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urth Anglo-Dutch War (Dutch: Vierde Engels-Nederlandse Oorlog; 1780–1784) was a conflict between the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the Dutch Republic. The war, contemporary with the War of American Independence, broke out over British and Dutch disagreements on the legality and conduct of Dutch trade with Britain's enemies in that war.

4차 앵글로-더치 전쟁. 1780-84. 미국 독립전쟁 후반부에 발생. 영국이 북미에서 진도가 안나가거든. 전쟁 시작하고 5년이 지났고, 북쪽에서 진전없고 전선이 남쪽으로 진행되고 바로 협상 국면이야. 영국이 네덜란드에 화풀이하는겨 이게.

둘이 1차에 붙는 건 크롬웰 때고, 크롬웰이 찰스 목짜르고, 찰스 아들 찰스2세 가 잉글랜드 휘젓고 대륙으로 튀었거든. 크롬웰은 정통성의 문제가 가장 커. 저 찰스 를 잡거나 주변 애들 에게 다짐을 받아야 해. 자기를 인정하라는. 찰스의 여동생 메리 가 오렌지 남편에 아들인 나중 1688 오렌지 윌리엄3세고, 네덜란드에게 자기 인정하고 찰스2세 받지 말라는겨. 네덜란드가 엉겁결에 당한거고 1차는. 2차는 찰스2세 오르고, 이 2차 가 진짜 경제 전쟁이야. 네덜란드의 위대한 영웅 드 라이터 가 2차 에 3차 도 해전에서 해주시는겨. 3차 때는 프랑스 루이가 네덜란드 지우려고 오는거고 찰스2세는 아무 주관없이 들러리서는거고 이걸 네덜란드 강물 방어선으로 막는거고 찰스는 네덜란드 가려다 만거고.

그리고 4차 가 백년 만에 터진건데, 영국이 분풀이 하러. 네덜란드 는 자기 오렌지 로 잉글랜드 정치경제 키워주고, 오히려 웃기게도 오렌지 를 잉글랜드로 보내고 자기들 땅은 쇠하는겨 이게. 참 이 킹 하나 가 머무는 코트 가 어디냐 에 따라서 절대적인거야 나라의 흥망이. 물론 제대로 된 킹이. 오렌지 윌리엄 은 위대한 인간이야. 오렌지 가 런던갈때 이미 네덜란드의 리더층은 알았어 자기들이 쇠할 걸.

Although the Dutch Republic did not enter into a formal alliance with the United States and their allies, U.S. ambassador (and future president) John Adams managed to establish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Dutch Republic, making it the second European country to diplomatically recognise the Continental Congress in April 1782. In October 1782, a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was concluded as well.

미국의 대표는 콘티넨털 콩그리쓰 야. 대륙의회. 전쟁 전에 모여서, 여기서 만든게 콘티넨털 아미 이고, 이 콘티넨털 아미, 가 전쟁후 에 해산했다가, 유에쓰아미 가 되는겨. 조지와싱턴 이 씨니어 오피서 여. 당시는 커맨더 가 아냐.

미국을 인정하라 는게 대륙의회 를 인정하는거고, 영국 네덜란드 전쟁 중에 네덜란드 가 공식 인정을 해. 영국은 계속 바다에서 네덜란드에게 분풀이 하는거고. 이 네덜란드 라는 나라는, 참 웃픈게, 엘리자벳 의 잉글랜드 가 만들어준거고, 더하여 프랑스 도 스페인 오스트리아 에 앙숙이어서 네덜란드 를 도와준거일 뿐이라, 이렇게 선 나라지만, 잉글랜드 에겐 그 이상으로? 해준 거일 수도 있어. 오렌지 를 준 나라고, 물론 오렌지 도 자기 나라 외교로 살릴려고 잉글랜드 간거지만. 그러나 언어 세상에서 영국의 영어는 너무나 네덜란드 를 하시 경시 멸시 하거든. 참 너무한건데 저건. 하물며 저 영어의 네덜란드 비하 단어 때문에 나라이름을 바꾸려 한 네덜란드야.

어쨌거나 저때 화풀이 당하면서, 대게 바다에서 벌어지는거고. 해외 식민지 를 겨누고

The Battle of Dogger Bank was a naval battle that took place on 5 August 1781 during the Fourth Anglo-Dutch War, contemporaneously related to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in the North Sea. It was a bloody encounter between a British squadron under Vice Admiral Sir Hyde Parker and a Dutch squadron under Vice Admiral Johan Zoutman, both of which were escorting convoys.

가까운 바다의 전투가 도거 뱅크 야. 잉글랜드 오른쪽 백키로 바다. 도거 라는게, 코드 청어 잡이 보트 여. 투망이나 롱라인 이라는 낚시 고리들 주렁주렁 단거 로 바다 긁으면서 잡는 배. 저 바다가 모래언덕으로 수심이 얕아. 어장이 풍부하고. 여기서는 둘 다 심각하게 치뤘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론 4차는 네덜란드 패. 이미 네덜란드는 오렌지 가고나서, 저무는 나라거든. 인도의 식민지 동남쪽 도시는 걸로 끝나는거고.

