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nch Wars of Religion
Mérindol (1545) Amboise (1560)
1st–7th wars1562–63 Edict of Saint-Germain Vassy Rouen Toulouse Vergt Dreux Orléans Edict of Amboise1567–68 Saint-Denis Chartres1568–70 Jarnac La Roche-l'Abeille Orthez Moncontour1572–73 Mons St. Bartholomew Sommières Sancerre La Rochelle1574–76 Dormans Edict of Beaulieu1576–77 Treaty of Bergerac1579–80 Treaty of Fleix
War of the Three Henrys (1587–89) Treaty of Nemours Coutras Vimory Arques Day of the Barricades
Henry IV of France's succession (1589–94) Ivry Paris Rouen Caudebec Craon Blaye Morlaix Fort Crozon Edict of Nantes
Franco-Spanish War (1595–98) Fontaine-Française Ham Le Catelet Doullens Cambrai Calais La Fère Ardres Amiens
Huguenot rebellions1621–22 Saumur Saint-Jean-d'Angély La Rochelle Montauban Royan Saint-Foix Nègrepelisse Saint-Antonin Montpellier Saint-Martin-de-Ré Treaty of Montpellier1625 Blavet Ré island Treaty of Paris1627–29 Saint-Martin-de-Ré La Rochelle Privas Alès Montauban Peace of Alès
Revocation of the Edict of Nantes (1685)

 

War of the Cévennes (1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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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rench Wars of Religion were a prolonged period of warand popular unrest between Roman Catholics and Huguenots(Reformed/Calvinist Protestants) in the Kingdom of Francebetween 1562 and 1598. 

 

프랑스 종교전쟁을 일단 1562년에서 1598년. 36년으로 끊어. 이후 위그노 반란들은 따로 보고. 

당시 세 세력. 기존 왈데니지언이라는 부데스.들(발도파)가 4백년 동안 있어왔고. 프랑스 남부에서. 여기에 루터파들이 넘어오고. 칼뱅이 중심이 되는 위그노들이 큰 세력을 이뤄.

 

위그노. Huguenot. 어원 넘어가고 벼라별게 있고. 더하여. 프랑스 카페 시작인 위그 대제. 에서 왔을 수도 있다 는 썰.

 

Hugh the Great (

c.

 898[1] – 16 June 956) was the Duke of the Franksand Count of Paris.

 

위그 카페를 낳은 파리 백작이자 프랑크의 공작이야. 이 사람 아들이 위그 카페.야 이 카페부터 카페왕조가 시작되고. 필리프 6세에서 발루아왕조 시작하면서 백년전쟁하고. 이 종교전쟁에서의 앙리4세가 부르봉 왕조. 를 이어가면서 나폴레옹 전까지 가는겨. 다들 카페의 방계들이야. 카페는 카롤링거의 방계고. 카롤링거는 메로빙거의 핏줄이 덜 섞였고.

Hugues le Grand1 (né vers 898, mort le 

 à Dourdan)

 

저 위그 카페.의 아빠인 위그 대제.를 불어로 위그 르 그랑. 하고 이걸 영어로 휴 더 그레이트 하걸랑. 

 

휴 카페 도 마찬가진데. 

Hugh Capet. 영어. Hugues Capet 불어. 영어로는 휴 카페트. 야. 불어로 위그 카페.. 저걸 한글로 쓸때도. 영어 휴 카페트. 라 쓰면 휴카페트.로 읽어야해. 영어로 휴 카페트. 즉 휴 카페 란건 없어. 휴 카페트. 위그 카페야. 

 

그랜드. 라는건 grand 라틴어 그란디스. 야 다 큰거야. 이걸 그랑프리. 하민서리 프랑스가 쓰는거고 여기서 영어가 그랜드 가져다 쓰지만. 저거에 대비하는 영어는 그레이트.야. 얘들은 그레이트.가 라틴어 그란디스.에서 온 걸로 보지 않아. 독자적 게르만어로 봐. 


하튼 위그노.가 저기 왔다는 설도 있는데.

