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4년 수확기. 가을에 달팽이껍데기 때메 시작해서 모이고. 겨울동안 스와비아 전 지역에 불만을 가진 민들이 서로 전파하고. 다음해 2월 16일에 메밍엔.에서 영주 중심의 위원회를 조직하고. 농민들의 불만사항을 받아. 거부돼.
다음달 3월 6일에 고지대 스와비아 농민들 대표가 모여. 연합 조직을 만들기로 해.
The peasants met again on 15 and 20 March in Memmingen and, after some additional deliberation, adopted the Twelve Articles and the Federal Order (Bundesordnung)
보름 후에 다시 만나서. 메밍엔. 12개 조항.을 채택해. 그리고 분데스오르드눙. 조직 강령. 연합조직의 기본 행동강령을 만든거야.
바로 군대조직을 만들고. 다음달 4월 부터 전쟁인거야.
Kempten Insurrection. 켐프텐. 알고이. 메밍엔 바로 남쪽. 스위스 접경. 오른쪽 바바리아. 여긴 수도원 령에서 황제령으로 팔렸어. 이게 스무스하게 바뀐게 아냐. 지배권자가 중첩이야. 민들 입장에선 이놈저놈이 뜯어가는 곳. 자기가 임대권자라민서리.
Battle of Leipheim 라이프하임 전투. 메밍엔 바로 위야.
Weinsberg Massacre. 바인스베르크 학살. 슈투트가르트 위.
Jack Rohrbach 여긴 지도자가 야크 로르바흐. 여기에 백작과 귀족들 70여명이 대피해있엇어. 이들을 다 죽여.
They forced him, and approximately 70 other nobles who had taken refuge with him, to run the gauntlet of pikes, a popular form of execution among the landsknechts. Rohrbach ordered the band's piper to play during the running of the gauntlet. [48][49]
곤틀렛. 이 장갑인데. 파이크.가 스위스 캔톤이 밀라노와 전투하다 개발한 긴 짝대기고. 이게 스와비아 애 퍼져서리 전지역에 퍼진무기야. 런 더 곤틀렛. 이란게. 저 파이크를 쥔 애들을 두 줄로 세워. 그 사이를 지나가는겨. 양쪽에서 파이크로 패는겨. 다 죽어.
항상 시작할땐. 공격 쪽이 이겨 대부분. 그 힘이 막 폭발하는거걸랑. 당하는 쪽은 준비가 안되어있어.
초기엔 농민들이 완전히 이겨. 그리고 학살하는겨.
기본적으로 말야. 민들은. 똑같애. 학살이고 약탈이야. 죽여야해. 머 별거 잇냐. 헌데 쟤들은 말야. 자기 영주를 죽여.
동학때 웃긴게. 그 조병갑이 조차도 못죽여. ㅋㅋㅋ. 나중 조병갑이가 배석판사가 되서리 최시형에 사형선고하는데 앉아있어.
저 유교란건 엄청난거야. 저 세뇌질. 자기들이 파렴치범이라 규정한 그 도. 못죽여. 감히 북극성이고 해이신 킹이 임명하신 관리.를 어드래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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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바인스베르크 학살.의 문제를 자기들이 알아. 해서리. 저쪽 리더를 바꿔. 저 야크 로르바흐. 를 짤라. 얜 란스크네히트. Landsknecht 의 용병이었걸랑. 다른 사람을 세워.
Gottfried "Götz" von Berlichingen (1480 – 23 July 1562), also known as Götz of the Iron Hand
괴츠 폰 베를리힝엔. 철갑손 괴츠. 용병이야 이사람도. 스와비아 뷔르템부르크 지역. 헌데 또한 시인이야. 나중에 자기 자서전을 남겨. 24살때 바바리아 에서 전투하다가 총에 맞아서 오른손 팔꿈치 밑이 날라가. 철갑손을 끼는겨. 해서 철갑손 괴츠. 란 닉이야.
나중에 괴테.가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을 만들어.
이사람이 저 부대 리더자리로 들어가. 헌데. 통제가 안돼 이미. 민들이야 민들. 농민들. 마음만 부글부글. 분노만 드글드글. 멀 해본 사람들이 아냐.
12개 조항이란건. 어쩌면 저들과 격리가 된거야. 12개 조항은 명문이야. 그 글에서. 먼가 민들에게 나름 교육 을 시켰어야해. 전투도 또한 해본 애들이 하는거야. 민들은 전투 따위 해본 적이 없어. 자기가 살아온 것의 문제는 저 영주들 탓인거야 자기들 마음엔. 저것들만 깨부스면 새 세상이 자기들에게 열리는거지.
저게 마르크스 애들이 똑같이 이용하는거야. 5백년 후에. 참 슬픈건데 그래서.
선동질 하는 들이. 저렇게 이용하는거야.
