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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rman Peasants' War, Great Peasants' War or Great Peasants' Revolt (German: Deutscher Bauernkrieg) was a widespread popular revolt in some German-speaking areas in Central Europe from 1524 to 1525. It failed because of the intense opposition by the aristocracy, who slaughtered up to 100,000 of the 300,000 poorly armed peasants and farmers.
게르만 농민들의 전쟁. 위대한 농민들의 전쟁. 위대한 농민들의 리볼트. 그레이트 페전트스.
농민들의 반기.에 저리 그레이트. 와 워. 를 붙이는 건. 이게 처음이지 마지막. 이야.
전 세계의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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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중세농민반란. 이란 주제로 잠깐 언급했지만. 특히나 14세기.는 기후변화가 극심했던 때야. 더하여 백년전쟁의 해이거니와.
잉글랜드에서도 농민봉기. 프랑스에서도 자크리.라는 농민 봉기.
The Jacquerie (
French:
[ʒakʁi]) was a popular revolt by peasants that took place in northern France in the early summer of 1358 during the Hundred Years' War
The Peasants' Revolt, also called Wat Tyler's Rebellion or the Great Rising, was a major uprising across large parts of England in 1381
이전에는. 불가리아의 이바일로. 기억날리가 없겄지. 당근. 플랑드르. 당시 프랑스령.에서의 농민봉기. 프랑스 루앙.의 아렐. Harelle. 이것도 기억날리가 없겄지. 파리에 이어 바로 위 루앙에서도 반란.
다음 헝가리 부다나기 안탈. 잉글랜드의 잭 케이드. 농민은 아니지만 스웨덴의 광산업자 엥겔브렉트.
다 이전에 언급한거야. 저것 외에 더 더 있는거고. 콘스탄티노플때 모레아 알바니안들 봉기. 카탈로니아의 레멘사. 잉글랜드 콘윌의 콘위쉬 주석광산 업자들.
독일농민전쟁. 직전에의 푸어 콘라드. 불쌍한 콘라드. 슬로베니아 농민반란.
유럽은. 한곳이 터지면. 브리튼 섬에서 이베리아반도에 저 동유럽까지 싹 번지면서 터지는거지.
프리지아의 아루머 즈바르테 후프. 아룸 마을의 검은 무리의 사람들. 다 농민이야.
싸그리 다 번지는거야. 쟤들은 하나야 하나.
의외로. 이탈리아땅의 농민봉기는 없어.
The revolt of the Cruel Fat Thursday ('Crudel zobia grassa' in Venetian used by Gregorio Amaseo, 'Crudel joibe grasse' in modern Friulan) was a revolt (or more properly a jacquerie) that broke out on Fat Thursday in 1511 in Friuli.
Friulian revolt of 1511
푸리울리 봉기. 여기가 베네치아와 슬로베니아의 접점이야. 베네치아가 여길 점령한지 얼마 안되서 일어난 농민반란. 이게 다야. 이탈리아에서는 딱히 페전트 들의 리벨리온이니 없어 여긴.
이미 옌날에 다 했어 저긴. 시스템이 전혀 달라. 이놈의 이탈리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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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분위기가. 중세 봉건 체제. 자체를 다 깨부수기 로 가는거야.
십여년 전의 헝가리 킹덤 의 트랜실베니아 드라큐라 땅에서의 게오르게 도자. 는 농민반란이라 딱히 딱지 붙이지를 않지만.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된 거걸랑 이건. 저런 이야기는 삽시간에 다 퍼지는거야. 이게 이어서리. 바로 옆 아래 슬로베니아 농민반란이 저 도자 사건 직후 해야. 이건 지금 체제에 대한 반기야 역시. 그 사문화된 봉견 계약의 족쇄를 왜 여전히 니덜은 강요를 하냐. 우리도 장사 하거나 물고기 잡아서리 사고 팔수 있는 권리를 달라. 하는겨. 이 고지대가 깝깝한거야. 산맥에 가려서.
이미 저런 구닥다리 중세봉건 시스템은.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야. 사문화된 로마법을 스태튜트.로 중세에 적용하면서 터지는 반란들인거야. 이미 다른 곳은 걍 그런 법들은 죽었어 저 강과 바다로 열린 땅들에서는.
독일 농민전쟁.도 사건의 시작은 스와비아. 고지대 야. 바바리아 바로 왼쪽. 슈바르츠 발트. 검은 숲 지대.
The Limes Germanicus (Latin for Germanic frontier) was a line of frontier (limes) fortifications that bounded the ancient Roman provinces of Germania Inferior, Germania Superior and Raetia, dividing the Roman Empire and the unsubdued Germanic tribes from the years 83 to about 260 AD.
저기를. 카이사르.는 넘지 말라고 했걸랑.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 보다 먼가 다른걸 하고 싶은겨. 가만 보니 자긴 카이사르. 의 손발 일 뿐인거야. 그 이상 먼가를 하자. 그게 저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 까지 가는거야.
얜 전투를 못해. 몸이 원체 약하고. 자식들이 여길 다 가는겨. 여기서 커리어를 쌓는거고.
저길 200년 이상 공사를 한거야 결국. 그게 게르마니쿠스 장벽. 이야.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The total length was 568 km (353 mi).
총 568키로미터. 고지대 서쪽 독일. 저지대 독일.의 남부. 라이티아. 여기가 지금 스와비아 중심으로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접한거야.
저기의 중심 도시가 경계도시가. 바덴 하는 바덴바덴.이고. 바로 인접한 곳이 슈투트가르트. 야. 여기가 이전에 뷔르템베르크. 인거고. 이 뷔르템베르크. 의 공작 때메. 푸어 콘라드.란 농민반란이 저기서 터졌었고 직전에. 그리고 이 바람끼로. 후텐.이 공부하다가 저길 가서리. 지킹엔.을 만나서리. 기사들의 반란.이 터진거야 바로 직전에.
독일농민전쟁.이 또한 중심은 저기야.
이 스와비아.는 이전 바바리아 와 함께 언급했었지만. 바바리아 보다. 공작령이 4백년 가까이 늦어. 바바리아.는 클로비스 직후 세대. 스와비아는 나중 샤를마뉴 손자 직후 시대에야 여길 온겨.
