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po LigozziThe Return of the Knights of Saint Stephen from the Battle of Lepanto (c. 1610, Santo Stefano dei Cavalieri, Pisa)

 

 

The Allegory of the RedemptionMadridPrado Museum.

 

Jacopo Ligozzi (1547–1627) was an Italian painter, illustrator, designer, and miniaturist. His art can be categorized as late-Renaissance and Mannerist styles

 

야코포 리고치. 레판토 전투. 성 스테파노 기사들의 귀환. 리뎀션의 알레고리. 구원이란 것의 추상을 그림.

 

.

 

 
프랑스 종교전쟁 시작하고. 6년후에 80년 전쟁. 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중 50년후에 30년 전쟁이 같이 터지면서 80년 전쟁과 30년 전쟁이 섞이는 듯 하고 같이 1648년 에 끝나는데.
 

 

저건 말이야. 이 이탈리아전쟁. 1494-1559. 65년 간의 전쟁.이 끝나고 3년 후 부터 시작한거야. 

 

고대 로마.가 망하고. 인류의 전쟁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 가장 인류문명에 영향을 준건 이 이탈리아 전쟁이야. 이 전쟁의 의미를 너무나 모른다는게 문제란거지.

 

 

네덜란드 라는 나라가 생긴게 하늘에서 떨어진게 아냐. 쟤들은 저때 1568년에 시작한게 아냐. 이 전에도 전쟁의 땅이었어. 거기에 저 이탈리아 전쟁의 전장이 또한 뜬굼포 여 저지대였던거야. 프랑스가 이탈리아 처먹는 전쟁의 전투장소가 완전히 정반대 북해쪽인겨 이게. 

 

왜 저기가 프랑스와 신성로마의 전장터가 되었느냐. 그건 돌고돌아 가보면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루이의 세 형제인 장남 로타르. 둘째 게르만루이. 셋째 대머리아닌대머리샤를. 에서 전쟁에 진 로타르의 땅 가운데땅. 이 가운데 땅이 저 독일 저지대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죽 내려와서 룩셈부르크 로렌 알사스 사보이 까지의 땅이야. 

저 가운데를 프랑스가 먹느냐. 신성로마가 먹느냐. 또는 제 삼자가 두 중간 사이에 별도록 서느냐.의 문제야. 이 세번째를 위해서 부르고뉴의 용감공 필리프에서 겁없공 현명공 다음 마지막 사대인 같은 용감공 샤를.까지 할라다가. 저게 샤를 딸 마리.를 차지한 합스부르크.가 이긴듯 했으나 단지 그 결혼으로는 저 집단의 마음들이 수긍이 안된거지.

 

Map of northeastern Gaul around 70 AD.

 

서기70년 지도.의 로마. 저 끝이 Utrecht. 우트레흐트.위트레흐트 여긴 라인강의 하류.의 건너편에 있어. 

 

the founding date of the city is usually related to the construction of a Roman fortification (castellum), probably built in around 50 CE. A series of such fortresses was built after the Roman emperor Claudius decided the empire should not expand north.

 

저기에 군단기지.를 만든건 칼리굴라 다음의 클라우디우스.야 여기넘어가지 말자. 암스테르담은 저 우트레흐트 위에 있어. 여긴 로마를 몰라. 암스테르담은 80년 전쟁때 키운 도시야. 안트베르펜 전쟁 피해서 옮긴 땅이 암스테르담이야. 

 

로테르담.도 저 로마 범위 에 있는데. 우트레흐트 아래 왼쪽이야.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고

 

 

Map with the approximate location of pre-Roman Belgic Gaul shortly before Roman conquest according to an interpretation of Caesar

 

 

카이사르의 음청난 명작 갈리아 전쟁기. 서유럽의 역사는 이 책으로 시작하는겨.

 

여길 보믄. 저땅을 아키타니.들이 사는 아키타니아. 갈리아족이 사는 켈티카. 벨가이족이 사는 벨기카. 로 저리 나눠. 저 아래는 원래 로마땅이야. 스페인과 로마를 잇는 길이야 여긴 빨리 문명이 된겨. 그리고서리. 아우구스투스가 저 라인강넘어 게르마니아를 먹으려다가 결국 피만 본겨. 

