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ke's burial at sea off Portobello. Bronze plaque by Joseph Boehm, 1883, base of Drake statue, Tavistock.

 

 

프랜시스 드레이크. 가 1596년에 죽어. 죽은몸을 포토벨로 근처에 수장을 했어. 

 

사인은 이질에 의한 병사였고 그때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죽기 직전에는 병상에서 갑옷을 입으려고 하는 등 정신착란 상태를 보였다고 한다(죽을 때 멋있게 죽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생에 자식은 없었으며, 시신은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포르토벨로 부근의 바다에 수장되었다. 오늘날까지 다이버에 의한 수색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글위키.

 

 

쟤들이 영어 를 저리 번역질 지 눈깔에만 번역이 된걸 축약해서 저리 쓰걸랑. 저게 영어 좀 한다는 이땅바닥애들 수준이야 저게. 갑옷을 입혀달라.라는게 정신착란에 의한 . 다 주작이걸랑 저딴개이. 몇 주전에 그 위 푸에르토리코에서 싸우다 포탄을 맞아. 그리고 죽은건데. 정신병 걸린가 전쟁질하러 갔겠냐 . 

 

Before dying, he asked to be dressed in his full armour. He was buried at sea in a sealed lead-lined coffin, near Portobelo, a few miles off the coastline.

 

어 실드 레드 라인드 카핀. 이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참 개하는거지. 레드 라인드 라는건. 레드. 라는 납 덩어리를 매단 줄. 이야. 옛날에 바다 깊이를 쟤기 위한 도구야. 연추선이라해. 납덩어리를 추로 달은 선. 몸을 포장해서 납덩어리를 달아서 잠기게 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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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세 이야기.가 정말 개 오역질로 이 땅바닥에 심어졌어. 똑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일본들이 삼백년전의 텍스트를 보고 백년전에 번역한 그 글들을 지금 한글러들이 거기서조차도 삐딱한 왜곡된 똥떵어리 얘기만 주입이 된거걸랑. 양키 제국주의 하기 위한 근거를 삼을라고.


참 이땅바닥은 온갖 거짓과 위선의 똥떵어리 그 자체야. 

유럽 중세를 대충 퉁칠때 애들이 내뱉는 개소리는. 해적질이 무슬림 애들이랑 그 수준이 똑같고 다 같은 고 해적들이 딴애들 재산 약탈해서 국가 차원에서 재산 불린 그 수준의 애들일 뿐. 어쩌고 저쩌고 하걸랑.



일단 말야. 무슬림의 지중해 해적 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몰라. 쟤들은 대갈빡에 아는게 없어.

그리고 나서리. 쟤들 해적질을 저기에 빗대는겨.


쟤들이 그따위로 살아왔으면 지금 문명을 쟤들이 만들었겠니.

하기사 . 동양의 가치 이 해대민서리. 정신문명이 지고한 중국이와 인도와 동방예의 지쿡의 조선 이 하는 마당에. 아 정말 욕밖에 안티나오걸랑.

유럽의 해적은. 지중해 해적질의 무슬림과 전혀 다른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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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해적은 주 타겟이 이탈리아야. 그리고 마르세유 등 프랑스 남부. 그리고 스페인 해변. 레콩퀴스타 후에.

저건 다시 말해서. 고대 로마 의 연장선이야. 저 스페인 해변과 프랑스 남부.는 고대 그리스 도시들이야. 고대 로마보다 먼저야 저기가. 북아프리카 해변에서 고대에 약탈한겨. 이때는 그리스 본토에도 약탈이 심했던거고. 그리고 중세가 되서. 무함마드 이후로 무슬림들이 하는겨. 저기 해적을 코서. 코세. Corsair . 이 명칭은 지중해 해적용이야. 라틴어 받은 이탈리아 말이야 이 말은. 이걸 프랑스 남부에서도 불어로 갖고 가는거야. 

북해와 발트해의 해적들을 바이킹. 하다가. 파이어리트 .Pirates  하는겨. 그리스말 받아서 게르만들이 쓴겨. 여긴 코세.가 아냐 원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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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imates for the prevalence of slavery in the Roman Empire vary. Estimates of the percentage of the population of Italy who were slaves range from 30 to 40 percent in the 1st century BC, upwards of two to three million slaves in Italy by the end of the 1st century BC, about 35% to 40% of Italy's population.[26][27][28] For the empire as a whole during the period 260–425 AD, according to a study done by Kyle Harper, the slave population has been estimated at just under five million, representing 10–15% of the total population of 50–60 million+ inhabitants. An estimated 49% of all slaves were owned by the elite, who made up less than 1.5% of the empire's population. About half of all slaves worked in the countryside where they were a small percentage of the population except on some large agricultural, especially imperial, estates; the remainder the other half were a significant percentage 25% or more in towns and cities as domestics and workers in commercial enterprises and manufacturers.[29]

