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ünster rebellion was an attempt by radical Anabaptists to establish a communal sectarian government in the German city of Münster. The city was under Anabaptist rule from February 1534, when the city hall was seized and Bernhard Knipperdolling installed as mayor, until its fall in June 1535. It was Melchior Hoffman, who initiated adult baptism in Strasbourg in 1530, and his line of eschatological Anabaptism, that helped lay the foundations for the events of 1534–1535 in Münster.
 
뮌스터 반란. 
 
뮌스터.는 라인강이 쭉 흘러서리 본. 쾰른 지나고. 그 동쪽 위 지역이야. 여기에 도르트문트. 그 위로 뮌스터. 빌레펠트. 가 있어. 이쪽 라인강 북동지역을 베스트팔렌. 하는겨 흔히들어본. 영어 웨스트팔리아. 독어 베스트팔렌. 이건 도시 이름이 아냐. 이 베스트팔렌 지역 넘어서 오른쪽에 하노버. 그 위 브레멘이고 동프리지아.야
 
아나뱁티스트. 재침례교.가 여기서 터져. 
 

In 1534, the Anabaptists led by John of Leiden, took power in the Münster Rebellion and founded a democratic proto-socialistic state. They claimed all property, burned all books except the Bible, and called it the "New Jerusalem".

 

 
루터 대자보.가 1517년이야. 그 후로 17년 이 지난거야. 루터 직전만 봐도 이미 저긴 난리가 난겨 농민과 기사층 에 귀족층에. 시대가 바뀐거야. 뮌스터의 남부 독일 콘라드 농민. 게오르게 도자 트렌실베니아. 작센 내분은 이 뮌스터의 베스트팔렌 지역 바로 북쪽이야 동프리지아. 슬로베니아 농민반란.은 이게 뒤 독일농민전쟁과 성격이 비슷해. 종교만 빠진거야. 프리지아 농민반란은 프리즐란드. 아루머의 검은 무리들. 네덜란드의. 뮌스터의 북서쪽이야. 저기 먼 스페인에선 카스티야의 귀족들 포함 코무네를 만들어. 아라곤은 길드들이 반란해. 스웨덴은 구스타브 바싸가 스톡홀롬 피바다 사건이후 독립했어 칼마르 체제에서. 오스만은 헝가리로 쳐들어와. 
 
The Bundschuh movement (German: Bundschuh-Bewegung) refers to a series of localized peasant rebellions in southwestern Germany from 1493 to 1517.
 
저기에 없는 분트슈흐 운동. 이전에 이미 20여년간 스와비아와 라인팔라틴. 라인강 상류에서도 지속적인 농민반란들이 있었어.
 
이탈리아전쟁. 이게 지금 중심이야. 항상 이걸 주지해. 1494년. 20년이 지났어. 전반전이 1516년에 끝났어. 프랑스에선 샤를8세에 루이12세에. 프랑수아1세가 등장해. 합스부르크는 카를5세가 19세에 1519년에 황제가 돼. 이 둘이 삼십년 이상을 군주하는거야. 최고의 맞수야.
 
이전의 겔더들 전쟁.도 그렇고. 저때의 독일저지대의 반란 배후는 프랑스야. 이탈리아전쟁의 전장이야 저기도. 
 
루터가 대자보 붙이고 1517. 저 와중에 붙인거야. 루터가 붙였다고 루터 딱까리 멜란히톤.이 말한겨. 이게 유일한 쏘스야. 그리고서리 1521년 1월에 파문. 4월에 카를 보름스칙령 범법자 한겨.
 
그리고나서리. 바로 기사들의 반란에 농민전쟁이고. 이어서리. 스와비아 접한 스위스 츠빙글리.들의 카펠 전쟁들.에서 츠빙글리들의 프로테스탄트.는 일단 졌어. 죽고. 
 
그러면서 북쪽 덴마크에서는. 스웨덴 독립하면서. 크리스티안2세 가 영세상인들 위한답시고 재벌 적폐 놀이하다가 경제가 망해서리 들고 일어나서리 삼촌 프레데릭.을 킹에 올리고. 프로테스탄트 세우고  크리스티안은 카톨릭이다 하민서리 뎀비다가 갇혀.
 
