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 구분을 보면. 이전 얼핏 썰했지만. 쟤들은 매로빙거의 자식들이야. 쟤들은 왕조 흥망사.가 의미가 없어. 쟤들은 망한 적이 없어. 메로빙거 481년 부터 나폴레옹 까지 온겨. 

 

굳이 메로빙거가 끊겼냐 아니냐는 카롤링거야. 삼백년 지나서리. 카롤링거의 샤를 마뉴의 할배 카를 마르텔의 핏줄이 메로빙거네와 연관되었냐 아니냐가 주제중 하나야. 거의 연관 없는 듯.하지만 어쨋거나 시작 프랑크 핏줄들이야.

 

카페 시작인 위그카페.도 로베르. 로버트 가문이야. 올라가면 잉거만.의 딸이 경건루이 부인이고 이 아들들이 로타르랑 게르만루이야. 

 

위그 카페의 아빠 위그 대제.는 엄마가 카롤링거핏줄의 딸이야.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6세.는 아부지가 발루아 백작 샤를.이 프랑스 카페 왕조 필리프3세의 아들 샤를이야. 얘 형이 템플의 저주로 이후 루이10세(아들 아기 장1세). 필리프5세 샤를4세. 단명하는 세명의 아부지 필리프4세.의 동생이야. 끊기고 이어서리 아들이 발루아 왕조를 여는겨. 즉 카페야.

 

 

발루아 오를레앙. 샤를8세가 이탈리아전쟁 개시하고 죽어. 다음이 오를레앙의 루이12세야. 얜 오를레앙.이야. 이 오를레앙.도 발루아 에서 나온겨. 

 

백년전쟁때 발루아 방계 두 세력이 부르고뉴와 오를레앙.이야 부르고뉴 용감공 샤를이 죽고. 오를레앙 루이.가 남았어. 매드 전쟁을 해. 

 

이 오를레앙의 루이.가 결혼한 여자가. 루이11세의 딸이자 샤를8세의 작은누나 잔.이야. 얘가 태어나자 마자 오를레앙의 루이.와 약혼을 시켜. 이때 남자앤 두살.이야. 오를레앙에 남은 유일한 남자애야 이 루이가. 헌데 저 갓난 아기 잔.은 태어나자 마자 몸이 기형이야. 다리도 기형에 곱추야. 아이 생산능력이 없어. 나이 12살 10살에 결혼을 시켜. 발루아 루이11세가. 오를레앙 핏줄을 없애려는겨. 자기 딸이 자식생산 능력이 없걸랑. 억지로 결혼한겨 오를레앙 가문이. 그래서 전쟁을 한겨 매드전쟁. 브리타니랑 연합해서리. 헌데 뜬굼없이 샤를8세가 테니스장 입구 대들보에 머리박고 죽고서리. 재수좋게 킹이 된겨. 그리고 루이12세가 되서리. 결혼 취소를 하고. 막시밀리언이 부르고뉴 마리.가 말타다 죽고 재혼하려는 브리타니 여자를 중간에 쎄벼서리 재혼을 해.

 

이 발루아 오를레앙.도 루이12세에서 바로끊겨. 아들이 없어. 사위가 프랑수아1세야. 발루아 방계 앙굴렘.일 뿐이야. 

 

앙리4세의 부르봉.도 카페야. 시작이 성루이9세의 자식이야. 

 

 

 

쟤들은 왕조 흥망사.라는게 의미가 없어. 먼 왕조가 흥하고 망해. 그따위는 동양빠닥에만 있는거야. 쟤들은 왕조 흥망사.라는 관점으로 지들 역사를 이야길 안해. 주작이야 주작.

 

 

 

The Merovingians (/ˌmɛrˈvɪniən/) were a Salian Frankish dynasty that ruled the Franks for nearly 300 years in a region known as Francia in Latin, beginning in the middle of the 5th century.

 

메로빙거 왕조. 란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걸까. 저걸 영어론. Merovingian dynasty 메로빈지언. 하걸랑. 메로빈지언즈. 

Merovech (FrenchMérovée, MerowigLatinMeroveus

c.

411 - c. 458 AD[1])

 

시작이 클로비스1세의 할배 메호베쉬. 메호비. 야. 훈족 아틸라.랑 싸운 사람이야. 

 

Mérovée (ou encore MerowigMérovech),

 

불어로 짧게 메호비그. 라고도 불린다.는 말을 땄나?

