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Fordyce (died 1789) was a Scottish banker, centrally involved in the bank run on Neal, James, Fordyce and Down which led to the crisis of 1772.

 

https://youtu.be/lK3Zj3bGvPU



알렉산더 포어다이스. 스콧 사람이고, 1772년 은행 뱅크런 의 주범이야. 닐 제임스 포어다이스 다운 이라는 은행의 파트너여. 대표중 하나인 거고.

He was the youngest son of Provost George Fordyce (1663–1733)[1] of Aberdeen, and brother to David Fordyce, James Fordyce, and William Fordyce. He was educated under his uncle, Thomas Blackwell the younger, and was then for some time in the hosiery trade at Aberdeen. He went to London, and found a situation as outdoor clerk to a banker named Boldero. Eventually he became the most active partner in the firm of Neale, James, Fordyce, & Down.

애버딘 의 포로보스트 는 시장급인거고, 형제들도 스콧에서 잘나가는 사제 학자 의사 들이고, 삼촌 토마스 블렉웰 은 스콧 계몽주의 의 시작이야. 스콧 에서 아주 잘나가는 집안이고. 결혼한 부인도 In June 1770 he married Lady Margaret Lindsay, a 17-years-old daughter of James Lindsay, 5th Earl of Balcarres on Fife. 발카레스 의 린지 집안이야. 이 린지 클랜이 스콧 정통 이고, 린제이 로한 이 아냐, 린지 로한 이야.

걍 스콧 의 최고의 인간이야. 사립은행도 만든거고.

In July 1770 Fordyce collaborated with two planters John and William Macintosh on Grenada and borrowed 240,000 guilders in bearer bonds from Hope & Co. in Amsterdam with whom he corresponded in the weeks before.[3][4][5] Hope had undertaken commissions for Fordyce on the Amsterdam Stock Exchange involving dealings for the account in shares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결혼하고, 그레나다 의 농장주들과 조인 해서, 암스테르담 의 호프 은행에서 베어러 본드, 무기명채권 24만굴덴 을 투자받아. 즉 캐리비언해 의 그레나다 의 농장사업 을 담보로 해서, 24만 을 땡긴겨, 무기명채권 형식으로. 이건 채권소지자 에게 지급하는 채권이야. 이게 불리온 코인을 준게 아니라, 채권형식으로 은행이 지급한다며 페이퍼머니 노트 로 준겨. 즉 저 채권이 수표처럼 쓰이는거지.

Hope & Co was een bankiershuis aan de Keizersgracht 444-446 in Amsterdam. Het handels- en bankiershuis werd in 1762 opgericht door de Amsterdamse bankier Thomas Hope samen met zijn zoon Jan Hope en neef Henry Hope.

호프 은행, 이 암스테르담 호프 가문이고, 유명한 상업집안에, 토마스 호프 가 자기아들 얀호프 와 함께 세운 은행이야. 서기 1762년. 이 은행이 지금 ABN AMRO 에이비앤 암로, 야.

저 1762년 때 런던에 생긴 은행이, 베어링 은행이야. 이게 지금의 Barings 베어링즈 투자회사야. 베어링 가문도 그로닝엔 네덜란드가 뿌리고 이들이 영국간거고, 저때의 호프 가문과 베어링 가문이 서로 알고 지내던 네덜란드 인간들이야. 이 두 은행이 후에 같이 투자하면서 큰거야.

Henry Hope (1735–1811) was an Amsterdam merchant banker born in Braintree, Massachusetts. He emigrated to the Netherlands to join the family business at a young age. From 1779,

헨리호프 가 매사추세츠 태생이고, 토마스 호프 의 조카야. 이사람이 1779부터 암스테르담 가서 자기 삼촌의 은행 으로 가는거고, 소위 천재 여. 아담스미스 가 국부론을 쓰고 개정판 나올때 이사람에게 증정을 해.

저 호프 은행이 포어다이스 에 직접 엮인겨 1772년에.

Hope had undertaken commissions for Fordyce on the Amsterdam Stock Exchange involving dealings for the account in shares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6] Alexander Fordyce had been speculating successfully ..., but in the early 1770s his investments went sour. He managed to deceive his partners for a while; according to one biographer, “It is said he succeeded in quieting their fears by the simple expedient of showing them a pile of bank notes which he had borrowed for the purpose for a few hours.”

