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y, Queen of Scots (8 December 1542 – 8 February 1587), also known as Mary Stuart[3] or Mary I of Scotland, reigned over Scotland from 14 December 1542 to 24 July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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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VI (12 October 1537 – 6 July 1553) was King of England and Ireland from 28 January 1547 until his death.

 

Mary I (18 February 1516 – 17 November 1558), also known as Mary Tudor, was the Queen of England and Ireland from July 1553 until her death. as "Bloody Mary" by her Protestant opponents.

 

Elizabeth I (7 September 1533 – 24 March 1603)[1] was Queen of England and Ireland from 17 November 1558 until her death on 24 March 1603. Sometimes called The Virgin QueenGloriana or Good Queen B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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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의 마리. 갓 6일된 애기가 퀸 레그넌트. 여자 킹.이 되고. 잉글랜드의 헨리8세는 자기 아들 에드워드 6세와 결혼시키자고 루잉. 구애를 러프. 거칠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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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라 나중 작명하지만. 저건 전쟁. 이야. 이전 솔웨이 모스. 전투로 제임스 5세가 후유증에 죽었듯이. 구애를 빙자해서 무력으로 압박을 해. 스콧의 로마 카톨릭 지우기 위함이 커.

 

The Burning of Edinburgh in 1544 by an English sea-borne army was the first major action of the war of the Rough Wooing

 

잉글랜드가 함선 200대에 보병 기병해서 2만여명을 에든버러로 침투시켜서리. 에든버러를 약탈하고 가. 스콧의 마리. 만으로 두살도 안된겨. 얘를 피신 시키는거야. 잉글랜드에 잡히면 끝나는거야. 

With her marriage agreement in place, five-year-old Mary was sent to France to spend the next thirteen years at the French court. 1548년. 

 

스콧과 프랑스는 오래된 동맹이야. 베일리어 가문의 존 베일리얼. 부터 삼백년 가까이 된겨. 스콧은 킹이 인질되고서리 잠깐 프랑스에 등돌릴 수 밖에도 없었지만 이 동맹은 꾸준히 유지가 되는거야. 이건 나중에 스콧 제임스 후예들이 왕정 복권 운동할때도 계속 돼. 

 

프랑스의 앙리2세.가 직접 함대를 보내서리 스콧 마리를 데려와. 아들 프랑수아 2세 나중.과 혼인시키기로 한거지. 이 프랑스에서 13년을 스콧 마리가 지내는거야. 프랑수아 2세가 두살 적어. 각각 14세 16세 때에 결혼식 하고. 앙리2세가 이탈리아 전쟁 끝내는 조약을 맺고. 축하 연회장에서 자우스팅 직접 자기 근위대장 스콧사람이랑 하다가 그 파편이 뇌까지 파고들어서리 죽고. 15세에 킹이 되서리 1년 하다가 갑자기 실신을 해. 뇌막염이다 이염이다 알길없고. 죽어. 

 

On 4 April 1558, Mary signed a secret agreement bequeathing Scotland and her claim to England to the French crown if she died without issue.[43] Twenty days later, she married the Dauphin at Notre Dame de Paris, and he became king consort of Scotland.[44][45]

 

스콧 마리.는 프랑스 앙리2세에게. 아들과 결혼전에. 비밀 계약에 사인을 해. 자기가 죽으면 스콧을 프랑스에 주겠다. 잉글랜드에 대한 승계권도 주겠다. 스콧마리가 튜더 핏줄이고. 마리 나 엘리자베스 는 결혼 취소 된 핏줄이고 역모로 사형당한 엄마의 핏줄이라 자격이 스콧마리에게 있다는거지. 그리고 결혼하다가. 프랑스와 킹 자리에 오르고. 일년 반만에 죽어서리. 스콧에 오는겨. 13년 만에.

 

Mary returned to Scotland nine months later, arriving in Leith on 19 August 1561.[59] 

 

19살에 돌아온거야. 

 

Mary of Guise (FrenchMarie de Guise; 22 November 1515 – 11 June 1560), also called Mary of Lorraine, ruled Scotland as regent from 1554 until her death.

 

스콧 마리의 엄마.는 기즈.의 마리. 이 기즈 가문은 로렌 가문의 방계야. 

 

로렌. 로타르의 땅. 나중 오토1세가 동생 대주교 부르노.에게 주고. 부르노가 고지대 저지대 로렌으로 나눠서 몽스 백작과 바 공작에게 주고. 이걸 고젤로.가 다 받고. 이들 곳프리가 깽판치고 이걸 진압한 메스 백작 아달베르.가 고지대 로렌.을 하사받아서 로렌 가문 시작이 되고. 여기의 방계가 기즈 가문이야.