저 영주들이 말야. 저 민들 수준에서. 1500년이 지나서 저 영주 수준까지 온거야. 허섭하지만.
민들이 권력을 저때 잡았다고 쳐. 지들이 나누고. 더 유토피아 가 올것 같니? 천만에. 다시 천오백년을 저리 살아가서 이전 천오백년의 영주 수준이 될 뿐이야.
그게 마르크스 들의 그때 수준이고 지금 수준이야. 선동질 한 몇 몇 만. 자유를 죽이고 지들만 사는거야. 그게 북조선이야. 그게 중국이고.
저게 쉬운 이야기가 아냐. 나폴레옹.이 그 이상의 사유와 힘을 갖은겨. 헌데 나폴레옹 혼자인거야. 나폴레옹이 없으면. 프랑스는 폭동의 프랑스야. 아무런 힘이 없어 저 프랑스는. 계속 엎어 봤자. 그가 그 이전의 군주.수준이 안될 뿐더러. 다시 시작하는거야 그 이전의 군주 수준이 오기까지. 아무리 권력이 허섭 처럼 보여도. 그 권력이 거기까지 오던 세월이 수백년 수천년 걸린거야. 그 수백년 수천년의 마음. 싸이키.를 다 포섭한 가 진짜 혁명을 일으키는거야. 그게 나폴레옹이고. 그게 잉글랜드의 명예혁명이고. 미국 독립혁명이고 일본들의 메이지유신이야.
마르크스 따위 애들은. 그 소양이. 너무나 유치찬란한겨. 그 이야기는 게르만 이 갈리아 점령하던 천오백년 전. 수준 밖에 안되는거야 그게.
해서리. 니체 가 바그너 의 니벨룽겐의 반지. 의 운율에 전율을 느끼는거야. 그 니벵룽겐의 반지.라는것도 게르만들이 저 동유럽땅에서 부르고뉴 그 갈리아땅으로 점령해 져들어오면서. 서로마 망하는때에 게르만들이 로마에 갈리안에 아틸라 훈족애들을 몰아내는 거걸랑.
다시 시작할 뿐이야 게르만은. 야만의 게르만이. 로마 문명을 시작할뿐이야 저때부터.
헌데. 저따위 니체니 바그너 들에겐. 그 게르만.이 유럽을 처먹기 시작하는게 너무나 그리운거야. 저랬던 게르만이. 이게 머냐 함시롱.
야만 습성인거야. 저 철학이던 음악이던.
저걸 빨아대는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혁명을 하려면 말야. 그 권력 이상의 이야기를 담아. 그 외에는 걍 다 민란이고 폭동이야.
그 권력의 반대. 는 야만이야. 그건. 그 권력이 하던 그 방향 이상의 것을 하는게. 그게 혁명이야 제대로된. 그게 자유야 그게 리버티고. 그건 다 포섭하면서 더 좋은 것으로 가는거야. 이전애들이 하던 짓 반대. 그건 수천년 과거로의 회귀일 뿐이야. 그건 바바리안 야만이야.
.저기서 철갑손 괴츠.가 저기에 있었걸랑 당시. 자긴 하기싫은거야. 헌데 거부하면 바로 칼맞는겨. 통제를 해보려해도 안돼. 이사람은 저기서 걍 짱박혀 있어. 나중에 재판을 받아. 너도 저 살인에 리더라매? 나는 하기싫은거 어찌할수 없어 했을뿐. 풀리고 은퇴하고 자기 자서전을 남겨. 이걸 괴테가 희곡으로 남겨.
거의 마지막 전투가. 페데르셰임 전투야.
23/24 June 1525. 6월 말이야. 본격적인 전투는 딱 세달 한겨. 처음에 반짝 했다가. 짜지는거지.
일단 조직적이지 않아. 산발한 민들이 연합을 했지만. 시간을 보더라도. 서로 만나서 똘똘 뭉치는 시기가 전혀 없어 저긴. 걍 흩어진 애들이 잠깐 모이고. 종이 한장 받고. 깃발 세우고. 다시 흩어진겨. 각각에서 싸운거고. 조직 강령을 만들어봤자. 그게 스밀 시간도 없었고.
In February 1525 Müntzer returned to Mühlhausen
토마스 뮌처.가 저 스와비아와 스위스에 저때 돌아다니다가. 여기서 분명 12개조항을 얘가 와꾸를 짜 줬어. 얘 쎄 진짜. 그리곤 뮐하우젠.에 돌아갔어. 저긴 투링기아. 완전 중간이야. 오른쪽이 작센. 아래가 헤쎄 가문이야. 여기 오니 자기 이름이 벌써 날라다녀. 애들이 모여. 군주는 얘가 싫어.