 

고대 로마때 의 노예를 추정하길. 기원전 1세기에 삼사십퍼. 이탈리아 안에서만 삼백만의 노예. 이탈리아 인구의 사십퍼 가까이. 즉 저때 이탈리아 인구를 9백만 내외로 보는겨. 3세기 전후의 전체 로마제국. 2세기. 트라이아누스.가 다키아 먹고나서 서기 백년 지나면서 최대치 였걸랑 땅덩어리가. 그리고 나서리 좀 지난후에 전체 노예수는 5백만 추정. 전체 로마제국 인구를 오육천만명.으로 볼때 십퍼 십오퍼. 

 

모든 노예의 반은 엘리트. 즉 파트리쿠스. 파트로누스.가 소유했고 이들은 전체 인구의 일쩜오퍼. 

 

Roman slavery was not based on ideas of race.[30][31] Slaves were drawn from all over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including Gaul, Hispania, North Africa, Syria, Germany, Britannia, the Balkans, Greece, etc. Those from outside of Europe were predominantly of Greek descent, while the Jewish ones never fully assimilated into Roman society, remaining an identifiable minority

 

로마의 노예는 인종.을 잣대로 두지 않는다. 유럽 전역과 지중해 에서 왔다. 유럽 외에는 그리스 핏줄들이 압도적이다. 유대인들은 로마 사회에 전혀 동화되지 않았다. 

 

 

 

Debt bondage, also known as debt slavery or bonded labour, is the pledge of a person's services as security for the repayment for a debt or other obligation, 

 

이 노예 중에. 전쟁에 의한 노예도 많지만. 빚 노예도 많은겨. 로마인.이라도 빚 못갚으면 노예가 돼. 다 갚으면 해방노예가 되서리 나중 시민권을 받아. 

조선바닥은 18세기 지나면서 인구 반이 노예야. 어떤 애들은 우리 위대한 조선왕조님들은 노예가 아니라. 쟤들의 농노 임둥!!! 감히 노예 라니!! ㅋㅋㅋ 진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지. 노비나 농노나 . 노예이상 먼 차이니 그게. 

로마애들은 저따위 노예 구성에서 문명이나 허벌라게 창조를 하지. 이 조선들은 말야. 지들 민족을 노예로 부리는 전 세계 문명사에 전혀 없는. 저러면서 지들 끼리 재산놀이를 오백년을 한겨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이이.가 노비들 신분 철폐해서 군역을 시키면 잘할겁니다. 하니까니 양반들이 자기 재산 뺏기는 게 보이걸랑. 이이.가 임금님 뵈러 왔다가 병걸려 잠시 쉬는 걸 핑게꺼리로 탄핵을 해요. 다음해 죽어. 이이.도 머 별거 있냐.
하튼 조선 왕조 오백년의 선비들 들 처럼. 인류 문명사에서 개 들이 없어 보믄.
저따위 들을 자랑스런 역사 대미 지폐 동전으로 모시는 들 수준은 또 어떻고.

.유럽애들은. 무슬림 들 처럼. 중세만 따져도. 중세 천년을. 지중해 북부 전역을 민간인 약탈하고 민간인들 노예로 포획해서리 사람장사하는. 그따위 을 어드래 유럽 해적애들에게 비교를 하니 .

더하여 말야. 저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예로 들면서. 아 일단 아는 이름은 저 인간 이름밖에 없어. 그러면서 엘리자베쓰가 해적을 용인하는 권리를 줘서리 상대를 맘껏 약탈하라는 나라. 저 잉글랜드는 그래서 해적질로 처먹은 나라. 미개한 애들. 

 

야. 그러면. 니덜이 잘나 보이니. 그따위 개그지 거짓말들 씨부리고 주작질하고 세뇌당하고 살면. 존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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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이땅바닥 지시긴 애들 수준이야.

 

저따위 말 하는 애들의 대갈빡은.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이 하는겨.

 

 

세상 문명사 인류사 에서. 무너져 가는 왕조 가. 자기 나라 이름 바꾸고 이어서 계속 헤쳐먹으면서. 또한 그 망한왕조를 떠받들어 정체성을 유지하는 나라는

 

 

이 조선민국. 이 유일해. 참으로 기괴한 나라야 여기가.

 

 

한국. 그 삼한의 한. 이전 수십번 썰했듯이 말야. 일본가 먼저 꺼낸 말. 삼한의 한.을 조선 구한말에 꺼내 저걸. 그리곤 지들이 대한 제국. 이래.

