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are Borgia (
Italian pronunciation:
[ˈtʃeːzare ˈbɔrdʒa]; Valencian: Cèsar Borja
[ˈsɛzaɾ ˈbɔɾʒa]; Spanish: César Borja
[ˈθesaɾ ˈβoɾxa]; 13 September 1475 [1] – 12 March 1507)
Prince of Andria
Prince of Venafri
Duke of Valentinois
Duke of Romagna
Duke of Urbino
Count of Diois
Duke of Camerino
Bishop of Pamplona
Archbishop of Valencia
Bishop of Castres
Bishop of Elne
Cardinal of Valencia
Abbot of the Abbey of Saint-Michel-de-Cuxa
Lord of Imola, Forlì, Sassoferrato, Fermo, Fano, Cesena, Pesaro, Rimini, Faenza, Montefiore, Sant'Arcangelo, Verucchio, Catezza, Savignano, Meldola, Porto Cesenatico, Tossignano, Solarolo, Monte Battaglia, Forlimpopoli, Bertinoro
체사레 보르자. 1475-1507. 이사람 연도는 기억해. 미켈란젤로.랑 같은 해야. 레오나르도 보다 20여년 늦어. 할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체사레의 도시설계자였어 짧게.
라파엘로.가 마르틴루터.랑 같은 해야. 1483
체사레 보르자.의 명함이야 저게. 많아. 베나프리.는 위키영어 오타야. venafro 베나프로. 가 맞아.
기본적으로. 저 타이틀의 땅들이 다 숙지가 되어야 이해가 돼 이야기가.
The peninsula's shape gives it the nickname lo Stivale (the Boot). Three smaller peninsulas contribute to this characteristic shape, namely Calabria (the "toe"), Salento (the "heel") and Gargano (the "spur").
이탈리아 반도 모양이. 로 스티발레. 부츠야. 장화 부츠. 서남단이 발가락이고 동남 끝 반도가 뒷굽이야. 발가락을 지금 칼라브리아.라는 레지오니. 뒷굽인 살렌토 지역.을 살렌토와 박차인 가르가노 지역을 포함해서 아풀리아.라는 레지오니 행정구역이야.
저 이탈리아 어가. 발가락이니 뒤꿈치라는 뜻이 아니라. 걍 모양이 저리 생긴거고 지명의 뜻과는 상관이 전혀 없어. 고대그리스애들이 로마인들보다 먼저 온곳이야 저기가. 고대그리스애들이 작명한거야.
저 지명이 헷갈린데 정리를 잘해야돼. 고대 로마이야기를 볼때. 원래 지금 아풀리아 Apullia 라는 아드리아해변. 뒤꿈치에서 발목위까지 지역이 칼라브리아. 였어. 이걸 아우구스투스 가.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라는 이름으로 바꿔. 그리고 지금의 발가락 칼라브리아 땅은
Bruttium 브루티움. 이라 해. 그리고 고쓰족들이 이탈리아를 점령한걸 비잔틴이 회복하고는 비잔틴애들이 뒷굽 살렌도 지역인 삐쭉이 반도와 브리티움의 바닥쪽.을 칼라브리아 덧치.로 공작을 세워. 브리티움.이라는 발가락이. 발등은 티레니아 해.이고 발바닥은 이오니아 해. 뒷굽의 동쪽은 아드리아해.야
저러다 롱고바르디 애들이 샤를마뉴의 아빠 소피핀에 쫓기고 내려와서. 저기도 차지하면서. 점점 칼라브리아 라는 이름이 브루티움.을 대체하게 된거야.
Starting in the third century BC, the name Calabria was originally given to the Adriatic coast of the Salento peninsula in modern Apulia.[4] In the late first century BC this name came to extend to the entirety of the Salento, when the Roman emperor Augustus divided Italy into regions. The whole region of Apulia received the name Regio II Apulia et Calabria. By this time modern Calabria was still known as Bruttium, after the Bruttians who inhabited the region. Later in the seventh century AD, the Byzantine Empire created the Duchy of Calabria from the Salento and the Ionian part of Bruttium. Even though the Calabrian part of the duchy was conquered by the Longobards during the eighth and ninth centuries AD, the Byzantines continued to use the name Calabria for their remaining territory in Bruttium.[5]
체사레.가 안드리아. 베나프로.의 프린스야. 안드리아.는 아풀리아. 베나프로는 몰리제.라는 레지오니의 서남끝이야. 여기가 세개 레지오니가 만나는 곳이야. 왼쪽 해변 주가. 라치오 Lazio 레지오니. 오른쪽 아래 해변.이 캄파니아 레지오니. 즉 티레니아 해를 따라서 칼라브리아. 캄파니아 라치오. 토스카나 가 있는겨. 라치오.에 로마 가 있고. 캄파니아에 나폴리가 있고. 베나프로.는 여기 완전 중간인거야.
발렌티노. 로마냐. 우르비노. 의 공작. 발렌티노.는 지금 프랑스 오베르뉴론 알프. 레종.의 발랑스. 이고 로마냐.는 에밀리아 로마냐. 레지오니의 오른쪽. 우르비노.는 지금 마르케 marche 레지오니.의 서북쪽이야. 여기 바로 위가 로마냐고 바로왼쪽이 피렌체.있는 토스카나. 아래 접한곳이 움브리아. 이 우르비노.에서 라파엘로.가 태어난겨. 이게 백작령에 공작령 4백년 하고 교황령으로 들어오고.
프랑스의 발랑스 바로 아래 디 die 디와 diois 라는 코뮨.이 있어. 여긴 백작령. 오베르뉴론 알프. 레종의 발랑스 공작을 받고 바로 접한 이 디와 백작령을 받아 루이12세한테. 프랑스 오를레앙의 루이12세가 한때 처남이자 사촌인 샤를8세를 이어서리 이탈리아전쟁하면서 합스부르크랑 싸울때 이탈리아의 동맹자가 이 체사레 보르자야. 얘한테 프랑스 땅을 주는겨 파리에도 초대하고.
다음 카메리노.의 공작. 카메리노.는 마르케 레지오니. 우르비노 바로 아래야.
팜플로나 비숍. 주교. 팜플로나는 나바라 킹덤의 수도야. 발렌시아 대주교. 스페인 발렌시아.라는 코무니다드.의 가운데야. 카스트르 주교. 여긴 프랑스 옥시탄 레종. 엘느 주교. 옥시탄 남부. 발렌시아의 대주교이름으로 카디널. 추기경. 생미셸드쿠샤 수도원 애봇. 원장. 옥시탄 남부 끝해변. 바로 피레네 산맥 접해.
이몰라 프롤리 사소페르라도. 페르모 파노 체제나 페자로 리미니 파이자. 몬테피오레. 산타칸젤로. 베루키오. 사비그나노. 멜도라. 토씨그나노. 솔라롤로. 폴림포폴리. 베르티노로.
의 로드. lord.
저기가 대부분 당시 로마냐. 지금 에밀리아 로마냐.라는 레지오니의 동쪽에. 저기 접한 지금 마르케 레지오니의 서쪽지역이야. 저기가 예전 페이펄 스테이트스. 교황령. 교황에 세금내는 곳이었는데 말이지. 이 전에가 아비뇽 교황정에 웨스턴 스키즘.해서 백여년 지나면서 교황이 힘이 죽었걸랑. 다 자잘자잘한 도시들인거야 코무네 수준을 좀 넘은. 이걸 체사레.가 아빠 교황을 배후로. 교황군단사령관이 되서리 저길 다 점령하는거야.
로어드. 로드 Lord 란 건. 피어리지. peerage 라는 귀족층에서 높은 층이 아냐 이게. 주님 에 쓰던 말이라 높게 여겨지걸랑.
듀크도 카운트도 마퀴스도 아닌 땅의 군주.가. 대게 두개야. 프린스. 로어드. 이 프린스.가 로어드 보다 윗자리야. 로어드.는 프린스 보다 아래야. 저 자잘한 땅들 스테이트들 각각의 군주를 로어드. lord 하는겨. 이 로어드.의 부인이. 레이디 야. lady 이 레이디 란 말이 높은 말이야 이게. 이게 나중에 레이디 앤 젠틀맨 해서리 젠틀맨과 동격이 된건데. 저 젠틀맨은 후진 하치리 귀족이야. 이걸 레이디 랑 동격화된겨 이게. 페미년들은 이따위에 대한 고찰이 없어. 아 페미 무시캐.
