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스터 반란 과 같이 터진게 카운트의 퓨드. 백작의 불화. 그리고 이어서리 노르웨이의 리포메이션. 은총 순례 잉글랜드. 소금전쟁. 닥케 전쟁. 러프 우잉. 슈말칼딕 전쟁. 까지 할수 있나 몰겄다 이거 오늘은. 아 은제 다하냐 .

 

 

이제부턴 모두 종교가 들어간 전쟁이야. 저거 다 종교전쟁이야. 종교가 하나의 구실이 되는겨 이제부턴. 근대 시작 서기 1500년부터는 이념전쟁인거야. 종교라는 이념. 신앙이라는 종교로 싸우다가 그게 마무리되니 그 다음엔 인민 이라는 이념전쟁을 후진들 땅바닥에서 한거고.

 

인민 이라는 이념놀이는. 쟤들은 중세에. 저 종교라는 이념에 곁들여서 다 한거야. 저거에서 신앙을 똑떼고 인민 만 건져서리 피바다를 만든게 후진들 땅바닥에서 한겨. 그따위 이념 전쟁은 쟤들은 저때와 저 이전에 벌써 다 했어. 조오오온나게 의미없는 이란걸 쟤들은 수백년간 체득을 하고 장에 던진거걸랑. 그따위 인민. 을 내걸고 권력 잡은 들의 땅에서 쟤들이 다 살아봤어. 헌데 그건 결국 더 죽이는 땅. 더 인간의 자유를 짓누르는 시스템이었던걸 깨달은거야. 

 

송영길 "北, 핵개발 후 경제 호전… 행복하게 살려는 가족주의적 나라"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3&aid=0003403821

 

오늘기사.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12일(현지 시각) 워싱턴 주미(駐美)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한 뒤로 재래식 군비를 절감해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며 "북한은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가족주의적인 나라"라고 했다. 송 의원은 이날 국정감사에서 "중동은 (이슬람국가 등 극단주의자들이 자살 폭탄 테러로) 알라신한테 가려는 사람들인데, 북한은 죽어서 하늘나라 가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일성 수령을 유사 종교처럼 떠받드는 것은 맞지만 '부러움 없이 살고 싶다. 가장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유교 사회주의적인, 어떻게 보면 가족주의적인 나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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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인민놀이 좋아하는 후진 땅바닥의 권력애들이 하는 말이야. 

 

이땅은 신앙이 죽었었걸랑. 조선건국이래 칠백년째 종교가 없어. 유교는 종교가 아냐. 유학이야. 신이 없어 저긴. 사대봉사하는 조상모시는 짓은 신이 아냐. 저 말의 마음바닥은. 이슬람을 빙자해서 그리스도.도 별다르니. 종교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는겨. 신을 죽인 조선의 유교가 제일 낫다는거고. 유교사회주의. 가족적인 나라. 저게 쟤들 이상향인거야.

 

종교가 아편이다. 마르크스 의 어록이야. 

 

신을 죽인 땅바닥은. 헬이야 헬. 
참 슬픈거지. 지금 이땅바닥 수준이야 저게. 저게 민주 놀이 정의 놀이 하는 애들의 수준이야. 수용소의 사람들은 관시미가 없어. 그 수많은 적폐놀이로 죽은 숙청당한. 끔찍하게 죽은 수많은 북한 사람들에 대해선 관시미가 없어. 그들은 적폐란 거야 저게. 유교를 바탕으로 가장 행복한 나라.의 북한의 의지가 훌륭해보이는겨

끔찍한거야 저건.
.저들이 인민과 신앙이라는 이념을 구실로 자유. 라는 두글자를 향해서 중세에 싸워왔고. 근대의 시작부터 본격적으로 싸운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너무나 너무나 무지한거야. 자폐의 땅에서 살아온 애들이걸랑. 너무나 너무나 인간의 역사를 몰라. 

지렁이야 지렁이. 이땅바닥의 모든 지식인자연하는 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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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 퓨드.와 노르웨이. 그리고 닥케 전쟁. 저건 북유럽이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는 크리스티안2세가 적폐놀이하면서. 재벌 길드 적폐 죽이고 중세상인 길드 육성 하다가. 경제 망해서 쫓겨나. 삼촌 프레데릭이 킹이 되고. 프로테스탄트.를 갖고와.