 

 

인류사에 저따위 하는 들은. 유일해 조선이. 아무런 근거가 없어. 딴애들이야 엠파이어 할만하고 나름 이유가 있으니 엠파이어 을 대지. 일단 자기땅 외에 남의땅을 복속하니 엠파이어. 하는 게 아냐. 엠파이어.라는 개념은 종교야. 잉글랜드는 로마를 버리고 자기들 앵글리카니즘의 세계.해서 엠파이어야. 러시아는 콘스탄티누스 핏줄 여자 소피아.가 이반3세에게 와서 오소독시. 정통인 세계 해서 엠파이어.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황제관을 해체당하고 비엔나로 지들이 갖고 가서 그 관 쓰면서 엠파이어. 독일은 이전 신성로마가 자기들이다 원래 엠파이어. 다 이유가 있어 나름

 

 

전혀 오백년 똥바닥으로 만든 들이. 갑자기 이름 바꾸고 엠파이어. ㅋㅋㅋ. 이제 조선을 버리고 한. 이라는 나라. 그 대한국제 법조항 아홉개냐. 그게 법이니 그게. 모든 건 다 황제님에 따라라. 완전히 전제군주 놀이도 먼 아프리카 추장놀이 하는것도 아니고 말야. 

 

 

그러면서. 이젠. 조선의 정체성은. 한. 입니다. 저때부터 조선사람들은 조선 이란 말을 버리고 한. 이란 한민족을 씁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저 한 만든 구한 말 이후 입니다. ㅋㅋㅋ.

 

저게 소위 진보 애들이 써먹는 논리야. 

 

 

저게 말이 되냐 저게. 조선이 너무나 너무나 후진걸 알걸랑 점점. 허니 한. 으로 가면을 써. 헌데 정작 조선에 대한 비판 하면 식민사관 자학사관이래 ㅋㅋㅋ. 조선이 좋았는데. 이름만 바꿔서 대한 민국 이란건지. 저따위 정체성이 무슨 의미가 있니 저게.

 

 

노예 이야기하다 이이 얘기하다 조선 이야기 하다 말이 샜는데.

 

 

유럽은 무슬림 처럼 저따위 은. 비율로 견줄 수가 없어. 북해 발트해.는 유럽애들이 지들 끼리 싸운겨. 쟤들이 무슬림이 유럽애들 약탈하듯이 쟤들이 무슬림을 약탈 노예 장사를 했냐. 몇 퍼는 그도 했겠지. 

 

 

지중해 해적 애들 때문에. 이탈리아 도시 설계가 바뀌었어. 천만이 넘을거야 천년동안 저 지중해 무슬림해적에 습격당해 잡힌 사람들이. 이 들이 또한 아프리카 더 들어가서리 흑인 장사도 하는겨. 얘들의 노예장사는 유럽들의 것과 비교를 할 껀덕지도 없어. 무슬림이 저따위 무슬림 된 이유야. 일단 무함마드 랑 지저스 랑 의 차이야. 시작부터가. 시작부터 종교가 하렘을 만들었걸랑 저따위 무슬림은. 

 

 

 

letter of marque and reprisal (French: lettre de marque; lettre de course) was a government license in the Age of Sail that authorized a private person, known as a privateer or corsair, to attack and capture vessels of a nation at war with the issuer.

 

마크.와 리프라이절.의 레터. 라이센스.야 레터가. 마크. 는 후작 할때의 마크.야 첨병이고 땅을 쳐들어가고 지키는 영역표시 하는겨. 리프라이절.은 복수.야 당한 걸 갚는겨.

 

Appleby, John C. Under the Bloody Flag: Pirates of the Tudor Age. The History Press, 2009.

 

Dalton, Paul, and John C. Appleby. Outlaws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England: Crime, Government and Society, c. 1066 – c. 1600. Ashgate, 2009.

 



