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V (1500 – 21 September 1558) 황제기간 1519 - 1556.
프랑스.
Francis I (1494 – 31 March 1547) was King of France from 1515 until his death in 1547.
Henry II (1519 – 10 July 1559) was King of France from 31 March 1547 until his death in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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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Henry VIII (28 June 1491 – 28 January 1547) was King of England from 1509 until his death. Henry was the second Tudor monarch, succeeding his father, Henry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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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Suleiman I (1494 – 6 September 1566), Sultan of the Ottoman Empirefrom 1520 until his death in 1566
The Italian Wars, often referred to as the Great Italian Wars or the Great Wars of Italy and sometimes as the Habsburg–Valois Wars or the Renaissance Wars, were a series of conflicts from 1494 to 1559
이탈리아 전쟁.은 샤를8세가 시작해서리. 오를레앙의 루이12세가 이어받고. 이때 상대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언. 이야.
8 로 가름 할때. 65년간. 세번째 부터는. 선수들이 바뀌어. 거창하게. 세계 전쟁들 중에 가장 쎈 애들끼리 붙은 전쟁이 이 이탈리아 전쟁이야.
프랑수아1세와 오스만 술레이만은 동갑. 카를이 6살 어려. 헨리8세가 제일 형이야 세살 많아.
헨리8세는 카를5세의 이모부야. 아 이전 글 보니. 이모부를 외삼촌. 고모는 숙모. 아 오타 많아 .
john 2세. 할때 말야. 카스티야의 이사벨라.는 아빠가 카스티야의 후안2세. 스페니쉬. 이사벨라의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도.는 아빠가 아라곤의 존2세. 이건 카탈로니아어야. 해서 알파벳은 똑같은데 발음으로 구분을 해.
저 아라곤의 존 2세가. 나바르 킹도 되서리. 아들 카스틸로와 내전하는 그 존2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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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8세의 아버지 7세.는 그 위 올라간 튜더의 핏줄은 곤트의 존.의 세번째 부인.이 미스트리스. 라서 정통성이 약한게 아냐. 미스트리스도 귀족이야. 공작부인도 미스트리스 가 돼. 헌데 헨리7세는 엄마가 결혼 전에 나은 자식이야. 미스트리스.는 서로 결혼한 사이가 아냐. 애인일 뿐이야. 이거같고 다른 킹들이 시비를 걸진 않아. 헌데 결혼 허가 정식 받고 나온 자식이 아닌거야. 이게 문제였어. 이건 illegitimate 적법한 자식이 아냐.
해서 헨리7세 부터. 정식 결혼 하고 나온 자식이 아니더라도. 결혼 해서 그 이전 자식도 승계가능 하게 되었다.는건 이 헨리7세 부터야. 중세 후기 어쩌고 저쩌고는.
아들을 막 낳는게 중요한게 아냐. 정식으로 결혼해서 낳았느냐 가 중요한겨. 애인이었냐 머냐 가 중요한게 아냐. 그따위껀 안따져. 쟤들은 법이야 법. 헨리 8세가 아무리 왕권이 쎄도 기본적으로 법에 따라야해. 그 스민 역사인 팔리어먼트.는 숨죽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쎄. 쉽게 못다뤄.
문제는 잉글랜드의 리포메이션.이란 종교개혁인데. 이건 말야. 앤 불린이 시작해서리. 아라곤의 캐서린 대 앤 불린. 이 이어서리 피의 마리 대 엘리자베쓰. 로 이어지는 싸움이야.
피의 마리.라는 캐서린의 딸이 집권을 하게 될 수 있었던건. 로마 카톨릭 세력의 힘이야.
헨리8세가 로마카톨릭을 버리고. 이를 대체한 세력은 어쨋거나 프로테스탄트 들이야.
캐서린의 딸 마리는 엄마 팽 당할때 이미 20대 전후야. 다 컸어. 얘가 제일 분노한 것 중의 하나는 로마카톨릭을 버린 아부지야. 엄마와의 관계는 둘째치고.
피의 마리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역사야 이게. 단지 엄마 복수 전이 아냐. 이 시선은 유치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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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of Aragon (Spanish: Catalina;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was Queen of England from June 1509 until May 1533 as the first wife of King Henry VIII; she was previously Princess of Wales as the wife of Henry's elder brother Arthur.
