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處に 行けばいい 貴方と離れて 
今は 過ぎ去った 時流に 問い卦けて 
長すぎた夜に 旅立ちを夢見た 
異國の空見つめて 孤獨を抱きしめた
流れゐ 淚を 時代の風に 重ねて 
終わらない 貴女の 吐息を感じて 
 
Dry your tears with love
Dry your tears with love
 
Loneliness your silent whisper
Fills a river of tears through the night
Memory you never let me cry
And you, you never said good-bye
Sometimes our tears blinded the love
We lost our dreams along the way
But i never thought you'd trade your soul to the fates
Never thought you'd leave me alone
 
Time through the rain has set me free
Sands of time will keep your memory
Love everlasting fades away
Alive within your breathless heart
 
Dry your tears with love
Dry your tears with love
 
流れゐ淚を時代の風に 重ねて
終わらない 悲しみを 靑い薔薇に變えて 
 
流れゐ淚を 時代の風に 重ねて 
終わらない 貴方の 吐息を感じて
 
If you could have told me everything
You would have found what love is
If you could have told me what was on your mind
I would have shown you the way
Someday I'm gonna be older than you
I've never thought beyond that time
I've never thought the pictures of that life
For now I will try to live for you and for me
I will try to live with love, with dreams, and forever with tears……
 

 

Mark, written in the period 65-75 CE, originally contained no post-Resurrection appearances, although Mark 16:7, in which the young man discovered in the tomb instructs the women to tell "the disciples and Peter" that Jesus will see them again in Galilee, hints that the author may have known of the tradition.[29] The authors of Matthew (c.80-90 CE) and Luke/Acts (a two-part work by the same anonymous author, usually dated to around 80–90 CE) based their lives of Jesus on the Gospel of Mark.[30][31] 

 

마가복음이 제일 일찍 쓰여진걸로봐. 1차 유대전쟁 직전이나 직후에. 여기엔 예수 부활 이야기는 없어. 초창기 코덱스 버전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사람이 쓴걸로봐. 마태복음과 비슷한 시기에 쓴걸로 보지만. 이 둘은 1차 유대전쟁후의 예루살렘 함락되고 비참한 분위기에서 쓰여진겨.
일단 글 냄새.를 맡을 줄 알아야 해.

이땅바닥엔 평론가가 없어. 단 하나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애들이 없어. 비참한거지. 이땅바닥 모든 수준이.

마가 누가 마태 세 곳이 똑같은 부분이 각각 40프로에서 76프로야. 

마가.에 없고 누가 마태 에만 있는 부분이 23 프로야. 저 23프로.는 마가.가 아닌 딴 곳의 것을 보고 썼다는거지.

The Q source (also Q document, Q Gospel, or Q from German: Quelle, meaning "source") is a hypothetical written collection of primarily Jesus' sayings (logia). Q is part of the common material found in the Gospels of Matthew and Luke but not in the Gospel of Mark. According to this hypothesis, this material was drawn from the early Church's Oral Tradition.[1][2][3]

 

저걸 가정한겨 독일 사람이. 저 걸 크벨레. quelle 한겨. 영어로 q source 라 작명을 해. 원본. 원본이 따로 있었을 거란 거지. 이 원본은 소실된걸로 추정을 해. 

 

시작은 마르코. 마르크. 마가복음이야. 일본 발음이야. 

 

해서 제일 귀한게 저 unique 란 겨. 유니크. 누가.의 유니크. 마태.의 유니크. 

 

저 세개를 Synoptic Gospels 시놉픽 가스펠즈. synoptic.이 sun. 더하기 opsis . sun 이 sum 이여 같이.여 투게더. 옵시스.가 보는겨. 같이 본겨. 히걸 공관복음. 번역을 한겨. 

 

Gospel (/ˈɡɒspəl/) is the Old English translation of Greek εὐαγγέλιον, evangelion, meaning "good news".[1]

 

가스펠.은 그리스말. 에반게리온.이야. 좋은 소식이야. 복음. 한거지.

