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in and the Völva" (1895) by Lorenz Frølich
오딘.과 볼바.
Völuspá (Old Norse Vǫluspá or Vǫluspǫ́, Prophecy of the Völva(Seeress); reconstructed Old Norse
[ˈwɔlʊˌspɒː], Modern Icelandic
[ˈvœːlʏˌspauː]) is the first and best known poem of the Poetic Edda.
게르만 신화.가 종류가 많아. 게르만들이 북게르만인 스칸디나비아.에 대륙으로 내려간 동게르만족이 부르고뉴 반달 고쓰족.에 나머지는 다 서게르만족이야. 저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에 덧치도 서게르만이야.
저 부족들마다 나름 이야기들이 있어. 지금 세상은 저 게르만들의 신화가 만든거야.
저게 일관되지 않고 서로들 막 이 신 저 신 섞어찌게로 쓰는겨. 그리고 보다보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갖고 온 듯 보이는게 많은거고.
제일 최고의 신이 누구까. 막 이거저거 보믄. 제우스와 헤라 처럼. 그 둘을 저쪽은 오딘.과 프리그.로 봐.
In Germanic mythology, Frigg (/frɪɡ/;[1] Old Norse), Frija (Old High German), Frea(Langobardic), and Frige (Old English) is a goddess. In nearly all sources, she is described as the wife of the god Odin.
In Germanic mythology, Odin (/ˈoʊdɪn/;[1] from Old Norse: Óðinn,
IPA:
[ˈoːðinː]) is a widely revered god. In Norse mythology, from which stems most surviving information about the god,
Godan and Frea look down from their window in the heavens to the Winnili women in an illustration by Emil Doepler, 1905
저들이 롬바르드 땅에 정착한 롱고바르디.라는 게르만에겐 고단.과 프레아.로 언급이 되고.
맨 위의 오딘.과 대화하는 여자는 무당.이야. 예언하는겨.
In Germanic mythology, Thor (/θɔːr/; from Old Norse: Þórr) is a hammer-wielding god associated with thunder, lightning, storms, oaktrees, strength, the protection of mankind, and also hallowing and fertility
토르. 라는 망치신은. 그리스의 제우스. 로마의 유피테르.의 캐릭으로 봐. 저기서 볼바 무당이 오딘.에게 토르.가 큰뱀이랑 싸우다 죽을 거란 예언을 하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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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ic Edda is the modern attribution for an unnamed collection of Old Norse anonymous poems,
The Prose Edda, also known as the Younger Edda, Snorri's Edda (Icelandic: Snorra Edda) or, historically, simply as Edda, is an Old Norse work of literature written in Iceland in the early 13th century. The work is often assumed to have been written, or at least compiled, by the Icelandic scholar, lawspeaker and historian Snorri Sturlusonaround the year 1220.
저 이야기들이. 대게. 에다. 라는 북게르만. 스칸디나비아. 의 올드노르 언어로 쓰여진 시 에다.와 산문 에다.에 있는겨. 더하여 이전 언급한. 세이 하는 사가. 에 있는 바이킹 신화와 이야기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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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ege of Szigetvár or Battle of Szigeth (pronunciation: [ˈsiɡɛtvaːr] Hungarian: Szigetvár ostroma, Croatian: Bitka kod Sigeta; Sigetska bitka, Turkish: Zigetvar Kuşatması) was a siege of the fortress of Szigetvár, Kingdom of Hungary, that blocked Suleiman's line of advance towards Vienna in 1566 AD After the Battle of Mohács in 1526. The Siege of Vienna in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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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트바 전투. 헝가리 남서쪽. 모하츠 전투.가 중요한겨 이 헝가리는. 게오르게 도자. 반군들 죽이고서 십여년 후 터진 전쟁에서 야기에워 핏줄 킹이 이 전투에서 죽어. 시게트바 오른쪽이야.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 서는겨.
John Zápolya, or John Szapolyai (Croatian: Ivan Zapolja, Hungarian: Szapolyai János or Zápolya János, Romanian: Ioan Zápolya, Slovak: Ján Zápoľský, Serbian: Jovan Zapolja/Јован Запоља; 1490 or 1491 – 22 July 1540), was King of Hungary (as John I) from 1526 to 1540. His rule was disputed by Archduke Ferdinand I, who also claimed the title King of Hungary.[1] He was Voivode of Transylvania before his coronation.
