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eaty of Verdun, signed in August 843, was the first of the treaties that divided the Carolingian Empire into three kingdoms among the three surviving sons of Louis the Pious, who was the son of Charlemagne. The treaty, signed in Verdun-sur-Meuse, ended the three-year Carolingian Civil War.
베르됭 조약. 유럽전쟁사. 유럽사.의 제일 문제는. 그 기원은 이 베르됭 조약이야.
아 이 이야기 안할라다가 해드리는건데 짐께서. 구찮걸랑 이거.
이걸 그 뿌리부터 완벽하게 이해시킬 분은 짐밖에 없어서리 문젠데.
잘 따라오도록 해. 이게 이해되야 저 복잡한 듯한 유럽 이야기들이 제대로 대갈빡에 처들어오걸랑.
샤를 마뉴의 손자. 세명이서 나누는겨. 서기 843년.
일단 용어정리 및 인간정리. 이전 썰은 대충했지만 말야. 더 드가면 빠나나덜 대갈빡 뽀개질듯해서리.
샤를 마뉴.가 다 묶었지만. 이 사람은 할배가 일군 걸 걍 다듬은겨.
Charles Martel (c. 688[2] – 22 October 741)
샤를 마르텔
Charlemagne (/ˈʃɑːrləmeɪn/) or Charles the Great[a] (German: Karl der Große, Italian: Carlo Magno; 2 April 742[1][b] – 28 January 814),
샤를마뉴.
저 둘을 헷갈리는데. 어딘 보믄 샤를 마르텔이 샤를마뉴야 .
전혀 달라. 샤를 마뉴.는 샤를 마르텔.의 손자야.
지금 저 프랑스 독일.은 샤를마뉴.가 아니라 샤를 마르텔.이 만든겨. 그 초석을 다진건.
클로비스의 메로빙거왕조가 로마 이후 삼백여년 통일하면서 영지들 나눠주면서 이어가다가 막판에 분열되면서 내전을 하걸랑. 여기에 무슬림들이 쳐들어오는겨 또. 스페인땅 점령한 우마이야. 압바스에 쫓긴.
저 내전하면서 무슬림. 무어족. 바다건넌 북아프리카애들.을 쳐부슨게 샤를 마르텔.
Charles Martel (en latin : Carolus Martellus ; en allemand : Karl Martell)
이 사람을 독어로는 카를 마르텔. 라틴어로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The Battle of Toulouse (721) was a victory of an Aquitanian Christian army led by Duke Odo of Aquitaine over an Umayyad Muslim army besieging the city of Toulouse
툴루즈 전투. 툴루즈.는 피레네 산맥 넘어에 바로 있어. 당시 아키탄지역. 아키탄은 나중 위로 가. 넘어가고. 이건 아키탄 사람들이 넘어오는 무슬림들 물리친거고. 샤를 마르텔은 여기 참전한게 아냐. 이때 아키탄은 프랑크와 떨어진 독립국이야.
The Battle of Tours (10 October 732)[17] – also called the Battle of Poitiers and, by Arab sources, the Battle of the Palace of the Martyrs
투르 전투. 프와티에 전투. 무어족이 더 쳐들어온겨. 투르. 프와티에 는 프랑스 중부 넘은 지역이야. 이게 무슬림이 피레네 넘어온 마지막 전투야. 저 투르 전투.를 샤를 마르텔.이 이기는겨. 얘때메 유럽이 이슬람이 안된겨. 고마와야 해. 이 샤를 마르텔 없었으믄 지금 세상은 이슬람 세상이 된겨 이게. 아 슬람이 무셔 .
해서 카롤링거 왕조. 할때 샤를.의 스페니쉬걸랑. 찰스. 샤를.이야 찰스의 자식. 찰스의 자식할때 찰스.는 샤를마뉴.가 아니라 샤를 마르텔.이야.
