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r of the Bavarian Succession (German: Bayerischer Erbfolgekrieg; 3 July 1778 – 13 May 1779) was a dispute between the Austrian Habsburg monarchy and an alliance of Saxony and Prussia over succession to the Electorate of Bavaria after the extinction of the Bavarian branch of the House of Wittelsbach. The Habsburgs sought to acquire Bavaria, and the alliance opposed them, favoring another branch of the Wittelsbachs. Both sides mobilized large armies, but the only fighting in the war was a few minor skirmishes. However, thousands of soldiers died from disease and starvation, earning the conflict the name Kartoffelkrieg (Potato War) in Prussia and Saxony; in Habsburg Austria, it was sometimes called the Zwetschgenrummel (Plum Fuss).

바바리안 후계 전쟁. 1778-79. 합스부르크 대 작센 프러시아 연합. 비텔스바흐 의 바바리아 직계 끝. 양쪽은 거대한 군대를 동원했지만 전투는 작게 치러져. 그러나 수천의 병력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사망. 감자 전쟁 카르토펠 크리크 라고 프러시아와 작센 칭. 플럼 퍼쓰, 자두 난리, 츠베츠겐 룸멜.

On 30 December 1777, Maximilian Joseph, the last of the junior line of Wittelsbach, died of smallpox, leaving no children. Charles IV Theodore, a scion of a senior branch of the House of Wittelsbach, held the closest claim of kinship, but he also had no legitimate children to succeed him. His cousin, Charles II August, Duke of Zweibrücken,

1777년 연말에 칼7세 의 아들 막시밀리언3세 가 나이 50에 천연두로 죽어 자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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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바바리아 의 비텔스바흐 는, 츠바이브뤼켄 에서 갖고 가는건데. 여기서 킹 이 되는거고, 나폴레옹 오시고는.

By the early 16th century, owing to the practice of dividing territories among different branches of the family, junior lines of the Palatine Wittelsbachs came to rule in Simmern, Kaiserslautern and Zweibrücken in the Lower Palatinate, and in Neuburg and Sulzbach in the Upper Palatinate. The Elector Palatine, now based in Heidelberg, adopted Lutheranism in the 1530s and Calvinism in the 1550s.

팔라틴, 이란게 중세유럽 의 시작에서, 가장 핵심이야. 킹 이 지역에 카운트 라는 대리인을 보낸거고, 이 카운트 의 핵심이 팔라틴 카운트 라는겨. 이 팔라틴 카운트 가 세습이 되어서 듀크 라는 공작 자리의 명분이고, 팔라틴 을 쥔 자가 공작 을 잇는 거야. 이게 바바리아 에 슈바벤 이고 잉글랜드도 카운트 팔라틴 이 최고 의 백작 이야.

다른곳은 듀크 로 가는거고, 라인강 지역은 자잘한 카운트 들이거든, 여기에 따로 듀크 를 안줘. 카운트들을 대표하는 자리를 Kurfürst von der Pfalz 쿠어퓌어스트 폰 데어 팔츠, 일렉터 팔라틴 이라는 팔라틴 선제후 야. 쿠어 가 초이스 이고, 퓌어스트 가 프린스 야. 팔츠 라는 팔라틴 에게 선거권을 준다는겨. 이게 라인강지역을 그래서 팔츠그라프 라고 하게 되고, 팔라틴 선제후 라는 특이한 이름이 생긴거야.

팔라틴 이란건 공작 자리를 잇는 자리고, 라인강에만 있는게 아니야. 헷갈리거든 이게. 잉글랜드도 팔라틴이 있어.

카운트 팔라틴 자격을 잡는 가문이, 그 지역의 공작 자리를 승계하는겨. 바바리아 작센 슈바벤 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라인강 지역만, 카운트들의 대표 가 쿠어퓌어스트 라는 이름의 라인팔라틴 이 된거야.

