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ll of Phaeton, 1604, in the National Gallery of Art in Washington, D.C.

 

 

루벤스. 그림인데. 파에톤이 아빠 아폴론의 마차를 타다가 땅을 불덩어리로 만들어서리 제우스가 번개치며 추락하는 그림.

 

Sir Peter Paul Rubens (/ˈrbənz/;[1] 

Dutch: 

[ˈrybə(n)s]; 28 June 1577 – 30 May 1640) was a Flemish artist. 

 

루벤스.가 플랑드르 사람이야. 지금 세상 문명은 이 플랑드르가 만든겨 이게. 네덜란드.도 플랑드르.를 빼놓고 말할 수가 없어.

 

루벤스.의 이전 그림. 플란다스의 개. 에서 네로.가 죽기 전에 달빛 스며들어 보는 그림 두개.가 십자가에 오르고 내려가는 지저스. 원작대로 안트베르펜.에 있어 그 그림이. 이 안트베르펜.이 또한 네덜란드 독립전쟁 80년의 핵심이야. 

 

William I, Prince of Orange (24 April 1533 – 10 July 1584), also known as William the Silent or William the Taciturn (translated from DutchWillem de Zwijger),[1][2] or more commonly known as William of Orange (DutchWillem van Oranje), was the main leader of the Dutch Revolt against the Spanish Habsburgs that set off the Eighty Years' War (1568–1648) and resulted in the formal independence of the United Provinces in 1581. 

 

네덜란드의 아버지. 오렌지의 프린스 윌리엄1세. 태시턴.이 말안하는겨. 사일런트. 윌리엄 더 사일런트. 로 불러. 오렌지의 윌리엄은 나중 명예혁명의 윌리엄이 또한 이 닉이야. 오렌지의 윌리엄은 잉글랜드 킹 되는 애로 구분을 하도록 해.

 

 

덧치.로 빌렘 판 오란녜. 불어로 오항지. 저기가 프랑스 남부야. 마르세유 아비뇽 위. 과거 프로방스야. 부르고뉴 덧치인 프랑스땅 빼고. 그 오른쪽 고지대 부르고뉴 저지대 부르고뉴.에 남부 프로방스.가 다 로타르.의 땅이었어. 여기서 사보이가 뻣어서리 오른쪽으로 간거고. 
저기 포함. 여전히 말야. 로타르의 가운데 땅.은 아래 사보이에서 죽 올라가서 저지대 네덜란드까지 프랑스와 신성로마.간 정리가 안된겨 이게. 베르됭 메쓰 뚤.도 이탈리아 전쟁 끝나고서야 프랑스 앙리2세가 그제서야 자기땅 인정받은겨. 저기가 파리에서 가까운곳이야. 하물면 고지대 로렌땅 저지대 로렌땅.도 여전 한겨. 저게 월드워 일.이. 끝나고나서야 그제서야 지금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선거고. 사보이는 이탈리아가 갖는거고 스위스가 왼쪽 갖는겨.

로타르의 가운데 땅이. 1100년 지나서야 마무리가 된거야 저게. 

윌리엄.은 나싸우 가문이야. 오렌지의 프린스. 영주가 자식없이 죽었어. 사촌인 얘한테 준겨 유언으로. 대신 카톨릭 교육을 받아라 하면서. 

René of Châlon (5 February 1519 – 15 July 1544), also known as Renatus of Châlon, was a Prince of Orange and stadtholder of HollandZeelandUtrecht and Gelre.

 

샬롱.의 르네. 오렌지의 프린스.에 홀랜드 질랜드 우트레흐트 겔레. 저기가 겔더스. 겔더랜드. 이걸 왜 계속 괼더 괼더 했냐 이거. 지금 네덜란드 땅의 반 정도 될듯한데. 저기의 스태트홀더. 

 

저게 스테이트. 에스테이트. 영지.에 홀더야. 

 

In the Low Countriesstadtholder (Dutchstadhouder

Dutch pronunciation: 

[ˈstɑtˌɦʌudər]

 

저기 저지대.의 지도자.를 스타트홀더. 라고 해. 덧치로 스타트하울더. 

 

steward is an official who is appointed by the legal ruling monarch to represent them in a country, and may have a mandate to govern it in their name; in the latter case, synonymous with the position of regentvicegerentviceroy (for Romance languages), governor, or deputy (the Roman rectorpraefectus or vicarius).