이런 중세 유럽의 해적 이야기도. 서기 이천년 지나서야 나오는겨 이게. 지중해 해적들 이야기도 이제야 제대로 나오는거고. 하물며 저 북해와 발트해와 대서양의 해적.은 대체 머냐. 어느정도냐.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이야기고. 이걸 지중해해적과 비교할게 못돼. 이건 바이킹들이 잉글랜드 스콧랜드 아일랜드 다 쳐들어 점령해서 정착한겨. 민족 이동이야 이건. 그러면서 쟤들과 전쟁을 삼사백년 한거야 바이킹 시대야 그게. 잉글랜드 스콧랜드 아일랜드 정리되고. 노르웨이 스웨덴도 왕조 서면서 점점 중앙집중적 구조 가지면서 문명인이 되가면서 바이킹이 남은 애들이 저기서 잔당 짜잘하게 해적질을 하는겨. 이건 지중해 애들과 비교가 안돼 규모가. 의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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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st widely known and far-reaching pirates in medieval Europe were the Vikings, seaborne warriors from Scandinavia who raided and looted mainly between the 8th and 12th centuries, during the Viking Age in the Early Middle Ages. They raided the coasts, rivers and inland cities of all Western Europe as far as Seville, which was attacked by the Norse in 844. Vikings also attacked the coasts of North Africa and Italy and plundered all the coasts of the Baltic Sea. Some Vikings ascending the rivers of Eastern Europe as far as the Black Sea and Persia. The lack of centralized powers all over Europe during the Middle Ages enabled pirates to attack ships and coastal areas all over the continent.[vague][citation needed]

 

일단 위키에도 저 북해쪽 해적 중세 이야기가 저게 다야. 다시말해서 저게 연구가 지금에야 하는겨. 헌데 별게 없어 또한. 저 마지막에 베이그. 인용불명. 이란 게 머냐면. 카더라 통신이걸랑. 이 카더라 통신은. 유럽애들이 근대의 정점 프랑스 혁명을 포장하면서. 이 폭동 수준의 이야기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중세를 로 만들어버렸걸랑 민들이 다 파괴하고 말야 중세 유적을. 그러면서 다크에이지. 어둠의 시대.란 단어를 만든거야 저때. 그 이야기를 일본들이 메이지때 번역한 걸 지금도 우리네가 보는거고. 저따위 영어 번역 실력으로 직접 디다보는 들도 있는거고.

 

 

시중에 책이란게 볼게 없어 . 특히나 역사책. 아 끔찍한겨.

 

 

팔세기에서 십이세기 바이킹 시대의 해적은 의미가 없어. 저때는 쟤들도 왕조가 안설때야. 서고 나서리 내전 하던 때고. 일본들이 전국시대때 중국이랑 조선반도를 약탈한 구조랑 비슷해. 

 

그리곤 정작 진짜 중세시대의 유럽애들의 해적질.은. 배를 공격하고 해변을 침범했다 전대륙에 걸쳐서. 

 

 

저게 다야. 

 

 

저 한 줄.을 근거로. 지중해 해적이나 유럽애들 해적이나 같은겨 하는겨. 참 너무하지 않니?

 

 

저쪽 바다의 중심 세력은. 프랑스 북부 해변. 잉글랜드 스콧랜드 아일랜드. 플랑드르 프리지아. 발틱해의 게르만과 슬라브. 

 

 

바이킹 시대 이후에. 바이킹들이 잉글랜드 쳐들와서리 앵글로색슨이랑 싸우고 정착하고 크누크란 애도 왔다가. 1066년에 윌리엄이 킹 하면서 막 안정의 시작을 가는겨. 바이킹애들도 점점 문명화되서 정착할 애들 정착하고 떠날 애들 떠나고. 스칸디나비아도 왕조가 자리잡기 시작하고. 

 

 

지들 끼리 싸우면서 그리스도 되면서 문명인이 되는겨 쟤들은. 세상에서 제일 늦은 축의 애들이야. 슬라브가 그 다음에 늦은 애들이고. 이땅바닥은 삼국시대 문명일때 쟤들은 이제야 바바리안에서 탈출하는겨 저러면서.

 

 

이슬람의 레반트.는 그리스 로마보다 빨라. 하물며 쟤들보다 수천년이 빨라. 이 동네는 고대 근동사의 이야기가 기원전 6천년전후부터 찐하게 스몄어. 고대 이집트 빵빵왕조가 기원전 3천년 이야. 무슬림이란 들은 그 속에서 단지 이슬람이란 또다른 가면을 쓴 들일뿐이야. 쟤들 바이킹 애들은 로마도 모르던 애들이고. 무슬림의 그 이전 핏줄들은 쟤들과 비교하면 아이를 외계인님 수준이신겨.

 

 

 

헌데 이 들은 지중해에서. 쟤들 저리 바이킹 하면서 같은 게르만애들 약탈하미 전쟁할때. 재들은 아래서. 이전 로마가 만든 문명의 이음을 계속 약탈만 해댄겨. 지들 껄 만들 생각을 안하고. 

