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view of Lorenzo Ghiberti's cast gilt-bronze "Gates of Paradise" at the Florence Baptistery in Florence, Italy, combining high-relief main figures with backgrounds mostly in low relief.
로렌초 길베르티. 1401년. 나이 23세 작품. 미켈란젤로 작명 천국의 문들.의 일부. 청동에 도금.
Gates of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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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iggerless arquebus; a hand cannon with hook
The arquebus (/ˈɑːrk(w)ɪbəs/ AR-k(w)ib-əs), derived from the German Hakenbüchse, was a form of long gun that appeared in Europe during the 15th century. Although the term arquebuswas applied to many different forms of firearms from the 15th to 17th centuries,
아키버스. 장총. 15세기 말에 등장. 17세기까지 다양한 다자인으로 사용.
Depiction of an arquebus fired from a fork rest. Image produced in 1876
1876년에 그린. 아키버스 를 이리 썼을 거라 추정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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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말이지. 일본들은 전장식 소총. 즉 총구를 세워서리 탄약을 총아가리로 쑤셔넣어서리 당겨. 그게 엔필드 라이플 머스킷. 하는 머스킷 총이야. 다음이 후장식이야. 탄약을 바로 방아쇠위에 올려놓고 쏴. 일본덜이 저 후장식 총으로 내전을 해. 저걸 들고 조선을 처먹으러 가.
저 구한말 의병이라 할때. 쟤들이 쓰는 총이. ㅋㅋㅋ. 저 저 저 아키버스. 저게 거치대 놓고서리. 저기 밑에 줄에 불붙여서 쏘는겨. 저게 일명 조총이야. 화승총이라 카는거.
저런 총이. 포르투갈 애들이 종자도 가서리 다이묘들에게 준거고. 오다노부나가 가 써먹은 거걸랑.
저걸 말이지. 구한말에야 저걸 쓰는겨. 조선이. 저 화승총을. 저것도 귀해서리 몇몇만 쓰는겨. 짝대기 없이 앞에 한사람이 앉아서리 그 사람 어깨에 걸치고 쏘고.
저게 떠벌리는 위대한 천보총. 어쩌고 저쩌고 조선의 위대한 문명 개 ㅋㅋㅋ. 아 정말 말이지 말야. 이땅바닥의 조선에 대한 역사 조작질은 정말 이건 끔찍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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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키버스.가 이탈리아 전쟁때. 프랑스 애들이랑 카를 황제 군대애들이 들고다니던 총이야. 프랑수아.가 저 총이 쩍었어 카를 애들보다. 저게 독일땅에서 제조를 한거야. 프랑스가 그래서 진거야 또한.
저때가 서기 1500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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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volt of the Comuneros (Spanish: Guerra de las Comunidades de Castilla, "War of the Communities of Castile") was an uprising by citizens of Castile against the rule of Charles V and his administration between 1520 and 1521. At its height, the rebels controlled the heart of Castile, ruling the cities of Valladolid, Tordesillas, and Toledo.
The Revolt of the Brotherhoods (Catalan: Revolta de les Germanies, Spanish: Rebelión de las Germanías) was a revolt by artisan guilds (Germanies) against the government of King Charles V in the Kingdom of Valencia, part of the Crown of Aragon. It took place from 1519–1523, with most of the fighting occurring during 1521. The Valencian revolt inspired a related revolt in the island of Majorca, also part of Aragon, which lasted from 1521–1523.
스페인땅의 두개의 리볼트. 게라 드 라스 코무니다데스 드 카스티야. 레벨리온 데 라스 게르마니아스.
시기가 1519년에서 1523년에 두개가 겹쳐 일어나. 코무니다데스.는 코무네.야 이탈리아의 코무네. 프랑스의 코뮌. 코뮤니티. 이건 카스티야 에서 일어나
게르마니아스. 라는 건 스페인 속어야. 슬랭. 트윈티 원 파일롯스 애들의 히든스.들이 지들이 서로 형제여 하는겨. 아 간만에 들어보자 히든스. 명곡이다. 짐이 번역한 걸 보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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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가 말야. 이탈리아 전쟁이 터지고 그 65년간의 이탈리아 전쟁 시작하고 딱 중간 지난겨 30년 지난 1520년 전후. 샤를8세가 황금사과 받아서리 밀라노도 콜하고 넘어와서리 매독 뿌리고 돌아가고 다음 루이12세가 다시 나폴리 먹으러 가기 전에. 페르디난도랑 나폴리 같이 나눠 먹자 병딱짓 해서리. 피렌체랑 피사 싸우는거 끼다가 걍 내려가서리 나폴리 나눠먹다가 스페인애들이랑 전투하다가 쫓겨나서 다시 돌아가고.
