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lo-French wars

1202–04 1213–14 1215–17 1242–43 1294–1303 1324 1337–1453 (1337–60, 1369–89, 1415–53) 1496-98 1512–14 1522–26 1542–46 1557–1559 1627–29 1666–67 1689–97 1702–13 1744–48 1744–1763 1754–63 1778–83 1793–1802 1803–14 1815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 하지만. 얘들은 6백년간이 전쟁이야. 백년전쟁은 저기서 1337-1453 일뿐이야.

 

 

리차드가 죽는건 1199야. 어린 막내 병딱이 존.이 형께서 십자군 간 사이 쿠데타해서리 필리프2세한테 뺏긴땅 회복하다가 죽어. 존.이 왕이 다시 되고 대륙 쳐들어가서 회복하려 하지만 못하는겨. 저 1202년은 존.이 노르망디 상륙하는거 부터 친겨. 

 

저때부터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웬수야. 

 

1215.가 마그나 카르타.야. 별게 아냐. 존 병딱이 왕새꺄. 앞으론 우리 팔리어먼트 허락없인 세금 함부로 걷지 말라우. 우리네 허락없인 아무짓도 말어. 배론들 몇십명이서 합의하면 왕자리도 내놓으라우. 거부하고 배론들이랑 전쟁하는겨. 이전 썰. 저때 프랑스가 배론들 스폰하는겨. 존 죽고 베론들이 돈 주고 보내 프랑스를. 다음 꼬마애 헨리3세가 왕이 되고 또 얘가 크니까 왕 행세해. 배론들이 또 대들어. 또 스폰해. 한편으론 대륙에서 남은 잉글랜드 정체성의 사람들이 라로셸 항구나 프아티에 생통주 에서 프랑스에 대드는겨. 그 아래 가스코뉴 에서도 붙어. 

 

저기에 없지만. 직전엔 스콧랜드 독립전쟁.이야. 이게 작명을 인디펜던스 한게 좀 웃긴데. 저때 스콧은 잉글랜드 속지가 아냐. 잉글랜드가 처들어간겨 걍. 그걸 벗어나고자 해서리 인디펜던스 한건데 저건 작명 잘못한거야. 마치 스콧이 식민지 상태서 독립전쟁 한 마냥. 전혀 아냐. 

 

하튼 저때도 스콧을 스폰해. 프랑스가. 

 

백년전쟁은 스콧 독립전쟁 중에 터진겨. 스콧이랑 전쟁하다가. 그 화살을 프랑스로 돌린겨 잉글랜드가. 스콧은 저 와중에 잉글랜드를 내쫓아. 잉글랜드가 스콧은 걍 버린겨. 프랑스에게만 집중한겨. 스콧 전쟁은 역시 프랑스가 올드 얼라이언스 해서리 동맹이니까. 어차피 스콧 쳐봤자 의미없다. 그 뿌리인 프랑스를 치자. 그리고 나서리 스콧을 먹자. 한거걸랑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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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쟁이 나폴레옹까지 가는겨 결국. 나폴레옹의 전쟁은 영국과의 전쟁이야. 

 

최후의 승자는 워털루에서의 유나이티드 킹덤 오브 그레이트 브리튼 앤드 아일랜드 가 된겨. 저때가 영국이 스콧이랑 아일랜드 랑 다 합치고 나서야. 이게 나중 아일랜드에서 북아일랜드만 갖고온 UK 가 되고.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 에 감금하면서. 최종 승자는 영국 인거야. 

 

 

 

 

저게 말야. 지금 현재에도 여전한겨 그래서. 그 싸이키가.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죽으면서 걍 끝난겨.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이야. 프랑스 혁명은 자코뱅 클럽의 몽테뉴파 지롱드파 의 혁명이 아냐 저건.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 그 자체야. 나폴레옹이 없는 프랑스 혁명은. 그건 혁명이 아니야. 걍 개 들의 폭동이야. 

 

 

저게 머냐면 말야. 여전한건데 저따위 이.

 

 

혁명이란 이름으로 기존 권력 기존 체제를 엎었어.

 

 

 

그다음엔?

 

 

 

피플들에게. 인민들에게. 나눠주면 돼? 가진 들의 재산 다 나눠주면. 천국인거야? 정의가 실현된거냐?

 

 

 

짐바브웨 무가베가 작년에 죽었잖냐. 백인 지주들의 땅을 다 몰수해서 나눠줬어. 

 

짐바브웨. 거지 중의 상거지 나라야 저게.

