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queduct of Segovia (or more accurately, the aqueduct bridge) is a Roman aqueduct in Segovia, Spain. With the Pont du Gard in France, it is one of the best-preserved elevated Roman aqueducts. The general date of the Aqueduct's construction was long a mystery although it was thought to have been during the 1st century AD

 

스페인 세고비아 수도교. 상수도관 다리. 프랑스의 퐁뒤가르. 가르교. 와 함께 가장 잘 보존된 높이 만든 상수도관. 1세기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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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브해 동맹 전쟁. 이탈리아 전쟁 이전 썰. 넘어가
 
 
폴란드 몰도바 전쟁. 
 
몰도바.는 루마니아 북동쪽이야. 이 몰도바는 왼쪽은 루마니아. 위와 동과남 다 우크라이나에 쌓인 곳이야. 여긴 흑해 부근인데 완전 내륙이야. 해변은 우크라이나에 막혔어. 3.3만 제곱키로. 경상도 다 합치면 돼. 
 
여긴 루마니안들이 떨어져 나온겨. 역사가 없어 여긴. 중세는 왼쪽 루마니아는 카르타피아 산맥이 감싼 가운데 까지 트랜실베니아 평원이야. 여긴 헝가리 킹땅이야 헝가리 벨라 때부터. 그 뒤 헝가리 앙주 루이가. 여기 몰도바까지 먹어. 
 
이 몰도바는 중세에. 옆은 헝가리 위로는 폴란드에 리투아니아야. 오른쪽은 스텝애들이야. 그 사이에서 걍 힘없이 이놈 저놈에 빌붙어 사는겨. 그리곤 월드워 끝나고서야 저리 살아. 저긴 완전히 산악 지대야. 먹고 살게 없어. 
 
해서기 저 서기 1500년 직전후에야. 이때 얘들은 처음으로 스테펜.이란 애가 나와서리. 저 사이에서 군주하는겨 헝가리서 독립했다 함시롱. 그리고 폴란드 킹에게 딸달라고 요구해 당신들과 손잡고 살고 싶다. 거부해. 쳐들어가. 딸 주께. 약속해. 다음 폴란드 지기스문트. 철회해. 쳐들어가. 져. 몰도바는 저 전쟁 이후. 다시 남의 바쌀 영지가 돼. 이때 주인은 오스만이야. 
 
이미 오스만은 발칸을 헝가리 아래까지 먹은상태야 1500년은. 발칸 옆 해변 빼고. 불가리아는 다 먹었어. 점점 헝가리땅 루마니아의 트랜실베니아까지 올라오려해. 그이전에 오른쪽 몰도바를 먹는겨.
 
저 몰도바도 답이 없는겨. 통이면. 빨랑 빨랑 나라 주권을 넘겨야해. 헌데 말야. 마땅히 주위에 줄 나라가 없어. 아래 루마니아 위에 우크라이나. 다 그지 들 존심만 있걸랑. 
 
 
하와이가 제일 똑똑한겨. 월드워 때 하와이는 미국에 팔았걸랑 자기들 땅을. 리더가 머리가 좋은겨. 무식한 원주민들이 차라리 저리 앞선 애들 밑에서 사는게 천만배 나은겨 저게.
 
 
옘병하는 소리라고? 그럼 걍 사타구니를 이파리로 가리고 밀림속에서 창들고 원주민으로 살라고 하던가. 다문화 다양성 개하는 소리지. 야 니덜이 그리 가서 살어. 남 위하는 척 하는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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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or Conrad (GermanArmer Konrad, also Armer Kunz) was the name of several secret peasants' leagues, which in 1514 revolted against the rule of Duke Ulrich of Württemberg. The rebels adopted the term used by the nobility to mock them, meaning "poor fellow" or "poor devil". The battle flag of the rebels depicted a farmer lying in front of a cross, under the words Der arme Conrad.[1]
 
 
가난 불쌍한 콘라드. 이탈리아 전쟁기간이걸랑. 이때 독일은 저 저지대 부르고뉴 영지들에서 전쟁이걸랑 이탈리아전쟁과 엮여서. 프랑스가 합스부르크랑 이탈리아에서 싸우면서, 동시에 부르고뉴 독일 저지대땅에서 반기를 드는겨 합스부르크에. 이걸 프랑스가 부채질 하는거고. 
 