 

メロヴィング朝(メロヴィングちょう、MérovingiensMerovingian dynastyMerowinger)は、ゲルマン人(西ゲルマン)であるフランク族の支族のサリ族が築いたフランク王国における最初の王朝である

 

이걸 일본애들이 메로빙구. 라 한걸. 고대로 따라하긴 쪽팔리니까. 메로빙거. 하는겨. 

 

墨洛温王朝(法语:Mérovingiens,又譯梅羅文王朝梅羅文加王朝)是一个法兰克人王朝和中世纪法兰克王国的第一个王朝. 중국이들은 모루오웬. 

 

 

하튼 이땅바닥은. 일본들이 심은 이야기.를. 걍 고대로 대갈빡에 심는겨 백년을. 여기에 문제 인식 갖고 있는 가 단 하나 없어. 허니 유럽사. 이야기들이 다 백년전 일본애들 번역한걸 썰하면서리 지시긴 노리하는겨 저게.

 

.

잉글랜드도 똑같은거야 이게.


무슨 튜더 왕조 흥망사.니. 정말 말야. 개소리야 개소리. 먼 왕조가 망하긴 망해. 

 

 

The Tudor period is the period between 1485 and 1603 in England and Wales and includes the Elizabethan period during the reign of Elizabeth I until 1603. The Tudor period coincides with the dynasty of the House of Tudor in England whose first monarch was Henry VII (1457–1509). In terms of the entire span, the historian John Guy (1988) argues that "England was economically healthier, more expansive, and more optimistic under the Tudors" than at any time in a thousand years.[1]

 

 

얘들은 걍 시대야. 중세는 정복왕 윌리엄부터 이 윌리엄 핏줄이야. 다 윌리엄의 자식들이야 쟤들이. 지금 영국 왕가 헤럴드리로 쓰는 플랜태저넷.이 헨리2세 부터라 어쩌고 하지만 말야. 왜냐믄 딱이 이 전에 헤럴드리가 없었어 유럽에. 헤럴드리 라는 문양은 레반트 십자군 때에 유행하는겨. 이전에 몇개 보이는게 딱히 많지가 않아. 윌리엄이 노르망디의 노르만이고. 그 헤럴드리가 사자 두마리걸랑. 헨리2세의 애비 앙주 제프리.가 역시나 노르망디 공작도 차지하걸랑. 플랜태저넷이 이 노르망디의 문양에 하나를 더한 듯해 보이는데. 하튼 다 윌리엄의 자식들이야. 

 

쟤들은. 왕조 흥망사.로 구분을 하는게 아냐. 걍 시대. 피리어드. 긴 시간. 이야. 개무식한 들이야 쟤들을 왕조 흥망사로 책들 내민서리 개 하는 미디어의 소리들은. 아들 핏줄 끊겨서리 방계 핏줄이 이어가는게 그게 먼 흥하고 망하는겨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니.

 

 

 

잉글랜드의 튜더시대에. 마리와 엘리자베스. 좀 보자. 이젠 잉글랜드 이야기가 세상사의 중심이야. 얘들 이야기를 모르면 저 유럽 애들 이야기가 이제부턴 이해가 안돼. 

 

 

.

 

다이너스티.라는건

 

Late Middle English: from French dynastie, or via late Latin from Greek dunasteia ‘lordship, power’, from dunastēs (see dynast).

 

다이너스트.에서 와이 하나 붙인겨. 라틴어야. 힘.을 가진 라인.이야. 

 

Mid 17th century: via Latin from Greek dunastēs, from dunasthai ‘be able’.
두사느테스.라는건 에이블. 이야. 할수 있는. 이라 번역하는데. 정확한 번역은. 할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상태.가 에이블.이야. 
,既是声旁也是形旁,表示日头初出的清晨。,甲骨文

“早”的异体字

夕,晓月),表示太阳刚刚升起,月亮尚未落尽。有的甲骨文

将“早”的异体字

写成

。金文

误将甲骨文字形中的“夕”

 当作“水”而写成类似“川”的 

。有的金文

将 不明确的字形

写成明确的“川”

篆文

则误将金文字形中的“早”

写成“倝”

;同时误将金文字形中的“川”

写成“舟”