스와비아.는 그래서 또한. 중세에. 호헨슈타우펜 가문이 2백년 잠깐 터잡아서리 여서 프리드리히1세 2세 황제도 나왓지만. 이게 끝이야. 그리고 여긴 다 쪼개진겨. 그 실세가 저 선 너머 인접한 슈투트가르트. 저때의 뷔르템베르크 가문이 걍 자잘자잘 하게 갖고 있는겨 저길. 거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끼고. 해서 여긴 또한 주교령들이 산재해 있어.
해서 좀 희안한 곳이야. 저 저지대 아래는. 바다에 접해서리 강 인접하면서 활발한 자유제국도시들 중심으로 상공업이 흥하걸랑.
여긴 그 영주들의 산발적인 구조는 저기와 비슷해. 먼가 중앙 집중적인 상태가 아냐. 나름 자기들이 걍 로컬 호족들에게 붙어서 사는겨 고지대 깡촌구석에서. 헌데 또한 여기도 상인들이 들어와. 세상 소식은 다 알아. 늦지만 다소.
저 지방 로컬 촌구석에서. 나름 영주들이 세상과 상대적으로 단절된 곳이야 저기가. 슈바르츠 발트 숲 속에서. 헌데 세상의 사이키는 그 주위 전쟁들 민란들 터지는 시대야. 시대가 이미 변했어. 민들도 이 싸이키 집단무의식이 스며들 수 밖에 없어.
영주들은 짜잘짜잘한 애들이 흩어진체로. 과거의 봉건 습성으로 여전히. 저 민들을 다스리는겨.
여기서 터진거야. 저 독일 농민전쟁은. 헌데 걍 리벨리온. 이 아냐. 업라이징 이 아냐.
그레이트. 워. 야. 그레이트 페전트스. 야.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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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긴 다른 게르만애들보다. 삼사백년을 먼저 로마를 익힌 이들이야. 그 싸이키가.
저 장벽들을 말야. 로마 군단병들이 만드는거야. 저기서 군단 건물들. 기지들. 길들. 엄청나다 정말 이 인간들. 저 밑에서 같이 일하면서. 게르만들이 로마를 배우는겨. 단지 노가다를 배우는게 아냐 저게. 저기서 로마의 문명을 익히는거야. 저기서 생각들을 하게 되는거야. 아 건물 도로 는 이따위로 만드는거구나. 이렇게 만들면 더 좋은거구나. 문을 어디로 내나 어느크기로 내나 어드래 만들어야 더 오래가나. 저들이 저렇게 할 수 있는 건 무엇때문인가. 글자가 있구나 어떤 글을 읽는가. 저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저 스와비아 사람들이 그래서. 아주 독특한거야 저 사람들이. 저긴 저지대와 또 달라.
유럽은. 또 어찌보면. 저기서 시작한거야 유럽의 근대는.
기사 둘이서 중심으로. 쳐들어가 대주교를. 트리어로. 아 자꾸 트리어를 티에르 하는지 원.
보름.이 아냐. 보름스. Worms 지도보니 언제 에스.가 붙었냐 저거.
저렇게 행동으로 터지는게. 저게 쉬운게 아냐. 아무나 하는게 아냐. 저 스와비아.의 기사들이어서리 저렇게 할수 있었던거야. 감히 자기들이 천년이상의 생각의 천장을. 자기의 하나님을 깨부스러 간거야 저건.
기사들의 반란. 이란게. 반란이 아냐 그래서. 리볼트. 해주는거야. 저것도 스와비아 의 기사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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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다시 루터.로 가보면. 아 이앤 좀 디비 파줘야해. 그 바닥을.
The Ninety-five Theses or Disputation on the Power of Indulgences[a] is a list of propositions for an academic disputation written in 1517 by Martin Luther, professor of moral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Wittenberg, Germany
95개 논제. 얘가 당시. 저 지역 수도원들 감독 자리에 더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어. 번개 맞을 뻔. 12년이 지나고서리. 얜 남들보다 오년 이상이 뒤진 상태야. 얜 신학을 늦게 시작한거야. 애가 머 남들보다 대단하게 아는것도 아냐.
헌데 이앤. 남들보다 다른게 있어. reason. 나름 이성이 더 활발한 애야.
교부철학 다음 스콜라 철학 하민서리. 신학을 디비 파걸랑.
얘는 저 관점으로다가. 카톨릭의 문제를. 자기의 이성으로 디비 판거야. 얘만 이걸 충실하게 한거야.
이젠 이성의 시대야. 스피노자 데카르트. 가 대명사일 뿐이야. 서기 1500년이야. 세상 모든것을 이성으로 파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넘치는거야.
칼슈타트.가 얘보다 먼저 들이댔지만. 칼슈타트는 문제제기가 약한겨. 그 논리가. 논리를 신학에만 사용했지. 그걸 사회적인 이슈로 더 깊이 파지를 않았어. 제목만 던지고 추상만 던진겨.
루터.는 작전을 달리간거야. 인덜전스. 란 것 하나만. 디비판거야. ㅋㅋㅋ.
해서리 말야. 요한 에크.가 라이프치히 가서리. 1519. 저들포함 네명이랑 붙을때도. 칼슈타트는 논쟁에서 지고. 루터는 이긴게. 루터가 이 인덜전스 분야 박사걸랑. ㅋㅋㅋ. 얜 이것 중심으로 판겨. 이것에 대해 요한 에크가 밀린거야.
이앤 정치 하면 잘했을꺼야. 이의 정치 버전이 칼 마르크스야. 레닌이고.
루터가 마르크스 레닌 이란게 아니라 . 또 말귀 못알아들어처먹는 것들이 그럼 개신교가 공산당이냐 이 할테지. 개신교가 공산당 빨갱이에 얼마나 부들부들하는데. 그런게 아니라. 말이지.
똑같은 자폐들이. 만나면 칼부림 하는거야.
