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펜서 부자가 잉글랜드에서 로저 모티머.가 이사벨라와 에드워드3세.의 등에 업히서리 사지 찢어죽이는 형을 당하고 죽지만. 그리고 모티머 가 쫓겨나고 에드워드3세가 왕이 되지만 말야.
그래도 데스펜서 자식들은 잉글랜드에서 계속 팔리어먼트 진출하고 귀족 명맥을 이어가.
조선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 조폭들 이념을 이어서리. 저러면 십족을 멸하느니 고대로 배워서리 그 집안 씨를 말리걸랑. 이따위 짓들이 그 땅의 사람들을 다 죽이면서리 나중에 다 처먹히는겨. 외적이 쳐들어와도 사람이 없는거지. 그게 구한말이야.
이들은. 이 조선 핏줄들은. 칠백년째 저인겨. 지들 이념 이 아닌 상대는 다 죽여. 적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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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와 동전으로 열심히 모시거라. 예의 해대민서리.
김정은 배때기가 예의가 있습디다.
어허 저 자기 동료들 뿌리치고 머리 염색한 저 젊은년. 예의가 없어요 예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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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가래만 티나오는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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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yzantine civil war of 1321–1328 was a series of conflicts fought in the 1320s between the Byzantine emperor Andronikos II Palaiologos and his grandson Andronikos III Palaiologos over control of the Byzantine Empire.
비잔틴 내전. 비잔틴. 십자군 4차가 비잔틴오는게 서기 1200년 막 지날때야. 프랑크 랑 베네치아 애들이 땅 나눠먹고. 50년후에 팔라이올로고스.애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차지해. 비잔틴에 뿌리깊은 귀족이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왔을때 같이 온 애들이야. 이전 왕조. 콤네노이의 피도 섞였어. 눈깔 뽑힌 아부지에 그 아들이 십자군 초대했던 그 콤네노이 왕조. 없어지고. 공백 후에. 이 팔라이올로고스 왕조가 비잔틴을 지배해. 얘들이 2백년 하는거야. 끝까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메메드2세가 쳐들어오는 콘스탄티노플 함락때 끝까지 남아서리 참전하고 죽어.
할아버지와 손자 의 싸움이야.
Andronikos II Palaiologos (25 March 1259 – 13 February 1332)
Andronikos III Palaiologos (25 March 1297 – 15 June 1341)
안드로니코스 2세.와 3세. 생일이 같은 할배와 손자. 중간에 아빠가 문제여.
Michael IX Palaiologos or Palaeologus (17 April 1277 – 12 October 1320)
이것도 좀 디다봐야 하는데. 아빠 미카엘 9세. 랑 할배랑 공동황제야. 로마때를 이어가는겨. 땅 나눠서 관리하는거지. 이전엔 단독 황제였다가. 이때 다시 공동황제하는겨. 왜냐믄. 투르크야. 오스만이 티나와.
Anatolia in 1300
저때 아나톨리아. 오스만제국의 오스만 osman. 이 저때 니케아 옆에서 티나오는겨.
십자군 1차 1099 할때는 셀주크 투르크가 상대야. 아랍무슬림 우마이야.가 사산 제국 없애고 다음 압바스 아랍. 하는데. 이 압바스.는 이른바 칼리프 로 점점 퇴화되는겨. 교황이야. 속세는 술탄들이 다스리는겨. 술탄이 에미르.를 지방에 또 두고. 해서 칼리프.는 교권. 술탄과 에미르.가 막막 들어서. 여기에서 제일 큰 세력이 서기 천년 지나면서 셀주크 투르크 일 뿐인거야.
셀주크 투르크 들어서고 오른쪽 이란땅엔 화리즘 샤.가 세력이 쎄지고. 할때도 저 넓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이란 땅에는 자잘한 술탄 에미르 들이 있는겨. 얘들이 셀주크 니 화리즘샤 니 란 중앙에서 서로 통제가 잘 안돼. 얘들이 협업 잘 되었으면 십자군 국가들이 2백년 저리 없었걸랑.
