

아로메니안.들은 알바니안.과 헷갈리믄 안돼. 전혀 달라. 이 아로메니안.들이 블라크. 그리스말로 블라키아. 라고 한겨. 헌데 지금은 블라크.란 대상을 발칸지역에 타트라 산맥 지역의 로망스 언어족들을 일컫다. 라고 하지만.

 

 

다시정리하면. 엄격하게는. 지금 루마니아 땅의 왈라키안.들이 이전에 그리스에 내려와 정착한 이들을. 아로메니안. 이라하고. 이들을 블라크. 라고 한거야. 

 

왈라키안.하면 지금 대부분 루마니아 사람들이고. 이 왈라키안.이나. 이전에 이들이 내려가서 정착한 아로매니안(블라크) 이나. 다 동로망스 언어족이야. 로망스.이고 로마 라틴어애들이야. 이전 로망스 썰.

 

즉 이 동로망스.라는 언어족이. 저 슬라브언어족이 후에 와서 주류들이 되었지만. 이들이 자잘하게 다뉴브 아래 디나르 알프스에서 발칸 산맥 전역에 퍼져 있어 소수언어족들로 현재.

 

저때 텟살로니아 땅에 왈라키안들이, 비잔틴 도망가고 십자군들이 와서리 지배할때 저 텟살로니아 아래에서 독자적 자치 지구를 만들었던거야. 

 

저때 위 왼쪽은 세르비아. 오른위는 불가리아.이고. 니카이아 있던 오른쪽 아나톨리아땅은, 저리 같이 갖고있다가, 오스만 자식 오르한에 가서 다 뺏긴거지.

 

 

애게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에 에우보이아 큰섬에 크레테 큰섬 등 지중해 섬들은 아직 베네치아 꺼야. 더하여 저 오른쪽 레반트에 인접한 키프러스 킹덤.

 

The Kingdom of Cyprus was a Crusader state that existed between 1192 and 1489. It was ruled by the French House of Lusignan. It comprised not only the island of Cyprus, but also had a foothold on the Anatolian mainland: Antalya between 1361 and 1373, and Corycus between 1361 and 1448.]

 

서기 1192년에서 서기 1489년.까지 3백년 킹덤이야. 뤼지냥 Lysinan 가문.이 3백년 킹이야. 이 마지막이 

 

Catherine Cornaro (GreekΑικατερίνη ΚορνάροVenetianCaterina Corner) (25 November 1454 – 10 July 1510) was the last monarch of the Kingdom of Cyprus. She was queen consort of Cyprus by marriage to James II of Cyprus, regent of Cyprus during the minority of her son James III of Cyprus in 1473–1474, and finally queen regnant of Cyprus. She reigned from 26 August 1474 to 26 February 1489 and was declared a "Daughter of Saint Mark" in order that the Republic of Venice could claim control of Cyprus after the death of her husband, James II.[1]

 

르네상스 여인 카테리나 코르나로.여. 뤼지냥 가문에 시집와서리. 남편이 죽어. 아들이 한살이야. 이여자가 여기 레그넌트 퀸.을 하다가 베네치아.에 눈물흘리면서 넘기는겨 연금받고 베네치아 가서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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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러스.는 이전 비잔틴꺼야. 1192년.이면. 십자군 4차 와서 비잔틴이 니카이아로 쫓겨나는게 1204년. 즉 십년 전에 비잔틴에서 나온겨. 당시 앙겔로스 조.가 선겨. 얘들 형제들의 내전으로 십자군 4차가 이리 온거고. 이 전에 조.가 콤네노스 조.야. 말년이 또한 끔찍한데. 넘어가고. 이 비잔틴의 천년 역사는 갈수록 끔찍해. 

 

그 콤네노스.의 핏줄이 키프러스 섬에서 자칭 황제를 한거야. 대륙엔 앙겔로스 조.가 황제를 하고. 

