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가 만든거야. 재생산한거야 고대 그리스로마를.

 

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알프스를 넘어서 잉글랜드 섬과 북유럽까지 가면서.

 

 

리포메이션.을 만든거야.

 

 

 

이탈리아.는 저 리포메이션에 대항한. 카운터 리포메이션.을 하는거고.

 

 

이 흐름이 참 재밌는거야 그래서.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를 만들었지 리포메이션.까지는 가지를 못한거야. 저걸 받아서 자기들만의 카운터 리포메이션을 한거지만. 이건 오히려 르네상스 보다 더 못한거야. 더 후퇴를 한거야. 그래서 이탈리아는 저기서 역사가 지지부진한겨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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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더 정리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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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estantism in France has existed in its various forms starting with Calvinists and Lutherans since the Protestant ReformationJohn Calvin was a Frenchman, as well as numerous other Protestant Reformers including William FarelPierre Viret and Theodore Beza, who was Calvin's successor in GenevaPeter Waldo (Pierre Vaudes/de Vaux) was a merchant from Lyons, who founded a pre-Protestant group, the WaldensiansMartin Bucer was born a German in Alsace, which historically belonged to the Holy Roman Empire, but now belongs to France.

 

프랑스.는 루터 다음세대 칼뱅의 위그노. 그리고 이전에 루터애들이 들어왔어. 그 이전엔 발도파 가 있었어 훨 이전에. 여기에 카타르파가 또한 있었어. 이미 3백년 전에. 

 

The Waldensians (also known variously as Waldenses (/wɔːlˈdɛnszwɒl-/), VallensesValdesi or Vaudois) were an ascetic movement within Christianity, founded by Peter Waldo in Lyon around 1173.

 

왈데니지언. 왈도파. 하는데. 이건 영어야. 피터 왈도. 

Vaudès, généralement connu sous le nom de Pierre Valdo ou Valdès, est un marchand de Lyon et prédicateur de l'évangile né en 1140 et mort en 12171.

 

프랑스어로. 부데스. 피에르 발두. 또는 발데스. 리옹의 상인 출신이야. 발데지. 부드와. 로 부르는게 맞아. 부데스.를 따르는 사람들. 발데스를 좇는 이들.

 

 

In 1211 more than 80 Waldensians were burned as heretics at Strasbourg; this action launched several centuries of persecution that nearly destroyed the movement

 

이 부데스.들은 서기 1211년에 80명이 화형을 당해. 스트라스부르. 알사스야. 이단으로. 그이후 계속 몰래 있는거야. 삼백년 이상. 부데스.의 리옹.은 고대 로마때 알프스 넘어서 도착하는 길이야. 이 리옹이 프랑스 갈리아땅으로 퍼지는 길. 로드의 중심이야. 

 

이 부데스.들이 프로방스 등 남쪽에 주로 있는겨 저 이후. 

 

The Massacre of Mérindol took place in 1545, when Francis I of Franceordered the Waldensians of the city of Mérindol to be punished for dissident religious activities. Provençal and Papal soldiers killed hundreds or even thousands of Waldensian villagers.

 

메린돌 학살. 메린돌.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도시야. 1545년. 프랑수아 1세때. 여기에 부데스 들이 있었어. 루터바람이 불면서 다시 부데스.들이 일어나. 루터들이랑 합세하고. 무장을 해. 수도원도 공격을 해. 

 

이들을 진압하는겨

 

These soldiers took the villages of Mérindol and Cabrières and also devastated neighbouring Waldensian villages.[1]Historians have estimated that the soldiers killed hundreds to thousands of people. They captured survivors and sent hundreds of men to forced labour in the French galleys. In total, they destroyed between 22 and 28 villages.[3][4] The execution of one young man, a servant, might well have been the first example of execution by firing squad in Europe for causes of ideology.[5]

 

수백에서 수천사람들을 죽이다. 생존자를 체포하고 수백의 남자들을 겔리선 노역을 시키다. 마을들 22게에서 28개를 파괴했다. 유럽에서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한 젊은 남자를 총살로 사형시키는 첫번째 사례. 

 

 

프랑스의 종교전쟁.은 이게 시작이야. 진짜 시작은.

 

먼저 저 부데스.들이 일어나면서 전쟁아닌 전쟁을 한거야. 

 

 

 

Massacre of the Waldensians of Mérindol in 1545 as imagined by Gustave Dore (1832-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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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시선을 돌려서. 다시 성경을 게르만어로 번역한게 언제냐를 보면 각각. 이전에 더해서.