교황이 베네치아 꼬셔서리 교황령을 체사레 보르자 수하들에게서 뺏았다가. 베네치아야 니덜도 걍 가 하다가 베네치아가 못가 해서리 캉브해 동맹으로 베네치아랑 모두 전쟁하고. 여기에 낀 프랑스 이 기회에 혼자 다 먹어치울라다가 베네치아도 프랑스랑 손잡고. 해서리 이태리북부는 프랑스 베네치아 가 다 먹고.
나서의 바로 그 직후야 저때가.
저때.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돼.
Charles V (Spanish: Carlos; German: Karl; Italian: Carlo; Dutch: Karel; Latin: Carolus; French: Charles Quint; [a] 24 February 1500 – 21 September 1558) was ruler of both the Holy Roman Empire from 1519 and the Spanish Empire (as Charles I of Spain) from 1516, as well as of the lands of the former Duchy of Burgundy from 1506.
1519년. 나이 19세에 얘가 황제가 되는겨. 얘 아빠 미남왕 펠리페가 1506년에 죽었어. 부르고뉴 공작은 나이 6살에 받은겨. 엄마 미친년 딱지 받는 후아나.는 오래 살아. 감금된 체로.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즉 이사벨라가 일찍 죽고. 이 페르디난도.가 1516년에 죽어. 후아나.가 카스티야와 아라곤 의 킹. 이어야 하는데. 이 후아나를 감금을 시키는겨. 그리고 16살에 카를5세가 스페인의 킹이돼. 이 상태에서 19살에 신성로마황제가 된겨. 할배 막시밀리언이 이해에 죽은겨.
막시밀리언이 1월에 죽어. 이때 황제 후보가 둘이야. 프랑스의 프랑수아. 여섯 많아. 25살. 카를 19살. 카를쪽애들이 로비를 하는겨. 돈을 무지 뿌려. 레오10세도 카를쪽으로 돌아서. 카를5세 황제가 되는겨 그래서.
저게 딱 이탈리아 전쟁. 저 가운데. 저때 벌어진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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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말야. 이 카를 5세가. 태어나 자란 곳이 스페인이 아닌겨. 아빠 펠리페.랑 엄마 후아나(조안나)가 살던 곳은 플랑드르야. 저지대. 엄마 후아나.는 당시 서열이 뒤야. 위에 큰언니에 오빠 있걸랑. 막내가 헨리8세랑 결혼하는 캐서린이고. 해서 막시밀리언이 자기 아들을 여기에 보낸건 걍 제휴차원이지 땅따먹기가 아녔어. 걍 재수로 얻어걸린겨 이게.
이 막시밀리언이 마티아스 다음인 야기에워 핏줄들이랑 두쌍 결혼시킨건 그야말로 깊은 스킴이었지만 말야. 하튼 이 대단한 새꺄. 저걸로 헝가리 보헤미아를 먹은거니까. 헌데 스페인은 정말 얻어걸린거걸랑. 후아나.가 여기 시집와서 살은겨.
미남왕 펠리페.를 낳은 부르고뉴의 마리.는 당시 플랑드르에서 살았어. 마리는 플랑드르의 그 브리허. 당시 플랑드르 백작령 수도. 남편 막시밀리언이 한때 포로가 되었던. 여기서 죽은겨 말타다가. 여기 교회에 묻혔어. 펠리페를 낳은 곳도 여기야 브리허. 플랑드르.
펠리페랑 후아나.가 처음엔 사이가 좋아. 2남 4녀.야. 헌데 대부분 다 플랑드르 땅에서 낳은겨. 헌데 남동생 페르디난도 랑 막내딸만 카스티야에 가서 낳은거야. 엄마 이사벨라 죽고 대가 끊겨서리 이리 온겨. 합스부르쿠 쪽에선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진거야 이건. 걍 재수로 주은거야 스페인을.
이 카를5세는 그래서. 어릴때부터 저 플랑드르에서 자란 아이야. 얘가. 스페인은 가리라고 생각도 못했어 원래.
It is said that Charles spoke several vernacular languages: he was fluent in French and Dutch, later adding an acceptable Castilian Spanish (which Charles called the "divine language"[8]) required by the Castilian Cortes Generales as a condition for becoming King of Castile. He also gained a decent command of German (in which he was not fluent prior to his election), though he never spoke it as well as French.[9]
언어를 예닐곱개를 했다고 알려졌다. 프랑스어 덧치어는 유창했다. 게르만어는 선거 전까지는 그리 유창하지 못했다.