造字本义:名词,月落将尽、红日初升的大清早



저걸 조. 라 하는 걸로 번역하는 이유는. 저 조.란 말이 왼쪽은 해가 막 올라오는겨. 오른쪽은 달이 지는겨. 월락장진 홍일초승적 대청조. 달이 지셔 막 다 잠기고. 붉은 해가 막막 오르기 직전의 이른 새벽. 힘이 제일 쎌때인겨 저게. 이전의 힘은 죽고. 새로운 힘이 제일 막 솟는거야. 
해서 중국이들도 지들 역사를 수나라는 수조. 당조. 라 해. 메로빙구조. 가 맞아. 왕조. 란건 개번역이야.
.
저기서 프랑스의 앙시앙 레짐. 하는 시대는. 단지 구체제 가 아니라. 백년전쟁 후에 프랑스 킹이 권력을 갖고 와. 그러면서 이탈리아 전쟁을 하면서 시대를 주도하걸랑. 해서 대게 15세기 후반 부터 나폴레옹 이전까지.를 앙시앙 레짐. 이라 하는데. 구체적으론 샤를 8세.가 오를레앙이랑 내전한 매드전쟁.하고. 얘가 성인이 되어서 이탈리아전쟁 시작하는 요 시기를 앙시앙 레짐. 시작으로 보면 돼..
.엘리자베스 시대.는 튜더 시대.에 넣어. 튜더 헨리의 핏줄 마지막이걸랑. 허나 다음의 제임스6세도 아빠 암살당한 단리.랑 엄마 스콧 마리는 조카뻘들이야. 마리의 친할머니.랑 단리.의 외할머니.가 헨리8세의 누나 마가렛이야. 제임스의 스튜어드들도 튜더야.

Edward VI (12 October 1537 – 6 July 1553) was King of England and Ireland from 28 January 1547 until his death. He was crowned on 20 February at the age of nine

 

헨리8세가 죽고. 세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에서 나온 아들 에드워드6세가 킹을 해. 나이 9살. 6년 후 15살에 병으로 죽어. 

 

 

Edward named his first cousin once removed, Lady Jane Grey, as his heir, excluding his half-sisters, Mary and Elizabeth. 

 

 

에드워드6세가. 퍼스트 커즌 원스 리무브드. 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에게 승계권을 주고. 자기 이복 누나들인 마리.와 엘리자베쓰는 배제를 해. 

요 과정이. 아주 중요해 요때 이야기가..

제인 시모어.가 마리.와 화해를 주선해. 

Mary I (18 February 1516 – 17 November 1558)

Elizabeth I (7 September 1533 – 24 March 1603)

 

Mary, Queen of Scots (8 December 1542 – 8 February 1587)

 

마리 엄마 아라곤의 캐서린은 1536년 1월에 죽어 병으로. 네달 지나서 5월 말에 앤불린.이 사형을 당하는겨. 그리고 바로 직후에 제인 시모어.랑 결혼을 해.
이때 마리.의 나이는 20세야. 이미 애비가 하는 짓을 다 본겨. 엘리자베스.는 아직 세살이야 엄마 앤불린 죽을땐. 같은 자매지만 부모자식차이야. 스콧마리는 엘리자베스.보다 또한 9살 어린 어리광부리는 사이야. 

제인 시모어.가 결혼하자마자. 마리랑 화해를 주선해. 마리 입장에선 일단 앤불린.이 죽은걸로 반감은 된겨. 

Within two weeks of Anne's execution, Henry married Jane Seymour, who urged her husband to make peace with Mary.[43] Henry insisted that Mary recognise him as head of the Church of England, repudiate papal authority, acknowledge that the marriage between her parents was unlawful, and accept her own illegitimacy. She attempted to reconcile with him by submitting to his authority as far as "God and my conscience" permitted, but she was eventually bullied into signing a document agreeing to all of Henry's demands.[44] Reconciled with her father, Mary resumed her place at court.[45] Henry granted her a household (which included the reinstatement of Mary's favourite Susan Clarencieux).[46] Mary's privy purse expenses for this period show that Hatfield House, the Palace of Beaulieu (also called Newhall), Richmond and Hunsdon were among her principal places of residence, as well as Henry's palaces at Greenwich, Westminster and Hampton Court.[47] Her expenses included fine clothes and gambling at cards, one of her favourite pastimes.[48] Rebels in the North of England, including Lord Hussey, Mary's former chamberlain, campaigned against Henry's religious reforms, and one of their demands was that Mary be made legitimate. The rebellion, known as the Pilgrimage of Grace, was ruthlessly suppressed.[49] Along with other rebels, Hussey was executed, but there was no suggestion that Mary was directly involved.[50] The following year, 1537, Jane died after giving birth to a son, Edward. Mary was made godmother to her half-brother and acted as chief mourner at the queen's funeral.[51]

 


엘리자베스.도 일리지티메이트.된거야. 적법치 않은 자식. 엄마가 역모로 사형당했걸랑. 그리고 알거 다 아는 마리.와 화해를 해. 제인시모어가 거들고. 마리는 적법치않은 자식.임을 인정하고. 아빠의 교회권위도 인정을 해. 하기 싫은 싸인을 하고. 승계권은 배제되고. 그 상태에서 이제야 제대로 살수 있는 하우스홀드.를 갖추는겨. 일하는 사람들이랑 집이랑 영지들을 받아. 마리.는 자기 땅에서 사는겨. 저 받는 집이랑 땅이 웃겨 또한. 하트필드 집. 뷸리 궁.은 런던 북동쪽이야. 여기가 마리의 엄마 아라곤의 캐서린이 죽은 집 근처야. 킴볼튼 성.이 저기 근처에 있걸랑. 이쪽의 바로 오른쪽이 이스트 앵글리아.라는 노퍽과 서퍽.이야. 

