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역사는 야 . 이따위 이야긴 보는 것 조차 역겨운데 말야.
차라리 그시간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고려숙종 서기 1100년 이전의 이야기를 봐. 그 학교도 말이지. 고구려 태학.이란 게 있고 경당이란 지방 학교가 있어. 저게 소수림왕이야. . 캔터베리 킹스스쿨이 서기 597년에 바로 이어서리 로체스터의 킹스스쿨 요크의 성베드로 스쿨. 이라지만. 우리네는 쟤들보다 삼백년 전에 학교가 있었어.
당근이지 저게. 저 게르만은 갓 로마 벗어나서리 이제야 시작한거고. 이땅은 쟤들 로마일때 기자조선이란 식민지가 어드런진 알수 없지만 기원직전후엔 바로 고구려랑 신라가 서. 게르만보다 빨라.
문제는. 쟤들은 저게 늦지만 꾸준히 지금도 있는거고 말야. 우리네는. 이런 것들이 조선때 다 지워진거란 거야.
조선 그 부원배 들이 말야. 고려를 싸그리 죽이면서리. 이땅이 유학이 된거갈랑. 저 왕씨들 죽이는거 봐라. 태종13년 기록. 20여년동안 죽이고선. 야 이제 좀 그만 죽이자. 세상 빠닥에 이따위로 전 왕조 죽인애들 중국이도 없잖니. 하긴 그렇쥬 대는 들.
조선왕조 오백년은. 소인배 놀이 적폐 놀이로 상대들을 죽인 역사걸랑. 죽은 들이 죽인들이 적폐였오 소인배였오 죽이고. 그 당한들이 다시 이어서리 저들이 적폐였어. 다 죽이고선 이제 이긴 들끼리 또 상대는 적폐요 죽이고. 왕은 중간에서 그 상황 즐기고.
지금 여전히 저따위 핏줄 들이야 저게. 아 이건 끔찍한건데.
가장 큰 문제가. 민족 대는 들이 말야. 저 조선 띄우는 짓거리.가 이게 끔찍하걸랑. 쟤들의 바닥은 조선이야 조선. 쟤들한텐 조선이 개 똥떵어리여 하면 부들부들 떠는거라. 야이 들아 정체성을 차라리 고구려백제신라나 고려숙정이전엘 찾아 그나마 하믄 적폐네 저거. 감히 위대한 조선을 비하하다니.
인류 문명사는 말야. 현대에 올수록 어려운겨. 고대사는 고기만 파면 돼. 고때까지의 시절만. 그 주변 영향 변수들은 짝아.
헌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 당시 이전 이야기를 이해해야 그 시대 이야기가 보이는거야. 또한 말야. 그곳만 보면 안돼. 그 주변땅들의 이야기들도 같이 엮여 있걸랑. 이 주변인자들 또한 많아지잖아. 시간의 길이 에 더하여 장소의 수 가 많아지는겨 점점.
해서 짐께서 지금 저 서기 1500년대에서. 진도를 못나가는겨. 워낙에 이야기들이 뭉쳐있고 섥혀있고 땅들이 더 많아지고 변수는 더 늘어나고.
저때부터 진도가 안나갈 수 밖에 없어.
국사.란건 없어. 세계사 속의 그 땅의 국사 일뿐이야. 프랑스사.란 게 어딨니. 로마 이야기 없는 프랑스사가 어딨고. 그 이전의 그리스 없는 로마에 프랑스 사가 어딨어. 프랑스사 란게 어딨니 스페인사없는. 영국사 없는. 독일사 없는. 이탈리아사 없는. 오스만사 없는. 동유럽 사 없는. 그따위프랑스사가 어딨어.
문제는 말야. 저 서기 1500년대 까지의 이야기가. 제대로 일이관지로 잡혀있어야. 그 다음 이야기가 풀려. 이게 사백년이 지나고 쌓인 이야기가 이제 더 어마어마 하잖니. 이걸 이해해야 서기 1900년 전후의 이야기가 그제서야 이해가 되는거야 이게.
헌데 우리네는 말이지. 저 서기 1500년대까지의 이야기도 전혀 몰라. 이땅바닥에. 저때까지의 이야기를. 수메르부터 이집트에 메소포타미아에 고대그리스에 알렉산더와 디아도코이에 고대로마에 다음 게르만애들 나오고 슬라브 애들 나고 훈족애들 오고 게르만애들이 서유럽 먹고 슬라브애들이 낑겨 들어오고 오른쪽은 페르시아애들에 셀레우코스애들에 유대인들 이야기에 페르시아애들이 다시 들어서고 이제 아랍이슬람에 수니와 시아에 칭기스칸 애들 오고 하민서리 그와중에 이탈리아는 다시 일어서고 재료로 쓰이면서 탐험의 시대 여는.
이런 이야기에 러시아 애들이야기까지. 걍 눈 감고 주절주절 할 수 있어야 말야. 그때서야 서기 1500년 이후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는겨. 이땅바닥엔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이 딱 한분 계신겨.
저건 팩트야.
인류사에서 혁명은 세 개야.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나폴레옹 혁명. 일본 메이지이신.
저 메이지이신.이 그야말로 최고야 저거. 이전 썰. 앞의 두개는 백년 걸린겨. 메이지이신은 쟤들의 십분의 일이야. 그래서 그야말로 절절한거야 저게. 참 싕기한겨 쟤들.
일본 일본도. 유럽애들과 비교하면. 메이지이신 전까진. 야만이야 저게. 특히나 전국시대 나오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는 지금 보믄 대단한듯 보이지만. 재들이 의미가 있어진거는. 저 탐험의 시대에서 시작한. 포르투갈애들과의 만남이야.