카를 5세는. 스페인이 외국이야. 스페인은 말년에 있었어. 이전엔 저 저지대에 있다가. 이탈리아 전쟁때 이탈리아 있다가 스페인에 가는거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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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황제 되기 전에. 펠리페가 일찍 죽고. 후아나.가 킹이 되지만. 아빠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가 이 카스티야.를 섭정을 해. 그러다 페르디난도가 1516년에 죽어.
후아나.가 정신 이상이다.라는 이유로. 물러나게 하고. 저때 장남 카를 5세가 네덜란드 땅에서 처음으로 여길 온겨. 나이 17살에.
이때 얘가 델꼬 온 애들이. 이도 어리걸랑. 선생들이 있걸랑. 그런걸 레티누. 안트라지. 해. retinue. entourage. 얘들이 다 저지대 인간들이걸랑.
카스티야.나 아라곤. 이나 이게 벙찌는겨. 귀족애들이 특히나 더한거지.
카를5세가 보기엔. 독일 저지대의 그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말야. 여긴 그야말로 깡촌인겨. 얘가 우습게 보는겨 여길. 헌데 돈은 많은 듯. 빼먹기 쉬운겨. 이 시기가 또한 아메리카 신대륙 진출할때야. 아직 여기 곶감은 안 올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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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II de Croÿ, Lord of Chièvres (1458 – 28 May 1521)
윌리엄 드 크로이. 얘가 카를5세의 선생이었어. 카를 5세가 얘한테 맡기고 대륙으로 가는거야. 황제 선거에 이탈리아 전쟁으로.
얘가 여기서 군주행세를 하면서 자기들 수행원들을 심는겨.
더하여. 톨레도 의 대주교가 죽었어. 여기 대주교.는 카스티야에게 매우 큰 상징자리걸랑. 이 자리에 갓 20살 짜리 자기 조카. 똑같은 이름의 윌리엄 드 크로이.를 임명하는겨 이가. 교회 돈이 이 돈이 되는겨. 20살 짜리는 얼굴마담이고, 이름이 같어. 이 인간이 대주교행세를 하는겨. 사람들은 이 인간에게 로비 하는거고.
You, land of Castile, very wretched and damned are you to suffer that as noble a kingdom as you are, you will be governed by those who have no love for you.[13]
대자보가 붙어 교회에. 너 카스티야라는 땅이여. 불쌍하구나 신의 저주를 받았구나 고귀한 왕국 카스티야여. 너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지배당할거야.
더하여. 카를5세가. 황제 선거하느라고 로비 하면서 개인 금고가 마른겨. 돈을 빌리고. 해서리 카스티야에서 특별세를 부과하는거야. 왜 카를5세가 신성로마제국 일 하는데에 우리를 빨아먹냐는거지.
귀족들과 민들이 다 들고 일어나는거야.
A group of clerics soon circulated a statement in protest of the king. It argued three points: any new taxes should be rejected; Castile should be embraced and the foreign Empire rejected; and if the king did not take into account his subjects, the Comunidades themselves should defend the interests of the kingdom.[16] It was the first time where the word comunidades (communities, communes) was used to signify the independent populace, and the name would stick to the councils later formed.[16]
대주교에 벙찐 성직자 그룹이 모여서 성명서를 돌렸다. 세가지 주제. 어떤 신규 세금도 거부한다. 카스티야만이 소중하다. 외국의 제국은 거부한다. 킹이 자기의 서브젝트들. 자기 밑의 땅과 민들을 생각 않는다면. 코무니다데스 는 스스로 킹덤의 이익을 지킬 것이다.
이때 코무니다데스.라는 말이 스페인에서 처음 티나오는 말이야.
이 스페인은 말야. 유럽사에서. 제일 늦어 이들이. 저 산맥들에 막혀서리. 얘들이 문명이 제일 늦는겨. 무슬림 스페인 칠팔백년 겪으면서리 또한 늦게 티나온거도 있고. 얘들이 근현대사에서도 비참한 이유야. 무슬림 역사를 또한 싸그리 지우느라 그게 역설적으로 더 자폐적으로 가는겨 얘들이. 고리타분하게 종교놀이도 하는겨 그래서. 당했다는 깊이가 클수록 그에 대한 반작용이 또한 쎈겨. 오히려 더 극단적이 되는겨.
이게 소위 열등감에 쩐 들의 아주 패턴이야 똑같은.
이 열등감이란게. 인간의 진보를 막아. 온전함을 막아.