예전 서점에 가보니. 페미 코너에 여인. 을 如人 해서리. 여자도 사람과 같다. 느니 하고 싶다는 듯. 야 정말 저건 끔찍한 대갈빡 수준인데. 여 라는 같을 여.는 말이지.
如,甲骨文
(口,应答)
(女),表示女子应答。包容、顺从的“随性”是女性突出的性格特征之一,在男权时代被视为女性的美德。有的甲骨文
以“每”
代“女”
,表示“如”的“母性”特征。
造字本义:妇女唯唯诺诺,包容顺随。
여자가 응답하는겨. 부녀유유낙낙 포용순수. 웨이웨이누어누어. 무조껀 예쓰 하는겨. 여자가. 남자 말에. 비굴한 말이야 여자 입장에선. 저걸 양성평등이네 주장하민서리 저딴 단어를 지들 프로파간다로 쓰고 있으니.
양성평등을 실현합세다. 조온나게 코뮤네지 저게. 먼이냐 저게. 완전 사회를 죽이는거다 저건. 야 니 월급 억 가까이 받는거 평등하게 다 나눠저 니도 최저임금으로 공무원 월급받아. 인사권 평등 만 말고. 니덜이 방송출현하며 버는 돈도 최저임금으로 받아. 인세로 받는 돈들도 다 평등하게 나눠줘. 평등평등 대민서리 선동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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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이야기를 정리하자. 얜 한번 정리해 줘야해. 나폴레옹 끕이 될 뻔했걸랑. 똑같이 말야. 체사레가 너무 무서버서리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떨어진 스페인땅에 얠 감금하걸랑. 나폴레옹을 유럽바닥에서 멀리 세인트헬레나 에 보내듯이.
보르자 가문.을 봐야해 체사레 보르자.를 이해하려면. 이탈리아의 서기 1500년은 이게 쉬운이야기가 아냐. 유럽 이야기는 저때부터의 이야기가 하나하나가 쉬운게 아냐 이게. 한글러들의 이야기 푼건 너무 얄팍해. 시오노 나나미 할매의 이야기도 얕어 이게. 이 할매도 유럽사를 잘 몰라. 물론 한글러애들보다 수준이 월등하지만.
저 할매의 이탈리아 글들은 전부 다 보도록 해. 이탈리아 이야긴 무조껀 다 봐. 저 할매의 체사레 보르자.와 르네상스 여인들.도 봐 재밌어. 보르자 는 봤는데 여인들.네명 이야긴 안봤어.
저 할매의 체사레 이야기 를 이해하려면. 더 들어가야해. 저글을 봐도 저게 먼말인지 몰라 대게. 저당시 주변이야기를 모르걸랑 잘.
Pope Callixtus III (31 December 1378 – 6 August 1458), also known as Alfonso de Borgia (Spanish: Alfons de Borja), was head of the Catholic Church and ruler of the Papal States from 8 April 1455 to his death in 1458.
시작이 칼릭스투스 3세 교황이야. 1455-1458. 3년 재임해. 스페인 땅에서 최초로 교황이 된 사람이야 이사람이. 이 다음 스페인 출신이 이사람 조카인 알렉산더 6세 교황인겨. 체사레 아버지.
The Avignon Papacy was the period from 1309 to 1376
The Western Schism, also called Papal Schism, Great Occidental Schism and Schism of 1378, was a split within the Catholic Church lasting from 1378 to 1417[1] in which two, since 1410 even three, men simultaneously claimed to be the true pope, having excommunicated one another. Driven by politics rather than any theological disagreement, the schism was ended by the Council of Constance (1414–1418). For a time these rival claims to the papal throne damaged the reputation of the office.
아비뇽 교황정.이 1309. 로마를 버리고 얘들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 보니파티우스 8세 교황이 프랑스 필리프4세에게 게기다가 뚜드려 맞고 죽었어. 다음교황인 베네딕투스 11세는 1년도 안되서리 죽었어. 암살로 죽었다 소문 퍼지고. 조온나게 무서분겨. 클레멘스 5세 교황이 바로 짐싸서 드가는겨. 무조껀 충성충이야. 프랑스 가서 템플기사단장과 간부들을 화형시키면서 프랑스의 부채를 해결해줘. 70년을 아비뇽에 박혀있다가. 모든 유럽 군주들이 그러는겨 니덜 로마로 가라고. 프랑스 킹도 골치아픈겨 마치 자기가 인질 잡고있는양 눈치 보이고. 야 니덜 제발 좀 나가 하는거야. 해서 제노바 출신 후보이자 아비뇽 후보 로베르.와 나폴리 출신의 우르바누스.가 선거하고 나폴리가 이겨. 이거에 삐쳐서 아비뇽파애들이 다시 아비뇽엘 들어가. 이때부턴 웨스턴 스키즘 하는거걸랑. 아비뇽 교황정 67년에. 다음 웨스턴 스키즘 39년이야. 저게 110년인겨.
제노바의 로베르. 다음이 아비뇽에. 안티교황.인
Pedro Martínez de Luna y Pérez de Gotor (25 November 1328 – 23 May 1423), known as el Papa Luna in Spanish and Pope Luna in English, was an Aragonese nobleman, who as Benedict XIII, is considered an antipope (see Western Schism) by the Catholic Church.
페드로 마르티네스. 이사람은 안티포프 베네틱투스 13세. 꼭 앞에 안티포프.를 붙여야해. 교황 베네딕투스 13세는 18세기에 나오걸랑 로마에서. 이 사람은 스페인 사라고사 지역 출신이야. 이땐 아라곤이야. 아라곤의 귀족 가문인겨. 아비뇽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야 니덜 언제까지 이럴껴 선거에서 졌잖어 걍 들어가. 프랑크 킹에 로마 황제에 막막 직접 만나서리 욕질하는겨 서로. 이게 먼 개이냐 이 새꺄. 이때 당근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편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도1세야. 이사벨라 남편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의 할아버지야. 황제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이고. 아라곤이 페드로 편을 들어주는겨. 교황이 자기네 사람이걸랑. 이때 프랑스 킹은 미친놈 딱지 붙은 샤를 6세여. 백년전쟁 한가운데 잉글랜드에 몰릴때야. 아비뇽에 쟤들이 있던 말던 관시미도 없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공식 선언하는겨. 저땐 오스만이 발칸땅 다 먹을 때야. 콘스탄티노플만 달랑 남았어. 얀후스가 저때 티나온겨. 얀후스를 이 회의중에 이단선언하고 화형시킨겨.
According to Joseph McCabe, the council was attended by roughly 29 cardinals, 100 "learned doctors of law and divinity", 134 abbots, and 183 bishops and archbishops.
여기에 카톨릭의 카디널들 애봇들 비숍들 아치비숍들이 싸그리 모인거야. 로마를 정통 인정하고 아비뇽은 사이빈겨. 여기에 안티포프 페드로.가 도망가는겨 무서버서. 아라곤이 얘를 보호해줘. 죽을때까지 지가 교황 대고 저기서.
저 콘스탄츠.가 콘스탄츠 호수의 서쪽 들어온 땅이야. 이 호수가 스위스와 독일을 갈라. 콘스탄츠.는 지금 독일땅이야. 이 호수를 Bodensee 보덴지. 지.가 바다 이자 호수 야. 보덴 호.라고 해 독일말로.
저러면서 아비뇽교황정이 진짜 끝나는겨 110년 만에.
헌데 저때 말야. 교황이 되는 칼릭스투스3세.는 아라곤 사람인겨. 여기 주교고. 얜 당근 아비뇽 편이야. 아라곤 킹덤도 아비뇽 편이야. 콘스탄츠 공의회.도 얘가 아비뇽 대변인이야. 헌데 저 회의에 참석을 안해.
헌데 이사람이. 안티포프 페드로.에게는. 로마로 들어갑시다. 라고 설득을 한 사람이야. 들어 처먹지 않아서 문젠거지만.
저걸 종지부를 찍은 교황이 마르티누스 5세 교황이야. 군주들 입장에선 추기경 자리를 만드는게 교회업무중 가장 큰겨 이게. 교황 선출직. 저 스키즘이 끝나고 아라곤 킹이 마르티누스5세에게 우리 칼릭스투스 3세 되는 애 추기경자리좀 줘. 이걸 거절당해. 당근 기분 나쁘걸랑. 쟨 아비뇽 편이야. 대신 니네땅의 발렌시아 주교.나 해. 하는겨.
