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전쟁의 시작을 1562년.으로 할때. 이건 두 진역이 병력으로 싸운거야. 이 전쟁이 시작한 사건은 베씨 학살.이야
 
 

The Massacre of Wassy, also known as the Massacre of Vassy, is the name given to the murder of Huguenotworshipers and citizens in an armed action by troops of Francis, Duke of Guise, in WassyFrance on 1 March 1562. 

 

1562년 3월 1일. 기즈 공작 프랑수아. 즉 첫째 공작 클로드의 자식이야. 얘가 가는 길에 이 배씨.에서 위그노들이 이 기즈 공작땅의 건물터에서 종교의식을 따로 하는 걸 보고. 뭐하는 짓인가 해서리 진입하다가 위그노들이 막아 이 병력을. 이에 열받아서리 터진 사건이야.

 

On 1 March 1562, Francis (François), the second Duke of Guise, travelling to his estates, stopped in Wassy (aka Vassy) and decided to attend Mass. He found a large congregation of Huguenotsholding religious ceremonies in a barn that was their church. Some of the duke's party attempted to push their way inside and were repulsed. Events escalated, stones began to fly, and the Duke was struck. Outraged, he ordered his men to fortify the town and set fire to the church, killing 63 unarmed Huguenots and wounding over a hundred.[2]

 

63명의 비무장 위구노들을 죽이고. 백여명이 부상을 당하다. 

 

배씨. 가 낭시 왼쪽이야. 왼쪽으로 죽 가면 파리고. 낭시.가 로렌 공작령의 수도야. 기즈네는 원래 로렌 공작이야. 저기 왼쪽 배씨.도 얘들 땅인겨. 기즈.는 낭시에서 도 쭉 올라가 벨기에랑 가깝고. 

 

 

저것도 말야. 한글러들 글보면.

 

와시에서의 신교도 학살. 미술백과. 바시의 학살. 두산백과사전.

 

일단 저걸 잘 풀은 내용도 없거니와. 대부분 와시. 끽해야 바시. 

 

저건 불어 발음기호로도. 배씨. 야 배씨. 저게 왜 바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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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러면서. 프로테스탄트의 노블. 귀족인 콩데. 의 군주가 병력 모아서리 다음달에 오를레앙을 점령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이 된겨. 여기서 저 배씨 학살의 기즈 공작 프랑수아 가 다음해 죽는거고. 

 

배씨 학살. 이전에 카톨릭 왕정의 분노를 일으킨게 플래카드 사건.이었어. 이게 1534년.이야. 

 

The Affair of the Placards (FrenchAffaire des Placards) was an incident in which anti-Catholic posters appeared in public places in Paris and in four major provincial cities: BloisRouenTours and Orléans, overnight during 17 October 1534

 

얘들이 대자보를 붙이는데. 저기가 파리.랑 블루아. 루앙. 투르. 오를레앙. 
프랑스 파리가. 북쪽 직선으로에 죽 가믄 아미앵.이고 더 가서리 해변에 칼레.야 마주편이 도버해협에 잉글랜드 켄트 접하는거고.
저 아미앵의 왼쪽으로 루앙. Rouen 이고. 오른쪽 위가 랭스 Reims 이고 파리 오른쪽 직선 죽 가면 낭시.이고 더 가면 스트라스부르. 접경이야.
파리에서 아래로 죽 가면 오를레앙. 이고 더 내려가면 부르쥬.야. 칼뱅이 이 오를레앙 대학 부르쥬 대학에 학생이었던거고. 오를레앙 에서 왼쪽 아래로 빠지면. 블루아.blois 이고 더 가면 투르 tours 야. 
얘들이 위에 파리랑. 루앙.에 사람많은 곳에 벽보를 붙이고. 또한 아래. 오를레앙 블루아 투르.에 붙이면서. 앙부아즈 성. 프랑수아1세의 침실방이 이 투르.에 있어. 여기에다 붙인게 아주 결정적인겨 저 사건이. 이때 프랑수아가 치를 떠는겨. 얜 르네상스 인간이야

그러면서. 십년 후에. 메린돌 학살.Mérindol 이 부데스들. 발도파 대상으로 벌어진거고. 17년 지나서 저 배씨 학살. 이 시작이 된겨. 

