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3Es3I8nKlw

 

 

 

아래 생각, 생각하다 라는 단어의 풀이는 위의 영상으로 대체 합니다 202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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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이 26 April 1889 – 29 April 1951. 히틀러가 6일 먼저야 출생이. 4월 20일.

히틀러 는 비트겐슈타인 에 대한 열등감이 쩔을 데로 쩐 상태에서, 이  컴플렉스를, 개인의 너무나 무능함 저열 저능 을 해결 하기 위해, 자기의 아이덴티티 를 레이시즘 으로 레프리젠트, 프로젝트, 빔으로 쏴. 그게 자기생각에 뜬 화면이야. 이걸 자기만의 레이시즘 내셔널리티 의 명제들로 표현을 해. 그 언어의 표현대로 행동을 해.

이 비트겐슈타인 이란 사람은, 19세기를 마무리하고 20세기로 진입해서 문을 여는 가장 아주 상징적인 인물이야.

인류의 문명을 가르는, 진보를 위한, 즉 지금 현대문명을 만들어내고, 또한 그 다음을 만들어갈 수 있는 그 포텐셜 잠재태가 쌓일수 있고 터진, 그 결정적 시기는 그리스 아테나이 의 기원전5세기 와, 19세기 야.

가장 위대한 시기는 저 두 시기야.

19세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시기야.

어마어마한 인물들은, 모두 이 19세기에 나오는겨. 기원전 5세기부터의 사유가 2000년 이상이 쌓여서. 물론, 웨스턴 만. 이스턴은 전혀 의미없어.

이스턴은, 전혀 의미없는 역사야 이게. 지금까지 씨뮬레이션 해보니까. 오직 웨스턴 애들의 힘을 만들어 주기 위한 , 진선미 의 반대역할에 몰입해서, 오히려 웨스턴에게 모랄 의 어게인스트, 저렇게 살면 안되는구나 하는 용도로만의 모델 뿐이었던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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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전쟁은, 열등감 이 시작하는거야.

열등한 애가 폭력을 행사해. 지저스는 저걸 저 악을 사랑하라고 했어. 이제는 사랑 사랑 하다가는 열등의 바바리안 세상이 돼. 그게, 극동 이고 조선이야. 페리 의 막부 이고. 막부 애들 의 표현이야 미국애들에게, 니들이 대체 뭔데 내정간섭하냐!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는데 왜 참견이냐! 왜 간섭하는거냐! 가만히 냅둬라 우리를!

이건 내가 주작한 문장이 절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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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 하지 않아, 앞으로는. 미워는 안해. 상종안해. 그러나 선을 넘어 개입하면 난 지킬거야 나만의 문명을. 원수를 사랑하라, 지저스의 저런문장은 이제 안맞아. 팩트가 아니야 세상이 아니야 더이상. 이 문장 때문에 웨스턴은 복수 퓨드 에 자제를 해온겨 그나마. 이스턴은, 말살을 몰살을 시켜 복수대상 적폐는. 구족 십족을 멸해. 저런 문장이 없었어서.

이제는 저 문장을 못써. 폭력의 무기가 상상초월이야. 사랑해주다가 문명자체가 지워져. 그래서, 3차대전 이후로는, 악랄하게 , 지우는겨 이기는 편은. 그때 비로소, 럿셀의 사회주의 월드 유나이티드 가, 진짜 유토피아 카먼웰뜨가 지구에 서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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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꺼낸게 그래서, 아리안이즘 인데, 이게 웃긴게 머냐면, 아리안 이란 단어는 쓰면 안된다 히틀 러땜에, 아리안 은 이란 으로 대체 쓴다. 인도아리안 과 인도이란과 인도유럽피안과 머냐 대체.

가장 의문이, 슬라브 여. 저당시 아리안은 인도유럽피안 이야 이게. 슬라브도 여기여. 슬라브는 그럼 히틀러가 어떻게 여기기로 한건가?

권력자 는, 오직, 아니, 미개한 권력자는, 이스턴의 모든 권력자들은 미개해 미개했고 미개할거고. 웨스턴엔 미개한 권력자 가 극히 드물어. 나름 다들 자기보다 자기영지의 사람들을 땅들을 위해 살아 그게 자길 위함이 되니.