해서 이사람이 나중에야 카디널이 되고. 마르티누스 다음 세번째인 20여년 지나서. 스페인땅 출신 첫 교황이 되는겨. 이때 나이가 77세야. 3년 하고 죽어. 이사람이 한 게 유명한건 잔다르크.를 복원시켜준겨. 잔다르크.는 무죄야 이사람때메.
Pope Alexander VI, born Rodrigo de Borja (Valencian: Roderic Llançol i de Borja
[roðeˈɾiɡ ʎanˈsɔl i ðe ˈbɔɾdʒa], Spanish: Rodrigo Lanzol y de Borja
[roˈðɾiɣo lanˈθol i ðe ˈβoɾxa]; 1 January 1431 – 18 August 1503), was Pope from 11 August 1492 until his death. During the Age of Discovery, the Iberian-born pope's bulls of 1493 confirmed or reconfirmed the rights of the Spanish crown in the New World, following the finds of Christopher Columbus in 1492.[3][4] He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of the Renaissance popes, partly because he acknowledged fathering several children by his mistresses. Therefore his Italianized Valencian surname, Borgia, became a byword for libertinism and nepotism, which are traditionally considered as characterizing his pontificate. Two of Alexander's successors, Sixtus V and Urban VIII, described him as one of the most outstanding popes since Saint Peter.[5]
저 칼릭스투스3세. 가 재임때 카디널. 추기경.으로 올린 사람이. 자기 외조카 로드리고 데 보르하. 보르하 가문의 로드리고야. 스페니쉬로 보르하. 이지만. borja 가 이태리 와서리 borgia 되면서 보르자 하는겨 이게. borja 는 보르하.로 읽어야 해. borgia 일때 보르자. 하는겨. 하튼 걍 보르자 해.
로드리고. 가 외삼촌 칼릭스투스3세 가 죽고. 30여년 지나서인 1492년.에. 다섯번째 대에서 교황이 돼. 막 이탈리아전쟁이 벌어질때야. 식스투스4세가 나폴리랑 틀어져서리 샤를8세에게 황금사과 던져주고 죽고. 다음 인노켄티우스 8세 교황이 미친 하인리히 크라머.가 주작으로 써댄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마녀잡는 망치.라는 마녀사냥 책 공인해주고 뒈지고. 나서 로드리고.가 알렉산더 6세 교황이 되는겨. 나이가 이때 61세야. 11년 재임하고 72세에 식중독으로 죽은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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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Glass of Wine with Caesar Borgia (1893) by John Collier. From left: Cesare Borgia, Lucrezia Borgia, Pope Alexander VI, and a young man holding an empty glass. The painting represents the popular view of the treacherous nature of the Borgias - the implication being that the young man cannot be sure that the wine is not poisoned
존 칼리어. 가 1893년에 그린 그림. 체사레 보르자의 포도주 잔. 포도주를 따르려는 턱수염이 체사레. 가운데 여자가 다섯살 어린 루크레치아 보르자. 여동생. 아빠 알렉산더 6세 교황. 젊은애는 몰라 누군지. 가만히 보면 하얀 유리잔을 들고 있어. 보르자들의 트레쳐러스. 사기치고 배반하는 성격으로 알려진 시선을 대표하는 그림 이라는 거지. 저 젊은 애가 오른손으로 잔을 내밀 지 않아. 술을 받으려는 자세가 아냐. 독이 들은 거 아닌가 하미 수동적인듯한 포즈라는겨. ㅋㅋㅋ.
존 칼리어. 가 저 그림보다 유명한건. 레이디 고다이바.
Lady Godiva, 1898, Herbert Art Gallery & Museum
Godiva, Countess of Mercia (/ɡəˈdaɪvə/; died between 1066 and 1086), in Old English Godgifu, was an English noblewoman who, according to a legend dating at least to the 13th century, rode naked – covered only in her long hair – through the streets of Coventry to gain a remission of the oppressive taxation that her husband imposed on his tenants. The name "Peeping Tom" for a voyeur originates from later versions of this legend in which a man named Thomas watched her ride and was struck blind or dead.
고다이바. 머시아 백작부인. 로어드 레이디. 를 도시들의 군주들.을 체사레 처럼 타이틀로 주는 경우도 있고. 일반명사로 군주들을 로어드 레이디 하는경우도 있어. 백작부인을 레이디. 하는겨. 레이디.는 높은 말이야 이건.
칠왕국체제일때. 지금 미들랜드 넓은 땅이 머시아 킹덤 이었어.
Leofric (died 31 August or 30 September 1057) was an Earl of Mercia. He founded monasteries at Coventry and Much Wenlock. Leofric is most remembered as the husband of Lady Godiva.
남편이 레오프릭.이야. 머시아 킹덤 안에 백작인겨. 카번트리 coventry. 지역이야 정 가운데야 여기가. 11세기 중반이야. 백작이 세금을 올린겨 자기 영지에. 이걸 부인 고다이바.가 그거 너무한거 아니냐 따지니까 이 여편네가 먼 개소리여 니가 나체로 거리에 돌아다니면 세금 올린거 취소하께. 장난으로 던진 말이걸랑. 헌데 저걸 진짜 저 여자가 한거야. 카번트리 거리를 저리 다닌겨. 민들이 그걸 알고 다 숨어. 창문을 다 닫고 안볼려고. 헌데 인간이 그럴 수가 없잖오. 호기심 . 몰래 보는겨. 저게 관음증의 시작이야. 보면서 음해져서 올가선생이 오는겨. 보이어리즘. voyeurism 하는데 저건 불어 voir 봐흐. 얘들은 보는게 봐흐야. 영어는 피핑 peeping 을 써. 피핑은 구멍이나 틈새로 엿보는겨.
고다이바.나 레오프릭.은 역사적 인물이고. 진짜 저런 일이 벌어진거냐 픽션이냐 논픽션이냐 말이 많고.
The legend of the nude ride is first recorded in the 13th century, in the Flores Historiarum and the adaptation of it by Roger of Wendover. Despite its considerable age, it is not regarded as plausible by modern historians,[citation needed] nor is it mentioned in the two centuries intervening between Godiva's death and its first appearance, while her generous donations to the church receive various mentions.
13세기에 처음 기록이 되다. 즉 1200년대에 이미 알려진겨 저 이야긴. 중요한건 말야. 저런 이야기들이 있다는거야. 중세 영주들이 저런 이야길 알고 민들도 저런 이야길 알아. 저런게 롤 모델이 돼 사실이던 아니던. 유럽애들은 저런 이야기가 있었어 이미 저때에.
조선에 저따위 이야기가 있냐. 동양빠닥에 저따위 이야기가 있냐. 저런게 쟤들 모럴 수준과 동양빠닥의 어글리한 모럴 수준의 차이야 또한.
동양빠닥은 어글리한 걸 인정해야해. 참 싕기한겨. 유교놀이를 오백년 찐하게 한 인간들이. 추악한겨. 이게 웃기면서도 당연한겨 심리적으로. 도덕에 치인들의 그 그림자가 오백년 눌린거걸랑. 구한말 외국인애들 글들이 또한 말야. 조선시대 남자들 특히. 특히나 공무원 고위직 들. 추악한겨. 거 서유견문 미국 외교관애가 일기가 그래 옷 훌훌 벗어대고 술냄새 풍기고. 저건 말야 공통된 이야기야. 조정에 가는 들 옷 꼬라지가 빨지도 않고 술자욱 그대로. 아가리에선 술냄새 풍기고.
저기에 무슨 모럴이 있고 도의가 있고 윤리가 잇어. 걍 오백년 내내 적폐놀이하면서 상대 죽이는게 일상이고. 도덕 강요질에 정작 선비란 들은 찬하의 말종이 된겨 저게. 그게 박지원의 양반전이야.
제왕처럼 귀하고 제후처럼 부유해져도
첩을 두는 풍속이 없고
일부일처가
임금으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봄날 안방에서나
가을날 다듬이질을 하면서도
원한이 없다
- 제15편〈여자를 대접하는 예절〉中
서유견문에 있다는 글인데. 나중에 저런 이야길 풀 시간이 있나 몰겄는데. 저당시 미국 대통령 누구냐. 거 악수할라는데 서넛이 넙죽 절하민서리. 걘 뻘쭘해 하고. 저게 골때리는겨 저게. 저 서유견문을 보면 당시 그나마 깨인 애들 조차도 어떤 시선의 폭을 갖고 있는 지 파악이 되걸랑.