카톨릭을 버리는 이유는. 군주가. 단 하나야. 그 바닥은. 카톨릭이 세속 군주의 힘을 가져간거야. 그걸 뺏아오는겨. 카톨릭이랑 밀땅하는 게 아냐. 아예 엎어버리는겨. 그리고 세속군주 아래의 교회를 다시 만드는겨.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으로.

 

스웨덴.이 구스타브 바싸.가 해방전쟁하고 칼마르에서 나와. 그리고. 친 덴마크였던 스톡홀롬 대주교.때메 피바다 사건으로 아부지도 죽었어. 킹이 되어서리 가장 먼저 하는건. 교회의 권력을 갖고 오는겨. 카톨릭을 버리고 프로테스탄트를 심어. 이때 군주의 목표는 단 하나야. 교회 경제력을 자기가 갖는겨. 더하여 자기 사람을 심는겨. 서임권도 갖고 오는겨. 이걸 카톨릭 이름으로 못해. 카톨릭은 교황이야. 교황이랑 밀땅할 이유가 없어. 더군다나 여긴 멀어. 똑같애 덴마크 노르웨이도. 걍 가볍게 터는겨 카톨릭을

 

At the Riksdag of Västerås in 1527, referred to as the "Reformation Riksdag", the Estates agreed to a number of demands toward reformation: 1) to give the king mandate to confiscate clerical assets: 2) that all church offices where henceforth to be illegal without royal consent, in effect placing the church under royal control: 3) that the clergy were to be subjected to secular law, and finally: 4) that only the words of the Bible were to be taught in sermons in churches and schools (in effect removing all Catholic church doctrines).

 

릭스다크. 가 쟤들 의회이름이야. 1527년. 킹 되고 4년 후. 독일땅은 농민전쟁 끝난 후. 

 

킹에게 교회 제산을 몰수할 권한을 준다. 킹의 승인없는 모든 교회의 자리들은 지금부터 불법이다. 즉 교회 성직자 임명은 킹의 통제하에 있다. 성직자들은 세속의 법에 따른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글들. 성경의 말씀만이 교회와 학교의 설교에서 가르쳐져야 한다. (모든 카톨릭 교리를 지운다는 것)

 

 

저건 말야. 잉글랜드의 헨리8세의 앵글리카니즘도 똑 같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하고자 하는 각 영주들도 똑 같애. 

 

프로테스탄트.는 군주들이 하는거야. 자기들이 필요해서. 

 

 

작센의 영주.를 더 와이즈. the wise 현명함 딱지 붙이면서 저따위도 프로테스탄트 사가애들이 붙인거걸랑. 저 작센 영주 형제가 현명하고 페어 트라이얼. 재판도 공정히 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물들이고 성격도 온후 . 어쩌고 따위의 평을 쟤들이 하걸랑. 조까는 소리야 그게. 저사람들이 오육십 할배들이야. 그따위 초딩 수준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게 아냐 이무시기들아. 작센의 영주들도. 저 구스타브 바싸의 특히나 일번 이번. 저걸 하고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루터애들이 필요했을 뿐이야. 루터가 착각속에 뒈지는겨 지가 하나님인양 예언자냥. 작센 영주 형제들이 자기를 예언자 모시듯 하는구나 하는 착각속에서 뒈진겨 쟤가. 저기서 루터를 이용해서 권력강화하는 작센 애들을 보고. 다른 작센 사촌 영주가 반기를 든거야. 이사람도 프로테스탄트였어. 아 헌데 저 루터 갖고 있는 저 사촌 작센이 이러다 나의 작센땅도 갖고 가는거구나. 그게 슈말칼딕 전쟁에서 저 다른 작센영주가 카톨릭에 다시 들어가서리 카톨릭이 이기게 된 이유야. 저 두 작센이 아주 시대를 명확하게 읽는거야.