해서리, 여기에 황제령으로 저지대 전쟁에 참전시키는겨 영지들에게. 이때 뷔르템베르크. 지난 스와비아 이야기. 지금 스튜트가르트. 에서 공작이 전쟁을 위한 세금을 걷는거지. wealth tax. 각 집안마다의 전체 재산 총액에 과세표준을 해서리 세금을 매기는겨. 
 
민들이 거부하고. 얘가 열받아서리 고기 소금 와인 과일 등을 민들에게 팔게할때. 일명 도량형을 조작을 해. 일키로당 얼마.면 똑같은 가격에 일키로가 아닌 칠백그램을 주는겨. 거기서 이득 보는걸 갖고 가는겨 얘가. 여기에 농민들이 뭉쳐서 저를 내 쫓는거지. 결국 주위의 영주들이 병력 보내니. 힘이 있나. 진압. 
 
Ducal troops occupied the Rems Valley without resistance, hauling the remaining 1,700 rebels off to Schorndorf, where they were tortured, imprisoned and their commanders beheaded. Fines had to be paid, and they were deprived of their rights.
 
남은 1700명 반란군을 잡아 끌어내었다. 그들은 고문당하고 투옥당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목베였댜. 벌금을 물리고 그들의 권리들도 박탈했다.
 
독일 농민전쟁이 딱 십년 후인 1524년이야. 이후 종교전쟁이야. 이미 대륙은 농민전쟁과 종교전쟁으로 달궈지는겨 저 이탈리아 전쟁기간에.
 
 
 
저기도 보면 말야. 프리스트. 사제가 오히려 민들 앞에 서. 그리고 정도가 심해지니 더이상은 하지말자고도 하고. 
 
저들은 민들 반란 할때. 그래도 귀족들이나 사제들이 같이 참여해. 저게 동양빠닥 들과의 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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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전쟁은. 그게 처음이 아냐. 이미 저 일이십년 전부터 특히나 민들의 반란이 있었어. 걍 농민전쟁은 대명사일 뿐이야. 헌데 이건 이전보다 사상 이념이 더 함양이 된겨.  독일 농민전쟁이 유럽의 종교전쟁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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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örgy Dózsa (or György Székely,[note 1] RomanianGheorghe Doja; 1470 – 20 July 1514) was a Székely man-at-arms (and by some accounts, a nobleman) from TransylvaniaKingdom of Hungary who led a peasants' revolt against the kingdom's landed nobility. He was eventually caught, tortured, and executed along with his followers, and remembered as both a Christian martyr and a dangerous criminal. During the reign of king Vladislas II of Hungary (1490–1516), royal power declined in favour of the magnates, who used their power to curtail the peasants’ freedom.[1]
 
게오르게 도자. 의 반란. 아 이사람 정말 비참하게 당하는데 말야. 역시 농민전쟁이야. 당시 트렌실베니아. 지금 루마니아땅 가운데 카르파티아 산맥이 휘감아 올라가는 가운데 평원. 여기서의 농민 전쟁이야. 이 중심의 인물이 게오르게 도자. 귀족이야 이사람. 세케이 Szekly 땅의 맨앳암즈. 기사야. 무장을 갖춘 기사는 귀족이야. 
 
In 1514, the Hungarian chancellorTamás Bakócz, returned from the Holy See with a papal bull issued by Leo Xauthorising a crusade against the Ottomans.[2] He appointed Dózsa to organize and direct the movement. Within a few weeks, Dózsa had gathered an army of some 40,000 so-called hajdú[citation needed], consisting for the most part of peasants, wandering studentsfriars, and parish priests
 
1514년. 아래에서 오스만이 발칸을 거의 다 먹었어. 세르비아 불가리아 까지 다 먹었어 저즈음엔. 크로아티아 에도 조금씩 들어와. 이전에 오스트리아의 카르니올라. 즉 슬로베니아땅까지도 막막 왔다가 가. 
 
The Ottoman–Hungarian Wars  1366–1526
 
오스만 헝가리 전쟁들.은 1366년에 오스만이 비잔틴땅 먹고 올라가면서의 전쟁이야. 얘들이 다뉴브강까지 가면서. 여기서 헝가리랑 붙는게 시작이야.
 
헝가리의 앙주 루이.가 더 그레이트. 데제 칭호 받는게. 저 다뉴브 하류까지 먹은거걸랑.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가름 다뉴브. 의 하류야. 여기가 왈라키아. 라 하는겨. 몰도바까지 먹었어 루이가. 해서리 이제부턴 헝가리 관할인겨. 해서리 오스만 헝가리 전쟁 하고. 바르나 십자군이란게 여기 다뉴브 하류 전투걸랑. 
 