일본애들의 역사는. 저기서 시작을 한거야 그야말로. 저걸 명청과 비교를 해야해. 중국이는 저리 안될 수도 있었어. 원나라때 서기 1250년 전후에 지오반니 카르피네. 안드레 롱규모. 윌리엄 루브룩이 저길 직접 가. 그 뒤에 이븐바투타. 도 저 조정엘 들어가서 직접 만나 황제를. 다음에 마르코폴로.가 쿠빌라이때 직접 가. 헌데 말야. 명나라는 정화원정 대지만 말이지.
이 정화가 한짓은. 내가 영락제 지시로 여기 온거유. 우리네 배들 어마어마 하쥬? 우리네 병사들 어마어마 하쥬? 좋은 말할때 북경가서리 공물바치슈. 가서 책봉받으슈.
저게 다야. 이들이 한짓은. 그리곤 문 닫은겨. 쟤들도 저리 초기에 가고 말아. 청 건륭제가. 영국 외교관 매카트니 만날때 디룩디룩한 가 드러눕듯. 조지 매카트니가 무릎하나 꿇는걸로 합의보면서 겨우 만나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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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언제냐. 1793년. 이전 보인 그 만화가 그림 사진.
미국 페리 애들이 올때. 막부의 주장이. 대체 우리가 싫다는데 왜 그러는겨 왜왜왜? ㅋㅋㅋ. 우리가 니덜이랑 사귀기 싫당께롱!!! 걍 우리네끼리 3백년 전에 세키가하라 이긴 공으로 서쪽애들 노예부림서. 인간들 예의놀이 시키믄서 걍 우리네 지배 사무라이끼리들 잘 처먹고 살겠다는데. 대체 왜왜왜왜? ㅋㅋㅋ. 아 이건 진짜 어록이야. 짐이 쫌 과장비슷하지만 쟤들 어록이야 저건. 대체 상대가 싫다는데 왜그러냐 니덜.
나중 저게 똑같은겨 조선이. 조선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와. 사귀자 사귀자.
아 싫다니까!! 상대가 싫다는데 왜 자꾸 그르냐 니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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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료마의 대정봉환 이후. 이게 연극놀이로 시작했지만 말야. 저거 별게 없걸랑 솔직히. 막부가. 권력을 왕에게 바칩니다.
나중에 다시 돌려줄줄 알았어. 이런 마음도 분명히 있어 쇼군에게. 왜냐믄 말야.
저 당시. 천황이란 애들의 구게. 공가.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어. 길게는 헤이케이야기 나오는 13세부터야. 헤이안 시대 1185 끝나고는. 이미 이전에 다이라노 기요모리 부터. 이들 다이라씨 몰아내는 겐지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의 가마쿠라 막부 부터. 칠백년 이상 교토 조정은 아무런 힘이 없어. 특히나 에도때부턴 더 쎄게 저길 옭아매. 에도부터 250년간은 저긴 걍 아주 완벽한 한무당의 터가 돼 천황이란 애들의 구게들은. 왕족은 오직 유교책만 읽고. 교양만 쌓아라. 세상엔 관심 끊어라. 신도만 모셔라. 기도만 하는겨 쟤들은 저기서. 종교의례만 하는겨 저 아홉문의 성벽에 둘러쌓여서.
천황은 밖을 못나가. 천황은 세상을 전혀 몰라. 화재 날때 잠깐 밖에 가는겨 집이 타서.
저게 시안해진겨. 저건 웃겨. 막부 쇼군도 천황 얼굴 전혀 안봐. 3대 이에미쓰 이후론 관심도 없어 저긴. 그냥 돈만 주는겨 먹고 살만하게. 권력과 완전히 동떨어지게 저길 만들어.
내대신 좌대신 우대신 태정대신 대납언 어쩌고. 아~무런 힘도 없고. 해서 경험도 없고. 아는게 없어. 저게 250년이야. 쇼군이 저들에게 권력을 줘봤자 곧 다시 받을 꺼란 찐한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어 저게.
저긴 완전히 한무당의 터야. 귀신 나오는 곳이 천황의 조정이야. 이건 조선 경복궁이랑 똑같어. 저기도 귀신 이야기 자주 보여. 저 궁궐안에 귀신들이 돌아다녀. 교토의 덴노가 사는 곳은 더해. 죽은 아버지 고메이가 나타나서리 병들다. 이런 기록이 있어. 헌데 저런 기록이 흔해 쟤들한테. 왜냐믄 할 게 귀신놀이 밖에 없걸랑 저기서.
얘들은 그게 특히나 250년이 세뇌가 되었어 심하게 더. 해서 전혀 쇼군의 막부 도쿠가와네와 싸울 생각도 전혀 없어. 진짜 없어. 그냥 돈 안끊기게 먹고 살게 해주믄 땡큐야. 하치만 신. 하치만 대보살.을 쟤들 위해서 빌어주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찾고 그게 다야.
그래서. 이 천황애들이 저때. 보믄 말야. 생기가 없어. 요절을 많이 하고. 애 낳으면 대부분 죽어 사산이거나.
그만큼 저기가. 죽음의 왕가인겨 교토의 천황이 살던 곳이. 팩트로 보면 저 시기에 천황이 몇명인가.