이게 조선이었고 말야. 지금 조선민국이야. 이게 중남미 애들 이념놀이하는거고 이게 무슬림 들인거고.
쟤들은 이탈리아의 코무네를 이제야 들어본겨. 오른쪽 아라곤이 시칠리아섬 킹덤을 하잖냐. 프랑크 애들이 이탈리아 남부를 먹을때 호헨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2세가. 엄마가 프랑크 프랑스 사람이야. 그 핏줄로 이 호헨슈타우펜 가문이 저 이탈리아 아래를 먹는겨 나폴리랑 시칠리아를.
이 프리드리히2세 황제가. 위대한 인간이야. 살라딘 조카랑 노는. 넘어가고. 얘가 열린 인간이야.
짐이 위대하다. 라는 지칭을 하는 기준은 단 하나야. 열린 인간. 온전한 인간. 사람들을 열리게 끔 해준 인간. 오직 그거 하나야. 자유 자유.
이 프리드리히2세가 인물은 별로인데 성격 좋고 막 여자 많아. 이 인간의 첫 부인이 아라곤의 콘스탄체.인겨.
아라곤이 이때 시칠리아.에 발을 담궈. 이때 이탈리아에 발을 담궈.
나중 말야, 저 호헨슈타우펜.가문이. 프리드리히 2세 죽고 1250년. 이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교황이 프랑스 앙주의 샤를 을 부르걸랑. 성루이 동생. 얘가 남부를 다 처먹고 서리. 시칠리아도 먹다가. 시칠리아의 만종. 이란 이름으로 배후에서 작용한게 이 아라곤.이야. 저때 아라곤의 콘스탄체.를 걸고 가는겨. 이때 카탈란 컴퍼니. 용병들이 온거고. 해서리 이때 프랑스 앙주는 여기서 쫓겨나고 바르셀로나 가문. 아라곤의 유니온 카탈로니아.가 여기에 발붙이는거야. 이게 서기 1282년이야.
스페인이. 이때부터 말야. 이탈리아를 더 쎄게 익히는거야. 저 시칠리아는 프리드리히2세가 만들어낸 시안한 곳이야 저기가.
스페인의 동쪽 아라곤.이 여길 중심으로 이탈리아 문명들을 갖고 오는거야. 얘들이 이때 레콩퀴스타 후반이걸랑. 이러면서 얘들은 세상에 눈을 떠.
스페인 말. 스페니쉬.가 이탈리아말이랑 비슷해. 저 이유야. 얘들은 독자적인 말을 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을 통해서 그나마 만든거야.
해서리 말야. 스페인이 점령한 중남미 아메리카.를 라틴 아메리카 할때. 그 라틴은 이탈리아 어.와 직접 맞닿은 고대 로마의 그 라틴어.의 라틴이야.
쟤들은 저때에. 아 이탈리아의 코무네. 서기 8백년에 쓰다가 버린 그 단어 코무네. 그리고 널리고 널린 이탈리아의 리퍼블릭.을 저때 각성한거야.
우리도 리퍼블릭 할래. 우리도 코무네라는거 좀 해보자. 를 저때 카를 5세의 수행단 들 때문에. 귀족들과 민들이 다 들고 일어난거야. 즉 말이지. 이건 리벨리온 이 아냐. 레볼루션 같은거야 이건.
오른쪽의 아라곤.이 늦게 저 소식을 들어. 카스티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주교도 어린래. 세금을 또 막막 걷는데.
아라곤.은 카탈로니아와 유니온이야 당시. 얘들은 지중해를 접했어. 헌데 레콩퀴스타 하면서리 무슬림 몰아내고서리. 역시나 지중해 해적. 아 이들은 엄청나. 헌데 이전에는 저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이 이 스페인은 잘 안건드려. 왜냐믄 같은 무슬림 동지걸랑. 헌데 이제는 달라. 여기도 약탈하는겨 수시로.
더하여. 아라곤은 달라 또한. 아라곤 만은 내륙이야. 바로 옆 해변이 카탈로니아야. 얘들은 그래서 특히나 가난해. 카탈로니아가 지중해 무역으로 그나마 벌지 얘들은 특히나 없어. 그래서 아라곤 킹이 여 아라곤에서는 세금조차 걷지를 않았어.
아 우리도 세금 내야 하는거 아녀?
여기에 말야. 카탈로니아 사람들에겐 카를5세가. 무기 소지권을 준거야. 이게 제일 요구사항이었걸랑. 지중해 해적을 상대해야하는데. 킹덤차원에서 못해줘 지들 힘없다고. 그럼 자치적으로 우리가 할테니 제발 무기를 갖게 해달라. 이걸 허락을 해줘.