 

 

Early Christian tradition ascribes it to John Mark, a companion and interpreter of the apostle Peter.[8]Hence its author is often called Mark, even though most modern scholars are doubtful of the Markan tradition and instead regard the author as unknown.[9]It was probably written c. AD 66–70, during Nero's persecution of the Christians in Rome or the Jewish revolt, 

 

마가복음.은 마가. 마르코.가 쓴걸로 봤어 초기 기독교는. 베드로가 촌놈이야. 글을 잘 못해. 얘가 따라다니면서 쓴겨. 

 

 

The Great Fire of Rome erupted on the night of 18 July to 19 July, AD 64

 

로마 대 화재.가 네로 죽기 4년 전 서기 64년.이야. 로마에 대화재가 몇번있어. 
저때 기독교인들에게 화살 돌려서리 죽였지만. 몇명을 죽였는지 언제 죽였는지. 몰라.
네로가 자살하고. 네로의 기록을 다 말살해.

Damnatio memoriae is a modern Latin phrase literally meaning "condemnation of memory", meaning that a person must not be remembered.

It was a form of dishonor that could be passed by the Roman Senate on traitors or others who brought discredit to the Roman State. The intent was to erase all memory of the malefactor.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그 인간에 대한 기억이 되어선 안된다는겨. 다 지워. 다 없애. 악행에 대한 기록 지우기가 의도였지만. 다 지우는겨. 

 

로마 엘리트나 황제들 사후에 이런 짓을 가끔 해. 로마의 적 이라 원로원에서 규정하는거지. 칼리굴라.도 당할 뻔한걸 클라우디우스.가 막았어. 

 

네로.는 살아있었다는 소문이 돌아. 특히 아르메니아 왕국은 네로를 좋아했어. 얘들이 그래. 니덜이 네로에게 머라 하던 우린 네로 좋아한다. 외교적으로 네로는 감각이 있었어. 넘어가고.

 

하튼 그래서. 베드로. 와 바울. 이 죽은 해를 정확히 몰라.

 

해서 베드로.는 저 대화재 에서 네로 죽은 해 68년 그 사이에 죽었다 하는겨.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잡혀왓걸랑. 로마 시민권자라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못해. 저 대화재 때 로마로 가서 있던겨. 아마 베드로 랑 같이 처형당햇따 라 하는겨. 그따위 기록들이 서기 1백년 전에 있고 이세기 삼세기에도 기록이 있어. 서신에들 있고. 해서 그렇겠지 하는겨.

 

로마 대화재 나고. 2년 후에 터진게 예루살렘 반란이야. 유대 로마전쟁의 시작이야. 그리고 2년 후에 네로가 죽어. 그 2년 후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는거고. 

 

마가복음은 저때 또는 저 직전에 쓰여진 걸로 봐. 

 

그 다음 쓰여진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야. 이건 한 사람이 쓴겨.

 

Luke is the longest of the four gospels and the longest book in the New Testament; together with Acts of the Apostles it makes up a two-volume work from the same author, called Luke–Acts.[2]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 이야기를 쓰기 위해 쓴겨. 이 사람이 누군지 몰라. 루크. 루카. 

 

Luke is the only one who continued his story with Acts, and participated in some of actions within Acts—you can see several areas where the story switches from 3rd person to 1st person at some juncture where he joins the story and usually Peter, and then back to 3rd person when he separates from the group.

 

이 사람은. 저 현장에 직접 있던 사람이야. 사도행전의 관찰자야. 바울 옆에 있던 사람이야. 그 시선으로 저걸 보도록 해. 인칭이 3인칭으로 갔다가 1인칭으로 가고 다시 3인칭으로 가.  인칭 변화를 유의해서 다시 보도록 해. 우리 란 말이 나와. 

 

이사람은 그리스인이야. 유대교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야. 유대인이 아냐. 그러다가 예수를 알게 돼. 바울에 의해서. 바울이 아나톨리아와 그리스로 넘어갈때 만난 사람이야. 아나톨리아 의 그리스인 이야. 