 

이 기즈 가문.이. 저 기즈의 마리.가 스콧 제임스5세에게 시집가고 딸 스콧 마리가 킹이 되고 프랑스 퀸자리로 13년 프랑스에 머물면서. 스콧에서 섭정을 하고, 프랑스에서도 권력이 되는거야 이 기즈 가문이. 프랑수아 2세 다음에 샤를9세 앙리3세 때의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카톨릭 세력의 중심이 이 기즈가문이야. 또한 스콧에서도 기즈 마리가 섭정할때 권력은 기즈가문이야. 헌데 엄마 기즈가 죽었어. 프랑스 킹 신랑도 죽었어.

 

Henry Stuart (or Stewart), Duke of Albany (7 December 1545 – 10 February 1567), styled as Lord Darnley until 1565, was king consortof Scotland from 1565 until his murder at Kirk o' Field in 1567

 

Darnley was murdered eight months after James's birth. On 9 February 1567, his body and that of his valet were discovered in the orchard of Kirk o' Field, in Edinburgh, where they had been staying.[37]

 

 

스콧 마리.가 단리 헨리 스튜어트.랑 결혼하는게 4년 후야. 1565년. 이 단리.는 2년 후에 폭사 암살로 죽어. 커크 오 필드. 에든버러. 커크. 가 쿠리오스. 퀴리오스. 신. 스콧이 그리스어와 비슷한 신.의 발음을 계속 쓰는겨. 처치. 안하고 커크. 하는거지. 교회건물의 숙소야. 여기사 단리 헨리가 천연두 치료 요양 중이었걸랑. 스콧 마리.는 근처에 자기가 아끼던 시종 결혼식에 참석차 근처에 왔고. 그참에 신랑도 데려가려 했고. 폭탄이 터진게 새벽 두시야. 단리.랑 시종. 둘이서 숙소 근처 과수원에서 잠옷차림으로 발견이돼. 상처는 없어. 해서 목졸려 죽인듯 하지만. 폭탄으로 내부장기 파손으로 죽었을 지도 하고. 

 

On 24 July, she was forced to abdicate in favour of her one-year-old son James.[136] Moray was made regent,[137] while Bothwell was driven into exile. He was imprisoned in Denmark, became insane and died in 1578.[138]

 

스콧 마리.가 왕위를 한살짜리 아들 제임스 6세.에게 물려줘. 쫓겨나. 당해 1567년 7월. 암살 다섯달 후야. 

 

she crossed the Solway Firth into England by fishing boat on 16 May. 1568

 

In mid-July 1568, English authorities moved Mary to Bolton Castle, because it was further from the Scottish border but not too close to London.[146] 

 

스콧 마리가. 도망나와서 잉글랜드로 간게 다음해야. 

 

 

Mary was convicted on 25 October and sentenced to death with only one commissioner, Lord Zouche, expressing any form of dissent.[209] Nevertheless, Elizabeth hesitated to order her execution, even in the face of pressure from the English Parliament to carry out the sentence. 1586

 

스콧 마리.가 잉글랜드에서 사형 판결 받는게. 그후 18년 지난 1586년 10월 25일.

 

At Fotheringhay on the evening of 7 February 1587, Mary was told that she was to be executed the next morning.

 

다음해 1587년 2월 7일.에 사형을 당해. 나이 4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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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헨리8세가 1547년.에 죽어. 앤불린 죽고 11년 후. 슈프림 헤드 오브 처치.하고 16년 후. 헨리8세가 카톨릭을 버린건 전적으로 앤불린이야. 나이 40 되어서 슈프림 헤드 처치. 한겨. 저건 쉽지 않은거야. 권력 가진 자가. 애기때부터 쩔고 쩔은 생각의 바다에서 나온다는게 조오온나게 불가능하기 까지 한겨.
남들은 바닥에서 세상의 문제를 몸소 체득하면서 생각을 바꾸는 거야. 북유럽 애들도 권력 투쟁하면서 거기서 자기가 필요해서 바꾼거야. 하물며 독일땅 영주들도. 얘들은 을이야 갑이 아냐. 을의 입장에서 문제 인식후 자기의 권력을 위해 프로테스탄트 하는거야
헨리8세의 경우는 전혀 달라. 이 입장에선 생각을 바꾸는게 불가능한거야.
카를 5세는 플랑드르 에서 자랐어. 얜 열린애야 좀. 신성로마제국은. 