사포야이 가문의 존. 야노스. 이 사포야이 가문이 헝가리 귀족 가문이야. 얜 야기에워의 다른 핏줄인 폴란드 킹의 딸이랑 결혼한겨. 모하츠 때 죽은 야기에워. 킹 루이2세랑. 그 누나.랑 막시밀리언이 자기 아들 펠리페와 요한나의 아들딸과 결혼시킨거걸랑. 해서 그 누나랑 결혼한 페리디난도. 카를 5세의 동생. 즉 황제가 되는 페르디난트1세.가 이 헝가리 크로아티아 킹을 하는건데.
저 사포야이의 존.이랑 다투는겨. 얘도 마누라가 야기에워. 이들이 오스만 술레이만과 연합을 해.
술레이만이 헝가리 넘어 비엔나까지가서리 불지르고 약탈하고 왔어. 1529년. 누구는 오스만이 패한거다. 아니다 걍 비엔나 주위 약탈만 하고 겁만 주러 가기만 한거다 해. 그리고 나서리. 헝가리 부다페스트. 이때는 부다 와 페스트 가 나뉜상태야. 여기를 저 사포야이 의 존.을 바쌀로 임명한겨. 얘는 오스만으로 들어가기로 한겨 페르디난트.에게 맞서 킹 하려고. 여길 페르디난트.가 치러 가는겨. 사포야이 네는 힘이 없고. 결국 헝가리 킹 자리를 둔 페르디난트1세와 오스만 술레이만의 싸움이야. 서로 승패를 나누고 휴전을 해.
그리고 나서 터진게. 시게트바 전투 1566년. 이야.
In January 1566 Sultan Suleiman I had ruled the Ottoman Empire for 46 years and went to war for the last time.[14] He was 72 years old and, although having gout to the extent that he was carried on a litter, he nominally commanded his thirteenth military campaign.[14] On 1 May 1566 the Sultan left Constantinople at the head of one of the largest armies he had ever commanded.[14]
술레이만이. 46년간 술탄을 했어. 저때 나이 72세 할배. 이전에 이탈리아 전쟁에 프랑스와 손잡아서 프랑스 남부해변과 이탈리아 해변을 치기도 하고. 그 이전에 모하츠 전투에 비엔나 포위도 다 얘야.
바로 직전해에는 몰타 전투에서 오스만이 졌어. 저긴 전략적으로 요충지야 돌섬 이백제곱키로 좀 넘은 섬이지만.
His opposite number, Count Nikola Šubić Zrinski, was one of the largest landholders in the Kingdom of Croatia, a seasoned veteran of border warfare, and a Ban (Croatian royal representative) from 1542 to 1556.[22] In his early life he distinguished himself in the Siege of Vienna and pursued a successful military career.[7]
헝가리 아래 크로아티아. 킹덤에 카운트 백작.이 헝가리 속국이지만. 크로아티아도 배부분 먹히고 헝가리도 대부분 오스만 땅이지만. 이 변경 지역의 백작이 오스만은 절대 싫어. 이전 비엔나 수비하러 신성로마 황제군대에 유일하게 참여한 크로아티아 군도 이 사람이야.
Nikola Šubić Zrinski (
Croatian pronunciation:
[nǐkɔla ʃûbitɕ zrîːɲskiː][1]) or Zrínyi Miklós (
Hungarian pronunciation:
[ˈzriːɲi ˈmikloːʃ]) (1508 – 7 September 1566) was a Croatia-Hungarian[2][3] nobleman and general in the service of the Habsburg, ban of Croatia[4] from 1542-56, and member of the Zrinski noble family.
니콜라 슈비취 즈링스키. 이 사람이 헝가리 크로아티아 역사에 최고 영웅이야.
오스만 군병력.
- 80,000 Ottomans
- 12,000–15,000 Tatars
- 7,000 Moldavians
얘니체리 특전근위대 포함 8만명. 타타르족 1만오천여명. 몰도비안 7천명.