 

이 키프러스 사람들이. 음청난겨. 이들을 Cypriot 시프리오트. 그리스어로 키프리오이. 라 하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고대 이집트때도 여긴 문명이야. 그러다 로마들어가고 비잔틴에 있는 사람들이걸랑. 쉬운 사람들이 아냐 이들이. 저 키프러스.가 지금 터키와 그리스의 영토분쟁 하지만, 특히나 말야 이 터키 들은, 저 땅 온 게 서기 1300년 직전이야. 도둑놈 들이야 저게.

 

 

저땅이 비잔틴 떨거지 콤네노스.가 지배하지만, 스피리오트들이 대드는거야. 마침 말이지, 저때 십자군 3차 사자심왕 리차드.가 오는겨. 이탈리아에서 놀면서 쉬다가, 배타고 레반트 가는길에 저길 들른겨 키프러스섬에. 리차드는 놀러왔걸랑. 헌데 섬이 반란 하고, 더하여 저 콤네노스.가 벌벌 떠는겨. 리차드가 자기땅 뺏아온줄 알아. 이 콤네노스 핏줄이 살라딘이랑 연합을 해서 리차드를 치려는겨. 

 

 

리차드.가 콤네노스.를 내쫓아. 그리고 대리.를 대신 세우고 레반트에 갔는데, 키프러스를 통치를 못하는거지 대리맡은 애가. 리차드가 생각해보니, 자기가 키프러스.를 관리를 못해 저걸. 그 먼 잉글랜드에서 저길 머 어째. 저 민들도 엄청난 자부심에. 해서 이걸 레반트에 템플 기사단에 파는겨. 당시 가장 부자가 템플이걸랑 기부 많이 받아서리 현금 돌리는. 헌데 막상 템플 애들도, 바다 인접해서 저걸 돈주고 샀는데, 반란 하고, 이전 비잔틴 원주민도 드세고, 템플은 로마 카톨릭이여. 키프러스는 오소독시에 쩔었어. 그 반감이 음청난겨 저게. 

 

템플애들이, 다시 리차드.에 가서 막 비는겨. 아 돈 다시 돌려줘유. 우리 저거 안살텨. 

 

 

리차드.가 낙장불입 할수는 없고. 다시 계약 취소해주고, 아 이걸 어쩌냐 이거. 하다가. 마침 말야. 예루살렘 킹이

 

Guy of Lusignan (c. 1150 – 18 July 1194) was a French Poitevin knight, son of Hugh VIII of the Lusignan dynasty. He was king of the crusader state of Jerusalem from 1186 to 1192 by right of marriage to Sibylla of Jerusalem, and of Cyprus from 1192 to 1194. Having arrived in the Holy Land (where his brother Amalric was already prominent) at an unknown date, Guy was hastily married to Sibylla in 1180 to prevent a political incident within the kingdom. 

 

뤼지냥.의 기. 뤼지냥 가문.의 뤼지냥.은 Poitou. 프와투. 에 있어. 여기 수도가 Poitiers 프와티예. 백년전쟁때 장2세가 져서 포로된 곳. 앙굴렘 위야. 리차드.는 헨리2세 아들이야. 당시 이 프랑스 서쪽땅은 헨리2세의 앙주제국 하는 잉글랜드 땅이여. 이 뤼지냥 가문.도 하미지 하는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잉글랜드인겨 당시.

 

해서 이들이 헨리2세에게 대드는 전쟁하다가 십자군 원정 간 거걸랑. 저기 레반트 십자군 국가들에서 윗자리들을 이사람들이 하는겨. 당시 배런으로 와서리. 저때 이탈리아 허섭한 몬테페라토 애들도 텟살로니아 킹에 레반트 예루살렘의 킹을 해.

 

뤼지냥의 기.가 결혼한 여자가 예루살렘 킹.의 엄마여

 

Baldwin V (Baldwin of Montferrat, also known as Baudouinet; August 1177 – August 1186) was crowned co-King of Jerusalem with his uncle, Baldwin IV in 1183, and once his uncle died, reigned alone from 1185 to 1186 under the regency of Count Raymond III of Tripoli. He was succeeded by his mother Sibylla and stepfather Guy.