아직 몰도바까지는 오스만이 안먹은 상태야. 저때 십자군을 또 발동을 시킨겨 교황이. 물론 헝가리가 중심을 이뤄야지. 
 
저때 십자군으로 모였는데. 농민들에 더하여 학생들. 프라이어 사제들. 이 프라이어는 멘디컨트 탁발 수도사들이야. 그리고 파리쉬 사제들. 파리쉬 면 교구가 걍 시골 작은 곳의 교구.가 파리쉬. 여기 사제들. 훈련 안되고 허섭한 사람들이 모인겨 이게. 여기 지도자가 저 게오르게 도자. 라는 루마니아 귀족인겨. 
 
다들 저들은 발런티어들이야. 징집된게 아냐. 자발적으로 가는겨.
 
 
이전엔 킹.들이 나서서리 나름 물자 보급이 좋았걸랑. 게오르게 도자.는 하급귀족이야. 교황이 입만 살았고 아무것도 해주는건 없어. 무기도 없어. 밥도 안줘. 영주들이 무시하는겨 이 사람들을. 저기 십자군 사람들이 또한 혼자 가는게 아냐. 가족이 있는사람은 다 델꼬 가는겨. 
 
그래도 저 게오르게 도자.가 이 사람들에게 무기들 어드래 마련해주고. 훈련을 시켜. 그래야 싸우러 가니. 헌데 마침 수확철이야. 주위 영주들이 이 사람들을 농민들 취급하민서리 부려먹는거야 니덜 수확들 좀 하라우. 가족 델꼬 간 사람들은 또 그 부인들과 가족들에게도 하대하면서 종취급 했나보지. 더하여 저사람들이 무기들 갖고 있으니 자기 영주들의 농민들을 부리는데 써먹는겨.
 
 
저 사람들이 귀족 이란 것들의 정체성에 화가 나는거지 오히려. 야 귀족들이란게 저런거야? 이사람들이 십자군행을 안가고 오히려 헝가리 킹덤 자체에 반기를 드는겨. 저따위 귀족덩어리들의 킹덤을 이기회에 없애자우.
 
여기에 주위의 농민들도 합세를 해. 
 
Dózsa's camp at Cegléd was the centre of the jacquerie, as all raids in the surrounding area started out from there.
 
게오르게 도자.의 캠프가 저 자커리.의 중심이 된겨 어느새. 저 자크리. 란 말이 프랑스 백년전쟁때 의 농민들 리볼트.를 자크리. 라 하고 이게 일반어가 된겨. 도자.는 처음엔 원치 않아. 헌데 사람들의 분노.를 이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거지. 걍 떠밀려서 저기의 지도자가 된겨.
 
저때 헝가리 킹.이 마티아스.가 죽고 나서리. 그 자리 주은 브와디스와프2세야. 촌놈의 야기에워의 후손. 얘가 헝가리를 지금의 헝가리로 만든겨 얘가. 남땅 가 헝가리를 망쳐놓은겨 이가. 마티아스가 아까운 인물이야 헝가리 입장에선.
 
 
By this time, the uprising had attained the dimensions of a revolution; all the vassals of the kingdom were called out against it, and soldiers of fortune were hired in haste from the Republic of VeniceBohemia and the Holy Roman Empire. Meanwhile, Dózsa had captured the city and fortress of Csanád (today's Cenad), and signaled his victory by impaling the bishop and the castellan.
 
지금에 저 봉기는. 레볼루션. 수준으로 평가를 해. 저건 단지 머 먹고 살게 해달라의 부르짖음이 아니걸랑. 체제 자체를 엎는겨. 해서리 혁명이야. 저게 쎄었던겨. 해서리. 헝가리 킹이 모든 바쌀들에게 콜한겨. 베네치아 용병들도 불러와. 
 
보면 트랜실베니아 의 땅들을 거의 먹은 듯해 이 도자. 부대가. 잡힌게 저기 왼쪽 변경에서 잡혔으니까. 대포에 총들까지 갖췄어. 
 