What a pretty spectacle we have before us now – all the eels and snakes coupling together immorally in one great heap. The priests and all the evil clerics are the snakes...and the secular lords and rulers are the eels... My revered rulers of Saxony...seek without delay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take up the cause of the gospel boldly[17]
토마스 뮌처.가 프라하 갔다가 다시 작센 와서. 군주들 귀족들 앞에서 한 연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냐 우리 지금 앞에 있는 이 모습이. 모든 뱀장어들과 뱀들이 서로 짝이 되어서 부도덕하게 이리들 산뭉텡이로 앞에 있다니. 사제들과 모든 사악한 성직자들은 뱀들이다. 그리고 세속의 영주들과 지배자들은 뱀장어들이다.... 나의 존경하는 작센의 군주들은...지체없이 신의 옳음을 구하는구나 긜고 복음의 뿌리를 세우는구나 강하게.
저게 어디 재판정에서 얘가 하는 연설이야. 음청난 인간이야 이 토마스 뮌처.
In late April, all of Thuringia was up in arms, with peasant and plebeian troops from various districts mobilized.
쟤가 아마. 저 12개 조항 와꾸 짜주고. 바로 뮐하우젠.으로 올라가서리. 2달 후 4월에 투링기아에서 무장된 농민과 블레비안 군조직을 만들어.
At length, on 11 May, Müntzer and what remained of his troops arrived outside the town of Frankenhausen
5월 11일에 프랑켄하우젠. 역시 투링기아야. 작센 오른쪽에 접한. 스와비아 농민전쟁 아래 벌리는 중이고. 얜 독자적으로 저 위에서 한겨. 남들처럼 이빨만 살은 인간이 절대 아냐. 얜 자기가 저 카톨릭과 영주 봉건체제.를 자기가 몸소 엎으려 한겨.
On 15 May, battle was joined.[25] It lasted only a few minutes, and left the streams of the hill running with blood. Six thousand rebels were killed, but barely a single soldier. Many more rebels were executed in the following days. Müntzer fled, but was captured as he hid in a house in Frankenhausen. His identity was revealed by a sack of papers and letters which he was clutching. On 27 May, after torture and confession, he was executed alongside Pfeiffer, outside the walls of Mühlhausen, their heads being displayed prominently for years to come as a warning to others.
5월 15일. 전투가 벌어졌다. 단 몇분. ㅋㅋㅋ. 피로 넘쳤어. 6천명의 반란군들이 죽었다. 거의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음날부터 사형당했다. 뮌처 는 도망갔으나 체포되었다. 프랑켄하우젠.의 어느 집에 숨었는데. 그의 신분이 밝혀졌다 그 배낭에 있는 종이 뭉치들과 서실들로. 5월 27일. 고문과 자백후에. 그는 사형당했다. 그들의 머리는 몇년동안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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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마스 뮌처.는 독특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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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듯 전혀 다른 사람. 울리히 츠빙글리.
"The murder of Zwingli", by Karl Jauslin (1842–1904).
이사람도 참전해 죽어. 스위스에서. 맥락이 같아보이지만 전혀달라.
Huldrych Zwingli[a] or Ulrich Zwingli[b] (1 January 1484 – 11 October 1531) was a leader of the Reformation in Switzerland. Born during a time of emerging Swiss patriotism and increasing criticism of the Swiss mercenary system, he attended the University of Vienna and the University of Basel, a scholarly center of Renaissance humanism. He continued his studies while he served as a pastor in Glarus and later in Einsiedeln, where he was influenced by the writings of Erasmus.
훌드리히 츠빙글리. 울리히 츠빙글리. 루터보다 한살어려. 비엔나 대학에 바젤대학.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 글라구스. 아인지델른.에서 패스터 를 하였다.
패스터. 가 양치기. 란 말로 프로테스탄트부터 본격적으로 쓰였다지만. 원래 패스터. 라고 로마 카톨릭에서도 쓴 말이야.
parish
(in the Christian Church) a small administrative district typically having its own church and a priest or pastor.
패리쉬. 로마 카톨릭의 교구. 다이오시스. 에서 . 특히나 저 작은 다이오시스. 시골 구석에 처박힌 교구.라 하믄 거시기하지만. 하튼 도시가 아니라 촌구석의 교구.를 패리쉬. 하는겨.
여기의 사제.를 패스터. 했어. 즉 패스터.도 사제야. 패리쉬의 사제.
패스터.란 말은. 라틴어야. 이건 밥 주는겨. 풀 먹이는겨. 시골에서 양 소 풀 멕이는게 패스터야. 해서 양치기 목동이야. 저게 시골 말인거야. 이걸 프로테스탄티즘이 티나오면서. 이따위말을 목사.로 번역해서리 애들이 쓰는거고.
At this time, he also married Ottilie von Gersen, a former nun; in the spring of 1524, Ottilie gave birth to a son.