호프 는 저때 암스테르담 주식시장에서, 포어다이스 의 영국동인도회사 주식을 거래해주면서 커미션을 먹는 주식중개업도 한거고. 얘가 여기 주식에 또한 농장투자에 스콧의 은행에 짱짱해서 거금을 투자한거야. 영국동인도 회사도 주가는 날라다니는 때고. 그러면서 얘가 그라나다 농장에도 투자 하고, 벌수록 더 벌고싶은거고. 그런데, 동인도회사 주가 가 폭락을 해. 벵갈 대기근 여파 가 일이년 지나면서 창고 가 비는겨 이게. 인건비는 늘고. 그리고 저 농장투자 도 별로일테고. 그런데 주 원인은, 동인도회사 주가 폭락 이야. 이 거래 담당인 호프 가 겁을 먹어. 담보 가 사라지는겨 이게.

포어다이스 가, 아마 자기 은행에서도 돈을 땡긴거고, 속여 채권자들을, 이때 막 빌린 페이퍼머니 들을 한다발 쌓아놓고, 걱정말라고 여기 받을 돈들이 이리 쌓여있으니까.

국부론 을 설명할 때 말했지만, 불리온 코인 시대의 저 뱅크노트 라는 걸 이해해야 저게 이해가 돼. 국부론 이야기에 남해회사 에 존로 의 미시시피 회사 이야기 가 있어야 저런 말들이 이해가 돼.

미국독립전쟁 의 원인 을 말할때 가장 중요한 건 1772년 의 저 금융사건이야. 이걸 말하는 한글러는 단 하나도 없을테고, 세금과중으로 미국시민들이 불만쌓여, 완벽한 거짓말이야.

저런 경제 화폐 이야길 이해를 못해. 빌 을 이해못해. 단지 어음 어쩌고 란 개념외엔 먼말인지 몰라. 불리온코인 피아트머니 가 먼말인지 제대로 이해를 못해 경제학 하는 애들조차. 당연히 역사 하는 인간들은, 전혀 몰라 이런 이야길. 이해할 지능이 절대 안되는겨.

남해회사 에 미시시피회사 의 버블로 사람들이 피아트머니 의 지폐같은 돈 맛을 안거야. 너무나 불편한 불리온 코인의 시대에. 저 버블이 1720년대 초 거든. 저 사태가 터져도, 이미 이 종이돈 의 편한맛을 절대 버릴 수 가 없는겨 이게.

불리온 코인 에 근거 한 빌 이든 본드 든 뱅크노트 라는 페이퍼머니 를 발행해야 하는데, 그냥 어설픈 미래가치 를 보고, 어차피 돈 들어와, 저거 사업 돼. 건물세우면 돈들어와, 해대면서, 종이를 찍어대는겨 저게. 그 종이 노트가 현금 의 불리온코인 행세를 하는거고. 오히려 본격적으로, 저 버블사태가 터지고나서, 이게 참 웃긴거야. 그 위험을 겪고도, 이미 종이도 맛을 알아버렸어 저게. 그리고, 역시나 이 불리온 코인 으로는 이미 저때의 경제력을 담아낼 수가 없게 된거야. 금과 은은 너무나 한정적이고, 그 이상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시대야 18세기 초 부터.

화폐라는건, 윤활유 일 뿐이야.

저 시대의 성장의 엔진 을 돌리기엔, 기존 불리온화폐로는, 불가능 한겨 이게. 아무리 버블이 터져서 폭락해서 망한다 해대지만, 그 이상을 돌리고 벌어드릴 경제력 이 된거야.

오히려 은행들이 더 등장하고, 미래가치를 보고 저렇게 무기명채권이니, 또다른 빌들 이니 를 걍 발행하는겨. 이게 시장에선 금은 코인 처럼 쓰이는거야. 버블사태 이후 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ㅋㅋㅋ.

저게 모두, 저 노트 들, 페이퍼 머니들이, 그냥, 차용증서 일 뿐이야 저건. 불리온코인 시대여. 은행에선 저 페이퍼 를 주면, 페이퍼 가 빌 이든 본드 이든 저건 노타리 가 공증한 차용증이고, 무조껀 금은 이 코인으로 줘야 해 코인으로 달라고 하면. 잉곳 덩어리를 주던가.