 

위대한 역사가야 결국은. 저기서 유니크 투 루크. 누가 복음에만 있는 이야기가 35프로야. 마태보다 많아. 이사람이 직접 겪은 이야기야. 이 누가의 유니크.는 그래서 특히나 귀한거야. 

 

누가복음이 제일 길어 신약에서. 4대복음에서 제일길어. 

 

이사람이. 마가와 큐복음 에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리 이걸 쓴거야. 예루살렘 함락되고. 유대인들 다 죽고 다 내쫓기고 나서의 그 감정에서 쓴거야 이걸.

 

According to fourth-century church fathers Eusebius and Epiphanius, Jerusalem's Jewish Christians fled to Pella before the beginning of the war.[29]

 

저 전쟁은 유대교 믿는 유대인들이야. 기독교 믿는 유대인들은? 나중 2백년 지나서리 저 두사람의 기록을 보면 저때 기독교 유대인들은 함락 직전에 펠라.로 기적적으로 갔었대. 펠라.는 요단강 바로 너머야. 저 북쪽 갈릴리 호수 남쪽이야. 

 

헌데 당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면서리 땅굴 파서 도망가는 유대인들 까리 잡을라고 삥둘러 참호를 파걸랑. 성벽 넘는 유대인이나 땅굴로 나가는 유대인들 다 잡아서 죽였어. 저게 기적적으로 얼마나 넘어갔는 지 알길 없지. 희박해.

 

기독교인 유대인들도 죽은겨 저때. 당시 기독교 유대인.은 유대교.를 배척하지 않아. 오럴 토라의 하나님이나 예수의 하나님이나 같아. 헌데 유대인에게는 적이야 기독교는. 예수가 감히 메시아 행세를 하다니.  그런말을 따르다니. 바울.을 고소한건 유대인 이야. 바울을 로마에 잡아가라 한건 유대인이야.

 

After seven days in Jerusalem, some "Jews from Asia" (most likely from Roman Asia) accused Paul of defiling the temple by bringing gentiles into it. He was seized and dragged out of the temple by an angry mob. He narrowly escaped being killed by surrendering to a group of Roman centurions, who arrested him, put him in chains and took him to the tribune.[Acts 21:27–36]

예루살렘 성전에 유대인이 아닌 외부인을 와서 더렵혔다는 핑게로 고소를 한겨. 이건 일부고. 바울이 쎄. 유대인들이 죽이란걸 로마 총독이 2년이나 질질 끌은겨 잡아두고. 그러다가 새 총독이 부임하고 로마로 보낸거걸랑.
누가복음 사도행전의 작가.인 루크.도 같이 간겨. 지중해 지나서리. 로마 시내까지. 인술라 공동주택까지. 거기에 바울.이란 기독교인이 왔다는 소문 듣고서리 사람들이 왔다 등 하며 끝나는겨 사도행전은. 
저걸 역사적 이야기로 보면. 찐한겨 저게. 저건 공허한 신앙놀이 책이 아냐.
.

그리고 바울이 죽고 누가가 되돌아간겨. 아나톨리아.로. 예루살렘 소식을 들어. 처참한 이야기를 들어. 

 

그때 쓴겨.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다 죽었어. 

 

According to Josephus, 1.1 million non-combatants died in Jerusalem[1] and 100,000 in Galilee. He also tells us that 97,000 were enslaved.[1]

 

요세푸스.는 백십만명의 민간인들이 죽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에서 십만이 죽었다. 십만 가까이가 노예로 팔렸다.

 

 

Matthew White, The Great Big Book of Horrible Things(Norton, 2012) p.52,[2] estimates the combined death toll[clarification needed] for the First and Third Roman Jewish Wars as being approximately 350,000

 

현대 사가들은  대략 35만으로 본다 총 사망자를. 
저때 쓴겨. 기독교이야기를. 유대인의 유대교.가 중심인 듯 보이지만. 유대교 유대인도 어쨌거나 자기들이야. 기독교.는 저것의 가지이걸랑. 저기서 유대교 유대인만 죽은게 아냐. 당시 기독교 유대인은 이제 시작이야. 얼마 되지도 않겄지. 예수 죽고 삼십년이야 끽해야. 
저 때는 유대인이 기독교인 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의 친구이고 가족이야. 건너건너 아는사람이야. 저기에 같이 참전한 기독교 유대인도 있었을 터이고. 
저때 저들은. 신약을 쓴겨. 저 감정으로.
지옥이야. 지옥. 