Charles V (SpanishCarlosGermanKarlItalianCarloDutchKarelLatinCarolusFrenchCharles Quint[a] 24 February 1500 – 21 September 1558) 

 

카를 5세가 58세에 죽어. 19살때 오르고 40년을 황제한거야. 이 인간은 위대한 인간이야. 헌데 플랑드르 출생이라서 가능했어. 죽기 2년전엔 동생 지지하고 자리를 내려놓는데. 동생이 표가 밀려서 제발 더 있으라 부탁을 해. 통풍이 와 죽기 6년전부터. 수도원에 들어가서 죽었어. 

이사람이. 슈파이어 다이어트 1526년. 독일 농민전쟁 다음해야. 루터파가 진압해준겨. 루터 범법자 선언한 보름스 칙령을 유보해. 그러다 3년후 같은 슈파이어 회의 1529년. 루터파 금지. 이게 3월이야. 바로 다음달 4월에 같은 곳 슈파이어 에서 6개 영주들과 14개 도시영주들이 프로테스탄트.가 정식으로 된거야. 
이미 저때는 스웨덴 구스타브 바싸가. 1527년에 릭스다크.에 리포메이션.을 선언한 상태. 덴마크 노르웨이의 프레데릭1세도 조카 몰아내고 1523년에 킹되서 프로테스탄트를 추진해. 루터파 인기 좋아 막막 좀 와달라해.
잉글랜드는 헨리8세가 저때 앤불린에 들이대민서리 1527년 사코디로마때 결혼취소 사신파견할 때야. 얜 이때 저게 머여 하민서리 두리번 거릴때.

카를5세는 고리타분 인간이 아니걸랑. 저리 왔다리 갔다리 하걸랑. 얜 여기서 모든 판들을 다 봐야 할 입장이야. 제일 피곤한겨. 플랑드르에서 자란 애야. 다행인겨. 얘가 프로테스탄트의 말도 들어. 


The Augsburg Confession, also known as the Augustan Confession or the Augustana from its Latin name, Confessio Augustana, is the primary confession of faith of the Lutheran Church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document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The Augsburg Confession was written in both German and Latin and was presented by a number of German rulers and free-cities at the Diet of Augsburg on 25 June 1530.

The Holy Roman Emperor Charles V had called on the Princes and Free Territories in Germany to explain their religious convictions in an attempt to restore religious and political unity in the Holy Roman Empire and rally support against the Turkish invasion. It is the fourth document contained in the Lutheran Book of Concord.

 

아우크스부르크 콘페션. 저게 1530년 6월이야. 슈파이어 회의 1529 다음이야. 프로테스탄트 20개 군주들이 반발을 했어. 그다음의 아우크스부르크 다이어트야. 이때 카를 5세가 나이 30. 저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에게 요구하는거야. 니들이 하고픈 말을 구체적으로 정리를 해 달라. 지금 오스만애들이 쳐들어온다. 카톨릭이던 루터던 같은 그리스도 라 생각한다. 

 

해서리 이때 루터파들이 모인거야. 루터.는 슈파이어 1529때메 다시 범법자야. 얜 여기 없어. 그래도 실세야 이가. 루터랑 딱깔이 애들 멜란히톤. 유스투스 요나스. 셋이서 드래프트 갖고 가서리 저 모든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학자들이 모이는거야. 황제에게 요구하는 공식 선언문이야. 여기서의 중심은 작센의 선제후 존 이고. 헤세의 필립이야. 28개 조항. 이걸 보면 저 루터애들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볼 수가 잇어. 이런 이야긴 넘어가고. 나중에 하던말던. 

 

 

Philipp MelanchthonMartin Luther and Justus Jonas had already drafted a statement of their theological views in the Articles of Schwabach in 1529, [1] when on 21 January 1530, Emperor Charles Vissued letters from Bologna, inviting the Imperial Diet to meet in Augsburg on 8 April for the purpose of discussing and deciding various important questions. Although the writ of invitation was couched in very peaceful language, it was received with suspicion by some of the Protestants. Landgrave Philip of Hesse hesitated to attend the diet, but the Elector John of Saxony, who received the writ 11 March, on 14 March directed Martin Luther, Justus Jonas, Johannes Bugenhagen and Philipp Melanchthon to meet in Torgau, where he was, and present a summary of the Lutheran faith to be laid before the Holy Roman Emperor at the diet.[2]

 