 

Translations of individual books of the Bible and verse adaptations survive from the twelfth century, but the first prose Bible collections date from the mid thirteenth. These include the Acre Bible, an Old Testament produced in the Kingdom of Jerusalem, likely for King Louis IX of France,[22] the Anglo-Norman Bible and a glossed, complete translation of the Paris Bible known simply as the “Thirteenth-Century Bible” or “Old French Bible,” often referred to by the French title “Bible du XIIIe siècle” first coined by Samuel Berger.[23][24][25]

Completed with prologues in 1297 by Guyart des Moulins, the Bible historiale was by far the predominant medieval translation of the Bible into French throughout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 It translates from the Latin Vulgate significant portions from the Bible accompanied by selections from the Historia Scholastica by Peter Comestor (d. ca. 1178), a literal-historical commentary that summarizes and interprets episodes from the historical books of the Bible and situates them chronologically with respect to events from pagan history and mythology. In many copies, Guyart’s translation has been supplemented with some individual biblical books from the ‘’Bible du XIIIe siècle’’.[26]

 

프랑스.는 자기들의 게르만어인 프렌치.로 번역을 한게 13세기야. 저때 스페인에선 비슷한 시기에 아라곤에서 카탈란 성경이 또한 나와. 저 카탈란 성경은 전체 번역한 듯 보이는데 확실치는 않고. 대게들 일부를 번역한거거나 미사용으로 쓴거걸랑. 

 

After a number of French Bible translations in the Middle Ages, the first printed translation of the Bible into French was the work of the French theologian Jacques Lefèvre d'Étaples in 1530 in Antwerp, Belgium. This was substantially revised and improved in 1535 by Pierre Robert Olivétan

 

그러다 제대로 된 불어 성경은 1530년.에 자크 레페브르.가 안트베르펜.에서 내는거고. 이 전에도 나름 성경들이 자기들 언어로 부분부분 있었던거야.

 

 Altogether there are 13 medieval German translations before the Luther Bible.[2

 

독일땅에는 루터 이전에 13개의 게르만 번역 성경들이 있었다.

 

There are a number of partial Old English Bible translations (from the Latin) surviving, including the Old English HexateuchWessex Gospels and the Book of Psalms, partly in prose and partly in a different verse version. 

 

잉글랜드 영어라는 게르만들의 성경은. 헥사투크(여섯 책) 웨섹스 가스펠. 헥사투크는 서기 천년 이전. 웨섹스 가스펠은 11세기. 하튼 오래전부터 자기들 언어로 된 성경이 있었어. 존 위클리프 이전에도. 그러면서도 자기들끼리 라틴어.로 다시 번역을 해서 돌려 본거야.

 

저들이 쌓이고 쌓여서 각 지에서 리포메이션.을 한것일 뿐이야. 프랑스는 루터파가 이입되면서 더 불을 질른거고. 

 

일단 바닥은. 자기들만의 언어로 된 성경 번역이 되어있었던거야. 잉글랜드는 5백년 전에. 프랑스는 3백년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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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LutherO.S.A. (/ˈlθər/;[1] 

German: 

[ˈmaɐ̯tiːn ˈlʊtɐ]; 10 November 1483[2] – 18 February 1546)

John Calvin (/ˈkælvɪn/;[1] FrenchJean Calvin 

[ʒɑ̃ kalvɛ̃];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 27 May 1564) 

 

장 칼뱅. 은  아빠가 교회에 법관련 행정직이야. 엄마가 여관집주인 딸이야. 귀족이 아냐. 루터보다 26살 아래. 얜 나이 20전후에 생각이 나름 트였어. 이게 1530년 전후. 이때 프로테스탄트로 바뀐듯 해 일기형식의 글을 보면. 

 

n 1525 or 1526, Gérard withdrew his son from the Collège de Montaigu and enrolled him in the University of Orléans to study law. According to contemporary biographers Theodore Beza and Nicolas Colladon, Gérard believed that Calvin would earn more money as a lawyer than as a priest.[7] After a few years of quiet study, Calvin entered the University of Bourges in 1529

 

아빠가. 얘를 몽테규 칼리지.에서 철학 배우는애를. 오를레앙 대학으로 등록시켜. 아빠는 족보가 없어. 얠 공부시켜서 법관시켜서리 집안 일으키고 싶은거야. 즉 투자를 한겨 아빠가. 루터 아빠는 광산임대업으로 나름 돈번거고 똑같이 루터 법관시키고 싶었다가 번개 한방때메 낙담한거고. 칼뱅아빠는 걍 허섭한 교회 사무직이야. 오를레앙 대학에 부르주 대학에도 보내. 얘가 저리 공부하다가 인문주의에 찐하게 빠지면서, 성경의 다른 뜻들이 스미면서. 진짜 존 칼뱅이 되기 시작한거야 나이 20에. 번개 한방 없이 얜 그냥 대학서 교수한테 배우면서 책읽다가 자각을 한겨. 