천국이 옵니다. 당대에 오는겨. 바울이 그랬어. 천국은 지금 여기 옵니다. 천국이 옵니다. 믿으세요. 

그래 지금 이 지옥같은 이 예루살렘의 현장. 저 괴물같은 들 로마. 그래 곧 로마가 망한다. 천국이 올거다. 예수님을 갖고 오자.

희망으로 쓴겨 저걸. 절망의 바다에서 한가닥 희망을 취하고자 저 복음서를 써댄겨 저 누가 루크.가. 그리고 어쩌면 마르코. 마가가 먼저 쓴겨. 그리고 마태 도 쓴겨. 서로 막막 쓴겨.
우리가 살아 생전에 천국이 온다.
기달리라. 희망을 품자.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s the fourth of the canonicalgospels.[1][Notes 1] The work is anonymous, although it identifies an unnamed "disciple whom Jesus loved" as the source of its traditions.[2] It is closely related in style and content to the three Johannine epistles, and most scholars treat the four books, along with the Book of Revelation, as a single corpus of Johannine literature, albeit not from the same author.[3]

 

요한복음은. 애매해. 요한서신들과 문체랑 내용이 비슷해. 요한계시록은 또 달라. 이 계시록은 넣을까 말까 하다가 걍 맨 마지막에 쑤셔 넣었어. 저자가 같지 않아.

 

The gospel of John went through two to three stages, or "editions", before reaching its current form around AD 90–110.[12][13] It arose in a Jewish Christian community probably located in Ephesus in modern Turkey, although other possibilities include Antioch (Syria), Palestine, and Alexandria (Egypt).[14] It speaks of an unnamed "disciple whom Jesus loved" as the source of its traditions, but does not say specifically that he is its author.[2]Christian tradition identified this disciple as the apostle John, but for a variety of reasons the majority of scholars have abandoned this view or hold it only tenuously.[15][Notes 4]

 

요한복음.은 기독교 유대인들 초기 공동체.에서 나온걸로봐. 저 공관복음서 세개 보다 늦은 걸로 봐. 사도 요한.이 저자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리 안봐. 

 

The scholarly consensus in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was that John was independent of the synoptic gospels (Matthew, Mark, and Luke), but this agreement broke down in the last decade of the century and there are now many who believe that John did know some version of Mark and possibly Luke, as he shares with them some items of vocabulary and clusters of incidents arranged in the same order.[16][17] Key terms from the synoptics, however, are absent or nearly so, implying that if the author did know those gospels he felt free to write independently.[17]

 

20세기 후기까지도 학계에서는 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독립적인 걸로 봤어. 헌데 이게 깨진겨. 

이 저자는. 마가복음을 알고 있었어. 누가 이야기도 알고 있었을거 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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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Papyrus /pəˈprəs/ is a material similar to thick paper that was used in ancient times as a writing surface. It was made from the pith of the papyrus plant, Cyperus papyrus, a wetland sedge.[1] Papyrus (plural: papyri) can also refer to a document written on sheets of such material, joined together side by side and rolled up into a scroll, an early form of a book.