 Edward, in 1537. From his birth, Edward was undisputed heir apparent to the throne. Elizabeth was placed in his household and carried the chrisom, or baptismal cloth, at his christening.



엘리자베쓰. 완전 꼬마 여자애.는 막 태어난 아기 에드워드.랑 놀아주는겨. 즉 제인 시모어.가 같이 키우는거야. 

Elizabeth's first governess (or Lady Mistress), Margaret Bryan, wrote that she was "as toward a child and as gentle of conditions as ever I knew any in my life".[13] Catherine Champernowne, better known by her later, married name of Catherine "Kat" Ashley, was appointed as Elizabeth's governess in 1537, and she remained Elizabeth's friend until her death in 1565. Champernowne taught Elizabeth four languages: French, Flemish, Italian and Spanish.[14] By the time William Grindal became her tutor in 1544, Elizabeth could write English, Latin, and Italian. Under Grindal, a talented and skilful tutor, she also progressed in French and Greek.[15] After Grindal died in 1548, Elizabeth received her education under Roger Ascham, a sympathetic teacher who believed that learning should be engaging.[16]

 

귀족집안의 꼬마들을 교육시키는 여자.를 거버니스.라고 해. 내니.라는 유모가 아냐. 교육시키는겨. 엘리자베스.도 역모한 엄마의 딸.이지만 어쨋거나 킹의 딸이야. 일리지티메이트.이지만. 교육을 시켜.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아이보다 젠틀한 아이였다. 에드워드 아기에게 친근했다. 이 엘리자베스.가 네가지 언어를 배워. 프랜치. 플래미쉬. 이태리. 스페니쉬. 다른 선생한테서는 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쓰기를 배워. 다른 선생한텐 프랑스어 그리스어를 더 배워. 저게 열살 전후까지 배우는 과목이야. 

 

 

 

 

제인 시모어.가 에드워드를 낳고 서리 죽어. 헨리8세의 네번째 부인이 클레베의 앤. 인데. 원래 이 결혼은 우연하게 된겨. 

 

마리.가 24세야. 혼기가 넘었어. 결혼을 시킬라고. 클레베.의 공작이랑 동갑이라 토마스 크롬웰을 보낸겨. 헌데. 이게 얘기가 안돼. 클레베는 프로테스탄트야 마리는 카톨릭이고. 그러다가 한살 많은 누나. 앤. 이 당시 25세야. 헨리가 49세. 이 크롬웰이 이걸 주선을 한겨. 나중에 크롬웰.을 사형시키는 죄명이. 크롬웰이 마리.랑 결혼하려고 그 성사는 안시키고 못생긴 앤.을 일부러 한거다 로 역모죄로 죽인겨. 

 

그리고 다음 부인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 역시 역모로 죽고. 마지막 여섯번째여자가 캐서린 파.야.

 

캐서린 파.도 세번째 결혼이야. 당시 나이가 31세. 헨리랑 결혼하고 4년후에 헨리가 죽어. 

 

She was influential in Henry's passing of the Third Succession Act in 1543 that restored both his daughters, Mary and Elizabeth, to the line of succession to the throne.[2]

 

이 여자가. 헨리랑 결혼하는 해에. 마리와 엘리자베스.를 복원을 시켜주는겨 헨리를 조종해서. 불법을 적법 자식으로 고치고. 승계권도 회복을 시켜. 물론 에드워드 6세 다음.으로. 만약 캐서린이 자식을 낳으면 그 다음으로. 

 

 

이걸 에드워드6세가 죽기전에 다시 번복을 한거야. 적법을 불법자식으로 다시. 

 

 

 

.

 

에드워드 6세. 의 엄마가 죽었어. 소위 외척.이 이때 정권을 잡는거야. 여기가 재밌는데. 

 

Lady Jane Grey (

c.