이전에 노예 이야기를 했지만 말야. 이 노예.를 또한 군병력으로 쓰는겨. 중세 군사는 하미지.하는 기사들 귀족들. 이 제일 중심이고. 이들이 그 기세나 기술이 제일 좋고. 다음이 돈으로 부리는 용병이고. 그다음이 노예.야. 식민지에서 진 이들이 또한 결국 이 노예 야.
그중에 얘니체리. 란 애들은. 어릴때부터 세뇌를 시켜서리. 장가도 안가게 하고. 이교도 애들을. 이슬람으로 에이아이.로 만들어서리. 온갖 특혜를 주면서 부리는거야. 무서운겨 얘들이. 얘들 앞에 저 식민지 병사들을 앞세우는겨. 후퇴하면 얘들이 죽여.
그래서 오스만 부대는 최소 일이십만명이야. 유럽애들의 부대는 총해야 기사가 수천명이면 많은겨 그게. 중요한건 말탄 기사야. 저기에 비율상 세배 다섯배의 보병 용병들이 따라갈 뿐이야. 기사들 수천 모여서 전쟁하는건 드문 대전인거야 그건.
헌데 쟤들의 저런 노예를 군병력으로 도입한 인해전술에 의한.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전투걸랑. 질 수 밖에 없어 유럽애들이. 헌데 중세 유럽애들은 저따위 식민지 애들을 징집하는 짓은 안한거야
저게. 오스만이 지고 가 된 이유야. 몽골도 마찬가지고.
저런 곳에서는. 문명의 진화가 없어. 길게 보면. 베네치아 가 그래서 위대했던거고. 저들이 지금 문명을 업그레이드 한건데.
저기서 타타르즈. 하는 타타르는 몽골 칭기스칸의 웬수. 아빠 예수게이 죽인 타타르족.의 타타르냐.
The name "Tatar" likely originated amongst the nomadic Mongolic Tatar confederation in the north-eastern Gobi desert in the 5th century.[16]
저 타타르.란 말이 5세기에 나온 말. 글쎄 어디서 티나온겨 저때. 일단 오르콘 비문에 투르크말로는 보여. 韃靼 달단. 이라는 한문으로 보이는건 명나라때 몽고 가 언급되면서 달단.이란 말이 나왔는데 같이. 중국사에선 칭기스칸 예수게이 이야기때나 저 달단.이 언급이 된느겨 원사.에서. 하튼 쟤들이 칭기스칸 자식들과 넘어오면서. 유럽은 납작한 것들을 타타르 하게 되고. 쟤들이 가도 다 타타르야. 저 타타르.가 칭기스칸이 살던 옆동네 타타르.족 들이 아냐. 이름만 따온겨. 저 수많은 스텝유목족들중에 걍 이름없는 애들은 타타르 한겨
.2,300[3]–3,000[4] Croatsand Hungarians[5][Note 2]
- 600 able-bodied men by the end of the siege[6]
크로아티아. 즈링스키 가문의 니콜라 병력은 끽해야 2천 3천명이야. 일 대 백. 이야.
6 August 1566 – 8 September 1566
8월 6일에서 9월 8일 한달간 버틴겨 시게트바 요새.에서
Szigetvár Fortress today
지금의 저 시게트바 요새.래. 저 안에서 버틴겨 이삼십만을 상대로 이삼천명이. 한달을
After over a month of exhausting and bloody struggle the few remaining defenders retreated into the old town for their last stand. The Sultan tried to entice Zrinski to surrender, ultimately offering him leadership of Croatia under Ottoman influence,[26][27] Count Zrinski did not reply and continued to fight.[27]
술탄이 즈칭스키의 니콜라에게 항복하면 크로아티아는 너에게 주겠다. 내 바쌀 해라. 대답않고 계속 싸우다.
헌데 결정적인 사건이 터져.
The fall of the castle appeared inevitable but the Ottoman high command hesitated. On 6 September Suleiman died in his tent. His death was kept secret at great effort, with only the Sultan's innermost circle knowing of his demise.[6] This was because the Ottomans feared that their soldiers would give up the battle if they knew that their leader died, so his death was kept secret for 48 days. A courier was dispatched from the camp with a message for Suleiman's successor, Selim. The courier may not even have known the content of the message he delivered to distant Asia Minor within a mere eight days.[6]
술탄이 갑자기 죽은겨. 9월 6일날. 자기 텐트에서. 늙어 죽은겨 걍. 이게 알려지면 조때는겨 오스만은. 48일간을 비밀에 부치다. 캠프안의 최측근만 알고. 다음 술탄 셀림2세.에게 전령을 보내고 술탄에 오를때까지.