.https://en.wikipedia.org/wiki/Ninety-five_Theses
아 저걸 일일이 다 번역을 해주고 싶은데. 아 구찮걸랑 그러면. 읽어봐 걍. 짐의 이야기를 따라온 빠나나덜은 잘 읽힐 껴. 저걸 제대로 설명하는 인간이 단 하나가 없어. 영어 번역을 너무나 대충하걸랑. 왜냐믄 이해를 못하는거야 저걸. 저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역시나 이야기가 깊걸랑. 그 속내를 전혀 모르니. 이해를 못하는거야. 그게 이땅바닥 지식인 놀이 하는 애들 수준이걸랑.
Popes are empowered to grant plenary indulgences, which provide complete satisfaction for any remaining temporal punishment due to sins, and these were purchased on behalf of people believed to be in purgatory. This led to the popular saying, "As soon as the coin in the coffer rings, the soul from purgatory springs". Theologians at the University of Paris had criticized this saying late in the 15th century.[6] Earlier critics of indulgences included John Wycliffe, who denied that the pope had jurisdiction over purgatory. Jan Hus and his followershad advocated a more severe system of penance, in which indulgences were not available.[7] Johannes von Wesel had also attacked indulgences late in the 15th century.[8] Political rulers had an interest in controlling indulgences because local economies suffered when the money for indulgences left a given territory. Rulers often sought to receive a portion of the proceeds or prohibited indulgences altogether, as Duke George did in Luther's Electoral Saxony.[9]
저 인덜전스. 문제는. 이미 이전 보니파티우스 9세 교황. 교황이 이미 150년 전에 교구들 주교들에게 그따위 미친 하지 말라고 했어. 아비뇽 교황정때메 특히나 교권이 중심을 잃은 시절이야 저때가. 저때 얀 후스. 보헤미아에서 그래서 터진거고.
파리대학에서도 15세기 후반에 비판을 했다.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 영어성경 만든 14세기 사람도 비판을 했다 저 인덜전스. 얀후스와 후사이트들도 저게 먼짓이냐 비판을 해댔었다.
얀 후스는 저 말해서 화형당했고. 산체로 태운겨.
쟤는 똑같은 말을 한거야. 새삼스러운게 아냐. 헌데. 이제 시대 분위기가. 점점 각 지방 영주들이. 문제의식을 강하게 느끼면서. 정치권이 합세했을 뿐이야.
교회에 주는 인덜전스 돈들은. 해당 영주 에게 인마이포켓 하는게 아냐. 저건 백프로 교회 돈이야.
자기들 땅의 부. 재산이. 교회로 빠져서리 로마 교황청으로 들어가는거야.
얘전엔 못 대들었어. 어드래 감히 카톨릭에 대들어.
헌데. 이것도 역시나. 십자군 레반트야. 쟤들이 깨달은거야. 하늘에서 내려온거야 그 2백년 동안. 점점 이탈리아 사람들이 되가는거야. 쟤들은 원래 야만 바바리안 이었어. 이걸 명심해. 항상. 무식한 것들에겐 사유의 천장을 씌우면. 거기서 나오질 못해. 망상족이 되는겨.
그게 소위 인민 민주 하는거걸랑.
사유 없고. 야만 애들에게 아름다운 추상명사를 뒤집어 씌우고 설교를 해대면. 얘들은 걍 개돼지가 되는거야.
그게 이탁오.가 나이 오십되어서야 깨달은거야. 유교란게 언뜻 보면. 아름답걸랑.
아 저게 였고. 나는 앞의 개가 멍멍 짖으면 따라서 짖는 였을 뿐이구나. 하면서리 조옥에서 자기 목을 걍 근겨. 만력제.가 탄압해서 가둬서 이탁오가 죽은게 아냐. 이탁오 스스로. 자기 인생이 너무나 너무나 쪽팔렸던거야.
이땅바닥은 저따위 유교에. 별 시안한 놀이를 더하여 덧씌어주었으니. 완전히 저 이념질의 노예가 된거야. 아 끔찍한거야 이게. 저게 지들만의 정의가 된거고. 한심하지.
헌데. 저당시의 영주들은. 2백년 레반트를 드나들면서. 망했걸랑. 거기서 먼가 확 사유의 천장이 주저앉어. 대체 우리의 하나님이 왜 저기서 힘을 발휘못한겨? 그 와중에. 저기를 들락날락 하면서. 저 길이 수백키로가 아냐. 바다건나 산너머서 사막지나 가는겨. 그러면서 사람들이 생각이 풀리는겨 이백여년간. 그리고 저 레반트의 상인들을 또한 봐. 무역을 봐. 해변의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섞여있는 걸 봐. 아 저리도 사는구나. 아키탄의 엘레오노르 루이7세랑 저기 구경을 하고 잉글랜드로 가서 해상법을 만들어.
저러면서 시대가 변하는거야. 시대가 변한다는건 귀족들의 삶의 방식과 민들의 삶의 양식이 변하는거야.
그러면서. 자기의 생각의 하나님 에게 조차. 반기를 들 지경까지 온거야 이제.
루터.는 이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받아서 계속 한 거야. 이걸 이제. 정치권의 권력이 받아주는거야. 이 세력이 있는 거야. 루터는 재수 좋게도. 저당시 같은 문제의식을 갖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중심. 베텐베르크. 에 있었던겨.
영주들이 불만이 점점 생겨. 이전엔 이따위 불만은 없었어. 있어도 표현을 못해. 헌데. 점점 불만이 더 생겨. 표현을 더 해. 힘이 막막 생기는거야. 힘이 터지는데 근본 체제는 저걸 담지를 못해.
더군다나 말야. 수도원 들의 돈은 또한 바로 교황 직속이야. 이것도 영주들은 못 가져가.
중세 의 땅 중심으로 돈 걷는 거는. 한계가 있는거야 이건. 점점 상공업이 득세를 하는데 이것에 대한 관리체계.는 중세에 적용되는 로마법 에 태부족한거야.
해서. 인덜전스. 가 특히나 유행할때에. 저때 인덜전스 전용 프로모터 인 설교사들이 프로모션을 해.