 He was captured after the battle, and condemned to sit on a smouldering, heated iron throne, and forced to wear a heated iron crown and sceptre (mocking his ambition to be king). While he was suffering, a procession of nine fellow rebels who had been starved beforehand were led to this throne. In the lead was Dózsa's younger brother, Gergely, who was cut in three despite Dózsa asking for Gergely to be spared. Next, executioners removed some pliers from a fire and forced them into Dózsa's skin. After tearing his flesh, the remaining rebels were ordered to bite spots where the hot pliers had been inserted and to swallow the flesh. The three or four who refused were simply cut up, prompting the others to comply. In the end, Dózsa died from the ordeal, while the rebels who obeyed were released and left alone.[6]

The revolt was repressed but some 70,000 peasants were tortured.[7] György's execution, and the brutal suppression of the peasants, greatly aided the 1526 Ottoman invasion as the Hungarians were no longer a politically united people. Another consequence was the creation of new laws, an effort in the Hungarian Diet led by István Werbőczy. The resulting Tripartitum elaborated the old rights of peasants, but also greatly enhanced the status of lesser nobility (gentry), erecting an iron curtain between Hungarians until 1848 when serfdom was abolished.[8]

 

게오르게 도자.는 잡혀서리 불에 달군 쇠로 된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곤 달궈진 쇠 왕관과 쇠 왕홀 작대기를 쓰고 잡게 했다. 왕이 되고 싶었냐 며 놀리는듯. 다른 굶주린 아홉명도 이짓을 하게 했다. 지도부에는 도자의 동생도 있었다. 도자는 동생을 살려줄것을 요청했지만 그동생은 세 등분으로 토막내 죽었다. 다음, 처형수들은 뺀찌들을 불에 달궈서리 도자.의 피부를 쑤셨다. 그 살들을 뜯어내서리 반란군들에게 그 살점들을 씹어먹으라고 했다. 서너명은 거절했다. 이들은 짤려 죽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먹었다. 마지막에 게오르게 도자.는 오어딜.로 죽었다. 고개숙인 반란군들은 모두 풀려났다. 

 

농민들이 7만명이 고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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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헝가리 전쟁들.은 1526년에 일차로 정리를 해. 160년간. 1526년에 치르는 마지막 전쟁이 모하츠 전투야. 

 
 
The Battle of Mohács (Hungarian: [ˈmohaːt͡ʃ]HungarianMohácsi csata, Turkish: Mohaç Meydan Muharebesi) was one of the most consequential battles in Central European history. 
 
이 모하츠.는 헝가리 본토 맨 아래야. 가운데 아래. 여기서 오스만이 압승을 해. 이 전투에서 헝가리 킹. 저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인 루이2세가 죽어. 그리곤 사위핏줄이 잠깐 하다가 합스부르크로 넘어가는겨. 
 
 
즉 이제부턴. 오스만 합스부르크 전쟁 2백년을 하는겨 이게. 헝가리가 오스만이랑 360년을 했던거야 합스부르크 라는 이름에 가려서. 저때 헝가리가 끝난겨 저 전쟁을 하면서. 
 
 
할때 말이지. 저 모하츠 전투가 결국 쩜을 찍은겨. 모하츠 전투로 헝가리는 끝난겨 결국. 
 
헌데 저 모하츠 전투에서. 헝가리 민들이. 저 잔인한 고문 했던 기억이 남았어. 12년 전에 게오르게 도자.를 죽이던 짓들. 수만명 고문하던 짓들. 그 이전 귀족들의 행태들. 이 민들이 오스만 편을 든거야. 
 
 
 
헝가리는 마티아스.가 죽고 저 촌놈가 헝가리 킹이 되고 이전 귀족들 시껍하게 했던 르네상스의 마티아스.꺼를 다 뒤집어서리. 저 개한 저 들. 또한 저 중심엔 말야. 브와디스와프 라는 야기에워 가 문제였지만. 또한 저기에 동참한 귀족들이야 헝가리 귀족들. 
 
 
헝가리는 게오르게 도자. 를 잔인하게 죽이면서. 끝 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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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농민전쟁까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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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xon feud was a confrontation between the East Frisian Count Edzard I and George, Duke of Saxony in the years 1514-1517. The war took place predominantly on East Frisian soil and destroyed large parts of th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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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퓨드. 동 프리지아.의 백작과 작센 공작.과의 싸움. 대부분 동 프리지아 땅에서 벌어지고 전지역이 파괴되었다.
 
이전의 이야기를 보면. 기느게이트 전투. 프랑스와 플랑드르 접점에서 루이11세와 막시밀리언의 전투. 가 기억날리가 없겄지 빠나덜이. 
 
부르고뉴의 마리와 막시밀리언이 결혼하고서리 터진 전쟁이걸랑. 루이11세는 용감공 샤를 죽이고. 부르고뉴의 저지대 땅까지 다 뺏아올라는겨. 이때 패하고 포기하는 듯 해.
 
