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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트.
Origin
Late Middle English (as a verb in the sense ‘make a solemn declaration’): from Old French protester, from Latin protestari, from pro- ‘forth, publicly’ + testari ‘assert’ (from testis ‘witness’).
이건 공개적으로. 테스타리. 주장하는겨. 고대로마의 법정에서 반론.을 드는거야 공개된 장소에서. 증인 목격자들 세우고.
지난번. 성직.하는 클러지. 란 말은 lot. heritage. 유산이고 받은거고 운명적인거걸랑. 아 말을 로마에서 안쓴 이유는. 로마의 사제.는 선거로 뽑는거걸랑. 자기들 사는 것과 전혀 다른 단어야. 해서리 저 말을 안쓰고 플라멘. 이라고 자기들은 한거야. 그리스의 사제들만 쓴거야 저건. 걔들은 선거.로 사제를 뽑지 않은거고 대물림이거나 신들린 무당들만 사제를 해서리 클러지.한거야. 이게 그리스도 들어오면서 운명적인 거다 성직은. 해서리 쓰는겨. 그리스도는 바탕이 찐한 운명론이야 이것도.
Origin
Mid 16th century: via ecclesiastical Latin from ecclesiastical Greek euangelikos, from euangelos (see evangel).
에반젤리컬. 그리스어야. 유 안겔리코스.
Greek euangelion ‘good news’, from euangelos ‘bringing good news’, from eu- ‘well’ + angelein ‘announce’.
유 안겔리온. 유. 가 좋은. 안겔레인.이 공식적인 발표. 해서리 좋은 뉴스. 복음. 하는겨. 에 반겔리온. 이야.
가스펠 이란건
Old English gōdspel, from gōd ‘good’ + spel ‘news, a story’ (see spell), translating ecclesiastical Latin bona annuntiatio or bonus nuntius, used to gloss ecclesiastical Latin evangelium, from Greek euangelion ‘good news’ (see evangel); after the vowel was shortened in Old English, the first syllable was mistaken for god ‘God’.
저 에 반게리온. 이란 고대그리스어를. 이걸 라틴어로 후기에 조합해서 만든 말이. 그리스도 믿고서리. 저걸 보나 안눈티아티오. 하는거야. 독일 본. 이란 도시가 보나. 야 좋은 도시. 카이사르 가 만든 군단도시.
저걸 이젠 게르만 애들이 창작 할 수준 까지 온거야. 자기들 게르만 말로. 얘들이 이제는 로마 그리스를 다 배우고 진화를 한거야. 언어를 보면 알게 돼 그걸.
저 말을. 자기들은. 복음 이란건 신의 소리. 라는거야. 갓. 이 스펠. spell 소리를 내는거야. 스펠링 스펠 spell. 은 완전한 게르만어야. 세이. 에서 시작하는. 그냥 생각나는 걸 말하다. 이게 막 그 말의 무게 에 따라서. 말을 만들기 시작하는거야. 스펠. 스피크. 다 저 세이. say 에서 시작하는겨. 말을 하다보니. 그 말도 무게에 따라서 구분하기 시작하는거지. 스펠 스피크 다 게르만 어야. 그리스 로마 에서 갖고 온게 아냐.
프로테스탄트. 란 말은. 영주들이 쓰기 시작한거야.
에반젤리칼. 이란 말은. 루터가 쓰기 시작한거야.
시작부터가 전혀 달라.
Six princes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rulers of fourteen Imperial Free Cities, who issued a protest (or dissent) against the edict of the Diet of Speyer (1529), were the first individuals to be called Protestants.[19]
On 18 April 1521, Luther appeared as ordered before the Diet of Worms.
The Edict of Worms was a decree issued on 25 May 1521 by Emperor Charles V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 에 모습을 나타낸게 1521년 4월 18일.
It was conducted from 28 January to 25 May 1521, with the Emperor Charles V presiding.