그러면서 아라곤.도 무기를 옆에 동지들이랑 같이 같는겨. 그러면서리. . 어 이거 스페인땅이랑은 쌩짜 관련도 없는 가 우리를 빨아서리 대륙 에 퍼가는겨 저거.
카스티야에 이어서 바로 여기 아라곤에도 리볼트가 터진겨.
문제는 말야. 스페인 남부야. 해변에 접한. 여기를 안달루시아 andalusia. 라고 해. 무슬림 스페인 시대를 알안달루스
Al-Andalus
하걸랑. 안달루시아 가 제일 끝까지 무슬림이 거주하던데야. 그라나다 세비야 코르도바 다 음청난 중세도시야 이때는. 여기는 생계가 문제가 안돼. 다들 살만해.
여기는 안끼는거야 저 리볼트에. 자기들 먹고사는데 문제 없고. 설혹 저러다 내전이 나면. 자기들 땅도 피해를 보는거야.
저 위 갈리시아. 북부도 안끼는겨. 여기도 해변에 접한 곳이걸랑. 더구나 외져. 여긴 세력 자체가 약해.
가운데만 들고 일어난거야. 나중엔 저 위와 아래의 귀족들이 진압군에 지원병 오히려 보내는거고.
그리고 뒤에 바로 연이어 터진 아라곤 세력과 뭉치지를 못했어 얘들이.
왜냐믄 아라곤.은 저기완 반대로 또 달랐어 그 색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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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volt was an anti-monarchist, anti-feudal autonomist movement inspired by the Italian republics. It also bore a strong anti-Islamic aspect, as rebels rioted against Valencia's peasant Muslim population (also called mudéjars, to contrast with crypto-Muslims or Moriscos in the Crown of Castile, where Islam was outlawed) and imposed forced conversions to Christianity
이 형제들의 리볼트. 아라곤의 발렌시아 킹에서 터진 리볼트. 해변이야. 게르마니아스.는 당시 상공업인들 길드들. 상공업자들 조합들.이야. 해서리 형제애야. 원래 같이들 한겨 상공업 장사들을.
Mudéjar (
Spanish:
Portuguese:
[muˈðɛʒaɾ]; Catalan: mudèjar
[muˈðɛʒəɾ]; Arabic: مدجن,
mudajjan, "tamed; domesticated")[1] refers to an architecture and decoration style in (post-Moorish) Christian Iberia that was strongly influenced by Moorish taste and workmanship, reaching its greatest expression in medieval Aragon, Andalusia and the city of Toledo. The distinctive Mudéjar style is still evident in regional architecture, as well as in music, art, and crafts, especially Hispano-Moresque ware, lustreware pottery that was widely exported across Europe.
스페인어 무데할. 포르투갈어 무데잘. 스페인 반도에 있는 이슬람 건축 양식. 이라 정의하지만. 이 무데할. 무데잘.은 무슬림들이 쫓겨나고. 당시 이들을 무어인 했어. 레콩퀴스타 끝나고 그리스도화 된 땅에 남은 무어인.들을 무데잘. 한거야.
The Alhambra Decree . 알람브라 칙령. 1492년.은 유대인들만 나가라. 하는겨. 이건 무슬림이 아냐. 그라나다 전투 끝나고서리. 알람브라.가 그라나다에 있는 성이야. 무슬림은 살았어 계속. 무슬림들은 이미 이 전에. 무슬림의 종교와 문화의 자유를 보장해줬어 이사벨라가.
Mudéjars, unlike the Jews who were expelled that same year, kept a protected religious status, although there were Catholic efforts to convert them. However, over the next several decades this religious freedom deteriorated. Islam was outlawed in Portugal by 1497,[4] the Crown of Castile by 1502,[5] and the Crown of Aragon by 1526,[6] forcing the Mudéjars to convert or in some cases leave the country.[7] Following the forced conversion, they then faced suspicions that they were not truly converted but remained crypto-Muslims, and were known as Moriscos. The Moriscos, too, were eventually expelled, in 1609–1614.
무데잘.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보호받은 종교의 자리에 있었다. 헌데 점점 쫓아내느거야. 포르투갈에서 1497년. 카스티야에서 1502년. 아라곤에선 1526년. 무데잘들은 그리스도로 개종을 하거나 떠나라. 하는겨.