피펭가문.과 아눌핑가문.의 합이 카롤링거 왕조. 시작은 샤를 마르텔.인데.
저 두개 가문이. 프랑크 메로빙거왕조의 중앙관료. 와 교회 권력의 중심이야.
샤를 마르텔의 할아버지. 안세기젤. ansegisel. 이 피펭가문.의 피펭 디 엘더.의 딸 성녀 베가.랑 결혼을 해. 해서 이 두가문이 합치는겨. 그 손자가 샤를마르텔.이고 카롤링거 시작인데.
문제는. 저 카롤링거가 메로빙거 의 핏줄 이냐 아니냐 걸랑.
일단 저 피펭가문은 메로빙거 와 상관이 없어.
아눌핑가문 시작인 아눌프 주교가. 메로빙거 클로비스의 핏줄이다. 아니다. 썰이 분분해. 걍 메로빙거 이은걸로 봐 . 헌데 누구는 저 위의 엄마핏줄이 메로빙거 시작 클로비스 1세의 손녀라 하는데 그 손녀는 자식이 없었다 해서리. 전혀 상관 없다 하는 것도 있어.
걍 카롤링거는 메로빙거야. 다 그노미 그노민걸로 쳐. 메로빙거를 이은거여야 해. 그래야지 돼. 왜냐믄 짐이 예전에 그랬다 했걸랑.
하튼 그래서. 카롤링거가 저리 섰는데. 저 집안 시작이 주교.야. 그리스도야. 해서 샤를마뉴도 그리스도 인겨.
샤를 마뉴 자식이 열서넛 돼.
- Pepin the Hunchback
- Charles the Younger
- Pepin of Italy
- Louis the Pious
그중에 적법한. 즉 교회에서 인가받아서리 정식 부인 뱃속에서 나온 자식. 에서 살아남은 자식.
첫째 피펭 pepin 은 곱추야. 얘가 샤를마뉴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게 발각이 돼. 사형선고를 받아. 아비가 감형을 시켜서리 머리깎아서리 수도원에 처 넣어. 거기서 죽어.
샤를 더 영거. 피펭 오브 이탈리. 루이 더 피우스. 샤를 피펭 루이. 이 셋은 한배에서 나온 자식이야. 곱추 피펭은 엄마가 달라.
곱추 피펭.을 수도원에 처넣고. 샤를마뉴.는 로마에 가서 황제관을 써. 그리고 장남 샤를에겐 프랑크왕. 둘째 피팽은 이탈리아 왕. 막내 루이.는 아키탄왕. 으로 지명해.
헌데 장남 샤를.이 쇼크로 죽어. 샤를마뉴는 이후 삼년후에 죽는거고. 오래 살아 칠십이 넘어.
둘째 피펭은 형보다 일년 먼저 죽어. 이 이탈리아왕은 자기 자식에게 승계가 돼.
헌데 샤를.은 자식도 없었어.
해서 아키탄의 왕 막내 루이.가 저 프랑크왕.이 되고 아빠 샤를마뉴랑 공동 황제 가 돼. 그리고 샤를마뉴는 죽고.
재수 쨈봉인거지. 루이 더 피우스. 경건함 독실함. 경건했나봐. 경건 루이.
Louis the Pious (778 – 20 June 840), also called the Fair, and the Debonaire,[1] was the King of the Franks and co-Emperor (as Louis I) with his father, Charlemagne, from 813. He was also King of Aquitaine from 781.
머 좋은 단어는 다 붙어. 하튼 샤를마뉴 814년 죽고. 36세에 단독 황제가 된겨. 이탈리아.는 조카들이 물려받고 그 외의 땅은 다 이 인간 꺼야.
- Lothair I
- Pepin of Aquitaine
- Louis the German
- Charles the Bald
아들이 넷.이야 . 막내 대머리 샤를. 만 배가 달라. 루이.의 첫 황후가 죽었어. 두번째 황후가 나은 자식이야. 해서 어려.