술레이만이 죽고. 비밀에 부치고,. 바로 다음날 마지막 전투를 한겨
The Ottoman army swarmed through the city, drumming and yelling. Zrinski prepared for a last charge addressing his troops:
“ | ...Let us go out from this burning place into the open and stand up to our enemies. Who dies – he will be with God. Who dies not – his name will be honoured. I will go first, and what I do, you do. And God is my witness – I will never leave you, my brothers and knights!... |
즈링스키.는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자기 부대에.
이 불타는 요새 안에서 전부 나가자 저 밖으로. 그리고 우리의 적들과 당당히 맞서자. 죽는 사람은 신과 함께 할 것이다. 죽지 않는 사람은 그 이름이 높게 떠받들어질 것이다. 내가 먼저 나가겠다. 내가 하는 그대로 니덜도 해라. 그리고 신이 나의 증인이다. 나는 절대 니들을 떠나지 않는다. 나의 형제들이여 나의 기사들이여.
Zrinski did not allow the final assault to break into the castle.[7] As the Turks were pressing forwards along a narrow bridge the defenders suddenly flung open the gate and fired a large mortar loaded with broken iron, killing 600 attackers.[7]Zrinski then ordered a charge and led his remaining 600 troops out of the castle.[7]He received two musket wounds in his chest and was killed shortly afterwards by an arrow to the head.[7] Some of his force retired into the castle.[7]
츠링스키.는 오스만의 성벽 침투를 허락하지 않았다. 투르크들은 좁은 다리를 따라 앞으로 짓눌리는 듯 진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비병들이 문을 열고 튀나와서리 큰 포를 쏴 대었다. 순식간 6백명 투르크가 죽었다. 즈링스키.는 그리고 그의 남은 600명 부대원들과 함께 성밖으로 나왔다. 그는 두방을 맞았다 그의 가슴에. 그리곤 머리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몇몇은 다시 성안으로 후퇴했다.
Before leading the final sortie by the castle garrison, Zrinski ordered a fuse be lit to the powder magazine.[4][Note 8] After cutting down the last of the defenders the besiegers poured into the fortress. The Ottoman Army entered the remains of Szigetvár and fell into the booby trap;[6] thousands perished in the blast when the castle's magazine exploded.[29]
The Vizier Ibrahim's life was saved by one of Zrinski's household who warned him of the trap when the Vizier and his troops searched for treasure and interrogated the survivors. While inquiring about treasure the prisoner replied that it had been long expended, but that 3,000 lbs of powder were under their feet to which a slow match had been attached.[7] The Vizier and his mounted officers had just enough time to escape but 3,000 Turks perished in the explosion.[5][7][10][30]
나오기 전에. 성안 화약고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오스만 둔대가 여기 들어가다가 이걸 건드려 터져서리 수천명이 죽어. 이때 비지어. 면 수상 껵인 사령관인데. 얜 살아. 즈링스키 의 집사 중 한명이 얘한테 말한겨 폭탄 터질거라고. 해서 살은겨.
Almost all of Zrinski's garrison was wiped out after the final battle.[4] Ottoman casualties were also heavy. Three pashas, 7,000 Janissaries and 28,000 other soldiers are said to have perished.[7] Sources vary on the exact number with estimates ranging from 20,000–35,000.[4][7][9]
오스만 애들이. 파샤. 귀족 세명. 얘니채리가 자그마치 7천명. 그외 2만8천명이 죽다.
Nikola Šubić Zrinski, preparing for the final battle, by Oton Iveković
크로아티아.에선 저 니콜라 슈비취 즈링스키.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헝가리사람들도 저기 참여해서 얘들도 같이 존중하는 인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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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은 저런 사람이 없었어. 끽해야. 후퇴하는 애들 기세꺾인 애들을 쫓아가서리 조진게 다야. 삼국시대 다음으론.
다음엔 바로 80년 30년 마무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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