 

 

 

저기서 보면 말야. 벨가이족이 살던 벨기카.가 줄어서 벨기에가 지금 된건데. 이 벨기에 를 삼등분하는 강이. 헨트를 지나 안트베르펜.으로 해서 바다흐르는 에스꼬강. 리에주.를 지나 네덜란드와 국경선 나누는 뫼즈강. 할때.

 

에스꼬강 위의 바다 접하는 곳이 덧치어 

Vlaams 플람스. 영어 플레미쉬. 불어 플라망드.들이 사는 땅 플랑드르. Vlaanderen . 덧치어가 플랑드르. 불어도 플랑드르.야 .그리고 저 우트르흐트.위의 해변 걸쳐 쭉 덴마크 반도 모가지의 서쪽까지 지역이 프리지이 Frisii 족들이 살던 프리지아. 프리질랜드 하는겨. 

 

Frisia (West FrisianFryslânDutch and GermanFriesland[1]

 

플레미쉬족들이 사는 플랑드르땅. 그 위에 프리지이족.들이 사는 프리지아.가 해변걸쳐 쭉 있는거야.

 

 

네덜란드란 땅은 지금. 카이사르가 점령했던 벨기카 에. 더하여 저 보믄 쾰른 군단기지 지나서 네덜란드 로테르담 남부까지는 이미 카이사르 문명을 시작한 곳이야 저속이. 더하여 쪼금 더 위로가서 클라우디우스가 이후 100년 지나세운 우트레흐트 기지까지. 지금 네덜란드의 사분의 일 정도는. 문명을 겪은겨 고대로마의. 이들은 차원이 달라 저짝 위의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애들은 미개한겨 이 지역에 비하면. 

 

플랑드르.를 포함한 벨기카.가 파리의 북쪽이야. 바로 인접해. 이 파리.라는 것도. 파리 족이 있었어. 카이사르가 밝힌거야. 저 플랑드르 역시 로마를 겪은 애들이야. 촌놈들이 아냐 이들이. 

 

 

헌데 프리지아.는 촌놈인거야. 얘들은 로마를 겪지를 않은 이들이야. 걍 아래의 로마를 간접경험한겨. 

 

 

저 네덜란드란 땅이. 아래 한 삼십퍼 가까이는 아래 로마를 겪은 벨가이족들의 벨기키땅이고. 해변의 프리지아.가 한 삼십퍼 되고. 그 외가 삼사십퍼인겨 비율상. 이 프리지아.를 동프리지아 서프리지아 나뉘는게 네덜란드 저 영역 북쪽에서 나뉘어. 북 프리지아.는 덴마크 모가지 서쪽아래야 네덜란드와 상관이 없어. 

 

 

해서 좀 묘한 곳이야 이곳이. 저 아래 플랑드르라는 로마를 겪은 이들과. 전혀 겪지 않은 프리지아에 사는 프리지이 들과. 이 둘사이의 게르만들이야. 다 게르만이야. 결국 로마를 익힌 플랑드르의 사람들이 이 네덜란드의 중심인겨. 이 문명이 확장이 된거야. 

 

눈에 익은 프랑크왕국의 지도흐름인데. 클로비스1세 부터 시작하는 프랑크 킹덤이. 시작이 작센옆에서 시작해. 저 지도를 프리지아쪽은 대충 그린건데. 쾰른 지나는 라인강에. 그왼쪽에 돌아흘러 만나는 강이 뫼즈강이고. 그 위에 아이셀강이 라인 하류에서 찢어지면서 위로 아이셀호로 흘러가. 

 

저 작센에서 saxony 이 아이셀강을 건넌 이들이 살리안족.이야 프랑크족의 가지. 여기에서 클로비스1세가 나온겨. 즉 시작이 저기 땅이야. 벨가이족의 벨기카가 제일 먼저 프랑크의 봉건체제로 들어오는겨. 플랑드르가 제일 먼저 먹히는겨 그림상. 그리고 말야. 저 프리지아.가 제일 늦은겨. 

 

Frankish troops conquered the area east of the Lauwers in 785, after Charlemagne defeated the Saxon leader Widukind. The Carolingians laid Frisia under the rule of grewan, a title that has been loosely related to count in its early sense of "governor" rather than "feudal overlord".[5](p205)

During the 7th to 10th centuries, Frisian merchants and skippers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international luxury trade, establishing commercial districts in distant cities as Sigtuna, Hedeby, Ribe, York, London, Duisburg, Cologne, Mainz, and Worms.