 

 

저 지중해 북부 해변땅은. 로마가 망해도. 이들은 고대 그리스를 이은 고대 로마.의 살았던 사유를. 그 삶의 방식을. 그 문명의 양식을 그대로 이어서 바로바로 쌓아올리면서 살아. 항상 부유한겨 상대적으로. 지배체제가 망해도 그 바닥은 여전히 다시 살아남아서리 꿈틀대면서 이전의 것들 하던 대로 다시 세우고 살아간겨

 

 

이 무슬림들은. 자기들 꺼를 쳐만들 생각은 안하고. 레반트의 도시들의 고대 문명을 더 올리면서 퍼뜨릴 생각을 안하고. 걍 저곳만 약탈하면서 살아간겨. 

 

 

쟤들은 문명화 과정이 될때. 훨씬 문명인의 무슬림애들이. 정체하면서 편하게 살기만 한거야. 마약장사 다음으로 제일 돈되는 사람장사에 도적장사 만 한거야.

 

 

저게 지금의 무슬림.이야 무슬림 문명이고. 쟤들 바이킹 시대부터 사오백년 지나면서 백년전쟁하는 서기 1400년 지나면 육백년을 미개에서 탈출할때말야. 재들은 지중해 남쪽과 동쪽에서 전 혀. 발전 없이 삶의 방식이 똑같은겨 쟤들 육백년간. 그게 지금 이슬람 들이야. 그러곤 남탓하는겨 저게 테러만 할줄 알고. 아주 똑같아 유교의 자식들이랑.

 

 

In the absence of professional navies, and with small royal fleets made up of ships which could still be challenged by well-armed private vessels, maritime power was essentially fragmented. In addition it was marked by an inescapable intermingling of public and private interests. (Appleby, 13) 

 

 

저 해적연구한 이의 글 갖고 오면. 해서 말야. 중세 후기인 백년전쟁 이전까지도. 저 북해와 발트해.는 해군.이라는 게 없어. 

 

 

신성로마제국이 해군을 만들 이유가 없어. 플랑드르 프리지아.나 해상에 힘을 쏟을 까. 저긴 내륙이야. 더하여 발트해란건 엘베강 지나서야. 엘베강 건너서리 그 동쪽 위쪽이 발트해야. 

 

The House of Mecklenburg, also known as Nikloting, is a North German dynastythat ruled until 1918 in the Mecklenburg region, being among the longest-ruling families of Europe.

 

왼쪽 북해는 플랑드르와 프리지아. 야. 신성로마에 플랑드르는 합스부르크 때에나 들어오는겨. 프리지아.는 이전엔 걍 자치권 강한 영지야. 신성로마는 해군을 만들 이유가 없어. 저 동쪽 발트해에. 메클렌부르크. 가문이 뤼네부르크.에서 시작해서리 지금 서포메라니아.와 합친 독일 주.가 되지만. 저 메클렌부르크 가문이 저해변으로 넓히는것도 12세기 넘어서야. 그 아래 브란덴부르크 후작령들이 또한 호헨졸레른 가문들이 오면서 진출하지만 얘들은 내륙이고. 

신성로마.는 해변에 관시미가 없어 저 북쪽의.

즉 해상세력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이라는 바이킹의 후손들이 잔당세력들이 되서리 약탈하는 것 외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일 뿐인데.

잉글랜드 만 보면. 여기도. 헨리2세 가 엄마 마틸다랑 사촌이랑 아나키.라는 내전하면서 컸다고 했잖아. 그리고 사자심왕 리차드에 실지왕 존에 얘가 마그나 카르타. 땅 다뺏기고 하면서 꼬마 왕 헨리3세에 역시 내전 또 나고. 배런들 이란 남작들이 모이걸랑. 그러면서 말야. 여긴 왕정차원의 해군이 없어. 약해 의미가. 걍 왕이랑 경호하는 애들이 타는 배들 몇개 수준인거야. 내전하면서 해변 애들이 상대영지를 공격하는거고. 해변의 영지들이 배에 무장을 하는겨. 이때도 파이어리트. 라는 개념이 약한거야 이게. 이건 전쟁이야. 상대의 땅과 상대의 상선을 공격하는겨. 이건 해적개념의 민간인 약탈 하는게 아냐.

무슬림들이 지중해 해적은. 그건 전쟁이 아냐. 걍 지중해 북쪽 해변의 민간인 마을들과 도시들을 수시로 약탈하는겨. 오스만이 동유럽 치고 올라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겨. 지중해의 해적들은 코서. cosair 라고 쟤들이 착한척 공인된 해적 정의 해주는데 천만의 말씀이야 저건. 저런 을 셀림1세가 죽기전에 눈치를 채고 아들 술레이만.이 활용한것 뿐이야.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해적질 해 줄테니 우리에게 투자하라우 를 콜한겨. 전쟁이란건 무장한 들 이 서로 싸우는게 전쟁이지. 그때의 해적을 공인된 해적.이라 명명할 수는 있겄지. 저 지중해 해적은 그딴게 아냐. 걍 무작위적으로 무자비하게 민간인마을들과 사람들을 잡아간 것일 뿐이야.