 

그짓 김일성이 했다고 이땅바닥에 여전히 위대한 독립운동가 이 하는 들. 아 없겠지 어찌 그런 분들이 있을 수가 있니. 저도 그 하걸랑. 지주들 땅 뺏고 무상분배 했대. 얼마나 골고루 분배질 했을까.

 

저게 결국 다 거지가 된겨 저게. 처음엔 좋겄지. 베트남 파병 전에는 북조선이 우리네 보다 잘살았어. 처음엔 잠깐 좋은겨. 저게 결국 인간들 활력을 죽이는겨 저게. 평생 거지가 되는겨. 양키탓 하면서 심심하믄 양키 미 제국주의 물러가라 해민서 애들 광장에 동원 대회 하는거지.

 


남아공 대통령 "토지 무상몰수 개헌 단호하게 추진"송고시간 | 2018/08/01 09:34

 

 

"토지몰수·재분배, 경제에 중요"…일각선 회의론도

 

 

남아공에서. 이들이 하다하다 안되니 저. 이전 얼핏 썰했지만 말야. 만델라는 그 하고. 다시 정권을 네덜란드애들에게 줬어야해.

 

 

쟤들이 멀 아는게 있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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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냐. 무상몰수 재분배.

 

 

프랑스 혁명이란 시기 당시. 귀족들 망명귀족되고. 막막 나눠줫을꺼 아이가? 대체 얼마나 어느정도 나눠줬겠냐만. 거기에 가진들 있을테고 못 챙긴 들 있을거 아이가?

 

 

거리는 피바다야. 암살도 아냐. 걍 대놓고 죽이는겨. 

 

 

 

 

로베스피에로. 민들이여 모든 정보 다 공개함둥! 실시간으로 알려드림둥!! 이게 민주주주의 임둥!

 

 

 

저가 알리는 정보들은. 오히려 민들의 분노만 더 치밀어오르는거지. 아 저 적폐들의 적폐이 그정도였냐?

 

 

 

살벌해 지는겨. 공포야 공포.

 

 

저걸 진압한 것도. 저 자코뱅 클럽의 들이야. 로베스피에로 형제들 목짜르는 애들도 자코뱅 클럽 애들이야. 걔들이 부른게 나폴레옹이야. 청년 장교. 아 진압좀 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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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엎었어. 다음은 먼데?

 

 

 

 

없어 이 들아. 결국 다시 처음부터 하는겨. 이전의 체제가 했던 그대로 ㅋㅋㅋㅋ. 이거 이상의 정답이 없어. 그게 역사야 인간사고. 이상하지?

 

 

아 가진들 재산 다 뺏아서리 나눠주고. 기본 임금 만원이 머야 시간당. 십만원해 . 해서리 올려주고. 그러면 좋은 세상이 되는건 당연할 듯 한데.

 

 

 

오히려 거지가 되걸랑. 오히려 더 큰 전쟁만 불지르는겨. 여자들은 창녀가 되고 파출부가 되는겨. 남자들은 약탈을 해야하고. 일자리가 없으니. 

 

 

그게 베네수엘라야 지금.

 

 

 

저 마두로. 최저임금을 몇백프로 또 올려. 그리고 하는말. 우리 경제가 안좋은건. 미국과 기존수구세력 탓입니다.

 

 

 

뇌구조가 똑같은겨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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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몰라서 그래. 인간을 몰라. 무지해서 그래. 너무나 너무나 무지한겨 저게. 

 

 

 

 

우리네가 얼마나 무지한 인간들 인가를 알아야 해. 

 

 

 

정의를 부르짖는 저가 정말 최 악 의 최 악의 사탄이자 데블이야. 이걸 명심해.

 

 

 

 

그럼서. 지가 뒈질땐. 여러분. 정의를 위해. 제가 못한 일. 제가 부족해서 이리 가지만. 남은 여러분들은 화이링 하십시오.

 

 

넵! 알겠슴니다 동지여!!! 열사여!!! 우리의 예수이시여 !!!! 흑흑흑.

 

 

 

불쌍한겨 진짜.

 

 

코메디도 저따위 코메디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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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외친 들 치고. 인간들을 대학살 안 시킨 가 없단다. 그게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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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뿔 혁명. ㅋㅋㅋ. 조불혁명이다. 조선이 부활한그지. 

 

 

소위 양키따라하는 들도 말야. 보수란 이름하에. 제대로 잘 모르걸랑. 걍 어렴풋 하걸랑. 아 걍 양키 따라하자. 자유다 자유가 어쩌고. 그름서 남의 아가리 막던 들 역서 저들이걸랑.