Lothair I (795 – 29 September 855)
Pepin I or Pepin I of Aquitaine (797 – 13 December 838)
Louis (also Ludwig or Lewis) "the German" (c. 805-876)
Charles the Bald (13 June 823 – 6 October 877)
우리는 단지. 샤를마뉴 통일. 하고 다음 손자대에서 분쟁. 이리 아는지 마는지 하는데.
샤를마뉴.가 황제관 쓸때가 서기 8백년. 58세야. 늙었어. 자식들 셋에게 영지 나눠주지만. 또 개기는겨. 그 자식들에 충성 할 리가 없걸랑.
계속 내전인겨. 이후에도 샤를 마뉴는. 저때 그 중심은 막내 루이 인거고. 루이.는 내전하면서 아빠랑 같이 있었던겨. 아빠 샤를마뉴.랑 사이가 안좋았어.
내전을 다 끝내고 죽어. 편하게 모든 주교들과 사제들이 보는 속에서 죽어. 그래서 경건. 타이틀 붙는건데. 이때 꼬마 샤를 이랑 샤를 엄마는 멀리 있어서 못봐 죽는걸.
루이 더 피우스.가 죽는 해가 840년. 저 위 삼형제 중에 둘째는 죽었어. 로타르 45세 루이 더 게르만 35세야. 막내 대머리 샤를.은 17세야.
둘째가 죽을때. 아키탄땅을 막내 샤를에게 줘. 헌데 아키탄 사람들은 거부를 해. 자체 투표를 해서리 피팽의 아들을 자기들 영주로 뽑아. 샤를과 조카가 싸우는 모양새가 돼.
동쪽
루이.가 죽기 전에. 첫째 로타르.가 반란도 했어. 왜 배다른 어린 샤를.이 후계자에 껴야 하냐고. 장남 로타르는 반란 하다 쫓겨나서리 이탈리아로 가서. 여기서 자기 세력을 만들어.
그러다가 죽은겨. 아부지가. 루이는 죽으면서 제국의 휘장. 상징을 장남 로타르.에게 보내 그래도. 즉 황제자리 너 해라 하는겨. 맘 넓은거지
장남 로타르.가 땅 나눈 상태의 황제는 의미없다 하는겨.전체 땅에 대한 지배권을 이전과 같이 행사하게 해 달라는거지. 여기에 아키탄인들의 지지를 받은 피팽 조카가 로타르에 합세해.
로타르.와 루이 더 게르만.의 싸움인겨. 바로 삼년 전쟁을 해.
샤를 대머리.는 당근 루이.에게 붙는겨.
게르만의 루이.와 대머리 샤를 의 연합군이 로타르 장남을 이기는겨.
저게 베르됭 조약.이야. 당근 이탈리아 근거지 였던 장남 로타르.가 제일 짝아
The parting of Carolingian Empire by the Treaty of Verdun in 843. Pink area indicates West Francia.Green area indicates Middle Francia.Yellow area indicates East Francia.
셋째 루이.는 라인강 오른쪽 부터 엘베강. 이랑 오데르강 위 발트해변가. 즉 이땐 저 지도를 보면 엘베강 오른쪽은 훤한겨. 야만이야. 해변만 쓰는거지. 여기에 이탈리아 동쪽 주변.
막내 대머리 샤를.은 지금 프랑스 땅 대부분을 먹어.
장남 로타르.는 져서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넘어의 라인강 서쪽 주변. 이게 아래부터 부르기니. 알사스. 로레인. 그리고 독일저지대. 네덜란드 땅.
Partitions of 843 and 870
베르됭 조약 다음의 메르셍 조약 870년. 왼쪽 샤를은 브리타니아 까지 다 채우고. 게르만의 루이.는 오데르강까지 가는겨. 부르기니.는 고지대 부르기니 저지대 부르기니.로 나뉘고. 자식들에게.