 

파피루스. 파피루스.라는 갈대같이 생긴 식물의 껍데기 속 진액을 추출해서리 다져서리 만든 두꺼운 종이야. 
이 파피루스.는 얕은 물에 안자라. 깊은 물에 자라. 해서리 나일강 하류에 드물어. 나일강 상류 고지대 이집트 위에서 생산하는겨.
1왕조 부터 사용한걸로봐. 기원전 3천년. 
이게 귀한거야 그래서. 파피루스 식물 자체 생산지가 고대에선 성지야. 글씨 연습은 돌판이나 흙판에 하고 여기에다가 공식적인 글을 쓰는겨. 이집트 신성문자.는 특히나 이집트 외의 지역에선 금지야. 
저 파피루스 자체가 귀한거야. 고대 그리스 로마 인들이 어떤 글이든 정리된 귀한 글만 쓰는겨. 
승리자의 역사 주작질 위해서 저 파피루스에 거짓 글쓰기.를 할 리가 없는겨. 다 자기 생각을 느낀바대로 쓰는겨. 저긴 띄워쓰기도 없어.
저 파피루스.는 스크롤. 돌돌말이였다가. 코덱스 가 나오는겨 기원 후에. 
코덱스.는 스크롤.이란 돌돌말이에 대비되는 단어야. 책 형태처럼 끊어서리 묶은겨.
신약은 저 코덱스.가 많은겨 그래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글들은 대부분 돌돌말이야. 멋있어 보이걸랑. 저걸 코덱스. 모양으로 써라 하고 시작한 이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야 . 헌데 말 안들어. 일세기 지나서야 코덱스로 쓰는겨.
코덱스 형태는 파피루스 보다는 파치먼트.라는 가죽 피지가 먼저야. 가죽 피지. 특히 양가죽 양피지가 재질상 둘둘말이 보다는 코덱스가 편한겨. 그러다 파피루스 도 코덱스 로 묶는겨. 
저 신약을 연구하민서리  저 요한 복음도. 공동체에서 업그레이하면서 만든 거로 보인다는게. 코덱스의 버전들 보니 초기보다 막막 먼가 업그레이드 된게 보이는겨. 여러 사람이 가감한. 
마가 초기 코덱스.는 예수 부활 이야기가 없다는 거고. 누가 처 넣었다는거지.
.
이전에 성경번역 썰할때 그 웨스턴 타입 비잔틴 타입 알렉산드로스 타입. 의 코덱스들은 다 신약이야. 구약 이야길 한게 아냐. 헌데 거 예시에서 알레포 코덱스.는 구약이야.

구약은 이미. 히놈 골짜기의 그 은으로 된 돌돌말이.가 기원전 6백년 전후야. 그 두개 은 말이 글자들이. 이 히놉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사이고.
사해문서.라는 그야말로 음청난 사건의 문서들은. 사해 북부에 접하는 쿰란 동굴.의 것들은 기원전 4백년이야. 

Sirach provides evidence of a collection of sacred scripture similar to portions of the Hebrew Bible. The book, which dates from 180 BCE (and is not included in the Jewish canon), includes a list of names of biblical figures (44–49) in the same order as is found in the Torah and the Nevi'im (Prophets), and which includes the names of some men mentioned in the Ketuvim (Writings). 

 

타나크.란 구약이 편집된건. 기원전 180년으로 봐. 시라크. 여기에 토라 네빔 케트빔. 형식이 있는겨.

The Septuagint (LXX) is a Koine Greek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translated in stages between the 3rd to 2nd century BCE in Alexandria, Egypt.

 

70인역. 이라는 셉투아긴트. 란 그리스 번역 구약성경.이 나오는건 기원전 3백년에서 2백년이야.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 정벌하고. 부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만든겨 알렉산드리아 에서. 

 

여기 유대인들이 많았걸랑. 그리스인들의 상업도시엔 항상 유대인들이 낑겨 들어와. 더군다나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에서 사마리아 유다 땅을 차례차례 정벌하면서 디아스포라. 될때 주로 많이 이주하는 곳이 아래 이집트야.

 

이 유대인들의 활력.이라는 힘.은 엄청나. 저 바빌로니아가 점령한 50년 동안에도 반란해. 이때 도와주는 이들이 이 이집트의 유대인들이야. 

 

유대인은 누가 점령하던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아. 나중 마카비. 매카비. 애들이 또한 셀레우코스 애들에게 그래서 반기를 드는겨. 자기들이 왕조 세우고 땅 다 회복하는겨. 음청나 이들.