쟤들은 그런 해적질이 아니야 근본적으로. 저 북해와 발트해는. 물론 소수애들이 한건 있겠지만.
전혀 개념이 달라.

Not until 1228 did England try and execute a pirate, William de Briggeho, for the first time. 



쟤들은 그야말로 공식적으로 전쟁 이였어. 해서리 걍 묵인한 것일 뿐이고. 상대 영지를 갖기 위해서 다툰겨. 지중해 들은 오직 약탈과 사람장사 가 목적이야.

딱히 이 해적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 1228년에야 윌리엄 드 브리거.라는 해적을 사형시키다. 처음 나오는 기록이야. 백년 전쟁 전이야 저게. 내전 계속 할때야. 그때 도적질 하는 애 하나 잡아 죽인겨.

Eustace the Monk (Old French: Eustache le Moine; c. 1170 – 24 August 1217), born Eustace Busket,[1] was a mercenary and pirate, in the tradition of medieval outlaws. The birthplace of Eustace was not far from Boulogne. A 1243 document mentions a Guillaume le Moine, seigneur de Course, which indicates that the family lived in that vicinity.[2]

 

 

몽크 우스타시. 수도사야. 용병에 해적. 저 유럽 해적사에서 처음으로 티나오는 인물이야. 우스타시.가 불로뉴 바로 아래. 불로뉴가 칼레 왼쪽 해변이야. 이 불로뉴.에서 나폴레옹이 영국을 쳐들어갈라고 발 동동 구르던 곳이야 넬슨 따돌리고 어여 오라 했걸랑 도버 건너야 한다고. 한데 얘들이 넬슨에 잡혀서리 트라팔가르 곶에서 전멸한겨. 그래서 나폴레옹이 영국을 못먹은겨. 할때 그 불로뉴 아래의 우스타시.에서 태어난 버스킷 수도사. 얘가 프랑스 애잖아. 원래 수도사 였다가 아빠 죽은거로 복수한답시고 해적이 되었다는데. 저때가 실지왕 존.이 존엄왕 필리프.한테 뺏긴 땅 다시 찾는답시고 싸울 때걸랑. 프랑스가 싫은겨. 잉글랜드 존 킹이 얘를 고용해. 그리곤 다시 프랑스 용병이 되고. 잉글랜드에서 왕권에 대드는 배런들이 나올때 프랑스가 지원겸 먹을라다가 휴전할때 얠 죽여.

 

With the Viking era at an end, and conflict with France largely confined to the French lands of the English monarchy, England faced little threat from the sea during the 12th and 13th centuries, but in the 14th century the outbreak of the Hundred Years War dramatically increased the French menace. Early in the war French plans for an invasion of England failed when Edward III of England destroyed the French fleet in the Battle of Sluys in 1340.[16] Major fighting was thereafter confined to French soil and England's naval capabilities sufficed to transport armies and supplies safely to their continental destinations. However, while subsequent French invasion schemes came to nothing, England's naval forces could not prevent frequent raids on the south-coast ports by the French and their Genoese and Castilian allies. Such raids halted finally only with the occupation of northern France by Henry V.[17]

 

 

프랑스도 잉글랜드도 딱히 해군 이란게 없었어. 잉글랜드.는 백년전쟁 이전에는 딱히 바다에서 왕권차원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거야 바이킹시대가 끝나고. 바이킹애들도 지들 정착을 한겨 대륙 게르만들이 로마랑 싸우다가 정착했듯이. 그러다가 백년전쟁 때. 프랑스가 초기 에드워드3세 넘어오는걸 못 막으면서 프랑스도 자각을 하기 시작한거야. 즉 프랑스도 딱히 바다는 관시미가 없었어. 또한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던겨 저게. 바이킹이 끝나고는. 백년전쟁하면서 소위 해상의 무장을 키운거야. 그러면서 상대국 해변들을 습격을 하는거고. 

 

 

 

Henry VII deserves a large share of credit in fostering sea power. He embarked on a program of building merchant ships larger than heretofore. He also invested in dockyards, and commissioned the oldest surviving dry dock in 1495 at Portsmouth.[18]

 

잉글랜드.는 이 튜더 시작의 헨리7세가 만든겨. 얘가 경제란 무엇인가. 국부란 어디서 오나. 아 기존 지주 시스템은 한계가 있구나. 상인들 특히나 울 양털 기르고 플랑드르 프리지아에 팔고 더 나아가 원단도 만들면 더 부가가치 생기고 해서 상업이 커지면 거기서의 세금이 더 들어오는구나. 를 깨달은 인간이걸랑. 얘가 지금 잉글랜드를 만든거야 이 헨리 7세가.