이 메린돌.은 마르세유 해변 윗 지역이야. 프로방스야. 부데스 시작은 리옹.이야 

In 1211 more than 80 Waldensians were burned as heretics at Strasbourg;

 

이들이 이전 4백년전에 80여명이 화형당해서 이단 규정된게 스트라스부르.야 

 

이 리옹. 이 고대로마.에서 알프스 넘어서. 갈리아땅을 개척하는 분기점 도시야. 여기서 갈리아 로 가는 길들이 갈라지기 시작해. 중심도시야 그래서. 서로마 망할때 게르만들 중 수에비족이 와서리 세운 부르고뉴 킹덤.의 수도가 이 리옹. 이야.

 

나중 대머리 샤를.의 공작령인 부르고뉴 공작령의 수도.는 리옹 위의 디종. 이야. 이 덧치 공작령과 바로 오른쪽 접하는 로타르의 부르고뉴 카운티.랑 헷갈리믄 안돼.

 

 

부데스.들이란 발도파가. 리옹에서 죽 우상향으로 라인강 따라서 스트라스부르.까지 퍼졌던겨. 이들은 해서 프랑스 남동부 쪽에 사백여년 몰래 스민겨.

 

저때 부데스 보다 더 먼저인듯한 비슷한 시기에. 카타르.파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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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bigensian Crusade or the Cathar Crusade (1209–1229)

 

알비젠시안 십자군. 카타르 십자군. At least 200,000[1] to at most 1,000,000[2] Catharskilled

 

 

적어도 20만에서 많게는 백만의 카타르 교도들을 죽였다. 큰 사건이걸랑. 저 20년 동안.

 

 

저 카타르파.가 알비. Albi 란 도시 부근으로 있었던거야. 해서 카타르파를 알비파. 알비젠시안즈 Albigensians 하는건데. 이 알비.란 도시가. 고대로마때도 찍혀 이름이. 여기가 툴루즈 

Toulouse 바로 오른쪽이야. 피레네 산맥 넘어서 가장 큰 도시가 툴루즈.야. 가론 강이 바로 접해. 이 가론강이 흘러서 프랑스 서쪽 해안으로 흐르는 삼각 모양 땅이 고대로마의 아키탄. 했던거야. 

여기를 중세에 옥시탄. Occitan 하는겨. 아키탄.은 저 가론강 위까지 더 올라가고. 이 옥시탄 왼쪽에 피레네 바로 접하는 곳이 가스코뉴 가 되고. 아키탄의 엘레오노르 할때 아키탄은 가스코뉴 에서 쭉 올라가서 앙굴렘. 에서 더 위 프와티예 Poitiers 공작령 까지를 엘레오노르의 그 아키탄.이야. 
저걸 다시 프랑스의 루이2세가 아우구스투스 닉을 얻으면서 갖고 와서 백년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저 지역의 정체성은 바다건너 잉글랜드였어. 
Saintonge. La Rochelle. Saint-Sardos 백년전쟁 이전에 잉글랜드 세력이 잔존해서 프랑스에 반기드는게 생통주 전투. 라로셸 전투. 생사도스 전투 걸랑. 이건 배후에 잉글랜드가 있는겨 그 아키탄. 생사도스 그 수도원이 툴루즈 위야. 생통주. 는 앙굴렘 옆이고. 라로셸.은 끝까지 반기를 둔 해변 도시야. 가론 강 위에 있는. 
저기에 더하여. 카트르파가. 툴루즈 부근 알비. 포함 이 서남부 쪽에 자리 잡은겨. 이 오른쪽이 마르세유의 프로방스고  나중 메린돌 학살 되었던 메린돌.이야. 

