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종교전쟁 

 

March 1562 – April 1598 (36 years and 1 month)

 

이 전후의 주변정세를 정리해보면. 

 

바다건너 브리튼은. 이미 헨리8세 죽고. 에드워드 6세에서 캐서린딸 마리. 가 11년 간이야. 6년 5년 각각 한겨. 마리가 카톨릭을 복원하고. 암으로 죽어. 엘리자베스가 25세인 1558년에 오르고 프로테스탄트 다시 올리고. 스콧의 마리는 3년 후인 나이 19세에 프랑스에서 스콧으로 와. 엘리자베스가 9살 많은 사촌 언니야. 저 브리튼은 프로테스탄트 세상이 된겨. 

 

 

신성로마제국 오른쪽은 루터 이전에 분트슈흐 운동이란 이름으로 스와비아와 라인강 상류에서 20년 이상 농민반란이 있었어. 이후 바로 루터 대자보야 1517년. 그리고 기사들의 반란. 농민전쟁. 슈파이어 회의 1526 루터파 인정한듯 하다가 다시 1529년 루터 금지. 다음해 1530 아우구스부르크 컨페션 그 채플에서 크리스티안 바이어가 두시간을 크게 읽는 일. 그리고 카를과 교황청의 요구에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의 동맹 슈말칼덴 동맹을 맺고 15년 후에 슈말칼덴 전쟁을 해. 1547. 카톨릭이 이겨. 그리고서리 다시 아우구스부르크 협약.을 맺어 1555.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 영주의 종교에 따라 영지의 종교를 갖아. 인정하는겨 이 선에서. 

 

왜냐믄 무엇보다도. 동쪽에 오스만이 계속 쳐들어오걸랑. 

 

The Battle of Mohács (

Hungarian: 

[ˈmohaːt͡ʃ]HungarianMohácsi csata, Turkish: Mohaç Meydan Muharebesi) was one of the most consequential battles in Central European history. It was fought on 29 August 1526 near MohácsKingdom of Hungary

 

모하츠 전투.가 1526년이야. 헝가리가 정가운데에 위가 부다페스트고. 아래가 모하츠.야 여기서 헝가리 킹 루이2세가 죽어. 마티아스 죽고 자리차지한 야기에워의 브와디스와프의 아들.. 막시밀리언이 저 야기에워의 남매 죽은 루이2세랑 안나.를 아들 필리프1세의 마리와 페르디난도와 합동결혼 시킨거걸랑. 마티아스가 뺏은 비엔나 받으면서. 헝가리가 저때 죽은건데 멍청한 들. 그 죽은 루이2세의 누나인 보헤미아의 안나.의 신랑인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도. 카를5세의 동생이야. 이때부터 350년 간. 19세기 까지 합스부르크 아래 있었던거야. 지들이 자초한겨 저건. 마티아스.의 저주야. 저기서 합스부르크를 더 품어서 넓은 세상으로 간게 아니라. 합스부르크 아래서 기대고 산 거야. 저게 지금 헝가리야. 저건 백퍼 헝가리 노블 들 탓이야. 노블이 그 땅바닥의 상징이야. 그게 그 바닥 민심의 수준이고. 게오르게 도자 의  반란 처리는 그야말로 야만이야. 마티아스 다음의 야기에워네 시절이야 그게. 거기에 사람들이 돌아서서 오스만 편을 들고 저 야기에워의 루이가 모하츠에서 죽은겨.

 

저게 이땅바닥 임진란 때 의 모습과 똑같애. 임란때 조선 민들이 오히려 가이드를 해 한양 길까지. 초기에 일본들은 걍 계속 온겨 걸리적거릴것도 없어. 히데요시가 병참 챙기고 마을 불지르는짓 말고 한양 통과해서리 명나라 직진만 하라그랬걸랑. 조선 민들이 이 조선왕조에 부들부들 하는 인간들이 저때도 많은겨. 선조가 밤에 도망가. 이 튀는 길까지 일본한테 알려줘 선조 이길로 튐. 

