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ranco-Flemish War (also called Flanders’ War of Liberation) was a conflict between the Kingdom of France and the County of Flanders between 1297 and 1305.
프랑스 플레미쉬 전쟁. 플란다스. 플랑드르. 플랑드르 라 하자. 플란다스의 개.가 입에 붙어서리.
フランダースの犬 Furandāsu no Inu 플란다스 노 이누. 쟤들 발음을 그대로 쓴 거걸랑.
여기가 베르됭 조약. 삼형제 땅나누기 당시. 여긴 서쪽 대머리샤를 땅이야.
Green: Lower Lorraine after 977
전쟁에서 진. 장남 로타르.가 가운데 받은 땅은 아래 부르고뉴. burgundy 영어 버건디. 버건니. 불어. Bourgogne 를 부르고뉴. 쓰는데. 부르고니. 가 더 정확하겄다 . 하튼 부르고뉴. 쓰니 부르고뉴. 하자. 부르기니.를 밀고 싶지만.
수에비아. 스와비안 접하는 스트라스부르. 저게 라인강이야. 저 라인강 따른 지역이 알사스. 접해서리 위가 로렌. lorrain. 저걸 두개로 나눠. 고지대 로렌 저지대 로렌. upper lower
고지대 저지대 와 남북 방향을 헷갈리믄 안돼. 우리넨 고지대 하믄 걍 북쪽 저지대 남쪽. 이리 박혀있는데 그게 아니다 잉? 이딴거 까지 말해야 하냐 .
이집트도 그거 쪽바리 번역 그대로 상이집트 하이집트 번역 잘못된겨. 상하 이르믄 북쪽 남쪽 이리 인식이 되걸랑. 고지대 저지대 똑같이 저 영어의 어퍼 로워. 를 상하 이 번역. 고지대 저지대 고 저 로 하던가. 유럽애들 이야긴 고지대 저지대 이 이집트는 상하 이.
일본가 처음에 쟤들 베낄때. 막막 급해서 번역하니까니 거기 번역 오류가 많아. 그걸 다시 생각해서 고쳐 번역할 줄 모르고. 그걸 그대로 여전히 쓰고 .
대표적인 단어가. 민주. 라는 단어여.
일본들이 번역해서. 생각의 천장을 만들었걸랑.
저 일본들이 모~든 번역을 한문으로 해서리 지금 한글발음으로 쓰고 있는데. 그러면서 일본 무시캐 일본 나퍼 이 밖에 할줄 모르는.
발음도 다 일본들이 가타가나로 번역한걸 그걸 고대로 지금도 쓰는겨 저걸. 가타가나 너무 쉽걸랑 한글발음과 똑같으니.
애들이 말야. 그래서. 대갈빡에. 든게 없어. 일본에게 고마와 하던가 그러면. 그따위것도 없어.
생각을 전혀 지들 대갈을 스스로 굴린 적이 없어 조선건국 이래 육백년 지나 칠백년 접어들면서
그러니 저분들이 정치놀음 하면서 정의 민주에 눈을 부리고 이념놀이에 환장하면서 나라가 그지가 되는그지.
남북.은 방위야. 고지대 저지대.는 땅의 높고 낮음이야 쟤들 upper lower는. 저게 달라. 이집트는 고지대가 남쪽이야. 유럽이 또한 고지대는 무조건 남쪽. 하믄 안돼.
고지대 부르고뉴는 북쪽이고 저지대부르고뉴는 남쪽이야. 산맥에 따른 그 지역 이름마다 다른겨.
알고있었다구?
.
플랑드르.는 저기서 저지대 로렌.의 왼쪽이야. 지금 벨기에 북부지방. 저걸 가르는건 강.이야.
The Scheldt (/ʃɛlt/, French: Escaut
[ɛsko], Walloon: Escô, Dutch: Schelde
셸트강. 불어 왈룬어 에스꼬. 해서리 에스꼬 강. 이라해
지금 벨기에.를 크게 저 셸트(에스꼬)강. 아래 뫼즈강. 해서리 삼등분하는겨. 원래는 저 위가 플랑드르였어. 저게 점점 내려온건데.