이 프랑스 남쪽이. 왼쪽으론 이전 잉글랜드의 아키탄에 더 남쪽으로는 카타르들과 부데스들이 저 끔찍한 이단 학살 이후로 그 마음들이 있었던 곳이야. 

더하여 잉글랜드는 앵글리카니즘이란 프로테스탄트가 자리를 잡은상황이고. 


해서. 위그노 들이. 여기서 특히나 세력을 갖는거야. 이 남부에서. 저 마음들이 이어져서리. 잉글랜드에 대한 이전 향수. 아키탄. 생통주 생사도스 라로셸 전투 는 백년전쟁 이전의 잉글랜드의 반기야 프랑스에 잠재된. 그게 앵글리카니즘으로 이어진거고. 더하여 카타르들과 부데스들의 사백년 전의 죽음들이 잔존해 있던 곳이야.

여기에. 우연치 않은게. 이 남부에 접한 피렌체 너머의 나바라 킹덤. 나바르. 에 나바르의 앙리2세가 프로테스탄트였고 다음 딸인 잔.이 프로테스탄트 위그노.였고 그 아들이 부르봉왕조여는 앙리4세가 위그노일 수밖에 없고. 이들이 자연스레 프랑스 남부에서 만나서리 여기서 세력을 이루면서 이 위그노들이 통계로는 10퍼가 안되지만. 이들이 여기서 세력을 이루고 종교전쟁을 한겨. 그리고 쌩뚱맞게도 세력 없는 앙리4세에게. 암살로 죽는 앙리3세 를 이어서리 살리크 법에 따라서 왕위를 승계하고 스페인 카톨릭이랑 전쟁하면서 낭트칙령으로 마무리되는게 프랑스 종교전쟁 36년간의 마침표.걸랑.

.프랑스의 종교전쟁의 마침표는 저 이후 백년인 1704년에 끝나
War of the Cévennes (1702-04) 세벤느 전쟁. 세벤느.가 카타르들의 알비지역 오른쪽이고 부데스들의 메린돌 학살 의 왼쪽 이야. 

Camisards were Huguenots (French Protestants) of the rugged and isolated Cévennes region, and the Vaunage in southern France. 

 

태양왕 루이가 낭트칙령 폐지하고 위그노 탄압할때 이쪽으로 모인 위그노들을 카미자르. 라고 해. 이 카미자르.들이 세벤느에서 전쟁하면서 마무리가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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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건 집단 무의식의 꼭두각시일 뿐이야. 
인간이란 건 거대한 사유의 흐름의 점과 선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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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들이 20만에서 최고 백만명 죽었다고 할때. 이전 썰했듯이. 교부철학 세팅되고나서 동시에 아르메니아에서 올라오는 폴리시언들의 종교개혁 바람이 오백년 지나서 카타르파 부데스파 학살하는거걸랑. 이때 다시 교리 재정리를 위해서 나오는 사유가 스콜라 철학이야. 스콜라 철학은 이교도 교리와의 생각의 전쟁인겨 그건.


저때 카타르를 교화한답시고 나온 인간이 도미니코 야. 도미니코 수도회.의. 프란치스코와 두 수레바퀴를 이루는.

Saint Dominic (Spanish: Santo Domingo), also known as Dominic of Osmaand Dominic of Caleruega, often called Dominic de Guzmán and Domingo Félix de Guzmán (/ɡʊzˈmɑːn/; 

Spanish: 

[ɣuθˈman]; 8 August 1170 – 6 August 1221), was a Castilian priest and founder of the Dominican Order. 

 

세인트 도미니크. 스페인어 산토 도미니코. 카스티야 사람이야. 



Dominic was educated in the schools of Palencia (they became a university soon afterwards) where he devoted six years to the arts and four to theology. In 1191, 

 

팔렌시아 학파에서 공부중인겨. 이게 곧 팔렌시아 대학이 돼. 주교의 요청으로 카스티야 킹 알폰소3세가 대학을 세워. 이게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야. 살라망카보다 오래됐어 이게. 그러다가 이사람이 카스티야 코트가 덴마크 공주와 결혼 문제로 사신들을 대륙에 보낼때 도미니코가 동행을 하면서 저 프랑스 남부의 카타르 바람을 겪는겨. 해서 저 카타르.때메 생긴겨 이 수도회는.