 

 

아 저때 말야. 명나라 만력제 가 개개끼걸랑. 저때 조선왕조를 엎었어야해. 헌데 이순신도 유교이념에 쩔고 쩔은 인간이야. 못엎어. 이것도 난중일기 보믄. 시간만 되믄 산에 쳐 올라가서 님이 계신 땅을 위해 절을 합니당 우리 군주 태양 잘 계시야 할틴데.

 

 

이 만력제가 조선을 살려. 저때 조선에 흉년이 들어. 그럴 수 밖에. 얘가 식량공급을 해줘. 이가 뜬굼없이. 계속 방구석만 처박혀있다가 어느날 티나와서리 조선을 도와야해 하는겨. 이때 뜬굼없이 이가 또 하는 짓이 그래서 이탁오 를 쳐넣는겨. 이탁오가 얘때 조옥 지하감옥에서 목을 거 칼로. 

 

선조 입장에선. 얘가 은인이야. 선조앤 그럴 수 밖에 없어. 만력제가 군이며 쌀이며 조선을 살린겨 얘가.

 

 

선조가 한편으론 이해가 가. 얘 입장에선 말야. 대신 대간들이 개 야. 얘도 정통성이 없어. 먼 방계 핏줄이걸랑. 거기다 막내야. 헌데 말야. 왕자리 오르면 보는 시각이 달라 더 위에서 보여. 헌데 애들이 맨날 저 소인배요 저 적폐요 이 하는거야. 그게 가운데 입장에서는 개소리라는게 보여. 증거있냐? 아 조선 팔도 가 다 알아유. 

 

얘 이황 싫어해 이이 싫어해. 이황에겐 좀 있어달라. 하믄 아 난 재야에 은퇴할껴 라는게 먼 협박도 아니고. 매번 좋은 소리 발린 소리 하민서리. 그럼 니가 자리 차지해서 해봐 하면 또 아 몸이 안좋아서유. 헌데 말이쥬 어쩌고저쩌고. 
그걸 옆에서 이름이 누구냐 기억이 안나는데. 야 이황 저 또 자리 은퇴 빙자해서 한몫잡고 가는구나. 
쟤 재산이 얼마냐 이황이. 

머 개혁 성인군주 하믄 니가 좀 자리 앉아서 해보던가. 그것도 아니고 이빨만 살아서리 왕이 몸소 군자가 되믄 다 돌아가게 되어있는데 니가 문제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서 신은 아무 욕심 없슴둥 자리에. 이 해대고.

이이.도 똑같아. 이들은 자리에 욕심없다는게 먼 대단한 정의질인양 청렴질인양. 그럼 니가 해보던가. 아 저는 그런 소인배의 욕심은 없슴둥.

하면서리 서로들 서인 동인에 서로서로 소인배 개개끼 하는겨. 얘가 실록 보면 거기서 그래. 그 이유가 말이 되니 그게. 그거 증거 있니? 역모라면 증거가 머냐. 

없어 없어. 걍 맨날. 간언질이 무슨 대단한 선비질인 마냥. 간언이 충성충인 마냥.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매번 조정서 하는 짓들은 상대는 적폐유. 누구가 적폐유.
선조 시선에서 보면. 선조의 한숨 소리가 조온나게 느껴 져 저걸보면.


공신록은 먼 얼어죽을 공신록. 걍 지 옆에서 시종든 마꾼이나 의사들이랑 내시들 주는겨 상을. 걍 대신대간들은 적폐놀이만 해대는. 거기에 그래도 저 만력제 는 병력이랑 쌀은 주지. 당연히 얘 입장에선. 명나라가 자기를 구해준겨. 
대신 대간 들이 관리해댔던 호적에 병력 데이타는 다 개거짓말 들이었고. 그걸 저 정통성 하나 없는 선조 만 탓할 것도 안돼.

저따위 대신 대간 들의 오백년 정치였어 저 조선왕조 오백년이.




저걸 들. 지금 역사시간에. 또는 미디어에서 연일 민주의 이름으로 도배를 하는게 대신 대간의 민주정치. 이 하는겨. 그래서 위대하다는겨 조선왕조 오백년이.


개미친 들이 없어 이땅바닥에 사학자들이 이게. 더하여 저 정의놀이 하는 지식인자연하는들 말이지.

하는게 없어 하는게. 가만히 있어라 여 저게. 그러면서 적폐들의 구호였다는겨 저 가만히 있어라가. 