저 오른쪽이 작센. 색슨.이고 그 왼쪽이 머랬냐. 프랑크족이 있던데라 했잖냐. 기억나냐. 작센과 접하는 애들이 프랑크의 살리안족. 그 가름선이 아이셀강.
이 프랑크들이 작센에 있다가 아이셀강 건너서리 프랑크 하다가 클로비스가 통일할때 처음 정복하는 곳이 저 플랑드르겄지.
베르됭 할때 저기 플랑드르는 셋째이자 배다른 아들 대머리샤를 꺼였어. 즉 프랑스 관할이야.
얘들이 또한 쎄. 바이킹들이 항상 처들어오고 그러면서도 해상무역 하면서 나름 풍부하게 살아. 독립성이 쎈겨 애초에 프랑스 관할 이지만. 해서 프랑스 왕이 쳐들어 가는겨 그 문제의 필리프 4세. 저주받은 왕들의 시작.
애초의 문제는 성인 딱지 붙은 루이 9세걸랑. 이딴 한테 성인딱지 붙이니. 넘어가고.
지들 십자군 국가를 애초에 뿌리부터 다 박살을 낸 를 위대한 성인 .
저 프랑스 애들은 심리적으로 좀 디다볼 필요가 있어. 영프독에서 제일 후진 이유가 있어 재들이. 환상속에 사는 들이걸랑 또한. 해서 위선이 또한 득실거리지. 그게 혁명 하는거걸랑. 육팔이 머 대단한듯이. 나치 나가고서리 거 사람들 인민재판해서리 누군 오육만 누군 십만 죽였다 하고 저게 먼 들 도 아니고. 저따위 나치 청산이 대단하다고 또 한글로 받아서리 대고. 쟤들도 그때 그짓 한거 쪽팔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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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하면서 플랑드르가 항복해. 합의금이랑 접경에 도시 세개 주고 끝나. 얘들은 당시 오른쪽에서도 홀랜드랑 그 아래서 공격들어오걸랑.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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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저 전쟁 후 70년지나서 부르고뉴 가문에 들어가는 거걸랑. 이놈의 부르고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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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of the three parts in the old Kingdom of Burgundy, ca 900. Upper Burgundy Lower Burgundy Duchy of Burgundy of Richard the Justiciar
부르고뉴. 가 베르됭 이전에 저 프랑스의 아키탄 오른쪽의 저 남부 전체였걸랑. 프로방스 포함하고 지금 스위서 서쪽해서리. 오른쪽 끝에 뿔형상 꺾이이는 라인강 접하고. 바로 위가 알사스.
로타르.랑 대머리샤를 이랑 나눌때 저길 The Saône 손강.을 중심으로 왼쪽 위 작은 땅은 대머리샤를이 갖는겨. 다 안주는거지. 이겼으니까.
해서 부르고뉴 공국 duchy.는 서프랑키아. 프랑스 왕 관할 영지야.
오른쪽과 남쪽의 고지대 저지대 부르고뉴.는 로타르의 자식들대에 고지대 저지대로 나뉘는겨. 로타르가 막내에게 줬는데 막내가 죽어. 로렌 땅 이태리땅 갖은 형제들이 막내꺼 나눠가져.
Then in 869 Lothair I's son, Lothair II, died without legitimate children, and in 870 his uncle Charles the Bald and Louis the German by the 870 Treaty of Meerssenpartitoned his territory: Upper Burgundy, territory north of the Jura mountains(Bourgogne Transjurane), went to Louis the German, while the rest went to Charles the Bald. By 875 all sons of Lothair I had died without heirs and the other Burgundian territories were held by Charles the Bald.
첫째 형 로타르.가 둘째 게르만루이보다 열살 많아. 셋째 대머리샤를은 루이형보다 스무살정도 어려.
로타르가 먼저 죽는겨. 루이랑 샤를은 쌩쌩해. 로타르의 자식들이 막내도 죽고 둘째도 죽어. 저땅을 삼촌들인 루이랑 샤를이 나눠갖아. 그게 메르셍 조약이야. 870년.
고지대 부루고뉴,는 동쪽 게르만루이가 갖고. 저지대 부르고뉴.는 서쪽 대머리샤를이 갖아.