헨리8세의 여자들.에서 거론되는 첫부인 캐서린. 이 여자들 이야기는 캐서린과 앤불린 이야기가 끝이야. 나머진 걍 자잘한겨.
이 여자가 엄청난 여자야.
Such was Catherine's impression on people, that even her enemy, Thomas Cromwell, said of her "If not for her sex, she could have defied all the heroes of History."[5]
그녀의 정적이었던 토마스 크롬웰 조차 말하였다. 캐서린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역사 속의 모든 영웅들을 당당하게 거부했을 것이다.
토마스 크롬웰은 나중에 중매 잘못서서. 이쁘지도 않은데 이쁘다고 해서리. 직접 보니까 시른겨. 결혼 취소는 못하고. 어쩔수 없이 식은 올리지만. 삼일 후에 결혼 무효해. 그여자가 네번째 여자 클레베의 앤. 그리고 중매선 저 토마스 크롬웰을 사형시켜. 이사람의 조카 핏줄이 나중 올리버 크롬웰이야.
The House of Trastámara (Spanish: Casa de Trastámara)
아라곤의 캐서린. 트라스타마라 가문.이야. 저 당시 제일 잘나가는 가문이야. 엄마 이사벨라 아빠 페르디난도 도 이 트라스타마라 가문이야.
시작이 엔리케2세. 카스티야와 레온. 이사람의 손자 에서. 아라곤의 페르디난도1세 가 나오는겨. 즉 아라곤.도 카스티야.의 핏줄인거야. 여기서부터 죽 죽 해서리 아라곤의 존2세.에서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가 나와.
엄마는 엔리케2세.의 손자에서 다른. 동생이 저 아라곤 핏줄까지 가고. 형이 이사벨라의 핏줄까지 간겨. 저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바르셀로나 가문 다음에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지배하다가. 미친년 딱지 후안나.조안나. 다음으로 시칠리아랑 나폴리는 합스부르크에 가는거고.
She studied arithmetic, canon and civil law, classical literature, genealogy and heraldry, history, philosophy, religion, and theology. She had a strong religious upbringing and developed her Roman Catholic faith that would play a major role in later life.[12] She learned to speak, read and write in Spanish and Latin, and spoke French and Greek. She was also taught domestic skills, such as cooking, dancing, drawing, embroidery, good manners, lace-making, music, needlepoint, sewing, spinning, and weaving.[13] Scholar Erasmus later said that Catherine "loved good literature which she had studied with success since childhood".[14]
수학. 교회법. 시빌로. 고전 문학. 계보학. 헤럴드리 문양들. 역사. 철학. 종교. 신학. 아주 강렬한 신앙분위기에서 자라다. 태어난 곳도 대주교 집에서 낳았어. 스페니시 라틴어 프랜치 그리스어.로 말하기 읽기 쓰기. 집안일인 요리 춤 그림 장식 예절 바느질 음악 등등.
독일 저지대 르네상스의 짱 에라스무스.가 말하길. 캐서린은 어릴때부터 잘 공부했던 훌륭한 고전들을 사랑했다.
이 여자는 교육 받은 게 최고야 당대에서. 헌데 당시 귀족 가문들이 이 시대 전후부터 다 이런거야. 앤불린이 또한 저래.
저게 말야. 노블. noble. nobility
1Belonging by rank, title, or birth to the aristocracy.
노블.이란 말을 아리스토크러시. 상류층에서 태어난. 이란 말로. 귀족의 라고 번역해서리 쓰지만 말야.
Having or showing fine personal qualities or high moral principles.
기본적으로 파인. 한 성격이랑 하이 모럴 한 원칙들을 갖고 보유한 상태야.
Origin
Middle English: from Old French, from Latin ( g)nobilis ‘noted, high-born’, from an Indo-European root shared by know
라틴어 노빌리스. 야. 노트된거. 콕 찍힌겨. 높은 출생이야. 누구에게 찍혀서? 신에게. 저기서 노우. 알다. 란 게르만어가 있지만. 이게 여기서 나왔는지 누가 먼전지 모르지.
저건 기본적으로 말야.
교육이야 교육. 그게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제고.