천하의 개 들이 저 조선왕조 오백년의 대신대간들이었어.

저을 임란이후에도 또옥 같이 해. 이젠 머 벼라별 여자 상복 입는 걸로 싸워. 저건 권력질 이전에. 그게 정말 쟤들은 중요한겨. 상복을 1년입냐 3년 입냐. 그리고 또 9개월 입냐 일년 입냐. 우리 공자님 우리 주자님이 말씀하신게 이게 진짜다. 얘들은 진짜 놀이 리앨리티 놀이를 이딴 을 이딴 주제를 잡고서리 하는겨 그것도 조정에서 . 


헌데 저따위것도 말야. 아 음청난 예송논쟁. 아 음청난 권력투쟁. 이 개 해석을 하면서 애들에게 갈키는겨. 예의란게 저렇게 중요한겁니다.

저게 이땅바닥에서. 일본 대비 위대했던 조선왕조시여. 하는겨. 


세상에 저딴 개 들도 없어. 과거나 현재나.

쟤들이 저 미디어를 잡으면서. 저 기서 또 열광질 하는거고 지금. 저게 지금 조선시대야 지금 저게. 

.아 왜 이딴 하는겨. 조선 이란 두 글자만 나오면. 분뇨가 입구멍르로 치밀어올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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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바닥 페미가 쓰레긴겨 그래서. 저 개같은 년들이. 이것들이 선비놀이를 하는거야 저게. 이젠 하다하다 년 들이 선비질을 해요.

토지. 라는 소설과 혼불 이라는 소설이 그게 웃긴겨.

저게 머냐면 말야. 조선시대에 대한 향수.를. 그 마음이 말야. 일본에 대한 방어막을. 차마 조선의 남자를 갖고 갈 수 가 없어. 쪽팔리거든. 저들이 어쨋거나 후지게 살아서 조선이 망한거걸랑.
그걸 잇는걸. 여자.로 대체 하는거야.
경상도 에선 최참판댁 서희. 전라도 에서는 매안 마을 양반촌 총암부인과 효원.


이제 조선의 선비.는 여자가 맥을 이어주마 하는겨. ㅋㅋㅋ.

 

 

이땅바닥 여자들이. 저 유교라는 이념에 얼마나 치였고 얼마나 노예적으로 살아왔나 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겨. 저 이념이란건 엄청나 저 유교라는건 특히나.

 

 

자기들 오백년을 더 죽여온 그 사유.를 몸뚱아리만 바꿔서 잇는겨 저걸.

 

 

해서 저것들이 멍충인지 무슨충 하민서리 예의 따지고. 또한 풍문 상소야. 누가 그러더라 하민서리 실명 밝히고 그게 진짜예요 하면서리 인민재판 하고. 해서 당사자 자살하는게

 

 

저게 아주 똑같은 프레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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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가고. 

 

 

 

오스만이 올라와.

 

 

모하츠 전투 이야기하다가 게오르게 도자 이야기에 저 선조때로 얽혔는데.

 

The Hungarian campaign of 1527–1528 was launched by Ferdinand I, Archduke of Austria and King of Hungary and Bohemia against the Ottoman Turks.

 

Suleiman I's campaign of 1529 was launched by the Ottoman Empire to take the Austrian capital Vienna and thereby strike a decisive blow, allowing the Ottomans to consolidate their hold on Hungary. This was in response to Ferdinand I's daring assault on Ottoman Hungary.

 

그 다음해에 페르디난도1세.가 얘가 카를5세 동생이야. 바로 헝가리 크로아티아 킹에 올라. 그러면서 또한 내전을 해 구 헝가리 귀족애랑 왕권으로. 그러면서리. 오스만이 모하츠 위로 치고 들어온걸 막는 전쟁을 하는겨 모하츠 전투 다음해부터. 

 

그 다음해 술레이만1세가 다시 처들어가서리 랍. 카마롬. 부다. 완전히 헝가리 북부야. 헝가리땅을 대부분 먹은겨.

 

The Siege of Vienna in 1529 was the first attempt by the Ottoman Empire, led by Suleiman the Magnificent, to capture the city of Vienna, Austria.