 

The story is told that before his birth his barren mother made a pilgrimage to the Abbey at Silos,[4] and dreamt that a dog leapt from her womb carrying a flaming torch in its mouth, and "seemed to set the earth on fire." This story drew resonance from the fact that his order became known, after his name, as the Dominican order, Dominicanus in Latin which a play on words interpreted as Domini canis: "Dog of the Lord."

 

도미니코 엄마가. 수도원 가고서는 태몽을 꾼게. 개 한마리가 자궁에서 티나와서리 뛰가는겨 자기 입에 횃불을 물고서리. 그게 마치 땅에 불을 지르는 듯 보였대. 도미니 카니스. 라틴어로 개.종류가 카니스. 신 로어드가 도미누스. 제우스에서 데우스에서 도미누스 가 된겨. 해서 주의 개. 주님의 충견. 인건가 로 이름이 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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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de Bourbon or Louis I, Prince of Condé (7 May 1530 – 13 March 1569) was a prominent Huguenot leader and general, the founder of the House of Condé, a cadet branch of the House of Bourbon.

 

종교전쟁 시작할때. 기즈공작 프랑수아.에 맞서는 위그노의 노블.이 콩데.의 프린스 군주 루이1세야. 이 콩데 가문은 부르봉 가문의 방계야. 콩데 창업자 부르봉 루이.와 기즈 창업자의 아들 프랑수아.가 붙은거야. 이 사람이 프랑스 위그노 세력의 핵심이야. 

 

Antoine (in English, Anthony; 22 April 1518 – 17 November 1562) was the King of Navarre through his marriage (jure uxoris) to Queen Jeanne III, from 1555 until his death. He was the first monarch of the House of Bourbon, of which he was head from 1537. He was the father of Henry IV of France.

 

 

부르봉의 앙트완. 콩데 군주 부르봉 루이.의 형이야. 이사람이 바로 나바르의 앙리2세의 딸 잔3세와 결혼하는겨. 해서 나온 자식이 프랑스왕 앙리4세야. 부르봉 왕조를 여는.

 

 

앙리4세가. 앙리2세와 카테리나의 딸인 마가렛.이랑 결혼해서. 사위라고. 남자핏줄 끊겨서리 사위 줄로 왕을 하는게 아냐.

 

프랑수아1세가 루이12세의 사위라고 킹을 하는게 아냐. 여자쪽 핏줄이던 남편이던 살리크법으론 못 이어가. 그 결혼한 남자가 왕족 핏줄이라서 킹을 승계하는겨. 더하여 사위면 더 점수가 가산이 되겄지.

 

이 부르봉은 직계로 쭉 올라가면 성 루이 9세야. 

 

기즈의 로렌 가문은 쭉 직계로 올라가면. 없어. 몰라. 해서 지들은 사를 마뉴. 후손이라고 주장하는게 증거가 없어. 즉 기즈 공작들이 킹을 하고는 싶은데 솔직하게 족보가 약한겨. 얘들은 그래서 킹을 할 수가 없었어 어쨌거나. 저 프랑수아의 자식인 기즈 앙리.가 그래서 밀은게 자기 삼촌이야. 대주교 였걸랑. 뒷배는 펠리페2세가 봐주고. 기분 째진 상태에서 앙리3세가 죽였지만. 애초에 얘들은 프랑스 킹을 할 수가 없었어 프랑스 역사에서. 혼자 망상질 하다가 간거지.