해서 저때 안떠나고 남은 사람들을 모리스코스 Moriscos 라 한겨. 이사람들은 그리스도로 개종한 무슬림들이야. 이사람들도 결국 백년 후에 다 쫓겨나게 되지만. 즉 백여년 동안 저기 무슬림들이 살은겨 그리스도 믿는다 함시롱. 해서 이 모르스코스 들 중에 크립토 이슬람.
Crypto-Islam 몰래믿는 이슬람 교도들이 있었다 하는겨. 모르지 누가 크립토인지 아닌지 진짜 개종이 된건지 아닌지.
해서리 저때 오스만애들과 아래 모로코 애들이 저들을 싣고 가는거야 자기들 땅으로.
저들이 당시 저 길드. 상공업자 모임들 에게 최대의 적인거야.
발렌시아의 카탈로니아.는 아라곤에 속국 킹덤이지만. 그래도 자치 주권이 있는겨. 이게 지방갈수록 또한 더해. 대게 지방들이 그 로컬 호족들이 다 킹들이야 어느 나라던간에. 중세는 더해. 헌데 이 지방 귀족들은 저 무데잘. 이란 무슬림들이. 인건비가 제일 싼겨. 귀족들은 이사람들이 필요해. 반면에 하층민들은 저사람들이 일자리 뺏는 사람들이야.
더하여. 길드들은 말야 아마도. 사람 심리상. 이전에는 자기들 위의 계층 들인거야. 나름 한맺힌게 더 많을 수가 잇어. 귀족들은 어차피 자기가 위.라는걸 인정 된 상테에서 부리는거고.
저 무데잘 들이 나중 개종해서 모리스코스.가 되면서리 저 길드 사람들과 그리 계급이 다르지 않아. 여기에 대한 불만도 있고. 더하여 지들은 독실한 그리스도다 하는거고. 무슬림 나가고 그리스도는 저 스페인서 아주 똘똘 자폐적으로 가는거야 이게.
마침 역병이 저때 돌아. 아 이건 게이들때문이야 호모섹슈얼. 더하여 저 무슬림들 때문이야. 이때 저 소위 모리스코스.들을 죽여대. 이때 중심이. 무기 소유권을 갖게 된 저 게르마니아스 라는 길드들 조합인겨. 해적 막으라고 준 권리가 저때 쓰이는거야.
또한 역시나 카스티야는 대주교 갈린것때메 불을 지르고. 여기도 맘에 안드는 인간을 카를이 지명하면서 그게 불을 붙여. 이때 이 게르마니아스. 라는 상공업 길드업자들이 십삼인 위원회를 만드는겨. 그리고 카스티야 처럼 코무네 비슷하게 가는겨 지들도. 제노바 공화국의 리퍼블릭을 우리네도 해보자 하는거고.
얘들은 무슬림을 인정안해. 발렌시아 킹덤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이 모리스코스.도 탄압을 하는거야. 억지로 개종을 다시 시키는 짓들도 하고.
지금은 아쉬운 쪽은 아쉬워하는게 저때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같이 연합했어야 하지만 하는데. 원래 저들은 각각 다른 나라인거야 그 성질이.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 도 부부지만 권력행사는 따로 각각 자기 땅에서만 한거고. 전혀 달라. 연합할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지들이 안한거고.
더하여 아라곤의 발렌시아 쪽은 자기들 힘을 무슬림 탄압하는데 분산을 시킨것도 패착이고.
여기도 아래 안달루시아 의 귀족들이. 반란 참여안한. 이들이 병력 지원하고 하면서 다 진압이 돼.
이게 당시 거국적으로 벌어진거야. 쟤들이 전략을 잘짰으면 저때 스페인은 전혀 달리 갈 수도 있었어.
저때 카스티야 에서는. 저 코무네에서.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도.를 옹립하려 해. 페르디난도.는 카스티야에서 태어났어. 얘가 스페인의 정통이라는겨.
얘가 카를보다 세살 아래야. 해서리 엄마 미친년 후아나.(조안나)를 움직이려 해. 지금 위 갈리시아. 아래 안달루시아 들도 안나서는데. 당신이 정통 카스티야 여자 킹이다. 당신이 미쳤다고 당신 친정아빠랑 지금 아들 카를5세가 이리 감금시킨건 죄악이다. 당신 미친거 아니지 않느냐. 우리 코무네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달라. 그리고 당신과 당신 둘째 아들이 카스티야를 다스려 달라.
이게 통했으면. 저 코무네는 이긴거야. 카를은 쫓겨났을꺼야.
이걸 후아나가 처음엔 받다가. 최종적으로 거부를 하는거야. 그러면서 점점 입지를 잃어 코무네 세력이.