By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Huguenots constituted 7-8% of the whole population, or 1.2 million people. By the time Louis XIV revoked the Edict of Nantes in 1685, Huguenots accounted for 800,000 to 1 million people.[11]

 

저 위그노가. 종교전쟁 끝나고 서기 1600년 즈음에는 전체 인구 10프로에서 이삼프로 줄어서리. 120만 정도 되었다. 전체 프랑스 인구를 당시 2천만으로 볼때. 나머지 90퍼는 카톨릭이야. 

 

1598년.에 프랑스 종교전쟁을 일단 끊는건. 앙리4세의 낭트칙령이야.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하는겨.

 

그리고나서도. 위그노들이 반란들이 일어나. 낭트 칙령 후 거의 백년가까이 되서리. 태양왕 루이.가 저걸 폐지해. 위그노들을 다 조져. 

 

 

Louis XIV laid claim that the French Huguenot population was reduced from about 800,000 to 900,000 adherents down to just 1,000 to 1,500; although he overexaggerated the reduction, the dragonnades certainly were devastating for the French Protestant community. Nevertheless, the remaining Huguenots faced continued persecution under Louis XV. At the time of Louis XV's death in 1774, Calvinism had been nearly eliminated from France. Persecution of Protestants officially ended with the Edict of Versailles, signed by Louis XVI in 1787. Two years later, with 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of 1789, Protestants gained equal rights as citizens.[1]

 

태양왕 루이가 있을때 위그노가 좀 더 줄어서 80만 90만 정도 였는데. 얘가 확 조져서리. 이제 겨우 천. 천오백명 정도 된다. 라고 루이가 말을 했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어쨋꺼나 엄청나게 줄었다 확실하게. 루이 15세까지에도 박해를 받았다. 해서리 나폴레옹 전에는 거의 없어졌다 칼뱅들이 프랑스에선.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 1789 터지면서 동등한 권리를 갖은 시민권자가 다시 되었다.

 

 

Jeanne d'Albret (Basque: Joana Albretekoa; Occitan: Joana de Labrit; 16 November 1528 – 9 June 1572), also known as Jeanne III, was the queen regnant of Navarre from 1555 to 1572

 

Catherine de Medici (Italian: Caterina de Medici, 

pronounced 

[kateˈriːna de ˈmɛːditʃi]; French: Catherine de Médicis, 

pronounced 

[katʁin də medisis]; 13 April 1519 – 5 January 1589)

 

잔 달브레. 카테리나 드 메디치. 알브레 가문의 잔.과 메디치 가문의 캐서린. 이 중심이야 이 이야긴.

 

 

 

잔.은 나바르 킹덤의 레그넌트 퀸. 킹이야. 프랑스 신성로마.는 퀸이 권력이 없어 프랑크 살리안족이 만든 살리크법을 따라야해. 여긴 여자핏줄이 킹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여자의 남자자식이 킹을 요구할수 없어. 그게 백년전쟁 구실중 하나였지만 그래서 거부한겨 저걸로 프랑스는. 헌데 잉글랜드나 스콧. 덴마크 북유럽이나 스페인땅이나 나폴리는 살리안족이 만든게 아냐. 여자도 킹을 하는겨 그래서. 

 

 

 

나바르. 영어야 이건. 스페인어로 나바라. 해서 나바라 라고 해야해 원칙은. 걍 나바르 해. 그리 썼으니까.

 

이 나바르.가 이전 썰했듯이. 어줍짢게도 프랑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가 없어. 샴페인 백작이 나바르에 시집간 고모 핏줄로. 저기 자식이 없어서리 킹을 하면서리 이어 성루이 딸도 오면서리 프랑스가 발담그기 시작하다가. 근대의 핵심이 되는게 이 나바르야. 부르봉 왕조를 여는 앙리4세가 이 나바르 킹의 저 잔.의 자식이야. 종교전쟁때 여기가 위그노의 중심이야. 단지 앙리4세만 달랑 해서 이름이 있는게 아냐 이게. 해서 나폴레옹 이전의 프랑스 왕가의 헤럴드리.에 당당히 부르봉에 나바르 의 문양을 넣는겨.