 

 

그리고 루터를 처음엔 찐하게 배운겨. 그러다가. 루터가 츠빙글리랑 만나걸랑 유카리스트.로 빵 포도주가 살피냐 아니냐로 논쟁한걸 나중에 확인하고. 그러면서 루터파가 저 유카리스트를 지지하는걸 루터에 등을 돌려 루터 하면서. 

 

 During this time, tensions rose at the Collège Royal (later to become the Collège de France) between the humanists/reformers and the conservative senior faculty members. One of the reformers, Nicolas Cop, was rector of the university. On 1 November 1533 he devoted his inaugural address to the need for reform and renewal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대학 두개 나오고. 얜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라이센스를 받아. 어디 대학가서 선생을 하면 돼. 또는 로이어를 하던가. 헌데 돌아다닌거야. 태어난곳이 피카드리.야 저 저지대 접경이야. 타고난 바람도 있어. 그러다가 삼년 즘 후에 파리로 돌아와. 콜르드 로얄. 이 왕실이 운영하는 브레인 집합소야 저기가. 저기서도 한창 종교 논쟁을 한거야 그시절.  저때가 프랑수아1세 일때야. 

 

니콜라스 콥.이 카톨릭 개혁하자고 취임연설을 한거야. 저것도 달리보면. 저 왕실 가운데에서 말야. 저런 취임사를 할 분위기가 된겨. 저런 인간을 렉터로 뽑는 상황도 된거야 프랑스가. 

 

 

저때 프랑스 상황을 보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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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게르만이 먹은거지만. 그 바닥은 갈리아 켈트야. 갈리아인들이 로마 카이사르 이후로 로마화 된 사람들이야 게르만 점령 4백년 전에. 프로방스는 훨 이전에 로마화가 된거고. 여긴 그래서 상대적으로 독일땅 보다 사람들이 유한겨. 부드러워. 열렸어. 해서 그 언어도 콧소리가 맹맹한겨 얘들 웃긴 애들인데. 공상과 현실 사이의 인간들이 이 프랑스인간들이걸랑.

 

여긴 상대적으로 안 깝깝해. 신성로마는 게르만에 슬라브가 섞인겨 저기가. 갈리아땅보다 뭔가 딱딱하고 깝깝한곳이야. 말도 쎄 그래서 독일어가. 날카로와. 저긴 숲속의 땅이야. 마르크스 따위 도 티나오는.

 

샤를8세부터 이탈리아를 쳐들어가지만. 그래서 저길 드나들면서 이탈리아에 흠뻑 빠져. 프랑수아가 그래서 미켈란젤로에 환장 했던거야. 그러면서 자기 코트에 또한 이탈리아를 심는겨. 얘들은 깝깝한 카톨릭이 아냐 더이상은. 십자군 레반트 2백년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현실감을 익혀 얘들이 또한. 재밌는 곳이야 여기가.

 

 

장 칼뱅 어쩌고 티나오면서 리포메이션이 된게 아냐. 이미 인문주의에 쩔고 쩔었어 분위기가. 저기 왕실 대학에서도 저따위 인간들이 나온겨. 장칼뱅이 배운 오를레앙 대학 부르주 대학 의 교수들이 인문주의자들이야. 여기서 깨달은거야 칼뱅은. 파리대학은 더해. 

 

헌데 저때 분위기가. 옆의 신성로마땅이걸랑. 저기서 기사들의 반란에 농민들이 카톨릭을 비난하면서 전쟁을 했어. 그 아래 스위스도 츠빙글리가 주축이되서리 전쟁들 하고 죽어 츠빙글리는. 프랑스 왕정이 여기에 주춤 할 수 밖에 없어. 더하여. 이탈리아 전쟁 중이야 얘들은 여전히. 전반전 끝난 상황이야. 그리고 프랑수아1세는 밀라노 다시 찾으러 갔다가 카를5세에게 포로가 되서리 마드리드에서 자기 자식들 볼모로 두고 석방된게 1526년이야. 그리고 나서리 반 카를5세 동맹인 코냑동맹을 전부 맺어서리 다시 이탈리아 전쟁을 하는겨. 여기서 교황가 클레멘스 7세. 지가 주도하고서는 정작 자기가 배신을 해. 베네치아가 비참하게 당하고 돌아서고. 프랑수아도 그냥 돌아가고. 로마는 약탈을 당해. 

 

 

프랑스 왕정에서 카톨릭에 힘을 줘야만 하는 상황이야. 이탈리아에서 빈손으로 돌아온겨. 이탈리아는 카를땅이 된거야. 40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한 짓이 빈손인겨. 킹이 포로도 되고. 나폴리는 날라가뻐리고 밀라노는 둘째치고. 