 
저때 동시에. 이탈리아 전쟁이 다시 시작이야. 합스부르크 발루아 전쟁. 이라는건.
 
The Italian War of 1521–26, sometimes known as the Four Years' War,[1] was a part of the Italian Wars. The war pitted Francis I of France and the Republic of Venice against the Holy Roman Emperor Charles VHenry VIII of England, and the Papal States. The conflict arose from animosity over the election of Charles as Emperor in 1519–20 and from Pope Leo X's need to ally with Charles against Martin Luther.

 

 

프랑수아1세가 카를5세보다 6살 많아. 카를 생년은 외우기 쉬워. 서기 1500년. 카를 5세의 탄생일이 근대의 시작이야. 외워. 

 

 

프랑수아.가 황제가 되고싶었걸랑. 얘도 돈 무지 쓰고 로비 하고. 교황 레오10세 형도 황제시켜준다 했걸랑. 헌데 쌩가임 당하고 카를이 된겨. 이게 꽁 한 상태고. 이전에 이탈리아 전쟁에서 샤를 8세랑 루이12세가 나폴리 먹다가 쫓겨나고 밀라노도 먹다가 쫓겨난걸. 프랑수아1세 얘가 오르자 마자. 베네치아랑 손잡고 교황령에 치면서 밀라노를 뺏으면서 전반전이 끝난 상태였걸랑. 

 

 

얘가 다시 시작하는거야. 

 

 

1521 French-Navarrese expedition

 

Near Pamplona, the French (Gascons) and the Navarrese were completely defeated at the Battle of Esquiroz (Noáin)on 30 June 1521. The French-Navarrese force did not have sufficient artillery to defend themselves, and were outnumbered by more than two-to-one. French and Navarrese losses numbered more than 6,000 dead, and General Asparros was captured,[7]

 

팜펠루나 전투. 팜플로나. The Battle of Pampeluna (also spelled Pamplona) occurred on May 20, 1521

 

프랑수아1세가 먼저 건드린 곳이 이탈리아가 아니라. 스페인의 나바르야. 카를5세가 오고 카스티야와 라곤에서 반란할때. 이걸 기회로 나바르.에서 다시 반기를 드는겨. 이전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여길 속주로 넣은 상태 였걸랑. 프랑수아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리 나바르의 앙리2세를 지원해주는겨. 헌데 프랑스 입장에선 아쉽게도. 코무네로스의 반란이 진압이 되고. 이들이 충성충 하기 위해 나바르 반란 진압에 힘을 보태 카를 편을 드는거야 카스티야 애들이. 

 

Henry II (18 April 1503 – 25 May 1555), nicknamed Sangüesinobecause he was born at Sangüesa, was the King of Navarre from 1517

 

이때 나바르의 킹. 이라 자처하는. 아미 카스티야 속주된 상황서 싸우는. 엄마가 나바르의 케서린인데. 엘레오노르의 손녀핏줄이걸랑. 엘레오노르가 퐈 가문 남편. 퐈가문인겨 엄마가. 얜 

Albret 아빠가 알브레 가문이야. 이 나바르의 앙리2세가. 프랑수아1세의 누이랑 결혼을 하고. 여기서 낳은 딸.의 자식이 바로 앙리4세.야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여는. 
앙리4세가 원래 위그노야. 프로테스탄트야. 왜냐믄. 저 나바르의 앙리2세. 외할아버지가 위그노였걸랑. 


나바르의 앙리2세가 프랑스 프랑수아1세의 도움을 받아서리 독립운동 하지만. 깨지고 잡혀. 나중에 카를5세가 풀어주고 걍 너 나바르 킹 열심히 해라 나비둬.

The Siege of Mézières (1521) 미지에 전투. 

The Siege of Tournai (1521) 투르네 전투. 