 

샴페인 가문에 프랑스 카페가 같이 킹하다가. 프랑스도 샤를4세 이후로 직계 끊겨서리 발루아의 루이6세가 시작하지만. 이때 나바르.는 카페 먼 핏줄에서 따로 갖고 가. Évreux 노르망디의 에브뢰 백작이 이어가는거야. 여기서도 끊겨서 남자가. 블란체.가 아르곤의 조안2세.랑 결혼하면서. 삼남매 낳고 죽고. 아들 카를로스가 새엄마에 뺏길까봐 뎀비다가 죽고. 임포텐트 안서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에게 시집갔다가 모욕당하고 나바르 다시 온 언니가 킹하다 독살당하고 동생 엘레오노르가 킹 하다가 이여자가 프랑스 퐈가문이랑 결혼하면서 이 퐈가문으로 낳은 딸이 나바르의 캐서린.이야 이여자가 시집간 가문이 프랑스의 알브레. Abret 가문이야. 퐈 가문 알브레 가문 다 가스코뉴 땅이야 피레네 접경. 

 

이때 이전 썰했듯이.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부인 이사벨라가 죽어. 그리고 재혼한 여자가 퐈가문의 귀족여자야. 그러면서 나바르 킹덤에 개입을 하고 전쟁을 하는겨. 저때는 프랑스랑 막시밀리언의 신성로마랑 이탈리아에서 전쟁중일 때야. 페르디난도가 저길 쳐들어가. 이즈음 나바르의 캐서린이 죽어

 

나바르는 바스크야. 쎈곳이야. 점령을 해도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아. 나바르의 캐서린.의 자식이 이전 썰한 나바르의 앙리2세.인겨. 얘가 프랑스로 넘어가서리. 프랑수아 지원받아서리 다시 쳐들어가는겨 스페인으로. 이때부터 이탈리아 전쟁이 다시 시작이 돼. 이게 1521년이야. 카를5세가 받은겨 애비 페르디난도가 점령한 나바르.의 문제를. 그리고 앙리2세는 전장에서 잡혀 포로가 되는거고. 그러다가 카를 5세가 프랑수아1세의 코냑동맹을 다시 조지면서. 로마 약탈도 하면서. 이태리를 손에 쥐고 조약맺으면서. 나바르에는 땅 좀 줄은 저지대 나바르.를 주고 나바르의 앙리2세가 거기서 킹 하는거야.

 

 

이 나바르의 앙리2세가 딸 하나 달랑 낳고 죽은겨. 이 딸이 잔 달브레. 나바르의 잔3세. 인거야. 얜 아빠가 알브레 가문이라 알브레인겨.

 

아빠가 저때 한창 프로테스탄트 나올때 사람이야. 해서 아빠 나바르의 앙리2세는 프로테스탄트야. 해서 이여자도 프로테스탄트야. 해서 이 여자가 낳은 자식인. 부르봉 왕조를 여는 앙리4세도 위고노 일 수 밖에 없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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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카테리나 메디치. 메디치의 캐서린. 

 

 

.The legend that de' Medici introduced a long list of foods, techniques and utensils from Italy to France for the first time is a myth routinely discredited by most food historians.[167] Items whose introduction to France have been attributed to Catherine include the dinner forkparsley, the artichokelettucebroccoli, the garden peapastaParmesan, as well as the turkey and tomato of the New World. She has also received credit for introducing sauces and a variety of dishes such as duck à l’orange and deviled eggs.

 

 

카테리나.는 증조할배가 위대한 로렌초.이고. 로렌초의 장남 불운딱지 멍청한 페에로.가 할배야. 차남이 똑똑한 교황 레오10세야. 즉 카테리나.는 레오10세 교황한테 손녀뻘이야. 카테리나의 작은할아버지. 카테리나 부모가 결혼하는 해가. 캉브헤 동맹 전쟁 다음이야. 프랑스 루이12세가 나폴리 뺏기고 돌아가고. 베네치아가 교황령 다시 달라는데 안주고 해서리 베네치아 상대로 전부 동맹맺아서 다시 이탈리아 전쟁할때. 요틈에 프랑스가 배신해서 베네치아랑 손잡고 다 헤집고 밀라노 먹고 돌아간 후야. 그리고 루이12세는 이때 죽어. 막시밀리언도 죽어 늙어서. 

 

그리고나서리 사위 프랑수아1세랑 카를5세가 티나올 때야. 프랑수아1세랑 레오10세 교황이 이때 동맹을 맺는거야. 교황은 프랑수아에게 니네가 잃은 나폴리를 찾게 해주겠다. 프랑수아는 교황이 졸 싫어하는 베네치아 처리해주겠다. 