얘들은 중세에 협약 맺으면서 포기한다 어쩐다. 다 뻥이야 . 계속 해. 그딴 약속이 머냐 함시롱. 해서리 나중에 얘들이 하는 짓이 전부 다 모이는겨. 그런게 비엔나 조약이야. 야 이 이제 그만 좀 한번 약속해쓰믄 지키자 좀. 하는겨 이게. 앞으론 안지키면 여기 증인들이랑 다 같이 죽여뿐다 하는겨.
 
 
프랑수아가 카를에게 잡혀서리 머 이땅저땅 다 주께 풀어줘. 봤자 내가 은제 그랜냐 하는거고. 또 그런걸 다 알어. 서로.
 
 
In the period 1482–1492, the cities of Flanders revolted twice against their Habsburg overlord, Archduke Maximilian of Austria. The revolts were rooted in the cities' desire to maintain the autonomy that they had wrested from his late wife, Mary the Rich of Burgundy,[1] which Maximilian threatened to curtail. Both revolts were ultimately unsuccessful.
 
지난 겔더들의 전쟁.에서 겔더들이 저당잡힌거 무효 라미 합스부르크 부르고뉴에도 대들지만 말야. 
 
그 아래 플랑드르.는 마리가 결혼하고 . 죽어 1482년에 말타고 놀다가. 이때부터 다시 합스부르크에 대드는겨. 이게 10년이야. 이때 막시밀리언은 황제가 아냐. 황제되는건 1508년. 헌데 애비 프리드리히가 늙었걸랑. 얘가 실세야 점점. 
 
저 십년간의 전쟁 중에 이전 Guinegate 기느게이트 전투였던겨. 그래도 계속 프랑스가 얘들 불지피는겨. 저건 이탈리아 전쟁 이전이야. 결국 저때 잠시 샤를 8세가 어린나이에 저길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가는거야. 
 
저때 막시밀리언이 직접가. 특히 이전 헨트전쟁. 부르고뉴 현명공이냐 그때는. 저긴 쎄걸랑 . 
 
 
 
 From Bruges, Maximilian, now King of the Romans, negotiated with Ghent the following month. But when he attempted to close off the city with his own troops in January the following year, the guilds of Bruges joined the revolt, demanding publicity of the grievances of the rebels (a.o., plundering of the country by Habsburg troops[7]:62) as well as the decision making process.[5] They forbade Maximilian from leaving the city, then in February imprisoned him after installing new municipal officials, loyal to Philip[1][5] and executed one of Maximilian's ministers.[6]
 
덧치 브뤼허. 영어 브루즈. 저기가 플랑드르 백작령의 수도야 저때. 헨트보다 위에 있어. 막시밀리언이 헨트에 협상하러 가다가. 이 브뤼허.에서 잡혀 포로가 돼. 막시밀리언 참모 중 하나도 처형을 해.
 
 
쟤가 저때 프랑스 식으론 도팽.이야. 세자야. 로마의 킹이야. 황제는 아냐. 저때가 1488년. 
 
막시밀리언이 오른쪽 작센 공작에게 콜을 하는거야. 너 나 도와주면 프리지아 전체 땅을 다 주겠다고.
 
프리지아.는 블랑드르 위. 여기가 홀란드 에서 점점점나오는 섬들이 아이셀호 를 감싸고. 그 섬들 가운데 까지고 서 프리지아. 다음이 동프리지아. 그리고 주트랜드 덴마크 왼쪽에 가생이가 북 프리지아. 걸랑.
 
여기 끝에 땅들인 프리지아들의 총대리인. 이게 저지대에 쓰이는. 스타트홀더. stadtholder 여. 자주 나오는 단어야. 나중엔 독립할때 대빵을 스타트홀더. 라고 해. 윌리엄이 이 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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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공작이 가서 도와주고 탈출 시켜주고. 플랑드르 다시 합스부르크 갖고가고. 이사람이 프리지아의 대빵으로 임명되고. 저기서 동프리지아 백작이 반기를 드는겨. 3년을. 저때 동프리지아가 초토화 되었다는거고. 해도 저 백작은 버텨내. 협상하고. 
 