 

 

역사의 절실함을 전혀 몰라 저것들이. 우리네가 얼마나 뒤쳐진걸 몰라. 아 빨리 따라왔네. 저기서 예전 왕조들 하던 연줄 놀이나 하민서리 지들 돈만 챙기는겨 저게. 썩은겨 쟤들도 역시. 그에 대한 반발이 소위 민주고 소위 정의야. 

 

 

저기서 쟤들 썩은 것만 도려내면돼. 그 이상 없어. 썩은 것 다시 못 썩게 하는 방식으로만 갈 뿐인거야. 저기서리 저것들 전체가 오답이다. 판정하고서리 인민이 답이고 피플이 답이여 하며 전체를 갈아엎으믄 전부 거지되능그지. 

 

다들 정신병자다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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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잉글랜드 에서 나중 영국에 최종 진겨. 나폴레옹도 죽었어. 

 

 

이때가 1800년대야. 일본는 눈치 좋아. 막부가 처음엔 프랑스에 기대걸랑. 애들을 유럽에 막막 유학을 보내. 

 

프랑스 맛이 갔슈. 독일이유 독일. 그리고 영국에 미국이유.

 

 

고뤠? 독일 선생들이랑 장군들 초빙하자우. 영국관 조약맺고. 미쿡가서들 공부하라우.

 

 

음청나 일본들 진짜. 저게 러일전쟁이야. 동양바닥 미개인들이. 서양의 문명을 처부슨겨. 저건 세계 사건 중 가장 음청난 사건이야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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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때 말야. 저 프랑스가 지고서리. 저때부터 프랑스는 우울한겨. 육백년 간의 전쟁이야. 

 

저게 머냐면 말야. 중세 천년의 전쟁과 그 이후를 잇는 전쟁의 끝판을. 프랑스는 진거야. 

 

 

세계 1차 대전의 전장은 프랑스야. 왜 오스트리아 헝가리 황태자가 세르비아애들배훅로 뒈진걸. 왜 프랑스를 치냐 닝기리 하는겨. 최대 전장은 프랑스야 닝기리. 억울한겨 프랑스. ㅋㅋㅋ.

 

 

세계 2차 대전. 아이 닝기리 히틀러 개개끼야. 왜 또 우리네 프랑스를 쑥대밭 맹글어 색햐.

 

 

 

나폴레옹이 죽고. 150여년을. 프랑스는 저따위 쭈그러 앉은 짙은 그림자 속에 살은겨 저게.

 

 

거기서 티나온게 6.8 혁명일 뿐이야. 걍 욕만 티나온겨. 저게 머 대단한 혁명 딱지 붙는 음청난 먼가를 만들은 것도 아니고. 

 

 

저건 대안이 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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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튼 육백년간의 전쟁이야 그래서. 웬수야 웬수 영국과 프랑스는. 그 중심엔 헨리2세의 엄마 마틸다와 아빠 앙주의 제프리.의 엄마재혼.  그리고 아키탄 엘레오노르의 헨리2세와의 재혼. 부터 시작해서리 아들 존 래크랜드.에서 터진겨. 그로부터 6백년인겨 저게.

 

 

리차드와 필리프2세.는 친했어. 헨리2세 아부지를 원수로 둘땐. 헌데 결국 잉글랜드의 정체성이 강한거지. 

 

잉글랜드.가 또한 시안한 곳이야. 대부분. 잉글랜드의 킹이 되면. 이전 정체성을 버리고 잉글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더 쎄게 갖아. 제임스란 이름의 스튜어트.는 스콧으로 회귀하려 했지만. 개척한 윌리엄이나. 나중 네덜란드의 윌리엄3세나. 스튜어트 다음의 조지.로 시작하는 하노버 가문이나. 잉글랜드인이 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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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튼 육백년간의 전쟁이야. 

 

 

백년전쟁. 을 자세히 볼껀 없고. 걍 간단히 보면.

 

쉼.

 

 

남아공이나 베네수엘라 애들은 지하자원이 남아도라서리 저따위 이라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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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계승권.은 걍 말장난이고. 

 

 

France in 1477, when Guyenne was a part of the royal domain

 

 

백년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야. 백년전쟁이 끝나고 대륙엔 잉글랜드의 땅이 저 맨 위. 칼레. calais 만 잉글랜드땅으로 남아. 이땅은 잉글랜드가 백년전쟁 때 빼앗은 땅이야. 