 1537[3] – 12 February 1554), also known as Lady Jane Dudley (after her marriage[4]) and as "the Nine Days' Queen"

 

Lord Guildford Dudley (also spelt Guilford) (c. 1535[1] – 12 February 1554) 

.

 

John Dudley, 1st Duke of Northumberland KG (1504[1] – 22 August 1553)

 

Robert Dudley, 1st Earl of Leicester KG PC (24 June 1532[note 1] – 4 September 1588) 

 

 

 

Jane Seymour (c. 1508 – 24 October 1537) 

Edward Seymour, 1st Duke of Somerset KG (c. 1500[3] – 22 January 1552)

Thomas Seymour, 1st Baron Seymour of Sudeley, KG (c. 1508 – 20 March 1549)

 

 

제인 시모.어의 남자형제가 소머셋 공작 에드워드.와 토마스 배론. 남작이야. 이전 썰. 

 

제인 시모어.죽고 얘들 천하가 돼. 원래 에드워드는 헨리 밑에서 스콧과의 전쟁을 이사람이 다 처리해. 더하여 내전도 이사람이 진압을 해. 이 형제가 군사력이 짱이야. 헌데 가장 문제가 저 토마스 시모어.인거야. 얘가 아주 문제야. 우선 헨리8세가 죽고 과부가 된 캐서린 파.와 결혼을 해 이가. 그리고 말야. 엘리자베스.는 아빠 헨리 죽을때 1547 아직 14살이야. 엘리자베스.는 계속 레이디 코트에서 크는겨 왕비 거주하는 곳에서. 아빠 죽어서. 그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를 따라서 저 집엘 가는겨. 헨리가 1월에 죽고. 이 둘이 삼사개월 후에 비밀결혼을 해. 여기서 이 토마스 가 14살 된 엘리자베스.에게 찝쩍대는겨. 이 광경을 본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딴곳으로 보내는겨. 

 

Now, living under the same roof as Elizabeth, Thomas became more than a little familiar, if not intimate, with Elizabeth, indulging in daily romps with her, tickling her, and slapping her on her behind as she lay in her bed, or coming into her room in his nightclothes. Her governess, Kat Ashley, thought this scandalous, and reported it to Catherine.[17] Indignant, Thomas retorted, 'By God's precious soul, I mean no evil, and I will not leave it!'[15] At first, Catherine dismissed the behaviour as just innocent fun, and even joined in the romps on a few occasions.[17]Elizabeth's feelings regarding this behaviour are unknown, but it was said that she bore Thomas some degree of affection.[18] And though her governess, Kat Ashley, "bade him go away in shame," she found him more amusing than dangerous. When Catherine was pregnant in the spring of 1548, she had become concerned enough about her husband's flirtatious relationship with Elizabeth that she sent Elizabeth away to live with Anthony Denny and his wife, Joan Champernowne (Kat Ashley's sister), in Hertfordshire. 

 

캐서린 파.도 산후 후유증으로 죽고. 이 토마스 시무어.가 캐서린의 재산이 무지 많았던듯. 햄뽁아했지만. 바로 다음해 역모죄로 죽어. 얘가 개차반이걸랑 완전히 왕 행세를 해. 그 형 에드워드.는 조심조심 하다가 역시 사형시켜 에드워드 때에. 

 

에드워드의 섭정을 처음에 저 소머스의 시모어가 한겨. 헌데 특히나 동생 때문에 점점 눈 밖에 나는거야 다른 애들에게. 이 시모어.를 상대하는 쪽이 저 더들리. 

 

 

에드워드6세가 자기 뒤를 맡긴 게. 레이디 제인 그레이. 퍼스트 커즌 원스 리무브드. 라는게. 
얘들은 우리네 첨 고종 이종 외종 이따위말 안써. 걍 바로 윗세대가 핏줄로 엮이면 그 자식들은 커즌이야. 엄마 핏줄 자매나 아빠 핏줄 자매들은 다 앤트. 형제면 엉클. 참 좋은겨 저게 먼 촌수 가리고. 
퍼스트 커즌.이란건.  할아버지가 같은겨. 
세컨드 커즌.이 있어. 이건 증조할아버지가 같은겨. 즉 각 할배할매들이 서로 형제자매인거야.
이 세컨드 커즌.이 대표적인 사람들이. 잉글랜드의 바다 시대를 만든 잉글랜드의 명 해적이자 해군 부사령관 딱지로 스페인 아르마다를 격파한. 프란시스 드레이크. 와 존 호킨스.

Sir Francis Drake (

c.

 1540 – 28 January 1596[3]) was an English sea captain, privateer, slave trader, naval officerand explorer of the Elizabethan era.