해서리. 저들이 다 진압이 되고나서 말야. 카를 5세가 해야만 했던일이. 동생 페르디난도를 스페인 땅에서 내쫓는거야 ㅋㅋㅋ. 해서 카를이 죽고 다음 황제는 동생 페르디난도.를 하게 하고. 카를의 아들은 스페인 킹만 하게 하는겨. 그러면서 저 형제의 자식 둘 남녀 가 다시 황제부부.를 하는게 막스밀리언2세 부부야.
다 계약을 한겨 저 사건 이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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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을 쫓아낸게. 이사벨라가 죽기 2년 전인데 보믄. 애초에 이사벨라.나 페르디난도 부부는 무슬림에 대한 반감이 없어. 페르디난도는 자기땅 아라곤에서도 안했어. 이사벨라가 자기 아들 죽고나서리 정치를 놓은겨 이여자가. 이때 저 무슬림 나가라 하는거에 얼마나 관여되었나 몰겄지만 말이지.
그라나다 점령하자 마자 유대인들을 내쫓은건. 더 디비 봐야겄지만. 아마 유대인 무어들에게 붙어서리 저항을 디게 쎄게 같이 한 것에 대한 반감이 클 듯도 한데 말야.
스페인은 저때 유대인과 무슬림들이. 자기들보다 더 선진문명의 애들이걸랑 저들이. 저들을 다 데리고 자기들 자원으로 썼어야 해. 그러면 이후의 스페인이 안되었을 수도 있을거라.
지금 무슬림은 후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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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 스페인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독일 저지대에서 문명을 만드는데 기여를 한거야.
스피노자.가 저때 포르투갈에서 쫓겨나서리 네덜란드땅으로 간 유대인핏줄이야.
저들 무슬림들이 오스만으로 가서리 오스만 제국을 만드는데 쓰이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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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당시 제일 앞선 인간들이야 저 사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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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wedish War of Liberation (1521–23; Swedish: Befrielsekriget, "The Liberation War"), also known as Gustav Vasa's Rebellion and the Swedish War of Secession, was a rebellion and a civil war in which the Swedish nobleman Gustav Vasa successfully deposed the Danish-Norwegian king Christian II as regent of the Kalmar Union in Sweden.
스웨덴 해방전쟁. 칼마르 유니온체제에서 스웨덴이 나오는거야.
유니온 유니온 하지만 말야. 헝가리 크로아티아 유니온.도 수백년 가지만 말야. 유니온 이란게 킹만 하나에 각각은 인정 하지만 말이지. 대부분 속국 으로 들어가는거걸랑. 힘센 놈 아래로. 노르웨이 덴마크 유니온 해봤자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시다바리일뿐이야. 지 딸 다우리.로 지 맘대로 노르웨이 섬들을 스콧에 팔아넘기는 거 하미.
해서 폴란드 리투아니아 카먼웰스도 결국 유니온 이걸랑. 이걸 모스트 서린. 이라고 칭하면서 인정해주는게. 저 두개는 그래도 동등하게 서로들 간거다 하는 거걸랑.
대부분은 걍 소위 식민지야.
스웨덴이 칼마르 식민지 체제에서 나오는거야.
이전의 그 용 죽이는 조각상 만든 스텐. 실질 스웨덴 짱의 세력들이 계속 버티는겨. 러시아가 핀란드 넘어오는거에 복수하러 가고. 하다가 덴마크애들이 직접 스톡홀롬으로 쳐들어와서리 다시 진압해서 깨갱 중인거야.
The Stockholm Bloodbath (Swedish: Stockholms blodbad, Danish: Det Stockholmske Blodbad) was a trial that led to a series of executions in Stockholmbetween the 7th and 9th of November, 1520.
스톡홀롬 피바다 사건. 블러드 배쓰. 배쓰가 욕조 잖아. 그 배쓰 욕조에 물이 아닌 피로 채워진겨.
1520년 11월 7일에서 9일. 삼일간 벌어진 일.
이전에 로베르토 전투.란 이름으로 스톡홀롬에 와서리 진압해서리 다시 덴마크가 스웨덴의 킹자리에 올랐지만. 여기 심은 사람들이 다시 도망나와야 했어 곧. 기존 스웨덴 귀족들이 계속 반기를 드는거지. 20여년간 덴마크와 전투를 하는겨.
Christian II (1 July 1481 – 25 January 1559) was a Scandinavianmonarch under the Kalmar Union. He reigned as King of Denmarkand Norway from 1513 until 1523 and of Sweden from 1520 until 1521. From 1513 to 1523, he was concurrently Duke of Schleswigand Holstein in joint rule with his uncle Frederick.