 

저 칼레. 맞은 편 잉글랜드.가 도버. dover 야. 해서 도버 해협 하는겨. 영프 사이 해협 전체가 영국해협이야. 이건 채널. channel. 저긴 채널중에서 좁은데야. strait 스트레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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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ortest distance across the strait, 33.3 kilometres (20.7 miles; 18.0 nautical miles),

 

가장짧은 거리가 33 키로미터. 해서 여기가 프랑스나 영국의 최고 중요한 곳이야. 세계대전때 히틀러가 폭격해서 함락하려 한 곳도 이 칼레.야.

 

저 칼레.는 백년전쟁 끝나고. 백년 후에나 프랑스 땅이 돼. 피의 마리. 일때 뺏기고. 엘리자베쓰가 다시 찾아오려다 실패해. 

 

The Siege of Calais was fought in early 1558 during the Italian War of 1551–1559. The Pale of Calais had been ruled by England since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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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pute over Guyenne: a problem of sovereignty
기옌. Guyenne 논란. 저 기옌. 가스코뉴. 아키탄. 이 이게 막막 쓰는데. 이게 같은 말이 아냐. 
저 지도 상에서. 기옌. 이 보이는데. 가스코니. 가스코뉴. 는 저 스페인이랑 접하는 접점 지역을 가스코뉴. 해. 즉 가스코뉴 위에가 기옌.이고 기옌 위에가 아키탄 이야.
카이사르 가 원정할땐. 저 기옌 이 있는. 저 파여진 날카로운 만으로 흘러내리는 가론강. 에서 피레녜 산맥까지의 삼각지역이 아키탄이었어. 헌데 이게 점점 올라가서리 그 위까지 아키탄 하고. 그러다가 저 강 너머 윗쪽을 아키탄. 바로 아래.를 기옌. 그리고 그 아래 피레녜 산맥 접한는 프랑스땅은 가스코뉴. 하는겨. 
해서 중세이야기할땐 저걸 다 섞어서 막막 구분않고 뭉뚱그려 아키탄. 하는 인간도 있고. 하지만 세부적 구분은 저래.
즉 기옌 논쟁 하면 저게 가스코뉴 기옌 다 합한겨. 아키탄 땅은 대부분 뺏겼걸랑 엘레오노르가 갖고온건. 병딱이 존 이 필리프2세한테 쏙아서리. 그래도 계속 저기서 반란 한겨. 그게 라로쉘 전투. 생통주 전투. 생사도스 전투. 잉글랜드가 막 지원해도 프랑스가 이겨. 저기가 프와티에 의 아키탄 부근이야. 기옌 위야. 그 접점이 생사도스. 였고. 

France in 1330.

 

 

남은게 저 남부에 기옌. 이야. 안보이는 거 아래의 가스코뉴.이고. 잉글랜드의 땅이야 여전히 저기가. 다 뺏긴겨. 1330년.

 

The dispute over Guyenne is even more important than the dynastic question in explaining the outbreak of the war. Guyenne posed a significant problem to the kings of France and England: Edward III was a vassal of Philip VI of France because of his French possessions and was required to recognize the suzerainty of the King of France over them. In practical terms, a judgment in Guyenne might be subject to an appeal to the French royal court. The King of France had the power to revoke all legal decisions made by the King of England in Aquitaine, which was unacceptable to the English. Therefore, sovereignty over Guyenne was a latent conflict between the two monarchies for several generations.

 

저 땅은 어쨋거나. 프랑스 왕의 땅이란거지. 피프 fief. 하사받은 땅을. 받은 임차인. 바쌀. vassal 이. 주러렌티. 그 권리를 행사하려면. 왕한테 엄숙히 의례를 받아야해. 이땅 니헌테 줄팅께 잘 다스리라우. 그 현장이 court. 코트야. 그 예의 범절 이 에티켓.이야.

 

저걸 하미지 homage. 라 해.

 

왕이. 바쌀. 한테 피프.를 준겨. 이 바쌀. 이라는 영주.는 대리인일뿐이야. 

 

 

 

Homage of Edward I of England(kneeling) to Philip IV of France(seated), 1286. As Duke of Aquitaine, Edward was also a vassal to the French King. Illumination by Jean Fouquet from the Grandes Chroniques de France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Paris. 

 

존 래크랜드.가 땅 뺏기고서리. 그 다음 애들부터는 임차인 임대인이 바뀌믄 가서 저리 하미지. homage 를 하는겨. 무릎 딱 꿇고. 애드워드1세가 필리프4세한테 하는 하미지. 저건 프랑스에 있는 아키탄 부근 땅 때메 저리 무릎꿇는겨. 잉글랜드 땅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During the War of Saint-Sardos, Charles of Valois, father of Philip VI, invaded Aquitaine on behalf of Charles IV and conquered the duchy after a local insurrection, which the French believed had been incited by Edward II of England. Charles IV grudgingly agreed to return this territory in 1325. To recover his duchy, Edward II had to compromise: he sent his son, the future Edward III, to pay homage.