The tide of fortune then turned; Fordyce lost heavily at the beginning of 1771 in the fluctuations of the market caused by the dispute with Spain about the Falkland Islands. ... His losses continuing, he absconded, and the bank stopped payment on 10 June 1772. Later that year, (October?) Fordyce returned to England, declared personal bankruptcy, and in December had agreed a repay scheme with his creditors

동인도회사 주가 도 폭락하고, 이미 1771년부터 심각하게 손실을 봐, 포크랜드 제도 가 남미 끝의 동쪽섬들이야 여기 점유권으로 스페인과 전쟁직전까지 가면서 시장이 안좋고. 결국 사라지는겨, 프랑스로 도망가. 은행에서 1772년 6월 10일날 지급정지 를 해, 포어사이드 에 물린 뱅크노트들을. 이때부터 시작하는거야. 이사람은 그해에 다시 돌아와서 파산선언하고, 상환계획 세우고, 다시 자기지역 선거에도 출마해. 떨어지지만. 하튼 대단해.

In June 1772 Alexander Fordyce lost £300,000 shorting East India Company stock, leaving his partners liable for an estimated £243,000 in debts.[5] As this information became public 30 banks across Europe collapsed.[6][7][8] The boom and subsequent crisis were most pronounced in Scotland.[1] but also triggered a liquidity crunch in Amsterdam. In the end, none of them actually lost money. [9] According to Paul Kosmetatos existing literature dealing with aspects of the episode—no comprehensive coverage exists up to now.

다른쪽 내용을 보면, 저 6월에 터진거고, 동인도 회사로 30만파운드 를 손실을 본거야 이사람이. 걍 백배 만 하고 천원하면 300억원 이야. 호프가 물린게 걍 2백억원 보면 돼 무기명채권이. 그런데 이걸 지급정지 해버려. 은행이 돈을 안주는거야 이건. 법적으로 원래 물주 가 돈이없으니까 지급자가 지급의무가 없는겨. 이사람의 스콧 은행은 이삼백억 물린건데 얘들은 원래 직접당사자고 지급이행을 해야 하는애들이고. 유럽전역에 30개 은행이 망했어 연쇄적으로. 특히나 스콧 이야. 저 사람의 은행. 암스테르담의 호프 도 물린거란 것이고.

결국 아무도 실재로 돈을 잃지는 않았다. 저게 머냐면, 지급의무가 있는 은행이나 채무자 는 망하는거고, 호프 은행 같은 경우는, 지급정지 야. 안해도 되는겨 저게 법적으로. 원래 채권 주인이 망했으니까. 그래서 돈 잃은 인간은 없어, 저 당사자들 은행 빼고는, 하는 설명이야. 그러나 너무 극단적 주장이고. 여하튼, 유동성이 확 줄어버린거야. 은행이 신중해지기 시작한겨. 함부로 투자 안해.

The moneyed interests in Scotland founded the Ayr Bank to assume many of the responsibilities associated with a central bank, principally standing ready to advance notes to Scottish banks as a 'lender of last resort.'

문제는 스콧 의 은행이고, 이 스콧 은행들에 물린 런던 은행들이야.

뱅크런 인겨. 직접적 이해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어머, 내 노트 도 지급불능 벌어지는거 아니야? 해대며 공포에 떨어서, 은행가서 금은 코인 달라는겨 이게.

이 짓을 스콧 의 은행들이 터무니없게 한거거든 저 당시에. 포어다이스 도 스콧은행이고, 스콧의 공신력이 확떨어지는거야. 담보없는 노트를 남발한 애들이야 얘들이. 스콧이 아주 미개한 촌동네야. 계몽주의라는것도 1백년 늦게 온곳이고.

에어뱅크 가, 서쪽에서 대부분의 귀족들과 지주들이 투자한 은행이고, 스콧에서 자기들 땅 키우자 며 만들고 여기서 투자를 열심히 한거야 미래가치를 보고. 노트를 막찍어내고, 노트에 대한 상환이 오면, 이 돈을 런던에서 빌리는거야 자기들의 노트 를 할인해서. 이게 쌓이고 쌓여서 런던쪽도 타격을 받는거고.

뱅크런이 쟤들에게 오면서, 바로 망하는겨 줄 돈 없으면. 소문 다 나고.

6월 10일날 지급정지 소식 알려지면서, 스콧 에든버러 는 그야말로 공포 야. 거대한 지진이 온듯 해 저당시 글 보면. 마찬가지로, 저 스콧 은행들에 할인해서 돈빌려준 런던 쪽도 끔직한겨. 얘들은 돈을 다 떼인거거든.