저 네덜란드 의 패배 를 고대하던 인간이, 합스부르크 의 요제프 야. 바바리아 승계도 뜻대로 안되고, 얜 뜻대로 된게 하나도 없었거든. 힘도 없고.

The Kettle War (Dutch: Keteloorlog or Marmietenoorlog) was a military confrontation between the troops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the Republic of the Seven Netherlands on 8 October 1784. It was named the Kettle War because the only shot fired hit a soup kettle

케틀 워. 1784년 10월 8일 에 오스트리아 쪽에서 전함이 출항한거고, 단지 대포 한방으로 주전자 를 타격했다는건 비유 일 뿐이고, Fort Lillo 릴로 요새 를 공격하고, 릴로 에서는 제방을 무너뜨려서 주민들이 죽고, 그러다가 휴전을 한겨.

Since 1585, the northern Netherlands had closed off the Scheldt, so that the harbours of Antwerp and Ghent could not be reached by trade ships,

네덜란드 독립전쟁 80년 하기 시작할때부터 셸트, 스켈트, 불어 에스코 강 은 막힌거야. 여기 하류가 안트베르펜 이고, 여기서 북쪽 십여키로 가 네덜란드야. 여기가 네덜란드와 의 접경이고, 안트베르펜 까지의 에스코강 이 완벽히 막힌겨 2백년 동안. 여기 상권이 암스테르담 으로 넘어간거고, 에스코 강의 헨트 와 안트베르펜 은 거지도시가 된거고, 벨기에지역은 스페인후계자전쟁으로 오스트리아 가 갖고 와서, 요제프 가 여기 막힌 강을 뚫으려고 저때 시작한거야 네덜란드 의 영국과 4차전쟁 패배를 기회로. 안트베르펜 은 에스코강 남쪽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땅이야. 여기서 출항해서 네덜란드를 치러 가는거고.

Since Europe's "Diplomatic Revolution" of 1756, Austria, and thus the Austrian Netherlands, had been in an alliance with France. Prussia, France's former ally, entered into an alliance with Britain. The change, sensational at the time, made nonsense of all the strategic assumptions and plans, current since 1713, based on the premises that the southern Netherlands would serve as a barrier between the Republic and France and that the Republic's security depended on close ties with Austria and Britain. It was a shift which undoubtedly made it ever more attractive for the Dutch to remain neutral in any conflicts between both Britain and France, and Austria and Prussia

당시 오스트리아 나 네덜란드 나, 저무는 나라고, 오스트리아 가 7년전쟁 때 프랑스 와 손을 잡아. 이걸 외교적 혁명 사건이라고 해 1756년. 프랑스 와 신성로마 는 천년의 웬수사이고, 오스트리아 가 이걸 깬거야. 프러시아로부터 실레시아 를 갖고 오려고. 7년전쟁이란건 영국 대 프랑스 전쟁이고, 영국은 하노버 가 옆의 프러시아가 더 가깝고, 오스트리아 입장에선 대륙의 프랑스 가 더 아쉽고, 그러나 역시 프랑스 도 이미 약해져가는 나라고, 러시아 는 예카테리나 의 초강력이고,

네덜란드 가 저 상황에서, 영국 프러시아 동맹, 오스트리아로 돌아선 프랑스 사이에서 중립 안지키면 나라가 사라지는겨 이게. 더하여 네덜란드 를 미끼로 전쟁 발발하면 그 나라도 피곤해지는거고. 오스트리아 가 저걸 확전 을 못해. 그냥 주변 요새에 찝쩍 대고선 올 뿐. 이게 케틀 전쟁 이야. 1784년. 이게 다음해 야 마무리가 되고.

네덜란드 는, 영국과의 4차전쟁 때부터, 등장하는게 패트리오트 야. 이 패트리오트 라는 단어는, 미국독립전쟁 부터 미국인들이 자칭하면서 등장한 단어고, 이걸, 네덜란드 에서 카피를 한겨. 오렌지 들에게 벗어나려는. 자기들이 마치 미국의 패트리오트 라며. 즉, 오렌지 네덜란드 입장에선 반란군 이야.

The Patriottentijd (Dutch pronunciation: [pɑtriˈotə(n)tɛit]; lit.'"Time of the Patriots"') was a period of political instability in the Dutch Republic between approximately 1780 and 1787. Its name derives from the Patriots (Patriotten) faction who opposed the rule of the stadtholder, William V, Prince of Orange, and his supporters who were known as Orangists (Orangisten)

오렌지 5세 는, 오렌지3세 가 자식없이 죽고, 침묵오렌지 의 동생 핏줄이야. 오렌지3세 는 침묵오렌지 다음 아들 모리스 에 동생 프레데릭 헨리 핏줄인거고.