 

이전에 썰한 생사도스 전투에서. 이건 발루아 샤를이 왓걸랑. 얘가 나중 필리프 6세가 되는 애의 아부지야. 얘가 생사도스.를 진압하고. 잉글랜드에게서 안뺏았어. 다시 돌려준겨. 

요걸 눈치채서리. 에드워드2세가. 부랴부랴 자기 자식 미래 에드워드3세를 보내서리 하미지.를 한겨. 요땅에 대해서. 프랑스 왕 마음바뀌기 전에. 

The King of France agreed to restore Guyenne, minus Agen. But the French delayed the return of the lands, which helped Philip VI. On 6 June 1329, Edward III finally paid homage to the King of France. However, at the ceremony, Philip VI had it recorded that the homage was not due to the fiefs detached from the duchy of Guyenne by Charles IV (especially Agen). For Edward, the homage did not imply the renunciation of his claim to the extorted lands.

 

프랑스.는 저 남은 아래 기옌. 가스코니. 땅들을 다 빼앗아 올라했어. 헌데 이게 지지부진 해진겨. 필리스4세의 자식왕들 네명이 막막 죽고. 그러다가 필리프 6세가 즉위를 한겨. 1329년. 임대인. 즉 빌려주는 사람이 바뀠어. 다시 인사가이돼. 하미지. 에드워드 3세가 간겨. 

 

헌데 필리프6세는. 니가 하미지 하는 땅은. 저 기옌 주위 땅에 대해서만 이지. 이전에 우리아부지가. 니 아부지 에드워드2세가 부추겨서 생사도스 전투를 할때 내 아빠 샤를.이 진압해서리 이미 우리네 앙주 가문꺼다. 그건 잉글랜드꺼가 아니다 더이상. 넌 이것에 대해 하미지 할 권리가 당근 없는거고. 난 니가 갖고 있는 나머지 기옌 땅들에 대해서만 하미지를 받는거다.

 

 

 

아 에드워드 3세.가 짱나는겨. 자기가 왕자일때 그 땅에 대해 하미지 했걸랑. 헌데 지금은 아니라니. 

 

 

그러잖아도 존심 상할꺼 아녀. 원래 우리땅 . 존 할배때메 매번 이리 자식들이 인사하러 오는것도 짱나는데. 어 머 우리꺼도 아니라니 먼 개소리.

 

 

여기에 플랑드르.와 프랑스.도 역시 웬수잖아. 플랑드르 애들이 불지피는겨. 니가 프랑스 왕이지. 저거 핏줄 방계 핏줄. 성루이 그 까마득한 할배의 동생 핏줄이 왜 프랑스 왕하냐. 니덜 엄마 이사벨라.가 더 가까운데. 니가 프랑스 왕이다.

 

 

저때 이미 잉글랜드는 스콧이랑 전쟁중이었고. 이건 에드워드1세부터 2세 3세까지 온겨 지금.

 

Philip VI had assembled a large naval fleet off Marseilles as part of an ambitious plan for a crusade to the Holy Land. However, the plan was abandoned and the fleet, including elements of the Scottish Navy, moved to the English Channel off Normandy in 1336, threatening England.[11] To deal with this crisis, Edward proposed that the English raise two armies, one to deal with the Scots "at a suitable time", the other to proceed at once to Gascony. At the same time, ambassadors were to be sent to France with a proposed treaty for the French king.[13]

 

필리프 6세는 어차피 대대손손 지긋지긋 한거걸랑 저놈의 잉글랜드. 저 하미지 논쟁 불 지핀건 대놓고 즉위 전까지 계속 속 긁을꺼 아녀. 왕자리 내놓으라고. 신경전 하는거지. 마르세유에 군함들을 원래 십자군 레반트 가려는걸 빠꾸시켜서리 스콧랜드로 보내는겨. 에드워드 도 부랴부랴. 스콧에 증원군 보내고 가스코뉴에 병력 준비하는겨. 그리고 대사를 보내 프랑스에. 