 
 
저 저지대는. 나중에 80년 전쟁에서야 터진게 아니라. 부르고뉴에 드갈때부터 시작인겨 저게. 저게 산발적으로 저리들 터지다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본격적으로 터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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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이란 공작령은. 이전의 바바리아.에서 그랬듯이. 땅이 넓은게 쪼개져. 그러다 바바리아.는 그냥 다시 바바리아 하나가 되었지만.
 
저 작센은. 아이셀강 에서 시작해서리 얘들이 점점 동남으로 확장되서리. 지금의 니더작센. 작센 안할트. 작센. 이리 세주가 된건데. 
 
 
이미 중세 중반을 접어들면서 저기 작센도 쪼개지는겨. 얘들은 원체 집안이 오토1세 쎈겨. 프랑크 살리안의 조상이야. 하나의 공작령에서 두세개의 공작령으로 나뉘고. 백작령에 대주교령으로 나뉘는겨. 
 
대표적인게 작센 비텐베르크 공작령. 작센 라우엔부르크 공작령. 브룬스위크 뉘네부르크 공작령. 
 
저 브룬스위크.가 히틀러 가 원래 오스트리아 시민권이걸랑. 얘가 독일 시민권자가 아냐. 해서리 이때 이가 편법으로 취한 시민권 지역이 저 브룬스위크.야
 
하튼 해서리. 저때 작센 퓨드.란건. 저기서 퓨드.는 봉건주의 퓨드.의 그 퓨드 가 아니라. 다툼 불화.의 퓨드야.
 
저기에 끼는게 다른 작센 백작애가 끼는겨. 작센 공작애들도 끼고. 이 작센 쪼개진 애들이 또한 경쟁하는겨.
 
해서 선제후 들 중에 작센 선제후.는 저 쪼개진 작센들 중에서. 작센 비텐베르크. 공작이 선제후인겨. 해서리 얘들을 일렉토레이트 오브 작센. 하는거야. 따로 구분하기 위해서. 선제후 선거권이 있는 공작이야. 여기도 덧치야. 이걸 베틴 가문이 갖고 가면서 얘들이 권력이 쎄져. 저기가 마이센에 양도되걸랑. 하튼 넘어가고. 
 
해서리 말야. 종교개혁의 중심이. 마르틴 루터. 를 보호해 준 사람이. 저 작센 비텐베르크.의 공작이야. 즉 선제후야. 베티가문인겨.
 
종교개혁에서 두사람이 정치권에서 배후야. 헤쎄 가문의 필리프. 와 베티가문의 작센 존. 요한이야. 저 두사람이 정치권에서 움직인겨.
 
지금 비텐베르크.가 지역이름이 루터슈타트 비텐베르크.야 마르틴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가 여기 있었던겨. 여기서 튜튼 기사단장을 만나서리 사바사바 해서리 역시 튜튼의 프러시아.를 프로테스탄트로도 만든 곳이야 이 비텐베르크가. 
 
 
 
여하튼 간에. 이런게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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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lovene Peasant Revolt (German: Windischer Bauernbund, Slovene: slovenski kmečki upor) took place in 1515 and was the largest peasant revolt in the Slovene Lands. It engulfed most of what is now Slovenia. There were about 80,000 rebels who demanded the reintroduction of the original feudal obligations and trade rights (the so-called "old rights"; Slovene: stara pravda) and a right to decide about the taxes. The spark which started this uprising was when the ethnic German peasants of the Gottschee region killed their lord Jorg von Thurn. They attacked the castles within the region, except in the territory of the County of Görz, where conflicts were solved through negotiations. The revolt was put down by the mercenaries of the Holy Roman Empire, with the deciding battle fought at Celje. The words stara pravda were printed in 1515 in Vienna in a poem of the German mercenaries and were the first printed Slovene words.[1]
 
슬로베니아 농민 리볼트. 
 
쟤들 용어 쓰는거 보면. 제일 낮은게 uprising. 업라이징. 봉기.야 이건. 걍 먹고살게 해줘. 그다음이 리벨리온. rebellion. 이건 반란이야. 가운데 벨룸. 전쟁인겨. 리. 뒤에서 치는. 내부반란. 봉기보다 규모가 쎈겨. 여긴 이념이 없어. 이것보다 더 치는게 리볼트야. 볼트.는 볼베레.야 회전하면서 체제가 있는겨. 여기에 대한 반기야. 이거보다 더 차원이 높은게 레볼루션. 혁명 번역하는겨. 
 
레볼루션 빼고 다들 걍 반란. 봉기. 막막 써대는거고. 
 