後陽成天皇(ごようぜいてんのう、1571年12月31日(元亀2年12月15日) - 1617年9月25日(元和3年8月26日))は、安土桃山時代から江戸時代初期にかけての第107代天皇(在位:1586年12月17日(天正14年11月7日) - 1611年5月9日(慶長16年3月27日))
고요제이. 세키가하라 전투가 1600년이야. 이걸 이기고 부터 이에야스의 시대인겨. 에도막부 시대야 이때부터 실질적인. 즉 에도시대의 천황 교우제이.가 얘가 107대야.
孝明天皇(こうめいてんのう、1831年7月22日(天保2年6月14日) - 1867年1月30日(慶応2年12月25日))は、第121代天皇(在位:1846年3月10日(弘化3年2月13日)‐ 1867年1月30日(慶応2年12月25日))。諱は統仁(おさひと)。仁孝天皇の皇子、明治天皇の父。
코우메이. 얘가 메이지의 애비야. 얘가 121대야. 이 인간이 15대 째인겨 에도시대의 천황은.
徳川 家茂(とくがわ いえもち)は、江戸幕府第14代征夷大将軍。初めは第12代将軍・徳川家慶の偏諱を賜って慶福(よしとみ)と名乗っていた
도쿠가와 마지막쇼군 요시노부.가 15대야. 아 이 별 차이가 없네......
아 아깝네 진짜. 천황애들이 두셋만 더 죽었어도. 짐의 저 논리가 대단한 통찰이 될틴데.
다시 그럼 만들면 말야. 그만큼 할일 없는데도. 저 권력 잡고 있는 애들 영주들 틈에서 긴장속에 사는 쇼군애들보다도 더 잘 오래 살아야 하는데. 그리 못산겨. 저긴 생기가 없는 곳이야.
고메이.는. 메이지 애비. 얜 시안해. 얘때 페리가 온겨. 양이 운동 들끓을때 말야 제일 선봉이 이 고메이 천황이란 애야. 이게 싕기한겨. 저 금문 속에서 말야. 얘가 어드래 저런 정치의식이 있었나. 완전히 우국지사야 이 인간이. 막부애들이 250년 만에 처음으로 교토에 와서리 정세 보고를 하게 돼. 이건 에도 막부 역사에서 없던 일이었어. 이러면서 여기 조정이 쎄지는겨. 막부애들이 위축이 되고. 헌데 이 고메이 조차. 천연두로 죽어. 우두 안 맞아서. 얘들은 전형적인 신굿 하는 애들이야. 막부애들은 네덜란드 의학에 젖어서리 의학 수준이 높아. 헌데 저 교토 금문 안은 철저한 원시시대야 저기가. 고메이는 절대 예방접종을 안해. 헌데 아들 메이지는 몰래 맞아. 이걸 눈감아. 고메이가 독살로 죽었다느니 음모론 하지만 음모론일 뿐이고 저 우두 안맞아서 죽은겨 고메인. 하튼 그만큼 어둠의 황가야 저기가.
쟤들을 세상에 끌어낸 애들이. 유신애들이야.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천황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서 사람들과 만나게 한 사람이 쟤들이야. 사람들이 싕기한겨. 오잉 천황이 저리 생깄네. 혹시나 천황애가 지나갈 일이 있으면 그 길을 다 막고 양옆을. 장막을 쳐. 사람들은 천황이 누군지 전혀 알길이 없었어.
메이지.는 얘가 단순히 꼭두각시가 아냐. 메이지 란 인간이 일본애들 입장에선 행운의 인간이야. 고메이가 철저한 양이파였걸랑. 헌데 그 아들 메이지.가 적극적으로 서양을 배워. 얜 모든 조정회의를 다 참석을 해. 물론 말은 안하지만.
메이지이신.이란건 엄청난 인간의 역사야. 짐이 이걸 나중에 정리를 해보려해. 그 이전에 말야.
메이지이신. 명치유신과 만나는 접점이. 저 운요호 사건. 이라는거야 이 조선바닥에 엮이는게.
정한론.은 저 당시 사이고 애들끼리 지들끼리 분노질 해서리 지들 만의 이야기고. 이건 조선과 직접 부딪친듯한 게 안보이는듯 한데 말야.
결국 정한론.이 나온 것과. 저 운요호 사건.은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돼. 이게 머냐면 결국. 저 1793년 조지 메카트니.가 건륭제 만나는 장면이야.
의전.이야 . 두 국가의 정상과 사신이 어드래 만나야 하냐. 상대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야. 저게.
저게 아주 비슷하게 말야. 왜관.을 통해서. 일본와 조선이 부딪히게 돼.
배경[편집]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년)을 통해 안으로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단행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을 벌여 부국강병을 모색했다. 이러던 중 일본은 이웃나라 조선에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펴던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어(1873년 11월) 조선을 개항시킬 기회를 포착하였다. 이전부터 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이번엔 무력시위로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875년 9월(고종 12년)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와 다른 한 척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곧이어 동해 영흥만에 운요호를 북상시켜 해로측량과 무력시위를 하였다.
한글 위키.인데. 우리네가 대부분 저따위 시선이걸랑. 일단 팩트가 달라. 군함 5척이 아냐. 군함 2척에. 여기 해군애들이 수백명 실리걸랑. 수송선이 3척이야. 보급선이야 이건. 그리고 이 배들은. 회담하러 가는 애가 끌고 가는겨 사후에.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1875년 9월 20일(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조선 정부의 동태를 살피다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불법으로 들어와서리 동태를 살필라다가 벌인 사건이래.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이번에는 서해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조선군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우세인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면서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ᆞ방화ᆞ약탈을 자행하였다. 일본은 한편으로 부산에 전함을 파견하고 병사를 상륙시켜 함포외교를 계획했다. [1]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며, 일본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돌렸으며,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몰래 접근을 한거래. 접근하지 말랬는데 해서리 막막 포를 쐈어.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해서리 전사자 35명 포로 16명. 일본군은 단지 2명 경상.