 

At the end of April 1337, Philip of France was invited to meet the delegation from England but refused. The arrière-ban, literally a call to arms, was proclaimed throughout France starting on 30 April 1337. Philip then met with his Great Council in Paris. On 24 May 1337, it was agreed that the Duchy of Aquitaine, effectively Gascony, should be taken back into the king's hands on the grounds that Edward III was in breach of his obligations as vassal and had sheltered the king's 'mortal enemy' Robert d'Artois.[14] Edward responded to the confiscation of Aquitaine by challenging Philip's right to the French throne. When Charles IV died, Edward had made a claim for the succession of the French throne, through the right of his mother Isabella (Charles IV's sister), daughter of Philip IV. Any claim was considered invalidated by Edward's homage to Philip VI in 1329. Edward revived his claim and in 1340 formally assumed the title 'King of France and the French Royal Arms'.

 

즉위하고 팔년 후야. 즉 하미지. 한 후의. 잉글랜드 대사와 만나는 걸 거부해. 그리곤 귀족들 만나고. 아키탄 땅. 즉 저기서 아키탄은 기옌. 가스코뉴. 를 다 포함한겨. 저 모든 땅들 다 프랑스로 갖고 오자우. 저게 우리네 적도 숨겨주고. 

 

에드워드3세.는 그 프랑스 왕은 우리엄마 핏줄인 내꺼다. 8년만에 다시 들고 나온겨. 치사하긴 치사한거지. 하미지. 하민서리 무릎꿇었으믄 저 논쟁은 끝난거걸랑. 

 

즉 이건. 이전 130년 동안 쌓인 것이 터진겨 이게. 왕위 달라는 건. 아무런 명분이 없어.

 

거기서 그 중심은 저 아키탄 땅 중에 특히나 저 생사도스 전투때의 땅. 이게 가장 큰 핑게꺼리가 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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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선 아리에르방. 전쟁선언은 귀족들 소집을. 전쟁선언으로 본대. 해서리 1337년.을 전쟁 시작으로 본겨.

The Battle of Sluys (/ˈslɔɪz/

Dutch pronunciation: 

[slœys]), also called the Battle of l'Ecluse, was a naval battle fought on 24 June 1340 between England and France, in the roadsteadof the port of Sluis (French Écluse), on a since silted up inlet between Zeeland and West Flanders. The English fleet of 120–150 ships was led by Edward III of England and the French of 230 by the Breton knight Hugues QuiéretAdmiral of France and Nicolas BéhuchetConstable of France. It was one of the opening engagements of the Hundred Years' War.

 

첫 시작은. 슬뢰이즈 전투. 저기가 지금 프랑스 너머 벨기에 해변이야. 에드워드 3세가 배타고 여기에 가서리 내려올라가는겨. 

 

 

In 1348, the Black Death, which had just arrived in Paris, began to ravage Europe

 

흑사병은 전쟁 아주 초기에 왔어 파리에. 저건 저 터키쪽서 계속 올라오던 거고 흑사병.

Edward of Woodstock, known as the Black Prince (15 June 1330 – 8 June 1376),[1][a] was the eldest son of Edward III, King of England, and Philippa of Hainault and participated in the early years of the Hundred Years War. He died before his father and so never became king. His son, Richard II, would succeed to the throne instead.

 

에드워드 3세의 아들 흑태자. 

 

The Battle of Crécy (26 August 1346), also spelled Cressy, was an English victory during the Edwardian phase of the Hundred Years' War. It was the first of three famous English successes during the conflict, followed by Poitiers in 1356 and Agincourt in 1415.

 

얘가 처음 시작하는 전투. 나이 16살이야. 크레시 전투. 저 슬뢰이즈 보다 아래 프랑스 북부 해변이야. 

 

The Battle of Poitiers was a major English victory in the Edwardian phase of the Hundred Years' War. It was fought on 19 September 1356 in Nouaillé, near the city of Poitiers in Aquitaine, western France

 

프와티예 전투. 프랑스 루이 6세 죽고 아들 장2세.가 자기 자식 둘이랑 잡히는게 이전투야. 저기서 부르고뉴 용감공 어린자식이 나중 부르고뉴 앙주가문 창업하는거고. 저게 전쟁 시작 30년 되서야. 저때 프랑스 가 끝난겨 이미. 저때 흑태자가 상대였걸랑. 얘 나이 26세.

 

흑태자 우드스탁 에드워드가 1376년에 죽어. 다음해 아부지 에드워드3세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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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ns commonly divide the war into three phases separated by truces: the Edwardian War (1337–1360), the Caroline War (1369–1389), and the Lancastrian War (1415–1453). Each side drew many allies into the war: local conflicts in neighbouring areas, which were contemporarily related to the war, including the War of the Breton Succession (1341–1365), the Castilian Civil War (1366–1369), the War of the Two Peters (1356–1369) in Aragon, and the 1383–85 crisis in Portugal

 

저 백년전쟁을 나누면. 시기별로. 잉글랜드 에드워드. 프랑스 찰스. 잉글랜드의 랭카스터 가문 헨리.