이땅바닥엔. 업라이징. 이상은 없어. 끽해야 업라이징 이야. 조선건국이래 칠백년째. 촛불혁명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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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지금 슬로베니아야. 오스트리아 아래. 여긴 당시 카르니올라. 공작령이야. 역시 문제는 세금이야. 세금 결정권을 달라. 공정히 세금 매겨라. 더하여 상업권이야. 트레이드 레이트. 저기가 바로 아래가 베네치아야. 점점 세상이 상인이 대두되걸랑. 농민들이 상업쪽으로 가는겨. 헌데 그것도 봉건주의 체제에서 그 계약을 벗어나서리 자기들 맘대로 못하는겨. 그것에 대한 반기야. 
 
 
 
프리지아 농민 반란. 저 작센 퓨드. 와 겹쳐서리 후반에 터진거야. 
 
 
The Arumer Zwarte Hoop, meaning "Black Heap of Arum" (West Frisian: Swarte Heap) was an army of peasant rebels and mercenaries in Friesland fighting against the Habsburgauthorities from 1515 to 1523. For 4 years they were successful under the former farmer Pier Gerlofs Donia. Led by his Lieutenant Wijerd Jelckama from 1519 they slowly lost ground and were captured and executed in 1523.
 
프리즈란드.에서 벌어진겨. 저긴 서 프리지아.야 저 작센퓨드.의 전장터는 동프리지아야. 
 
The Vetkopers and Schieringers 이전에 썰한 펫코퍼들 쉬레링거들. 프리지아의 두 호족들이 내전을 150년 하면서. 저기에 합스부르크가 들어와서 정리를 한거야. 그러면서 자유의 프리지아.가 끝이나고 막 합스부르크에 먹힌겨. 서기 1500년 직전에.
 
이 합스부르크.가 저길 진압할때 부른 용병이 란트스크네히트.라는 저지대 용병들이야. 스위스 용병을 하이랜더 고지대 용병 하고 독일땅의 용병들은 저 란트스크네히트.란 단어를 써. 스와비아 가 시작이지만 점점 독일 용병들을 이르는 말로 써.
 
이들이 프리지아.를 진압하면서 저기가 황폐화가 된겨. 그리고 오른쪽은 작센과 전쟁. 아래는 또 겔더들의 전쟁. 이게 결국 나중 네덜란드 독립전쟁 하는겨. 다들 모여서. 아 각각이는 안된다. 다들 합하자. 
 
 
농민이 주축이야. 아루머 즈바르테 후프. 아룸.이라는 마을의 검은 무리들. 
 
합스부르크랑 싸우는겨. 아래 겔더 공작이 합스부르크랑 겔더 전쟁할 때야 저 8년이. 겔더공작이 돈을 저기 줘. 헌데 얘도 전쟁중이라 힘드는거지. 펀딩이 안돼. 처음 발기한 애는 은퇴하고 자기 농장에 가서 죽어. 다음 이은 애가 4천명 데리고 싸우다가 결국 패해. 남은 사람들 참수.
 
 
The Polish–Teutonic War of 1519–1521 (German: Reiterkrieg, horsemen's war, Polish: Wojna pruska, Prussian War) was fought between the Kingdom of Poland and the Teutonic Knights, ending with an armistice in April 1521. Four years later, under the Treaty of Kraków, part of the Catholic Monastic state of the Teutonic Knights became secularized as the Duchy of Prussia. The reigning Grand Master Albert of Hohenzollern-Brandenburg-Ansbach became the first Duke of Prussia by paying the Prussian Homage as vassal to his uncle, Polish king Sigismund I the Old.
 
폴란드 튜튼 전쟁. 아 얘들 전쟁시작한지 2백년 지나는겨. 지긋지긋 한거지. 
 
이전 13년 전쟁으로 튜튼은 걍 짜부러졌어. 모은 땅 다 뺏기고.
 
 
 
이 튜튼들이. 지원을 받으려고. 기사단장. 그랜드 마스터.를 선출하는데, 이제 신성로마 땅의 힘있는 가문 출신을 뽑아. 폴란드에서 벗어나고 직접 힘있는 신성로마의 카톨릭을 더 쎄게 지원 받으려고. 
 
해서리 선출한 그랜드 마스터. 기사단장이. 호헨졸레른 가문의 알베르트.
 