 

당시 예루살렘 킹.이 볼드윈 5세. 삼촌이 죽어서 조카가 받는겨. 헌데 얘가 8세에 킹을 받는데, 얘가 나병에 걸렸걸랑. 바로 죽어. 엄마가 레그넌트 퀸.을 하는겨. 이 여자도 마침 과부였걸랑. 잽싸게 재혼자리를 끼들어간게 뤼지냥의 기.여. 

 

 

 

리차드가 저 키프러스.를 처리를 해야하는데. 템플도 안갖겠다고 하지, 깝깝하던 차에. 자기 영지인 뤼지냥.가문애가 예루살렘 킹.이 된거야. 야 너 키프러스 갖아라. 마침 잘됐다. 하는거걸랑. 이땐 예루살렘 명목 킹.이란 자리에 주는게 아니라. 뤼지냥 가문.에 준거야 리차드가. 그래서 자연스레 잉글랜드 관할인거고. 

 

 

저걸 리차드가 뤼지냥에게 돈주고 팔았느냐. 이게 문제인데. 템플에겐 돈 주고 받은게 찍혔걸랑. 저건 기록이 없어. 돈을 받을 리가 없는겨. 당시 리차드에겐 뤼지냥 애들이 자기 관할앤데 그냥 준겨 하미지 더 열심히 하라 하면서. 

 

 

저러면서 뤼지냥 가문이 3백년을 갖고 가. 

 

 

저런 이야긴 십자군 레반트 이야기가 제대로 풀려야 하는데. 저 레반트 십자군이 제일 재밌어 저게. 정작 저걸 할라다가 지금 이따위로 가는건데.

 

저 레반트 십자군 2백년은, 유럽애들에게 두 가지를 준거야. 하나는 갈리아 게르만 애들에게 말이야. 그리스도에 대한 현실감을 줘. 쟤들이 레반트 안갔으면 한무당식 그리스도가 되었을꺼야. 저 2백년 다녀오는 동안 현실감을 갖아 얘들이. 교황을 줘 패고 감금도 하게 되는겨 그게. 

 

또한 역설적으로. Piety 파이어트. 경건 신성함을 찐하게 갖아. 
저 레반트 원정이 쟤들 문명을 만든겨.

반면에 오스만애들은. 걍 유럽 원정은 약탈 살인 이상은 없어. 아무런 현실감 아무런 경건함이 없어. 저게 지금 터키가 된거고. 마찬가지로 몽골들이 저따위로 된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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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이 미카엘 8세.가 팔라이올로고스 조.를 세우고. 땅을 반이상 회복하고. 죽어. 이후로 내전하면서 비잔틴은 끝이난거야. 2백년 팔라이올로고스 조.이지만. 첫 황제 죽고 끝난겨 이 비잔틴은.

 

Andronikos II Palaiologos (Medieval GreekἈνδρόνικος Β′ Παλαιολόγος; 25 March 1259 – 13 February 1332), usually Latinizedas Andronicus II Palaeologus, reigned as Byzantine Emperor from 1282 to 1328

 

아들이 안드로니코스2세. 이사람의 아들이 미카엘 9세. 둘이 나눠서 다스리는겨. 이 부자.가 황제를 할때 오스만이 베일리크에서 아빠 에르투룰.이 죽고 베이.가 되서리 1299년. 니카이아 니코메데이아를 위협하고, 해서 카탈란 용병을 불러서리 이 카탈란들이 이오니아땅들 찾아주다가 얘들을 초대해서 죽이는게 미카엘9세여. 

 

Andronikos III Palaiologos (Medieval GreekἈνδρόνικος Γ′ Παλαιολόγος; 25 March 1297 – 15 June 1341), commonly Latinizedas Andronicus III Palaeologus, was Byzantine emperor from 1328 to 1341.[1]

 

미카엘 9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3세. 

 

The Battle of Apros occurred between the forces of the Byzantine Empire, under co-emperor Michael IX Palaiologos, and the forces of the Catalan Company, at Apros on July 1305.

 

카탈란 용병 남은 애들이 모여서, 트라키아 아프로스.에서 비잔틴 황제 저 배반 미카엘 9세랑 전투를 하는겨. 카탈란이 여기서 이겨. 트리키아 땅을 아주 개작살을 내고 이 카탈란들은 내려가서 아테네 덧치를 차지해. 아빠 미카엘 9세.가 아프로스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죽어. 아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 할배 2세가 여전히 살아있어. 얘가 할배랑 전쟁하는게 1321-1328 비잔틴 내전이야. 손자가 이기고 할배는 은퇴를 해. 