 

에드워드 전쟁. 에드워드3세와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애들 주도

캐롤라인 전쟁. 필리프6세의 아들 샤를 5세. 미친놈 딱지 샤를6세. 애드워드들 다음 캐롤라인. 찰스들.시대의 전쟁.

랭카스터의 전쟁. 흑태자 아들 리차드.가 왕권 갖고오려해. 정치를 못해. 랭카스터의 헨리.가 쿠데타로 리차드를 내몰고 얘가 왕을 해. 헨리4세.5세6세. 랭카스터 헨리들 시대의 전쟁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3세. 흑태자아들 리차드. 랭카스터 헨리4세.5세.6세.

프랑스는. 필리스6세. 장2세. 샤를5세.6세.7세.

 

해서 최후의 승자. 샤를 7세.가 승리자 딱지 받걸랑. 얘가 잔다르크.만나는 애고. 

저기서 다른 줄기로. 브레튼 계승전쟁. 카스티야 내전. 카스티야 내전. 카스티야 아라곤 피터들의 전쟁. 포르투갈 내전.

The War of the Breton Succession was a conflict between the Counts of Blois and the Montforts of Brittany for control of the Duchy of Brittany. It was fought between 1341 and 12 April 1365

 

노르망디 아래 브리타니 공국 후계자 전쟁. 프랑스가 지지한 쪽이 승리.

 

The Castilian Civil War was a war of succession over the Kingdom of Castile that lasted from 1351 to 1369. 

 

카스티야 내전. 프랑스.가 이기게 된 이유는. 프랑스가 지지한 쪽 애가 승리. 

 

The War of the Two Peters (Spanish: La Guerra de los Dos Pedros, Catalan: Guerra dels dos Peres) was fought from 1356 to 1375 between the kingdoms of Castile and Aragon. Its name refers to the rulers of the countries, Peter of Castile and Peter IV of Aragon.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두 피터 전쟁. 누가 이겼다 딱히 어렵지만. 어쨋거나 잉글랜드가 지원한 카스티야의 피터는 도중 사망. 프랑스 지원 아라곤 피터는 오래 생존. 프랑스 승.

 

The 1383–1385 Portuguese interregnum was a time of civil war in Portuguese historywhen no crowned king reigned. 

 

포르투갈 왕 후계자 끊기고. 카스티야 에서 자기들 꺼다 주장. 포르투갈 독립연합과 카스티야 전쟁. 잉글랜드는 당근 포르투갈 지원. 프랑스는 이전 지원한 카스티야애들 지지지. 이건 잉글랜드의 포르투갈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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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판세는. 장2세 포로 껀으로 해서리 잉글랜드 판세야. 에드워드 부자가 다 이긴 께임이야. 까롤링거 캐롤라인 샤를 들은 상대가 안됬어. 개다가 6세는 미친놈 딱지야. 더군다나 지들 나라에서 내전이야. 이게 

The Armagnac–Burgundian Civil War was a conflict between two cadet branches of the French royal family — the House of Orléans (Armagnac faction) and the House of Burgundy (Burgundian faction) from 1407 to 1435

 

아르마냑 부르고뉴 내전. 전쟁 후반전에 터진겨. 장2세 죽고 샤를5세 아들 샤를6세가 제정신이 아냐. 이때 두 가문이 오를레앙 과 부르고뉴 야. 부르고뉴의 겁없공이 오를레앙 루이.를 죽여. 조카뻘이라고 무시당하는겨 겁이 없어. 그 겁없공을 오를레앙애들이 죽여. 파리가 내전인겨 잉글랜드 애들이랑 전쟁중에.

 

아르마냑.은 오를레앙 루이가 죽고. 어린 공작이라서 얘를 스폰 하는. 아키탄 아래 애들땅이 아르마냑. 해서리 실재는 아르마냑과 부르고뉴가 싸우는겨.

 

자기 아부지 겁없공.이 죽어서리. 그 아들 현명공이.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서. 파리가 잉글랜드땅이 된겨. 여기에 입성하는 애가 헨리 5세야. 해서리 미친놈 샤를6세.의 딸과 결혼해. 프랑스랑 하나가 되겄다는거지. 이 아들이 헨리6세야. 