보름스 다이어트 제국회의.는 이미 당해 1월28일 부터 시작을 한겨. 3개월을 한거야 보름스에서. 야 너 루터 나와서리. 최후의 진술 하라우. 얘가 간겨 저기에. 그리고 여기서도 요한 에크.와 논쟁을 해. 얘 깡다구는 인정해줘야지. 대자보 글 쓰고 햇수로는 4년 째인거야. 1517. 라이프치히 논쟁 1519.쟤가 최후의 진술을 하고. 회의 마지막. 세달 만의 결론.이 보름스 칙령. 에딕트. 황제령이야. 카를 5세. 얘가 황제에 오르고 갓2년 만에 하는 칙령이야. 얘 나이가 21살이야. 1500년생.
이때 이 카를5세의 처지가 또한 피곤한 상황이야. 일단 이탈리아 전쟁은 전반전이 끝났어.
- 2.1First Italian War of 1494–1498 or King Charles VIII's War
- 2.2Second Italian War or King Louis XII's War (1499–1504)
- 2.3War of the League of Cambrai (1508–1516)
- 2.4Italian War of 1521–1526
막 후반전 시작할때야. 1521년-26년 저리 뭉뚱그려 되어있지만. 저게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캉브헤 리그 전쟁. 베네치아 상대로 전부 올인하다가. 프랑스 돌아서서리 교황 시껍하고. 프랑스는 밀라노.만 먹고 돌아간 상황에서. 5년간 조용한겨. 할배 막시밀리언도 늙었고. 아빤 이미 일찍 죽고. 저때 카를5세가 황제관 쓰는 시기걸랑. 이때 쉰겨. 카를5세도 머 이탈리아에 숟가락 담굴까 말까 고민만 하는거야. 프랑스가 굳이 시작한거. 쟤들은 나폴리에서 쫓겨나고 밀라노만 내꺼 하고 간거걸랑.
- 1520–1521 Revolt of the Comuneros
- 1521–1523 Revolt of the Brotherhoods
The Spanish conquest of the Iberian part of Navarre was initiated by Ferdinand II of Aragon and completed by Charles Vin a series of military campaigns extending from 1512 to 1524.
이미 이전에. 아빠 펠리페 죽고서리. 외가쪽에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나바르.랑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거야. 이게 10년 지나서리. 외할아버지 페르디난도.도 죽고. 엄마는 미쳤다 하는거고. 저 나바르와의 전쟁의 짐도 얘한테 떨어진겨 당시.
저 상황에서 루터가 튀나온거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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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르.가 남자핏줄 끊기고. 여자 퀸이 아라곤의 조안2세.랑 결혼하고. 이 나바르 본주인 여자 퀸이 죽고. 카스티야의 귀족여자랑 재혼하면서. 이전 나바르엄마의 아들 카를로스.가 반기를 들고 짜지고.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 안선다고 임포텐트.하민서 처녀인체로 이혼한 딸에게 나바르 주고. 독살 당하고. 여동생이 나바르.를 물려받아서리. 이 여자가 프랑스 퐈 faix 피레네 접한 가스코뉴땅 백작이랑 결혼하면서. 옛날 샴페인이 외숙모핏줄로 발담그기 시작해서 성루이 딸이 며느리가 되서리 커패 왕조가 나바르.도 지배한 이후로. 프랑스의 퐈.가문이 결혼으로 가면서 끈적끈적 계속 프랑스 애들이 여기 나바르.에 발담그고 있었던거걸랑.
저러면서. 기존 나바르. 바스크의 핏줄들과. 저때까지의 카페 핏줄들과. 새로온 퐈.가문의 애들이. 이게 서로 내분이 될 수 밖에 없는거야.
이탈리아 전쟁.은 결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전쟁 이걸랑. 그 주요 전장터가 이탈리아지만. 이게 결국 유럽 전대륙으로 퍼질 수 밖에 없어. 합스부르크가 스페인과 합치면서. 얘들은 프랑스를 치는 거고. 프랑스는 오른쪽 경계선을 치고 들어가는거야. 해서리 특히나 저지대의 반란들에 이 프랑스가 불을 지펴 배후로.