 

로마와의 전쟁은 그래서 그게 갑작스런 사건이 아냐. 기존 바빌로니아가 유다 먹을때부터 이전 셀레우코스 까지도 5백년 이상을 싸우던 애들이야. 다른 이들관 차원이 달라. 
로마가 점령하고. 칼리굴라.있을 때에 이집트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싸우는겨. 시작은 이때야.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서로서로 칼리굴라에 로비를 하는겨. 그때 칼리굴라를 직접 본 이가 기록을 또한 남겨. 칼리굴라 참 재밌는 아이인데. 넘어가고.
칼리굴라.가 이 유대인을 싫어해. 워낙 소문이 안좋을 수 밖에 없어. 의무는 없고 권리만 챙기걸랑 걍 보믄. 
헌데 로마.는 인정해줫걸랑. 안식일날 쉬는 것도 인정해줫어. 로마에서 무상급식 할때도. 급식일이 안식일이면 따로 남겨놔. 그리고 다음날 밀가루를 줬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다음에 예루살렘 입성할때도. 유대인들이 카이사르한테 그러는겨. 우리네 그리스 인들 대비 차별받는다. 그랬걸랑 이전엔 그리스 인들 아래에 있었으니. 카이사르가 동등한 대우 해줘. 유대인들이 고마와 해. 도시이름을 카이사리아로 바꿔. 해변도시를. 
헌데 그리스인들이 보기엔 티껍걸랑. 신앙관은 그리스와 로마 는 똑같아. 다르지 않아. 
먼가 얄밉걸랑 유대인들이. 그 먼가.는 먼걸까. 먼가 있겄지 저기에 더하여.

synagogue, also spelled synagog 

Although synagogues existed a long time before the destruction of the Second Temple in 70 CE, communal worship in the time while the Temple still stood centered around the korbanot ("sacrificial offerings") brought by the kohanim ("priests") in the Temple in Jerusalem. The all-day Yom Kippur service, in fact, was an event in which the congregation both observed the movements of the kohen gadol ("the high priest") as he offered the day's sacrifices and prayed for his success.

 

유대인들의 회당을 시나고그. 라 하는데. 이게 저 로마 유대 전쟁 이후에 생긴게 아니야. 원래 각 지역마다 저 시나고그.가 있어. 여기서 공부를 해. 예배도 오손도손 하는겨. 로마가 솔로몬 2차 템플 없애는 70년 전에도 오래 있었어. 
알렉산드리아.의 저 유대인 시나고그.에 그리스인들이 가서리. 막막 동물 제사 지내면서리 낄낄 대는겨. 신상들 막막 올려놓고. 이때 불이 붙어. 이게 칼리굴라 때야. 
칼리굴라.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 조각상을 올려놓으라 해. 일년동안 총독이 끙끙 앓어. 그런데 얘입장에선 다행히도 칼리굴라가 암살당해. 이게 서기 41년.
.이 이전에 카이사르.랑 친해지는 헤롯왕조 헤롯의 아버지. 안티페르.가 죽는게 기원전 43년. 카이사르 죽고 다음에 죽어. 
당시 하스몬 왕조.가 막판에 파르티아. 의 힘으로 삼촌을 엎고 파르티아.의 우산으로 들어가. 
이때 로마에서는 헤롯.을 유다의 왕.으로 임명해. 얘가 로마의 힘으로 파르티아를 내몰고 헤롯왕조를 열어. 이때가 기원전 37년. 
예수.가 태어나고. 헤롯.이 당해 죽어. 그리고 세 아들이 권력쌈질하면서 유다 땅을 셋이 나눠가져.

The Herodian Tetrarchy was formed following the death of Herod the Great in 4 BCE, when his kingdom was divided between his sons Herod Archelaus as ethnarchHerod Antipas and Philip as tetrarchs in inheritance, while Herod's sister Salome I shortly ruled a toparchy of Jamnia

 

헤로디안 테트라아크키. 헤롯 세아들이랑 헤롯의 여동생. 넷이서. 여동생 살로메는 해변땅 조금 갖고. 지금 물론 예루살렘 통하는 해변중심도시지만. 유다 땅은 대부분 아켈아우스.가 갖는겨. 얘가 실질적인 유대 왕인거지. 