 

그러면서. 레오10세의 조카.랑 프랑스의 오베르뉴의 마델린. 이랑 결혼을 하는겨. 프랑수아의 먼 친척인데. 이 결혼식을 Château d'Amboise 앙부아즈 성. 여기가 프랑수아1세가 태어난 곳이야. 

 

이 앙부아즈 성.이 나중에 이 종교전쟁에 불을 지르는. 앙부아즈의 음모.의 성이 돼 또한. 장 칼뱅이 연루되는 플래카드 벽보 사건.에서 그 벽보가 왕 침대방문에 붙었다 할때 그 방의 성이 이 앙부아즈 성.이야.  어린 프랑수아2세를 위그노들이 납치하려한다는 소문에. 파리에서 이 앙부아즈로 옮기고 여길 처들어와 위그노가. 

 

 

레오10세의 조카 메디치 랑 프랑스 귀족의 결혼을 프랑수아1세가 저기서 치뤄주면서 돈도 주는겨 메디치에게. 메디치는 당시 다시 피렌체를 되찾고 우르비노.도 가진 상태고. 

 

 

그리고 나서리 그 다음해에 신성로마황제를 프랑수아1세 민다고 했다가. 카를5세가 황제 된건데.

 

 

저기서 나온 딸이 카테리나.야 메디치의 카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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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피렌체의 메디치.는 예전 샤를8세가 처음 넘어오면서 프랑스 군에 쫓겨나서리 카테리나의 할배 불운딱지 피에로는 도망가고. 사보나롤라 인민 민주정부 서고 인민놀이하다가 프란치스코네랑 불속 살아남기 하다가 사보나롤라는 죽어 화형시키고. 저 쫓겨난 피에로는 내려가서리 쌩뚱맞게 프랑스 편에 붙어서 스페인이랑 전투하다가 죽었어. 이 인연으로 메디치랑 프랑스가 화해를 한겨. 그 자식이 저리 결혼을 해서 카테리나 를 낳은건데.

 

그리고 나서 저 부부가 바로 죽어. 아빠는 태어나고 죽고 엄마도 두살때 죽고. 해서 다른 손에 크다가 다시 이탈리아전쟁에 이번엔 카를 군이 피렌체를 점령하면서 이 카트리나.가 성에 갖혀 꼬마가. 성을 에워싸서리 카트리나 꼬마 내놔라 다 돌려가면서 강간을 시키니 어쩌니 막막 구호나오고. 카트리나 가 여기저기 손에 자라다가. 교황이 델꼬오는겨. 이 교황이 클레멘스 7세 교황이야. 이 사람 아빠가 위대한 로렌초.의 동생이야. 즉 레오10세랑 사촌간이야. 카테리나가 역시 손녀뻘인겨. 

 

로마로 델꼬와서. 결혼상대를 찾아. 이때 프랑수아1세가 자기 둘째인 앙리.를 프로포즈한겨 먼저. 이때 장남이 있었어. 앙리가 킹이 될 줄 모른거야 프랑수아는. 

 

 When Francis I of France proposed his second son, Henry, Duke of Orléans, in early 1533, Clement jumped at the offer. Henry was a prize catch for Catherine, who despite her wealth was of common origin.[7]

 

 

둘이 1519년생 동갑이야. 14살때 약속하고 저 해에 결혼을 해. 클레멘스는 입이 찢어지고. 로마약탈 당할때 교황이 이 교황이야. 카를5세에 깨갱할때 프랑스 킹이 손을 내민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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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클레멘스7세는 다음해 죽어. 즉위하는 교황이 파울루스3세. 메디치랑 전혀 상관이 없어. 클레멘스가 다우리.를 교황과 메디치의 이름으로 후불로 주기로 했걸랑. 헌데 죽었어. 이 파울루스3세가 이 약속을 파기해. 

 

King Francis lamented, "The girl has come to me stark naked."

 

프랑수아가 그 걸 듣고는. 저 카테리나가 나를 완전히 발가벗겨 버렸네. 카테리나가 완전 빈손으로 와서리 장사 손해를 봤다는 건지. 당했다 라는 창피함인건지. 두 의미가 내포된 말이겠지.