After the crisis, a dramatic rise in the number of bankruptcies was observed: the average number of bankruptcies in London was 310 from 1764 to 1771, but the number rose to 484 in 1772 and 556 in 1773.[1] Banks that were deeply involved in speculation endured hard times during the crisis. For example, the partners of the Ayr Bank paid no less than £663,397 in order to fully repay their creditors. Owing to this process, only 112 out of 226 partners remained solvent by August 1775. In contrast, banks that had never engaged in speculation did not bear any losses and gained prestige for their outstanding performance despite the turbulence.[11]

런던 에서만 파산이 1771년까지는 평균 310개 회사인데, 1772년에 484 개, 1773에는 556개. 이건, 은행들이 유동성을 화악 줄이면서 돈이 안돌면서 회사들이 파산하는거야. 에어뱅크 자체는 아주 남발한 애들이야. 걍 사업계획서 만 보고 빌 발행하던 애들이거든. 그 빌들로 바로 돈 받아 챙기고 사기꾼들은. 에어뱅크 의 빚만 걍 육칠백억원 이야 아주 작게 잡아도. 저 은행의 주주들 파트너들이 226명이고 이들 모두 귀족에 지주들이야. 책임의무가 있어. 절반이 다 탈탈 털렸다는겨 빚 상환해야 해서. 1775년 즈음엔. 반면에, 철저히 코인과 정확한 담보에 근거해서 운영한 은행은 오히려 신용이 더 올라갔다는 거고 저 분위기 에서.

In Amsterdam a worse catastrophe was averted by rapid imports of precious metals.[22] In January 1773 Joshua Vanneck and his brother were involved (by Thomas Walpole) when British merchants sent ₤500,000, gold and piastre to Amsterdam

암스테르담 은 최고의 금융이고 이전 국부론 썰. 여기 신용력이 최고로 저때 인증받으면서, 여기에 불리온 코인들이 몰리는겨. 영국상인들도 자기들 돈을 이리로 보냈다는거고.

The credit crunch was a real disaster for the Dutch plantation colonies in the West Indies and particularly for Surinam, where colonial agriculture was almost exclusively carried out with the help of the city of Amsterdam. In the summer the crisis reached Jamaica, Grenada, and the Danish West Indies

크레딧 크런치. 크레딧 이 신용이지만, 시작은 자금이체 야. 여하튼 은행이 돈줄 유동량을 확 줄인거야. 은행돈 투자받아서 굴리는게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농장들인데, 타격이 심각했다는거지.

문제의 시작이 영국동인도회사 야. 당연히 여기에 빚내서 투자한 애들도 거지된거고, 동인도회사 자체도 심각한겨 재정상태가

The root of this crisis in relation to the East India Company came from the prediction that ‘peace conditions plus an abundance of money would push East Indian shares to ‘exorbitant heights.’[31] Fordyce had speculated away the bank's assets.
In 1771, a group of Dutch financiers led by the Van Seppenwolde brothers took a large position in EIC stock.[37] They had borrowed money to buy a stake in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expecting the firm’s share price—depressed by famine and unrest in Bengal—to rebound. There is also evidence that EIC directors James Cockburn and George Colebrooke were "bulling" the Amsterdam market during 1772


7년전쟁 으로 영국세상이 되면서, 주가가 이그조비언트 하이트, 궤도를 벗어나서 뚫었어 폭등이야. 포어다이스 도 자기 은행 돈을 여기에 드리 민거고. 네덜란드 투자자들도 빚내서 여기 주식을 사. 이런 애들은 다 망한겨. 또한 런던 은행가도 폭락한 주가 에 당연히 유동성이 말리는거고.

동인도회사 자체도 심각한겨 이게. 벵갈 기근 1770 이 직접적 타격이고.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얘들을 살려야 해 당연히. 얘들 주가 를 올려줘야 하고. 그래서 얘들 재고창고 에 쌓인, 북미용으로 팔리지 않는 걸, 세금 줄여서 북미에 팔게 한게 티액트 법이야 1773년 5월 10일 의. 북미도 밀수 네덜란드산보다 더 좋은 티 를 더 싸게 먹어서 좋고, 해피한겨 서로.

그런데 이게 웃기게도, 보스톤 티파티 의 폭동이 되어 버린거야. 저때 일자리 잃고 손실 보는 네덜란드 티 밀수하는 애들과, 영국창고의 것을 중개해주던 애들이 주동이 되어서, 영국이 지들멋대로 법만들고 기존법 무시하고, 이건 말도 안되는 주장이야. 이런게 북미의 불만세력애들에게 먹힌겨 웃기게도. 이게 미국독립전쟁의 진짜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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