저게 웃긴건데.
저걸 해석하는 지금 시대의 이땅바닥 사학자들이 더 웃긴건데. 우린 학교에서 저걸. 일본들이 말임둥. 우리네 조선을 처먹을라고 저때부터 계획 몰래 비밀로 짜고 정말 사악한 들이 불법적으로다가 시작해서 힘없는 조선을 강제적으로 조약맺게 해서리 하튼 리 일본드린데요.
다 사기야 사기. 저때 조선이 얼마나 한심하냐면 말야.
이 조선 들은 정말 들인데. 더 한 들은 저따위 조선 저따위 구한말을 빨아대는 지식인 자연 민족 조선민족 위대해 하는 들이걸랑.
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1월 19일 辛亥 1번째기사 1876년 조선 개국(開國) 485년 대관이 일본 변리 대신과 회견하고 주고받은 기록을 올리다
접견 대관(接見大官)이 이달 17일에 일본국(日本國)의 특명 전권 변리 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부대신(副大臣)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군영(軍營) 안의 연무당(鍊武堂)에서 회견하고 주고받은 말을 개록(開錄)하여 치계(馳啓)하였다.
문답구어(問答句語)에,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두 나라에서 각각 대신(大臣)을 파견한 것은 곧 큰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고, 또 이전의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니, 대관(大官)이 말하기를, ‘300년 간의 오랜 좋은 관계를 지금 다시 회복해서 신의를 보이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참으로 두 나라 간의 훌륭한 일이므로 매우 감격스럽고도 감격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이번 사신의 임무는 바로 그 전에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가 별함(別函)에서 언급한 문제입니다.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로써 어찌하여 화목하게 지내지 않고 이렇듯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일본과 사귀어온 이래 언제나 늘 격식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이 그만 오랜 전례로 되어버렸습니다. 당신네가 이미 이전의 격식을 어긴 상황에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는 그저 종전의 관례만 지키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말썽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이 마당에서 무슨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日本全權大臣)이 말하기를, ‘우리 배 운양함(雲楊艦)이 작년에 우장(牛莊)으로 가는 길에 귀국(貴國)의 영해를 지나가는데, 귀국 사람들이 포격을 하였으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정의(情誼)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남의 나라 경내에 들어갈 때 금지 사항을 물어봐야 한다는 것은 《예기(禮記)》에도 씌어 있는데, 작년 가을에 왔던 배는 애초에 어느 나라 배가 무슨 일로 간다는 것을 먼저 통지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방어 구역으로 들어왔으니,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이 포를 쏜 것도 부득이 한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운양함에 있는 세 개의 돛에는 다 국기를 달아서 우리나라의 배라는 것을 표시하는데 어째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그때 배에 달았던 깃발은 바로 누런색 깃발이었으므로 다른 나라의 배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귀국의 깃발이었다고 하더라도 방어하는 군사는 혹 모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깃발의 표시는 무슨 색이라는 것을 벌써 알렸는데 무엇 때문에 연해의 각지에 관문(關文)으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여러 가지 문제를 아직 토의 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도 미처 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영종진(永宗鎭)의 군사 주둔지를 몽땅 태워버리고 군물(軍物)까지 약탈해간 것은 아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의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득실에 대해서는 아마 양쪽이 양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먼저 동래(東萊)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손님에 대한 예의로 접대하는 것이니 또한 양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표류해 온 배에 대해서까지 먼 지방 사람을 잘 대우해주는 뜻으로 정성껏 대우하여 주는데 어찌 귀국의 군함을 마구 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이번에 우리들의 사명에 대하여 두 나라의 대신이 직접 만나서 토의 결정하려 하는데 일의 가부(可否)를 귀 대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귀 대신은 봉명(奉命)하고 먼 지역에 나왔으므로 보고하고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전권(全權)이라는 직책을 가진 것이지만,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내에서 전권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데, 하물며 수도 부근의 연해인 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접견하러 왔으니 제기되는 일을 보고하여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히로쓰 히로노부가 우리나라에서 전권 대신을 파견한다는 일을 보고한 것이 있고, 귀 대신이 이제 접견하러 왔는데, 어째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본래 전권이라는 직책이 없고, 또 어떤 사건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미리 품정(稟定)하여 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사신도 만나주지 않고 서계(書契)도 받아주지 않고 6, 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지났는데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지난 정묘년(1867)에 중국에서 보내온 신문지(新聞紙)를 보니 귀국 사람 야도 마사요시〔八戶順叔〕가 보낸 신문지상에, 조선 국왕이 5년마다 반드시 에도〔江戶〕에 가서 대군(大君)을 배알하고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이 옛 규례였는데, 조선 국왕이 오랫동안 이 규례를 폐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여 그 죄를 추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모두 귀국에서 우리나라를 몹시 무고(誣告)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또 《만국공보(萬國公報)》 가운데는 공물(貢物)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귀국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고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공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제 환공(齊恒公)이 주(周) 나라 왕실을 위하여 초(楚) 나라의 왕을 꾸짖던 말이므로 비유하여 인용한 뜻도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 서계를 막아버린 첫째가는 근본 이유입니다. 