 

 

그리곤 장남이 죽는거야. 18살에. 해서 프랑스의 앙리2세. 자리를 받는겨 얘가. 카테리나.가 퀸 후보가 된거고. 그리고 나서리 프랑수아 죽고 킹 퀸 이 된건데.

 

 

 

 

카테리나는. 저때 완전히 그지 걸랑. 프랑수아가 옛날 메디치 만 생각해서. 거기에 할배가 메디치의 교황 이라 둘째를 보낸건데. 완전한 착각인거지. 메디치는 이미 거지였걸랑 그 바닥은. 로렌초때 거지가 되었어. 

 

 

저기에 교황 할배도 죽고. 카트리나 꼬마때 피렌체의 영주는 같은 메디치. 이지만 족보가 달라. 진짜 메디치는 코시모 메디치.걸랑. 메디치 은행을 창립한 지오반니.의 장남이야. 여기서 손자 위대한 로렌초 형제와 그 핏줄들이 메디치 걸랑. 

 

저당시 피렌체 공작부터는. 저 초대 메디치의 작은 아들. 코시모의 동생 핏줄인거야. 카트리나 랑 핏줄이 멀어.

 

 

카테리나.는 빈손으로 프랑스의 퀸이 된거야. 눈치밥 먹는거야.

 

Diane de Poitiers (3 September 1499 – 25 April 1566)

 

프와티예.의 디안. 디안 드 프와티예. 이 디안. 이 앙리2세의 미스트리스. 애인이야. 나이가 20살이 많아. 아빠 프랑수아1세가 이탈리아 전쟁 후반적 시작할때 밀라노 쳐들어가다가 포로가 되서리 스페인에서 감금되다가 나올때 볼모로 지냈어 얘가. 나이 7살에. 이때 옆에 있던 여자야. 이여자가 평생 앙리2세의 진짜 애인이 된겨. 

헌데 그러면서도. 또한 이여자는 앙리를 카테리나에게 보내려 하고 좀 그만와라 앙탈 비슷. 하지만 카테리나가 갖고 싶던 성도 이여자에게 주고. 선물 주고. 해서리 카테리나가 좋아할 리가 없어. 하튼 카테리나는 그 속에서 살은겨. 그러면서 십년동안 애가 안생겨. 세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여자가 자식도 없어. 심각하게 이혼이 논의가 돼. 그러다가 의술 의 힘으로 애가 생겨. 의사.가 진단해보니 당시 앙리의 생식기가 약간 변형이 되서리 배출이 잘 안되는 구조인가봐 이걸 고치고 나서리 바로 애들을 생산하기 시작해. 이 이전엔 카테리나가 벼라별 한무당 질 오크 질을 해대고. 그러면서 낳은 자식들이 세 킹이 되는겨 프랑수아2세. 샤를 9세. 앙리 3세.

 

 

 

 

아 이런 얘기 하다가 은제 저거 하냐.

 

 

 

The French Renaissance traditionally extends from (roughly) the French invasion of Italy in 1494 during the reign of Charles VIII until the death of Henry IV in 1610.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침입으로 시작하는거야. 이전 썰. 샤를8세가 찔끔 갖고 오기 시작하다가. 프랑수아1세와 그 며느리 카테리나.가 흠뻑 뿌린거야. 저 중심엔 이탈리아에서온 카테리나.인거야. 카테리나.가 지금 프랑스를 만든거야.
궁정발레. 니 미술이니 음악이니 이런게 다 카테리나때에 더 들어서. 
저기에 저 맨 처음의 메디치의 카테리나가 가져온듯 하단 전설. 파슬리. 아티초크 양배추 브로콜리 콩 파스타 파르미자노 치즈. 터키 토마토. 이따위것들을 프랑스 코트에 들여오다. 포크. 도 이때 들어오다 프랑스에.

포크. 라는 건. 이전에 쓴게 아닌겨. 이 게르만 무시기들은. 이전엔 걍 나이프와 스푼만 쓴거야. 그러다가 카테리나가 포크 를 쓰는걸 보고 포크질을 한거다 등등의 전설. 그외 여러 쏘스 양념들 삶은 달걀 요리들. 지금 프랑스 미식가 놀이 하는게 저때부터 생긴겨.
헌데 다른의견. 카테리나가 갖고 온게 아니라. 프랑수아1세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온것이다 하민서리 카테리나.랑 분리하고픈 설. 