The Frisian coastal areas were partly occupied by Danish Vikings in the 840s, until these were expelled between 885 and 920. Recently, it been suggested that the Vikings did not conquer Frisia, but settled peacefully in certain districts (such as the islands of Walcheren and Wieringen), where they built simple forts and cooperated and traded with the native Frisians. One of their leaders was Rorik of Dorestad.

 

저기 프리지아는. 샤를마뉴 할배인 카를 마르텔.때 들어온거야. 프리지아 작센 아래 바바리아. 프로방스. 가스코뉴. 롱고바르디. 카를 마르텔 부터해서 아들 소피핀에 그 아들 샤를마뉴때 들어오고. 그 아들 경건 루이.가 자기 아들들과 다시 작센등 반발 티나오는거 진압하고 경건루이 죽고 삼형제가 저걸 나눌때.

 

프리지아.는 저리 찰스들이 통일전쟁 이어서 하면서. 저때 무어족 무슬림들이 넘어오기도 하고. 라인강 너머의 작센족. 알프스 고지대의 바바리아에. 해서 여기 프리지아.는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뒀다는거지. 봉건 체제로 안두고. 걍 거버너. 대리를 두고 관리를 한거야. 해서 여긴 카운트가 늦어. 저때 프리지아 상인들이 북해건너고. 라인강 상류 보름스 까지 가면서 활발하게 무역을 했다. 옆에 덴마크 바이킹이 찝쩍대다가 쫓겨나고. 여긴 바이킹들이 못와. 

 

The Vetkopers and Schieringers were two opposing Frisian factional parties from the medieval period. They were responsible for a bloody civil war that lasted for over a century (1350–1498) and which eventually led to the end of the highly praised "Frisian freedom".

 

해서 펫코퍼 쉬레링거 내전때 합스부르크.가 개입하면서까지의 서기 1500년. 까지도. 프리지아의 자유. 라 한거걸랑. 저게 다시보믄. 찰스들에 들어갔지만. 봉건제도 안겪고. 근대 전까지 나름 자유로왔던겨 상대적으로. 

 

이게 합스부르크.가 마리로부터 받는 시기 전에. 이미 저기 저지대는. 프리지아의 아래는 부르고뉴들이 점령하면서 땅 뺏고. 돈 빌려준 담보로 뺏은거 달라고 전쟁하고 겔더전쟁. 부르고뉴에 맞서는 헨트전쟁 리에주 전쟁. 대포 티나오고. 그걸 합스부르크가 받고서리. 막시밀리언 이랑 프랑스 루이랑 전쟁하고 저 부르고뉴의 저지대를 두고. 할때 저 프리지아.가 내전에 같이 휩쌓이면서 프리지아 자유.가 사라지면서 완전 봉건제에 흡수가 된다 할때 말야. 저건 막시밀리안이 프랑스랑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서리 작센 영주에게 콜하면서 너 나 구해주면 프리지아 주께. 부터 저 프리지아 자유.가 끝 하는거야.

 

 

프리지아.를 다시보면 말야. 걍 역사 자체가. 자유야 자유. 근대 시작할때 그 자유를 잃은겨. 

 

아래 플랑드르.는 전혀 달라 프리지아와는. 여긴 로마를 알아. 겪었어 찐하게. 프랑크 킹덤에 처음 발판이 또한 플랑드르야. 완전히 달라 프리지아와는

 

 

샤를 마뉴 손자 삼형제가 나눌때. 저 플랑드르. 에스꼬강 상류는. 대머리 샤를 땅이야 시작부터. 저건 완전히 프랑스 땅인거야. 시작부터. 헌데 플랑드르가. 메로빙거왕조 시작을 같이했지만. 오히려 카롤링거들이 정착하면서. 제일 먼저 반기를 드는애들이 그래서 또한 플랑드르 였던겨. 이 플랑드르가 프랑스에 반기를 들어 중세 중반부터. 그 아래 저지대. 가운데가 로타르 땅인 애매한 분위기에서 프랑스와 신성로마가 싸울때 이들도 나서는겨 우리네는 벗어나겄다고. 

 

 

이 플랑드르 땅이 프랑스에겐 항상 반란의 땅이야 그래서. 뒤에서 부추기는건 신성로마 황제쪽이야. 그리고 프랑스의 숙적 앙숙 잉글랜드고. 