이 라인팔라틴 은, 겔피 가문에서, 이게 비텔스바흐 로 간겨. 그래서 비텔스바흐는 자기 바바리아의 팔라틴 의 공작에 더해, 라인팔라틴 이란 이름으로 라인강 지역을 갖고 있던거야. 호헨슈타우펜 에서 겔피 에서, 이게 1214년에 비텔스바흐 로 온거고, 비텔스바흐 가 1180년에 비텔스바흐 에서 첫 바바리아 공작을 하고, 이 아들이, 호헨슈타우펜 끊긴 라인팔라틴 도 같이 받는겨 바바리아 공작 자리와 함께. 그리고 이 아들의 손자 부터, 13세기 말에, 형제가 갈려서, 장남쪽이 라인팔라틴 과, 바바리아의 다뉴브강 북쪽을 갖고, 동생쪽이 다뉴브 아래를 갖아. 이게 어퍼 팔라틴 과 로우어 팔라틴의 시작이고. 그래서, 뒤에 가면, 라인팔라틴 이 뚝 떨어진 어퍼팔라틴 의 프랑코니아 지역도 같이 갖고 가는거야.

그래서, 라인팔라틴 은, 비텔스바흐 의 직계여 이게. 오히려 바바리아 공작들 보다 더 직계야.

마틴 루터 티나오고 칼5세 황제 시절의 라인팔라틴 은 비텔스바흐 야 여전히. 따로 방계 로 부르지 않아.

Frederick III of Simmern, the Pious, Elector Palatine of the Rhine (14 February 1515 – 16 October 1576)

슈말칼덴 전쟁의 종교전쟁할때, 라인팔라틴 선제후는 짐먼 의 프레데릭3세 야. 이사람이 비텔스바흐 직계끊겨서 짐먼 의 카운트가 선제후 를 시작한겨. 이 이전의 비텔스바흐 가 마틴루터 시대고 역시나 프로테스탄트 였어. 이 짐먼에서 뒤에 잉글랜드 제임스 의 딸이 가서 보헤미아 겨울킹 하는 프레데릭5세 인거고.

Palatine Zweibrücken (German: Pfalz-Zweibrücken),

짐먼 의 가지 가 츠바이브뤼켄 이야.

Palatinate-Sulzbach

쯔바이브뤼켄 의 가지 가 쑬츠바흐. 이 쑬츠바흐 는 다뉴브 강 위이고 어퍼팔라틴 이고 암베르크 가 더 대명사이고.

이 쑬츠바흐 는 끊겨서 노이부르크 로 들어가.

Palatinate-Neuburg (German: Herzogtum Pfalz-Neuburg)
노이부르크 는 다뉴브강변 에 있는 도시고, 여기도 어퍼팔라틴 이자 라인팔라틴 에 속하는겨. 1505에 생긴거고, The War of the Succession of Landshut 란트슈트 후계전쟁때 노이부르크 가 따로 나오고, 얘들은 당연히, 어퍼팔라틴 에 라인팔라틴 인 프로테스탄트 의 칼뱅 이야. 이게 뮌헨 의 바바리아 로 합쳐지고 여기서 막시밀리안에 칼7세 의 비텔스바흐 가 나온거야.


Charles Theodore (German: Karl Theodor; 11 December 1724 – 16 February 1799) reigned as Prince-elector and Count Palatine from 1742, as Duke of Jülich and Berg from 1742 and also as prince-elector and Duke of Bavaria from 1777 to his death.

Charles II August Christian (German: Karl II. August Christian; 29 October 1746 – 1 April 1795) was Duke of Zweibrücken from 1775 to 1795.

바바리아 공작 직계가 끊기고, 경쟁자가, 칼 테오도르, 는 노이부르크 팔라틴 이야. 이전 뮌헨 에 들어간 란트슈트 의 노이부르크.

칼 아우구스트 는 츠바이브뤼켄 공작 이야. 이때 츠바이브뤼켄 의 라인팔라틴 자리는 이사람의 동생 이 쥔겨.

노이부르크 팔라틴 의 칼 테오도르 가 결국 저 바바리아 후계전쟁 에서 예카테리나 중재로 공작 을 잇지만, 자식없이 죽어. 경쟁자 츠바이브뤼켄 공작 도 자식없이 죽어. 바바리아 를 잇는건, 칼 아우구스트의 동생이었던 라인팔라틴 의 막시밀리언 이 잇는거야 이때부터. 이들이

Palatinate-Birkenfeld (German: Pfalz-Birkenfeld) 비어켈펠트 야. 짐먼 츠바이브뤼켄 비어켈펠트 가 지금 모두 라인팔츠 스테이트 의 도시들이고, 이 비어켈펠트 가 바바리아 킹으로 1차대전까지 가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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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는 요제프 가 황제고 엄마 마리아 테레사 가 아직 살아있어. 이 전쟁 하고 바로 다음해 죽어.