더하여. 스페인이 프랑스를 칠때 저 길목이 나바르.걸랑. 카스티야 와 아라곤의 합이 저 나바르.가 결국 프랑스면 배후가 찜찝한거고 가는 길의 길목이야 저걸 정리하고 피레네 산맥너머로 가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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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이탈리아 전쟁 하나도 골치아픈데. 먼 나바르 이야기는 머여 대가리 뽀가질텐데. 하튼 저따위 이야기가 한글로 된게 전혀 없어. 안뒤져봤지만.
The War of the Bands (Basque: Bando gerrak, Spanish: Guerra de los Bandos) was a civil war, really an extended series of blood feuds, in the western Basque Country, Gascony, and Navarre in the Late Middle Ages. The main primary source for the War is Las Bienandanças e fortunas by Lope García de Salazar, written c.1471.
저 프랑스 퐈. 가문이 나바르의 조안2세의 두째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고 다시 이어 나바르에 발담그면서 특히나. 기존 귀족들과 프랑스의 카페 핏줄들에 이어서리 발루아 가문에. 퐈 가문에. 거기에 나뉜 민들에 해서리 반도스 전쟁. 이 나바르에서 터지는겨 오래. 프랑스에 반발하는 기존 나바르 세력이 특히나 더. 여기에 프랑스 왕가가 직접 끼는거고. 해서 프랑스 애들이 수시로 넘어오는겨.
저런 상황에서.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말야. 마누라 이사벨라.가 죽었잖아. 재혼을 해. 이 재혼한 여자가. 저 하필 퐈 가문의 여자야.
Germaine of Foix (Catalan: Germana de Foix; French: Germaine de Foix;1488 – 15 October 1536)
이여자가. 엘레오노르.와 퐈가문사이의. 세째아들의 딸이야. 당시 나바르 왕은 죽은 첫째의 딸.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가 1452년생. 재혼을 이사벨라 죽고 1506년. 54살에. 18살 처자랑 한거걸랑. 이사람은 저기 왕권에 낄 마음도 없어. 걍 좋은겨. 저쪽 분위기는. 저 페르디난도.가 카스티야에 이제 여기 나바르.도 먹는구나. 난리가 난겨 지들끼리. 자기들 서로들 내전 하면서.
깡브헤 리그 전쟁때. 프랑스가 배신하고 베네치아랑 손잡고 다시 이탈리아에 욕심부리면서.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재혼하고 저 나바르를 치는거야. 내전 여전한 상황에. 프랑스와의 변경이기도 하고. 저런 내전들이 국경 넘어서리 카스티야 아라곤에 전파되는 것도 안좋고.
헌데 저긴 바스크. 드센 곳이야. 나바르와는 프랑스 샴페인이 들어오면서 크고 작은 내전 해왔던겨. 여기에 프랑스는 피레네 자주 넘어오는거고.
프랑스와 스페인은 원래 저때부터 안좋았걸랑. 레콩퀴스타 전에도. 저 나바르 문제에. 피레네 변경 지역과의 충돌에. 이게 합스부르크 랑 묶여지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 이탈리아 를 핑게로 아주 불이 붙었을 뿐이야.
항상 문제는 저기 피레네 접경이야. 그리고 거기에 저 나바르.
나바르를 점령했지만 다시 후퇴해. 수시로 싸워. 재점령하고. 나바르의 뒷배는 프랑스야. 이 와중에 페르디난도가 죽어. 1516. 카를5세가 황제가 되고.