 

반대로. 플랑드르 위의 프리지아와 그 주변 저지대의 영주들 반란.을 지원하는건 프랑스야. 

 

 

로타르가 가운데 던진 땅.의 임자 문제가 특히나 이탈리아전쟁때 발생하는겨. 더하여 이탈리아 전쟁 후반전에. 서로간의 내전을 부추기면서 배후에서 노는겨. 

 

그 와중에 아래는 종교바람이 불어 프로테스탄트. 농민전쟁도 터지고. 아나벱티스트 쎈이들도 티나와. 뮌스터 반란에 케이지 세개 나오고. 그 사람들이 더 돌아다니미 세례한답시고 설교하고. 

 

저런 상황에서 65년간의 이탈리아 전쟁이 일단 끝 한겨. 그리고 앙리2세는 죽고 자우스팅으로.

 

 

그리고 바로 이념전쟁인 종교전쟁이 터져 3년후에. 저 바람이 저지대에도  불었었어. 

 

.

 

 

 

Mary I (18 February 1516 – 17 November 1558), also known as Mary Tudor, was the Queen of England and Ireland from July 1553 until her death.

 

잉글랜드의 마리.가 1553년에 퀸에 오를때가 37살이야. 1558년까지 5년 하는겨. 

 

결혼을 퀸되고 바로 다음해 에 스페인의 펠리페2세랑 해. 그리고 상상임신을 하는겨. 진짜 배가 불렀어. 열달가까이 ㅋㅋㅋ. 헌데 배가 꺼진겨 갑자기. 펠리페2세가 그전에 편지를 써 친척에게. 마눌이 임신했다고 하는데. 아 이상타 임신했다니. 

 

마리가 펠리페를 좋아했는데. 펠리페는 마리에게서 여자를 못느낀듯해. 배 꺼지고 나서 바로 잉글랜드를 뜨고. 플랑드르에 쳐박혀 펠리페는. 마리 입장에선 붙들고 싶걸랑. 임신이 최우선인데. 헌데 저때가 말야. 이탈리아 전쟁 마지막때야 저게. 

 

The Italian War of 1551 (1551–59), sometimes known as the Habsburg–Valois War and the Last Italian War, began when Henry II of France, who had succeeded Francis I to the throne, declared war against Holy Roman Emperor Charles V 

 

마리가 퀸 할때 라스트 이탈리아 전쟁이야. 마리가 죽고 나서. 이탈리아 전쟁이 끝이나. 아들 펠리페2세는 마리랑 결혼할땐 스페인킹이 아냐. 아빠 카를이 수준 맞춰줄라고 나폴리 킹자릴 먼저 줘. 그리고 결혼한겨. 그러다 엠퍼러 넘기면서 스페인킹을 넘긴건데 카를5세는.

 

저때 아들 펠리페는 플랑드르.가서 이탈리아 전쟁을 했던거야. 펠리페가 마리보다 11살 아래야. 매력을 못느끼는겨 마리에게서. 그리고 플랑드르에서 프로테스탄트를 겪는겨 또한 이사람이. 환멸을 느껴. 카톨릭이걸랑. 

 

This debt caused Phillip II to default on loans in 1557, 1560, 1575, and 1596 (including debt to Poland, known as Neapolitan sums).

 

이 펠리페2세가. 돈 못갚겠다고 디폴트선언을 네번을 해. 아빠가 진 빚. 이탈리아 전쟁. 오스만과의 전쟁.때 쓴 돈이. 지금시대로 보면 수조원이 아니라 수십조원 수백조원 으로 봐도 무방한듯해.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금은.도 택도 없는겨.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쪽 세금도 부족해. 저기 저지대 땅인 프리지아 있는 네덜란드 땅에서 세금을 인상하는겨. 옆에 플랑드르가 프랑스 쳐들어오는거 같이 전쟁하면서 또한 네덜란드 땅에서도 부글부글한겨 그 민심들이. 저 전쟁의 독박을 이쪽에서 쓴거야. 여기에 프로테스탄트 바람이 특히나 쎄.

 

 

펠리페2세가 저당시 저 저지대에 있으면서. 다짐을 하는거야. 프로테스탄트는 내땅에서 설 수가 없어 하는겨. 더하여 마리가 죽었어. 바로 엘리자베쓰에게 청혼을 해. 거부를 당해. 그리고 잉글랜드에 다시 프로테스탄트가 들어서. 