십자군 4차가 비잔틴갈때가 서기 1200년이야. 성루이가 이집트가서 포로되는게 7차.야 이게 서기1250년. 아코함락이 1291년이야. 이걸로 십자군의 성과가 쫑 나는겨.
할때 저 땅에 십자군의 상대는. 셀주크투르크. 처음 백년에 다음 셀주크 투르크에서 장교였던 쿠르드족 살라딘 삼촌이 살라딘 데리고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서리 십자군이랑 같이 싸우자 하다가 조카 살라딘이 아예 시아파 파티마 왕을 암살하고 아유비드 왕조를 세우걸랑. 이 살라딘이 리차드랑 놀고. 3차. 4차는 비잔틴 가고. 6차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와서 살라딘 조카랑 또 잘 놀고 가고. 그 판 깬게 성루이9세고. 이때 살라딘의 아유비드 없어지고 무슬림 노예 맘룩 왕조가 서고
할때 저 땅은 이미 셀주크는 점점 짜지고 아래는 살라딘의 아유비드. 저 시리아땅과 아나톨리아땅은 걍 자잘한 술탄들이 있는겨. 얘들이 5차때 십자군 몰아낸거고.
그러다가 이젠 몽골애들 오는겨. 이걸 아래에서 뻗은 맘룩 애들이 상대하고. 몽골애들은 시리아 땅에 일칸국 저리 세운겨. 그 위엔 자잘한 술탄들 에미르 들이 들어선게 서기 1300년 이야. 이땐 십자군 국가 없어 레반트에. 이제 비잔틴만 남은겨.
Osman I or Osman Gazi (Ottoman Turkish: عثمان غازى,
translit.
ʿOsmān Ġāzī; Turkish: Birinci Osman or Osman Gazi; died 1323/4)
오스만 제국. 할때. 1299. 하걸랑. 이 시작이 오스만.이야
According to later Ottoman tradition, Osman's ancestors were descendants of the Kayı tribe of Oghuz Turks.[9] The Ottoman principality was just one of many Anatolian beyliks that emerged in the second half of the thirteenth century.
조상들이 오구즈 투르크.의 부락이었어. 흑해 위에 술탄의 도시야. 아나톨리아로 와서리 베일리크. 투르크 애들의 술탄도시들을 베일리크. 하는겨. 짱이 베이. 술탄의 투르크말이야. 술탄은 아랍말. 이제 이슬람을 투르크 애들이 주도하는겨 여기서. 저 자잘한 투르크애들에서 오스만 부락이 저길 점점 확장한거지. 이 투르크.는 이전에 돌궐국 2백년 하다가 당나라에 망하고 동서로 흩어진거고 서쪽으로 간애들은 불가리아 자리잡고. 러시아땅에 볼가 불가리아. 그러다 킵차크 칸국에 몽골애들에게도 스며있다가. 그중에 한 투르크.가 돌궐국 이후 6백년 만에 나온겨 이게.
아 투르크 들이 짐이 이따위로 한글로 지들 역사 설명해 주는걸 고마와해야 할틴데 .
해서리. 비잔틴에서 공동황제.가 부자가 서는겨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저때 아들이 미카엘 9세인겨. 서론 기네.
Area of the Ottoman Beylik during the reign of Osman I.
얘가 하필 지 나라를 세워도 말이지. 비잔틴 코앞에서 세운겨. 이게 천운이야 어찌보믄. Nicaea 니케아. 니케아 공의회할때. 그리고 니코메디아. 바로 건너서 콘스탄티노플이야.
The Battle of Bapheus occurred on 27 July 1302, between an Ottoman army under Osman I and a Byzantine army under George Mouzalon. The battle ended in a crucial Ottoman victory, cementing the Ottoman state and heralding the final capture of Byzantine Bithynia by the Turks.