카를5세가 1530년 1월 21일에 볼로냐에서 공고문을 날려. 4월 8일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다이어트를 하는데 니덜을 초대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심을 하는겨. 아 초대를 빙자해서 다 죽일라는거 아녀? ㅋㅋㅋ. 헤세의 필리프. 작센 선제후 존. 이 정식 초청장을 3월에 받았어. 작센이 루터에게 지시를 내려. 니 딱깔이 유스투스 요나스. 요하네스 부겐하겐. 필리프 멜란히톤.을 내 있는 곳 부근 작센의 토르가우.로 보내라우. 저기서 부겐하겐.은 루터보다 두살많아. 이사람이 루터 성경번역에 같이 참여한겨. 그리고 북유럽에 루터파 부를때 구스타파 바싸와 프레데릭1세 킹들이. 이사람이 가서 저기 프로테스탄트 로 예배식에 성경 번역 하는걸 참여하는겨 나중. 하튼 가서리 루터가 정리해준 가안을 갖고 저기서 다시 작업을 하는거야.

 

On 23 June, the final form of the text was adopted in the presence of the Elector John of Saxony, the Landgrave Philip of Hesse, the Margrave George of Brandenburg, the Dukes Ernest and Francis of Lüneburg, the representatives of Nuremberg and Reutlingen, and other counselors, besides twelve theologians. After the reading, the confession was signed by the Elector John of Saxony, Margrave George of Brandenburg, Duke Ernest of Lüneburg, the Landgrave Philip of Hesse, the Prince Wolfgang of Anhalt, the representatives of Nuremberg and Reutlingen, and probably also the electoral prince John Frederick and Duke Francis of Lüneburg.[2]

 

저 토르가우.에서 세달을 루터빼고 작업하는겨. 두 영주랑 세 루터파가. 루터랑 수시로 서신 교환하며 컨펌받고. 그래서 6월 23일에 최종 안이 나와. 이걸 프로테스탄트 영주들과 신학자들에게 다 확인을 받아. 

 

 The emperor had ordered the confession to be presented to him at the next session, 24 June. When the Protestant princes asked that it be read in public, their petition was refused, and efforts were made to prevent the public reading of the document altogether. The Protestant princes declared that they would not part with the confession until its reading should be allowed.[2]

 

카를5세가 그걸 제출하라고 해. 다음 세션인 익일 6월 24일.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이 요청해. 우리의 신앙고백. 콘페션. 저 28개로 정리된 내용들을 공개된 장소에서 다 들리도록 읽어달라고. 거절해. 이 건물 밖으로 저 이야기가 나가면 안돼 하는겨. 

 

지금 상황이. 저 건물 밖에. 사람들이 득실득실 지금 몰려있는거야. 시급한 중요한 안건이걸랑. 밖에 버글버글 한거야. 저 컨페션 글이 밖의 사람들에게 안들린다면. 읽게 안해주면. 제출도 안할거고 더이상 이 회의에 참여 안한다. 

 

다음날이 되었어. 카를 5세가 꼼수를 부려.

 

 

 

The 25th was then fixed for the day of its presentation. In order to exclude the people, the little chapel of the episcopal palace was appointed in place of the spacious city hall, where the meetings of the diet were held. The two Saxon chancellors Christian Beyer and Gregor Bruck, the former with the plain German copy, the other in traditional Latin language, against the wish of the emperor stepped into the middle of the assembly. The reading of the German version of the text by Christian Beyer lasted two hours and was so distinct that every word could be heard outside. The reading being over, the copies were handed to the emperor. The German copy he gave to the imperial chancellor, the Elector of Mainz. The Latin copy he took away. Neither of the copies is now extant.[2]

 

회의장소를 바꽈. 청사 안에 작은 채플로. 그래 그럼 읽어라 하는겨. ㅋㅋㅋ. 이때 작센의 의장들 둘이서 읽는겨. 게르만어로 된 걸. 두시간동안 읽었어. 아마 밖에 모든 사람들이 들리도록 크게 천천히 읽는겨 이걸. 그리고 나서리. 카를 5세에게 제출을 했다. 게르만어와 라틴어로 된 걸 두개 줬는데. 카를은 라틴어로 된것만 받았다. 저 건네줬다는 저 원본글은 없는겨 지금. 사본만 남은거고. 

 

 

Diet of Augsburg by Christian Beyer.

 

당시 회의. 크리스티안 바이어. 당시 직접 카를 앞에서 읽은 사람.이 그린 그림.

 

 

여기에 대한 답이. 두리 뭉실한거야. 