이번에 관계를 좋게 하자는 이 마당에서 지나간 일을 들추어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귀국에서 이러한 곡절이 있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것도 떠도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이웃 간의 두터운 의리를 어떻게 이것 때문에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설사 이런 황당한 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정부에서 귀국 정부에 통보한 일이 없는 이상 어떻게 믿고 이렇게 의절(義絶)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리어 귀국을 위해서 개탄할 일입니다.’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신문은 귀국 사람이 간행하여 각국(各國)에 돌린 것인데 어떻게 황당한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이른바 신문이라는 것은 비록 자기 나라 안의 고을에서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간혹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이 신문만을 믿는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니 그저 한 번 웃고 넘어가면 그만일 뿐입니다.’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우리 조정과 민간에서는 실상 의심을 품어온 지 오래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웃 나라를 사귀는 도리는 성신예경(誠信禮敬) 이 네 글자를 중요하게 삼고 있으니 피차간에 서로 예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두 나라에 모두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그 당시 사실 여부를 우리나라에 물어왔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회답하였습니다. 무슨 지금까지 의혹을 품을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설령 의심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오가면서 의혹을 풀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전날에 서로 대치하였던 일과 연전에 새 서계를 받아주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다 뉘우칩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한 마디로 말해서 전날의 사건은 얼음이 녹듯 완전히 풀렸는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득실(得失)을 따지지 말고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은 실로 부당한 말입니다. 설령 친구간의 약속이라도 저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나라 사이에 좋게 지내는 우의(友誼)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7, 8년 동안 관계를 끊어버린 이유는 이미 남김없이 다 드러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이제 운양함이 우리 배라는 것을 알았으니 옳고 그른 것이 어느 쪽에 있으며, 그 때에 포격을 한 변경 군사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알면서 고의적으로 포를 사격한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두 나라 간에 조약을 체결해서 영구히 변치 않게 된 다음에야 좋은 관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두 대신이 면담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수원(隨員)들을 시켜 서로 통지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책임진 관리가 있는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수원들을 시켜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나의 수원들은 각기 봉명(奉命)한 직무가 있으며, 모두 공무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귀 수원들도 공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로써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나의 수원들은 봉명한 것이 아니라 사신인 내가 임의로 데려온 사람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의 수원이 귀국의 부관(副官)과 서로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대관이 말하기를, ‘서로 만나기에는 서로의 지위가 맞지 않지만, 만약 오갈 일이 있으면 내왕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관이 말하기를, ‘간단하게 다과(茶果)를 준비하였으니 좀 들어보십시오.’라고 하니,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호의는 감사하나 그만두는 것이 대단히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관이 말하기를, ‘이미 준비해 놓은 것이니 되도록 드십시오.’라고 하니,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권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저게 1876년 음력 1월 19일. 운요호사건 시작이. 전년도 음력 8월21일. 사건 발생 5개월 만에 만난겨 양국이.
조선의 접견대관.은 신헌. 申櫶 이란 사람이야. 강화도 조약을 이사람이 하는겨 저 만남 후 20여일 후에. 나중에 미국과 조미조약 할때도 이 신헌.이 도맡아서 해. 조선이 외국이랑 조약 맺는 최초가 이사람이야.
黒田 清隆(くろだ きよたか、旧字体: 黑田 淸隆[注釈 1]、天保11年10月16日(1840年11月9日) - 明治33年(1900年)8月23日)は、日本の武士(薩摩藩士)、陸軍軍人、政治家。階級は陸軍中将。栄典は従一位大勲位伯爵。通称は仲太郎、了介
일본 전권대신으로 온 사람이 쿠로다 키요타가. 사쓰마 출신이야. 저 시대는 사쓰마애들이 만든겨. 이 인간은 홋카이도 개척사로 유명해. 홋카이도.는 원래 일본의 관심밖이었다가. 막부말에 무진전쟁하면서 막부군이 홋카이도 하코다테 까지 가면서 이때부터 역사에 전면 등장해. 그러다가 홋카이도 위의 쿠릴열도 를 러시아랑 분쟁하면서. 이게 이당시 가장 큰 이슈야. 홋카이도를 개척하는 개척사.였어 이 인간이. 러시아 를 상대하는 인간도 이인간이야. 얘가 상대해봤으니까 얘를 조선에 보낸겨.
이 인간은 당시 중장.에 참의.야 실세야 . 사쓰마 이지만. 사이고의 정한론에 반대를 해. 제일 유명한게 뒤에 홋카이도에서 뇌물 받아 쳐먹었다고 신문에 보도 돼. 그래도 써 정부가. 그런 식으로 이러 짜르고 저리 짜르면 사람이 없걸랑.
얘가 군함 두척에. 수성선 세척에. 병력 8백명을 데려가. 아 출세한겨 일본이. 페리가 오던 1853년. 이후 23년 만에. 일본들이 그 흉내를 그대로 조선에 내는겨 이게 ㅋㅋ. 헌데 달러 그게. 페리앤 철갑 증기선이야. 증기로만 가는 배에 돛달린것도 있지만. 저게 네대야. 얘들은 목조야 저 군함이란게. 그것도 두대야. 세개는 보급선일 뿐이고.
저때가 1876년이야. 대정봉환이 1867년이야. 페리가 오고 23년 동안. 일본은 천지가 개벽한겨 저때. 저 사이에. 막부랑 교토부터 에도에서 저 홋카이도까지 진짜 전쟁을 치뤘어. 일본애들은 전쟁. 이란 딱지를 이때 써. 이전의 그 숱한 전쟁 이라봤자 걍 타타카이야. 헤이케전쟁 때나 전쟁.을 병행해서 쓸까. 저건 그야말로 동과 서.가 또한 육지와 바다에서 붙은거걸랑. 헌데 세키가하라.도 전쟁 안붙여. 걍 타타카이야.