 

 

더하여 이 인가이 말야. 선박 제조 시스템을 바꾼겨. 개인들 몇몇 모여서리 배를 만드는 것보다. 왕조 차원에서 그 도크를 만들어준겨. 야드도 만들고. 더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이건 개인 몇몇이 못하는거야. 

 

 

헨리 7세는 위대한 야 얘가.

 

 

저때가 끽해야 헨리 8세 아부지야. 서기 1509년에 죽어. 

 

여기는 그야말로 프라이빗티어야. 

 

privateer is a private person or ship that engages in maritime warfare under a commission of war.[1] The commission, also known as a letter of marque, empowers the person to carry on all forms of hostility permissible at sea by the usages of war, including attacking foreign vessels during wartime and taking them as prizes. Historically, captured ships were subject to condemnation and sale under prize law, with the proceeds divided between the privateer sponsors, shipowners, captains and crew.

 

얘들은. 레터 오브 마크. 라는 선박 공격 증서.를 받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육백년간 전쟁이야 수시로. 공식적인 전쟁이야 얘들은. 상선을 공격하고 공격받으면. 그 사유를 제출해. 그 사유에 의해서 보복 을 사적으로 할 권리를 주는겨. 왜냐믄 왕정차원에서 해군이 미약할때야. 저따위 해군 개념은 서기 1500년 근대 이후에야 시작하는겨. 

 

얘들은 걍 지중해 들처럼 아무 개념없이 해변에 민간인 마을에 도시들 약탈하고 사람 포획해서 노예로 팔아 돈버는 그따위 이 아냐.

 

 

어드래 저것과 지중해 무슬림 개들의 해적질을 비교를 하냐.

 

 

During the 13th century, maritime associations emerged to supervise trade and suppress piracy on the Baltic and North Seas. The first of these appeared in Germany when the cities of Lübeck and Hamburg banded together as the Hanse, or Hanseatic League. By 1300, other port cities had joined until the Hanse was akin to an independent state. Its ships often sailed in convoys, and beginning in 1477, large vessels were required to carry twenty armed men to defend against pirates. 

 

 

오른쪽 한자 동맹.이란게 13세기에 등장하는데. 뤼벡. 이 시작이야. 여긴 엘베강 건너서 함부르크 지나서 발트해 접하는 곳이야 여기가. 이건 발트해.의 바이킹 후손들 때메 만든겨. 문명화된 바이킹에서 탈락한 애들이 도적이 된겨 상선들을 공격해. 이걸 모여서리 무장을 하는거야. 신성로마제국이 안해줘. 저긴 저 직전에야 영지가 들어서고 후계자 계승권 전쟁들 서로 할때야 엘베강 넘어서는.

 

There was an upsurge in piracy during the Hundred Years’ War (circa 1337 to 1453). The dukes of Mecklenburg hired German seamen, who became known as Victual Brothers (Vitalienbrüder) because they supplied food to Stockholm while the Danes besieged it. In reality, though, they were sevore (sea robbers), and since they received no wages, they survived by plundering ships of the Hanse. Once they boarded a vessel, they slew anyone who had dared to resist them. The rest they put in barrels, nailed shut the lids, and stowed them in the hold until they could be ransomed. But the Vitalienbrüder weren’t always successful: 

 

. . . in this year [1391] . . . a number of these Vitalienbrüderattacked a ship from Stralsund and attempted to take it by force, even though they heard and saw that its crew were not Danes but Germans. But the men on the Stralsund ship defended themselves and overcame the Vitalienbrüder and captured more than a hundred . . . . They took barrels . . .  struck the bottoms out of them, and made a hole in the top large enough to hold a man by the neck. Then they stuffed the Vitalienbrüder into the barrels, one after the other, so that their heads stuck out of the top. Then they nailed the bottoms shut again. They stacked up the barrels as one is accustomed to do, but with the men in them, and brought them to Stralsund. The Vitalienbrüder remained in the barrels until they were taken in carts where they were to be beheaded. The Stralsunders had learnt this method of dealing with prisoners from the Vitalienbrüder themselves, who had mistreated and martyred many a poor Dane in just the same way. (Meier, 147) 

 

 

비탈리엔브뤼더. The Victual Brothers (GermanVitalienbrüder) were a loosely organized guild of privateers who later turned to piracy. They affected maritime trade during the 14th century in both the North and Baltic Seas.[1]

 

 

비탈리엔 형제들. 저때가 1391년이면. 칼마르 마가렛 퀸이 시작 전에. 스웨덴 형이 죽고. 노르웨이 동생이 같이 킹하다 죽어서리 마가렛이 칼마르 다 연합 킹 하기 전이야. 스웨덴에서 자기 귀족들이 내전하면서 킹하려는. 저때 스톡홀롬에 있는 덴마크 인들에게 식량 주라고 동원한 이들이 이 비탈리엔브뤼더. 인데 얘들이 해적이 된겨. 하튼 당시 유명한 게르만 해적집단이야.