헌데 쟤 조차도 하나 보는건. 첩을 두지 않는거에 놀란거야. 저게 큰 거야. 인간의 모럴 이란 면에서. 이 동양빠닥 들과 무슬림들이 야만에 개망한 이유는 저 하렘과 유너크 환관놀이야. 이걸 당연시 해댄거걸랑. 저게 동양빠닥이 가 지금 된 이유야. 저 시선이 그대로 인도에 심심하믄 여자들 강간하고 해대는게 그런겨 저게. 중국이도 마찬가지고.
유교라는 도덕 하던 들이. 가장 추악하게 살던 들이란게 역설인거지. 어글리한 족속들인거야. 저런 족속을 여전히 지폐와 동전으로 모심질 하는 나라는. 전 세 계 에서 여기가 유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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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고다이바.는 위대한 이야기야 그래서.
John Maler Collier
(/ˈkɒliər/; 27 January 1850 – 11 April 1934) was a leading English artist, and an author.[1] He painted in the Pre-Raphaelite style, and was one of the most prominent portrait painters of his generation. Both his marriages were to daughters of Thomas Henry Huxley. He studied painting at the Munich Academy starting in 1875
저 화가.가 존 칼리어. 인데. 이사람이 재밌는게. 물론 그림들 참 좋지만 말야. 장인이 토마스 헨리 헉슬리.야. 중요한 인간이야. 재민는건. 이사람이 저 헉슬리가 딸이 다섯인데. 둘째딸과 결혼하고. 이여자가 이삼년후에 죽어. 막내 처제랑 그 몇년후에 결혼해.
저 장인인 토마스 헨리 헉슬리. 가 찰스 다윈의 불독이야. 열렬한 진화론자야.
Originally coining the term in 1869, Huxley elaborated on "agnosticism" in 1889 to frame the nature of claims in terms of what is knowable and what is not. Huxley states
이사람이 애그노스티시즘. 그노시스.가 know 알다의 그리스 말이야. 반대야. 모른다. 불가지론.으로 번역해. 저말을 만든 사람이야. 헌데 다들 오해하는게 머냐면. 불가지론자. 해서리. 알 생각 말아라. 가 아냐. 저사람이 저 말을 만들면서 저리 써.
불가지론. 애그노스티시즘. 이란건 말이다. 크리드.가 아니라 매쏘드.다. 크리드 란건 신앙적 믿음 이야. 이건 근거 없이 믿는겨 그냥. 내 말의 핵심은 현대 과학의 근본 축. 단 하나의 원칙을 학실하게 적용하라는 것에 있다. 인털렉트. 리즌. 이라는 의식. 이성. 의 영역에서. 그 이성이 너를 데려 가는 곳으로 넌 따라가라. 어떤 주저함도 하지 말고. 이성의 문제에서. 이런 짓은 절대 하는 척도 말아라. 즉.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닿는 짓. 은 절대 근처도 가지 말라.
불가지. 알 수 없는 영역이 지금 현재 있지만. 너의 지성. 이성.은 그걸 불가지 에서 가지 하게끔 사유할테니 걱정말고 따라가서리 계속 가지 하도록. 알 수 있도록.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꾸도록 하라. 는거야. 세상에 증명되지 않는 것은 없어.
이것을 위한 하나의 메쏘드. 방법론으로 만든 개념일 뿐이다 내가 만든 개념 불가지론.은.
칸트.의 말도 저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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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가
Thomas Henry Huxley PC PRS FLS FRS (4 May 1825 – 29 June 1895) was an English biologist specialising in comparative anatomy. He is known as "Darwin's Bulldog" for his advocacy of Charles Darwin's theory of evolution.[2]
과학.이 그야말로 봇물이 터질 때걸랑 저때가. 우주 모든 것을 알 수 가 있어. 그래야만 해.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야. 매크로 뿐 아니라 마이크로 도 현미경으로 다 디다보던 시대가 되었어. 현미경은 저 북 르네상스 네덜란드가 만든겨 이미. 가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된겨. 불가지.가 방점이 아냐.
규일영.이란 망원경으로 감히 하늘 을 보려 하다니. 저게 지금 이땅바닥의 환경론자 하는 거랑 똑같은거지. 도롱뇽이 어쩌고 . 한 사람이 디비 누워있다고 모든 공사를 중단하고. 인권 대며 그 사람 앞에가서 무릎꿇고 협상 . 헌데 말야. 탈원전 한답시고 모든 산을 다 깎아서리 태양광 패널 설치하는데 환경론자애들은 다들 대체 어디 간거냐.
이땅바닥 이념놀이는. 단 하나의 종속개념들 뿐이고. 결국 편가름이고. 결국 적폐놀이 이상 없어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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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체사레 보르자 은제 하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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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drigo de Borja was born on 1 January 1431, in the town of Xativa near Valencia, one of the component realms of the Crown of Aragon, in what is now Spain. His parents were Jofré Llançol i Escrivà (died bef. 24 March 1437), and his Aragonese wife and distant cousin Isabel de Borja y Cavanilles (died 19 October 1468). His family name is written Llançol in Valencian and Lanzol in Castillian (Spanish). Rodrigo adopted his mother's family name of Borja in 1455 following the elevation to the papacy of maternal uncle Alonso de Borja (Italianized to Alfonso Borgia) as Calixtus III.[6]
로드리고 데 보르하. 알렉산더 6세교황. 체사레의 아버지. 발렌시아 에서 태어났어. 보르자. 라는 성을 엄마한테서 갖고와. 부모가 먼 사촌지간이야. 이사람에게 카디널 을 준 칼릭스투스3세 교황은 머터널 엉클. 엄마쪽으로해서 삼촌이란겨. 엄마랑 남매인겨. 외삼촌. 저 윗대는 말야 사라고사 지역이야. 아라곤 내륙 에서 발렌시아 해변으로 움직인겨 이사람때.
알렉산더6세 교황이 61세인 1492년.에 교황에 오를때 체사레.가 1475년 생이니까 17세야. 얘한테 주교자리를 막막 주는겨 수도원장 자리랑. 이때 팜플로나.는 자기 아버지때 고향 근처고. 자기가 태어난 곳 발렌시아.는 대주교 자리를 줘. 이 자리에서 카디널. 추기경자리도 주는거야. 정작 말야. 체사레 보르자.는 저 스페인땅에 한번도 간 적이 없어. 죽기전에 감옥살이 할 때나 간겨 ㅋㅋㅋ.
- Pier Luigi
- Giovanni (or Juan)
- Cesare (or Cesar)
- Lucrezia
- Gioffre (or Giuffre, Jofré in Valentian, Goffredo
이사람 자식들. 즉 체사레의 형제들이 중요해.
Pier Luigi de Borgia, 1st duke of Gandía (Spanish: Pedro Luis de Borja, Latin: Petrus Ludovicus de Boria) (1458 or 1460[1]–1488[2] or 1491) was a Valencian noble. Pier Luigi was the son of Cardinal Rodrigo Borgia (later Pope Alexander VI), and half-brother of Cesare Borgia, Gioffre Borgia, Giovanni Borgia and Lucrezia Borgia
첫째가. 피에르 루이지 디 보르자. 그라나다 전쟁.에 참여해.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던 나스리드. 아랍족이야 얘들은. 레콩퀴스타를 마무리하는 전쟁이야. 저게 마지막 10년 전쟁이야. 얜 발렌시아 태생이야. 아빠 알렉산더6세가 외삼촌때 발렌시아 주교.가 되고 여기가 다음에 대교구가 되서리 대주교가 돼. 이들은 발렌시아 사람인겨. 첫째가 여기서 그라나다 참전한겨. 핏줄이 좋아 외삼촌은 교황이었고 아빠는 발렌시아 대주교야. 결혼을 카스티야 왕족 핏줄 여자랑 해.
저 전쟁 기간에 죽어. 아마 전쟁하다가 죽은듯 한데 막판에.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가 전쟁 중간에 간디아 땅을 줘. 공작령으로 올려주고. 여기가 발렌시아 에 있어. 발렌시아가 얘들 본거진겨. 죽고서 마누라.가 동생 지오반니와 재혼을 해.