 

그리곤 바로 왼쪽 위 비엔나.로 쳐들어가는겨. 1529년. 

 

The Battle of Vienna (GermanSchlacht am Kahlen Berge or KahlenbergPolishbitwa pod Wiedniem or odsiecz wiedeńska(The Relief of Vienna); Modern Turkishİkinci Viyana KuşatmasıOttoman TurkishBeç Ḳalʿası Muḥāṣarası) took place at Kahlenberg Mountain near Vienna on 12 September1683[1] after the imperial city had been besieged by the Ottoman Empire for two months.

 

비엔나 전투 1683년. 이때에야 비엔나에서 철수하는겨. 처음 1529년.에서 150년 간 저기를 치러간겨. 150년 만에야 결정적으로 오스만이 패배해서 포기하고 물러서면서 오스만은 끝의시작을 가는거야.

 

 

이때는. 즉 모하츠 전투부터 비엔나 포위 1529까지. 얘 형 카를.은 독일 농민전쟁 끝나고 아래 이탈리아 전쟁 하면서 베네치아 프랑스 다 돌아서고 로마 약탈하고 이탈리아를 전부 먹을 때야. 

 

 

오스만은 저 술레이만1세의 비엔나 포위에서 물러나면서. 그다음 부터는 다시 레반트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이란의 사파비랑 싸우는겨. 그리고 비엔나쪽 대륙은 주춤한 상태에서 이탈리아 전쟁때 프랑수아1세가 포로가 되고. 엄마가 오스만에 접촉하면서부터. 저기에 프랑스랑 동맹맺고 바다쪽으로 들어가서리 페르디난도1세의 형 카를5세랑 싸워 프랑스랑 같이. 프랑수아1세의 자식 앙리2세도 오스만과 동맹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탈리아전쟁에서 카를과 계속 붙어.

 

 

그러면서 말야. 오스만은 저 서유럽을. 비엔나에서 더이상 못 치고 가면서. 바다에서 치고 들어가. 바다에서 베네치아 랑 병원기사단 이랑 스페인 이랑 붙는겨. 얘들이 지중해를 거의 점령을 해. 그러다가

 

The Battle of Lepanto was a naval engagement that took place on 7 October 1571 where a fleet of the Holy League, led by the Venetian Republic and the Spanish Empire, inflicted a major defeat on the fleet of the Ottoman Empire in the Gulf of Patras.

 

레판토 전투. 1571년에 오스만이 지면서 주춤해. 이때 유럽쪽의 전력 손실도 만만치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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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이 메메드2세 때부터 보면. 서기 1300년에 오스만.의 꿈 기억나냐. 가슴에서 나온 나무가 뻗어서리 세상을 덮고 그 그늘아래에서 산이 생기고 물이 흐르고 사람들이 경작하면서 사는 세상. 진짜 꾼겨 이꿈을. 그리고 150년 만에 메메드2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하면서 그꿈을 결정적으로 실현하기 시작한거야.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도 이때 통일을 해.

 

 

이 메메드2세 아들이 바예지드 2세야. 할배 무라드2세때부터 인간들이 엄청나 얘들은. 

 

Bayezid II (3 December 1447 – 26 May 1512) (Ottoman Turkish: بايزيد ثانى Bāyezīd-i s̱ānīTurkishII. Bayezid or II. Beyazıt) was the eldest son and successor of Mehmed II, ruling as Sultan of the Ottoman Empire from 1481 to 1512.

 

마틴 루터가 태어나서리 벽보 붙이기 전까지 술탄 자리였어. 서기 1500년 유럽의 근대가 시작할때. 이탈리아 르네상스절정이었을때의 인간이야. 오른쪽엔 사파비가 막 들어설때의 인간이야. 해서 얘때부터 사파비랑 오스만이 오른쪽에서 싸우는거야. 얘들은 오른쪽에서 사파비. 그 위 러시아 왼쪽은 유럽 과 피터지게 싸우면서 크는거야. 이걸 얘들이 다 한겨. 그 힘의 이유 가 당근 있어. 얘들이 그냥 깡패들이 아냐. 깨인 애들이야. 레반트 문명이 얘들에게 찐하게 또한 학습이 되었어. 거기에 고대 이집트에 맞선 히타이트 문명도 얘들이 흡수가 된겨. 더하여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는 그리스문명의 핵심이야. 그것도 얘들이 습한겨. 거기에 이슬람을 더한겨. 엄청난 애들이야. 메메드2세 라는 인간은 인문학자야. 