 

 

프로테스탄트로 시작하는 리포메이션.은 군주 들이 한거야. 저기서 루터 칼뱅.은 걍 저들의 재료일 뿐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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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저 군주들의 생각으로 들어가보면 다 똑같애 그 과정은.
우선 자기가 교회의 위에 서는겨. 헨리가 맨 처음 1531년에 한 짓이 슈프림 헤드 오브 처치 오브 잉글랜드야. 교회의 최고 대빵이야. 저 슈프림 헤드. 란 말이 쎈겨. 해서 나중에 엘리자베쓰가 저 타이틀을 다시 취할때 밑에 애들과 싸우는겨 같은 프로테스탄트라도. 이 잉글랜드의 앵글리카니즘은 또 달라. 의회와 행정부의 귀족들이 같은 프로테스탄트라도 권력을 킹과 다투는겨. 잉글랜드는 마그나 카르타.를 이미 3백년 전에 했던 의회의 나라야. 쎄 귀족들이. 엘리자베스에게 저 타이틀을 안줘. 거버너. 란 타이틀에 합의를 보는겨 그래서.

다음에 하는게. 성직자들에게 복종 선언을 하게 하는거야. 교황이 아닌 킹.에게. 즉 서임권을 갖고 가는겨. 

그 다음이. 수도원들을 정리하는거야. 카톨릭의 수도원은 특히나 교황 직속돈이야. 이 수도원들이 크고 작은게 중구난방으로 널리고 널려있어 이게. 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돈들이 어마어마해. 이건 특히나 영주들이 건들지도 못해. 저걸 다 깨부스는겨 저 조직을. 


그 다음에 하는게. 예배식을 달리 가는거야. 이건 카톨릭의 예배가 부정부패에 구태의연하다 란 문제의식이 아냐 이건. 영주들이 교회를 갖고왔어. 단지 그걸로 끝나고 교회안에서의 예배나 조직이 카톨릭과 똑같으면. 쪽팔리잖오. 속보이잖오. 단지 교황자리 킹이 했구나 함시롱. 해서리 먼가 바뀐걸 보여줘야해. 그게 예배절차를 달리 가고 교회 안의 성상 배치랑 건물 양식을 달리 가는거야. 그러면서. 성서 를 자기들의 언어로 싹 바꾸는겨. 예배 용어도 카톨릭의 라틴어를 지우고 킹이 만드셨단다 우리네 언어로 된 걸. 

아 킹한테 교회가 가니까니 먼가 새롭구나.

그걸 보여주기 위함일 뿐이야 그 마음 바닥은. 

On famously failing to receive from the Pope a declaration of nullity regarding his marriage, Henry had himself declared Supreme Head of the Church in England in February 1531, 

 

헨리8세가 앤불린이랑 만나면서. 1531년에 교회 최고짱.을 선언해. 아직 결혼전이야. 

 

앤불린이 퀸 자리는 28 May 1533 – 17 May 1536. 딱 삼년이야. 5월 17일 1536년에 죽었어. 정식결혼은 즉위하는 해. 비밀결혼은 1532년 11월. 

 

The Submission of the Clergy was a process by which the Catholic Church in England gave up their power to formulate church laws without the King's licence and assent. It was passed first by the Convocation of Canterbury in 1532

성직자의 순종. 킹에 대한. 카톨릭의 교회는 자기의 힘을 킹의 허가와 동의 없이는 어떤짓도 못한다.

 

The Ecclesiastical Appeals Act 1532 (24 Hen 8 c 12), also called the Statute in Restraint of Appeals[3] and the Act of Appeals,[4] was an Act of the Parliament of England.

 

교회 짱이다. 하고 다음해. 의회통과가 1533년 4월. 결혼과 앤불린 즉위 사이야. 

 

저건. 교회의 어필을 제한하는겨. 어필법. 앞으로 로마에게 어떤거든간 묻거나 자문이나 금지야. 킹에게 해야해. 로마 교황정과의 이별선언이야. 

 

 

이미 앤불린이 즉위하기전에 시작을 한거야. 

 

 

그다음에. 수도원들을 갖고 오는겨.

 

Visitation of the monasteries

In 1534, Cromwell undertook, on behalf of the King, an inventory of the endowments, liabilities and income of the entire ecclesiastical estate of England and Wales, including the monasteries

 

1534년이야. 아직 앤불린 즉위 전이야. 토마스 크롬웰이 수도원들을 방문하는겨. 눈치 못채게. 수도사들 원장들 은 저사람이 왜 오나 했겄지. 걍 인사하러 오는갑다. 저때 수도원들의 실상을 얘가 보는겨. 재무상태를 특히 보러간겨 눈치 못채게. 어마어마 한거지. 저때 수도원들이 몇개고 어디있고 거기 사람들이 몇명이고. 이걸 조사를 한겨. 이 조사를 처음 해본거야.