 

스튜어드. 라는 승무원.으로 지금 쓰지만. 스튜어드. 스태트홀더. 리전트. 바이스로이. 거버너. 데퓨티. 이게 다 같은 말이야. 대리인 이야. 권력자 위임을 받아서 힘을 행하새. 
라틴어 비카리우스.야. 바이스 vice 하는게 정. 부. 할때 부. 로 굳이 쓰는데. 저건 대리. 야. 
스튜어드.는 게르만 말이고. 스튜.가 집.이고 . 워드. 가 지키는겨. 
저 저지대는 부르고뉴 다음에 스페인 킹이 백작 공작령을 다 가진겨. 이사람이 자기 대리를 보낸겨. 스태트홀더.란 이름으로. 영주가 아냐 영주 대리야. 

샤롱의 르네.가 죽을때 윌리엄.은 11살 이야. 엘리자베스.랑 동갑이야. 카를5세가. 어려서 저 스태트홀더.를 안줘. 공석으로 남기고. 나중에 커서 얘한테 주는겨. 어차피 카를 대리인.이걸랑. 

샤롱.의 르네.는 오렌지 땅을 삼촌한테 역시 물려받았어 이미. 아버지가 저지대 땅 스태트홀더.를 임명받은겨 카를한테서. 이 사람이 공이 지대해. 아버지 죽고. 아들이 단 하나야. 저 권리를 오렌지땅 받은 르네.에게 준겨. 이 두개 권리가 윌리엄.에게 간거야. 

Count Henry III of Nassau-Dillenburg-Dietz (12 January 1483, Siegen – 14 September 1538, Breda), Lord (from 1530 Baron) of Breda, Lord of the Lek, of Dietz, etc. was a count of the House of Nassau.

 

William I, Count of Nassau-Dillenburg (nicknamed William the RichDutchWillem de Rijke; 10 April 1487 – 6 October 1559) was a count of Nassau-Dillenburg from the House of Nassau. His nickname the Rich refers to him having many children. However, he owned a number of counties: Nassau-Dillenburg, Nassau-Siegen, Nassau-Dietz and Vianden.

 

 

나싸우의 헨리와 윌리엄.이 르네.과 윌리엄.의 아버지들이야. 이 아버지들이 형제야. 헨리가 큰형이야. 이 사람이 막시밀리언과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전쟁하면서 겔더들이 프랑스랑 합쳐서 반란하는걸 진압하고 프랑수아1세가 저지대 쳐들어오는걸 막아. 기느게이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이 루이11세랑 싸워 이길때도 이 나싸우의 헨리가 짱이야. 카를의 애비 펠리페 미남왕을 얘가 수행해. 완전히 스페인왕가의 오른팔이야. 카를 5세의 황실 체임벌린.도 해. 자기 집안을 맡긴겨 카를이. 카를 5세 입장에선 저 나싸우 가문에게 애정이 깊은거야.

 

 

 

오렌지의 윌리엄.이 프로테스탄트로 크다가. 저 오렌지 땅에 저지대도 받을라고 개종을 하고 카톨릭 교육을 시키는겨 아부지가. 그래서 저걸 승계해.

 

Anna of Saxony (23 December 1544 – 18 December 1577) was the heiress of Maurice, Elector of Saxony, and Agnes, eldest daughter of Philip I, Landgrave of Hesse.[1] Maurice's only son, Albert, died in infancy. Anna was the second wife of William the Silent.[1]

 

이 윌리엄.의 첫부인이 죽어. 둘째 부인이 작센.의 안나.야.

 

이 작센의 안나.가 윌리엄이 자리비울때 바람핀듯 한 남자.가 플랑드르의 변호사인 루벤스.야. 저 그림의 아버지야. 그렇다고 화가 루벤스.가 안나의 자식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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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싸우. 작센. 헤쎄. 를 보면. 

 

 

윌리엄이 작센의 안나.와 결혼한 이유는 작센과 헤쎄.를 잡기 위해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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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비스1세때부터 프랑크 왕국이 서고 샤를마뉴때까지의 확장되는 지도.를 머릿속에서 그리면 말야. 

 

 

쟤들이 프랑크의 살리안족이걸랑. 아이셀강 건너서 바로 플랑드르 부터해서리 아우스트라시아.에서 왼쪽으로는 네우스트리아(뉴스트리아). 아키탄. 부르고뉴.를 먹어. 이때 부르고뉴.는 원래 부르고뉴 킹덤이 서로마 망할때 부르고뉴족이라는 게르만이 킹덤을 세운겨. 이걸 프랑크 살리안족이 통합시킨거야. 

 

오른쪽으론 아래 고지대 스와비아.그리고 동쪽으로 투링기아. 그 아래 바바리아.를 영지화해. 그리고 위로는 프리지아.에 작센.을 합쳐. 