 

Admiral Sir John Hawkins (also spelled as Hawkyns) (1532 – 12 November 1595) was an English slave trader, naval commander and administrator, merchant, navigator, shipbuilder and privateer. 

 

 

저 두 인간은 영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야.  프란시스 드레이크. 위대한 인간이야 이 인간은. 이 둘이 증조할배가 같은 데본 충생들인 세컨드 커즌.이야. 존 호킨스. 가 훨 나이가 많아. 저 드레이크 도 잘 모르지만 우리네는. 저 존 호킨스는 더 몰라. 이 인간이 드레이크.를 만든겨. 얘들이 영국을 만든거야.

 

 

퍼스트 커즌이 원스 리무브드 된건. 리무브.가 제거된게 아니라. 움직인겨. 한번 움직이다.란 뜻으로 보면 되겄나. 저건 촌수가 더 내려간겨. 같은 급이 아니라. 퍼스트 커즌.에서 위아래 한세대 차이가 나는걸 퍼스트 커즌 원스 리무브드. 라고 해.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외할머니.가 마리 튜더. 즉 헨리 8세의 동생의 딸이야. 헨리 8세 동생이 마리.이고 누나가 마가렛.이야. 마가렛 쪽으로 스콧 마리와 신랑 단리 인겨.

 

 

에드워드는 제인 그레이의 삼촌 뻘인겨. 이 사이를. 퍼스트 커즌 원스 리무브드. 라고 해. 

해서. 가장 가까운 튜더 핏줄이라고 세우고. 아빠가 캐서린 파.의 요청으로 승계권과 적법을 회복한 마리와 엘리자베쓰는 다시 불법 한거야. 마리.가 카톨릭 못버리는 걸 안거야 이 꼬마가. 눈물 뚝뚝 흘리는 그 때. 형평성을 위해서 엘리자베스.도 같이 배제를 한것 뿐이고.

이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신랑이 길포드 더들리. 노썸벌랜드 공작의 아들이야. 이 길포드 더들리의 형.이 로버트 더들리. 레스터 백작.이야. 이 사람이 엘리자베스.가 퀸이 되고서리. 제일 연정의 상대야. 
로버트 더들리. 네덜란드 80년 전쟁 할때. 네덜란드로 가서 스페인이랑 전쟁하는 사람이 이사람이야. 엘리자베스와도 서신교환을 해. 나중 스페인 아르마다. 1588년에 전쟁하고 그 해에 병으로 죽어. 엘리자베스.는 

 endorsing it with "his last letter" on the outside. It was still there when she died 15 years later on 24 March 1603 그의 마지막 편지. 라는 글과 함께 편지를 보관하고 죽어. 나중에 발견이 돼. 

 

 

.

 

문제는 말이야. 에드워드6세가 죽고.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신랑 집안인 이 더들리.가 수 싸움에서 마리.라는 여자에게 진거야. 

 

 

마리.는 엄청난 여자야. 

 

 

.

On 10 July 1553, Lady Jane was proclaimed queen by Dudley and his supporters, and on the same day Mary's letter to the council arrived in London. By 12 July, Mary and her supporters had assembled a military force at Framlingham Castle, Suffolk.[74] Dudley's support collapsed, and Mary's grew.[75]Jane was deposed on 19 July.[76] She and Dudley were imprisoned in the Tower of London. Mary rode triumphantly into London on 3 August 1553, on a wave of popular support. She was accompanied by her half-sister Elizabeth and a procession of over 800 nobles and gentlemen.[77]



소머셋의 시모어 를 권력에서 친건 더들리 들이야. 그리고 섭정을 노썸벌랜드 공작.인 존 더들리.가 한겨. 제인그레이의 장인.이야. 이 더들리.부자들도 스콧과의 전쟁. 그리고 케트 반란.이라는 인글로져 문제로 반란한걸 진압한 가문이야. 실력이 있어. 

 

에드워드가 죽을 때. 마리는 37살이야. 7월 6일에 죽고. 4일 후에 레이디 제인.이 퀸이 되었어. 12일에 마리가 병력을 소집하는겨 서퍽.에서. 여기 바로 왼쪽이 엄마가 죽은 성이야. 이 노퍽 서퍽.이라는 이스트앵글리아.는 아라곤의 캐서린 향수가 찐해 그래서. 이걸 이 마리가 아는겨. 또한 케트 반란.이 노퍽에서 일어났어. 이걸 진압한게 더들리 가문이야. 그 반대 민심이 쎈겨. 마리가 이쪽으로 튄거야. 