알렉산더는 대주교에 교황이야. 마누라가 있으면 안돼 공식적으론. 즉 다 미스트리스. 애인인겨 엄마들이. 다음 지오반니 체사레 루크레치아 죠프레.는 엄마가
Giovanna dei Cattanei (13 July 1442 – 24 November 1518[1]), commonly known as Vannozza dei Cattanei, was an Italian woman who was the chief mistress of Cardinal Rodrigo de Borgia, later to become Pope Alexander VI. Amongst them all, her relationship with him lasted the longest.[2]
- Cesare (1475–1507)
- Giovanni (1476–1497), 2nd Duke of Gandia
- Lucrezia (1480–1519)
- Gioffre (born 1481 or 1482; died 1518)[3][6]
반노쪼 데이 카타네이. 열살정도 어려. 이여잔 만토바 출신으로 보고. 로마로 이사와서 여관들 여러개를 운영한 사장이야. 알렉산더가 카디널로 오르면서 로마에 있을 때 만난거지. 해서 체사레부터는 로마에서 낳은겨. 지오반니.가 체사레 보다 형이다 동생이다 확실치가 않아. 피에르 루이지.는 배다른 형이야. 얘가 죽고 간디아 공작을 받은게 지오반니.라 얘가 형일수도 있고. 아니다 체사레가 주교자리 받아서 동생으로 간거다 할 수도 있고.
체사레.랑 막내 죠프레.랑 여섯살 차이야. 알렉산더가 1431생이니 막내를 나이 50에 낳은겨. 교황 자리 이전에 이미 다 낳아서 막내는 열살이 넘은거고.
문제는 말야. 알렉산더6세 교황이 오르는 1492년.이후 2년 후 1494년이 이탈리아 전쟁 65년 발발할 때인겨. 샤를 8세가 나폴리를 먹으러 오는거야. 그 바닥엔 밀라노.도 먹으려 하는거고.
Cesare was initially groomed for a career in the Church. Following school in Perugia and Pisa, Cesare studied law at the Studium Urbis (nowadays Sapienza University of Rome). He was made Bishop of Pamplona at the age of 15 and archbishop of Valencia at 17. In 1493, he had also been appointed bishop of both Castres and Elne. In 1494, he also received the title of abbot of the abbey of Saint-Michel-de-Cuxa.[12] Along with his father's elevation to Pope, Cesare was made Cardinal at the age of 18.[10]
체사레.가 아빠 빽으로 교황 이전에 이미 팜플로나 주교가 되고. 교황때 맞물려서 발렌시아 대주교가 돼. 프랑스 땅의 카스트르.와 엘느. 의 주교가 돼. 그 아래 생미셸드쿠사 수도원장도 돼. 카디널. 이 제일의 교황정 권력자리야. 18세에 되는겨. 이게 1494년이야. 와중에 대학교육을 다 받아.
Charles invaded Italy with 25,000 men (including 8,000 Swiss mercenaries) in September 1494 and marched across the peninsula virtually unopposed. He arrived in Pavia on 21 October 1494 and entered Pisa on 8 November 1494.[16] The French Army subdued Florence in passing on their way south. Reaching Naples on 22 February 1495,[17] the French Army took Naples without a pitched battle or siege; Alfonso was expelled, and Charles was crowned King of Naples.
샤를 8세가 2만 5천 병력으로 이탈리아에 들어오는게 1494년 9월이야. 밀라노 아래 파비아.에 10월 말. 아래 피사 11월. 이때 로마에 교황이 알렉산더6세야. 벌벌 떨었어. 헌데 졸 웃긴건. 프랑스 애들이 다시 이전 그리스도 떠받들던 때로 온건지. 아비뇽이전에 우습게 보던 교황대접 안하고 깎듯한겨 알렉산더에게. 아무런 짓도 안해. 그래도 말야. 이때 나폴리를 가면서. 인질로 데려가는게 체사레.야. 교황 너 이상한 짓 말어 하는거걸랑. 탱자 탱자 놀다가 나폴리에 다음해 2월에 도착한거야. 여기서 나폴리를 약탈하고 이전 킹 알폰소를 쫓아내고 나폴리 왕관쓰고. 대리 세우고 돌아가는겨. 이때 나폴리 약탈 소식 포함. 이탈리아가 처음으로 뭉친거야. 돌아가는 길의 샤를8세와 싸워.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도 들어와. 쫓겨난 자기 아라곤 방계들을 다시 앉혀. 샤를8세는 도망치듯 돌아가고. 건진 건 아무것도 없어. 걍 여행 한번 하고 온거야.
샤를8세는 다시 도전할라다가. 빚때문에 용병을 못구해. 그러다가 테니스장 대들보에 마빡깨져서 죽어. 3년 후에.
인질 볼모로 잡혀갔던 체사레.는 샤를이 나폴리 가는 길에 탈출을 했어. 샤를은 그냥 간거고.
On 17 August 1498, Cesare became the first person in history to resign the cardinalate.[16] On the same day, Louis XII of France named Cesare Duke of Valentinois, and this title, along with his former position as Cardinal of Valencia, explains the nickname "Valentino".
샤를이 봄에 죽어. 체사레가 말이야. 저 해에 카디널. 추기경 자리를 사임하는거야. 최초야 추기경직을 던진 인간은. 같은 날 프랑스 루이12세가 발렌티노. 발랑스 공작에 체사레를 임명을 해. 스페인 발렌시아의 대주교에서의 카디널이어서리. 발렌티노.라고 새로 작명을 한겨 루이12세가. 즉 이건 이미 루이12세와 다 말이 된거야.
이게 판세가 재밌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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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로 다시 돌아가서. 즉 이탈리아 전쟁의 황금사과의 미끼는 나폴리였걸랑. 이전 썰한 나폴리의 조안나 1세와 조안나 2세.에 아비뇽 교황정에 웨스트 스키즘의 연장선인데.
나폴리는 앙주의 샤를.이 괼피 기벨리니 내전할때 황제파 기벨리니의 핵인 호헨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2세 자식들 내쫓으러 온거걸랑. 그리고 나폴리를 다시 먹은겨 프랑크가. 시칠리아와 함께. 그러다 시칠리아는 만종 으로 아라곤에게 뺏긴거고.
앙주의 샤를.은 성루이9세의 동생이야. 카페의 앙주야 이때는. 나폴리는 카페의 앙주.의 샤를에서 이어받는거야.
헝가리의 앙주 킹들 할때 이 앙주도 저 앙주의 샤를.의 자식들이야. 카페 앙주야.
이 카페의 앙주.가 발루아의 앙주.가 되는거야.
카페 앙주의 형.이 성루이야. 성루이9세 아들이 필리프3세고. 이 차남.이 발루아.의 백작이었어. 이 발루아 백작이. 카페 앙주 샤를의 손녀랑 결혼을 해. 증조할배가 같은 세컨드 커즌인거야. 그러면서 다우리.로 앙주 땅을 이 발루아 백작이 받는겨. 어차피 카페 앙주는 나폴리 땅이 있걸랑. 즉 손자 손녀 결혼으로 성루이9세 핏줄로 넘어온겨 저게.
저때부터. 앙주가 발루아 앙주.가 되는거야. 세컨드 커즌이지만 남자가 갈린겨.
발루아 앙주.는 저 이후 필리프6세때 프랑스킹을 배출하는거고. 그래서 백년전쟁이 나는거고.
조안나 1세.가 문제 많걸랑. 첫 결혼한 앤드류.가 독살당했니 할때. 헝가리 루이대제 동생이걸랑 죽은 앤드류가. 같은 카페앙주야. 그리고 이 조안나1세가 결혼 복잡 문제로 아비뇽 교황정에 찰싹 들러붙어서리 로마 교황정과 사이 안좋고. 자식 없이 죽을 때 나폴리를. 카페의 앙주 핏줄에 안주고 저 바뀐 발루아 앙주의 루이에게 던져주고 죽은거야.
해서리. 이때 카페앙주와 발리아앙주.가 싸우는겨 나폴리를 두고. 이긴 쪽이 아래 두라초.의 샤를이야. 얜 카페앙주야. 이사람이 헝가리 루이대제 죽고 마리만 달랑 남았을때 헝가리 킹도 뺏어서 하다가 죽어. 해서 헝가리 마리가 지기스문트 나중 로마황제되는 이랑 결혼하는거고
할때. 달랑 낳은 딸이 조안나2세야. 즉 카페앙주야. 로마 교황정이랑 사이가 안좋아. 자식이 없어. 조안나1세랑 아빠가 웬수지간인데 오히려 똑같은 짓을 해. 나폴리를 저 발리아 앙주.의 자식들에게 준다면서 죽었어.