루터보다 6살어린 토마스 뮌처.는 루터보다 1년 먼저 결혼해. 아들 하나 낳았어.
as he had secretly married a widow, Anna Reinhard, earlier in the year. Their cohabitation was well-known and their public wedding took place on 2 April 1524
츠빙글리.도 참 시안한게. 뮌처랑 같은 해에 결혼해. 얜 이미 동거를 했어. 과부였어 원래 여자가.
토마스 뮌처가. 농민전쟁 그 수확기에 겨울 때에 내려오면서. 돌아다닐때 이 츠빙글리 파들도 만나. 헌데 둘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어.
루터.는 번개 맞고부터 쫄아서. 22살에 몽크가 된겨.
At ten years old, Zwingli was sent to Basel to obtain his secondary education where he learned Latin under Magistrate Gregory Bünzli. After three years in Basel, he stayed a short time in Bern with the humanist, Henry Wölfflin. The Dominicans in Bern tried to persuade Zwingli to join their order and it is possible that he was received as a novice.[7]
츠빙글리는. 꼬마때 집에서 홈스쿨. 성직자 삼촌이 교육하다가. 열살때 바젤가서 라틴어를 공부해. 이 사람은 라틴어에 히브리어에. 정통 엘리트야. 꼬마때 도미니코 스도회에서 이 꼬마를 수도사 멘디컨트를 시키자고 해. 부모가 거부해. 그리고 비엔나 대학 갔다가. 바젤대학으로 옮겨서리. 여기서 마스터 학위를 받아.
The University of Basel (German: Universität Basel) is located in Basel, Switzerland. Founded on 4 April 1460,
바젤대학. 1460년. 설립. 이때 설립하자 마자. 여길 오는 인간이.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야 에라스무스.가 여기 바젤에서 말년에 거주하면서 애들 가르치고 죽어 여기서. 바젤대학 하면 에라스무스. 나중 뒤에 니체에 칼융 나오는 곳. 설립하고 초기멤버가 저 츠빙글리야.
카톨릭이 썪었다느니 대지만 저 중세에 1088 볼로냐 대학부터. 지금 모든 유럽 대학의 시작은. 교황이 만든거야. 저것에 대한 승인은 교황이야.
여기서 신학만 가르친게 아냐. 제너럴 아트 일곱개가 필수야. 거기에 의학. 어학. 카톨릭이 지금 쟤들 문명을 만든거야 저게.
이땅바닥은 오직 유교. 그것도 주자가 해석한 유교. 주자가 해석 안 한 이야기는 죽여.
지금 시중에 말야. 논어 번역한 것 모~~두 주자해석이야. 이건 바뀌지가 않았어.
도덕경 해석조차. 왕삐라는 꼬마가 해석한 주를 고대~~로 따르는겨 지금도. 저것과 전혀 다른 해석이 없어.
멀 해석을 할줄 알아야지 이땅바닥 지식인 자연 들은.
주자는 개 야 저건.
하기사 그래봤자 다른 시선으로 번역해봤자 그 개 같은 이야길. 배워서 머할거며
저건. 유교는 종교가 아냐. 유교가 아냐. 유학이야 유학. 저건 릴리전 이 아냐. 저기에 무슨 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냐. 인간이. 왕이. 집안에 남정네가 신이다 하는겨 저게.
미쳐도 분수가 있어야지 이거원.
종교도 아니고 일개 철학이야. 저따위 철학이야기에 반기를 들으면. 그앤 반민족주의자야 ㅋㅋㅋ.
옆에 일본들 조차. 저 유학에 바탕을 둔 에도 들의 싸무라이를 엎을려고 피의 전쟁을 해서리 싸그리 한때는 죽여번졌걸랑.
이땅바닥은. 흥사단. 이야. 선비를 흥해야하는 이야기.가 민족이고 위대한 독립운동이었고. 여전히 흥사단 해야해.
쟤들은 그따위 사족.은 반란 이라 규정해서리. 피눈물로 아예 걍 갈기갈기 찢어죽였걸랑.
저런게 이땅바닥에 없었어. 앞으로도 없어. 지금 정의의 사도 빠가모노 가 예의 민주 정의 예절 의 아주 중심이걸랑.
쟤들이 언제 민족 민족 대니 저 서양애들이. 그따위 민족개념은 게르만이 갈리아 처먹으면서 이미 지워지고 다음은 영지의 영주 가 정체성이야. 먼 민족 이니 민족은. 민족은 피야 피. 쟤들이 그따위 민족 의 정체성은 서로마 망하고나서리 끝난거야. 그이전엔 민족이란 이름으로 로마에 싸운거고. 그게 나중 슬라브야. 그 바통을 이은겨 개무시기들이. 그 슬라브 끼리 뭉치자가 유고연방 이고 해서 피비린내 풍기고 다시 찢어진거고.