 

둘다 네덜란드와 경계야. 프랑스 북동쪽. 미지에와 투르네를 봉쇄를 해 카를 군이. 미지에는 못뺏아. 투르네는 빼앗아. 

The Battle of Bicocca or La Bicocca (ItalianBattaglia della Bicocca) was fought on 27 April 1522, 비코카 전투. 

 

이탈리아 밀라노.는 이전에 프랑수아1세가 대신 총독을 세웠걸랑. 얘가 쫓겨나는거야 카를5세와 교황의 압박으로. 그리고 서리 밀라노 근처 비코카.에서 프랑스와 카를군이 붙으면서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이 시작이 돼. 밀라노는 걍 가볍게 카를 5세 손에 들어온겨. 이걸 보고 프랑수아1세가 직접 다시 쳐들어가면서리 본격적인 후반전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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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 1521년.부터는. 루터의 교황파문.과 카를 칙령. 요때부터 터진거야. 카를5세가 황제 된지 2년 된겨. 얘도 이제 어느정도 감 잡은 상태야. 
저 와중에 농민전쟁에 독일땅은 전역이 다 난리가 난겨. 걍 위아래 다 반란중인 상태에서. 종교가 더해지면서. 걍 터진거야. 이 와중에 이탈리아 전쟁이 다시 시작한거고.


로마약탈. 사코디로마는 1527년. 저때 벌어진 일이야. 이건 프로테스탄트 용병애들이 더 악랄하게 을 해댄겨. 저 알프스 넘어에서의 온갖 반란의 그림자.들이. 로마에서 터진거야.
로마는 저때 끝난거야. 이탈리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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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 말야. 저 분위기 속에서의 뮌스터 반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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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 이 가장 큰 말이고. 저기서 나오는 큰 줄기가. 어드벤티즘(재림교) 아나뱁티즘(재침례교) 앵글리카니즘. 뱁티스트 처치즈(침례교) 칼뱅이즘. 루터러니즘. 메소디즘(감리교) 펜테코스털리즘(오순절교)


순복음교회.는 저 오순절파의 분파야. 오순.은 오십일의 열 순. 이고. 순복음의 순.은 순수한 복음의 순이야. 이따위말은 나중에 하고.

The biggest Reformed association is the 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with more than 100 million members in 211 member denominations around the world.[5][6] 

 

칼뱅주의.에서 나온게 개혁교회야. 리포엄드 처치. 이 개혁교회 세계연합.이 1억에서 2억명.

 

 

There are over 279 million Pentecostals worldwide, and the movement is growing in many parts of the world, especially the global South

 

펜테코스털. 오순절교가 3억 가까이. 

 

Today, Lutheranism is one of the largest denominations of Protestantism. With approximately 80 million adherents,[7]

 

루터파. 8천만명.

 

 

 

in 2010, Adventism claimed some 22 million believers scattered in various independent churches.

 

재림교가 2천2백만.

 

today claiming approximately 80 million adherents worldwide.[2][nb 1]

 

감리교. 메소디스트가 8천만.

 

Today, more than 100 million Christians identify themselves as Baptist or belong to Baptist-type churches.

 

뱁티스트. 침례교 타입이 1억명.

 

The number of Anglicans in the world is over 85 million as of 2011.[86]

 

앵글리카니즘. 성공회가 8천5백만.

 

할때 말야

 

Approximately 4 million Anabaptists live in the world today with adherents scattered across all inhabited continents. 

 

아나뱁티스. 재침례교.는 약 4백만. 제일 적어. 이들이 가장 래디컬이야. 가장 급진적이고. 그 시작이 저 뮌스터야. 

 

루터보다 늦지 않아 이들은. 루터의 영향을 받은게 아냐. 오히려 루터 개개끼 하면서 초기에 따로 나온 사람들이야.  혹자들은 토마스 뮌처. 그리고 뮌처가 만난 츠비카우 세 예언자 놀이애들을 이 재침례교.로도 봐. 주류들은 그리 보지 않아. 저들은 따로 걍 봐. 헌데 주장은 비슷해. 칼슈타트.도 여기에 넣니 마니 해.