 

 

In July 1492, the new state of Spain expelled its Jewish and Muslim populations as part of the Spanish Inquisition. Bayezid II sent out the Ottoman Navy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Kemal Reis to Spain in 1492 in order to evacuate them safely to Ottoman lands. He sent out proclamations throughout the empire that the refugees were to be welcomed.[17] He granted the refugees the permission to settle in the Ottoman Empire and become Ottoman citizens. He ridiculed the conduct of Ferdinand II of Aragon and Isabella I of Castile in expelling a class of people so useful to their subjects. "You venture to call Ferdinand a wise ruler," he said to his courtiers, "he who has impoverished his own country and enriched mine!"[18] Bayezid addressed a firman to all the governors of his European provinces, ordering them not only to refrain from repelling the Spanish refugees, but to give them a friendly and welcome reception.[18] He threatened with death all those who treated the Jews harshly or refused them admission into the empire. Moses Capsali, who probably helped to arouse the sultan's friendship for the Jews, was most energetic in his assistance to the exiles. He made a tour of the communities and was instrumental in imposing a tax upon the rich, to ransom the Jewish victims of the persecution.

 

이 인간의 최고 없적은. 딴거 볼거 없어. 스페인의 유대인과 무슬림을 갖고 온거야. 당시 스페인 문명이 최고야 최고. 스페인 마드리드가 최고야. 저기에 유대문명 그리스도문명 이슬람문명이 짬뽕으로 해서리 황금시대인겨 저기가. 저게 시칠리아의 킹으로 시작한 프리드리히2세 황제의 시칠리아랑 같은거야. 얘들이 최고로 앞선 애들이야 당시 시대에서. 이탈리아 빼고. 위 게르만 후질때야. 게르만은 이제 갖 배운겨. 

 

스페인이 저 이전엔 해변을 중심으로 카르타고 가 있었어. 한니발 아빠가 로마에 지고서리 아들 한니발을 데리고 해외파들이 만든 거점이 기원전 2백년 부터 있었어. 거기에 고대 로마 문명이 다음 온 곳이야. 여기에 더한 유대문명 그리스도문명 이슬람문명이 공존했던 곳.에서 그걸 다 습득한 몸에 배인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가 내쫓는겨. 유대인은 다 나가. 무슬림은 인정해주마 하다가 무슬림도 결국 나가게 되고 남은 이들은 모리스코스.란 이름으로 저항하다가 나가는거고
할때. 아, 저들이 우리의 최고 무기다. 저들이 우리 오스만을 부유하게 만들어 줄거다. 저들을 데려와라. 이걸 깨달은게 바예지드2세야.

음청난 안목인거야 이인간이. 
.1492년 7월. 스페인이 레콩퀴스타 끝내자마자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내쫓았다. 스페인의 인퀴지션 종교심문 명목으로. 바예지드 2세는 오스만 해군을 보냈다 케말 해군 제독에 명령하다 그들을 오스만의 땅에 안전하게 대피시키라고. 그는 제국 전역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피난민들은 환영받을 것이라고. 그는 피난민들이 오스만제국에 거주해서 오스만 시민권을 받는 것을 허가하였다.
그는 비웃었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도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의 짓들을. 자기들 땅에서 유용한 그 계층의 사람들을 쫓아내다니. "당신들은 페르디난도를 현명한 군주라고 부르도록 해라덜" 그는 그의 코티어들 조정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페르디난도는 자기의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나의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어 준 인간이란다" 바예지드는 법령을 발표했다 자기의 유럽 속주땅의 총독들에게. 스페인 피난민들을 쫓아내는 짓들은 하지 말것이며 오히려 그들을 친근하게 환영하며 받아들이라고. 유대인들을 거칠게 다루거나 그들이 오스만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모든 들은 사형에 처한다며 위협까지 할 정도였다. 