카테리나가 메디치의 핏줄이걸랑. 그 속에서 어린시절 보내고. 비록 많이 무너졌지만. 우르비노 도 역시 르네상스의 도시야 피렌체 접한. 거기에 교황 할배가 불러서리 로마에서 또 자랐걸랑. 

저런 카테리나.가 말야. 위그노 니 카톨릭 이니 . 관시미가 없어.
이탈리아의 카톨릭은. 알프스 넘어의 꼴통 카톨릭 놀이따위 그따위가 아냐. 그 정서가. 고대 로마야 그 신에 대한 마음은. 상관이 관심이 없어.

클레멘스7세 교황 죽고. 카테리나는 시집가고. 그 다음 파울루스3세 교황때부터. 소위 카운터 리포메이션을 카톨릭에서 하면서 이탈리아가 살벌해지기 시작하는거야.


이전의 프랑수아1세 도 관시미가 없어. 프로테스탄트 박해 안해 이사람은. 그러다가 말야. 역시나 저 앙부아즈 성. 침실 방문에 플래카드 붙으면서리 얘가 야마가 돈겨. 부데스 들의 메린놀 학살이 저 사건 지난 십년 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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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de Lorraine, duc de Guise (20 October 1496, Château de Condé-sur-Moselle, – 12 April 1550, Château de Joinville) was a French aristocrat and general. He became the first Duke of Guise in 1528.

 

기즈 공작. 기즈 가 북부 접경 쪽이야. 앙주의 르네.부터 시작인데. 그 장2세의 차남 루이 핏줄.해서 나폴리 조안나 이야기때 조안나 2세까지 죽고 나폴리 킹이 되는 앙주 르네.가 바로 옆 시칠리아 아라곤 전 약혼남에게 쫓겨 나가면서. 그 다음 이탈리아 전쟁이 터질때의 그 앙주 르네.야

 

이 르네 타이틀 중 하나가. 기즈 백작. 이야. 얘부터 시작해서리. 백년 후에 저 클로드.가 여기 공작.이 되는겨. 

 

이 클로드.는 원래 로렌 가문이야. 이사람이 프랑수아1세랑 코트에서 같이 자란겨. 일본들로 치면 굳이. 시동이야. 아 이건 좀 거시기한 비유고. 얘가 프랑수아1세의 캉브헤동맹 이탈리아 전쟁때 밀라노 북부 점령할때.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쪽은 이게 피크야. 이때 결정적 전투가 스위스 용병애들이랑 싸우는 마리야노 전투걸랑. 이걸 대승하고 부상을 심하게 당해서 회복하고. 하면서 프랑수아가 스페인 상대 전쟁하고 농민반란들 진압할때 이 클로드.가 다 해준겨. 

 

프랑수아.가 그래서. 그 상으로. 기즈.를 주면서. 공작.으로 승진을 시켜준겨. 

 

이 사람 딸이. 바로 기즈의 마리. 스콧 마리의 엄마야. 스콧 제임스5세의 부인.

 

 

 

그러면서말야. 기즈 가문이 프랑스의 실세가 되는겨. 일단 아버지의 후광이 쎄. 아빠는 프랑수아1세의 일등 공신이야. 스콧 마리가 프랑수아2세의 부인이 돼. 기즈가문이 스콧에서도 이때 실세로 등장하지만 프랑스는 더 한겨. 아빠 때메. 

 

Francis de Lorraine II, Prince of Joinville, Duke of Guise, Duke of Aumale (French: François de Lorraine, duc de Guise; 17 February 1519 – 24 February 1563)

 

기즈 마리.의 동생이 기즈 공작 프랑수아. 즉 클로드를 얘가 이어. 

 

기즈 공작 프랑수아 때 저 종교전쟁이 본격적으로 터진겨. 1562년. 이때 이사람이 죽어. 총에 맞아서. 
이 기즈 가문이 카톨릭의 중심이야 프랑스에서.