크리스티낭 2세. 이전 아빠 존.이 로베르토 전투 한 사람이걸랑. 가서 스웨덴 킹. 자리도 가져가고. 했다가 20년 공백이야 저기가. 아빠 존이 죽어. 1513년. 얘가 덴마크 노르웨이 킹. 하는겨. 그 이후 7년 동안 스웨덴을 공격하는거야.
스웨덴도 귀족이랑 대주교랑 내분이야. 덴마크에 들어가자. 아니다 우리네 스스로 하자. 여기서 대주교파랑 짜고서리 결국 저길 점령해. 얘가 킹 오르고 7년 만에. 아빠 쫓기고 20년 만에. 아빠의 숙원을 얘가 푼거지.
그리고 나서리 스톡홀롬 성당에서. 어노인팅. 대관식을 하는거야 스웨덴 킹자리.
앞으로 스웨덴은 정통 스웨덴 사람들로 정권을 꾸리고 자기는 형식만 킹 하겠다 선언을 해.
그리고 삼일 후 11월 7일에 연회를 베푸는겨.
Stockholm Bloodbath
On the evening of that day, Christian summoned many Swedish leaders to a private conference at the palace. At dusk on 8 November, Danish soldiers, with lanterns and torches, entered a great hall of the royal palace and took away several noble guests. Later in the evening, many more of the king's guests were imprisoned. All these people had previously been marked down on Archbishop Trolle's proscription list.[citation needed]
당일 저녁. 크리스티안.은 많은 스웨덴 리더들을 궁정의 개인 회의실로 소환했다. 8일 저녁 어스름. 랜턴과 횃불들을 든 덴마크 병사들이 궁전의 큰 홀로 들어갔다. 몇몇 귀족 손님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늦은 저녁. 왕의 많은 소님들이 감금되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이전에 대주교 . 덴마크에 붙어살자는 파의 대빵.이 프로스크립션. 살생부 리스트에 올랐던 사람들이었다.
The following day, 9 November, a council, headed by Archbishop Trolle, sentenced the proscribed to death for being heretics; the main point of accusation was their having united in a pact to depose Trolle a few years earlier. However many of them were also leading men of the Sture party and thus potential opponents of the Danish kings. At noon, the anti-unionist bishops of Skara and Strängnäs were led out into the great square and beheaded. Fourteen noblemen, three burgomasters, fourteen town councillors and about twenty common citizens of Stockholm were then hanged or beheaded.
The executions continued throughout the following day (10 November). According to the chief executioner Jörgen Homuth 82 people were executed.[7] It has been claimed that Christian also took revenge on Sten Sture's body, having it dug up and burnt, as well as the body of his child. Sture's widow Lady Kristina, and many other noblewomen, were taken as prisoners to Denmark.[8]
다음날 9일. 대주교 대리인인 한 위원가 그 살생부에 올려진 이들에게 이단 이라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허나 그 고소의 큰 이유는. 그 죽은 자들이 며칠전 대주교를 파면 시키고자 한 것에 있었다. 그러나 그 죽은이들 중 많이는 독립파였고 덴마크 킹의 반대파 들이었다. 정오헤 반 유니온파 주교 두명이 광장에 끌려 나와서 참수되었다. 14명의 귀족들 3명의 시장들. 14명의 마을 위원장들. 그리고 약 20명의 스톡홀롬 시민들이 목메달리거나 짤렸다.
사형은 다음날 10일에도 계속 되었다. 최고 집행자에 의하면 82명이 사형당했다. 킹 크리스티안이 또한 전쟁 상대였던 스텐의 죽은 시체를 파내어서 불에 태워 복수했다고 전해진다. 스텐의 아들. 과부가 된 부인. 그리고 다른 많은 귀족 부인들도 덴마크에 끌려가 감옥살이를 했다.
저 피바다 사건. 다음해 부터 3년간 일어난 전쟁이 스웨덴 해방전쟁이야
Gustav Vasa addressing the Dalecarlians in Mora. Johan Gustaf Sandberg, oil on canvas, 1836.
저때 리더가 구스타브 바싸. 가 연설하는 장면. 캬 옷 디자인이 멋져. 저때 쟤들은 저따위 옷을 입었나봐.
저 구스타브 바싸 가문이 나중 독일 30년 종교전쟁을 마무리해. 그리고 이 핏줄들이 이후 유럽의 강대국으로 가는거고.
지금 스웨덴을 만든건 저 구스타브 바싸. 이고. 저 스톡홀롬 피바다 사건이야.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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