From 1520–1521, Castile was distracted by the Revolt of the Comuneros. The Crown of Aragon was also suffering economic difficulties as well as the Revolt of the Brotherhoods. As a result, Spain was seen as a ripe target of opportunity by the French King Francis I. Meanwhile, the young King Henry II of Navarre, based in his domains of Béarn, saw a way through to reconquer Navarre.[2]:81 Taking advantage of the synergies with France, Henry began raising a 12,000-strong army, mainly Gascons and Navarrese exiles, to recapture the Navarre occupied by the Spanish. The large French-Navarrese army commanded by General Asparros (or Esparre) crossed the Pyrenees, consisting exactly of 12,000 infantry, 800 mounted knights, and 29 pieces of artillery.
그리고. 카스티야.에 코무네로스 리볼트가 터지고 곧이어 아라곤의 길드들이 반란 하지만. 이때 나바르.의 자기들이 세운 킹을 앞세우고. 다시 나바르.를 재정복하려는겨. 프랑스는 스페인이 싫어. 무서버. 완전히 양쪽에서 자기를 에워싼겨 이젠. 합스부르크와 스페인이. 당연히 나바르 이전애들. 얜 저 퐈가문과 결혼해서 낳은 딸.이 킹 되고 결혼한 역시 프랑스 가문애야. 얘들 이어서리 결국 부르봉이 먹는겨 나바르 킹덤을.
여기에 프랑스 프랑수아1세가 당근 도와주고. 가스코뉴에서 프랑스 병력으로 나바르.를 다시 재정복하러 가는거야. 저때가 1521년. 3월 4월. 이야
저러면서 프랑수아.는 왼쪽은 나바르.를 치면서 결국 이베리아반도를 치는거고. 오른쪽으론 독일땅 저지대를 치는거야.
카를5세는. 그래서. 저걸 막으면서. 프랑수아.가 먹은 밀라노.를 다시 치러가면서 먹고. 이탈리아 전쟁이 다시 불을 붙는거야 이게.
저때. 프랑스가 나바르를 치러갈 때. 보름스 다이어트. 회의 중이었던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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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5세는 이십년가까이를 플랑드르에서 태어나서 자란애야. 저긴 인문주의야 당시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제일 빨리 가는 곳도 저기야 저 끝 해변이야. 플랑드르고 프리지아야. 인문주의가 저기 넘어갈때 얘가 태어나서 자란겨. 얜 꼴통 카톨릭이 아냐. 해서리 수행온 따까리가 자기랑 이름 똑같은 20살 조카를 카스티야가서 대주교 자리에 앉힌것도 달리보믄. 카톨릭을 우습게 보는겨 그게.
헌데 황제가 되었어. 얜 교황 자리까지 갖고 오려는 인간이야. 얘 어록이야. 나는 카이사르와 그리스도를 같이 취해야겠다 는 거야. 아무도 못한거걸랑. 오토1세부터 서임권 갖고 오려고 교황이라 싸우다가 하인리히4세는 카놋사가서 무릎꿇고 나중에 작센 진압하고 승질나서 지혼자 로마 교황 가두고 새 교황 세우고 황제관 쓰고 왔지만. 그이후로 그리스도는 교황꺼였걸랑.
이제. 자기가 속세와 하늘의 통치자. 가 되는겨. 음청난겨 이게.
로마 카톨릭.이 깨부서지는건. 관시미가 없어. 저 루터애들 이야기가. 얘한텐 그리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걸랑. 아 헌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말야. 저러다 로마 카톨릭이 깨지면. 저 루터 애들의 저건. 내께 되는거야?
그게 아닌거야. 그 고민의 시간이 저 어린애가 주위의 말도 듣고. 생각 점점 여물면서. 그게 4년이 걸린거야. 1517년에서 1521년 까지. 저 결론 내릴때까지.
더하여. 얜 20살 갓 넘었어. 영주들은 짱짱해. 이베리아반도 자체의 킹덤들도 그 로컬의 귀족들도 깐깐해. 지 앞에선 수그리지만. 자기 말이 잘 안먹혀.
하물며. 저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이 그 각각이 쉬운 애들이 아냐.
그걸 서로 알아.