 

 

 Following debate between the court of Charles V and the Vatican representatives, the official response known as the Pontifical Confutation of the Augsburg Confession was produced to the Diet, though the document was so poorly prepared that the document was never published for widespread distribution, nor presented to the Lutherans at the Diet.

In September, Charles V declared the response to be sufficient and gave the Lutheran princes until 15 April 1531 to respond to the demands of the Confutation. In response, Phillipp Melancthon wrote a lengthy and sustained argument both supporting the Augsburg Confession and refuting the arguments made in the Confutation. This document became known as the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and was soon translated into German and was widely distributed and read throughout Germany.

 

카를이 저걸 보고. 바티칸이랑 검토해서 답을 해야해. 답을 했어. 헌데 부실한거지. 그 내용이 먼지는 공개되지 않았어. 하튼 당사자들은 들은겨 그 내용을. 그에 대해서 카를이 요구해 답을 하라고. 다음해 4월 중순까지. 

 

The Lutheran princes at the diet concurrently agreed to a military alliance in the event of action by Charles V known as the Schmalkaldic League.

해서 만든게. 프로테스탄트 동맹.이야 군사적 동맹. 아 전쟁을 해야 하는구나. 즉 카를과 바티칸의 요구사항 그 부실.의 내용이 허섭했던지 자기들에게 무리한걸 요구했던거지. 

 

이때 두 사람이 역시 헤세의 필리프.에 작센 선제후 존 프레데릭이야. 

 

The League was officially established on 27 February[2] 1531, by Philip I, Landgrave of Hesse, and John Frederick I, Elector of Saxony, the two most powerful Protestant rulers in the Holy Roman Empire at the time.[3] 

 

Schmalkalden (

German pronunciation: 

[ʃmalˈkaldən]) is a town in the Schmalkalden-Meiningen district, in the southwest of the state of ThuringiaGermany

 

슈말칼덴. 이 독일땅 완전 가운데야. 투링기아.의 작은 마을. 

 

 
저런 요구의요구들이 오고가다가.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후 15년 지나서리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카톨릭 군주들이 벌이는거야 독일땅에서. 저때 작센의 다른 방계 가문이 돌아서 카톨릭으로. 그리고 카톨릭이 이기고서리 저 작센 선제후의 땅을 더 갖고 오면서 선제후 권까지 갖고오는겨 이사람이. 
 
 
The Peace of Augsburg, also called the Augsburg Settlement,[1] was a treaty between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the predecessor of Ferdinand I) and the Schmalkaldic League, signed in September 1555 at the imperial city of Augsburg.
 
그리고나서 말야. 카를 5세가. 자기가 퇴임하겠다는 해 의 직전 해에. 하는게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이야. 
 
 

Cuius regio, eius religio is a Latin phrase which literally means "Whose realm, his religion", meaning that the religion of the ruler was to dictate the religion of those ruled. 

 

여기서 나온 말이.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 지배하는 자의 종교. 그 영주의 종교에 따라서 그 영지의 종교를 채택한다. 

 

그리고나서리 60여년 후인 1618년에 30년 전쟁이 발발하는거지만.

 

 

카를 5세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거였어 저게. 카를 5세는 인정을 해 줘야해. 저렇게 라도 들어주면서리 풀어주는거야. 저 아우크스부르크 컨페션.이 루터애들에겐 시작으로 봐. 아주 귀한 날이야. 모여서 크게 읽은 날. 카를이 저걸 두시간 동안 들어주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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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5세가 그래서 또한 대단한 인간이지만. 얜 어릴때 플랑드르 출신이라. 저게 가능한거야.

다음 황제 페르디난도. 가 동생이 황제가 되는데. 이사람도 스페인을 떠나서 말이야. 형이 너 스페인 있지말아라 반란의 수괴가 된다 해서리. 그러면서 여기저기 전쟁참여하고 형옆에 있으면서 나름 생각이 트이는겨. 얜 유도리가 있어 그래도. 
나중에 삼십년 전쟁 터지는 시작이 프라하에. 꼴통 황제 프리드리히2세.걸랑. 저 페르디난도 1세의 장남 핏줄이 끊겨서리 다른 아들 자식. 즉 얜 손자야 카를5세 동생 페르디난도1세의. 완전 합스부르크 꼴통이 프라하에 카톨릭 심을라다가 삼십년 전쟁이 시작인건데.