땅이 더 적어 보이는건 가운데가. 로타르가 죽었어. 샤를과 루이만 저때 살아있는겨. 로타르 조카들 입지가 약한거지.
저게 나중에 로타르의 부르기니집안이 그나마 저 알프스 이북의 부르기니에서 저지대 네덜란드땅들을 갖고 있는거야. 그나마. 얘들이 나중에 백년전쟁에 프랑스 편을 안들어. 은근히 잉글랜드에 붙는 이유야. 부르기니.는 프랑스는 장남 로타르. 의 자기들 꺼란 존심이 쎄겄지.
즉 저걸 보믄 말이야. 결국 프랑스는 막내 대머리 샤를.이 시작이야. 거기에 로타르의 부르기니.땅들을 갖고 온게 지금 프랑스인데.
해서 대머리 샤를. 하지만. 저 대머리. 란 별명은. 샤를이 대머리 가 아니라. 처음에 삼형제 나눠주고 땅이 없었어. 어릴때. 해서리 대머리 란 비유가 붙은겨.
해서. 저 처음 지도를 보면 말야. 프랑스 로타르의 중간 땅이 라인강 서쪽이야. 저기가 저지대에서 지금 네덜란드 땅 까지가 로타르 땅이야. 저게 중세내내 프랑스 킹덤의 관할이걸랑. 저기서 무수한 반란이 일어나는겨. 저기가 프리지아. 그리고 아래 플란더스. 라는 곳이야.
다시 보면 말야. 저 가운데 로타르 땅은. 이탈리아 일단 빼고. 저 알프스 넘어서는. 점점 왼쪽 샤를 땅이 된겨. 왼쪽 서프랑키아에 들어가는겨. 그러다가 저지대는 나중에 중세 이후에 17개냐 저지대 네덜란드 독립국 어쩌고. 하면서 네덜란드 벨기에 로 따로 나간거야. 그러면서 그게 경계선이 되면서 오른쪽 라인강 부근까지를 독일 땅이 더 들어선 형국이걸랑.
쉼.
저 이탈리아 북부. 롱고바르디 연맹 되는 저곳은 해서 저때 프랑스땅이란겨 얘들은. 중세에 롱고바르디 롬바르드 킹덤.은 롱고바르디 족이 아냐. 얘들은 샤를마뉴때메 아래로 내려간거고 이 민족은.
중세 후기에 샤를 이니 프랑스와 니 이탈리아 넘어올때 말야. 1527 사코디로마 전후에 황제와 프랑스왕이 이태리를 넘어오는건. 또한 그 빌미는 저거야. 원래 저 이태리 북부 밀라노 땅들은 프랑스 땅이란겨. 해서 얘들이 나폴리도 서기 천년 이후에 노르망디가 와서 킹덤했던 자기들 땅인건 물론이거니와 밀라노 있는 저 북부도 자기들 땅이라는겨 그 빌미로 프랑스는 수시로 넘어와. 중세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애들이 넘어오는 이유야. 이 주장이 나폴레옹 시대 까지 가는겨.
.
프랑스.를 보던 어디를 보던. 그 지역의 가장 중요한 건 강.줄기야. 베르됭 조약의 그 베르됭 지나는 뫼즈강. 리옹 지나는 혼느강(론강). 파리 지나는 센강. 오른쪽 rhin 라인강.은 독일과 경계.
그리고 중부 가르는 루아르강. 그 아래 샤랑트강. 그 아래 도르도뉴강. 아래 가론강.
저기서. 원래 아키탄. 이란 지명은. 카이사르.가 원정할때 저 프랑스 땅은 아키탄 더하기 갈리아 야. 아키탄은 갈리아랑 따로 구분한겨. 갈리아에 켈트가 살다 하는거고.
카이사르의 아키탄은. 저 가론 강이 흐르는 왼쪽 구석탱이였어 원래. 헌데 이게 나중에 점점 올라가는겨.