쟤들은 영주 영지 의 정체성. 그것도 흐릿해. 전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학교를 다녀. 학교가 대학교가 모든 영지의 애들에게 오픈이 되어있어 기본은.
그러다가 백년전쟁으로 잉글랜드. 프랑스. 라는 국가 정체성이 나오기 시작하는겨.
민족따위 피의 개념은 천년 이전에 버리고서리 국가 정체성으로 간게 지금에서부터 육백년 전이야. 민족 개념은 천오백년 전에 버렸어.
헌데 여전히 민족 민족 한민족 . 오쳔년을 같이 살았는데 칠십년을 헤어졌슈.
아이 환빠들은 정말 짓밟아버려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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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미개해도 보통 미개해야지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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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wingli was ordained in Constance, the seat of the local diocese, and he celebrated his first Mass in his hometown, Wildhaus, on 29 September 1506.
츠빙글리가. 오어데인.에 따른 예식으로 사제가 된게 1506년이야. 22살. 얜 아주 정통 인문주의자에서. 사제가 되기로 한거야. 번개따위 경험은 없어. 똑같은 나이에 루터는 몽크가 되고 얜 사제가 된겨. 콘스탄츠. 저기가 그 거대한 콘스탄츠 호수 왼쪽에 접한 도시야. 저 호수가 왼쪽으로 흘르는게 라인강이야. 여기서 시작을 해 라인강이. 그러다가 이게 바젤에서 꺾여서리 우상향으로 흘러가는겨. 이 콘스탄츠 호수에서 또한 스며서리 다뉴브강이 흘러가. 이게 오른쪽으로 해서리 뮌헨 위로 해서리 비엔나로 가는거고.
Zwingli took the opportunity to meet him while Erasmus was in Basel between August 1514 and May 1516.
에라스무스.가 바젤에 와서리 있을때. 나이 삼십 즈음에 본겨. 에라스무스한테서도 영향을 받아. 아직 루터 논제 대자보 나오기 직전이야.
나중에 해서리. 츠빙글리.가 루터의 영향 에라스무스의 영향 중 어디 소속이까. 가 질문꺼리야.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도. 루터도 아냐. 츠빙글리 일 뿐이야.
토마스 뮌처는 강렬해. 헌데 츠빙글리는. 보수적인 냄새가 나면서도. 강렬한 빛을 감추면서도 참을 줄 아는 사람이야. 좀 달라 뮌처랑.
In Christianity, Lectio continua (Latin for continuous reading) refers to the practice of reading Scripture in sequence over a period of time.
렉티오 콘티누아. 계속 읽기. 미사때 이사람이 쓰던 설교방법이야. 지금처럼 말야. 교회가믄 목사가 지 꼴리는 아무런 대목 하나 똑떼서리 고걸 지 맘대로 주작하면서 예수님의 뜻 하면서 한두시간 보내는게 아니라. 걍 성경을 그대로 읽어. 원어로. 그리고 그걸 번역을 해. 독일어 땅이면 독일어. 로망스면 로망스말로.
그게 다야. 거기에 주를 안달아. 그냥 그 성경의 말. 쓰여진 것만 읽어. 다음 미사때 이어서 읽고.
왜냐믄 특히나. 성경은 귀해.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나왔지만 여전히 민들은 만지지도 못해. 그리스도 오신지 천오백년이 지났지만 성경 글들에 대체 머가 진짜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지 몰라 민들은. 글도 읽을 줄 모르고. 자기들만의 버내큘러 구어로는 더구나 몰라. 그 버내큘러라는 구어도 이제야 본격적으로 써질 뿐이야 서기 1500년은.
해서리 12개 조항에서. 처음에 하는말이야. 야 이 진짜 성경 말좀 해주라 설교사야. 니가 주작하는 말은 못믿겠다. 걍 거기 말을 읽기만 해달라. 그거야 그 요구사항이.
그걸 이미 츠빙글리.는 하는겨. 저것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겨. 설교사들이 못한건. 실력이 없는겨. 루터가 나붕에 예배식을 따로 구성할때도 놀라운게. 사제들이 의외로 무식한거야. 해서리 교육서를 따로 만든겨 얘가. 그게 루터의 캐터키즘. 이야. 사제용 민들용 라아지 캐터키즘 스모올 캐터키즘.
The Battle of Marignano was fought during the phase of the Italian Wars (1494–1559) called the War of the League of Cambrai, between France and the Old Swiss Confederacy. It took place on 13–14 September 1515 near the town today called Melegnano, 16 km southeast of Milan. It resulted in a victory for the French forces.
마리냐노 전투. 지금 이탈리아 전쟁중이야. 전반전 끝타임. 교황이 베네치아 몰아내달라고 프랑스랑 황제랑 다같이 불렀다가 프랑스가 독자 행동해서리 베네치아랑 이탈리아 북부 나눠먹고 나갈때. 그 결정적 전투가 마이냐노 전투. 밀라노 남쪽이야.