Henry I, Prince of Joinville, Duke of Guise, Count of Eu (31 December 1550 – 23 December 1588)

 

저 사람을 잇는 기즈 공작이 아들 기즈의 앙리.야 

 

 

 

The St. Bartholomew's Day massacre (French: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in 1572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프랑스어로 성 바텔레미.의 학살. 이걸 영어로 바르톨로뮤. 바르쏠로뮤 가 맞고. 바텔레미. 가 맞아. 
저때가 아주 결정적이야. 카테리나.가 초기에 나바르의 잔. 이랑 결혼으로 위그노랑 화해하면서 마무리 하려 했걸랑. 헌데 저 결혼식때에 저 사건이 터지면서. 프랑스는 아나키. 무정부상태가 돼. 저 사건의 결정적 이유는. 기즈의 앙리.가 자기 아부지 첫 전쟁서 위그노에 피살된 것에 대한 복수질이야.
얘가 소위 세앙리의 전쟁. 할때 그 일인이야. 잔의 아들 나바르 킹덤 나중 킹이 되는 부르봉의 앙리4세. 당시 프랑스 킹인 앙리3세. 그리고 저 기즈공작 프랑수아의 아들 앙리.

위그노는 십퍼도 안돼. 전체 인구의. 귀족 자체 세력도 없는겨 저건. 전쟁은 민들이 하는게 아냐. 노블들이 하는겨. 
저때 킹덤 코트는 힘이 전혀 없어. 일단 말야. 돈이 없어. 이탈리아 전쟁 하면서 허덕 허덕 한겨 프랑스 킹 코트는. 
종교전쟁 본격.은 앙리2세가 죽고 부터야. 더하여 프랑수아2세가 일년 갓 넘어 죽고 부터야. 공백이 생긴 그 틈에서 저인겨. 거기에. 기즈공작 저 아들의 욕심이야 자기 기즈가문이 킹이 되야겠다. 이 난장판을 활용해서.

엄마 카테리나.가 코트의 중심이야. 이 여잔 원래 기득 세력이 없는 여자야. 안타까운상황이야. 카테리나는 역시나 관시미가 없어. 싸우는거 싫어. 니들 사이좋게 좀 지내라 이 사이에서 낑긴겨. 헌데 힘이 없어. 일단 돈이 없어. 군사력이 없어. 노블들이 이때 기즈에 붙는거야.

저걸 끝낸건. 아무 힘이 없는 상태서. 폴란드 리투아니아 킹자리 받아서리 갔다가. 형 죽었다고 해서리 다시 돌아와서리 폴리는 벙찌고 ㅋㅋㅋ. 그 앙리3세가. 몰리고 몰린 상황에서. 얜 이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어. 킹 자리를 내 놓을 수 밖에 없던 상황이야. 사람을 구석탱이에 몰아도 숨쉴 공간을 줬어야 하걸랑. 승자인척 초대당한 저 기즈.의 앙리를 얘가 죽이는겨. 

그러면서 마무리가 되 저게.

그리고나서리. 나바르의 앙리 를 부르는겨. 아 얜 꼴통 프로테스탄트.가 아니구나. 이념에 목메는 가 아니구나. 를 확인해.

그러다가. 역시나. 기즈 죽은. 카톨릭이 복수하는겨. 암살 하는거지 앙리3세를. 긴히 드릴말 있슈. 이가 프라이어. 메디컨트 수도사 일껴. 애들 맨날 하나님 대민서 하튼 인간들 죽여. 이념에 환장하믄 인간들이 다 저리돼.

저 자리를 앙리4세가 받아.
.

헌데 말야. 앙리4세는. 위그노야 그래도. 대대로 핏줄이. 이걸 쉽게 못버려. 파리를 버릴 바에야 카톨릭으로 바꾸겠다. 라는 말이 쟤의 어록이냐 아니냐 도 논쟁이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실세는 말야. 또한 쟤들이 아냐.

스페인이야 스페인. 스페인의 필리프2세. 

Philip II (Spanish: Felipe II; 21 May 1527 – 13 September 1598) 

 

카를 5세가 죽는해가 1558년이야. 저때 이탈리아 전쟁. 그 지긋지긋한게 끝난겨. 프랑스의 앙리2세.가 마무리 도장을 찍어. 샤를8세 루이12세 프랑수아1세 앙리2세. 까지 온겨. 막시밀리안의 아들 카를5세. 