해서 나폴리 킹을 한게 발루아 앙주.의 르네. 인거야. 이때 앙주는 공작령이야. 얘를 무력으로 몰아낸게 옆의 시칠리아 킹.인 약혼자였다던 아라곤의 알폰소5세야.
An opportunity for Alfonso to reconquer Naples occurred in 1432, when Caracciolo was killed in a conspiracy. Alfonso tried to regain the favour of the queen, but failed, and had to wait for the death of both Louis (at Cosenza in 1434) and Joanna herself (February 1435). In her will, she bequeathed her realm to René of Anjou, Louis III's younger brother. This solution was opposed by the new pope, Eugene IV, who nominally was the feudal lord of the King of Naples. The Neapolitans having called in the French, Alfonso decided to intervene and, with the support of several barons of the kingdom, captured Capua and besieged the important sea fortress of Gaeta. His fleet of 25 galleys was met by the Genoese ships sent by Visconti, led by Biagio Assereto. In the battle of Ponza that ensued, Alfonso was defeated and taken prisoner.
조안나2세가 1435년에 죽어. 발루아 앙주의 르네.에게 준다고 하고. 교황은 조안나1세부터. 로마는 나폴리가 지긋지긋한겨. 쟤들이 인정한 발루아 앙주도 싫어. 프랑스는 아비뇽때메 지긋지긋 한겨. 당연히 반대야 로마교황은. 아휴 저노믜 110년 아비뇽. 그 아비뇽을 편든 조안나1세에 스키즘땐 조안나2세도 저 아비뇽 편. 더군다나 또 프랑스애가 와. 싫은거지.
1435년 저때부터.
After the return of René to Provence, Alfonso easily reduced the remaining resistance and made his triumphal entrance in Naples on 26 February 1443, as the monarch of a pacified kingdom. In 1446 he also conquered Sardinia.
거의 십년 가까이를 전쟁을 한겨. 아라곤의 알폰소5세와 프랑스 발루아 앙주 르네쪽이랑. 그리고선 나폴리도 아라곤 크라운의 땅이 된거야.
프랑스 본토는 저당시 백년전쟁 막바지야. 아라곤의 알폰소5세와 발루아 앙주랑 전투 시작인 1435년.이 백년전쟁 막바지 이자 프랑스가 판세를 쥐는 해야. 이전에 잔다르크 나오면서 정신적으로 뭉치고. 저 해에 부르고뉴 현명공이랑 아라스 조약을 맺어서리 부르고뉴가 그제야 프랑스 킹덤과 손을 잡아. 그러면서 잉글랜드를 내 쫓는건데. 저 와중에 아라곤이랑 프랑스가 싸우는겨. 프랑스가 저기까지 지원하기가 벅찬거지.
저때가 프랑스가 애매한 입장이었어. 잔다르크 부터 말야. 이때 잔다르크는 정신적으로 뭉치게 해준 거고. 실질적으로 가장 큰 힘이 된게. 샤를 7세의 마누라.가 저 발루아 앙주의 마리.야. 발루아 앙주.의 마리.가 아빠가 발루아의 앙주 공작인데. 엄마가 하필이면 아라곤 킹덤의 딸이였걸랑. 해서. 백년전쟁 후반에. 잔다르크 죽고서리 저때 발루아 앙주 쪽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줘. 특히나 장모님인 아라곤 여자가 아라곤 병력을 적극적으로 개입을 시키는겨. 해서 저 1435년 아라곤과 발루아 앙주 르네랑 싸우기 전엔 아라곤이 프랑스 편을 들어서리 백년전쟁때 해준겨 얘들이.
앙주 르네.가 앙주 마리.라는 샤를7세 마누라의 남동생이야.
헌데 저때부터. 아라곤이랑 프랑스랑 틀어져 버리는거야. 그리곤 재수좋게 프랑스 쪽에서는. 부르고뉴.가 잉글랜드에 등돌리고 프랑스 킹덤으로 돌아선겨. 저게 하필 1435년이야. 프랑스는 재수가 좋은겨 이게.
저러면서 나폴리.를 두고서리 아라곤과 전쟁할때. 여기의 전쟁 대리인들이. 불쌍한 제노바에 밀라노인거야.
제노바가 베네치아랑 전쟁하면서 점점 힘 빠지고 오스만에게도 치이고. 이걸 밀라노 공작 비스콘티 가문이 먹어. 비스콘티 공작들일때도 프랑스랑 결혼으로 엮여 친하고 뒤 스포르차.도 시작은 프랑스에 도움청하는 정도였으니.
나폴리를 두고 싸우는건 아라곤과 해전인거야. 저기 전초기지가 결국 제노바인겨. 이젠 제노바가 이지경까지 된거야. 이때 태어난 인간이 콜럼버스.야. 제노바는 더이상 기대할게 없어. 저때 에이지 오브 디스커버리. 탐험의 시대야. 제노바 인간들이 포르투갈 스페인 잉글랜드 프랑스.의 스폰을 받으러 떠나는겨. 제노바는 저러다 이탈리아전쟁때는 스페인에 찰싹 들러붙어서리 결국 카를5세의 부채를 쌩까임당하고 걍 기우는겨 쟤들은.
할때 말야. 아라곤의 알폰소가 1435년 부터. 십년 가까이 프랑스 앙주 공작네랑 싸우면서 나폴리를 먹은겨.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가. 저 나폴리를 50년만에 찾아가겠다는 거걸랑. 그러면서 이탈리아 북부부터 싸그리 헤집고 내려오는거야 샤를 8세가.
한가지 짚고 넘어갈건. 저 아라곤의 알폰소 5세야.
다음 루이12세가 나폴리를 다시 먹으러 올때.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랑 조약을 맺걸랑 같이 저걸 나눠 먹자고. 페르디난도2세가 이 콜을 받아.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에게 저 나폴리 시칠리아는 이게 같은 아라곤이라지만 같은 아라곤이 아닌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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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이 바르셀로나 가문.에서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받는게 아라곤의 페르디난도1세야. 아빠가 카스티야의 후안1세야. 차남이야. 아라곤의 바르셀로나 가 이전 쉬메네스 가문의 딸에 받아서 이어오다가. 여기도 끊겨 남자가. 프랑스 앙주에 시집간 딸.의 삼촌이 바르셀로나 마지막 킹이야 마르틴. 페르디난도1세의 엄마가 이사람 여동생이야.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이전 두 피터의 전쟁때 아라곤의 바르셀로나 가문이 카스티야의 일리지티메이트 트라스타마라 가문 시작인 엔리크.를 도와주면서 친해진겨 바르셀로나와 트라스타마라는.
페르디난도1세가. 외삼촌 끈으로 저걸 받아. 그래서 아라곤의 페르디난도1세.부터 여기는 트라스타마라 가문이야.
이사람의 두 아들이. 아라곤의 알폰소5세.와 다음 조안2세.야.
알폰소 5세의 아들이 미스트리스 애인에게서 낳은겨. 얘한테 본토 아라곤을 못줘. 해서 본토 아라곤을 동생 조안2세.가 물려받아. 일리지티메이트.한 안적법 아들이 저 나폴리.만 받는거야. 시칠리아도 조안2세.가 갖고 가. 저 나폴리만 유일하게 안적법 자식들이 이어가는겨 저걸.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가 조안2세의 아들.이야. 아라곤 알폰소5세가 큰아부지야. 카스티야의 같은 가문 이사벨라.랑 결혼하고. 아라곤 크라운을 물려받으면서 시칠리아 킹도 페르디난도2세야. 헌데 나폴리는 안적법 자식들꺼야.