세상은 노블.들이 만들어가는거야. 저 노블은 계속 쌓여오면서리 온전해지는겨. 저 사람들이 세상을 만든겨. 역사는 낙수효과야.
노블. 노빌리티. 가 되어야 하는거야 모두가.
피블 인민이 모두가 노블한 인간이 되는게 문명의 다다름이야
이땅바닥은. 저런 노블한 인간이 없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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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 days later, on 14 November 1501, they were married at Old St. Paul's Cathedral.[11] A dowry of 200,000 crowns had been agreed, and half was paid shortly after the marriage.[23]
아라곤의 캐서린.이 헨리7세의 장남 아서.와 결혼을 해. 다우리. 캐서린이 바치는 결혼지참금은 20만 두카트. 반은 일시불로 받았고 나머지 반은 나중에 주기로 했어.
A few months later, they both became ill, possibly with the sweating sickness, which was sweeping the area. Arthur died on 2 April 1502; Catherine recovered to find herself a widow.[24].
그리고 결혼 후. 웨일즈의 프린스.인 아서와 같이 웨일즈로 가. 거기서 땀나는 병.으로 죽어 미스테릭 병. 결혼식 후 다섯달 정도 되서 죽은겨 남편 아서.가 . 캐서린은 같이 누웠었지만 살아남았어.
헨리7세가. 저 다우리 선불로 받은 10만 두카트.를 게워내야해. 킹이 되는 조건으로 준거걸랑. 거기에 당시 국제정세에서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가문을 놓칠 수가 없어.
카스티야의 이사벨라.도 잉글랜드가 아까와. 자기꺼라 생각하걸랑 저걸. 헌데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도는 돈이 아까와 오히려. 남은 10만 두카트를 주기보다 오히려 받고 싶어 미리 준 반을.
캐서린의 아라곤은 과부가 된 체. 런던에서 걍 죄수아닌 죄수생활을 하는거야 아무런 결정이 안되고.
그러다가 아서 죽고 일년 후 1503년 2월에. 헨리7세의 부인 요크가문의 엘리자베스가. 딸을 낳고 죽어. 이 딸도 바로 죽고.
헨리7세와 이사벨라가 이야기가 되는겨. 이때 헨리7세가. 저 과부가 된 아라곤의 캐서린. 며느리를. 자기 부인으로 삼고 싶다고 하는거지. 돈문제에 핏줄 정통성에. 당시 마흔 중반 된 가. 열여덟 캐서린. 애 얍삽한건데 이 개개끼.
아라곤의 캐서린.이 막내딸이야.
아서.랑 결혼 하기 전에. 이미 하나있던 오빠.는 죽었어. 포르투갈에 시집간 큰언니도 죽었어. 바로 위 언니가 그래서 다시 포르투갈 형부에게 시집가서 퀸하고 있어. 그 위 미친년 후안나 언니도 이미 막시밀리언의 아들 미남 필리프 와 결혼했어. 이미 카스티야의 유산은 후안나 언니로 가기로 한겨.
카스티야의 이사벨라는 헨리7세의 제안에 동의해. 헌데 아빠 아라곤의 페르디난도는 싫지. 에이 그잖아도 돈 아까운데. 야이 아무리 그래도 내딸 열여덟이다 . 저 늙은 한테 왜주냐. 노발대발해. 해서리 헨리7세가 그럼 차남인 헨리8세.랑 결혼 시키자 하는겨. 얘가 아직 어리니까 성인이 되믄 성례를 하자고.
헌데. 카스티야의 이사벨라가 죽은겨. 그 다음해에.
Isabella I (Spanish: Isabel, 22 April 1451 – 26 November 1504)
.저당시 카스티야의 분위기가. 이미 아들하나 달랑.은 죽고. 큰딸도 죽고. 죽은 자리 아래딸이 들어가고 포르투갈에. 저 아들은 자식없이 죽었어.
저당시 카스티야와 레온을 받을 사람은 후안나. 언니와 캐서린. 막내야. 죽은 큰언니의 자식에게 스페인 후계를 줬었는데 얘도 죽었어. 둘이 남은겨. 쟤가 죽은것도 1500년 이야.
요때 캐서린.이 잉글랜드에 왔던겨. 아서랑 결혼할라고.
이전에 후안나.는 이미 약혼해서 필리프랑 결혼했고.