동생이 레오폴트 황제 하고, 이사람의 증손자 가 페르디난트 황제 야 3대를 잇는. 끊기고, 페르디난트 의 동생의 자식이 프란츠 요제프 오스트리아 황제야. 프란츠 요제프 의 외아들이 나이 40에 자기 애인이랑 자살을 해. 그래서 후계자 가 프란츠요제프의 동생의 장남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여. 이사람이 사라예보에서 부인 소피 와 암살당하는거고 1차대전 터지는거고, 그래서 다음이 죽은 페르디난트 의 동생 의 아들 이야. 이사람이 마지막 황제 인거고.

Acquiring territory in the German-speaking states was an essential part of Joseph's policy to expand his family's influence in Central Europe. For Frederick the Great, Joseph's claim threatened the Prussian ascendancy in German politics, but he questioned whether he should preserve the status quo through war, diplomacy, or trade. Empress Maria Theresa, who co-ruled with Joseph, considered any conflict over the Bavarian electorate not worth bloodshed, and neither she nor Frederick saw any point in pursuing hostilities. Joseph would not drop his claim despite his mother's contrary insistence. Frederick August III, Elector of Saxony, wanted to preserve the territorial integrity of the Duchy for his brother-in-law, Charles August, and had no interest in seeing the Habsburgs acquire additional territory on his southern and western borders. Despite his dislike of Prussia, which had been Saxony's enemy in two previous wars, Charles August sought the support of Frederick, who was happy to challenge the Habsburgs. France became involved to maintain the balance of power. Finally, Catherine the Great's threat to intervene on the side of Prussia with fifty thousand Russian troops forced Joseph to reconsider his position. With Catherine's assistance, he and Frederick negotiated a solution to the problem of the Bavarian succession with the Treaty of Teschen, signed on 13 May 1779.

합스부르크 의 요제프 는 바바리아 를 자기가 갖아와야 해. 엄마 테레사 는 전쟁이 지겨운거고 아들을 말려. 요제프 는 죽은 바바리아 공작의 여동생이랑 결혼했어 저걸 갖고오려고. 츠바이브뤼켄 의 아우구스트 는 바바리아 와 오스트리아네덜란드 를 바꾸자고 해. 자기 입장에선 저 벨기에 땅이 가까와. 거절을 해.

요제프 입장에선, 프러시아 가 실레시아 도 차지하고 독일땅에서 합스부르크 의 지분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반발이야.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2세 는 일단 이 상태 유지 하는것이고, 합스부르크 가 바바리아 를 취하는건 절대 안되는 입장이고, 웃긴게 작센 이야. 얘들은 이미 힘이 없는 상태에서 합스부르크 가 커지는걸 반대해. 라인쪽 아우구스트 는 결혼으로 엮인 사이고 저 먼 곳애가 갖고 가는게 좋아. 정작 전쟁은 프러시아 만이 하는겨 합스부르크 를 상대한 힘은. 프러시아 가 먼저 보헤미아 를 쳐들어가는거고, 이걸 예카테리나 가 중재해. 러시아 가 아주 이쪽에서 강력한겨. 합스부르크 의 절대적 동맹은 러시아야. 7년전쟁부터 절대적앙숙이었던 프랑스 와 동맹이 되었지만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가 커지는건 바라지 않아. 예카테리나 가 오히려 병력을 지원해 프러시아에게. 요제프 가 포기 를 하는겨 결국. 원래 요제프 는 노이브루크 팔라틴 과 손잡고 바바리아를 나눠먹기로 한거거든. 노이부르크 에게 바바리아가 가면서 그냥 그대로 잇는겨. 그리고 자식없이 죽고 칼 아우구스트 의 동생 비어켄펠트 의 라인팔라틴 에게 바바리아 가 가는거고, 이들 가문이 1차대전까지 가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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