저게 1100년대 지도 인데. 저걸 아주 눈여겨 보도록 해. 저 지명 이랑 저 지역이 눈에 선해야 유럽사를 이해할 수가 있어.
아키탄은 점점 위로 가는겨. 저 왼쪽 구석탱이를 가스코니. 라고 해. 저기가 메로빙거 때 프랑크.랑 저 인접한 서고트 애들. 바스크족. 이랑 중세까지 저기서 싸우는겨. 이전에 그 프로방스를 두고 부셍크 전투란게 그런거고.
아키탄은. 카이사르의 지명범위를 넘어서리 더 올라가 중세엔. 루아르강 근처까지 아키탄 하는겨. 엘레오노르 아키탄 할때는.
저 지도에 저 더치.란 이름으로 공국. 하는 영역을 보면. 맨 오른쪽 위에 플란더스. 아래 샴페인 아래 부르기니. 맨아래 툴루즈. 저때는 저 플란더스. 네덜란드 북쪽이 프랑스 관할인거야. 저 부르기니의 디종. 오른쪽의 스트라스부르.가 저때는 독일쪽 땅인거일뿐 대부분은 프랑스야.
저기서. 위의 노르망디. 만. 앙주. 투렌. 저 투렌의 투르.까지 무슬림이 왔던겨 그 투르전투.
헨리2세의 아빠 제프리.가 앙주백작 이었걸랑. 살아생전에 노르망디까지 해서 저 지역을 다 제프리가 접수해서리 헨리2세한테 넘긴겨.
저 노르망디. 가 이게 웃긴건데 말야.
노르망디. 는 norman 노르만들의 땅이걸랑. 노르스 norse 라는 노르족 이 온거걸랑.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직접 오거나 또는 잉글랜드 갔다가 여기 온겨. 이 노르족들이 프랑스 저 북부에서 노르만이 된겨.
이들이 윌리엄이 잉글랜드 넘을때. 그 직전에 이탈리아 남부 가서리.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왕국. 한거걸랑.
이 노르만들이 문명화 되면 쎄지는겨. 넘어가고.
잉글랜드.는 윌리엄이 저 노르망디에서 넘어갔지만 말야. 그 손녀의 아들 헨리2세는 노르망디.에 있었어. 얜 프랑스 아빠 땅에서 태어났걸랑.
나중에 아들들이 대반란을 일으킬때도 헨리2세는 노르망디에 있었어. 아들들이 잉글랜드가서 세규합하는거 건너가서 진압한겨.
그 아들 리차드. 도 아키탄의 리차드야. 전체 인생중에 잉글랜드 는 잠깐이야. 어릴때 공부하러 잠깐 갔다가. 아빠한테 대들때 건너갔다가. 걍 인생 태반이 대륙이야. 해서 영어를 잘 했다 라고 확신을 못해 사가들이.
웃긴게. 잉글랜드 킹들이 영어를 잘했나 못했나 이게 또한 주제야.
왜 이런 질문이 나오냐면. 영어란 건. 올드 잉글리쉬.가 시작으로 보면. 이건 앵글로 색슨 족의 언어야. 이들의 게르만어야 올드 잉글리쉬 이고. 켈트 인들의 언어를 이 잉글리쉬로 대체한거걸랑. 저게 윌리엄 가기 전의 서기 천년도 까지의. 로마 이후 의 잉글랜드 였걸랑.
헌데. 윌리엄의 노르망디.는 잉글리쉬.가 아냐. 이들은 앵글로 색슨 족이 아닌 노르족 이 원래 핏줄인 노르만 이걸랑. 말을 해도 노르어. 그리고 프랜치어에 더 익숙한겨 이들이.
해서리. 참 아이러니 인데. 플랜태저넷. 가문을 상징으로 지금 잉글랜드. 하는 건데. 정작 저들은 잉글랜드와 거리가 멀어. 그래도 저들은 인정해.