지금 교회 약속헌금 하는겨 이게. 약속헌금 얼마. 그 당시 기분에 . 나 얼마 하겄수. 헌데 다시 돌아가면. 아 왜 그짓을 했지. 헌데 찝찝해 이거. 하겠다고 했는데 안해. 아무리 서기 2천년대 사람이라도 말야. 이거 이거 안하고 쌩까는게 쉬운게 아냐. 특히나 한무당의 나라에선. 그게 교회 목사의 강요질 이 아니라. 자기가 먼 일을 하다 머가 잘 안되면. 저걸 안지켜서리 안되는구나 하게 될 수 밖에 없어 ㅋㅋㅋ. 그래서 한무당의 나라. 라 한겨. 이땅바닥의 종교질은 미개한겨 이게. 이걸 틈으로 쑤셔 나와서리 지금 이땅바닥의 종교야 저게. 거리엔 십자가 나이트클럽에 절 건물들이 휘황찬란해지는게 이땅바닥에선 가능한겨. 세계 최대의 교회 어쩌고 저쩌고 ㅋㅋㅋ. 정말 골때리는 나라야 이나라가. 넘어가고.
저러면 말야. 영주들이 열받는거야. 저들 돈들이. 과세 대상이 아냐. 영주들이 삥 뜯어 처먹는 애들이 아냐. 기본적으로 자기의땅에 먼가를 만들고 싶은 인간이 많아. 여긴 어떤 한가 주구장창 혼자 폐쇄적으로 사는 조선 땅이 아냐. 주위에 다 들 영주들에 친구 친척들에 적들에. 사는게 다 보여. 저들보다 먼가를 더 잘 해야 한 다는 그런 욕망덩어리들이 있어. 그게 저들 지금 문명을 만든건데.
헌데 인덜전스 하면 특히나 돈을 더 교회가 갖고 가.
해서 어떤 영주는 대드는거야. 거기서 얼마. 몇퍼는 우리 달라. 이런 영주들이 있어.
어떤 영주들은. 저 인덜전스 자체를 하지 말아라. 저거 성경에도 없고 저게 대체 먼 미개한 짓이냐.
영주들이 이리 두파로 나뉘어 또한.
저 바닥엔. 돈이야 돈. 아이 우리 땅에서의 부.가 왜 우리에게 전혀 이땅 문명을 업그레이드하고 보다 맛난 음식 옷 집 만드는데 전혀 쓰이지 않고. 교회를 통해서 로마로 가는 우리들의 부. 재산. 돈.
이것에 대한 불만이 생긴거야 영주들이.
이걸 다시. 루터가. 이 인덜전스 주제 하나로. 95개 테마.란게. 서론본론 결말을. 인덜전스란 무엇인가 저걸 왜 교회서 저인가 과연 효과가 있는가. 를 95개로 나눠서리 아주 개 아작을 내는겨 저게.
오직 하나 인덜전스.
뭔가 문제제기를 하려면. 그 체제에. 일단 가장 핵심 하나 만 파는거란다. 를 루터가 깨달은거야.
남들은 저리 쎄게 전체로 깊게 파지 않았어 또한. 아주 적나라하게 저 주제 하나로만 쑤셔댄거야.
이게. 저 영주들과 더하여 먹힌거고. 저 시대의 민들에게 스며든거야. 민들의 문제인식은 단 하나야. 체제야 봉건체제. 봉건 체제의 벽을 터뜨리고 싶은거야. 그걸 불지른 촉매가 저 인덜전스야. 이걸 통해서 교회의 문제. 더하여 체제의 문제 까지로 간거야. 해서 카톨릭 다 갈아엎자 없애자. 전혀 새로운 교회 만들자.
이 봉건 체제 없애고. 저 영주들을 갈아엎어버리자? 는 인식까지 왔는가? 는 일단 차치해. 이것의 극단이 마르크스.야. 그 직전의 프랑스 폭동이고. 이걸 나폴레옹이 혁명으로 승화를 시켜.
프랑스 혁명. 은 잘못 만든 작명이야. 저기 안에 괄호. 나폴레옹. 이 빠진겨. 프랑스 혁명. 하면 프랑스 나폴레옹 혁명 이어야 해. 자코뱅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거리를 피바다로 만든 들일 뿐이야. 그게 로베스 피에르 형제고. 얘들은 망상족이야 역시. 하우투 에 대한 스킴이 전혀 없어. 전혀 인문학적 배움이 없어 편협해. 초딩이야 초딩. 모든 정보 공개하고 모든 민들을 동등히 모든 재산은 다 뺏아서리 나누고. 언뜻 듣보긴 아름답지. 전혀 전혀 아무런 지식이 없는 초딩 들도 요즘 저따위 인식수준은 넘을. 정말
저런 을 여전히 역사 없고 편협하게 살아온 바바리안들 땅에서 여전히 횡행하는거고..
농민전쟁 저들은 아직. 영주들을 갈아엎자.는 아냐. 단지 이런저런 문제 해결해줘. 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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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가 허영심 많은 인간 이라 짐이 규정하셨잖냐. 짐은 글을 보믄 아시걸랑. 저따위 가 어떤 수준인걸.
헌데 금일 걍 저 위키 다른걸 보니 또한 쟤들이 짐의 생각을 확인해줘. 짐이 저들 글을 보고 저 병딱한게 아냐. 항상 짐이 말하면. 나중에 보면 영어 쓰는 애들이 찔끔 싸제껴 놓았더라 .
Luther sent the Theses enclosed with a letter to Albert of Brandenburg, the Archbishop of Mainz, on 31 October 1517, a date now considered the start of the Reformation and commemorated annually as Reformation Day. Luther may have also posted the Theses on the door of All Saints' Churchand other churches in Wittenberg in accordance with University custom on 31 October or in mid-November.
루터가 저걸 편지를 쓴거야. 자세히 보면. 바로 위 브란덴부르크의 알베르트.
Cardinal Albert of Brandenburg (German: Albrecht von Brandenburg; 28 June 1490 – 24 September 1545) was Elector and Archbishop of Mainzfrom 1514 to 1545, and Archbishop of Magdeburg from 1513 to 1545.