이미 세상이 변했어.
The Diet of Speyer or the Diet of Spires (sometimes referred to as Speyer I) was an Imperial Diet of the Holy Roman Empire in 1526 in the Imperial City of Speyer in present-day Germany. The diet's ambiguous edict resulted in a temporary suspension of the Edict of Worms and aided the expansion of Protestantism. These results were repudiated in the Diet of Speyer (1529).
보름스 회의 끝나고. 5년후. 슈파이어 다이어트. 여기선 잠시 보름스 회의 결정.한 루터애들에 대한 칙령. 을 보류하기로 해. 즉 루터들을 지지하는 듯 한겨. 즉 영주들이. 이미 분위기가 쎈겨 이 지금 카톨릭 중심의 세계. 이전 썰한 권력 싸움이야 이건. 영주와 교회의.
The Diet of Speyer or the Diet of Spires (sometimes referred to as Speyer II) was a Diet of the Holy Roman Empire held in 1529 in the Imperial City of Speyer (located in present-day Germany). The Diet condemned the results of the Diet of Speyer of 1526 and prohibited future reformation. It resulted in the Protestation at Speyer.
바로 3년 후. 같은 슈파이어 제국회의 1529. 삼년 전의 결론을 다시 뭉게. 루터들은 금지한다.
세력이 팽팽한거야. 한편으론 루터들이 드센거야.
- 1522–1523 Knights' Revolt
- 1522–1559 Habsburg-Valois Wars
- 1524–1525 German Peasants' War
기사들의 반란이 보름스 회의. 루터 죽여. 끝나고 그 직후에 터진거야. 저건 기사들. 배론 이라는 낮은 직위의 사람들이. 지킹엔과 후텐이 중심이 되었지만. 이 둘은 거지가 아냐. 지킹엔은 돈 많이 모은 기사야. 아쉬울게 없어. 헌데 과연 단지 쿠데타 해서 권력 잡으려는 인간이야. 아니면 나름 이상이 목적이 뚜렷한 거냐. 이게 애매한거야 지금. 후텐도 간단한 인간이 아냐. 나름 인문학적 소양이 높은 사람이야. 기사.가 아냐 원래. 아빠가 가난한 기사 였을 뿐이야. 창칼 쥐어본 사람이 아냐. 몽크 였다가 글만 판 사람이야. 로마를 보고 분노한 사람이야
지킹엔은 수많은 전쟁에 참여 하면서. 그 속에서 시대의 문제를 깨달은 사람이야.
헌데 아직 덜 무르익은겨. 시작인겨 저땐. 아직 큰 와꾸가 없어. 무모한거야 그래서.
둘다 로마 카톨릭이 싫어. 싫은 이유는. 그 시대의 권력이 싫은거야. 그 괴리감이. 그 상징이 카톨릭일 뿐이야. 저거에 반대하는 큰 소리가 루터들이야. 열렬한 루터가 되는겨. 헌데 루터가 먼말하는진 몰라.
루터를 반대하는 애가. 트리어. Trier 대주교 인걸 알았어. 선제후권 있는 곳. 칼마르크스가 태어난 곳. 깝깝한 곳이야. 칼 마르크스가 여기서 티나와서리 개소리 인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거고.
이들은 기사를 소집해. 의외로 모이는겨.
왜? 일단. 기사들이 점점 일자리가 없는겨. 다들 상인으로 빠졌어. 먹고 살게 없어. 시대가 변했어. 아키버스 라는 총이 나와. 몽스 메그. 매드 메그. 그 뒬레 흐릿. 대포가 나와. 이젠 중무장해서 말타서리 자우스팅 하는 시대는 끝난겨. 눈치빠른 애들은 상공업으로 빠지고 인문학 배우면서 행정으로 빠지는데. 점점 일꺼리가 줄어들어. 점점 이전의 영지 스테이트 땅 중심으로 땅나눠주는 시대가 아냐. 나눠줄 땅도 없고. 땅 줘 봤자 거기서 일할 농노 도 없어. 장사하지 누가 여전히 거기 처박히서 작물을 심어. 세상 돌아다니기 바쁜데.