 

저 헤롯 아켈라우스.가 예수 지저스.랑 같은 해 태어난겨. 헤롯 대왕이 자기 아들 아닌 다른 유대 아기가 유대왕이 된다 해서리 아기들 죽이는거고.

 

얘가 폭정을 해서리. 아우쿠스투스. 가 이 아켈라우스. 땅의 자치권을 뺏아 얘한테서. 그리고 로마 황제 직속으로 갖고 오는겨 이 유다 와 사마리아 땅을. 그리고 얘는 갈리아땅으로 유배를 보내는겨. 죽이진 않아.

 

즉 나머지 세땅은 걍 계속 헤롯의 아들과 여동생이 다스리는겨. 저 아켈라우스.의 유다 사마리아.은 로마가 직접 관리해.  이때가 서기 6년. 

 

이때부터 유대 프로빈키아. 라는 딱지가 붙어. 로마 유대전쟁들이 끝나는 백여년 동안.

 

여기 유다 사마리아 땅에 로마 사람을 파견해서 다스리는데. 그 관직명을 확실하게 구분해서 봐야해.

 

Name Reign Length of rule Category
Coponius 6–9 3 Roman Prefect
Marcus Ambivulus 9–12 3 Roman Prefect
Annius Rufus 12–15 3 Roman Prefect
Valerius Gratus 15–26 11 Roman Prefect
Pontius Pilate 26–36 10 Roman Prefect
Marcellus 36–37 1 Roman Prefect
Marullus 37–41 4 Roman Prefect
Agrippa I 41–44 3 King of Judaea
Cuspius Fadus 44–46 2 Roman Procurator
Tiberius Julius Alexander 46–48 2 Roman Procurator
Ventidius Cumanus 48–52 4 Roman Procurator
Marcus Antonius Felix 52–60 8 Roman Procurator
Porcius Festus 60–62 2 Roman Procurator
Lucceius Albinus 62–64 2 Roman Procurator
Gessius Florus 64–66 2 Roman Procurator
Marcus Antonius Julianus 66–70 (dates uncertain) 4 Roman Procurator

처음애는. 아그리파1세가 다시 유대왕.으로 복귀하기 전에는. 프레펙트. Prefect 라는 관직으로 가서 다스린겨. 

 

프레펙트.는 나름 작은 마기스트라투스. 권력이 있어. 큰 지역의 거버너는 전직 콘술 전직 법무관.이지만 프레펙트.는 상대적으로 작은겨. 지원을 위의 큰 시리아 거버너에게 받는거지.

 

프레펙트는 나름 군권을 갖고 있어. 사법권 행정권도 있어. 

 

빌라도 총독 이라 알고있는 폰티우스 필라테.가 서기 26-36년 사람이야. 이사람도 프레펙트.야 해서 재판을 직접 담당하는겨. 이때가 예수 수난받는 시기야. 이때도 유다 땅은 문제가 여전했던겨. 프레펙트.가 멀 어떻게 못하는겨. 

 

로마에서 직접 프레펙트로 유대인들을 다스리다가. 헤롯 아그리파.가 다시 유대왕 으로 복귀를 해. 얘는 헤롯 대왕의 다른 아들의 자식이야. 로마에서 자랐어. 로마를 배우고. 얘를 유대왕으로 복귀를 시킨겨. 

 

아그리파.를 유대왕으로 복귀시킨건 칼리굴라야. 

 

칼리굴라.가 보기에도 유다 땅이 피곤한겨. 프레펙트.로는 안된다 판단한겨. 이 헤롯 아그리파.가 로마에 있을때 칼리굴라.랑 친구였어 나이는 훨 많지만. 칼리굴라가 유대땅으로 보내면서 왕 시키고 니가 좀 유대땅 좀 조용하게 만들어 달라 한겨. 