 

저게 재침례교.라는게 누가 먼저 시작했나. 논란이 많은 이유야. 저건 동시 다발적으로 나온거냐 누가 먼저 제창한거냐. 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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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당시 리포메이션.의 제 1세대는. 마르틴 루터. 토마스 뮌처. 칼슈타트. 울리히 츠빙글리. 이 네명이야.

 

루터.가 1483년생. 츠빙글리가 한살 어려. 칼슈타트는 세살어린 스승. 뮌처가 89년생. 

 

칼뱅은 1509년생이야. 얜 2세대야. 루터가 엉겁결에 카톨릭에서 새로운 교회 만들고. 루터는 마스터플랜이 허섭해. 교회 조직을 어드래 갖아야 하는가. 이런건 얜 잘몰라. 얜 걍 학자야. 몽크 출신. 정치를 해본 애가 아냐. 걍 설교하면서 선동만 하던 애야 자뻑질 하면서.

 

 

세상을 전혀 몰라. 걍 수도원 벽보고 대학 강의하면서 세상은 머리속에서만 뿌옇게 상상한 애야. 얜 교황이 돈 많은 줄 알아. 돈 많은 교황이 왜 더 악랄하게 돈 걷냐. 완전히 음모놀이 에 푸우우욱 절은 애들이야. 

 

 

아 이땅바닥에 저 음모놀이에 절고 절은 열등감 덩어리 애들이 권력과 미디어에서 정의 놀이 하는거 보믄 참 기가 차지도 않은데.

 

 

 

루터 95개 논제를 보면. 가만히 디다보면. 얜 걍 망상에 쩔고 쩔은 애걸랑. 세상이 악 덩어리야 얘의 눈엔. 몰라 몰라. 세금이 어드래 걷고. 어드래 쓰이는지. 교황은 걍 야 얘 눈엔. 로마는 악마들이고. 지가 배운 학교. 그 건물들. 교회 성당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건줄 알아. 니가 읽은 책. 니가 읽는 그 종이들과 그 내용들이. 걍 하늘에서 떨어진 건줄 알아. 인 히스 오운 프리윌. 자기만. 스스로. 자유의지를 구현한 정의의 사도 인줄 알아. 

 

해서 조직을 어드래 만들고 어드래 꾸미는가는 잘 몰라. 

 

이런걸 고민한게. 츠빙글리야. 그리고. 뒤의 칼뱅이야. 칼뱅이 저 1세대 애들의 이야기를 받아서리. 얘가 교회 조직과 교리들을 아주 깊게 쎄팅 하는거야. 이걸 익혀서리. 존 녹스.가 브리튼에 가서 장로교를 맹그는겨. 

 

Anabaptism (from Neo-Latin anabaptista,[1] from the Greek ἀναβαπτισμόςἀνά- "re-" and βαπτισμός "baptism",[2] GermanTäufer, earlier also Wiedertäufer[a])

 

The early Anabaptists formulated their beliefs in the Schleitheim Confession, in 1527.[6][7] 

 

그리스말이야 뱁티스타.에 아나. 다시 뱁티스타 하자. 
공식적인 시작이. 슐라이타임 콘페션. 신앙고백. 슐라이타임. 이 스와비아 접경 스위스야. 바젤 지나서리. 취리히 북쪽에 삐쭉 스와비아 독일을 쑥 들어간 땅이 있어. 농민전쟁을 겪은 후야. 독일 농민전쟁은 이 스위스와 긴밀해. 다 같은 동지야. 이전 기사들의 반란.에서 그 지킹엔과 후텐도 여기랑 만나는겨. 여기의 중심인물은 츠빙글리야. 후텐이 나중 이 츠빙글리네로 도망와서 죽어. 

츠빙글리.와 의견을 달리해서 나온 이들이야. 

The Swiss Brethren are a branch of Anabaptism that started in Zürich, spread to nearby cities and towns, and then was exported to neighboring countries.[1]:62 Today's Swiss Mennonite Conference can be traced to the Swiss Brethren.