Edward VI died on 6 July 1553. The next morning Northumberland sent his son Robert into Hertfordshire with 300 men to secure the person of Mary Tudor.[177] Aware of her half-brother's condition, the Princess had only days before moved to East Anglia, where she was the greatest landowner.[178] She began to assemble an armed following and sent a letter to the Council, demanding to be recognised as queen. It arrived on 10 July, the day Jane Grey was proclaimed as queen.[179] The Duke of Northumberland's oration, held before Jane the previous day, did not move her to accept the Crown—her parents' assistance was required for that.[180]Dudley had not prepared for resolute action on Mary's part and needed a week to build up a larger force.[181] He was in a dilemma over who should lead the troops. He was the most experienced general in the kingdom, but he did not want to leave the government in the hands of his colleagues, in some of whom he had little confidence.[182] Queen Jane decided the issue by demanding that her father, the Duke of Suffolk, should remain with her and the Council.[183] On 14 July Northumberland headed for Cambridge with 1,500 troops and some artillery, having reminded his colleagues of the gravity of the cause, "what chance of variance soever might grow amongst you in my absence".[182]

 

좀 더 자세히 쓴걸 보면. 저 장인. 더들리.가 제일 머리.고. 아들 로버트. 나중 엘리자베스 애인.을 하트포드.로 보낸겨. 마리는 여러 성들을 받고서리 여기저기 살았던겨. 300명을 델꼬 갔어. 마리가 에드워드 죽은 소식을 알고 이스트 앵글리아. 노퍽 서퍽 지역으로 튄거야. 여기에 영지를 많이 받았지만. 또한 여기가 자기 지지세력이 많은 곳이야. 이런 움직임을 더들리. 쪽에서 시나리오 플래닝으로 대처를 못했어. 

 

병력을 부랴부랴 더 모으느라 시간 다 보내고. 누구를 장수로 보낼지도 결정을 못해. 자기 존 더들리 외엔 믿을만 한 사람이 없는거야. 그렇다고 런던을 비울 수도 없어. 레이디 제인 퀸은 자기 아빠 서퍽 공작은 자기 옆에 있어야 된다고 하고. 



Supported by gentry and nobility in East Anglia and the Thames Valley, Mary's military camp was gathering strength daily and, through luck, came into possession of powerful artillery from the royal navy. In the circumstances the Duke deemed fighting a campaign hopeless. The army proceeded from Cambridge to Bury St Edmunds and retreated again to Cambridge.[184] On 20 July a letter from the Council in London arrived, declaring that they had proclaimed Queen Mary and commanding Northumberland to disband the army and await events. Dudley did not contemplate resistance.[185][note 4] He explained to his fellow-commanders that they had acted on the Council's orders all the time and that he did not now wish "to combat the Council's decisions, supposing that they have been moved by good reasons ... and I beg your lordships to do the same."[186] Proclaiming Mary Tudor at the market place, he threw up his cap and "so laughed that the tears ran down his cheeks for grief."[187] The next morning the Earl of Arundel arrived to arrest him. A week earlier Arundel had assured Northumberland of his wish to spill his blood even at the Duke's feet; now Dudley went down on his knees as soon as he caught sight of him.[188]

 

이 와중에. 노퍽 서퍽의 젠트리들과 귀족들에 더하여. 템즈 벨리. 런던 템즈강 바로 옆이야. 여기서도 점점 마리 쪽 지원군들이 몰려. 노썸벌랜드 에서 내려온 병력들이 케임브리지.에서 오른쪽 서퍽의 베리.로 가다가 다시 빠꾸하고. 20일에 런던의 최고위원회에서 마리를 지지하고 노썸벌랜드는 물러나라.는 편지.  존 더들리.는 런던과 싸우고 싶지는 않아. 물러난겨.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7월 9일.에 퀸에 임명되서리. 저 편지 전날 까지인 19일 까지.해서리 9일의 퀸.이 된겨 그래서. 그리고 다음해 죽어. 이때 나이가 17살이야. 그 눈에 띄 안둘러도 되냐고 하면서리. 앉아서 더듬더듬 하며 블락을 찾는. 아무런 변명도 안하고 죽어. 법에 따를 뿐.

 

 

같이 사형당하는 신랑. 길드포드 더들리.는 두살 많아. 19살. 얜 애야 애. 

 

 

더들리의 수장인 존 더들리.는 역모로 바로 죽여. 즉 에드워드가 병에걸린 상태에서 유언장을 만드는데 뒤에서 주작질 했다는 거지. 

 

 

하튼 마리.와 그 카톨릭의 지난 맺힌 그림자.를 너무 경시했어 이 더들리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은.