전쟁을 저때 한겨. 그리고 말야. 아직 세이난 전쟁. 은 벌어지지 않았어. 세이난 전쟁은 강화도 조약 맺는 저 1876년 다음해야.
얘들은 말야. 저때 군함이고 머고 없어. 이제 마아아악 시작한겨 저게. 지들 일본 이란 나라를. 근대를. 저때 아무것도 없을때야. 내전으로 서로 보신전쟁으로 피보고. 이 직전에 대만 다녀온겨 류쿠 오키나와 사람들이 대만애들에게 표류당하다가 당했걸랑. 청나라가 쌩까고. 오키나와가 청꺼냐 일본꺼냐 영토분쟁이 정리가 안되고. 이걸 명분 갖기 위해서 저길 함대끌고 다녀와서 오키나와를 청나라에서 완전히 갖고 오는 명분을 만들어. 러시아 하곤 여전히 쿠릴열도 분쟁이고.
사이고.가 조선을 치자는건. 말도 안되고. 사이고.는 저때 보면 사람이 죽을 입장으로 내몰린거야. 사쓰마를 주축으로 신정부를 만들었는데. 정작 사무라이들은 저때 다 직업을 잃어. 대대로 물려주는 녹봉도 끊어. 이건 기도 다카요시도 불평을 해. 기도 나 사이고 나 그 지지층은 사무라이 무사들 선후배들 친구들이야. 정작 그들이 다 직업을 잃은겨. 기도.가 제발 좀 기존 무사들 녹봉 주는건 예전대로 하자고 빌어. 이게 안통해 더 이상. 사이고는 더해. 얜 지금도 일본에서 위인이야. 자기가 메이지를 만든겨. 헌데 정작. 자기의 사람들이 힘을 잃어. 저 조약할때에 폐도령.이 나와. 앞으로 무사들 칼 차는거 금지. 사이고가 이걸 알아. 무사들이 다들 부글부글 한겨. 저 신정부때메 자기들이 죽는다면서 연일 사이고를 들 쑤셔. 이는 인맥에 신경쓰는 야. 의리. 이걸 중시해. 헌데 얘가 저 신정부를 만든겨. 그 사이에서 그냥 죽을 맛인겨 이 사이고 란 인간은. 저때 조선엘 자길 보내달라고 주장하는겨. 얘가 글이 있어 서신이. 난 죽고싶다. 지금. 죽을 맛이다. 헌데 죽어도 의미있게 죽겠다. 조선에 가면 저들이 반드시 죽일거다. 내가 가서 죽겠다. 나를 보내다오.
오쿠보 도시미치.가 머리가 좋은겨. 저 분위기를 알아서. 저 싸이키를 말이야. 대만으로 돌린겨. 그게 정대론이야. 사이고는 저 내부 불만을 조선을 치는데 활용하잔 거고. 정한론.은 그게 다야. 멀 조선을 먹어서리 식민지로 해서리 따위의 논쟁은 저때 없어. 조선은. 해쳐 먹을게 없어. 그게 입성책동이야 고려 말의. 여섯번을 해. 제발 좀 고려를 처 가지세요 원나라 황제님. 원나가 사람이 저걸 막아. 조선은 우리 원나라가 자져봤자. 저 땅바닥에 아무런 자원도 없고. 오히려 원나라가 고려를 먹여 살려야 한다. 편입하지 말아라.
고려사 실록에 나오는 팩트야 팩트. 헌데 저 따위 말 한 사람이 왕씨인데. 왕씨가 원나라 사람이 되서리, 고려를 위해서 먹지말라고 죽는소리 하며 막은듯. 저 왕씨 애국자.
참 미친 들이야 지금 사가들이란 들은. 걍 저 왕씨 말도 팩트 그 자체야. 원나라를 위해서 한 말이야 저도.
저 쿠로다 키요타카.가 강화도엘 들어가. 만나는곳이 한양이 아니라 강화도에 강화부야. 헌데 말야. 분위기가 쌀벌한겨.
지들 정부에 병력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을 해. 헌데 저때 얘들이 갖고 갈 수 있는 군함 두대가 다여 저때. 이들 이땐 거지야. 그나마 돌릴 수 있는게 저거 두대였어 저당시에. 야 더 보내면 거 조선애들 겁주고 교섭에 방해되니까니 새꺄 쫄지말고 잘 해.
왜냐믄 말야. 병인양요.가 1866. 신미양요가 1871.. 이게 다 강화도여. 운요호가 저기서 누가 먼저 발포를 했던. 얘들이 신미양요 후에 4년만에 온거걸랑. 특히나 신미양요는 삼백명 가까이가 죽었어. 불에 다 태워 미국애들이. 저때가 여름이걸랑. 썪으면 전염병돌아서리 태우는걸 조선인들이 보면 저건 사탄에 악마인겨. 저 분위기가 저때 강화도걸랑. 운요호 오기전에도 그래서 저기에 포대를 배치해놓은겨.
얘들이 이 분위기를 모르고 저길 갔던거야.
거기에. 얘들이 영종도를 뺏았어. 저때 조선인들 또 삼사십명이 죽은겨.
쿠로다.가 들어오는데. 분위기 살벌할 수 밖에 없어.
헌데 말야. 저 쿠로다 키요타카.와 신헌. 의 문답 녹취록이야 저게. 저게 실록에 고대로 있는겨 .