 

장 칼뱅이. 저 때에. 프로테스탄트가 되어서리. 나이 20에. 그리고 나서리. 저 상황의 파리.에서 니콜라스 콥.의 취임연설을 듣는거야. 저때부터 카톨릭이 목소리를 쎄게 내면서. 프로테스탄트는 도망을 가는거고. 여기에 장 칼뱅이 끼는겨. 얜 걍 구경꾼이야 이땐. 그러면서 같이 섞여 다니다가 책도 내고. 저들 이야기 도와주다가. 얘를 눈여겨 본 애가 얘를 초이스 해서리. 제네바로 델꼬 간거야. 거의 협박 수준으로.

 

William Farel (1489 – 13 September 1565), Guilhem Farel or Guillaume Farel (

French: 

[gijom faʁɛl]), was a French evangelist, Protestant reformerand a founder of the Reformed Church in the Principality of Neuchâtel, in the Republic of Geneva, and in Switzerland in the Canton of Bern and the (then occupied by Bern) Canton of Vaud

 

이사람이 불어. 기욤 파렐. 윌리엄 파렐. 이야. 스무살 많아 칼뱅보다.

 

 

칼뱅. 은 대머리.란 불어의 줄임말. 집안이 대머리였는지 먼지는 몰라. 

 

 

The surname Calvin or Cauvin is in origin a diminutive of French chauve (Picard calve, from Latin calvus) meaning "bal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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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파렐. 츠빙글리랑 함께 취리히에 같이 있던 인간이야. 츠빙글리가 전투에서 죽고서리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가 세력이 죽은겨. 그러다가 잠시  제네바.온 칼뱅을 반협박조로 잡아놔.

 

The Affair of the Placards (French: Affaire des Placards) was an incident in which anti-Catholic posters appeared in public places in Paris and in four major provincial cities: Blois, Rouen, Tours and Orléans, overnight during 17 October 1534. One was actually posted on the bedchamber door of King Francis I at Amboise, an affront and an alarming breach of security that left him shaken. 

 

칼뱅이. 구경꾼으로 콥 애들이랑 떠돌면서 바젤도 가고 하다가. 플래카드 사건. 대자보 사건이 터져. 1534년 시월. 프랑스 주요 도시들 공공장소에. 카톨릭 개개끼 반그리스도 어쩌고 하며 쎈 글이 막 붙었는데. 문제는 말야. 프랑수아 1세의 침실방문에도 하나가 붙은겨. 

 

내용은 둘째치고. 대체 보안문제가 발생하면서. 이노믜 프로테스탄트들이 어디까지 스민거고 어드래 이 침대방까지 왔느냐는거에 당근 노발대발할 수가밖에 없어. 애들이 걍 우리들 죽여주쇼 그래서 열사로 만들어주쇼 하는겨 저건. 프랑수아.는 관시미가 없어 인문주의자야. 프로테스탄트도 잘챙겨준 인간이야. 저 사건에 야마가 빡 돈거야. 

 

직전에는 노블층에서 프랑스 걱정으로 카톨릭으로 뭉치기 시작했다가. 킹 까지 본격적으로 돌아선거야. 저때 칼뱅이름이 오르고 진짜 도망자가 된거야 얘가.

 

얘가 이때 도망다니다가. 캐스팅이 된겨. 저 기욤 파렐.에게. 스무살 많은.

 

Then Farel, who was working with incredible zeal to promote the gospel, bent all his efforts to keep me in the city. And when he realized that I was determined to study in privacy in some obscure place, and saw that he gained nothing by entreaty, he descended to cursing, and said that God would surely curse my peace if I held back from giving help at a time of such great need.[18] Terrified by his words, and conscious of my own timidity and cowardice, I gave up my journey and attempted to apply whatever gift I had in defense of my faith.[19]

 

파렐. 복음 전도를 미치게 하는 또라이 같다. 온갖 로 나를 그 도시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나는 단지 어디 조용한 곳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고 결심한걸 그가 눈치채고는,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다는걸 알고는, 이 파렐가 갑자기 욕 저주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서리 파렐님께서 도움을 주셨는데 그걸 받지 않고 조용히만 살겠다는 날 보면 신이 백퍼 저주할거라 하민서리. 아 그 말들이 무서웠다 글고 소심하고 겁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저가 저러다 날 죽이는거 아니까 하미) 나는 내 여정을 포기하고 그가 해달라는 데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칼뱅.이 도망다니다가. 스트라스부흐. 알사스로 갈라했다가 거기도 신성로마땅에서리 프로테스탄트 막 뮌스터 반란 터지고 안좋아서리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네바에서 하루만 자고 갈려다가 쟤한테 잡힌거야. 그리곤 결국 저기서 장 칼뱅.이라는 이름을 남기게 되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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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파렐이 있는 바젤 캔톤. 보 캔톤. 이 프로테스탄트 들어오면서리. 마녀사냥 이들이 조오온나게 하민서리 역시 사람들 조오오온나게 죽이는겨. 스위스에서 제일 많은 프로테스탄트 마녀사냥질이 저기 보 캔톤이고 바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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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하자.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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