루이12세가. 그래서. 나폴리를 우리 둘이 나눠갖자. 나폴리 킹덤이란건 이탈리아 반도 남부 전체야. 저거 안적법 자식으로부터 갖고와야 하는거 아니냐 니덜도. 하는겨. 이 콜을 받은겨 페르디난도2세가. 그리고선 다시 프랑스 병력이랑 싸워서 저걸 다 뺏아온거고. 샤를 8세랑 똑같은 병딱짓을 한겨 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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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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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당시 이탈리아 란 곳이 특이한거야. 특히나 로마 위로 북부가. 이전 썰했듯이. 자잘자잘한 코무네.들이 산재한 곳이었어. 해변 중심으로 리퍼블릭들이 자립해서 있었던 거고. 대부분 자잘한 코무네에 시뇨리아에서 피렌체 리퍼블릭 이걸랑. 저게 15세기에야 카운트에 덧치가 등장하는거야. 점점 정립이 되어간겨 저때서야.
피렌체가 유일하게 9세기에 마크. 후작령이었다가 따로 리퍼블릭.한거고. 아까 보여지는 우르비노 공작령.
The Duchy of Urbino was a sovereign state in central-northern Italy.
The first lords of Urbino were the House of Montefeltro, who obtained the title of counts from Emperor Frederick IIin 1213. The first Duke was Oddantonio, who received the title from Pope Eugene IV in 1443.
여기가 1213년에 카운트.를 받아서리. 2백년 후인 1443년에 공작령이 돼. 이게 그 1494년 지도에 안보이는데.
밀라노가 자잘자잘 코무네에 시뇨리아에서. 서기 1400년 직전에야 공작령이 된겨. 만토바 후작령이 1443. 모데나 레쪼. 페라라가 다 저 이후 공작령이야. 이전엔 자잘한 스테이트들 도시국가들이었어 그냥.
사보이.가 서기 1000년에 카운트.였다가 4백년 지나서리 덧치고. 여긴 시작이 프랑스 대륙 깊숙한 내부야. 이게 점점 오른쪽으로 와서리 지금 이탈리아가 된거고.
로마 아래 나폴리 킹덤에 시칠리아 킹덤.빼고 저 중북부가 그래서 희안해진겨. 즉 다시말하면 샤를마뉴 부자가 무슬림 해적 일차적으로 정리해주고 롱고바르디애들 아래로 몰아내면서 서기 8백년 전후부터 그제서야 정신이 들면서 사오백년을 자유롭게 살다가 뭉치기 시작한거야. 저게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든겨 그래서.
반면에. 교황령이라는 로마에서 로마냐까지 그 땅들은 특히나 아비뇽 교황정 백년동안에 완전한 각각의 도시국가들이 된겨. 로어드들이 막막 들어선거야. 이걸 나쁘게 해석해서 타이런트.라는 참주로 번역을 한건데 주제넘은 군주랍시고. 잘못된 사가들의 해석질이야. 저 로어드들이 각각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만든거야.
저걸. 특히나 저 교황령 이었던 저 도시국가들을. 알렉산더 6세가 다시 뭉치기로 결심을 한거야. 특히나 샤를 8세가 제집 안방드나들듯이 다녀오고 부터는 그 필요성이 절실해진겨. 흩어진 체로는 아무것도 안되는겨 아무런 힘이 없어 이게.
더하여, 이탈리아 전체를 다 묶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거야. 샤를 8세의 이탈리아 난입을 직접 겪고서.
아비뇽 교황정에 웨스턴 스키즘 110년.이 끈난게 1417년. 알렉산더 6세 교황 오른게 1492년. 70년 만에 저 생각이 들고 저걸 해야할 정신이 이제야 든거고 샤를 8세가 저후에 쳐들어오고 더 절실해진겨.
이걸 체사레 보르자. 라는 자식을 시켜서 하는거야. 이 둘이 의기투합이 된겨. 해서 체사레.가 카디널 자리를 던져버려. 1498년에. 교권에 관심을 버린거야. 그리고 무기를 쥔거야. 자기가 군주가 되겠다는겨. 통일 군주가. 이 생각을 발견한 사람이
Niccolò di Bernardo dei Machiavelli (/ˌmækiəˈvɛli/,
Italian:
[nikkoˈlɔ mmakjaˈvɛlli]; 3 May 1469 – 21 June 1527) was an Italian diplomat, politician, historian, philosopher, humanist, writer, playwright and poet of the Renaissance period
마키아벨리.야 군주론 쓴 인간. 얜 피렌체 공무원이야. 외교관. 체사레 보다 6살 많아. 체사레와 피렌체의 연락관을 한 인간이야. 체사레랑 대화를 주고받은 인간.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롤 모델이야. 체사레의 냉혹한 짓들을 보고 감탄을 해.
그 나라의 지도자.는 어설픈 감성하는 인간은. 말야. 최악이야 최악. 저런 는 그 나라 사람들을 다 죽이게 하는 인간이야 이게. 정치란 감성으로 하는게 아냐. 날카로운 이성의 칼로 하는거걸랑.
헨리키신저.가 저 군주론을 평해. 평범한 이야기. 얻을게 없어. 왜? 자기들이 그렇게 하는 거걸랑 상식이야 저 내용은 미국 정치가 애들에게. 저 내용 그대로가 베네치아 정치가 애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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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2세가 샤를 8세의 실패담을 복기하는겨. 뜬굼없이 이탈리아애들이 뭉치네. 저기서 자기편을 하나 만들어야해. 이때 눈에 띈 인간이 체사레 보르자 였던거야. 체사레 보르자 입장에서도, 프랑스가 필요한겨. 해서 라마냐까지 다 점령을 해 체사레가. 얘의 다음 목적지는 저 나폴리야. 그다음에 피렌체를 치면서 북쪽을 다 먹는겨.
피렌체.는 프랑스꺼야. 여긴 아직 못쳐들어가. 그 와중에 . 아빠 교황이 죽은겨. 얘랑 같이 밥먹다가 식중독으로. 체사레도 죽을뻔하다가 살아나. 완전 침대위에서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저때 이탈리아.는 끝 이 난거야. 걍 수백년 남들 전쟁의 전장터로 제공이 되고, 남들 전쟁의 대리인으로 참여하다가 무쏠리니까지 간거야 저게.
저걸 사학자 들은. 야비하고 배반배신에 미친 체사레 보르자. 하는거야.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들의 해석이야 저건.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까운 인물이 이 체사레 보르자야.
Lucrezia Borgia (
Italian pronunciation:
[luˈkrɛttsja ˈbɔrdʒa]; Valencian: Lucrècia Borja
[luˈkrɛsia ˈbɔɾdʒa]; 18 April 1480 – 24 June 1519) was a Spanish-Italian noblewoman of the House of Borgia who was the daughter of Pope Alexander VI and Vannozza dei Cattanei. She reigned as the Governor of Spoleto, a position usually held by cardinals, in her own right.
루크레치아 보르자. 체사레보다 다섯살 어려. 이쁜가봐. 이여자가 처음 시집가는 곳이.
Giovanni Sforza d'Aragona (5 July 1466 – 27 July 1510) was an Italian condottiero, lord of Pesaro and Gradara from 1483 until his death. He is best known as the first husband of Lucrezia Borgia. Their marriage was annulled on claims of his impotence in March 1497.
지오반니 스포르차. 1493년.에 결혼. 13살에 27살인 스포르차 가문애한테 간겨 아무것도 모를때. 결혼 무효가 4년 후. 페자로. 그라다라. 다 리미니 근처야. 여기 로어드. 도시국가 군주.
이 지오반니 스포르차.의 증조할배.가
Muzio Attendolo Sforza (28 May 1369 – 4 January 1424), was an Italian condottiero. Founder of the Sforza dynasty, he led a Bolognese-Florentine army at the Battle of Casalecchio.
무치오 아텐돌로 스포르차. 스포르차 가문의 창시자야. 무치오.의 아들이.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작 시작인 프란체스코 프리모 스포르차.야. 프란치스코 다음이 살아있는 토끼를 통째로 먹여 사람 죽였다던 갈리아초 스포르차.고 얜 암살당하고. 이 아들이 잔. 스포르차. 고 해서 갈리아초 스포르차의 동생인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섭정할때 얘가 프랑스를 부르면서 샤를8세가 온겨. 할때 저 지오반니.가 잔 스포르차 아이와 같은 세대인거지.
이탈리아 전쟁 직전에. 알렉산더6세가 먼저 들이대는건 교황령 회복이야. 예전의 교황영지들을 다 갖고 오고 더 갖고 오는겨. 이게 당시 밀라노 것이 많은겨. 교황은 나폴리랑도 안친해. 헌데 나폴리도. 이제 안적법 자식이야. 얘가 완전 뻘쭘한 상태야. 얘한테도 또한 교황이 영지 달라하고 세금 내라하기도 해. 이전 교황은 나폴리 먹으라고 프랑스에 편지도 썼어.