In the confusion after the death of Charles' son Louis the Stammerer in 879, the West Frankish count Boso of Provence established the Kingdom of Lower Burgundy (Bourgogne Cisjurane) at Arles. In 888, upon the death of the Emperor Charles the Fat, son of Louis the German, Count Rudolph of Auxerre, Count of Burgundy, founded the Kingdom of Upper Burgundy at Saint-Maurice which included the County of Burgundy, in northwestern Upper Burgundy.
대머리 샤를의 아들이 죽어. 이때 카운트. 백작이 프로방스에서 저지대 부르고뉴 킹덤을 세워. 879년
게르만 루이의 아들 뚱땡이가 죽어. 동쪽의 카운트. 백작이 하사받은 부르고뉴 카운트 더하기 고지대 부르고뉴 킹덤을 세워. 888년
즉 핏줄 상관 없는 애들이 독자적인 킹덤들을 서로 세운겨 위아래 부르고뉴에서. 여기에 작은 부르고뉴 공국.은 포함안되는거고.
In 933, Hugh of Arles ceded Lower Burgundy to Rudolph II of Upper Burgundy in return for Rudolph relinquishing his claim to the Italian throne. Rudolph merged both Upper and Lower Burgundy to form the Kingdom of Arles (Arelat). In 937, Rudolph was succeeded by his son Conrad the Peaceful. Inheritance claims by Hugh of Arles were rejected, with the support of Emperor Otto I.
저지대 부르고뉴 킹이 고지대 부르고뉴 킹에게 들어가. 이게 아를 킹덤.이야 937년. 그리고 오토1세 에게 들어가는겨. 해서 이때부터 이 위아래 부르고뉴.는 신성로마제국 관할. 부르고뉴공국.은 여전한 프랑스왕 관할.
933–1378. 저 아를 킹덤.은 4백년 가는거야.
저 위아래 부르고뉴 킹덤은 점점 조각조각 나는겨. 아래 프로방스. 오른쪽 스위스도 연합 독립하는거고. 저 막바지에.
Between the 11th century and the end of the 14th century, several parts of Arelat's territory broke away: Provence, Vivarais, Lyonnais, Dauphiné, Savoy, the Free County of Burgundy, and parts of western Switzerland
여기서 나중에 사보이 공국.이 분리되서 나와. 이 사보이 공국.이 나중 이탈리아 킹덤 세우는 애들이야.
저때 부르고뉴 카운티. 백작령.
Duchy (left) and County (right) of Burgundy in the 14th century
왼쪽은 베르됭 때 부터 있던 프랑스의 공작령.이고. 위아래 부르고뉴.는 다 떨어지고 저 원래의 부르고뉴 백작령. 이름으로 남은겨. 이 백작령은 신성로마제국 관할이야. 전혀 달라.
해서 지금 프랑스의 부르고뉴 레종. 이 저 두개 합한 걸 지금 부르고뉴 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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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부르고뉴 가문이. 저 두개를 합할때부터. 이게 골때리는건데.
쉼.
저걸 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서 보는건데. 저 부르고뉴가 유럽사의 중심 중 하나야. 저걸 근원적으로 이해해야해서 그런데.
원래 부르고뉴.는 그 부르고뉴 이름난 애들이 주인이 아니었어. 여기도 자식이 끊긴겨. 이걸 받는겨. 발루아 왕조 애들이.
여기부터 백년전쟁이 얽히고 여기서 종교전쟁의 시작이자 근대 유럽의 시작이야 여기가.
The Hundred Years' War was a series of conflicts waged from 1337 to 1453 by the House of Plantagenet, rulers of the Kingdom of England, against the French House of Valois, over the right to rule the Kingdom of France.
백년전쟁이 1337년부터.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6세. 발루아왕조의 시작이야. 발루아애들이 왜 프랑스 갖느냐. 이사벨라 영국여왕 내꺼다. 필리프 4세의 딸. 필리프 4세의 저주의 시작이야. 그 시작은 성루이9세 할배고.
필리프 6세 다음이 장2세야.
John II (French: Jean II; 26 April 1319 – 8 April 1364), called John the Good(French: Jean le Bon), was a monarch of the House of Valois who ruled as King of France from 1350 until his death.