 

 

 

저 앙트완.과 부르봉 루이. 형제의 아버지가. 역시나 기즈 공작 창업자 로렌의 클로드 처럼. 마리냐노 전투에도 직접 참여하고. 프랑수아1세가 포로가 되었을때도 구출위원회 짱이야. 이사람이 군권의 대리인인겨. 이사람이 자기 부친의 결혼으로 생긴 콩데. 저기가 

Condé-en-Brie 콩뎅브리.야 이 콩데 붙은 지명이 많아. 랭스 왼쪽에 있어. 이 콩데가 당시 하미지 하는 영지가 아니면 후진 동네야. 이게 커지면서 자기 작은 아들 중에 저 부르봉 루이.가 군주.가 된겨. 프린스 란 말이 쎈 말이 아냐. 걍 작은 동네 준겨 아부지가. 

 

그리고 큰 아들은 나바르.의 잔.에게 장가가서 명목상 킹이 된거고. 헌데 나바르.는 킹.이 단지 콘소트. 배우자 일뿐이야. 남자라도. 전혀 다른 세상이야. 그러면서 동시에 이사람은 프랑스.에서 앙리2세죽고 카테리나.를 대신해서 군권 대리인으로 지휘하는거야.

 

lieutenant general of the kingdom in 1561.[7] 

 

류트넌트.라는 건. 류.가 대타.야 대리인.이고. 데퓨티. deputy. 비카리우스. 다 같아. 테넌트.라는건 임차인이야. 채무자 입장이야. 걍 대신 하는겨. 대행 하는겨. 이 단어는 군대 대리인에 주로 써. 해서 군수사령관 정도. 제너럴. 전반. 모두 다. 특히나 군대관련 쪽 대행이 류트넌트.야 쎈말이야 저게.

 

 

이사람은 디게 웃긴게 처지가. 부인 나바르.의 잔.은 위그노야. 동생 콩데.의 루이도 위그노야. 헌데 이사람은 카테리나 를 위해서 프랑스 킹덤 입장에서 싸워. 카톨릭 편도 위그노 편도 아냐. 오직 프랑스 킹덤이야. 한편으론 애매한겨 그래서. 

 

이 앙트완.은 종교전쟁 시작하자마자 1562년. 위그노들이 오를레앙 점령하고 루앙 점령할때 루앙 전투에서 부상당해 죽어. 즉 시작하자마자 죽은겨.

 

 

초반의 리더였던 콩데의 부르봉 루이.도 1569년에 죽어. 그리고 나서리. 카테리나.와 나바르의 잔.이 자기 자식들 결혼으로 마무리를 하련거야. 둘다 전쟁할 돈이 없어 일단.

 

해서리 카테리나의 딸 마가렛.과 잔의 아들 앙리 나중4세.가 되는. 그 결혼식에서 

 



 
Gaspard de Coligny, Seigneur de Châtillon (French pronunciation: ​[ɡaspaʁ d(ə) kɔliɲi sɛɲœʁ d(ə) ʃɑtijɔ̃]; 16 February 1519[1] – 24 August 1572)
 
개스파드 콜리니. 콜리니 가문의 개스파드. 콩데의 루이가 죽고. 이사람이 위그노 의 군 지도자야. 저 결혼식이 끝나고 축하연회 주간에. 저격을 당햇는데 살았어. 카테리나. 기즈가문. 스페인쪽. 세 곳이 용의자이지만 몰라. 위그노가 난리가 난겨. 

 

 

The St. Bartholomew's Day massacre (French: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The massacre began in the night of 23–24 August 1572 (the eve of the feast of Bartholomew the Apostle), two days after the attempted assassination of Admiral Gaspard de Coligny, the military and political leader of the Huguenots. 

 

바로 터진게 성바텔레미.의 학살. 

 

Lasting several weeks, the massacre expanded outward to other urban centres and the countryside. Modern estimates for the number of dead across France vary widely, from 5,000 to 30,000

 

저게 단지 이틀이 아니라 수주간에 걸쳐서 일어났다. 누구는 5천명에서 3만명이 죽은 걸로 보기도 한다. 