 

스위스 형제단. 브레쓰런. 이란건. 브라더.에다가 종교를 가미한겨. 신앙으로 맺은 형제란겨 이게. 조폭애들이 해서 또한 브레쓰런 해. 쎈 말이야. 

 

취리히. 츠빙글리가 죽을 때까지 있던 곳이야 각성 하고나서리 사제로 있으면서. 츠빙글리는 래디컬 하지 않아. 이에 반대하는 래디칼들이 따로 모인겨. 더 북쪽 가서리.

 

In 1525, Felix ManzConrad GrebelGeorge Blaurock and other radical evangelical reformers broke from Ulrich Zwingli and formed a new group because they felt reforms were not moving fast enough.

 

펠릭스 만츠. 콘라트 그레벨. 게오르게 발라우락. 1525년. 

 

Michael Sattler (1490 – 20 May 1527) was a monk who left the Roman Catholic Church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to become one of the early leaders of the Anabaptist movement. 

 

저 슐라이타임 콘페션.을 주재한 사람. 미카엘 사틀러. 저 네명이 생년이 다 저 1490년생 전후야. 동년배야. 이사람은 몽크 였다가 프로테스탄트. 

 

재침례 라는게. 

 

Anabaptists believe that baptism is valid only when the candidate confesses his or her faith in Christ and wants to be baptized. This believer's baptism is opposed to baptism of infants, who are not able to make a conscious decision to be baptized. 

 

세례자 요한.한테서 지저스도 세례를 받는거야. 물로 씻김하는 새크러먼트야. 유아 세례.는 무효라는겨. 애들이 무슨 의식이 있다고 판단력도 없는데. 진짜 믿는 자들의 세례. 빌리버스 벱티즘.만 유효한겨. 

 

 

Peter of Bruys (also known as Pierre De Bruys or Peter de Bruis; fl. 1117 – c.1131) 

 

피에르 드 브뤼. 이전 썰. 아벨라르.랑 동세대의 사람. 12세기 초야. 똑같은 얘기 했걸랑. 화형당하고 죽을때 민들은 같이 돌던져 죽였어. 저말하믄 혼나. 

 

 

피에르 드 브뤼. 이후 4백년 만에 똑같은 말 하는거야. 츠빙글리.가 아 아직은 거기까지는 가지 말자. 이때 깝깝하걸랑. 츠빙글리네도 고민 해. 츠빙글리쪽은 완전히 교회 예배랑 단어며 다시 고민을 해 독자적으로. 루터는 영웅놀이하고 지 혼자 신나 할때. 이게 진짜로다가 말야. 현장에서. 캔톤의 짱들이랑. 현실에서 구현하려 해보니까. 장난이 아닌거야. 단어도 아 다르고 어 달라. 카톨릭 역사 1천5백년간 쌓여온 그 이야기가 쉬운게 아냐. 그게 그리 단순하지 않걸랑. 더하여 거기에 묶인 민들의 마음이 또한 천오백년이야. 
일단. 주최측 들도. 답을 잘 몰라. 투비를 몰라. 그냥 저거 나뻐. 저거 개개끼. 그건 쉬운 거걸랑. 헌데 막상 말야. 그래서 개선안을 현장에 구현할 정도로 해보려 하니까. 그건 엄청난 일이야. 교부들이 사오백년걸려서 해온 일이야. 그걸 지들이 머라고. 새로운 다른 안 들을 홰까닥 만드니 그걸.


저러면서. 이전 꺼 다 바꿔. 하면서리. 아 단지 방향 자체 잡기도 애매 한데. 거다 대고. 구체적 방안을 이전과 완전 다르게 홰까닥 만들어 이행하자 하면 그게 현장에 먹히냐 그게.

그 부작용을 아는거야 츠빙글리네가. 헌데 저 형제단 애들이 저 이야기를 밀어부치고.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 지들이 막막 세례 을 하는거야. 

니덜 다시 그 하면. 죽인다.

이들이 떠나. 펠릭스 만츠. 저사람은 그리고 다시와. 또해. 죽여. 츠빙글리도 죽이는거에 반론 안해.