카를5세 다음에 스페인의 킹이 되는 필리프2세.도 정통 카스티야 꼴통 카톨릭이야. 절대 못봐꿔. 얘가 프랑스 종교전쟁에 카톨릭 지킨다고 돈대주다가 스페인이 결국 거지가 되는겨. 카를5세가 원체 빚을 많이 졌고. 이 황제들이. 황제군단으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용병으로는 전쟁을 못해. 해서 개인 돈을 쓰면서 용병을 쓰는거야. 황제는 힘이 없어 저 신성로마 황제는. 명예직이야 이게 보믄. 

못봐꿔. 어릴때 부터 길들여져서리. 바닥에서 체험해서리 권력 쟁탈하고 바꾸는 거 아니면.

헨리 8세는 이걸 바꾼거야. 이건 전적으로 앤불린.의 힘이야.

이 이야기 할라다가. 저 까지 오게된건데. 
하튼 앤불린은 엄청난 여자야 그래서.

스코의 마리. 이야기 할라다가 샌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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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ecution scene, drawn by eyewitness Robert Beale

 

 

Robert Beale (1541 – 25 May 1601) was an English diplomat, administrator, and antiquary in the reign of Elizabeth I. 


로버트 빌. 잉글랜드 외교관 행정관. 고전수집가. 스콧 마리 처형 목격하고 그린 그림.

.스콧 마리 당시의 잉글랜드를 보면. 

헨리8세가 못움직일정도로 되서리 죽어. 1547년. 다음 킹이 에드워드 6세. 10살 짜리야. 얘가 6년 하고 죽어. 다음 마리 가 37세에 킹 오르고 5년만에 죽어. 암인듯. 그리고 엘리자베쓰가 25살 되서리 킹 오르고 45년을 킹자리 하면서 잉글랜드가 자리를 잡아.

 

1547년. 1553년. 1558년. 1603년.에는 제임스1세.

 

스콧의 마리.는 1561년. 19살에 스콧와서 1667년.에 쫓겨나. 킹을 6년밖에 안한거야. 그리고 그뒤 18년은 잉글랜드에 피신해있다가. 잉글랜드 킹 자리 넘보면서 세월 다 보내고 사형당한 참 불운한 여자야 이여자가. 

 

 

스콧 마리가 킹 일때 아기부터. 잉글랜드가 헨리8세 에드워드6세 마리 엘리자베쓰를 다 겪은거야. 이때 프랑스는 앙리2세에 한때남편 프랑수아2세 샤를9세 앙리3세. 저 프랑스 킹 네명이 모두 메디치의 캐서린의 남편이고 자식들이야. 

 

이때 스페인은 카를5세의 아들 펠리페2세야. 카톨릭 수호. 피의 마리가 잉글랜드 카톨릭 지키려고 이 펠리페2세와 결혼을 해. 죽어서 다시 오고나서리. 다음 엘리자베쓰랑 전쟁하는겨 그게 1588 스페인 아르마다. 야. 스페인 무적함대가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대패하는. 결국 이것도 종교전쟁이야. 

 

저때의 중심에 스콧 마리야. 

 

어릴때는 헨리8세의 러프 우잉. 거친 구애로 전쟁하며 침입하다가. 프랑스에서 13년 생활하지만 남의 집이고. 돌아와서 6년 살다가. 잉글랜드가서 18년 있다가 처형을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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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 Seymour (c. 1508 – 24 October 1537) was Queen of Englandfrom 1536 to 1537 as the third wife of King Henry VIII. 

 

제인 시모어. 에드워드 6세의 엄마야. 헨리의 세번째 부인. 앤불린이 똑똑에 배운거도 많은 반면 이여잔 바느질 잘하는 그야말로 여자야. 읽고 쓰는 것만 알아. 딱 반대로 고른거지. 캐서린의 메이드에 앤불린의 메이드였어. 앤불린 죽기 세달전에 헨리 눈에 들어왔대. 28살 결혼. 에드워드 낳고 산후후유증으로 바로 죽어. 

 

Edward Seymour, 1st Duke of Somerset KG (c. 1500[3] – 22 January 1552) was Lord Protector of England during part of the Tudor periodfrom 1547 until 1549 during the minority of his nephew, King Edward VI (1547–1553). 

 

에드워드가 10살이야. 잉글랜드는 프로텍터. protector 라는 말로 섭정이 돼. 헨리가 16명의 엑서큐터. 걍 집행부라 하면. 임명하고 죽어. 시모어.의 오빠야. 당근 엄마 핏줄이 권력을 잡아. 이사람이 프로텍터. 조카 왕의 후견인이 돼. 소머셋 somerset 공작의 시작이야. 소머셋은 콘월 오른옆 데본 옆의 오른쪽위야. 