이전에도 밀라노와 스위스 캔톤은 조르니코 전투. 크레볼라 전투. 등 계속 이탈리아 북쪽 경계선으로 한창 싸울때야. 밀라노에서 오히려 이 스위스 캔톤 연방에 지원을 구해. 도와주면 북쪽땅 더 주겟다. 프랑스는 베네치아에 더하여 독일땅 저지대 용병 란트스케네히트.를 부르는겨.
여기서 프랑스 프랑수아.가 대승을 하면서. 밀라노 확실히 먹고 가걸랑. 그리고 전반전 끝인데.
그리고 막시밀리언 늙어서 죽고. 카를5세 취임할때.
스위스에서. 카톨릭에 대한 회의감이 쎄지는거지. 이 전에 노바라 전투.도 밀라노에 붙어서 스위스 용병이 가서 싸워준거고 해서 이건 이기지만. 저 캉브해 연맹은 교황이 주도한거걸랑. 그 교황이 주도한 전쟁에 정작 프랑스가 배신해서 판세가 뒤집어진거걸랑.
이 스위스에서 교황이 우스워지고 황제가 우스워지는겨.
Territorial development of Old Swiss Confederacy, 1291–1797
구 스위스 연합이. 서기 1291년부터야. 260년이 지났어. 저게 시작이 정 가운데야. URI. GLARUS. Schwyz. 우리 글라루스 슈비츠. 해서 점점 위쪽으로 가입을 더 하는거야. 초록색 계열에 노란색은 늦는겨.
왜 가운데가 시작일까. 저들은 저기가 산악이걸랑. 그 가운데 사람들이 특히나. 저기서 먹고 살아야 할건. 상업이야. 저기서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가운데야. 역시나 치안이 문제야. 자기들이 뭉쳐서리 조직을 만든거야. 일차는 무력이야. 상거래 안전을 위한 무력이 커 저건. 거기서의 가운데 사람들이 시작이야.
스위스.는 알프스 고원 할때. 고원의 평지는 아래 알프스 산맥과 저 프랑스 접한 서북쪽에 주라 산맥. 그 사이야. 여기가 취리히 베른 제네바. 저 주라 산맥의 사선 평행선인겨.
The Jura Mountains (
French:
German:
locally
[ˈjuːɾa]; French: Massif du Jura; German: Juragebirge; Italian: Massiccio del Giura) are a sub-alpine mountain range located north of the Western Alps, mainly following the course of the France–Switzerland border.
바젤. Basel 은 이 주라 산맥 너쪽 너머에 있는거야. 이 산맥 안쪽 스위스 내부로 있는게 취리히 베른 제네바야. 해서 바젤이 늦어 또한 의외로. 캔톤 가입에. 산맥 넘어걸랑. 저기에 바젤대학이야.
Of the thirteen Confederation members, Glarus, Solothurn, Fribourg, and Appenzell as well as the Five States voted against Zwingli. Bern, Basel, Schaffhausen, and Zürich supported him.[58]
당시 13개 캔톤.에서 츠빙글리 를 지지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은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취리히. 다 이 고원지역에 바젤. 여긴 완전히 라인강 꺾이는 모든 지역 접하는 그야말로 열린땅이야. 여기가 프로테스탄트.
카톨릭 지지파가 파이브 스테이트. 다섯개 캔턴이. 저 가운데 우리 루체른 슈비츠 운터발덴 주크. 저긴 카톨릭에. 글라루스 아펜첼 캔톤도 저 가운데 다섯개의 부근이야. 더하여 저 외곽지역은 카톨릭이 쎄.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는 저 스위스 고지대 평원.이 시작인거야. 저기서 솔로투른 프리부르크 도 고지대지만 카톨릭이고 노란색 보주 voud 보 캔톤 지역등에서 특히나 프로테스탄트 세력애들이 마녀사냥을 하는거야 카톨릭 대상으로. 뒤에. 그러면서 저기가 주도하는겨. 저들이 나중에 지독한 종교전쟁을 또한 하는거고 서로.
그 시작이 츠빙글리.시절이야.
츠빙글리.는 사제로 시작한겨. 즉 찐한 카톨릭이야. 인문학 공부하다가. 그러다가 저 이탈리아 전쟁때 스위스 용병들이 복귀하면서. 쫓겨나. 그리고 저 가운데 지역으로 옮겨. 그러면서 스위스 용병으로 처먹고 사는 시스템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거야. 아무리 처먹고 살게 없어도 저따위 용병들이 버는 돈으로 먹고살아야 하나. 머 어째 먹고살게 없는걸.