저들이 대부분 스위스나 독일땅으로 떠나서리 저걸 전파해. 대부분 일찍 죽어 그래서. 

저런 이들이 독일땅에도 있던거야. 저지대에.

Jan Matthys (also known as Jan MatthiasJohann MathyszoonJan MattijsJan Matthijszoon; c. 1500, Haarlem – 5 April 1534, Münster) was a charismatic Anabaptist leader of the Münster Rebellion, regarded by his followers as a prophet.

 

John of Leiden (DutchJan van Leiden; also Jan BeukelszJan BeukelszoonJohn BockoldJohn Bockelson; February 2, 1509 – January 22, 1536), was an Anabaptist leader from Leiden, in the Holy Roman Empire's County of Holland

 

잔 마티스. 베이커. 제빵사야. 존 오브 아이덴. 얀 판 라이덴. 재단사 보조. 출신이야. 

 

 

Melchior Hoffman (or Hofmann; byname: Pel(t)zer "furrier"; c. 1495 – c. 1543) was an Anabaptist prophet and a visionary leader in northern Germany and the Netherlands.

 

 

멜히오르 호프만. 이사람은 뷔르템베르크 스와비아 출신이야. 루터 이야기를 들어. 거기서 지 나름 깨달아서리 평신도 상태에서 설교하러 다녀. 수도사도 사제도 아냐. 혼자 예언자가 된거야. 칼슈타트 도 만나. 칼슈타트 쎄. 

 

Caspar (or Kaspar) Schwen(c)kfeld von Ossig (About this sound listen ) (1489 or 1490 – 10 December 1561) was a German theologian, writer, and preacher who became a Protestant Reformer and spiritualist. He was one of the earliest promoter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in Silesia.

 

카스파르 슈벤크펠트 폰 오씨지. 이사람의 인맥도 칼슈타트.와 토마스 뮌처야. 독고다이 쎈애들만 만나. 루터 별로야. 역시 혼자 다녀. 멜리호르. 카스파르. 칼슈타트. 서로 알아. 헌데 각각 다녀. 각각이 예언자야. 토마스 뮌처는 농민전쟁때 죽어. 키스파르는 실레시아. 폴란드 서남부에가서 전파한겨. 멜리호르.는 독일 저지대랑 스웨덴 돌아다니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세례자 행세하는겨 끝까지. 이들이 스스로 수천명을 돌아다니면서 세례를 하는겨. 

 

 

잔 마티스.가 빵굽다가. 멜히오르.를 알게되고 세례를 받아. 그리고 자기가 또한 예언자가 되서리 수천명을 뮌스터에서 세례를 하면서 자기의 신도들을 만들어. 이 중 하나가 라이덴.의 존. 얀 판 라이덴.이야. 

 

 

잔 마티스.는 판관기 의 기드온. 장군을 자처해. 라이덴.은 뮌스터의 킹 을 자처해. 이들 아나뱁티스트들이 무기를 잡은거야. 그리고 뮌스터를 장악을 한거야. 

 

 Matthys identified Münster as the "New Jerusalem", 

 

마티스는 뮌스터를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천명하였다.

Bernhard (or Bernard) Rothmann (c. 1495 – c. 1535) was a 16th-century reformer and an Anabaptist leader in the city of Münster. He was born in Stadtlohn, Westphalia, around 1495.

 

버나드 로트만. 이 사람 약력이 확실치 않은데. 이사람이 공부한 사람이야. 원래 카톨릭을 신학적으로 비판을 하다가. 저들을 알게돼. 저들을 통해서리 재침례교가 된겨. 이때 이사람들의 팜플렛의 내용들은 로트만이 만든거야. 대자보 전쟁이야. 

 

뮌스터.는 루터파가 많았어 원래.

 

 

 The pamphlets at first denounced Catholicism from a radical Lutheran perspective, but soon started to proclaim that the Bible called for the absolute equality of man in all matters including the distribution of wealth. The pamphlets, which were distributed throughout northern Germany, successfully called upon the poor of the region to join the citizens of Münsterto share the wealth of the town and benefit spiritually from being the elect of Heaven.