저 도장은 그래서. 앙리2세 와 카를 아들인 필리프. 아니 펠리페2세 랑 악수하는겨. 아부지가 죽었걸랑. 글고 저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보다는 스페인이 더 발담궜다 하는거지. 

이탈리아 전쟁의 끝이. 저걸 기념하는 연회에서. 자우스팅 말타기 막대질 하면서 앙리2세가 죽으면서 진짜 끝난겨. 카를 5세 죽고. 프랑스 앙리2세 죽고. 카를의 인생은 그 자체가 이탈리아전쟁이야.


그리고서리 바로 시작한게 프랑스 종교전쟁인거야. 위그노들이 저 어린 프랑수아2세를 납치를 하려해. 미친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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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펠리페2세.가 대륙의 카톨릭의 수호자가 되는겨 얘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6세가 죽으면서 마리가 올라갈 수 있는 힘도. 그 뒷배는 이 펠리페 2세.야. 둘이 결혼을 해. 아 헌데 자식을 못나고 마리는 오년하다가 죽어. 엘리자베쓰가 펠리페의 적이 되는겨. 이건 이념이야. 그 바닥은. 

 

스콧 마리가 사형다하는 해가 1587년이야. 펠리페2세가 분노하는겨. 스콧 마리는 카톨릭의 상징이야 이사람 입장에선. 프로테스탄트 잉글랜드들이 감히 여왕 까지 죽이다니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 왕을. 1588년 스페인 아르마다. 라는 잉글랜드 침략 해전 은 이 스콧 마리의 죽음이 큰거야. 

 

 

프랑스의 카톨릭의 기즈 의 뒷배가 역시나 이 펠리페2세야. 얘가 돈과 병력을 대주는겨. 니덜이 꼭 카톨릭을 지켜라. 돈 없는 상황에서 얘가 프랑스의 카톨릭에 돈을 대는겨. 

 

저기에 더하여 프랑스의 카톨릭이 분노를 역시 해. 스콧의 마리가 죽었어. 이때가 세앙리의 전쟁이고 그리고서리 기즈 앙리가 암살되고. 파리의 카톨릭 인간들이 더 미치는겨. 

 

 

저 스콧 마리.의 죽음이 그래서 역사적으로 단순한게 아냐.

 

펠리페2세.가 죽는 해가 1598년 이야. 저해가 프랑스 종교전쟁 끝나는 해야. 36년의.

 

 

앙리4세가 카톨릭으로 전향했지만. 못믿겟단거야 카톨릭 진영은. 위그노들은 더 화가 났어. 저거 스페인 펠리페의 퍼핏. 애완견이야. 얘도 이상황서 힘이 없어. 얜 위그노를 더 밀고 파도. 못해. 그 뒤의 저 펠리페 2세의 힘이 느껴졌어 또한. 그래서 바꾼겨 카톨릭으로. 헌데 상황이 나아지지가 않아.

 

펠리페2세 입장에선 얜 위그노야. 그 바닥은. 얘가 계속 뒤에서 서포팅하는겨 카톨릭 애들을. 곳곳서 들고 일어나. 이걸 보다 못해서. 앙리4세가 전쟁 선언을 하는거야. 위그노에겐. 나 펠리페의 애완견 아냐. 카톨릭에겐 애국심에 호소를 하는거고. 

 

펠리페는 여기서 칼레. 도버해협의 그 칼레. 백년전쟁때 잉글랜드가 유일하게 하나 건진 곳. 그러다 겨우 몇십년전에 프랑스에 넘어온걸. 이때 펠리페가 뺏아. 곧 돌려주지만. 이 칼레는 뺏겼지만. 아미엥에서 이겨. 그러면서 저게 끝나는겨 1598년에. 그리고 펠리페2세가 죽어.

 

 

 

카를5세 죽음으로 이탈리아 전쟁이 끝나는거고

 

펠리페2세 죽음과 함께 프랑스 종교전쟁이 끝나.

 

 

하튼 큰 흐름은 걍 저런건줄 알어. 이 무시기 빠나나덜아. 

 

 

Entrance of Henry IV in Paris, 22 March 1594, with 1,500 cuirassiers.

 

 

 

 

Departure of Spanish troops from Paris, 22 March 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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