그러면서 교회에서 정치에 눈을 뜨는거야 저때.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시선이 바뀌고. 다시 자기의 세계인 카톨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거야 스스로.
그러면서. 모든게 다 문제라 느끼는거지.
In late 1518, the post of the Leutpriestertum (people's priest) of the Grossmünster at Zürich became vacant
그리고나서리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에 사제로 간겨. 자리가 나서리. 저기서 시작한거야. 성경 그냥 읽기. 딴 썰은 필요가 없어. 이 옆이 바젤대학이야. 에라스무스 있는. 지난 사오년간 내적 각성을 자기나름 한겨. 스위스 용병들 보면서. 그리고 쫓겨나서리. 바젤에 에라스무스도 만나고.
그리고 나서리 북쪽에선 루터가 대자보 붙인거고.
저 취리히에서. 온갖 문제제기를 하는거야. 십일조에 대한 것. 특히나 성상화 문제. 축일의 예식 문제. 아 모든게 다 문제야 이젠. 인덜전스 따위 하나가 중요한게 아냐.
저때가 막 루터 직후야. 해서리 루터의 영향. 어쩌고 하지만. 절대 아냐 . 이사람은 루터 와 전혀 상관이 없어.
루터.는 오직 인덜전스. 아 진짜 얘 전략 짱이야. 그리고나서리. 점점 다른 카톨릭 문제제기를 하는겨 얘가 그게 2년이야. 2년 후에 요한 에크랑 라이프치히 토론은 모든 카톨릭 문제를 제기한거야 주제가. 루터는 인덜전스 또 하나 물어서리 공격한거고.
In 1519, Zwingli specifically rejected the veneration of saints and called for the need to distinguish between their true and fictional accounts.
츠빙글리.는 특히나 저 베너레이션. 이전 마리아 성모. 포르투갈 세아이. 썰. 넘어가. 저 성인 승격에 대해서 공개적 거절을 하는겨. 야 이 소설이랑 실화랑 구분좀 하자우.
해서 나중에 말야. 루터랑 만나.
The Marburg Colloquy was a meeting at Marburg Castle, Marburg, Hesse, Germany which attempted to solve a disputation between Martin Luther and Ulrich Zwingli over the Real Presence of Christ in the Eucharist. It took place between 1 October and 4 October 1529.
마르부르크 칼러퀴. 1529년 10월 1일에서 4일. 헤쎄 가문의 마르부르크.
종교개혁의 중심은 작센과 헤쎄. 이 둘의 영주가 시작이야. 루터가 만든게 아냐. 저 두사람이 만든겨 프로테스탄트는. 루터에는 그 멜란히톤 딱깔이에 젊은 유스투스 요나스 도 당근 오는거고.
루터는 작센 영주에 붙었어. 츠빙글리가 이 헤쎄 영주에 구애를 한겨. 헌데 이게 결국 잘 안되고 츠빙글리는 결국 전투에서 죽은건데.
얘들이 갈리는 건 마지막 하나야. 유카리스트.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내 살이자 피이다 했걸랑.
츠빙글리는 저건 메타포고 은유지. 지저스가 니 마음안에 킹덤이 있다고 하는 말과 같어 저게. 하는거고. 루터 조차. 저건 진짜 이야기지 단지 은유가 아니란 거야.
저것만 둘이 갈린다 하지만. 이 둘은 원래 그냥 달라.
루터는 이빨만 살은거고. 작센 영주에 완전히 찰싹 붙어서리.
인간적으로 말야. 평을 하면. 차라리 토마스 뮌처.나 울리히 츠빙글리가 몇천만배 나은 인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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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는 저 프로테스탄트 를 지지하는 캔톤의 리더들과 함께하는거야.
뮌처는 완전 얘는 독고다이야. 특이한 인간이야. 군주들 사제들 앞에서 어이 뱀장어와 뱀들이 교미비슷 붙어있슴둥 해대고. 진짜 칼들고 애들모아서리 붙었어. 몇분만에 다 죽고.
츠빙글리.는 래디칼이 아냐. 성상 문제도. 저걸 없애자 하지 않아. 우리가 그럴 권한도 없거니와. 우리는 이런생각이다 성상같은 아이콘 조각상 그림들은 성경의 말씀에 맞지 않은듯 하면 민들이 점점 따라올꺼다 그수준으로 가자. 하는겨.
해서 여기에 그 칼슈타트. 같은 루터보다 세살 어린 선생. 래디칼. 아나뱁티스트. 재침례주의자들이 티나와. 애기들에게 세례하는 짓 말자. 세례 다시 하자 깨인 어른에게 우리가 해주마.
먼 뜻인지 알아. 헌데 저런 건 아직 아냐. 반대해. 츠빙글리 사람들은. 그래도 나대 저들이. 결국 캔톤들에선 한번만 더 재침례 하믄 사형이야. 해서리 흩어졌는데 다시 와서리 저을 해서리 정말 죽여 프로테스탄트 캔톤은. 츠빙글리가 여기에 반대하지 않았어.