 

농민전쟁의 12개 조항에 더나가서 그 민들이 재산도 다 나눠갖자는 주장도 했었던거야. 여기도 마찬가지야. 

 

성경을 직접 찐하게 듣보게 되면서. 신약을 들으면서.  저기서 인간은 신 앞에 모두 평등한거야. 똑같이 대속을 받은겨. 지저스가 신분에 따라서 대속의 권리를 나눠준게 아냐 하는거야. 다 똑같아. 이게 체제 운동으로 가는거야 종교에서. 

인간의 평등. 이란 생각이 나오고. 여기서 끄집어내는게. 부의 평등이야. 재산도 나눠야해. 당연히 없이 사는 이들이 몰리는거야. 그리고. 이따위 말을 믿고 깨달은 자여. 진짜 세례를 받아라. 우리모두는 태어나서 바로 애기때 세례를 받았잖니? 그게 뭐니 그게. 멀 안다고. 자각을 한 이들이여. 그대들이 진짜 그리스도니라. 자 나에게서 세례를 받으라. 나는 예언자니라.

저게. 인간 평등.에 자유. 까지 가는거야. 저 평등 놀이가. 재산 같이 나누기 하는거고.




해서리 저것만 똑떼서. 적폐 들 재산은 다 부패에 기득권이라서리 빼앗아서. 삼성 현찰들 사천만에 나누면 부자가 되는데. 하는게 원내대표란 의 말이고. 아 허섭한데. 애들 수준이 저때 저 수준. 도 안돼. 왜냐믄 저들은 나름 찐한 각성에서 나온 거고. 이땅바닥은 개 무식한 들이 남 따라 이바구질 하는거고.

on January 5, 1534, a number of his disciples entered the city and introduced adult baptism. Rothmann apparently accepted "rebaptism" that day, and well over 1000 adults were soon baptised. Vigorous preparations were made, not only to hold what had been gained, but to spread their beliefs to other areas. The many Lutherans who left were outnumbered by the arriving Anabaptists, there was an orgy of iconoclasm in cathedrals and monasteries, and rebaptism became compulsory. The property of the emigrants was shared out with the poor and soon a proclamation was issued that all property was to be held in common.[2]

 

1534년 1월 5일. 잔 마티스.는 자기 신도들과 뮌스터를 들어가서리 어른 세례를 소개했다. 로트만은 재침례주의. 리뱁티즘이라 명확히 했다. 천명이상이 곧 세례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도시 전역에 퍼뜨리다. 많은 루터파들은 쪽수가 안됐다 재침례교에게. 성당과 수도원들의 성상 파괴를 미친듯이 해댔고 재침례는 강압적이기까지 햇다. 도망간 자들의 재산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모든 재산은 공유물이고 같이 씀을 선언한다는 선언도 나왔다.

 

 

 

저을 여전히 못하고 싶어서 환장하는거지. 21세기에도.

 

 

 

 

Iron baskets that held the corpses of the leaders of the Münster Rebellion at the steeple of St. Lambert's Church.



After lengthy resistance, the city was taken by the besiegers on June 24, 1535 and John of Leiden and several other prominent Anabaptist leaders were captured and imprisoned. In January 1536 John of Leiden, Bernhard Knipperdolling and one more prominent follower, Bernhard Krechting, were tortured and executed in the marketplace of Münster. Their bodies were exhibited in cages, which hung from the steeple of St. Lambert's Church. The bones were removed later, but the cages hang there still.

 

1년 지나서. 다시 진압이 돼. 잔 마티스.는 죽여서. 갈갈이. 흩뿌리고. 신체일부는 걸어놓고. 로트만.은 시체를 못찾았어. 뮌스터의 킹을 자처한 라이덴의 존. 과 두명. 해서 새명은 저 케이지.에 넣어놓았어. 유골은 치웠고. 그 케이지는 지금도 저기 성 람베르트 교회 뮌스터에. 세개가 여전히 걸려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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