 

 

After the Vitalienbrüder attacked Bergen, Norway in 1393, the Hanseatic League, the Teutonic Knights, Queen Margaret I of Denmark, and Mecklenburg signed a treaty that ordered the Vitalienbrüder to depart the Baltic Sea. Gotland wasn’t covered by the treaty, so many of them went there. Now they attacked any and all merchant ships. Finally, Konrad von Jungingen, Grand Master of the Teutonic Knights, gathered an invasion force of eighty-four ships, 4,000 soldiers, and 400 horses and attacked Gotland. Most of the pirates were slaughtered. 

 

쟤들을 다 잡다가 걍 풀어주고. 다시 얘들이 곳랜드 그 구트족 고향. 가고 또 막막 약탈하는걸 튜튼들이랑 대규모로 연합해서리 대부분을 죽이다. 

 

 

The survivors of the Gotland raid adopted a new moniker, the Likedeelers, which meant they shared their spoils equally. Their base of operations was Helgoland, an island in the North Sea about forty-five miles from the German coast. Protected by tall sandstone cliffs, this haven was easy to defend against attack and lay near the shipping lanes that linked Hamburg, Denmark, and ports on the Baltic Sea. Their most notorious leader was Klaus Störtebeker, whose surname meant he could drain a mug in a single gulp. As was the case with Eustace the Monk, Störtebeker’s origins are fuzzy. He may have been born in Wismar around 1360, and his real name may have been Nikolaus Storzenbecher. According to legend, he sailed aboard the Seetiger (Sea Tiger), which may have been a cog. Three of his captains were Gödeke Michels, Hennig Wichmann, and Magister Wigbold (Magister being an academic title of the period)

 

 

비탈리안 형제들.이란 해적들 중에 살아남은 이들이. 리케딜러. 엔분의 일 똑같이 나누는 애들.이란 뜻이야. 계속 해적질 하는겨. 해적질한 장물을 거래를 못해 이제 한자동맹때문에. 이걸 프리지아 에서 얘들 장물을 받아줘. 그러다 결국 이것도 못하게 돼. 그러면서 넘어가서 북극해쪽 약탈하다가 잡히고 재판받아서리 사형당하고.

The Confederation of Cinque Ports (/sɪŋk pɔːrts/)[1] is a historic series of coastal towns in Kent and Sussex.[2] It was originally formed for military and trade purposes, but is now entirely ceremonial. It lies at the eastern end of the English Channel, where the crossing to the continent is narrowest. The name is Norman French, meaning "five ports". They were:

 

 

잉글랜드에는 싱크 포트스. 라는 항구도시들 연합체가 있었어. 잉글랜드 동남부에 켄트와 서섹스. 

The origins of the Cinque Ports can be traced back to Anglo-Saxon times,[7] when certain south-east ports were granted the local profits of justice in return for providing ships.[8] By 1100, the term Cinque Ports had come into use; and in 1155 a Royal Charter established the ports to maintain ships ready for The Crown in case of need. 

 

앵글로색슨 시대부터 였대. 오래된겨. 기록에 등장하는건 1100년. 

 

 

Although the Hanse was the most successful of the merchant trading groups, it was not the only one. The League of the Cinque Ports comprised the English cities of Hastings, Dover, New Romney, Hythe, Sandwich, Rye, Winchelsea, and nine others in the fourteenth century. Like its counterpart, the league’s mission was to protect local shipping from pirates while encouraging trade, but its members tended toward piracy, attacking any and all ships that refused to pay protection money. 

 

한자 동맹 보다 훨 이전에 만든겨. 항구들이랑 바다 무역의 안전을 위해 뭉친겨. 용병도 하고. 얘들은 튜더 시대때 기울어진듯 하고. 한자동맹만한 파워는 안되고.

이야기가 의외로 없어. 연구도 안된거지만 한편으론 걍 썰할 것이 없어 여긴. 지중해 해적과는 수준이 달라. 무슬림이 저따위로 사는 이유야 그게.

스페인의 금은의 배들을 대서양에서 탈취하는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고.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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