바페우스 전투. 1302년. 이게 역사적인 전투야. 짐이 규정하는겨. 오스만이 처음으로 서방애들이랑 붙는겨 이게. 이때부터 이놈의 오스만이 1차대전까지 자그마치 6백년을 전쟁 만 하는겨. 끝물엔 아르메니아인들 150만 대학살 하는거고. 그게 터키야. 위대한 투르크 민족 . 하민서리.
저 체코도 말이지. 보헤미아 의 체코. 자유의 프라하.는 보헤미아야. 독일 바바리아 에서 넘어와서리 더 트인 사람들이야. 종교전쟁 막판의 그 삼십년 전쟁의 시작이 보헤미아야. 오른쪽 모라비아에서 넘어온 슬바브들이 애들만 까다가. 위대한 슬라브여! 이 하민서리 역시 역사 주작질 하면서리 오 귀한 오래된 슬라브어로된 시가 있었슈! 우리 슬라브가 위대해유!! 이 민족 해대는 들의 공통점이야 역사 주작질. 저거 완전 조작이걸랑 조작. 저러면서 프라하에 슬라브 빼고 다 나가라. 저게 지금 들의 체코야. 저 체코가 보헤미아의 체코였으면 영독프 못지않은 음청난 나라가 되었을껴 저때.
적폐 보헤미아들 다 나라가 .
참 세상에 들 천지야.
저 바푸스 전투.의 현장이 니케아 와 니코메디아 의 사이야. 니코메디아가 함락이 되면 바로 항구야. 위험한겨 비잔틴 입장에선. 아들 황제가 저걸 담당했는데 저기서 아주 대패를 한겨.
해서 고용하는 용병들이 바로 카탈린 용병이야. 머 저건 머여 하겄지만.
The Catalan Company or the Great Catalan Company was a company of mercenaries led by Roger de Florin the early 14th century and hired by the Byzantine EmperorAndronikos II Palaiologos to combat the increasing power of the Turks. It was formed by almogavar veterans of the War of the Sicilian Vespers, who had remained unemployed after the signing in 1302 of the Peace of Caltabellotta between the Crown of Aragon and the French dynasty of the Angevins.
아 음청나 증말. 용병의 시대걸랑. 컴퍼니. 하면 무리 집단이야. 카탈로니아 에서왔어. 아라곤의. 이들이 시칠리아 만종.때 프랑스 앙주 애들을 몰아낸겨. 해서 앙주는 나폴리 킹덤 하나만 갖는거고 시칠리아는 아라곤이 먹어. 프리드리히2세 황제의 엄마 핏줄 핑게로.
시칠리아 먹고. 여기 파견된 카탈로니아 사병들이. 비잔틴을 가는겨. 투르크 좀 막아줘유. 십자군이유 이겄두. 알모가바르. 보병들이 쎄. 기사들을 따라다니는 알모가바르. 이들이 저 오스만 애들을 상대하는겨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애들이 당근 안되지 . 이들만 여기 계속 있었으믄 지금 오스만은 없어.
After two years of victorious campaigns against the Turks the indiscipline and the character of a foreign army in the heart of the Empire were seen as a growing danger, and on April 30 1305 the emperor's son (Michael IX Palaiologos) ordered mercenary Alans to murder Roger de Flor and exterminate the Company in Adrianópolis (modern Edirne) while they attended a banquet organised by the Emperor. About 100 cavalry men and 1,000 infantrymen perished
오스만 애들 포함 저땅에 투르크애들에 연전연승이걸랑. 미카엘 9세 이가 쪽팔린겨. 그리고 위협적인겨.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고서리. 죽이는겨. 100명의 기사와 1천명의 보병들이 죽은거지.
이때부터 카탈란용병들 남은이들은 비잔틴과 싸우다가 흩어지고 그리스 가서리 프랑크애들 용병하다가 끝난겨.