세상이 썩은겨. 세상탓 하는겨. 아 저 중심에 카톨릭이 나쁜야.
모이는겨. 저기가 스와비아 북부에 라인 팔라틴 접경이야.
이들이 저 트리어. 프랑스 접경이야 여긴. 저 서쪽으로 진격하는겨 ㅋㅋㅋ. 저 루터 죽이려는 중심의 저 대주교 치러갑세다.
아 순박한겨. 아마 중세 기사들의 마지막 향수야 저건.
카를이 그러지 마라해. 이들은 카를에게. 우리네는 황제에 반기를 드는게 아니다. 오직 저 트리에 대주교 치러 갈 뿐이다.
영주들이 나서는겨 오히려 카톨릭 깨부수자 하던 작센. 헤쎄 가문들이. 저들을 막으러.
바로 뒤의 농민전쟁도. 저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이 막어.
얘들 입장은. 거기까지만. 인겨 ㅋㅋㅋ. 우리는 건들지 말오.
저 기사들의 리볼트. 가 종교전쟁의 시작이야 이건. 확실해. 루터를 들고 일어나서리. 카톨릭의 대명사 트리어 주교를 치러간거야. 루터들은 이빨만 살았다. 우리네가 무력으로 없애주마.
바로 이어서리 농민전쟁도 마찬가지....는 아니야 시작이 이게. 헌데 이게 여기 반 카톨릭이 끼어들어가. 이건 중세 봉건체제 에 대한 반기야. 여기 사상 제공을 반카톨릭이 한거야. 이건 루터가 아냐. 토마스 뮌처.는 루터보다 더 엄청난 인간이야. 루터조차 시껍해 하는 인간.
Six princes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rulers of fourteen Imperial Free Cities, who issued a protest (or dissent) against the edict of the Diet of Speyer (1529), were the first individuals to be called Protestants.[19]
해서 프로테스탄트. 란 말은. 저때. 슈파이어 다이어트 1529년. 기사들 반란에 농민전쟁 후인 1526년 제국회의때 야 세상 어수선하니까 잠시 쟤들 건들지 말자. 무엇보다도 저 두개.는 루터파 영주들이 다 진압을 한거야. 기사들이 루터지만 막은것도 루터 영주야. 농민전쟁은 애초에 루터가 저것들 사탄이다. 루터들은 저기에 동참 말아라 라고 루터 자체가 난리 부루스를 춰.
해서 루터파들이 저걸 진압을해. 당연히 루터들이 입김이 쎄진거야. 해서리 루터에 대한 탄압은 잠시 보류. 하다가 3년 후에. 이 루터들이 더 쎄지니까. 절대 엄금 한거야.
즉 저 제목 흐름만 봐도. 카를 5세는 카톨릭에 대해서. 지지 는 전혀 없어. 얜 교황도 무시하는애야. 저때는 로마약탈 1527 이후야. 카를 5세의 루터파 용병들이 로마를 쑥대밭 만든 직후야. 성상들은 다 파괴가 되었어.
교황은 완전히 끝난겨 이미.
그리고 나서리. 슈파이어 제국회의 다시 하면서. 저 쓰러진 카톨릭.을 카를 5세가 다시 줍겠다는거야. 여기까지만. 다시 카톨릭 한다. 루터들은 없어져라 하시는겨. 얘도 이제 30살이 되어가.
저 것에 대한 반기야. 14개의 자유제국도시들의 영주들과 6명의 군주들. 이 저 슈파이어 제국회의 1529 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을 한거야. 프로테스트.
이들을 프로테스탄트. 라고 처음 불렀어.
프로테스탄티즘. 은 저기서 나와.