 

Reports and further visitations

In the autumn of 1535, the visiting commissioners were sending back to Cromwell written reports of all the lurid doings they claimed to have discovered; enclosing with them bundles of purported miraculous wimples, girdles and mantles that monks and nuns had been lending out for cash to the sick, or to mothers in labour

 

이걸 애들을 보내서리 전수조사를 하는거야. 그리고 보고서를 올리는겨. 

 

 

The Suppression of Religious Houses Act 1535 (27 Hen 8 c 28), also referred to as the Act for the Dissolution of the Lesser Monasteries[3] and as the Dissolution of Lesser Monasteries Act,[4][5] was an Act of the Parliament of England.

It was passed by the English Reformation Parliament of 1535/36. It was the beginning of the legal process by which King Henry VIII set about the 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 It was enacted in February 1535.

 

신앙을 위한 거주지들에 대한 억제법. 수도원들 줄이자 법. 이 1535년. 2월에 통과가 돼. 그러면서 전수조사를 병행하는겨.

 

The 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Suppression of the Monasteries, was the set of administrative and legal processes between 1536 and 1541 by which Henry VIII disbanded monasteriesprioriesconvents and friariesin England and Wales and Ireland, appropriated their income, disposed of their assets, and provided for their former personnel and functions. 

 

수도원들 해산. 이게 1536년 부터 시작한거야.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의 모든 수도원들을 정리하는거야. 이 교구 일 수도원 식으로 정해진 몇개들만 빼고. 스콧은 자기들 땅이 아니니 못하고. 역시 스콧에게 똑같이 요구하며 전쟁을 할 수밖에 없어. 왜냐믄. 자기 접경땅에 이전 체제를 머리 위에 둘 수가 없어. 피해간 사람들이 저기서 힘을 모아서리 자기에게 대들걸랑.

 

 

저 수도원 철폐 가. 엄청난 반감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어. 민심에. 저건 민들의 마음의 방들을 걷어치우는 거로 보이걸랑. 민들이 이거에 직접적인 상처를 느끼는거야. 해서리 이때 다 반기를 드는겨 곳곳에서. 여기에 성직자의 킹에 대한 순종.을 거부한 카톨릭 성직자들. 순종했지만 기분나쁜 꽁했던 카톨릭들.이 중심이 되어서. 민들과 함께 브리튼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는거야.

 

 

저때 또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살면서 느꼈던 문제들을 같이 들고서리 반기를 드는거야. 

 

 

이게 아주 똑같은거야. 전 유럽대륙의 소위 종교전쟁에.

 

 

저런 수도원 철폐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똑같이 하는겨. 똑같이 민들이 카톨릭과 중심이 되어서리 반기를 들면서 전쟁하는거고. 또한 여기에 껴서. 왕족 핏줄들이 카톨릭과 함께 뭉쳐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이들도 나타나는겨.

 

 

이게. 카운트 퓨드. 야 덴마크의. 이전 쫓겨난 크리스티안2세와 연합해서리.은 현재 킹인 삼촌세력의 프로테스탄트에. 우리는 그럼 카톨릭 다시. 하면서 그쪽의 카운트가 반기를 든겨.

 

덴마크의 프레데릭1세가 죽었어. 자식 크리스티안3세가 킹이 돼. 쫓겨난 조카 크리스티안2세에. 같은 올덴베르크 가문의 백작이 들고 일어난겨. 얘가 카운트 백작이야. 해서 카운트의 퓨드 한겨. 져. 크리스티안2세는 계속 죽을때 까지 성에 갇히고. 이 백작은 돌아가서도 죽을때까지 여기저기 개입하다가. 수도원에 가서 죽어.

 

The Pilgrimage of Grace was a popular uprising that began in Yorkshire in October 1536, before spreading to other parts of Northern England including CumberlandNorthumberland and north Lancashire, under the leadership of lawyer Robert Aske. The "most serious of all Tudor rebellions", it was a protest against Henry VIII's break with the Roman Catholic Church, the 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 and the policies of the King's chief minister, Thomas Cromwell, as well as other specific political, social and economic grievances.[1]

 

은총의 순례. 요크셔. 잉글랜드. 저것에 대한 잉글랜드 북부의 민들의 봉기야. 