저때 카탈란 컴퍼니.가 안 당했으면. 오스만은 없어.
비잔틴 들은 개들이야. 저건 유너크 와 하렘을 둔 모든 들의 공통점이야 저게.
저따위 비잔틴이 후지다고 아예 언급안한다고 시오노 나나미 썅년 해대는게 이땅바닥 개머저리 들인거고.
머 아는게 있나.
Byzantine Empire and surrounding territory in 1307, shortly before the First Palaiologan Civil War
저당시 왼쪽은. 불가리아 2차 제국.에 세르비아킹덤이걸랑. 아래는 프랑크 애들이 나눠먹은 그리스 영지들이고. 비잔틴은 트라키아 땅 마케도니아 땅에 필로폰네소스 맨 아래 땅에 아나톨리아의 에페수스 주변과 니케아 주변이 다야. 저걸 막아준게 카탈란 컴퍼니였어. 저 서진을.
비잔틴이 문제가 또한 불가리아걸랑 위에. 카탈란 용병들에게 불가리아도 막아달라고 하기도 해. 카탈란 짱이야 진짜. 할배 황제가 불가리아 를 싫어해.
저 카탈란 용병을 배신한 아들 미카엘.이 자기 아들을 불가리아 딸과 결혼을 시켜. 할배가 삐쳐서리 결별해. 아들은 죽어. 그 손자.의 땅까지 다 몰수해.
손자가 할배에게 대든겨. 손자편은 당근 불가리아. 할배는 세르비아를 델꼬와. 손자가 이겨.
그게 저 비잔틴 내전이야.
쉼.
1500년 된 ‘영원한 형제의 나라’ 한-터키 정상회담
고구려 때부터 돌궐과 접촉…6·25때 미·영 이어 최다 병력 파견김인영 기자승인2018.05.02 17:05
문대통령은 앞서 지난해 12월 6일 비날리 을드름 터키(Binali Yildirim) 총리를 청와대
에서 접견한 자리에서 "한국 국민들은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반갑게 생각하고 있
다"고 말했다. 당시에 청와대는 터키가 6.25전쟁 때 우리나라에 2만여 명 군사를 파견
한 혈맹국이자, 고대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었던 오랜 인연이 있는 나라라고 소개했다
아르메니안들을 150만명 죽인 터키.가 형제의 나라라서 좋겄다 새꺄 ㅋㅋㅋ
일본는 적폐. 150만 죽인 투르크는 형제.
참 대갈빡 구조가 단순해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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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man I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a local religious leader of dervishes named Sheikh Edebali, whose daughter he married. A story emerged among later Ottoman writer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men, in which Osman had a dream while staying in the Sheikh's house.[17] The story appears in the late fifteenth-century chronicle of Aşıkpaşazade as follows:
오스만의 꿈. 이런얘기가 재밌는데. 저건 주작이 아니라 꿈이 맞아. 꿈이란건 상상을 초월해. 꿈을 꿔봐서 아는데 참 이 꿈이란게 시안야릇하단 말이지.
오스만이 데브리쉬. 금욕 영지주의자야. 이슬람 종교리더랑 친구였대. 얘네집에서 자다가 꿈을 꾼겨.
그 친구 이슬람 믿는 애의 가슴에서 달이 뜨더니 오스만 가슴으로 들어왔다. 오스만의 배꼽에서 나무 하나가 티나오더니 그 그림자 온세상을 감쌌다. 그 그늘아래엔 산들이 있었고 그 각각 산들에서 물들이 흘러 나왔다. 사람들이 그 흐르는 물을 마시고 정원에 물을 주고 물줄기를 만들기도 하더라. 오스만이 깨고는 친구에게 꿈이야기를 했다. 친구가 말하길. 오스만이여 축하함둥. 신이 당신과 당신 자식들에게 제국의 임무를 주었슴둥. 내 딸 가져가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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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오스만 애들이 6백년 동안 전쟁질을 한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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