오렌지5세 는 엄마가 영국 조지2세 의 딸이야. 조지3세 는 조지2세 의 장남의 아들, 즉 손자 야. 오렌지5세 와 조지3세 가 항렬 이 같아 조선식으로.

William V (Willem Batavus; 8 March 1748 – 9 April 1806) 얘가 저당시 나이 30이 안될때인데. 네덜란드 패트리오트 시절에.

프리드리히2세 프러시아는 엄마가 하노버고, 조지2세 는 외삼촌 이야. 나이가 30살 많아. 동시대이고, 뒤에 손자 조지3세 와도 같이 하는거고. 조지3세는 프리드리히2세 의 조카 야.

The Prussian invasion of Holland[1] was a Prussian military campaign in September–October 1787 to restore the Orange stadtholderate in the Dutch Republic against the rise of the democratic Patriot movement.

네덜란드 패트리옷 이 4차 앵글로 전쟁 1780에 시작해서 1787에 끝나. 주전자전쟁이 사이에 끼고. 그래서 이 주전자 전쟁때 얘들이 또한 민병대 를 만들어 자기들만의 애국군대 라며. 미국을 흉내낸 반군인겨 이건. 역시나 홀란드 애들이고, 이 홀란드 애들의 오렌지 에 대한 반감이 계속 이어오는거야.

저게 프러시아 군대가 진압하면서 끝나는겨. 이때 프러시아 킹 은 막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2세 야. 프리드리히2세 가 1786년에 죽어 74세. 호모 인듯 자식없이. 동생이 받은겨.

Princess Wilhelmina of Prussia (Frederika Sophia Wilhelmina; 7 August 1751 in Berlin – 9 June 1820 in Het Loo) was the consort of William V of Orange and the de facto leader of the dynastic party and counter-revolution in the Netherlands. She was the daughter of Prince Augustus William of Prussia and Duchess Luise of Brunswick-Wolfenbüttel. Wilhelmina was the longest-serving Princess consort of Orange.

막 프러시아 킹 이 된 사람의 여동생이 빌헬미나 야. 오렌지5세 의 부인이야. 엄마는 볼펜뷔텔 이야. 볼펜뷔텔 은 걍 무조건 조지들의 하노버와 엮이는 애들이야. 신랑 오렌지 가 홀란드 애들에게 군권을 박탈당하고 쫓겨나. 이 여자가 왔다갔다 하면서 신랑 힘이 되는겨. 이 여자를 패트리옷들이 납치도 해서 헤이그 에 못가게 해.

홀란드 의 패트리옷 들이 외교로 기대는게 웃기게도 프랑스 야. 과거 1672 람프야르 라며 루이때문에 나라 지워질까봐 떨었던 네덜란드의 애국자들이 과거의 적폐 에게 기대는겨. 오렌지들은 영국과 프러시아와 끈끈하고, 이전 프리드리히2세 도 저런 애국애들에게 매력을 못느끼다가 죽은거고.

여동생이 헤이그 길에 홀란드애들에게 막힌게 6월이야. 그리고 오빠한테 편지를 쓰는겨. 영국은 오렌지 편이지만, 군사적으로 딱히 개입할 여력이나 명분이 없는겨 이게. 막 미국 독립하고. 편지를 받은 오빠 프리빌헬름2세 가 바로 즉위한지 1년만에 바로 전쟁선포 하고 2만명 병력의 프러시아군이 들어와. 여기에 오렌지들이 합세하고.

If the States of Holland acceded to these wishes, she would ask her brother the Prussian king to remove his troops. Of course, the States did as asked: the people on her list were proscribed on 11 October. The Princess now was ready to do as she had promised, but the Prussian king had incurred great expenses that he wanted to be recompensed for. The Duke and the Princess negotiated him down from his initial demand of several million guilders, but he insisted on a "douceur" for the troops of exactly 402,018 guilders and 10 stuivers, to be paid by Amsterdam alone. But the States of Holland generously rounded this up to half-a-million guilders, to be paid by the entire province, and the king acquiesced.[42] As invasions go, this was a bargain: the victorious revolutionary French forces in 1795 demanded an indemnity of 100 million guilders for their "liberation" of the Netherlands from the stadtholder's dictatorship.

내전으로 가서, 프러시아 의 오렌지들이 이기는거고, 빌헬미나 가 일곱살 어린 여동생인데, 여자의 뜻대로 홀란드 가 요구를 들어주고, 프러시아군은 철수 를 해야하는데, 오빠 킹이 전쟁비용을 요구해 이삼백만 굴덴 을. 킹은 암스테르담 이 40여만 굴덴 10스타이버, 백원단위까지 정확히 요구하는겨. 각 지역별로 든 비용 해서 총 이삼백만. 최종으로 전부 50만 굴덴 에 합의를 해.

나중 프랑스 1789 시민군 의 프랑스 가 네덜란드를 접수해서 결국 홀란드 패트리옷 세상이 된듯해. 프랑스 는 자유의 댓가로 1억굴덴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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