이사람이 카디널. 이야 추기경.에 더하여. 일렉터. 야. 선제후야. 마인츠의 대주교. 가 저기 브란덴부르크에 주교자리를 또한 겸임하고 있었던겨. 해서리. 지킹엔 과 후텐 의 기사들이 마인츠를 처들어간겨 저 죽이자 함시롱.
저게 올세이트스의 처치. 모든성인들의 교회. 비텐베르크.의 교회들 중에 하필 저 교회.에 대자보를 붙여 또한. 붙였을꺼야 당근. 왜냐면 편지 보내고. 저건 공론화 하기로 한거야. 사본을 쓰고. 그걸 돌리고. 그걸 벽보로 붙여. 이건 대자보 전쟁이야.
저 날이 또한 만성절. 이브. 저녁이야.
All Saints' Day, also known as All Hallows' Day, Hallowmas,[3][4]Feast of All Saints,[5][6] or Solemnity of All Saints,[7] is a Christianfestival celebrated in honour of all the saints, known and unknown. In Western Christianity, it is celebrated on 1 November by the Roman Catholic Church, the Anglican Communion, the Methodist Church, the Lutheran Church, and other Protestant churches.
저게 우리말로 만성절.이야.
카톨릭에서 만든거야. 매일 무슨 성인들의 날이 있걸랑 달력에 수시로. 그 성인들의 날 마다 또한 축제를 해. 더하여. 올 세인트 들의 날도 만들어.
로마 카톨릭이 고대 로마의 신의 축제들의 그 마음들의 사람들이야. 고대로마는 삼일에 이틀은 축제야.
그걸 못잊는거야.
그 축제들은. 게르만 의 애들과 차원이 달라. 특히나 저 고지대 중지대 숲속의 그림자 속에서만 사는 들과는.
칼슈타트.도 후텐 도 저런 걸 보고 야마가 돈거야. 저 사치 퇴폐. 적폐야 ㅋㅋㅋ. 저때는 야자타임이야. 민들의 발을 영주가 씻어줘. 민들이 성인들의 가면을 쓰고 놀아 거리로. 교황이 금화를 뿌려대. 게이놀이도 해.
미친거야 게르만의 숲속 애들 눈깔엔.
저런 성인들을 무수수히 만들어서 하다하다 모든 성인들의 날이라니 .
이 루터가. 저 모든성인들의 교회. 에. 저 모든성인들을 기리는 날. 전 날에 편지를 쓰고 저걸 대자보로 붙인겨 저 교회에. 저 날에.
해서 다음에 주장하는건. 저따위 축제 다 이단이다 하는겨.
로마에서 그 이후. 카운터 리포메이션. 종교개혁 루터에 반하는 카톨릭 종교개혁 함시롱 저따위 축제들이 싸그리 사라지는겨. 그러면서. 결국 전쟁 로 풀다가. 카를 마르크스 니체 따위 개 들을 역사가 낳은겨.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레닌과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 따위 들을 만드는거야. 그러면서 피바다의 역사가 나오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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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s Karlstadt had written a set of such theses in April 1517, and these were more radical in theological terms than Luther's. He posted them on the door of All Saints' Church, as Luther was alleged to have done with the Ninety-five Theses. Karlstadt posted his theses at a time when the relics of the church were placed on display, and this may have been considered a provocative gesture. Similarly, Luther posted the Ninety-five Theses on the eve of All Saints' Day, the most important day of the year for the display of relics at All Saints' Church.[35]
칼슈타트도 저따위 이야기를 1516년 9월에 로마가서 했고. 이건 교회 전체의 문제 151개 주제. 또한 루터보다 먼저 4월에 인덜전스 주제로 썼다. 이건 루터 보다 더 쎘다 글이. 그리곤 똑같은 교회 대문에 붙였다. 루터가 나중 붙일 자리에. 먼저. 헌데 날짜를. 루터는 똑같은 이름의 교회의 똑같은 날을 기념하는 그 날.에 했다는 거지. ㅋㅋㅋ. 칼슈타트 보단 머가 달라야 하걸랑. ㅋㅋㅋ. 세살 어린. 자기에게 닥터 학위 준 선생.
Luther's theses were intended to begin a debate among academics, not a popular revolution,[34] but there are indications that he saw his action as prophetic and significant. Around this time, he began using the name "Luther" and sometimes "Eleutherius", Greek for "free", rather than "Luder". This seems to refer to his being free from the scholastic theology which he had argued against earlier that year.[36] Luther later claimed not to have desired the Theses to be widely distributed.
루터.는 학술적 논쟁으로 여겼지 이게 민들의 레볼루션 수준으론 생각안했다. 얘도 놀랜거지. 머 없던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원래 다들 하던 이야기고. 헌데 이게 저리 될 줄 몰랐어 당근. 헌데 이가 스타가 된겨. 저 시대를 타서.
이때 이가 또라이가 되는겨.
지금보면 그런게 보인다. 그는 그의 행동을 예언자적이며 중요하게 스스로 여겼다는걸. 이 즈음에 그는 루터. 라는 자기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엘우테리우스. 그리스 말로 자유. 라는 루터 비슷 이름.으로. 루더 루데르.는 안쓰였다. 창녀란 뜻이 있으니. 이걸 보면 그는 스콜라 철학에서 자유로와진 것으로 보이고. 이것도 또한 초기에 반론하며 비판했지만. 루터는 나중에 말해따. 아 그 95개 논제들이 알려져 퍼지지를 바라진 않았다고.
개거짓말 하고 자빠진거지. 세상의 시선들을 받으면서. 예언자 놀이를 하는거야 이 개가.
Katharina von Bora was the daughter to a family of Saxon petty nobility.[2] According to common belief, she was born on 29 January 1499 in Lippendorf;
부인 카타리나. 는 작센의 작은 귀족 가문의 딸이야. 16살 어려 루터보다.
It is certain that her father sent the five-year-old Katharina to the Benedictine cloister in Brehna in 1504 for education
이여자가 수녀원에 간게 다섯살. 아빠가 가서 공부하라고. 마너스트리야.