 

프랑스에서 바로 종교전쟁이 터져. 

 

펠리페 입장에선. 갑자기 이념의 사도가 되는겨. 카톨릭은 나 밖에 지킬 사람이 없구나. 기즈공작의 카톨릭에 병력과 자금을 이사람이 대는겨. 이 돈은 결국 저 네덜란드 땅에서 또한 뽑아써야해. 네덜란드는 더 부글부글 한겨.

 

펠리페2세는. 정책 모토 중에 하나가 네덜란드 퍼스트야. 여기를 무지 중시했어. 

 

펠리페2세는 절대 자기 땅에 프로테스탄트.를 용납을 못해. 이게 쎄.

 

앙리2세가 죽기전에. 저러한 펠리페2세의 속내를 알려줘. 지나가듯이. 앙리야 머 카톨릭의 나라이지만 좀 널럴하걸랑 사람이. 원래 이사람은 골수 카톨릭따위가 아냐. 카테리나 와 함께 이탈리아를 즐긴 인간이야. 헌데 점점 도가 지나치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낀겨 이인간 입장에선.

 

 

William I, Prince of Orange (24 April 1533 – 10 July 1584), also known as William the Silent or William the Taciturn (translated from Dutch: Willem de Zwijger),[1][2] or more commonly known as William of Orange (Dutch: Willem van Oranje), 

 

영어로 오렌지 공작 윌리엄 1세. 윌리엄 더 싸일런트. 오렌지의 윌리엄. 

 

According to the Apology, William's letter of justification, which was published and read to the States General in December 1580, his resolve to expel the Spaniards from the Netherlands had originated when, in the summer of 1559, he and the Duke of Alva had been sent to France as hostages for the proper fulfillment of the Treaty of Cateau-Cambrésis following the Hispano-French war. During his stay in Paris, on a hunting trip to the Bois de Vincennes, King Henry II of France started to discuss with William a secret understanding between Philip II and himself aimed at the violent extermination of Protestantism in France, the Netherlands "and the entire Christian world"

 

이탈리아 전쟁.을 끝내. 앙리2세와 펠리페2세가 조약을 맺아. 그리고 볼모로 스페인에서 프랑스에 보낸 사람이 이 오렌지의 윌리엄.이야. 

 

앙리가 펠리페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걸 윌리엄에게 해주는겨. 1559년 4월에 둘이 조약을 맺은겨. 저 이야긴 여름이야. 

 

펠리페2세랑 나 앙리는 프랑스랑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를 무력으로 끝내버릴껴. 그리고 완전한 그리스도 세계를 만들거야.

 

 

이 이야기를 듣고도 윌리엄이 흥분않고 아무말 안했다 해서 더 싸일런트 란 닉을 줬다는게 일반론인데.

 

 

앙리는 저말 하고 죽고 3년 후에 본격적인 프랑스 종교전쟁이 터진겨. 

 

그리고 나서리. 바로 6년 후에 오른쪽 네덜란드에서 같은 종교전쟁이자 독립전쟁으로 마무리하는 80년 전쟁이 터져. 

 

저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자 중심이자 핵은 저 오렌지의 윌리엄.인 더 싸일런트 윌리엄이야. 

 

지금 네덜란드의 대부분의 이미지는. 다 저 싸일런트 윌리엄이야. 나라 국기 문양 상징들이 오렌지의 윌리엄으로 시작을 해. 자기 조국의 아버지.야 저 사람이. 네덜란드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암살 당해 죽어. 그 암살자를 조오온나게 잔인하게 저 사람들이 죽여.

 

저 윌리엄의 후손이 영국의 명예혁명을 또한 만들어. 영국은 저 윌리엄들이 또한 만든겨.

 

.

 

저 이야기의 중심엔. 스페인이 있어. 스페인의 펠리페2세3세4세. 

 

 

 

또한 말야. 베네치아 와 사보이. 아주 핵심이야 이들이.

 

여기에. 중세의 해적.

 

여기에. 중세의 노예.

 

여기에. 제일 중요한 포인트가 저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이슬람이라는 오스만이야. 얘들은 동지야 동지. 

 

이 프로테스탄트라는건. 태생이. 드러운 들이야 이건. 다른 시선으로 보면. 짐이 그리 본다는게 아니라.

.

 

나중에 하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