 

개스파드 콜리니.는 부상만 당했걸랑 슬쩍. 카테리나는 놀라서 바로 오고 의사보내고. 그러다가 바로 기즈쪽 카톨릭에서 병력을 동원한겨. 저걸 배후에 또 카테리나가 있다고 어쩌고. 카테리나는 악녀가 아냐. 
그러면서 기즈애들이 노리는게 저 개스파드.야. 콜리니의 개스파드는 저때 죽어. 8월24일에. 암살엔 살아남았는데 저기선 못빠져나왔어. 앙리4세도 저때 죽을뻔했어. 빠져나오고.

하면서 후반전이 본격적으로 터진겨.
estimated 3,000,000 dead
저 36년간 의 전쟁에만 3백만명이 죽은걸로 추정.

이젠 말야. 전쟁이. 한번 터지면 사상자가 대규모야.

이게 이념전쟁의 또한 특징인데 근대부터의.

이전에 중세 전쟁이란건 말야. 끽해야 기사들 수백에 보병들 기천이 다야 서로 붙는게.
기사들 천단위 동원하면 그게 그야말로 워. 전쟁이 되는겨.

만명 가면 이건 그야말로 엄청난 대전인겨.

걍 지들끼리 하미지 한 기사와. 돈으로 부른 용병 데리고. 지들 끼리 붙는거야. 저 때의 중세 전쟁은 약탈 개념이 아냐. 특히나 후계자전쟁이야. 이겨서 저땅 내가 갖고 오는겨. 그걸 피바다로 민들을 만들 이유가 없어. 

저게 위기의 삼세기 로마때 그 로마에서의 내전을 그린 이야기야. 로마 시민들은 시가지에서 술먹고 놀면서 내전을 구경을 해. 전쟁하는 군들은 자기들 끼리만 싸우는겨. 그 광경을 글로 남겼어. 웃긴겨 그게. 

헌데 이념전쟁은 달라 이제. 더구나 아키버스.라는 총이 생겼어. 누구나 말야. 걍 불 붙이고 조준만 하믄 돼. 
이념에 참여하는 민들이 더 달라붙는겨 적극적으로.

헌데말야 또한 민들도 몰라. 카톨릭이 먼지 프로테스탄트가 먼지. 거 루터 글 보믄. 성직자 조차에게 욕을 해. 무식한 그 시대 상황을. 성직자 조차 저리 무식한데 하물며 민들이야 오죽하냐. 그들이 멀 알겠니. 걍 기도하면서 마음 그림자 푸는 사람들이.

해서리 잉글랜드 수도원 해체 할때나 민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그러다가 카톨릭은 걍 짜진겨. 더이상 소요 없어 시간흐르면서. 왜냐? 가만 보니 말야. 카톨릭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자 하지만. 오히려 말이지. 앵글리카니즘 되믄서리. 하미지를 킹에게 하고. 지들 애인이었던 여자들과 결혼을 해. 결혼하는겨 예전에 사제미 수도사미 거드름 떨던것들이. 이것덜이 다시 마리가 잡을때 카톨릭 대지만. 명분이 없는겨. 뻘줌 상황서 민들이 보기엔 저건 머여 하는겨. 카톨릭 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관시미가 없어 민들도. 걍 기도만 하게 해주믄 돼 . 
헌데 그 사회 분위기를 적폐로 느끼면서 저기에 이념으로 참여하면서 말야. 그게 군대병력이 되는겨. 전쟁이 점점 커져 이게. 그러면서. 그야말로. 징집을 강제로 하면서 점점 피바다 전쟁이 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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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은 프랑스 가운데야. 바로 오른쪽 아래가 리옹.이가 더 가서 부르고뉴인데. 시작은 성루이9세의 자식부터야. 중세엔 조또 별 힘이 없어. 그러다가 종교전쟁후에 앙리4세가 부르봉 왕조를 열어.
나중에 하자. 

 

The massacre, with the murder of Gaspard de Coligny above left, as depicted in a fresco by Giorgio Vasari.

 

 

 

Charles IX in front of the Paris Parlement on 26 August 1572, justifying the Saint Bartholomew massacre as a response to a Huguenot plot. Vasari for Pope Gregory XIIISala Regia (Vat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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