이사람은 뮌처처럼 막막 가지 않았어. 보수 비슷 하면서리 점진적 개혁이야.
그래도 그 선의 개혁안을. 저 다섯개 중심 캔톤 포함 그래도 카톨릭 과 분쟁이 나는거야. 여기에 황제 카를 5세.는 얜 플랑드르야. 저기에 직접 개입을 안해. 카톨릭 편인듯 아닌듯. 얜 정치가야 완전한. 이 판에서 판흐름 제일 잘 읽는건 황제야.
The First War of Kappel (Erster Kappelerkrieg) was an armed conflict in 1529 between the Protestant and the Catholic cantons of the Old Swiss Confederacy during the Reformation in Switzerland. It ended, without any single battle having been fought, with the first peace of Kappel (Erster Landfriede).
The Second War of Kappel (Zweiter Kappelerkrieg) was an armed conflict in 1531 between the Protestant and the Roman Catholic cantons of the Old Swiss Confederacy during the Reformation in Switzerland.
해서 결국 카펠 전투.가 두번. 처음은 협상으로 끝나. 카펠.은 취리히 캔톤 지역이야.
저 두 세력의 캔톤. 츠빙글리의 프로테스탄트들과 가운데 중심의 카톨릭 캔톤들이 서로 만나서리 아우크스부르크 컨패션.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 의 이름으로 협약을 했지만. 츠빙글리들은 저기에 반대를 하는겨. 카펠. 취리히 캔톤이 중심이야. 여길 카톨릭 캔톤들이 쳐 들어오는겨.
이때 취리히 캔톤의 병력은 취약하고 저들은 완전 무장한 연합군이고.
on 11 October, 1531. The battle lasted less than one hour and Zwingli was among the 500 casualties in the Zürich army.[77]
전투가 한시간도 안되어 끝났다. 취리히 병력의 사상자는 500명.
Zwingli had considered himself first and foremost a soldier of Christ; second a defender of his country, the Confederation; and third a leader of his city, Zürich, where he had lived for the previous twelve years. Ironically, he died at the age of 47, not for Christ nor for the Confederation, but for Zürich.[78]
츠빙글리.가 . 글쟁이 주제에 저기에 직접 창들고 가서 싸운거야. 자기를 그리스도 병사의 첨병으로 여기다. 다음은 자기 땅의 방어자로 여기다. 다음세번째 취리히의 리더로써 행동했다. 여기서 12년을 살았다.
츠빙글리.는 각성하고. 취리히에서 사제 직 맡으면서 12년을 죽을때 까지 저걸 한겨. 저기서 페스트. 흑사병도 걸려. 남들 다 떠났는데 혼자 남아서리 자기의 신앙으로 버티고 살아남아. 그러다가 저 전장 한가운데서 죽었어.
In Tabletalk, Luther is recorded saying: "They say that Zwingli recently died thus; if his error had prevailed, we would have perished, and our church with us. It was a judgment of God. That was always a proud people. The others, the papists, will probably also be dealt with by our Lord God." .[79] Erasmus wrote, "We are freed from great fear by the death of the two preachers, Zwingli and Oecolampadius, whose fate has wrought an incredible change in the mind of many. This is the wonderful hand of God on high." Oecolampadius had died on 24 November. Erasmus also wrote, "If Bellona had favoured them, it would have been all over with us."[80]
루터.는 뮌처도 하고. 농민전쟁의 농민들은 미친개 매드도그 라 해. 츠빙글리 역시 죽었다. 아 잘못된 말 하던 의 가짜뉴스가 더 퍼졌으면 우린 망했을 텐데. 우리 교회도. 아 신의 판단으로. 그리고 자랑스런 사람들때메 저가 잘 죽은겨. 다른 교황파도 곧 저리 될꺼야 신의 뜻대로.
에라스무스.도 썼다. 우리는 저 츠빙글리 와 오클람파디우스 두인간의 죽음때메 큰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저들의 운명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기지 않는 변화를 야기했다. 아 다행이다. 이건 신의 손에 의한 고귀한 결정인거다.
에라스무스.를 존경했던 루터. 에라스무스가 자기 밑에 안들어오더니 욕질하던 루터. 에라스무스같은 교황파도 저리 뒈질거다. 저 교황파를 빗대어서 에라스무스를 욕질하는겨 이가.
그런 에라스무스.도 츠빙글리. 역시나 루터 처럼 보인거야.
츠빙글리.가 니덜따위에게 그따위 욕질 처먹을 수준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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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아 저 루터 맘에 안들어 저거. 아 저 저거. 눈앞에 이쓰면 확 .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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