밀라노.의 꼬마 잔 스포르차.의 마누라.가 나폴리 킹덤 딸이야. 15세 되었는데도 여전히 삼촌이 안줘. 잔의 엄마가 사보이 공작딸이야. 이여자도 얼씬도 못하게 해. 나폴리가 저 섭정하는 루도비코 개개끼하면서. 이때 교황이랑 같이 밀라노 치러가자 해.
루도비코.가 이래저래 눈치보이면서 정통성이 약한겨. 이때 얘가 프랑스를 불러. 그러면서 공작에 올라. 잔 이 죽고. 프랑스를 부른건 이전이고. 이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얘 후원에 있는거고.
샤를8세가 들어오면서. 나폴리에 더하여 밀라노에도 욕심이 있는걸 그제서야 눈치를 챈거야. 얘가 남하하는 와중에 부랴부랴 군비정비를 하는겨. 지가 불러놓고 지가 떨어.
이러면서. 밀라노의 스포르차.가 아무것도 아닌 개털이 된겨. 저때가 스포르차.의 실질적인 끝이야.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저 직전에 스포르차 가문에 시집을 간거야 꼬마때. 저 스포르차 가 당시엔 쎘걸랑.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제일 황금기였어 샤를들어오기 직전까진. 그걸 보고 저 방계인 지오반니 스포르차 에게 보낸겨.
헌데 샤를 8세 꼬라지에. 스포르차 애들 정세판단 못하고 허겁지겁 하는 걸 보고. 아 시집 잘못 보냈구나.
체사레.가 정치의식을 갖게 된 후야. 인질로도 잡혀서리 탈출 하고. 아빠 알렉산더6세 교황은 이미 정치가가 된거야. 발렌시아 태생이 이탈리아 정체성을 갖은겨. 잉글랜드에 가면 시안하게 잉글랜드 사람이 돼. 이탈리아에 가면 시안하게 이탈리아 사람이 되는거야 가만 보믄.
딸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사망한 스포르차 가문에 둘 필요가 없어. 저 지오반니 임포텐스. 고자다. 첫날밤 안치뤘다. 결혼 무효 한거야. 원래 지오반니를 죽이려 했대. 헌데 이걸 알고 루크레치아.가 지오반니를 대피시켜. 지오반니.는 오히려 교황을 인세스트. 근친으로 공격을 해.
Giovanni Borgia (March 1498 – 1548), known as the Infans Romanus ("the Roman child"), was born into the House of Borgia in secret and is of unclear parentage. Speculations of the child's parentage involve either Lucrezia Borgia with her alleged lover, Perotto Calderon or Cesare Borgia, or Pope Alexander VI as his father. Cesare Borgia's biographer Rafael Sabatini says that the truth is fairly clear: Alexander fathered the child with an unknown Roman woman.
지오반니 보르자. 1498년생. 이사람이 누구 자식이냐는 거지. 보르자가문의 비밀이야. 소문 많아. 루크레치아가 낳은 아이인데. 아빠가 체사레다. 애인 이다. 아빠교황이다. 보르자에 정통한 사가 왈. 교황이 늙으막에 이름모를 로마여자와의 자식.
해서 체사레와 교황이 의논해서 루크레치아.를 재혼시킨 자리가
Alfonso of Aragon (1481 – 18 August 1500), Duke of Bisceglie and Prince of Salerno of the House of Trastámara, was the illegitimate son of Alfonso II King of Naples and his mistress Trogia Gazzela. His father, cousin of Ferdinand II King of Aragon, abdicated in favour of his legitimate son Ferdinand II of Naples.[1]
아라곤의 알폰소. 안적법한 아라곤의 알폰소5세 자식의 핏줄이야. 형은 킹자리고 얜 비셰예 공작.에 살레르노 프린스. 나폴리의 영지야. 트라스타마라 가문이지만 할배부터가 안적법이야.
아라곤 알폰소5세의 안적법 핏줄인 나폴리 킹덤의 자식들이. 아무런 벨류가 없는겨 이게. 아라곤 크라운 본토.의 페르디난도2세를 보고 저리 간 거걸랑. 헌데 페르디난도2세에겐 저긴 안적법 애들이야. 자기가 빼앗으면 빼앗지 관시미 없어.
이걸 루크레치아.를 재혼보내고 나서야 눈치를 챈겨. 재혼하는 해가 1498년이야. 체사레가 카디널 자리 던지고. 루이12세에게서 발랑스 백작 받는 해.
In July 1499, the French Army left Lyon in France and invaded Italy with 27,000 men (10,000 of which were cavalry and 5,000 of which were Swiss mercenaries). Louis XII placed Gian Giacomo Trivulzio in command of his army. In August 1499, the French Army came across Rocca di Arazzo the first of series of fortified towns in the western part of the Duchy of Milan.[21]
루이12세의 군대가 이탈리아에 들어오는게 1499년 여름이야. 다음해에 11월에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와 싸인해서 나폴리 같이 먹기로 하고 먹는겨. 그러다가 다시 쫓겨나 도망가는거고.
On the evening of 15 July 1500, at the top of the steps before the entrance to St. Peter's Basilica, Alfonso was attacked by hired killers and stabbed in the head, right arm, and leg. When the assassins attempted to take Alfonso with them, his own guards put them to flight. The prince was residing in the palace of Santa Maria in Portico, but so desperate was his condition that he was taken to the chamber of the Borgia Tower[10] where he was cared for by his doctors from Naples, his sister, Sancha, and his wife, Lucrezia. On the night of 18 August, as Alfonso was still recovering from his wounds, Michelotto Corella and a group of armed men entered his room and strangled him in his bed until he was dead.[2] Following his death, his body was carried to the Basilica of St Peter and there placed in the Chapel of the Virgin Mary of the Fever.[11]
저 나폴리 점령하기 전에.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자기 신랑 나폴리의 알폰소를 로마로 불러. 베드로 성당 들어가는 계단에서 암살범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부상을 당해. 7월 15일. 루크레치아.랑 누나 산차.가 병간호를 해. 한달 후 밤에 암살범들이 들어와서 죽을때 까지 얘를 찔러.
"He was the most beautiful youth that I have ever seen in Rome" – The chronicler Talini[3]
연대기 학자가. 저 죽은 나폴리의 알폰소.는 자기가 로마에서 본 사람중에 가장 아름다운 젊음 이었대.
Alfonso d'Este (21 July 1476 – 31 October 1534) was Duke of Ferrara during the time of the War of the League of Cambrai.
루크레치아.가 세번째로 시집가는 곳이. 에스테가문의 알폰소. 알폰소 데스테. 네살 많아. 1502년. 세번째지만 나이 22세야 아직.
이전 알폰소.와의 사이엔 아들이 하나야. 얘는 거의 못봐 꼬마가 일찍 죽어. 애틋했다나봐. 세번째 결혼에서 애들을 줄줄이 낳지만. 마흔 전에 죽는데.
저 알폰소 데스테. 페라라 공작
The line of "Marquesses of Este"("Marchesi d'Este") rises in 1039 with Albert Azzo II, Margrave of Milan. The name "Este" is related to the city where the family came from, Este. The family was founded by Adalbert the Margrave. who might have been the true first Margrave of Milan of this family. In 1209 Azzo VI is named the first "Marquess of Ferrara", and the title passed to his descendants, and Este Marquisate's was delegated to a cadet branch of the family. Later, were also created the Marquisates of Modena and Reggio.
에스테. 가 베네토의 파도바. 베네치아에 흐르는 파도바 강.인데. 즉 오른쪽 위야. 여기서 시작한 가문이 내려와서리. 페라라 후작.이 서기 1209년 하고 그 옆에 모데나 레쵸.를 지배해서 같이 후작령 하다가. 저 세개 합한 공작령이 1471년. 저 와중에 교황과 싸워 교황령에 드가다가 갖고 오다가. 나중엔 페라라를 교황에 뺏기고 모데나 레죠. 공작령 이 되는데.
저 알폰소 데스테 페라라 공작이. 알베르토 칸티노.를 시켜서리. 포르투갈 세계지도.를 쎄벼서 갖고오게 한. 그 칸티노 세계지도.를 유럽에 알린 인간이 이 인간이야. 루크레치아.가 세번째 시집간 남편이.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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