Kett's Rebellion was a revolt in Norfolk, England during the reign of Edward VI, largely in response to the enclosure of land. It began at Wymondham on 8 July 1549 with a group of rebels destroying fences that had been put up by wealthy landowners.

 

케트.의 반란. 노퍽. 여기 반란을 이사람이 진압을 해. 이 케트 반란은 엔클로져.에 대한 반발이야. 종교와는 관계 없어. 이 엔클로져는 다음으로 미루고 다른 주제라서. 

 

The Prayer Book Rebellion, Prayer Book Revolt, Prayer Book Rising, Western Rising or Western Rebellion (Cornish: Rebellyans an Lyver Pejadow Kebmyn) was a popular revolt in Devon and Cornwallin 1549. 

 

프레어 북 리벨리온. 앵글리카니즘의 공동기도서.에 의한 예배.에 대한 반기야. 저기가 데본에 콘월. 콘월은 켈트고. 데본이 바로 옆이야. 비슷해. 보수적인 동네야. 카톨릭이 쎄. 여기서 반기를 든겨. 바로 옆이 소모셋이야. 저 제인시모어 오빠가 와서 진압해. 다 에드워드 6세 꼬마가 킹일때야

 

The Battle of Sauðafell (Orrustan á Sauðafelli) occurred in 1550, when the forces of Catholic Bishop Jón Arason clashed with the forces of Daði Guðmundsson of Snóksdalur.

 

저건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랑 카먼웰스 초기. 스투룰룽 인가 기억나냐 . 하튼 노르웨이꺼였다가. 노르웨이가 덴마크 속주가 되고. 여기도 프로테스탄트가 들어오는겨. 카톨릭이 들고 일어나. 

 

아이슬란드.는 나폴레옹이 와서야. 독립 시작하고 월드워 끝나고 독립이 된겨.

 

그 위. 그린란드.는. 18세기에 덴마크가 들어간겨. 저건 지금 덴마크 땅이야.

 

The Second Margrave War (German: Zweiter Markgrafenkrieg) was a conflict in the Holy Roman Empire between 1552 and 1555.

 

후작 전쟁. 야 간만에 이따위 전쟁. 신성로마에서 서로 싸우는거. 넘어가.

 

 

Wyatt's Rebellion was a popular uprising in England in 1554, named after Thomas Wyatt, one of its leaders. 

 

와이어트 반란. 잉글랜드. 1554년. 이 직전해에 피의 마리.가 킹이 되었어. 이젠 다시 카톨릭 세상인거야. 마리가 스페인 펠리페랑 결혼하려해. 프로테스탄트 와이어트 위주로 반란을 하는거야.

 

이 직전에 말야.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역모혐의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받았어. 그래도 마리가 결정을 안했어. 마리.는 죽일 생각이 없었어. 저 여자들이 다 분노에 복수질 하는 그런 여자들이 아냐. 헌데. 이 와이어트 반란.으로 피의 마리가 마음을 굳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사형시키는거야. 

 

두개 건너띄고

 

The Siege of Leith ended a twelve-year encampment of French troops at Leith, the port near Edinburgh, Scotland. The French troops arrived by invitation in 1548 and left in 1560 after an English force arrived to attempt to assist in removing them from Scotland.

 

라이쓰 함락. 라이쓰 leith 가 에든버러 근처 항구도시야. 아직 스콧 마리가 프랑스 있을때야. 마리가 오기전에 엄마 기즈 마리가 섭정을 하다 죽었어 저 해에. 이때까지 스콧은 카톨릭이야. 기즈마리도 프랑스 여자 카톨릭이야. 스콧은 러프 우잉 때부터 특히나 프로테스탄트 탄압 받은거야. 스콧마리 프랑스에 데려오고 프랑스군이 스콧에 상주하는겨 기즈마리 죽을때까지. 그리고 스콧 마리가 돌아온거야 19살에. 저때는 엘리자베쓰야. 피의 마리가 2년전에 죽었어. 잉글랜드는 다시 프로테스탄트야. 잉글랜드 군대를 저 라이쓰로 침투시키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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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Seymour, 1st Baron Seymour of Sudeley, KG (c. 1508 – 20 March 1549)[1] was the brother of the English queen Jane Seymour

 

토마스 시모어. 에드워드6세 꼬마킹의 엄마 제인 시모어.의 그 소머셋 동생이야. 제인시모어의 오빤지 동생인지. 큰형 에드워드 소머셋.과 함께 실세인거지. 이들이 군사권을 쥐었어.