 

 

On the scaffold, before 10,000 people,[201] Dudley confessed his guilt but maintained:[202]

And yet this act wherefore I die, was not altogether of me (as it is thought) but I was procured and induced thereunto by other[s]. I was I say induced thereunto by other[s], howbeit, God forbid that I should name any man unto you, I will name no man unto you, and therefore I beseech you look not for it. ... And one thing more good people I have to say unto you ... and that is to warn you and exhort you to beware of these seditious preachers, and teachers of new doctrine, which pretend to preach God's word, but in very deed they preach their own fancies, ... they know not today what they would have tomorrow, ... they open the book, but they cannot shut it again. ... I could good people rehearse much more ... but you know I have another thing to do, whereunto I must prepare me, for the time draweth away. ... And after he had thus spoken he kneeled down ... and bowing toward the block he said, I have deserved a thousand deaths, and thereupon he made a cross upon the straw, and kissed it, and laid his head upon the block, and so died.[203]

 

만명 앞에서. 마지막 진술하면서 죽는데. 넘어가고. 그래도 법정에서 다퉈. 배심원 앉히고. 자기 진술 다 하고. 쟤들은 저런 이야기가 동양빠닥과 달라. 그 차원이.

 

 

조선왕조와. 조선이 떠받드는 중국이의 명나라는 구족을 멸하고. 다 죽이잖냐. 어드래하믄 더 죽일까를 궁리하는 애들. 참 상대를 적폐요 해대민서리 죽이는 거 보믄 끔찍한 오백년 역사인데.

 

 

그러면서. 포용 . 상대는 적폐니 죽여. 지들 이념의 편은 포용합시다. 참 끔찍한 수준인데.

 

 

그리고선 레이디 제인 그레이.와 그 신랑. 길드포드 더들리.는 런던탑에 갇혀. 마리.는 죽일 마음이 없었어. 

 

 

However, Jane's father, Henry Grey, 1st Duke of Suffolk, became part of Wyatt's rebellion against Queen Mary's intention to marry Philip II of Spain, and Jane was viewed as a threat to the Crown. Both she and her husband were executed on 12 February 1554.

 

헌데 와이어트 반란.이 터져. 마리가 스페인의 펠리페2세 카톨릭 이랑 결혼한다는 이야기에 프로테스탄트가 반기를 드는겨. 제인 그레이.의 아빠가 주도를 해. 마리 입장에선 본보기로 죽이는겨 저 부부를.

 

 

그래도 말야. 저 길드포드 더들리.의 형제들. 즉 이미 죽은 아버지.의 자식들이 열명이 넘어. 

 

Jane Dudley (née Guildford), Duchess of Northumberland (1508/1509 – 1555) was an English noblewoman, the wife of John Dudley, 1st Duke of Northumberland and mother of Guildford Dudley and Robert Dudley, 1st Earl of Leicester.

 

존 더들리.의 부인이 제인 더들리야. 어찌보면 로버트.가 군대 몰고 간 핵심중 핵심이야. 이 여자가 구명운동 하면서 로버트.를 살리는겨. 역모로 죽은건 자기 신랑이랑 아들 길드포드. 단 둘이야. 그래도 다들 살아남아. 

 

제인 그레이의 아빠 서퍽 공작이 주도해서리 와이어트 반란. 으로 이 제인그레이 아빠도 죽이지만. 제인의 여동생들이 둘 있어. 세자매 야 형제가. 캐서린과 마리. 걍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 죽어. 조선 같았으면 정의놀이 소인배 고자질 한 들의 첩질 노예로 썼을 낀데 말야.

조선이란 왕조는 참 더러운 왕조야.
저건 문명이 아냐. 걍 들의 위선질에 들의 오백년 ..

Elizabeth, though protesting her innocence in the Wyatt affair, was imprisoned in the Tower of London for two months, then was put under house arrest at Woodstock Palace

 

저 와이어트 반란.때 엘리자베스.도 엮여. 제인 그레이 부부는 사형당하고.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 두달 감금되고나서 가택연금을 당해.

 

 

조선이면 또 죽였을껴. 조선은 죽임의 왕조야. 소인배. 적폐. 얘들은 이 이념놀이로 사람들 죽이는 낙.으로 오백년을 살았걸랑. 저딴 들을 여전히 찬양질 해대고 있으니.

 

 

 

나중에. 마리가 암에 걸린듯 죽을때.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마리가 낙점해주고 가는겨. 

 

 

 

프란시스 드레이크와 존 호킨스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The Crown Offered to Lady Jane Grey, as imagined in the 1820s: Guildford and Jane are in the centre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