 

즉위식을 헨리6세가 먼저 하느냐. 샤를 7세가 먼저 하느냐. 

 

 

잔다르크 때메 샤를 7세가 왕관을 쓰는겨. 

 

In reaction to Charles VII's coronation as French King in Reims Cathedral on 17 July 1429,[2] Henry was soon crowned King of England at Westminster Abbey on 6 November 1429,[3] followed by his own coronation as King of France at Notre Dame de Paris on 16 December 1431.[3]

 

샤를 7세가 림즈의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했어. 헨리 6세가 그 소식을 듣고 잉글랜드 본토에서 대관식을 하고는. 파리 노트르담 에서 프랑스 왕 대관식을 한겨. 2년 후에.

 

그렇다고해서리 프랑스가 별거 없걸랑. 

 

After the death of Joan of Arc, the fortunes of war turned dramatically against the English.[78] Most of Henry's royal advisers were against making peace. Among the factions, the Duke of Bedford wanted to defend Normandy, the Duke of Gloucester was committed to just Calais, whereas Cardinal Beaufort was inclined to peace. Negotiations stalled. It seems that at the congress of Arras, in the summer of 1435, where the duke of Beaufort was mediator, the English were unrealistic in their demands. A few days after the congress ended in September, Philip III, duke of Burgundy, deserted to Charles VII, signing the Treaty of Arras that returned Paris to the King of France. This was a major blow to English sovereignty in France.[73] The Duke of Bedford died on 14 September 1435 and was later replaced by Richard Plantagenet, 3rd Duke of York.[78]

 

부르고뉴에 잡힌 잔다르크.를 잉글랜드애들이. 루엔. 노르망디의. 에서 사형판결에 화형을 해. 이때부터 먼가 분위기가 급반전. 잉글랜드는 걍 저기서 조약 맺아서리 기존 갖고 있는 땅에 조금만 더 하고 말믄 되걸랑. 헌데 잉글랜드 애들이 노르망디도 먹자. 칼레도 먹자. 아니다 다 먹자. 평화는 뭔 평화. 

 

부르고뉴의 현명공이 아차 한겨. 여서 변심을해 완전 잉글랜드 편이었던 애가. 

 

지금 현재 프랑스 왕은 헨리 6세랑 샤를 7세 둘 다야. 

 

현명공이. 왕은 샤를 7세 너다. 완전히 얘한테 손을 올려준겨. 그럼 당근 부르고뉴 애들도 이쪽으로 다들 붙어야 해. 부르고뉴 땅들이 넓어. 여기다 영지를 더 달라 해. 몇개 더 얹어줘. 하미지 난 빼줘. 해서 빼줘. 후대는 하미지 하던말던.

 

 

그리고 나서리 전세가 확 프랑스로 기운겨. 여기에 스콧 독립전쟁 하던 애들도 프랑스를 지원하러 오고.

 

 네개의. 후계자 전쟁 및 이베리아반도 전쟁에서도. 브리트니아 도 프랑스애들이 지원한 애가 이긴겨. 이 병력이 나중 프랑스를 지원해.

 

저기에다가. 저 이베리아 반도의 전쟁들. 중심이 카스티야 걸랑. 결정적으로 여기 후계자 전쟁에서 프랑스가 스폰 한 애들이 이긴겨.이 카스티야 아라곤 에 프랑스의 후원받은 애들이 산맥 너머 아키탄의 프랑스를 얘들이 육로와 해로로 지원을 하는겨. 막판 포르투갈내전에서 잉글랜드가 민 포르투갈애들은 멀리 있고 약해. 도움이 별로 안돼.

 

 

어차피 주요 전장터는 저 아키탄이야. 아키탄의 가스코뉴. 기옌. 

 

 

 

저 별개로 보였던. 딴 곳들의 내전들의 승리가. 운 좋게 프랑스 쪽 애들이 이긴게 재순겨 가만 보믄. 

 

저기에 부르고뉴 현명공의 변심이 한 몫 한거지만. 내부적으로 프랑스에선 부글부글 했겠지. 결국 현명공 다음 다시 용감공은 딸하나 달랑에 저땅이 딴애들한테 가서리. 갈가리 찢어진겨 부르고뉴는. 잔다르크의 저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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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 포르투갈 독립세력을 편을 든 잉글랜드.는 저때부터 포르투갈과 잉글랜드는 계속 동지가 돼. 세계대전에서도. 

 

 

프랑스.는 이겼지만. 이긴걸까.

 

잉글랜드는 졌지만. 진걸까.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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