 

이 토마스 시모어.는 헨리8세의 마지막 부인 케서린 파.를 부인으로 맞이해. 헨리 죽고 과부가 된. 캐서린 파.는 딸 낳고 또 바로 죽어. 

 

시모어 들이 실세가 되는데. 특히나 이 토마스. 동생은 나대는거야. 얘가 조카 킹의 궁정에 가서리. 킹의 강아지를 총으로 쏴 죽여. 형 에드워드 시모어가 너 행동 조심하라 했걸랑 항상. 헌데 말귀를 못 들어처먹는거지. 얠 역모혐의로 죽여.

 

소머셋 공작인 에드워드 시모어.도 불안해지는거야. 이사람도 에드워드 좀 커진 후. 바로 죽어 역모혐으로. 즉 저 두 시모여 형제들이. 조카 에드워드 킹 시절에 죽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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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nox (

c.

 1513 – 24 November 1572) was a Scottish minister, theologian, and writer who was a leader of the country's Reformation. He is the founder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

 

스콧의 녹스. 장로교 창시자야.

 

Patrick Hamilton (1504 – 29 February 1528) George Wishart (c. 1513 – 1 March 1546)

 

스콧의 프로테스탄트.는 패트릭 해밀톤. 이야. 비튼에게 화형당해. 1528년. 잉글랜드 캠브리지 루터데모 1521년. 비슷한겨 바람이. 존 녹스는 패트릭 해밀턴 이야기만 들은겨. 존 녹스는 카톨릭이었어 이십 중반까지. 그러다가 조지 위샤트.를 만난거야.

 

Wishart travelled throughout Scotland preaching in favour of the reformation and when he arrived in East Lothian, Knox became one of his closest associates. Knox acted as his bodyguard, bearing a two-handed sword in order to defend him.

 

위샤트.가 스콧 돌아다니면서 카톨릭을 비난하며 연설하는거야. 존 녹스는 아빠 상인이지만 대학 다니면서 카톨릭 성직에 노타리. 사법직 공무원이야. 가정교사도 하고. 그러다가. 위샤트가 설교하는 것을 보고. 빠진거야. 위샤트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면서 두손에 칼을 들고 지킨거야. 저때가 1545년 전후야. 즉 나이 32세야. 대단한거야. 저때는 대게 머리가 굳걸랑. 헌데 생각이 깨이는거지.

어릴때 민주 놀이 하는 들은. 저걸 못 벗어나. 어릴때 정의놀이 하면 못벗어나. 세뇌야 세뇌.

그러다 잡혀. 존 녹스.도 같이 들어갈라 하는걸 위샤트가 말려. 넌 잡히지 말라. 내가 못다한거 니가 해 달라. 나이가 비슷 동갑인듯 해 보여. 
대단한겨 존 녹스. 꼴통 꼰대도 아냐. 
그리곤 같은 비튼 가문 대주교에 추기경.에 화형 당해 죽어 위샤트는. 존 녹스는 잉글랜드로 가는거야. 저때는 헨리 8세가 러프우잉 하는겨. 다 받아조 프로테스탄트는. 헨리도 이제 프로테스탄트도 자기편 하는겨. 이사람이 앵글리카니즘에 같이 참여하면서 저 공동기도서.도 참여해서 만들어. 
그러다가 말야. 헨리8세 죽고 에드워드6세.도 앵글리카니즘에서 커서 같은 파지만. 얘도 바로 죽잖아. 피의 마리 언니가 올라가시는겨. 이때 피하는거야. 제네바로 가는겨. 이때 만난 이가 칼뱅이야. 해서 그걸 다시 갖고서리 스콧에 가서리 장로교 를 만드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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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마리.는. 아 지쳤다 나중에 하자.

안타까운 여자야. 이 여자도 나쁜 악녀가 아냐. 나름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사이에서 잘 아우르고 싶걸랑. 왜냐믄 프랑스 에서 13년을 보냈어. 이 프랑스 코트는 꼴통 카톨릭이 아냐. 여긴 인문주의 쩌는 곳이야. 깝깝한 곳이 아냐.

별 이상한 소문과 음모놀이에 엮여서 비서관 살해당하고. 지 신랑 폭사 당하고. 그 폭사한 한테 이상하게 엮여서 결혼하게 되고. 
역사에서 제일 평가가 애매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인데. 죽음 장면은 특히나 안타까와.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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