Albert of Prussia (German: Albrecht von Preussen, 17 May 1490 – 20 March 1568) was the 37th Grand Master of the Teutonic Knights, who after converting to Lutheranism, became the first ruler of the Duchy of Prussia, the secularized state that emerged from the former Monastic State of the Teutonic Knights. Albert was the first European ruler to establish Lutheranism, and thus Protestantism, as the official state religion of his lands. He proved instrumental in the political spread of Protestantism in its early stage, ruling the Prussian lands for nearly six decades (1510–1568).
 
 
이 호헨졸레른 가문.이 결국 독일 을 만드는거걸랑. 최후의 승자는 이 호헨졸레른.이야
 
졸레른. 의 백작에서 시작했어. 졸레른.은 독일 고지대. 즉 남부. 왼쪽 스와비아 땅이야. 여기서 점점 올라가더니. 서기 1400년 지나면서 브란덴부르크. 마그레이브. 후작이 되는겨. 이 브란덴 부르크.를 거점으로 뒤에 독일을 통일하는거야.
 
저때 알베르트.가 저 브란덴부르크.의 또한 자잘한 영지들의 영주의 자식이야. 이전 봤듯이 여기도 저 후작들끼리 저 북쪽은 전쟁들 심하게 했걸랑. 이 아부지는 두 땅의 후작이야. 
 
당시 호헨졸레른가문이. 튜튼이 보기엔. 폴란드 바로 접한 가문이고 제일 쎌 때야. 
 
더군다나 이사람이. 당시 폴란드 킹 지기스문트.의 조카야. 지기스문트 누나의 아들.
 
 
십삼년 전쟁 으로. 튜튼은 완전히 폴란드로 넘어왔어 힘이. 튜튼은 폴란드 킹에게 하미지를 해야해. 헌데 자기들은 신성로마에 하미지 하는 사람들이야. 여기서 이걸 삼촌 조카 관계 로 해결이 안돼.
 
이때는 서기 1500년 지나는겨. 러시아가 동쪽에서 떠올라. 튜튼이 러시아랑 동맹맺고 황제 막시밀리언하고도 얘기가 된느겨. 그러면서 쎈 듯 해진겨 상황이. 폴란드 킹에게 요구해 이전 가져간 땅들 돌려달라우. 바르미아 주교령도 우리꺼걸랑 달라우. 
 
폴란드에서 전쟁을 선포하는거지. 머 이런 개뼈다구 경우 .
 
 
하튼 튜튼 뻔뻔해 가만보믄.
 
당시 폴란드가 제일 분위기 좋을때야. 더구나 아래 오스만이 쳐들어와. 막상 지원군 보내야하는 막시밀리언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폴란드는 러시아도 신경쓰여. 
 
걍 튜튼이 수비 하는 상태에서 정전 하는겨.
 
 
그러다가 말야. 이 알베르트 기사단장이. 마르틴 루터.를 저 비텐부르크.가서 만나는거야. 

 

마르틴 루터가 7살 많아. 야 너 그러지 말고 말야. 프로테스탄트로 바꿔서리 폴란드로 들어가. 폴란드가 후사이트들 이전에 와서리 같이 싸워주고 저긴 멀어서리 교황과 그리 상관도 없어. 귀족 애들은 프로테스탄트가 많아. 킹도 어쩔수 없고. 로마 카톨릭이 니덜에게 해준게 머야. 황제가 니덜에게 해준게 머야. 그 사이에서 이제 한물간 카톨릭 버리고.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해서리 폴란드에게 확 그냥 수그리. 어차피 니 삼촌이고 땅도 넉넉히 줄거 아니니. 대체 거기서 폴란드랑 왜싸우냐 니가 거기서 종교 전쟁하는것도 아니고. 튜튼 기사단 교회 버리고. 세속으로 들어가서리 살어. 결혼도 다들 시키고. 프로테스탄트는 결혼해도되잖어. 사람들 2백년간 그지들처럼 뒤에서 딸딸이나 치민서리 맨날 그리 지지리 궁상 . 2백년동안 해오다가 결국 땅은 다시 다 뺏기고. 기사단 버려. 세속으로 나와.

 

 

 

확 땡기는겨 이게. 

 

 

해서리. 기사단 이란 껍데기를 버리고. 정식 더치령이 되는겨. 프러시아 라는 이름으로. 지기스문트가 카톨릭이지만. 머 카톨릭이든 아니든 이 떨어진 동네에서 관시미 없어 그따위. 보믄 세임의 귀족들은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야 이미. 그래 조카야. 잘 생각했다. 하는거지.

 

 

프러시아.의 시작이고. 독일의 시작이야 저게. 저 전쟁 직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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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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