At the age of nine she moved to the Cistercian monastery of Marienthron (Mary's Throne) in Nimbschen, near Grimma, where her maternal aunt was already a member of the community.[8]
아홉살때 그림마. 에 있는 수녀원으로 간겨. 이 그림마.가 비텐부르크 부근인거야. 여기에 외숙모가 이미 있었다.
After several years of religious life, Katharina became interested in the growing reform movement and grew dissatisfied with her life in the monastery. Conspiring with several other nuns to flee in secrecy, she contacted Luther and begged for his assistance.[10]
다섯살때 부터 종교생활을 고독하게 한겨 꼬마여자애가. 헌데 여기서 카톨릭을 비판하는 소리들을 이런 곳에서도 알게 되는거지. 그러면서 자각을 하는거야. 이런 마너스트리. 벽 보고 하나님 계시만 보고자 하는 이따위 생활이 싫어지게 되는거야. 다른 예닐곱의 수녀들과 함께. 도망가기로 하고. 루터에게 연락을 해서. 좀 꺼내줘요.
On Easter Eve, 4 April 1523, Luther sent Leonhard Köppe, a city councilman of Torgau and merchant who regularly delivered herring to the monastery. The nuns successfully escaped by hiding in Köppe's covered wagon among the fish barrels, and fled to Wittenberg. A local student wrote to a friend: 'A wagon load of vestal virgins has just come to town, all more eager for marriage than for life. God grant them husbands lest worse befall."[11]
루터가 레온할트 쾨페.라는 상인겸 토르가우 시의 의원을 보냈다. 그 수도원에 헤링. 청어를 정기적으로 배달하던 사람. 그 마차에 숨어서리 수녀들과 함께 탈출해서 비텐베르크 로 도망을 오다. 1523년. 나이 24살. 다섯때부터 말야. 19년을 수녀 생활을 한겨. 아 . 정말 꼬마가 멀안다고. 해서리 뒤에 벱티즘 논쟁이 또 나오는겨. 아이 애들이 멀 아냐 제발 애기들 꼬마들에겐 침례 말자. 다 12세기 초에 피에르 드브뤼 가 한겨 아벨라르 있을때에. 저따위 세례 꼬마애들에게 하는 짓조차 개사기라민서. 태워 죽었지만.
그리고. 이가 결혼을 하는거야. 그 핑게.
"Suddenly, and while I was occupied with far different thoughts," he wrote to Wenceslaus Link, "the Lord has plunged me into marriage."[100] At the time of their marriage, Katharina was 26 years old and Luther was 41 years old.
누구에게 쓴 편지. 갑자기. 나는 전혀 다른 생각들에 휩쌓였다. 주님이 나를 결혼 속으로 밀어버렸다. 카타리나 26세 루터 41세.
아 저딴 은 들이나 하는 짓이야. . 상담하는 는. 상담받는 여자.와는 이성의 관계를 갖는게 아냐 이 개새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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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부터. 프로테스탄트.의 성직자들은 결혼을 하는거야.
아~~~~무 이유없어. 걍 루터가. 갑자기. 꼴려서. 결혼을 미끼로 하고픈겨 ㅋㅋㅋ. 주님이 시켜서리 했다 하는거고.
아 지저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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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Müntzer[b] (
c.
1489 – 1525) was a German preacher and radical theologian of the early Reformation whose opposition to both Martin Luther and the Roman Catholic Church led to his open defiance of late-feudal authority in central Germany.
토마스 뮌처. 농민전쟁 오늘 마무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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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로 처먹고 사는 는. 결혼을 하면 안돼.
결혼 후에 깨달아서 성직으로 가는 는. 인연을 끊고 사는거고
성직의 상태에서. 결혼하는 는 . 사기야 개사기. 이 입장은 카톨릭이 맞아.
In ancient Rome, the Vestals or Vestal Virgins (Latin: Vestālēs, singular Vestālis
[wɛsˈtaːlɪs]) were priestesses of Vesta, goddess of the hearth. The College of the Vestals and its well-being were regarded as fundamental to the continuance and security of Rome.
베스탈스. 베스탈 버진스. 고대로마에서는 여사제를 베스탈. 했어. 이들은 말야. 처녀야 해 시작이. 어린 꼬마시절부터 해서리 절대로 남자를 알면 안돼. 임기가 30년 이야. 은퇴를 하고 결혼을 해. 로마에선 은퇴후에는 연금을 꼬박 줘야해.
남자는 플라멘
A flamen was a priest of the ancient Roman religion who was assigned to one of fifteen deities with official cults during the Roman Republic.
얘들은 15명 으로 되어있어 사제단이. 각각을 플라멘 남자사제. 이들은 선거직이야. 임기가 일년이야. 최고 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종신제야. 이것도 이전 폰티펙스가 죽으면. 선거로 차지하는 자리야. 클러지.의 운명 개념이 없어. 그런건 베스탈. 여사제 에게만 한정을 한거야.
로마는 신.은 노는거야 같이. 그리고 신성함은 여사제 에게만 덮어씌운거고. 그것도 삼십년 이야. 평생은 아냐. 연금도 줘.
그리스도 들어오면서. 베스탈.의 임무를 남자들이 다 갖아야해. 그리스도는 자기들만의 유일한 안식처야. 어드래 결혼을 하냐 성직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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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Müntzer was born in late 1489 (or possibly early 1490), in the small town of Stolberg in the Harz Mountains of Germany. The legend that his father had been executed by the feudal authorities[4] has long since been shown untrue. There is every reason to suppose that Müntzer had a relatively comfortable background and upbringing, as evidenced by his lengthy education. Both his parents were still alive in 1520, his mother dying at around that time.[5]
Soon after 1490 the family moved to the neighbouring and slightly larger town of Quedlinburg, and it was as "Thomas Munczer de Quedlinburgk" that he enrolled at the University of Leipzig in 1506. Here he may have studied the arts or even theology: relevant records are missing, and it is uncertain whether Müntzer actually graduated from Leipzig. He later enrolled in late 1512 at the Viadriana University of Frankfurt an der Oder. It is not known what degrees he had obtained by 1514, when he found employment within the church: almost certainly a bachelor's degree in theology and/or the arts; and possibly, but less certainly, a master of the arts. Again, the university records are full of holes, or are completely missing.[6] At some time in this rather obscure period of his life, possibly before his studies at Frankfurt, he held down posts as an assistant teacher in schools in Halle and Aschersleben, at which time, according to his final confession,[7] he is alleged to have formed a "league" against the incumbent Archbishop of Magdeburg – to what end the league was formed is wholly unknown.