해서 저 후계자 순위권 정해진게. 1502년이야. 캐서린이 과부가 된 해야 저때. 이때 후안나를 스페인 후계자로 정한거야.
헌데 저때 말야. 이 후안나가 나중에 조안나 더 매드. 라는 미친년 딱지를 받지만 말야. 이 후안나는 엄마 이사벨라를 원래부터 싫어하고..아니 무서워했어. 종교에 신앙에 의문을 가져. 사람들 이단심문 인퀴지션.에 대해 디게 끔찍하게 생각해. 디게 심성이 여린 여자야.
해서 정가에서 소문이 난거야. 후안나보다 캐서린에게 스페인이 넘어갈 수도 있다. 하고.
만약에 말야. 아서.가 안죽었으면. 저 스페인은 잉글랜드것이 되었을 수도 있어.
아서가 죽고. 캐서린이 과부가 된겨. 저 희망이 사라진겨. 후안나에게로 정해지고. 그래도 말야. 헨리7세는 속으로 작은 희망이 있는겨 어찌될지 모른다 함시롱. 이사벨라가 후안나 보다는 캐서린을 아꼈걸랑. 헌데 이 이사벨라도 바로 죽은겨. 이 일말의 기대감도 캐서린의 포장에서 사라진거야.
The return of Christopher Columbus; his audience before King Ferdinand and Queen Isab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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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페르다난도.는 이사벨라 죽고. 프랑스 퐈. foix 가문의 딸이랑 결혼을 해. 퐈 백작령이 아라곤이랑 피레네 산맥 마주한 지역이야. 이 퐈 가문이. 아라곤의 존2세가 첫번째 결혼해서리 얻은 나바르 킹덤.에서 그 카를로스 아들반란하고 얘 내치고. 이 나바르.를 블랜치 애게 줬다가 얜 죽고. 바로 아래 엘레오노르에게 줬걸랑. 이 여자에게 장가간 집안이 프랑스 퐈 백작집안이야. 그리고 나바르 킹은 이 퐈.가문이 이어가는겨.
해서리 페르디난도.는 이미 잉글랜드에서 과부가 된 저 캐서린.이 관심이 옅어져. 차남 헨리8세에게 준다고 애비는 약속을 했다지만. 과연 그 약속이 지켜질까 의문이었걸랑. 해서리 캐서린에게 돈도 안줘 이 친정아부지가.
잉글랜드에서 걍 과부가 된 체로 그 좋은 때를 감옥아닌 감옥에서 돈도 없이 보냈던겨 이 캐서린이.
해서리. 캐서린이 부여받은 직무가. 스페인의 앰배서더. 대사직을 받아. 그걸로 생활을 유지해.
세계 최초의 여자 대사야 이 아라곤의 캐서린이.
Some of the letters she wrote to her father complaining of her treatment have survived. In one of these letters she tells him that "I choose what I believe, and say nothing. For I am not as simple as I may seem." She had little money and struggled to cope, as she had to support her ladies-in-waiting as well as herself. In 1507 she served as the Spanish ambassador to England, the first female ambassador in European history.[1] While Henry VII and his councillors expected her to be easily manipulated, Catherine went on to prove them wrong.[1]
저것도. 1507년. 과부된지 5년만에 받은겨. 이것도 아빠한테 열받아서리. 야 이 새캬. 열여섯된 처녀한테 새장가들고서리 싄나느라 이전딸 신경도 안쓰냐 색햐 내 돈도 없고 내밑에 레이디들도 다 생그지다. 꽁돈 주기 싫으면 내 여기서 니 나라를 위해 일할팅께 월급이라도 보내라 이 애비라.
헨리 7세와 그 참모들은 캐서린이 다루기 쉬울 거라 기대했다. 허나 그 반대였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을 선택한다. 아무말 안하겠다. 왜냐하면. 나는 보여지듯이 그리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편지를 썼대 아버지한테. 아 멋진 글이야 저게. 내 갈길 내가 믿는 것이 져스티스라고 확신을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선택한거야 이 길을. 더이상 말은 필요가 없어. 나는 그리 간단한 사람이 아냐. 아빠 나 믿어봐.