당했으면 우리네가 당한거걸랑. 우리네가 말야. 저 당시 일본네 쳐들어가도 쳐들어가야 했어.
헌데 말야. 저걸 봐 저 문답록을. 대체 말야 누가 죄인이고 누가 갑이야.
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2월 6일 무진 1번째기사 1876년 조선 개국(開國) 485년
접견 대관 신헌과 부관 윤자승을 소견하다
대관(大官) 신헌(申櫶), 부관(副官) 윤자승(尹滋承)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수고가 많았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왕사(王事)가 편안치 못한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노고를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답 장계(問答狀啓)를 보니 과연 말을 잘하였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다행히 전하의 위엄에 의지하고 묘당의 계책에 힘입어 전하의 명을 욕되게 하는 것은 면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노고를 내가 알고 있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따뜻한 말씀이 이러하시니 황송하고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계(狀啓)한 것 외에도 또 접견하여 수작(酬酌)한 것 가운데서 아뢸 만한 것이 있는가? 자세히 아뢰도록 하라."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천하의 각국(各國)에서 무력을 사용하고 있는 때인데 귀국(貴國)은 산과 강이 험하여 싸우고 지키기에 유리한 점이 있지만 군비(軍備)가 매우 허술합니다.’라고 하면서 부국 강병(富國强兵)하는 방도에 대해 누누이 말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 말은 교린(交隣)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 같다. 우리나라는 군사 수효가 매우 부족하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 어영청(御營廳)을 맡고 있는데 정병(正兵)이 많지 못합니다. 금위영(禁衛營)도 마찬가지이며 훈련 도감(訓練都監)은 비록 좀 크기는 하지만 정병을 낸다면 역시 얼마 되지 않고 외방(外方)은 또 절제(節制)하는 군사가 없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군사를 쓴다면 비록 지혜 있는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장수 노릇을 하겠습니까? 병력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이미 오랑캐들이 알고 있는데, 신이 무장(武將)으로서 이미 걱정스러운 것을 보고도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는다면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건대 각 국에서 병력을 사용하여, 전후로 수모를 받은 것도 벌써 여러 차례이거니와, 병력이 이러한 것이 만일 각 국에 전파되기라도 하면 그들의 멸시가 앞으로 어떠할는지 모르겠으니, 신은 정말 몹시 걱정됩니다.
병지(兵志)에, ‘공격하기엔 부족하나 지키기에는 여유가 있다.〔攻則不足 守則有餘〕’라고 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자기 나라를 가지고 자기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등(滕) 나라나 설(辥) 나라 같은 작은 나라들도 한편으로는 큰 나라를 섬기면서 교린하고 또 한편으로는 방어를 갖추고 나라를 지켜 전국(戰國) 시대에서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삼천리 강토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지켜낼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이것은 이른바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분발하여 빨리 변란에 대비하도록 처분을 내리신다면 군국(軍國)의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이미 늙었고 또 어두워서 군사를 거느리는 반열에 있기에는 부족하나, 몸소 눈으로 보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감히 이처럼 두려움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마땅하다."
하였다.
.
불평등조약 이라며 대는 강화도 조약을 맺고. 신헌이랑 고종이랑의 대화야 저게.
고종이 말야. 참 고생많았다 너. 너 일 참 잘했다. 칭찬을 해. 저기서 묘당.이란건 비변사.야 비변사가 외교 국방을 담당해. 그러면서 신헌이 하는 말. 일본인들이 저보고요. 우리네는 험해서 지키기는 좋은데. 군비가 너무 허술하다고 그러더라구요. 제가 생각해도 맞아유. 우리네 허섭해요. 군비를 확장해야 해유 이거.
쟤들이 우리네랑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는건 진심인거 같아유. 어쩌고 저쩌고 해 저때 대화들 보면 말이지.
.
일본애들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장계(狀啓)에,
"일본 사신이 바친 물건이 접견 대관(接見大官) 신헌(申櫶)으로부터 본영(本營)에 전해져 왔기에 우선 영고(營庫)에 봉류(封留)해 두고 물품 목록은 아래에 개록합니다.
회선포(回旋砲) 1문(門), 탄약(彈藥) 2,000발(發), 전차(前車) 1량(輛), 육연단총(六連短銃) 1정(挺), 탄약 100발, 칠연총(七連銃) 2정, 탄약 200발, 비추(緋縐) 2필(疋), 추(縐) 2필, 수진장금시진표(袖珍裝金時辰表) 1개, 금련(金鍊) 1조(條), 청우침(晴雨鍼) 1개(箇), 자침(磁鍼) 1개입니다."
하였다.
강화도 조약 맺고 바로 준 물건들이. 포 하나. 탄약 이천발. 전차 한대. 육연단총 칠연발총. 비단. 시진표.는 시계 같고. 저런걸 줘.
.