토마스 뮌처.는 1490년으로 보자. 루터보다 7살 어려. 슈톨베르크. 역시 작센 안할트. 가운데 지역. 산속이야. 하튼 이놈의 산속 . 아빠는 봉건 영주 체제에서 사형당했다는 전설. 다 나중 이사람 이미지 때문에 주작된 이야기로 보이다. 그의 부모는 1920년에도 살아있었고 엄마는 이때 죽은 듯.
태아나자 마자 옆의 좀 큰 마을로 이사.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가. 16살. 다 종교개혁 작센영주 베틴 가문들의 땅이야. 옆이 비텐베르크고. 그러다 프랑크푸르트의 대학으로 가고. 하튼 공부 한겨. 그러다가 교회에 취직을 하다. 1514년. 학교에서 어느정도 무슨 학위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프랑크 부르트에서 보조교사 를 했다가 짤렸는데. 뮌처가 잡히고 최종 진술을 할때 자기 이야기 하기를. 당시에 현직 대주교에 맞서는 단체를 만들었었다. 그 단체가 먼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1514년에 대주교.에 반기를 든 짓을 한겨. 나이 24살에.
얘들 약력을 보면 말야. 브라운슈바이크 도 가고 어디가고. 걍 다들 유럽 전역은 돌아당겨. 하물며 지들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으로 다 다녀. 에라스무스 경우는 잉글랜드에 이탈리아에 나중 스위스 가서 죽으시고.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하지만 정작 로테르담은 초기에 떠나서 안가.
이땅바닥 인간들에선 절대 인물이 사건이 제대로된. 게 나올 수가 없어. 자폐의 땅이걸랑. 조선 위대해유 대민서 .
일본 열등감에 쩌든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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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ay 1514, he took up a post as priest in the town of Braunschweig (Brunswick), where he was occupied on and off for the next few years. It was here that he began to question the practices of the Catholic Church, and to criticize, for example, the selling of indulgences. In letters of this time, he is already being addressed by friends as a "castigator of unrighteousness".[8] Between 1515 and 1516, he also managed to find a job as schoolmaster at a nunnery in Frose, near Aschersleben.
브라운슈바이크에 사제 자리를 갔어. 저 프랑크푸르트.에서 교사자리 그만두고. 여기서 몇년 사제. 여기서도 카톨릭의 행위들에 문제의식이 생겨. 비판하고. 인덜전스 역시. 이즈음 친구들이 토마스 뮌처.에게 편지로 그랬대. 뮌처 너는 부정의 부패를 드러낼 줄 아는 인간이네. 그 사이에. 프로제.의 수녀원에서 학장 자리를 구하려 했다.
그러다가 루터.를 만나는겨.
In the autumn of 1517, he was in Wittenberg, met with Martin Luther, and became involved in the great discussions which preceded the posting of Luther's 95 Theses. He attended lectures at the university there, and was exposed to Luther's ideas as well as other ideas originating with the humanists, among whom was Andreas Bodenstein von Karlstadt, who later became a radical opponent of Luther. Müntzer did not remain in Wittenberg for long, and was reported in various other locations in Thuringia and Franconia. He continued to be paid for his position at Braunschweig until early 1519, when he turned up in the town of Jüterbog, north-east of Wittenberg, where he had been asked to stand in for the preacher Franz Günther.
1517년 가을. 비텐베르크에 있었는데. 여기서 루터를 만났다. 이때 대주교에 편지쓰고 대자보 붙이고. 한창 문제가 막막 터질때야. 그 학교 가서 루터의 강의를 들어. 여기서 루터 이야기를 들어. 이 비텐베르크.는 당시 제일 앞선 곳 중의 하나야. 인문학도 막 터지고. 당시 이탈리아 전쟁이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넘어와. 이전에도 스멀스멀 넘어왓었고.
뮌처는 비텐베르크에 오래있지 않았다. 투링기아 프랑코니아의 여러지역에도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여전히 브라운 슈바이크 사제 자리로 봉급을 받는겨 1514년에서 1519년. 그러면서 돌아다녔어. 그러다가 프란츠 귄터.에게 설교자리를 제안 받는거지. 비텐베르크 에서.
저가서 교회에서 카톨릭 욕하는거고.
In June 1519, Müntzer attended the disputation in Leipzig between the reformers of Wittenberg (Luther, Karlstadt, and Philip Melanchthon) and the Catholic Church hierarchy (represented by Johann Eck). This was one of the high points of the early Reformation. Müntzer did not go unnoticed by Luther, who recommended him to a temporary post in the town of Zwickau. However, at the end of that year, he was still employed in a nunnery at Beuditz, near Weissenfels. He spent the entire winter studying works by the mystics, the humanists, and the church historians.[9]
라이프치히 토론.에도 직접 가서 봐. 얜 아주 적극적으로 저 시대에 참여한 인간이야. 헌데 루터파가 아냐 얜.
루터.도 이 뮌처.를 확실하게 인지한 상태야. 루터는 스타가 되었어. 해서리 여기저기 막막 와서 강의좀 해달라. 여기 자리 잇으니 여와서 공부하시라. 또는 근처 사람좀 대타로 보내주라.
루터가 츠비카우. Zwickau 에 자리가 빈 곳에 자리를 추천한겨. 아 이 문제의 츠비카우. 헌데 아직은 안가. 수녀원에 취직된 상태. 여기서 신비주의 미스틱스. 아 이런얘기 좋은데. 넘어가고. 거기에 인문학 교회 역사가들 등 공부 해. 1519년 겨울.