우리네 정서론 한국어 못하는 한국인이 저들 조상이야. 이땅바닥 정서론 이해를 몬하는거지.
헌데 하튼 저 와꾸가 중세의 잉글랜드.야. 저게 저들만 저런게 아니라, 저런 왕들이 흔하다는겨. 헌데 저게 지금 영국의 힘의 원천이 된겨 저게.
저 동떨어진 섬에서 말야. 오히려 전혀 딴 애들이 말야. 자기들을 어찌보면 자유롭게 둔겨 저걸.
영국 프랑스 독일. 영프독 셋 중에서. 제 일은 영국이야. 제 2는 독일이야. 프랑스는 저 셋중에 후진 땅이야 저게. 얘들은 현실감이 떨어져. 세계대전의 전쟁터도 얘들 땅이고. 그 전쟁을 이기게 한 건 프랑스 가 아냐. 프랑스 자력으로 세계대전을 이기지 않았어. 얘들도 남의 힘이걸랑. 그 구리구리 한 마음들이 터진게 6.8 혁명이란거야.
저걸 띄우지만. 거기서 딱 하나 맘에 드는 구호.
금지를 금지하라.
멋진 말이지. 헌데 저 육팔혁명이란건 지들은 대단한듯 자랑하지만 말야. 유치한겨 저게. 그 역사적 배경을 보면. 해서리 그 혁명 자체도. 걍 구질구질한겨. 저거 별거 아녀. 혁명이란 말은. 딱 세개만 붙이는겨.
.하튼 해서리. 오히려 저따위 이방인들이. 영어못하는 노르만애들 덕에 말야. 잉글랜드가 지금 영국이 된건데. 나중에 더 풀고.
저 아키탄의 엘레오노르. 도 프랑스야.
지금 잉글랜드.는 프랑스 애들이 만든겨. 이방인이. 저 여편네도. 그 파릇파릇 이십대 아줌마가 예루살렘까지 가걸랑. 거기서 이 여자가 시야가 확 트이는겨. 그 과정에서 겪은 경험담에 더하여. 그 레반트 항구의 상인들. 거기서 이른바 해상무역법을 알게 되는겨. 만민공법의 시작이야 그게. 그걸 잉글랜드 갖고 가서 써먹는겨.
.
프리지아. 와 플랜더스. 는 달라.
Frisia (West Frisian: Fryslân, Dutch and German: Friesland[1]) is a coastal region along the southeastern corner of the North Sea in what today is mostly a large part of the Netherlands
The Frisii were an ancient Germanic tribe living in the low-lying region between the Rhine–Meuse–Scheldt delta and the River Ems, and the presumed or possible ancestors of the modern-day ethnic Frisians.
고대에 프리지이. 라는 게르만 사람들. 여기서 프리지아. 라는 땅이름이 나와. 이건 네덜란드 해변 땅들이야. 북부 맨 끝이야. 프리지아. 프리지안.
Flanders (Dutch: Vlaanderen
[ˈvlaːndərə(n)]
( listen)
, French: Flandre
[flɑ̃dʁ], German: Flandern
[ˈflandɐn]) is the Dutch-speaking northern portion of Belgium, although,,, It is one of the communities, regions and language areas of Belgium. The demonym associated with Flanders is Fleming, while the corresponding adjective is Flemish.
플란더스. 의 개 할때 플란더스.는 저 네덜란드 남부.의 벨기에야. 벨기에 북부. 벨기에를 남과 북으로 이등분하면 그 북부.가 플랜더스. 라 해. 여기 사람들을 플레미쉬. 라 해. 남부.는 프랜치야 프랑스. 즉 저긴 천년 전부터 프랑스 귀족애들이 나눠서리 들어가 산곳이야. 이전 썰.
.
.
독일 황제를 선제후들이 뽑는다 할때. 이들이 황제 호칭과 함께 게르만의 왕. 로마의 왕. 한다 했잖오.