The Muslims and Jews of al-Andalus (Iberia) contributed much to the rising power of the Ottoman Empire by introducing new ideas, methods and craftsmanship. The first printing press in Constantinople was established by the Sephardic Jews in 1493. It is reported that under Bayezid's reign, Jews enjoyed a period of cultural flourishing, with the presence of such scholars as the Talmudist and scientist Mordecai Comtino; astronomer and poet Solomon ben Elijah Sharbiṭ ha-Zahab; Shabbethai ben Malkiel Cohen, and the liturgical poet Menahem Tamar.

 

알 안달루스. 스페인 남부.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오스만의 힘을 키우는데 기여했다. 새로운 사유. 새로운 방법. 새로운 직능들을 도입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첫번째 인쇄기는 이 셰파르딕 쥬스. 스페인태생의 유대인들이 도입했다 1493년도에. 바예지드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문예부흥의 시기를 갖았다고 기록된다. 탈무드학자이자 과학자 콤티노. 천문학자이자 시인 솔로몬. 샤베타이. 그리고 종교적 시인 메나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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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은 저 바예지드.가 만든겨 또한. 쟤가 델꼬온 당시 선진문명인간들인 스페인 유대문명과 무슬림문명이.

 

 

스페인은. 반대로 말야. 얘들이 중남미 식민지 어쩌고 아프리카 저쩌고 해서리 금은을 갖고 와서리 세계 금은 유통의 전부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말야. 그따위껀 쓰면 그뿐이야. 저건 잠재력이 될 수가 없어. 경제란건 그 내부적인 자유로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생성되는 힘.이 근본적인 거야.

 

스페인은 저 힘이 싸악 죽은거야. 그냥. 카르타고 오기 이전의 야만의 시대로 간겨 쟤들은.

 

외부 식민지에서 갖고 온 금은.은 전쟁때 용병 대금으로 쓰고 다 날라가. 얘들은 거지가 돼. 
카를5세가 자기 자식 필리프2세에게 남긴 빚이. 어마어마해. 이탈리아 전쟁과 독일 종교전쟁할때 땡긴 돈을 카를이 못 갚고 자식에게 넘겨. 필리프2세가 디폴트 선언을 다섯번인가 해. 돈이 없어서리 못갚는다고 배째라는겨. 그렇다고 그돈 받겠다는 채권행세도 못해 너무 큰 나라라서. 얘들이 또한 프랑스 종교전쟁때. 카톨릭을 지켜야 한다면서 프랑스의 군비를 대주는게 스페인이였어. 
외부 식민지에서 갖고 오는 돈은. 다 저기에 쓴겨.
그러면서 세금 올릴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터지는게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라는 80년 전쟁 일 뿐이야. 
그 시작은 말야. 쟤들이 자기보다 앞선 애들을. 적폐 라며 대민서리 죽이고 내쫓으면서야. 저러면서 스페인의 경제는 싸그리 죽은겨 오히려. 힘이 싸그리 사라져서리 오스만으로 간겨.

적폐 놀이는 그 나라를 죽이고 그 나라의 사람들을 굶겨 죽이고 그래서 이념전쟁을 더 악랄히 하면서 내전으로 서로들 죽어 그게 스페인 근현대사의 아주 비참한 이고 지금의 스페인 이야.


한심한 인간들의 역사.를 아는거야 앞선애들은 해서 저따위 을 아는 애들은 안해
모르는 무식한 들이 상대는 적폐요 소인배요 지가 정의요 대민서리 조오오온나리 지금도 저따위 개을 하는겨

얼마나 한심한 인간사인지 말야.


지들이 그러면서 정의고. 눈물 흑흑 . 위대한 우리네 누구 . 모든건 적폐탓 양키탓. 오잉 위대한 차베스 체게바라 볼리바르. 오잉 무함마드. 오잉 위대한 조선.

개들의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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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im I (Ottoman Turkish: سليم اول, Modern Turkish: Birinci Selim; 1470/1 – September 1520), known as Selim the Grimor Selim the Resolute[2] (Turkish: Yavuz Sultan Selim), was the Sultan of the Ottoman Empire from 1512 to 1520

 

 On the eve of his death in 1520, the Ottoman Empire spanned about 576,900 sq mi (1,494,000 km2), having grown by seventy percent during Selim's reign.[1]

 

바예지드2세의 아들이 셀림1세. 