 

이집트도 로마가 직접 다스렸어. 이 직위도 프레펙트.야. 칼리굴라가 이집트 프레펙트.가 반감있는걸 느껴. 여기도 헤롯 아그리파.를 보내서리 확인시키기도 해.

 

저 위의 나머지 땅 중. 헤롯 대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반란할거라고 로마에 알려서리 저 안티파스 땅도 아그리파.한테 줘. 

 

그리고 나서리. 이집트 에서 그리스인과 유대인들 전투가 벌어지는겨 싸움이. 이때가 서기 40년이야. 그리고 칼리굴라가 죽는게 서기 41년.이고.

 

헤롯 아그리파 1세.는 3년 후인 서기 44년에 죽고. 이후는 다시 로마에서 직접 다스려. 이때부턴 프로쿠라토르.야 프로쿠라토르.는 단지 세금만 걷어. 마기스트라투스.라는 권력은 없어. 시리아 의 총독에게 요청해야 해. 

 

아그리파.가 죽고. 다음 아들이 아그리파 2세야. 여전히 유대왕 이라 하지만. 형식이야 이름뿐이야. 대사제야. 헌데 로마에서 자랐어. 칼리굴라 죽고 아빠 죽을때 아직 십대야. 클라우디우스.는 프로쿠라토르.를 보내는겨 유다 땅으로. 이 2세 아그리파.도 로마에서 살았어. 클라우디우스.를 지지해.

 

나중 저 갈릴리 위의 땅들을 받아서리 가는겨. 그리고 예루살렘의 대사제. 칭호를 받아.

 

아그리파2세의 누이가. 베르니체.야. 한살어린듯 동년배인듯해. 이들이 왕위에 있을때 나이 40전후에 

 

유대인 로마 전쟁이 터지는겨. 서기 66년에. 명목은 대사제에 왕이지만. 아그리파는 로마에서 살았걸랑. 중간에서 피곤한겨. 유대인들 말 안통해. 대사제 이지만. 유대인들이 싫어하는겨.

 

해서리 아그리파.랑 누이 베네치아랑 근친 이다 하는겨 유대인애들은 당시도 이후도. 

 

 

아니야. 주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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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55, the Emperor Nero added to Agrippa's realm the cities of Tiberias and Taricheae in Galilee, and Livias (Iulias), with fourteen villages near it, in Peraea.

 

네로.가 아그리파.의 땅을 더 넓혀줘.

 

It was before Agrippa and his sister Berenice that, according to the New Testament, Paul the Apostle pleaded his case at Caesarea Maritima, possibly in 59.[10]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복귀하다가 고소당해서리 로마 압송되기 2년 일은 저 아그리파 와 베르니체.가 저기 있기 전의 일이야. 

 

저들 캐릭터들이 모두 신약에 나오는 이름들이야. 

 

헌데 엄밀히 하나 하나 따지면. 많은 이야기들이 시기랑 잘 안맞고. 편파적인 시선이 많은겨. 그걸 감안하고 보면 재밌어 저 신약이.

 

저 유대교의 유대인 시선이나 당시 기독교의 유대인 시선이나 헤롯 왕조와 로마는.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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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건. 감정이 개입된 해석에 의한 글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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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래 아냐고? 짐의 경지가 되믄 다 알게 돼.  유럽과 일본애들은 대부분 그리 다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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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로마 전쟁이. 66년 에 시작한게 아니라. 하스몬왕조 말기 즉 폼페이우스 다음 카이사르 때부터도 시끄러웠던 거고. 기원전 40년에 이미 시작한겨. 그게 1백년 지나서리 터진것일 뿐이고.

 

본격적인건 칼리굴라 있을때의 서기 40년 전후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그리스인 유대인들 싸움질에

 

더 본격적인건 서기 44년 부터의 20년 동안이야 서기 66년 까지의. 

 

저긴 열심당에 암살에 막막 피가 끓는겨. 

 

네로.가 죽으면서 로마도 혼란의 시기가 시작되고. 동시에 예루살렘 유다 땅에서는 저 일이 터지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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