 

 

 

 

이게 지금 독일.의 16개 주.로 나눈겨. 저기서 보문. 바덴 뷔르템베르크.가 스와비아. 바바리아. 투링기아.는 그대로 쓰고. 작센.은 저지대 작센.에서 죽 올라와서 작센 안할트. 작센. 까지 영역확장을 한겨.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있고 그 위에 메클렌부르크-포르포메른. 포르포메른.이 서쪽 포메리아.야 동 포레미아는 폴란드땅이 된겨. 그리고 위에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이 있고. 

 

 

살리안족이 이작한 가운데 아우스트라시아(오스트라시아).의 오른쪽이. 지금 라인팔라틴에 헤쎄. 북라인 베스트팔렌.이 된겨. 여긴 살리안족이야. 뷔르템베르크.는 스와비아족에 알레마니아족.이고. 헤쎄.는 헤쎈족이야 카티족 The Chatti (also Chatthi or Catti)  의 다른 이름으로 봐. 이 카티족은 저 브레멘에 베저강 Weser 이 죽 올라가서 헤쎄.의 북쪽 카셀 Kasse 까지 흘러. 저 베저강 하류에서 올라온 게르만이야. 

 

 

나싸우. Nassau 는 지금 헤쎄와 베스트팔렌 접경에 있어. 헤쎄 서북쪽이야. 나싸우는 헤쎄가 아냐. 그리고 헤쎄 오른쪽에 투링기아.가 독일땅 가운데 있는거고. 작센 이 오른쪽에 있는겨. 

프러시아 때에서야 헤쎄와 나싸우가 합쳐. 즉 나싸우랑 헤쎄는 이전엔 결혼으로 엮이지만 남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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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erick III (17 January 1463 – 5 May 1525), also known as Frederick the Wise (German Friedrich der Weise) was Elector of Saxony from 1486 to 1525, who is mostly remembered for the worldly protection of his subject Martin Luther.

 

Johann (30 June 1468 – 16 August 1532),[1] known as Johann the Steadfast or Johann the Constant, was Elector of Saxony from 1525 until 1532 from the House of Wettin.

 

작센의 프리드리히3세. 현명공 프리드리히. 이사람이 마르틴 루터.를 보름스칙령 후 납치해서 보호해준 스폰이야. 마르틴 루터.는 이 사람이 만들어준거야. 루터보다 20살 많아. 자식이 없어. 동생이 끈질공 요한. 형의 유지를 받들어서 프로테스탄트를 계속 이어가. 그걸 계속 했다해서 칸스턴트 닉 붙인겨. 똑같은 할배야. 형은 62살. 요한은 64살에 죽어. 

 

Johann Frederick I (GermanJohann Friedrich I; 30 June 1503 in Torgau – 3 March 1554 in Weimar), called Johann the Magnanimous, was Elector of Saxony (1532-1547) and head of the Schmalkaldic League.

 

 

이 동생의 아들이 요한 프리드리히1세. 이사람의 동맹자이자 친구가 헤쎄의 필리프.인겨

 

Philip I, Landgrave of Hesse (13 November 1504 – 31 March 1567), nicknamed der Großmütige("the magnanimous"), was a champion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of the early Protestant rulers in Germany.

 

 

The Augsburg Confession,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년. 이 중요한 사건이야. 카를 앞에서 두시간 읽는 사건. 이건 저 동생인 할배가 죽기전에 한겨. 이때 헤쎄 필리프는 26살이야. 얘가 주저주저 하는겨 어려서. 그리고 끈질공 요한.이 죽고서리. 그 아들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1세가. 한살터울 헤쎄의 필리프.랑 같이 손잡고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서리 전쟁을 하는거야 카를의 카톨릭이랑. 저 둘을 똑같이 마그나니머스. 그레이트 쏘울. 이란 닉을 붙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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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on the deposition of the Welf duke Henry the Lion in 1180, the ducal title fell to the House of Ascania, while numerous territories split from Saxony, such as the Principality of Anhalt in 1218 and the Welf Duchy of Brunswick-Lüneburg in 1235. In 1296 the remaining lands were divided between the Ascanian dukes of Saxe-Lauenburg and Saxe-Wittenberg, the latter obtaining the title of Electors of Saxony by the Golden Bull of 1356.

 

저 작센이. 벨프 가문 사자공 하인리히.가 끊기면서 아스카니아 가문.으로 작센이 가는건데. 벨프가문 하인리히.가 쎈 사람인데 이 사람을 이긴게 사촌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1세 황제야. 이 손자가 시칠리아 킹 황제 프리드리히2세고. 호헨슈타우펜 가문. 해서 벨프 가문.이 이 호헨슈타우펜에 치를 떠는거야 웬수야. 해서 나중에 이탈리아 내전할때 괼피 대 기벨리니.의 괼피.가 저 벨프.야 당근 그래서 괼피.가 교황파인거고. 