 

The Dacke War (SwedishDackefejden) was a peasant uprising led by Nils Dacke in SmålandSweden, in 1542 against the rule of Gustav Vasa. Dacke and his followers were dissatisfied with the heavy tax burden, the introduction of Lutheranism and the confiscation of Church property (the confiscation and taxes were introduced to pay for the Swedish War of Liberation that had brought Gustav Vasa to power). In 1543 the uprising was defeated, and Nils Dacke was killed.

 

닥케 전쟁. 스웨덴의 농민반란. 닥케. 가 리더야. 구스타브 바싸.가 해방전쟁 수습하면서 세금을 올려. 여기에 수도원 해체. 프로테스탄티즘 도입 에 대한 반감이 섞여서 터진겨. 쎘어 엎을 뻔도 했어. 닥케가 전투중에 죽어. 죽은 시체를 찢어서 걸어.

 

The Salt War of 1540 was a result of an insurrection by the city of Perugia against the Papal States during the pontificate of Pope Paul III (Alessandro Farnese). The principal result was the city of Perugia's definitive subordination to papal control.

 

1540년의 소금전쟁. 페루자. 이탈리아야. 이탈리아는 농민전쟁따위는 고대로마때 다 했어. 이건 오래전 식스투스4세의 페라라전쟁 이란 소금전쟁과 달라. 그건 페라라 해변의 소금사업권 쟁탈전이고. 이건. 교황이 돈이 없으니. 로마 약탈 당하고. 교황령이지만 교황의 권위가 사라져 이제. 소금에대가 세금을 부과한겨 자기 교황령에. 페루자.에서 들고 일어난겨. 당해 작황도 안좋은데. 교황이 자기 군대 만들어서 진압을 하고 요새를 세워. 저긴 구석 촌동네걸랑. 교황이 불쌍해진겨. 저런 곳에까지 가서 소금에 세금을 받으려 하는 시대까지 온거야. 저런곳에 요새를 또 세워. 다시말하믄. 그만큼 힘이 없는겨 교황이. 이제 신성로마 황제애들이 대관식도 받으러 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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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도원 해체 한다 할때. 수도원에 대한 말이. 에비. 모나스터리. 구분을 하면.

 

1. Abbey is the term used to describe the monk’s dwelling place according to the Benedictine order. For most of the other orders (especially the more cloistered and contemplative ones), these places are regarded as monasteries.

2. Ideally, a monastery is a more premature version of an abbey because the latter needs to have more religious dwellers or worshippers than in monasteries.

3. Either to non Catholics and Roman Catholics, monastery is a more popular term compared to abbeys.

4. The abbey is under the abbot or abbess leadership unlike the monastery.

애비. abbey. 란 말이 베네딕트 수도회.의 몽크들 거주지를 애비. 하면서 애비. 했다는건데. 

 

The Order of Saint Benedict (OSBLatinOrdo Sancti Benedicti), also known as the Black Monks – in reference to the colour of its members' habits – is a Catholic religious order of independent monastic communities that observe the Rule of Saint Benedict.

 

수도회.중에 이 성 베네딕트 수도회.가 가장 오래된 걸로 보이는데. 아 확실치 않아. 헌데 이 보다 더 오래된 건 짐이 못찾았어 예전에. 529년에 설립된 듯.

 

Benedict of Nursia (LatinBenedictus NursiaeItalianBenedetto da NorciaVulgar Latin*BenedectoGothicBenedikt

c.

 2 March 480 – 543 or 547 AD) is a Christian saint, who is venerated in the Catholic Church, the Eastern Orthodox Churches , the Oriental Orthodox Churches, the Anglican Communion and Old Catholic Churches.[3] He is a patron saint of Europe.[4]

 

성 베네딕트. 영어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이태리. 베네데토 다 노르차. 저 노르차.가 위 소금전쟁 페루자.의 쭉 아래야. 프란체스코.의 아시시.는 페루자 바로 오른쪽 아래고. 여긴 더 아래고. 완전히 아펜니노 산맥 가운데 걸랑. 완전 산속 촌동네야.