 

 

John V Palaiologos or Palaeologus (GreekΊ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Iōannēs V Palaiologos; 18 June 1332 – 16 February 1391) was a Byzantine emperor, who succeeded his father in 1341 at the age of eight.

 

안드로니코스3세.의 아들이 요아네스 5세. 8세에 황제가 돼. 어려. 섭정을 두고 또 내전하는거야. 

 

John VI KantakouzenosCantacuzenus, or Cantacuzene[1] (GreekἸωάννης ΣΤʹ ΚαντακουζηνόςIōannēs ST′ KantakouzēnosLatinJohannes Cantacuzenus;[2] c. 1292 – 15 June 1383[3]) was a Greek nobleman, statesman, and general. He served as Grand Domestic under Andronikos III Palaiologos and regent for John V Palaiologos before reigning as Byzantine emperor in his own right from 1347 to 1354. Usurped by his former ward, he retired to a monastery under the name Joasaph Christodoulos and spent the remainder of his life as a monk and historian.

 

이때 칸타쿠제노스.의 요아네스6세. 칸타쿠제노스 가문은 귀족가문이야. 얘들이 이기고 꼬마 아이랑 공동황제를 하는겨. 실세는 얘가 되는거고. 저 내전도 7년을 했어. 1341-47

 

Matthew Asen Kantakouzenos or Cantacuzenus (Greek: Ματθαίος Ασάνη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Matthaios Asanēs Kantakouzēnos, Bulgarian: Матей Асен Кантакузин, "Matey Asen Kantakuzin" c. 1325 – 15 June 1383) was Byzantine Emperor from 1353 to 1357.

 

 

칸타쿠제노스 요아네스 6세가 자기 자식에게 주려고 해. 얘가 마타이오스. 꼬마 요아네스 팔라이올로고스.가 컸어. 스무살이 되었어. 저 부자를 상대로 싸우는겨. 1352-57. 팔라이올로고스.가 이겨. 칸타쿠제노스네를 쫓아내.

 

 

Andronikos IV Palaiologos (GreekἈνδρόνικος Δ' Παλαιολόγος; 11 April 1348 – 25/28 June 1385), 

 

이긴 요아네스5세.의 아들이 안드로니코스4세. 이 부자.가 또 내전이야. 아들이 이겨. 137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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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니코스 2세 3세.의 할배와 손자 싸움에선 세르비아.가 할배편. 불가리아.가 손자편을 들어.
칸타쿠제노스 가 섭정자릴 차지하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세력이 오스만베일리크와 옆 투르크의 베일리크야. 그러면서 발칸땅의 갈리폴리.를 오르한.에게 주는겨. 칸타쿠제노스.가 이겼으니. 여기에 자기 딸도 오르한.에게 주는거고. 
그리곤 다시 부자.가 다 큰 요아네스5세랑 싸울때도 오스만이 끼는겨. 





즉 오스만제국.은 말야. 비잔틴이 일부러 걍 준겨. 제발 니덜이 우리땅 먹어라. 한거야 저게. 저게 당시 비잔틴 귀족 들의 마인드고 쟤들 정체성이야. 

저러면서, 세르비아 불가리아.는 비잔틴을 버리는거야. 아 오스만 투르크 애들을 오히려 자기들이 부르고 말야. 얘들이 저 반대편에서 싸워주걸랑 팔라이올로고스와 연합해서. 처음엔 지고, 다음엔 이긴거지. 그러면서 칸타쿠제노스 애들만 쫓겨난거고 오스만은 발칸에 버티고 있는거야.