저 아스카니아 가문때 작센이 쪼개지는겨. 아래 바바리아 쪼개졌던 것처럼. 
브룬스위크 뤼네부르크.는 아스카니아 경쟁상대 벨프(괼피)의 사자공 하인리히.가 만든 도시고.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은 작센 라우엔부르크. 작센 비텐베르크.로 쪼개져. 이 아스카니아가 브란덴부르크.를 만든거고.작센비텐베르크.쪽 핏줄이 끊긴걸, 라우엔부루크 에서 갖고오려해. 이걸 신성로마황제 지기스문트.가 투링기아 에 있는 베틴가문 Wettin 에게 주는겨. 이 작센 비텐베르크.는 선제후권있는 공작자리이고.

 

 

The family split into two ruling branches in 1485 when the sons of Frederick II, Elector of Saxony divided the territories hitherto ruled jointly. The elder son Ernest, who had succeeded his father as Prince-elector, received the territories assigned to the Elector (Electorate of Saxony) and Thuringia, while his younger brother Albert obtained the March of Meissen, which he ruled from Dresden. As Albert ruled under the title of "Duke of Saxony", his possessions were also known as Ducal Saxony.

 

그리고서리. 이 베틴가문.의 작센비텐베르크.가 커져 이게. 지금의 작센 안할트에서 아래 투링기아까지 다 이들께 돼. 이 땅이 쪼개져. 장남 에른스트.가 비텐베르크 와 그 아래 투링기아를 갖고,  오른쪽 마이센. 여기가 드레스덴.이 있는 지금의 작센.이야 여긴 동생 알베르트.가 가져. 둘 다 공작. 듀크.야. 

 

헌데 선제후권. 엘렉토레이트.는 장남 에른스트.의 비텐베르크.가 갖고 가는겨. 마이센쪽 가진 알베르트.는 걍 작센 공작.이야 마이센 후작이자.

 

 

작센 비텐베르크.가 형 에른스트 계열.의 선제후 작센이고. 
오른쪽 마이센.이 동생 알베르트 계열.의 작센 공작.이고.




마르틴 루터.는 저 선제후인 에른스트 계열의 형제들과 그 동생의 자식품에 있는거야.


George the Bearded, Duke of Saxony (Meissen, 27 August 1471 – Dresden, 17 April 1539), was Duke of Saxony from 1500 to 1539 known for his opposition to the Reformation. 

 

작센 공작 게오르크. 조지. 턱수염 조지. 는 마이센 후작이자 작센 공작이야. 동생 알베르트 계열이야. 이사람이 막시밀리언 황제가 아직 로마 킹일때 저지대 플랑드르 반란할때 브뤼허 잡혀있는 걸 가서 꺼내준 사람이야. 동프리지아를 받아 그래서. 이전에 작센퓨드. 가 이 알베르트 계열의 조지.와 거기 올덴부르크 작센에서 나온 백작이 싸우는겨. 이사람이 쎈겨. 헌데 촌수로 윗계열인 에른스트네의 선제후 작센애들이 더 커지는게 짜증이나. 자기 영역도 침해하걸랑. 이사람이 원래는 프로테스탄트야. 루터 이용해서 자기 영향력 확대하는 듯한 저 프리드리히와 요한 형제. 가 싫은겨 이사람은. 그래서 자기땅은 카톨릭을 고수해. 헌데 오래 살다가 아들 둘이 먼저 죽어. 같은 알베르트 계열.에게 받는데 얘가 프로테스탄트야. 죽어서 저승서 땅을 치는겨.

 

 

Henry IV the Pious, Duke of Saxony (German: Heinrich der Fromme) (Dresden, 16 March 1473 – Dresden, 18 August 1541) was a Duke of Saxony from the House of Wettin. Succeeding George, Duke of Saxony, a fervent Catholic who sought to extinguish Lutheranism by any means possible, Henry established the Lutheran church as the state religion in his domains

 

같은 알베르트 계열이야. 동쪽 마이센.의 작센공작.으로 저 턱수염땅을 받아. 프로테스탄트로 바꾸는거야. 헌데 이사람 아들이. 독특한거야.

 

Maurice (21 March 1521 – 9 July 1553) was Duke (1541–47) and later Elector (1547–53) of Saxony. His clever manipulation of alliances and disputes gained the Albertine branch of the Wettin dynastyextensive lands and the electoral dignity.