Henry VIII (28 June 1491 – 28 January 1547)
Henry VII died on 21 April 1509, and the 17-year-old Henry succeeded him as king. Soon after his father's burial on 10 May, Henry suddenly declared that he would indeed marry Catherine,
이미. 형의 여자.랑 결혼하는 문제는. 이전에 아서 죽고. 다음해에 엄마 요크의 엘리자베스 죽고. 헨리7세가 캐서린이랑 결혼하까 할때 페르디난도 열 받아서리. 그러믄 헨리8세랑 결혼 시키께. 하면서리. 이사벨라가 헨리7세랑 서로 교황에게 다 교통정리를 시킨거야. 그리고 이사벨라는 죽었어. 그리고서리 4년 후에 헨리7세가 죽어.
헨리8세가 캐서린보다 6살 어려. 햇수로 18살에 왕위에 올라. 얘들은 생일 지나야 한살이야. 1509년. 장례식 치루고. 바로 결혼을 하겠다고 해 캐서린 이랑. 24살 캐서린.
이때 헨리는 거부해도 되었어. 헌데 한거야. 둘다 독실한 카톨릭이야. 애비의 유언도 있겄지. 그리고 더군다나. 캐서린이 이 여자가 보통 여자가 아닌거야. 저 이상의 여자가 없어. 배운것도 배운 거지만. 외모 따지는 헨리가 보기에 캐서린이 너무 이뻐.
Catherine was of a very fair complexion, had blue eyes, and had a hair colour that was between reddish-blonde and auburn like her mother and sister Joanna.[citation needed] In her youth she was described as "the most beautiful creature in the world"[79] and that there was "nothing lacking in her that the most beautiful girl should have".[9]Thomas More and Lord Herbert would reflect later in her lifetime that in regard to her appearance "there were few women who could compete with the Queen [Catherine] in her prime."[80][81]
얘들이 표현이 페어 fair 라 쓰면. 페어 헤어. 페어 컴플렉션. 하는건. 저 페어가. 밝다 란 거야. 단지 금발이 페어가 아냐. 검은 계통이 아니라 밝은겨.
묘사한거 보면. 밝은 안색.이야. 하양인가봐. 파란 눈동자. 머리칼은 붉은듯 금발인듯 갈색인듯. 젊을 때 서술된거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 이라 했다. 더이상 부족할게 없어. 캐서린과 경쟁할 여자가 거의 없어. 라고들 한겨.
그만큼. 여섯살 차이의 누나지만. 형이랑 서너달 살은 여자지만. 캐서린 이상의 여자가 없는겨.
문제는 교미를 했냐는 건데. 교미를 했으면 교황의 예외적 허가가 무효가 되는거걸랑. 헌데 이건 또한 캐논로에 위배가 돼. 캐논로에. 교황이 예외적으로 해서리 허가한 것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어. 그래도 디미는겨 이혼할라고 나중에.
The Trial of Queen Catherine of Aragon, by Henry Nelson O'Neil(1846–48, Birmingham Museums)
아라곤의 캐서린 퀸.의 재판.
나중에 앤불린.이랑 결혼할라고. 결혼 무효 받을라고 할때. 캐서린을 법정에 세우는겨. 너 이 우리 형이랑 잔냐 안잔냐. 말이 안되잖냐. 빨랑 자따고 해라. 그럼 교황이 특별히 허가해서 니캉내캉 결혼한건 무효가 되는겨.
Even if her marriage to Arthur had not been consummated (and Catherine would insist to her dying day that she had come to Henry's bed a virgin), Henry's interpretation of that biblical passage meant that their marriage had been wrong in the eyes of God.[29]
캐서린은 죽는 날에도 말했대. 자긴 헨리의 침대에 버진.인 상태로 왔었다고.