The word evangelical (German: evangelisch), which refers to the gospel, was widely used for those involved in the religious movement in the German-speaking area beginning in 1517.[20] Nowadays, evangelical is still preferred among some of the historical Protestant denominations in the Lutheran, Calvinist, and United Protestant (Lutheran & Reformed) traditions in Europe, and those with strong ties to them (e.g. Wisconsin Evangelical Lutheran Synod). Above all the term is used by Protestant bodies in the German-speaking area, such as the Evangelical Church in Germany. In continental Europe, an Evangelical is either a Lutheran, a Calvinist, or a United Protestant (Lutheran & Reformed). The German word evangelisch means Protestant, and is different from the German evangelikal, which refers to churches shaped by Evangelicalism.
에반젤리컬. 에 반젤리컬.은 루터. 스스로가 만든 말이야. 게르만 에반겔리쉬. 얘가 만들었다기 보다. 얘가 이 말을 지금 우리가 쉽게 접하게끔 저때 퍼뜨린겨. 이 운동을 한겨. 1517년 대자보 글 나오는 때로 보다. 하는게 저게 마르틴 루터.야
얘가 그러는거야. 카톨릭의 모든 짓들은. 성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면서 지가 게르만어로 성서를 번역을 한거야. 신약이 1522년이고. 십여년 . 십이년 후냐 구약이 나온게. 저 신약도 에라스무스.께서 직전년도에 그리스어로 번역하신걸. 보고. 지가 게르만어로 주작질 한거야. 마치 지가 하늘에서 떨어진 마냥 꼴깝질 하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번역한 성서 대로 하라는거지.
지금 개신교. 라고 번역한건. 프로테스탄티즘.을 번역한거야. 저기서 루터 이야기 중심으로만 가자 하는게 루터리아니즘 이고. 즉 시작은 다 루터 야 일단은. 시안하게. 저때 직후에 헨리8세가 발정이 나면서 앤불린 에게. 저때 얘가 앵글리카니즘.을 만들은거야. 저걸 빼낀게 아냐. 그 와꾸는 또 옥 같아.
카톨릭 위에 군주 가 앉겠다는거야.
잉글랜드는 카톨릭 위에 킹이 앉겠다는거고
신성로마제국의 영주애들 관심은 자기들 각각이 카톨릭 위에 앉겠다는 거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엠퍼러는. 안된다 . 카톨릭은 내꺼다. 하는거고. 해서리 건들지 말아라. 껍데기인 교황. 자리 그대로 둬라. 거기서 황제.인 내가 뒤에서 조종할꺼니까는.
루터의 페이쓰 얼론. 단 하나만 봐도. 저 와꾸는 다를게 전혀 없어.
카톨릭에 돈주지 마세요,. 혼자 믿으세요. 굿워크 는 사탄의 노예가 된 자유의지의 인간들에겐 의미없는 거예요. 하지마세요 굿워크.
카톨릭에 안가요? 루터교회 가요? 아 그대들은 페이스 얼론 하는 자유의지를 갖추게 된 인간. 이젠 굿워크도 하세요. 헌금하셔야죠.
교회를 없애라 가 아냐 그래서. 교회를. 나를 지지하는 그대 영주가 갖아라 군주가 갖아라.
결국 똑같은...게 아냐 저게.
어차피 로마 카톨릭 이란건. 시작할때 저당시의 루터애들의 마음자세로 시작을 한거야. 그게 1500년이 흐르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 천오백년 동안 나름 이유있는 이유로 그러한 자리를 각각이 잡으면서 있었던거야. 그 그림자가 부패 적폐로 좀 튀어보였을 뿐이야.
저걸. 루터 란 이름으로 . 다시 처음부터 하는겨.
별다르겠니? ㅋㅋㅋㅋ
오히려. 카톨릭의 축제들이 사라지면서. 세상은 살벌해진거야. 서로들. 니가 더 순결하니 내가 더 순결하니. 저때부터 마녀사냥이 극심해지는거야. 저 적폐 들.