 

저 턱수염 조지와 하인리히는. 마이센의 작센공작 연이어 할때. 왼쪽에선 비텐베르크.  에른스트 계열의 선제후 형제들이 이어서 한겨. 이들이 죽고 다음세대야. 모리스의 상대가 저 헤세의 필리프와 작센선제후의 요한프리드리히. 인거야. 
슈말칼덴 전쟁.이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겨. 모리스는 이십대. 저 두 사람은 나이들어 사십대. 
이 모리스.가 아버지가 바꾼 프로테스탄트를 다시 카톨릭으로 바꿔. 원래 프로테스탄트야. 헌데 계속 왼쪽 작센 선제후네랑 영지 전쟁을 하는겨. 에른스트 계열과 알베르트 계열.의 싸움인거야. 해서 이 모리스.가 카를 5세의 카톨릭 동맹에 참여해서 자기 친척인 작센선제후랑 싸우는겨.

이걸 이겨 카를쪽 카톨릭 동맹이. 이 알베르트 계열의 마이센 작센.이 비텐베르크의 선제후권을 갖고 오고 땅도 더 뺏는거야. 해서 앞으로 작센 선제후는 이 동쪽의 작센이 갖고 가는겨. 해서 나중에 나폴레옹 와서 신성로마해체되고 킹덤들 다시 들어설때 작센 킹덤이 지금 작센 귀퉁이에서 이름을 얘들이 끝까지 갖고 가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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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저 모리스.가 슈말칼덴에 이긴 카톨릭 편 들면서. 알베르트 계열.이 힘이 제일 쎈거야. 에른스트 계열의 작센은 엎드리는거고. 

할때 말야.


윌리엄 더 사일런트.가 재혼하는 작센의 안나.가 저 모리스.의 딸이야. 

모리스.가 카톨릭에 참여했지만. 바닥은 프로테스탄트야. 여긴 종교문제 이전에 알베르트와 에른스트 계열 사이의 불화가 원인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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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이혼당하고. 작센으로 오는겨. 집안에서 쪽팔리다고 이여자를 감금해. 식사만 넣는 구멍만 만들고 거기에 살게 하다가. 연금 상태로 살다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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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쎄는 갈리는 시작이. 저 필리프 때부터 갈리는거야. 이들이 종교전쟁에서 지면서. 
전쟁에 져도. 저 제후들 안죽여. 걍 좀 쪼그라진 땅 받고 계속 가는겨. 이땅처럼 인간들 안죽여 쟤들은. 이 조선 땅바닥처럼 상대를 적폐 놀이하면서 죽이는 땅바닥은. 없어. 후진 무슬림이랑 중부아프리카랑 중남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야 그딴 개은. 일본들도 그런은 안해

After Philip's death in 1567, the territory was divided among his four sons from his first marriage (Philip was a bigamist) into four lines: Hesse-Kassel (or Hesse-Cassel), Hesse-Darmstadt, Hesse-Rheinfels, and the also previously existing Hesse-Marburg. As the latter two lines died out quite soon (1583 and 1605, respectively), Hesse-Kassel and Hesse-Darmstadt were the two core states within the Hessian lands.

 

헤쎄.는 땅이 아래가 슈튜트가르트.의 뷔템베르크 스와비아고. 오른쪽이 투링기아.야 여긴 네 개로 갈라져. 그러다가. 위에는 헤쎄 카셀. 아래는 헤쎄 다름슈타트. 카셀이 저지대 헤쎄. 아래가 고지대 헤쎄. 이 둘이 남은 마르부르크.를 두고 티격태격 하는겨.

 

헤쎄 바로 왼쪽 옆에 나싸우.는 상대적으로 짝아. 헤쎄는 란트부르크.야. 란트.는 마그레이브. 마퀴스 보다 커 의미가. 

 

나싸우는. 짝아. 얘들은 다 카운트. 백작이야. 이들도 갈라져. 크게 북 나싸우. 남 나싸우.

 

 

이 둘 안에서도 서너개씩 갈라져. 다 같은 핏줄들이야. 

 

 

윌리엄 더 사일런트.의 아버지는 북 나싸우에서의 다섯개 중 하나의 카운트.였고. 윌리엄이 오렌지와 저지대 대리인.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나싸우 백작은 동생에게 주는겨. 그리고서리 윌리엄이 나싸우 오렌지.를 시작하면서 이 핏줄인 오렌지 나싸우.가 북 나싸우. 전체를 다 통일하고 19세기 까지 가는거고. 남 나싸우는 나중에 공작령.하나로 합치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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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걸 기본으로 숙지하고. 다음 이야기를 보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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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을 하는건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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