고종실록 12권, 고종 12년 5월 10일 병오 2번째기사 1875년 조선 개국(開國) 484년
일본의 문서에 관한 일로 해명하는 역관을 특별히 파견해 일을 처리하게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의 서계(書契)에 관한 일로 삼가 하교대로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정연(黃正淵)의 장계(狀啓)를 가져다가 살펴보니, ‘연향 절차 및 서계와 도서(圖書) 등 격식에 어긋나는 여러 조목을 임역(任譯) 등으로 하여금 연달아 간사왜(幹事倭)에게 효유(曉諭)하게 하니, 비록 몇 건은 순순히 따랐으나 그 밖의 여러 조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번거롭게 간청하여 해부(該府)에 직접 올리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엄히 책망하고 연향은 옛 법식대로 설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서계가 대마도를 통하지 않고 외무성에서 보내온 것은 300년 동안 없던 일이니, 이것이 허접(許接)해서는 안 되는 첫째 이유입니다. 이웃 나라와 사귀는 문자가 겸공(謙恭)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스스로 존대하였으니, 이것이 허접할 수 없는 둘째 이유입니다. 특별히 연향을 베푸는 것은 실로 먼 지방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인데 제반 절차에서 갑자기 전의 규칙을 바꾸었으니, 이것이 허접할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
변경의 정사와 관련된 일이므로 매우 신중히 처리해야 하니, 단지 훈도(訓導)로 하여금 계속 책유(責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따로 일을 잘 아는 역관을 보내어 조목조목 바로잡고 속히 등문(登聞)한 다음 다시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2권, 고종 12년 8월 2일 병인 2번째기사 1875년 조선 개국(開國) 484년
아직도 왜인들이 예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동래 부사 황정연이 보고하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정연(黃正淵)의 장계(狀啓)에,
"이번의 서계(書契)는 마땅히 연향(宴饗)하는 날에 받아보아야 하겠으나 연향을 아직 설행(設行)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복색(服色)과 정문(正門) 출입(出入)에 구식(舊式)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회계(回啓)가 내려왔으므로 마땅히 연향의 설행을 서둘러야 하겠으나 그들이 끝끝내 구식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절차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만큼 사체(事體)가 있으니 신이 자의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은 선위(宣慰)의 직분을 맡고 있으나, 누차 성명(成命)이 있었음에도 교활한 저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아직 경연(經宴)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이 저들을 제압하지 못한 죄가 아닐 수 없으니 황공한 마음으로 감죄(勘罪)하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12권, 고종 12년 8월 6일 경오 2번째기사 1875년 조선 개국(開國) 484년
왜인의 복장 문제를 가지고 아직도 그들을 대접하지 못하고 있는 황정연에게 하유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동래 부사(東萊府使) 황정연(黃正淵)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는 유지(有旨)가 있었습니다. 왜인들에게 연향(宴饗)을 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이 복색(服色)과 정문(正門) 출입(出入)의 구식(舊式)을 따르지 않고 기어코 새 규례를 만들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소상히 효유(曉諭)하여 의심을 확 풀어준다면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복색 등의 문제를 가지고 번거롭게 등철(登徹)하면서 오랫동안 서로 버티면서 시간을 끌고 조정의 명령을 멈추고 집행하지 않으니 변신(邊臣)으로서 몹시 놀랍고 소홀한 행동입니다.
전 부사 황정연은 엄하게 추고(推考)할 것이며 새로 제수(除授)된 부사는 며칠 안으로 사조(辭朝)해야 할 것입니다. 서계(書契)와 연향의 절차는 전에 행회(行會)한 대로 상세히 개유(開諭)하여서 사체(事體)를 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일본애들이 폐번치현.이 1871년이야. 자세한건 넘어가고. 이때부터 영주는 거지야. 월급쟁이야 얘들은. 쓰시마 도주 란것도 없어 이제.
부산 동래 왜관.은 쓰시마랑 관계한거란겨 조선 왕조는. 아니 애들이 갑자기 옷도 양복이라는 시안한거 입고 돌아댕기고. 거래상대가 쓰시마가 아니라 일본 신정부.라는겨. 조선의 의리. 조선의 믿을 신.이 있지 어드래 저따위 정부와 거래를 해. 우리네는 쓰시마 섬하고만 상대할껴.
한심한겨 저게.
일본애들이. 왜관에 보내는 서류.의 장.이 그 도장 씰 헤럴드리.가 신정부로 바꾸겠다는겨 쓰시마 도주.가 아니라. 해서 저 해에 사신을 보내 일본애들이. 다시 국가대 국가로 계약을 맺자고. 외교관을 파견하는겨 대사니 영사처럼.
서계. 라는 말이 저기서 자주나오는데. 저게 외교관 신임장.이야. 신임장을 받아야 정식 대리인이 되는겨 영사던 대사던. 헌데 저걸 안받아줘 조선이. 저게 1875년까지 벼라별 변명을 대면서 일본애들을 상대를 안하는거야 저게.
연향.이라는게 신임장을 받는 의전이 음식나오는 자리에서 하는거걸랑. 못하겠다는겨. 쿠로다의 이야기도 저기 문답에서 저거야. 대체 니덜 왜 그러니?
니덜 대체 왜그러니? 저걸 신헌이 구구절절 변명하는겨.
저게 강화도 조약.과 정한론.의 빌미가 된게 저거야.
일본애들 입장에선. 명예 침해죄야. 명예훼손이야. 불쾌한겨. 자기들을 국가로 상대안하고 미개하게 대접한겨 저게. 쟤들이 저거에 분노해서리. 저 조선 저거 머여. 치자우. 했던겨 저 당시의 정한론 이란건.
그 오해를 쿠로다와 신헌이 저기서 푸는겨. 니덜 신문보니 조선을 하빠리 취급하더라 하니 쿠로다가. 신문이란건 이 저 벼라별 말하는거고 거기에 진실이 몇개며 어쩌고.
永宗城を攻撃する雲揚の兵士ら(想像図). 영종도.성을 공격하는 운양(운요호)의 병사들.
明治太平記(編輯:村井静馬 画:鮮斎(小林)永濯、序:明治8年3月27日、刊行明治13年(1880年)12月. 메이지타이헤이키 18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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