마녀사냥의 그 수많은 죽음의 큰 지분은 루터들에게 있어.
더하여 저 이후의 종교전쟁의 수많은 죽음은. 머 루터에게 있겠니. 어차피 그건 핑게꺼리고. 종교전쟁이란 이름으로. 기존의 체제. 가둔 벽을 깨뜨리는 과정이었던거야.
이땅바닥은. 저런것도 없고. 없을거고.
저 종교 수준도. 페이건 이걸랑. 걍 . 저들 종교가 이땅에 들어오면 미신이 되는겨. 한무당 을 저들 종교속에서 해. ㅋㅋㅋ.
번역도 개번역. 세상에 없는 성경의 말이 한글성경들에 있는거고. 불경은 별다르간.
여긴 딱 게르만애들이 갈리아 들어갈때인 서기 사오백년 수준의 지쩍 수준이야.
아 저 미디어를 점령한 지식인자연하는. 나라걱정하는 척하는 인간들을 보면.
지렁이가 생각나.
The 6 Princes[edit]
- John the Steadfast of Wettin, Elector of Saxony
- George the Pious of Hohenzollern, Margrave of Brandenburg-Ansbach
- Ernest I the Confessor of Brunswick-Lüneburg, Duke of Lüneburg-Celle and his brother
- Francis, Duke of Brunswick-Lüneburg, Duke of Gifhorn
- Philip I the Magnanimous, Landgrave of Hesse
- Wolfgang of Ascania, Prince of Anhalt-Köthen
The 14 Imperial Free Cities[edit]
- Strassburg
- Augsburg
- Ulm
- Konstanz
- Lindau
- Memmingen
- Kempten
- Nördlingen
- Heilbronn
- Reutlingen
- Isny
- St. Gallen
- Weissenburg
- Windsheim
저당시의 프로테스탄트들. 6명의 프린스. 작센의 베틴가문. 브란덴부르크 안스바흐. 호헨졸레른 가문. 안스바흐.는 바바리아 땅에 있지만. 브란덴부르크 저 해변과 엮였걸랑 호헨졸레른 가문이. 얘들이 보다 열린거야. 해변과 내륙을 같이 영지로 두면서 같이 스미는겨. 브륀스 뤼네부르크. 여기도 함부르크 아래야. 엘베강 흐르는. 헤세.의 필리프. 얘가 작센과 함께 두 축이야 시작이. 이 헤세가 나중 나싸우 랑 합치는거고. 안할트 쾨텐의 아스카티아 가문. 여기도 작센 마이센의 베틴 가문 라이프지히 부근이야. 이 가문이 베틴가문에게 들어가는데. 다 영향 받는겨 서로들.
아래 제국 도시. 임페리얼 임미디어시.하는 애들. 저 곳 다들이 스와비아.에 라인강 흐르는 팔라틴 부근과 옆 알사스 로렌 접경지대야.
다음에 하자.
The Gedächtniskirche der Protestation (English: The Memorial Church of the Protestation) is a United Protestant church of both Lutheran and Reformed confessions in Speyer, Rhineland-Palatinate, Germany that commemorates the Protestation at Speyer in defense of the evangelical faith, specifically Lutheranism. Built between 1893 and 1904, the church was constructed in memory of the protest that took place at the Diet of Speyerby the Protestant rulers of the Holy Roman Empire in 1529. The tower is the tallest bell tower in the whole Palatinate at 100 metres (330 ft).
프로테스탄트 처음을 기념하는 교회. 슈파이어. 1904년 완공.
보름스 회의 보름스. 슈파이어 회의.의 슈파이어. 라인강이 알사스 삼각모양 접하면서 쭉 내려가서리 라인강에 다들 접한 도시들이야. 가운데 만하임. 더 죽 가면 마인츠.
바다에 접한 이들과 강에 접한 이들이 생각이 트인 애들이 많은거야. 상대적으로.
강과 바다로 더 넓은 세상을 빨리 접하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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