In May 1520, Müntzer was able to capitalize on the recommendation made by Luther a year earlier, and stood in as temporary replacement for a reformist/humanist preacher named Johann Sylvanus Egranus at St Mary's Church in the busy town of Zwickau (population at that time ca. 7000), near the border with Bohemia. Zwickau was in the middle of the important iron- and silver-mining area of the Erzgebirge, and was also home to a significant number of plebeians, primarily weavers.
뮌처.가 저 츠비카우.를 다음해 3월에 가. 루터가 추천해준 곳. 대타자리야. 임시직. 교회 설교자리야. 여 바로 위에가 라이프치히. 그 위가 비텐베르크. 다 작센 주야. 바로 오른쪽 접경이 보헤미아 체코땅이야. 쭉 동남으로 내려가면 프라하야.
이 즈비카우.는 철광석 은 광산지역. 그리고 직조 원단공장. 광산업과 옷감일로 먹고 사는 곳이야. 이제 근대의 시작이야. 광산과 직조가 돈이 막막 될 때야. 저기에 부가 쌓이기 시작해 저 플레브스. 로마말이잖아. 플레비안이란 평민은. 플레브스 파트리쿠스.
오른쪽이 보헤미아야. 후사이트 들의 도시. 이 작센이 보헤미아랑 또 접해잇어. 저기 종교개혁 바람을 이들이 맞는겨 또한. 그게 작센이야.
비텐베르크.가 엘베강이 흐르는 도시야. 이 엘베강이 프라하에서 드레스덴 해서 비텐베르크로 흘러. 프라하의 얀후스 들이 비텐베르크 지나서 가는겨 또한. 츠비카우.는 접경이고.
Nikolaus Storch (born pre-1500, died after 1536) was a weaver and radical lay-preacher in the Saxon town of Zwickau. He and his followers, known as the Zwickau Prophets played a brief role during the early German Reformation years in south-east Saxony, and there is a view that he was a forerunner of the Anabaptists. In the years 1520-1521, he worked closely with the radical theologian Thomas Müntzer.
니콜라우스 스톡. 뮌처랑 나이가 비슷해. 얜 저기 마을의 직조공이야. 원사로 옷감 만드는. 얜 우리식으로 보면 야학으로 교회가서 공부하다가 글을 깨우치면서리 종교개혁에 눈을 뜬겨. 옆의 얀후스 바람으로. 독특한 인물이야.
뮌처가 츠바카우.를 가서리 설교하면서 쟤랑 쿵짝이 맞는겨. 쟨 혼자 깨우친거야. 독특한 야 저 니콜라우스. 그 빈부분을 뮌처.가 채워주는거야.
The Zwickau prophets were three men of the Radical Reformation from Zwickau, Electorate of Saxony in the Holy Roman Empire, who were possibly involved in a disturbance in nearby Wittenberg and its evolving Reformation in early 1522.
The three men, Nicholas Storch, Thomas Dreschel and Markus Stübner, began their movement in Zwickau.
츠비카우의 에언자들. 츠비카우의 세 예언자.가 저 루터때 츠비카우.의 세명이 바람을 일으켜. 이 셋이 니콜라우스 스톡. 토마스 드레쉘. 마르쿠스 스튑너. 뒤의 둘은 몰라 누군지. 오직 하나만 기록에 남아. 다 토마스 뮌처.가 저 츠비카우 에서 만난 친구들이야.
토마스 뮌처는 농민전쟁으로 가는거고. 이들은 지들 말을 떠나서리 비텐베르크 본토땅 중심에 가서리 예언자 놀이 하는건데. 저 세명은 말야. 걍 어설프게 감정적으로만 분발을 한거걸랑. 먹힐 수가 없어. 사람들이 그러는거지. 이젠 별 하다하다 별 떨거지덜이 개혁가네 함시롱 떠들고 다니고 아 세상 말세야 이건. 하는거고.
루터가 또한 자기 외에 뜨는 인간 싫어 . 뮌처에게 머라는겨. 너 대체 츠비카우가서 머 저따위 애들을 만나냐. 하니까 뮌처.는 야 이 아 내가 니 딱깔이냐 내 친구들을 개무시하냐 니가. 내보다 나이많다고 꼰대질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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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는 프라하로 넘어가는겨. 저기도 루터이야기가 퍼져있어. 아 헌데 말야. 프라하.는 다시 말하믄. 계속. 얀 후스 파들이 잇어 이미. 여긴 니덜보다 더 트였어. 후스 전쟁들도 이미 한 상태에서 그게 섞이면서 카톨릭과 후스가 자리를 잡은겨 이병딱아. 얘가 이딴 분위기 모르고 나 토마스 뮌처.는 해대민서 설교질 하는거지. 저따위 나 누구는. 은 하튼 똑같은겨 이게.
쫓겨나 프라하에서.
그리고 작센에 돌아오고 작은교회에서 또 설교하믄 시안하게 사람들 모이고
하다가 말야
농민전쟁에 들어가는거야
이 독일농민전쟁.은 토마스뮌처.의 전쟁이 아냐. 헌데 이 토마스 뮌처.를 뺄 수는 없어.
오히려. 루터 보다는 토마스 뮌처.가 더 강력해보여. 얜 아예 영주 자체를 엎으려한거걸랑 그 속내는. 물론 안될 것도 뻔한걸 아는거고. 나중 잡혀서리 고문 당하고 진술하고 사형당하지만.
쟤가 마르크스의 조상님이야 쟤가.
나중에 하자. 본론은.
The original armour worn by Götz von Berlichingen, on exhibit in the Hornberg museum.
Gottfried "Götz" von Berlichingen (1480 – 23 July 1562), also known as Götz of the Iron Hand, was a German (Franconian) Imperial Knight (Reichsritter), mercenary, and poet. He was born around 1480 into the noble family of Berlichingen in modern-day Baden-Württemberg. Götz bought Hornberg Castle(Neckarzimmern) in 1517, and lived there until his death in 1562.
He was active in numerous military campaigns during a period of 47 years from 1498 to 1544, including the German Peasants' War,
독일 농민전쟁. 괴츠 폰 베를리힝엔. 철갑손 괴츠. 가 입었던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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