The composition of electors at that time is unclear, but appears to have included representatives of the church and the dukes of the four nations of Germany: the Franks (Duchy of Franconia), Swabians (Duchy of Swabia), Saxons (Duchy of Saxony) and Bavarians (Duchy of Bavaria).
초기엔. 그 투표권있는 제후들이 프랑코니아. 스와비아. 작센. 바바리아. 의 공작 이었다는겨.
독일의 고지대. 즉 남부. 의 왼쪽이 스와비아. 오른쪽이 바바리아. 그리고 중부.가 프랑코니아. 야. 프랑코니아.와 프랑크 는 전혀 달라. 프랑코니아 공국에 사는 프랑크족 하는겨 저말은. 그리고 그 위의 작센. 북부
The seven have been mentioned as the vote-casters in the election of 1257 that resulted in two kings becoming elected.
- Three ecclesiastical Electors:
- Four secular Electors:
그다음엔 7명의 선제후가 뽑아. 세명의 대주교.에 더하여. 보헤미아의 왕. 라인강 팔라틴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후작.
브란덴부르크.는 늦게 나오는겨. 작센 넘어서리 오데르강 까지 개척하는겨 북부. 저지대에.
저기서 말야. 다시 이전 썰한 공후백자남. 이야길 더 하면 말야.
일본가 주나라 보고 번역한 말이라 했잖아.
공작 公爵 (duke). 후작 侯爵 (marquis) 백작 伯爵 (count) 자작 子爵 (viscount) 남작 男爵 (baron)
저건 다 개번역인거고.
duke.는 dux .둑스. 로마 제정이 안정된 이후에 콘술이나 임페라토르.를 둑스.라 해. 지도자. 리더야 둑스. 로마 속주를 지배하는 총독 도 둑스.라 호칭하기도 해.
즉 다스리는 애야. 해서 자기들 나눈 영지들의 리더.가 되라는겨. 그땅이 더치 duchy. 해서 영지땅의 최고 단위는 더치.야
count. 카운트. 는
Origin
Late Middle English: from Old French conte, from Latin comes, comit- ‘companion, overseer, attendant’ (in late Latin ‘person holding a state office’), from com- ‘together with’ + it- ‘gone’ (from the verb ire ‘go’).
라틴어 코밋. 에서 콩트. 콤. 하는겨. 이건 같이. 간겨. 공직을 받고서리 있는 사람. 즉 공무원이야 이건.
둑스.보다 낮아. 공무원이야. 그리고 더 가서. 공무원들을 보내는겨. 카운트. 세는거야. 세면서 나누는겨. 이게 행정 단위가 되. 카운트에 카운트를 보내는겨.
이걸 걍 백작이란 말에 끼워 맞춘거고.
마르퀴스. 마르게이브. 하는 후작이란건. 이전 썰했지만. marquess marquis margrave. 저건 mark. march. 마크의 독어. 마크. 는 찍는겨 표시나게. 그리고 경계야. 그래서. note 티나 나는겨. 신 이 더하지만 넘어가고.
경계를 딱 찍어서리. 저걸 막아라. 저길 넘어오는 애를 막아라 하는게 마르퀴스. 마르게이브 하는겨. 저건 그래서 좀 뒤에 나오는말이야.
잉글랜드.는 듀크 duke 대신 earl 을 쓰잖아. 왜냐믄. 듀크.는 라틴어에서 왔고. 저 얼.은 노르족언어야. 노르족애들이 앵글로색슨의 라틴어화한 잉글리쉬.를 얘들이 들어올때 자기들 말을 살짜기 얹은겨. 잉글랜드는 노르만 애들 땅이다 라는 걸 슬쩍 남기고 싶은 겨.
걍 그런줄 알어.
저런 걸 기본으로 깔고서리. 유럽전쟁사를 보도록 하자
냉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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