Battle of Poitiers[edit]
In 1355, the Hundred Years' War flared up again. In July 1356, Edward, the Black Prince, son of Edward III of England,
저 장2세 왕이. 프와티예 전투에서. 일명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잡히는겨. 자식들이랑. 쪽팔리지.
이 장2세의 자식들이.
Charles V of France
Louis I, Duke of Anjou
John, Duke of Berry
Philip II, Duke of Burgundy
저때 같이 잡힌 자식이 루이1세. 필리프2세. 잉글랜드까지 가서 갇혀.
왕을 풀어줘. 루이만 남기고. 필리프2세 는 세살 어려서 같이 보내줘. 프랑스 가서 돈 모아서리 보내라 그러면 아들 루이 보내주겠다.
장2세랑 어린 필리프만 델꼬 프랑스를 가는겨.
헌데 아들 루이1세가 감옥에서 탈출을 해. 이 소식을 들은 아빠 장 2세.
On 1 July 1363, King John was informed that Louis had escaped. Troubled by the dishonour of this action, and the arrears in his ransom, John did something that shocked and dismayed his people: he announced that he would voluntarily return to captivity in England. His council tried to dissuade him, but he persisted, citing reasons of "good faith and honour." He sailed for England that winter and left the impoverished citizens of France again without a king.
저 아들. 우리네 프랑스를 더렵혔다며. 욕해.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다시 잉글랜드로 가. 사람들이 말려도 안들어. 런던 사람들이 멋진 프랑스 왕이시여. 약속을 지키는 왕이시여. 오히려 환대하는거야. ㅋㅋㅋㅋ. 헌데 저기서 병으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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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할라는게 아니라.
해서 첫째는 다음 왕 샤를 5세 인데. 얘다음에 샤를 6세 미친놈 딱지에 마누라는 바람을 폈네 안폇네. 자식이 남의 자식이네 해서리 그 자식이 샤를 7세고. 대관식도 못하다가 잔다르크 나오는건데.
저때 네번째 아들이 필리프2세. 같이 흑태자에게 잡혔던.
Philip the Bold (French: Philippe le Hardi, Dutch: Filips de Stoute; 17 January 1342 – 27 April 1404, Halle) was Duke of Burgundy
일명 용감공 필리프. 걸랑. 얘가 부르고뉴.의 그 문제의 시작이야.
이전에 부르고뉴 공작령의 가문 핏줄이 끊겼어. 딸만 남았는데 그 딸이 프랑스왕 장2세.의 부인이야.
필리프가. 아빠왕한테 엄마가 가져온 저 부르고뉴 땅을 주세요. 하는겨. 원래 투렌땅 줄라 했걸랑. 프와티에 전투에서 같이 있다가 포로된 경험도 있고 나름 잘 싸웠고. 해서리 저걸 줘.
저때부터 부르고뉴 공작령은 발루아 왕조 땅이 된겨. 쎈겨. 왕이 아빠고. 형이 다음 왕이고 그 자식들이 계속 왕이야. 부르고뉴 가 실세로 등장을 하는겨 역사에.
Margaret III (13 April 1350 – 16/21 March 1405) was the last Countess of Flanders of the House of Dampierre, as well as Countess of Artois and Countess of Burgundy (as Margaret II). She was the only surviving child and heir of Louis II, Count of Flanders (1346–1384) and Margaret of Brabant.[1]
이 사람이 19살 아가씨 마가렛 3세를 부인으로 맞는겨. 이때 마가렛 3세. 플랑드르 아르트와 부르고뉴 백작부인이야. 아빠가 죽고 아들이 없어. 딸이 저 저지대 땅들이랑 부르고뉴 백작령을 갖고 오는겨.
저기서 마가렛이 갖고 오는 부르고뉴는 백작령이야. 저 지도의 오른쪽. 아를 킹덤에서 남은 고지대 부르고뉴.
아르트와.는 플랑드르 바로 왼쪽이야.
필립 용감공이. 부르고뉴 공작령을 받고 결혼으로 옆의 부르고뉴 백작령에 저 북쪽의 저지대 플랑드르와 아르트와.를 갖은 실세가 된겨.