Soon after returning to Dover, Henry and Anne married in a secret ceremony on November 14, 1532.[73] She soon became pregnant and, to legalise the first wedding considered to be unlawful at the time, there was a second wedding service, also private in accordance with The Royal Book,[74] which took place in London on 25 January 1533. Events now began to move at a quick pace. On 23 May 1533, Cranmer (who had been hastened, with the Pope's assent, into the position of Archbishop of Canterbury recently vacated by the death of Warham) sat in judgment at a special court convened at Dunstable Priory to rule on the validity of the King's marriage to Catherine of Aragon. He thereupon declared the marriage of Henry and Catherine null and void. Five days later, on 28 May 1533, Cranmer declared the marriage of Henry and Anne to be good and valid.[75]
헨리랑 엔불린.이랑 비밀결혼을 한건. 1532년 11월. 임신을 했어. 애 나오기전에 정식 에코트에 의한 결혼식을 해야 리지티메이트.된 애가 돼. 1533년 1월에 정식 결혼을 해. 약식으로. 즉 비밀결혼을 한건. 헨리가 빠구리가 하고픈겨 앤불린이랑. 앤불린이 결혼 안하면 안대준다고 했걸랑. 야 이 오년 여만에 소원풀은거지.
그리고 나서리 이전 결혼무효 선언을 정식으로 한겨. 1533년 5월에. 캔터베리 대주교.를 크랜머로 바꾸고. 이전 울시.는 앤불린을 몰래 빼내서리 망명시키려 어거지로. 이걸 헨리가 알고 죽일라다가 걍 병들어 침대있다고 봐줘. 병으로 걍 죽어. 그리고서리 캔터베리 대주교.가 특별재판을 하는겨. 저 캐서린의 재판이 저 때인거야. 저기서 결혼 무효.를 정식으로 선언해. 그리고 나서리 5일후인 5월 28일.날 앤불린과의 결혼은 좋은거고 유효하다. 라고 한겨.
그리고 나서리 다음달 1일에 앤불린이 여왕 왕관을 써.
아라곤의 캐서린은 일곱번을 임신을 해. 피의 마리.라 불려지는 마리.는 다섯번째 임신되서 낳은 아이야. 1516년생. 여섯은 대부분 죽은 상태에서 나온 아이들이거나 일찍 죽은겨.
Public support remained with Queen Catherine. One evening in the autumn of 1531, Anne was dining at a manor house on the river Thames and was almost seized by a crowd of angry women. Anne just managed to escape by boat.[65]
당시 사람들은 캐서린.이 너무 좋아. 1531년. 이면 앤불린이 결혼 하기 2년 전이야. 이미 캐서린은 아무 힘이 없어. 앤불린 세상이야. 베네치아 시아이에이에의하면 앤불린을 통해 로비할라고 줄을 선대. 앤불린이 저때에 탬즈강 매너하우스 맨션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화난 아줌마들이 몰려와서리 잡아 죽일라한걸 보트 타고 겨우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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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불린이 퀸이 될때. 캐서린의 딸 마리는 17살이야. 캐서린 죽을때 스무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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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년. 이탈리아 전쟁중일때 캉브해 동맹 전쟁.으로 교황이. 이탈리아들이랑 프랑스 신성로마 다 연합해서리 징징대면서. 베네치아 가 빼앗은 내 땅들 찾아줘유 해대다가. 정작 프랑스가 이 후에 교황땅들을 다 뺏으려 하걸랑. 이때 헨리8세가 프랑스를 치러 가는겨. 교황이 프랑스 먹으면 너 프랑스 킹도 해.
이때 프랑스 프랑수아.가 스콧 제임스4세에게. 잉글랜드를 쳐달라 하걸랑. 해서리 얘가 직접 병력데리고 쳐 내려가. 이걸 전선 근처까지 가서리 지휘한 사람이 이 아라곤의 캐서린이야. 여기서 압승을 하고. 저 제임스4세는 죽어.
당찬 여자걸랑 이 아라곤의 캐서린.
헨리가. 자기 재혼한걸 인정하면 딸 마리랑 같이 있게 해주겠다고 해. 죽을때까지 인정안하고. 두 모녀는 저 이후 만나지도 못한 체 죽어. 마리는 장례식에 참석 금지.
이 마리.가 피의 마리.라며 프로테스탄트 애들이 딱지를 붙였는데.
마리.는 단순한 피의 마리가 아냐. 마리는 엄마 복수를 하는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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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종교개혁과 대륙의 종교전쟁은 이게 다시보면 말야. 재미써. 그 다른 차이가.
저게 지금의 잉글랜드를 만들고 스콧을 만들고 얘들이 산업혁명에 미국을 낳은거걸랑.
영국은. 캐서린과 앤불린과 마리와 엘리자베쓰.가 만든거야.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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