 

 

불가리아.는 2차 제국.이 아센과 피터 형제의 봉기로 세운거지만. 얘들이 누구냐.는 애매해. 슬라브냐 스텝의 투르크냐 왈라키안이냐. 하튼 시작이 정체성이 약해 이게. 그러다가 슬라브가 된건데 점점. 그래도 시작할땐 좋았걸랑. 뒤에는 이바일로.가 몽골애들도 몰아내고. 몽골 다음에 회복할때 얘들이 비잔틴땅을 잠식하면서 내전에 끼는겨. 그래도 투르크는 싫은거야 얘들은. 이들이 트라키아 땅을 잠식해. 저 비잔틴 내전 기간에. 

 

다시 보면, 이미 비잔틴은 말야. 미카엘8세가 대부분땅을 아래 빼고는 회복했지만, 바로 내전하면서, 오른쪽 구석탱이 콘스탄티노플 부근 그 2만제곱키로 외에는 저때 대부분 세르비아에 불가리아 땅이야 저게. 이미 저때부터.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3년 해서, 얘들이 2백년 지나서리 저기만 남은게 아니라, 저 내전 하는 서기 1300년대 중반에 이미 모든 땅은 남들 땅이 된거야.

 

 

불가리아.는 오스만에 그리고 바로 먹히는겨. 비잔틴 내전에 참여하면서 트라키아땅 먹다가 돌아오며 쳐들어오는 오스만이랑 싸우는겨 얘들이.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버리고 바로 불가리아와 전쟁을 해. 서기 1396년.

 

Ottoman Bulgaria 1396–1878

 

 

이후 5백년 가까이 오스만 하에 잇지만, 그 오백년을 전쟁하는겨. 얘들 음청나.

 

 

The Serbian Empire in the 14th century.

 

Stefan Uroš IV Dušan (Serbian Cyrillic: Стефан Урош IV Душан, 

pronounced 

[stêfaːn ûroʃ tʃětʋr̩ːtiː dǔʃan] (About this soundlisten)), known as Dušan the Mighty (Serbian: Душан Силни / Dušan Silni; 

c.

 1308 – 20 December 1355), was the King of Serbia from 8 September 1331 and Emperor and autocrat of the Serbs, Bulgarians, Greeks and Albanians from 16 April 1346 until his death

 

스테판 우로쉬 두샨. 위대한 두샨. 이사람때 비잔틴 텟살로니카 까지를 다 먹은겨 세르비아가. 팔라이올로고스.조 가 칸타쿠제노스 부자.랑 싸울때. 저때 불가리아.는 땅이 나뉘어 세개로. 그러면서 불가리아는 오스만이랑 먼저 붙고. 이걸 오스만이 이기고 세르비아를 다음에 치는거야

 

Kingdom of Serbia1217–1346

King Dragutin's realm1282–1325

Empire · Fall1346–1371

Prince Lazar's Serbia1371–1402

Despotate of Serbia1402–1537

 

Serbia under Turkish rule 1459–1804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보다는 쎄. 불가리아는 아센 피터의 정체성이 약해 힘 합치는게. 이민족들이 더 많은겨. 반면 세르비아는 슬라브야. 이걸로 합치는겨. 해서 오스만에 먹혔지만. 자기들 나름 독자적 영지를 세우면서 대들어. 이들이 19세기에 오스만을 몰아낸건. 저 사오백년의 질기디 질긴 안에서의 전쟁이여 저게.

 

 

 

 

 

중남미 애들도, 자기들 힘으로 독립을 해써. 자기땅에서 전쟁하면서.

 

똥남아 월남들도. 캄보디아 들도 라오스들도. 지들 힘으로 싸워서리 자기들 독립을해. 커뮤니즘을 세워서리 더 거지가 되던 말던.

 

 

세상 빠닥에서, 거의 유일한거 같어. 저런 역사가 없는 곳은. 남의 힘으로 벗어난건.

 

그러면서, 그 대접 받는건, 커뮤니즘과 싸운 유공자들 대접 받는건 명함도 못내밀더만. 어디땅보니. 

 

이념에 미쳐야지 유공자가 돼. 세상 어디 빠닥엔. 

 

국가.란 정체성이 없는거야 저게. 

 

 

중국 인민군 들이랑 같이 해서리, 인민 인민 하는게 너무 좋은건가?

 

 

 

참 으로 말야. 싕기한 곳이야. 

 

 

주어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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