 

이사람이 베너레이션. 성인 되서리 성 베네틱트. 하걸랑. 이사람이 몽크를 위한 수도원들을 12개를 세운겨. 이걸 애비. abbey 라 했다는거야 저 공동체 거주지를.

 

몽크.야. 이들은 프라이어. 라는 멘디컨트 설교 구걸 수도사들이 아냐. 모나스터리.야 이것도.

 

 

저 수도회라는건. 걍 사람들이. 평신도든 성직자든 막막 지들이 막막 세우는겨. 혼자 조용히 또는 몇몇 같이 적극적으로 포교하는겨 신심이 쳐 올라서리. 프란치스코.는 평신도야. 

 

자기들이 막막 세우는겨. 혼자 거주하는 모너스터리.도 있는겨. 또는 몇이 몇몇이. 또는 귀족이 기부 해서리 크게 짓는 것도 있을테고. 해서 벽만 보는 모나스터리.들이 숱하게 생기는겨 지들만의 공동체로. 

 

베네딕트.가 저런 모나스터리.를 세웠는데. 나중에 저걸 애비.라고 했다는거지. 애비.라는것도 라틴어야. 이건 중세 라틴어. 즉 저때 생긴 라틴어야. 오직 저 베네딕트들의 거주지만을 위해서 만든 말이야 이건. 해서 대게 애비. 라는건. 교황정 차원에서 나중에 적극적으로 만든 수도원을 애비. abbey 라고 해. 여기의 짱을 애봇. 수녀원들의 애비.인 곳은 애비스.라는 수녀원장.

 

이건 교황정이 조직을 구성해서 세운 수도원.이야

 

초기엔. 걍 지들이 모나스터리 개념으로 막막 세운겨. 해서리 대게 모나스터리야. 모노. 독고다이. 로 하나님 보기. 이걸 이제 교황의 애비. 해서리 애비.란 이름도 자기들이 따로 쓸 수도 있어. 규모가 커지면 교황정 승인을 받으려 애쓰는거고. 그게 프란치스코 수도회 경우야. 

 

 

해서 저 위 구분하는게 그런 말이고. 

 

priory is a monastery of men or women under religious vows that is headed by a prioror prioress. Priories may be houses of mendicant friars or nuns (such as the DominicansAugustiniansFranciscans, and Carmelites, for instance), or monasteries of monks or nuns(as with the Benedictines). 

 

convent is either a community of priestsreligious brothersreligious sisters, or nuns; or the building used by the community, particularly in the Catholic Church and the Anglican Communion.

 

프라이오리. 라는건. 수도원들 중에서도. 프라이어. 가 사는 곳이야. 프라이어.는 규모가 큰 수도우원의 짱들 밑의 보조들이야. 행정직이든 일하는 사람들이든. 그들의 사는 거주지가 프라이오리. 또는 멘디컨트 수도사들인 프라이러.들의 거주지를 말하기도 한다. 

 

콘벤트.도 모여있다 똑같아. 멘디컨트들의 수도원. 하기도 하고. 지금 이건 성공회에서 주로 쓰고

 

.,

 

A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had also been published in 1526. After the reformation, a full translation was published in 1540–41, called the Gustav Vasa Bible. However, knowledge of Greek and Hebrew among Swedish clergymen was not sufficient for a translation from the original sources; instead the work followed the German translation by Martin Luther in 1534.

 

스웨덴.은 스웨덴말로 된 신약이 1526년에. 구약까지 다 합한 구스타브 바싸 성경. 이 1541년.

 

스웨덴 에선 그리스 히브리어 지식이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신약 1522년. 구약 1534년. 의 독일어를 스웨덴어로 번역하였다.

 

in 1543, the New Testament also to Finnish, 

 

스웨덴의 속주였던 핀란드.의 핀란드어 신약은 15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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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는 웃겨

 

In 1524, the exiled King Christian II of Denmark-Norway ordered the publication of the first Danish-language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It was given a full title which can be translated as "This is the New Testament in Danish directly from the Latin version," and is often referred to today as the New Testament of King Christian II. 

 

그 어중간한 크리스티안2세. 얘가 덴마크어로 된 신약 출간을 한겨. 1524년. 얘가 저지대 돌아다니고. 비텐베르크.의 루터 신약도 보면서. 얘가 신약 덴마크어를 지시해. 그리곤 나중 카톨릭 킹으로 자리 회복하려 했던거고 ㅋㅋㅋ. 이걸 정작 그래서 지들이 태워. 귀해 지금. 40개 카피만 남다.