 

The Battle of Chaldiran (Persian: جنگ چالدران‎; Turkish: Çaldıran Muharebesi) took place on 23 August 1514 in Chaldoran County, northwestern Iran, and ended with a decisive victory for the Ottoman Empire over the Safavid Empire. 

 

 

The Ottoman–Mamluk War of 1516–1517 was the second major conflict between the Egypt-based Mamluk Sultanate and the Ottoman Empire, which led to the fall of the Mamluk Sultanate and the incorporation of the Levant, Egypt and the Hejaz as provinces of the Ottoman Empire

 

 

칼디란 전투. 사파비랑 싸우는겨. 레반트와 이란땅 접경 북쪽이야. 오스만이 압승.  다음에 이집트 맘룩이 지배하는 레반트에서 싸워. 해서리 이때 레반트랑 이집트랑 헤자즈. 메카 메디나 있는. 이 셀림1세때에 오스만 제국 1683년 비엔나 전투때 최고 시절 대비 70퍼를 만들었다.

 

얘때 마르틴 루터가 대자보 붙인겨. 

 

 

Suleiman I (6 November 1494 – 6 September 1566), commonly known as Suleiman the Magnificent in the West and Kanunî Sultan Süleyman(Ottoman Turkish: قانونى سلطان سليمان‎; "The Lawgiver Suleiman") in his realm, was the tenth and longest-reigning Sultan of the Ottoman Empire from 1520 until his death in 1566.[4] Under his administration, the Ottoman state ruled over 15 to 25 million people.

 

그리고 그 아들 술레이만1세. 매그니피센트 붙는. 위대한 로렌초 할때도 저걸 붙여. 마그누스. 그레이트.는 게르만의 독자적 말이야. 라틴어가 마그누스.야 
이 인간때 유럽이 루터 티나와서리 본격적인 종교전쟁 터질때. 요때 기회로 헝가리 아래 모하츠.를 처들어가고. 헝가리 땅 다 먹고. 그다음 비엔나 포위했다가 물러나고. 그리고선 대륙으론 안되겄네 바다로 쳐들어가자 해서리 마침. 이탈리아 전쟁 중심에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와 다음 앙리2세이 자길 불러. 동맹맺어. 신성로마제국이랑 싸워. 애비 셀림1세가 점령한 레반트에 이집트.를 이어서리 알제리땅까지 가고. 사파비랑도 계속 맞서서리 오른쪽을 버티고. 

 

 

인도.는 델리술탄 무너지고 역시나 서기 1500년 이야. 무굴제국이 들어서. 해군애들을 여기까지 보내. 그러면서 포르투갈애들이랑 인도양서도 싸우고.

 

 

지중해에선 중세천년 지중해 무슬림해적의 이음이야. 해적들이 오스만의 해군이 된겨. 여기서 스페인 베네치아 병원기사단이랑 수시로 전투하는겨. 그 정점이 이 술레이만1세 말기때에 몰타 해전이야. 병원기사단이 로도스에서 몰타까지 간겨. 

 

At the helm of an expanding empire, Suleiman personally instituted major legislative changes relating to society, education, taxation and criminal law. His reforms, carried out in conjunction with the empire's chief judicial official Ebussuud Efendi, harmoniz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forms of Ottoman law; sultanic (Kanun) and religious (Sharia).[6] He was a distinguished poet and goldsmith; he also became a great patron of culture, overseeing the "Golden" age of the Ottoman Empire in its artistic, literaryand architectural development.[7]

 

쟤가 전쟁 만 한게 아냐. 소위 사회전반을 다 개혁을 한겨. 교육. 세금. 형법. 얘때 오스만 경제의 최고 정점.이었다. 예술. 문학. 건축 발전에서 오스만의 황금시기.였다. 해서 얘한테 매그니피센트. 위대한 술레이만. 딱지를 붙여줘.

 

 

 

할 때의 프랑스 종교전쟁.이야

 

 

나중에 하자. 



 

Francis I (left) and Suleiman the Magnificent (right) initiated a Franco-Ottoman alliance from the 1530s. by 

Tiziano Vecelli

 

프랑수아 1세와 위대한 술레이만. 1530년경 그림. 티치아노 베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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