John the Fearless (French: Jean sans Peur ; Dutch: Jan zonder Vrees; 28 May 1371 – 10 September 1419)
용감공 아들이 겁없공 장.이야 왕 후계자 도팽.인 나중 샤를7세가 중재해서리. 오를레앙이랑 대화테이블 주선하는 길에 가다가 다리위에서 암살당해. 해서 부르고뉴 가문은 더 발을 빼고 잉글랜드에 붙어.
Philip the Good (French: Philippe le Bon; Dutch: Filips de Goede; 31 July 1396 – 15 June 1467) was Duke of Burgundy as Philip III from 1419 until his death
아들 현명공 필리프. 얘가 잔다르크 잡아서리 잉글랜드로 보내는 애인데. 얘때 땅을 최고로 넓히는겨.
백년 전쟁 막바지걸랑.
He incorporated Namur into Burgundian territory in 1429 (by purchase from John III, Marquis of Namur) and Hainault and Holland, Friesland and Zeeland in 1432 with the defeat of Jacqueline, Countess of Hainault, in the last episode of the Hook and Cod wars. He inherited the Duchies of Brabant and Limburg and the Margraviate of Antwerp in 1430 on the death of his cousin Philip of Saint-Pol and purchased Luxembourgin 1443 from Elisabeth of Bohemia, Duchess of Luxembourg. In 1456, Philip also managed to ensure his illegitimate son David was elected Bishop of Utrecht and his nephew Louis of Bourbon elected Prince-Bishop of Liège.
It is not surprising that in 1435 Philip began to style himself the "Grand Duke of the West".
나무르. 플랑드르 왼쪽의 아르트와.의 아래야. hainault. 에노. 플랑드르 아래 넓어. 홀랜드. 저 위쪽. 프리즐랜드. 질랜드. 네덜란드 땅까지 다 갖는겨. 저기 훅앤콕 전쟁. 얘들 내전이걸랑. 전쟁 분위기에 껴서리 힘 또는 돈으로 넓힌겨. 브라반트 림부르크. 안트베르프. 저지대 땅 대부분을 확보한겨 이인간이.
더 골때는건 룩셈부르크. 여긴 여자야. 이 여자가 삼촌이 담보로 해서 돈을 빌렸걸랑. 그걸 안갚아. 해서 이여자 땅이 된건데. 이 여자도 점점 돈이 말라. 자식은 없어. 현명공 필리프에게 판겨. 판건지 그냥 준건지 몰겄는데. 맘 변할까봐 이가 이 공작부인을 내쫓아. 룩셈부르크 까지 얘 땅이 된겨.
Philip's court can only be described as extravagant. Despite the flourishing bourgeois culture of Burgundy, with which the court kept in close touch, he and the aristocrats who formed most of his inner circle retained a world-view dominated by knightly chivalry.
이 필리프일때 저 북쪽의 저지대 땅들에 더하여. 후원 페이트론 도 최고야. 최고의 인너서클을 만들고. 귀족들로 북적북적 대고.
아빠가 암살당하고. 그 반감이 자기만의 왕조를 만들려 한건가.
Charles the Bold (also translated as Charles the Reckless) [1] (French: Charles le Téméraire, Dutch: Karel de Stoute, 10 November 1433 – 5 January 1477),
저 현명공의 아들 용감공 샤를. 때의 땅이야. 저 색칠땅이 다 이 부르고뉴 집안꺼야. 저게 딸 메리.에게 가서리. 메리가 시집 간 합스부르크 집안땅이 되는겨 저게.
처음의 용감공 필리프가. 아빠 왕한테 받은 해가 1363년이야. 아빠는 다음해 런던가서 뿌듯 하다 죽은거고. 그이후부터 겁없공 현명공 용감공. 사대 백년 걸쳐서리 용감으로 되돌아와서리 이룬 땅이야.
저게 나중에 골치아프게 되는데.
해서 저 부르고뉴의 메리.가 시집가기 전을. 저 저지대를. 부르고뉴 네덜란드. 하고. 시집가고서리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그 다음에 종교전쟁이야. 팔십년전쟁. 네덜란드 공화국이 위에서 서. 그 아래 플랑드르 이하는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네덜란드 하다가 벨기에.가 되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현재인 킹덤이 되는데.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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