 

Christian III's Bible was the first full Danish-language Bible translation, published in 1550. It was commissioned by King Christian III. A commission of theologians compiled this first 1550 edition, 

 

해서 프레데릭.의 아들 크리스티안3세 성경.이 신구약 전체로 된 덴마크어 성경. 1550년. 

Hans Poulsen Resen

His first translation was published in 1607 and was very accurate, but it was written in an unnatural and difficult language, as he followed the original texts with painstaking accuracy (for example, Resen put Danish words needed for comprehension in parentheses if they were not present in the original text.) This edition was the first Danish-Norwegian translation to include the traditional subdivision into verses.

 

노르웨이어로된건 1607년에야 처음 나와. 레젠.의 번역으로. 덴마크의 속주걸랑 걍 백년가까이 덴마크어로 된 거로 예배에 성경 했었던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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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마르틴 루터. 사람들이 가서리 예배식과 예배언어와 성경언어를 만들어 준거야. 저들은 게르만들중에 제일 늦어. 이들이 마르틴루터 들에게 부탁해 당신들 좀 와서리 우리네 프로테스탄트좀 만들어줘 하는겨.

 

 

저게 쟤들의 장점이야. 이 게르만들은 말야. 자기가 후진건 후지다고 인정을 하고. 남에게 도움을 요청해. 게르만의 세상인 이유야.

 

 

이땅바닥에선 꿈도 못꿀 일이지. 이 조선 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개 들의 핏줄들이. 어디서 개조까튼 자부심 은 대체 어디서 떨어진건지 말야. 대뇌망상질인지 저건. 자기들이 위대한 민족 . 중국이들이나 인도들이 저런건 쫌 이해는 가. 헌데 무지에 야만의 역사의 들이 대단한척. 완전 정신병동이야 여긴. 유교 사회주의 ㅋㅋㅋㅋ. 참 골때린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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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수도원 해체 작업이 1536년이야. 조사가 1534년이야. 앤불린 3년 재위기간에 말야. 특히나 저 수도원들에 인간들 풀리면서 전수조사하면서 분위기가 싱숭생숭한겨. 저때 잉글랜드 곳곳에서 수백명씩 죽어나가. 

 

앤불린이 죽은 날이 5월 17일이야. 저게 한창 막 불붙을때야. 

 

 

카톨릭의 성직자들과 그 바닥 민심들은. 카톨릭이야 그 찐한 마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이 사람들에게 최고의 악마은 앤불린.이야

 

 

앤불린이 헨리의 낙마사고로 놀라서리 유산하고 아들 못낳는다고 어쩌고 저쩌고 전에 말야. 이 헨리란 가 저건 정치적으로 민심수습용으로 앤불린을 죽인거야. 

 

그 증거 하나 없는 재판정에서. 모든 배심원들이 유죄를 때리는건. 헨리가 무서워서 유죄를 서로들 선언하는게 아냐. 저 자기들이 투사한 악마는 앤불린의 모습으로 나타난거야. 저년때문에 카톨릭이 없어지고 수도원들이 없어지고. 저년때문인거야. 아 그 옛날의 아름답고도. 전장에서 스콧을 이기기도 했던 아라곤의 캐서린.도 저년때문에 죽었어. 

 

 

앤불린은 그래서 걍 죽었을 뿐이야. 

 

 

앤불린.은 역사적으로 인정해 줘야 하는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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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우잉. 거친 구애. 저 스콧의 마리.에 엘리자베스에. 정말 재밌다 이쪽은 특히나. 

 

또한 다음의 슈말칼딕 전쟁. 

 

나중에 하자. 

 

円山 応挙(まるやま おうきょ、旧字表記では圓山應擧享保18年5月1日1733年6月12日)- 寛政7年7月17日1795年8月31日)by 月岡 芳年

 

마루야마 오쿄. 에도시대 화가. 자기 죽은 가족을 그렸든데. 그 그림이 그림속에서 티나와서리 사라졌대.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써. 

 

月岡 芳年(つきおか よしとし、1839年4月30日天保10年3月17日) - 1892年明治25年)6月9日

쓰키오가 요시토시.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전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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