미개한 애들은, 화면을 이용할 뿐이야.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만. 자기 주위몇몇만. 밑에 수천 수만 수천만명 이 죽네 사네 는, 전혀 전혀 관심 이 없어요 정치권력은. 지금 이 나라 정치판 에 이씨조선에 북조선에 중국 등등을 보라고. 터키를 보고. 술탄 은 형제들을 죽여야만 해. 칼리프가 되서도 여전히. 지금 에르도안 도, 쟨 권력 내려오면, 죽어, 투르크 역사로 베겨있는 유전자여. 절대 못내려와. 마두로 는 얜 돈 챙겨서 떠나야해. 얜 차베스만큼의 기반을 못 만들었어.

정치권력은, 관심이 없어 자기 인민들에겐.

히틀러는, 경제를 살리려고, 지폐를 찍어내는겨. 인기를 끌려고 그래서. 이 지폐 찍어내는게 그래서 결국엔 1트릴리언 마르크, 1천조 마르크 짜리가 1마르크 가 되는겨 이게.

피아트머니 주술이 다 한거거든.

지폐 발행 은 , 인플레를 안일으키는 정도로만 찍어야해 피아트머니 세상에선.

쟤들은 이미 히틀러 초기 부터, 저 마르크지폐 똥값 될걸 눈치를 채 민심은. 그러나 걍 간겨 눈감고. 당연히 외환 거래에선 문제가 돼.

자기들만의 세상에선, 저런 지폐 무작정 찍기 발행하기 가 통해. 언제까지 통해? 그 문명의 크기 까지만 그만큼의 지폐가 에너지로 쓰이는거야. 그 잠재태 를 넘어서는 지폐량 은, 그때부터 휴지가 되는겨.

히틀러 애들이 이걸 알아. 이걸 이미 알아. 저 문명의 잠재크기를 그래서 군수품 제작에 쏟은겨 쟨. 얜 이런 머린 있는겨 이게. 지폐가 턱끝까지 차기 직전에, 시작을 하는거야 체코 폴란드 부터.

아리안주의 가 슬라브 를 쳐들어가는게 웃긴겨 저게.

이걸 의외로 제대로 말 하는 애들이 드문데.

나치는 슬라브를 아리안 으로 여기지 않았다. 거짓말이여 말도 안되는. 저당시 아리안주의 는 슬라브 도 아리안 이야. 논리를 어드래 만들어? 같은 아리안 이지만, 끕이 다른겨. 슬라브 는 슬레이브, 노예로 쓰자 야. 얜 동쪽을 치면서 러시안 도 노예로 쓰기로 한겨 식민지화해서. 나치에서 이 슬라브 가 유대인 에 가려져서 대게들 모르는데, 이 슬라브 특히 동서 슬라브는 나치의 제거 대상이야 유대와 함께. 남슬라브 는 고뜨족피가 남아있다며 달리가 여긴. 왜냐면 돈이 안되는겨 여긴 먹어봤자. 니들은 안 먹겠다 효율적 전쟁을 위해.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와 엮여온거고 크로아티아를 이용해야 하거든 병력으로. 문장을 어거지로 만들어야해 명분삼아. 거짓언어로 주작질하는겨 비트 의 언어로 본다면.

They actually were considered as Aryans, I dont know where all this people get their information from but you can read it in the original description of the Aryan certificates here: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1/Ahnenpass_003_anonym.jpg" target="_blank" rel="noopener" data-mce-href="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1/Ahnenpass_003_anonym.jpg">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1/Ahnenpass_003_anonym.jpg

It still doesn’t give the claim any scientific value in any way but it basically says that, English-men or Swedes, French or Czech(Slavs), Poles(Slavs) or Italians had to be considered as Ary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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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cognate in Sanskrit is the word ārya (Devanāgarī: आर्य), in origin an ethnic self-designation, in Classical Sanskrit meaning "honourable, respectable, noble".[7][8] The Old Persian cognate ariya-

아리안 이란게 아리아 산스크리트어 의 존경 고귀 귀함 이고 올드페르시안 에 같이 있고. 인도는, 이란 이야. 인도 ㅡ이란 어족 이란건. 인도는 페르시아 스텝과 같은겨 얘들 정체는. 19세기후반 아리안 이론이 등장할땐, 당시 개념이 지금 인도유럽피안 과 똑같아. 코카서스 에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동서로 퍼진. 슬라브 켈트 그리스 이태리 도 여기서 온겨.

The term Indo-Aryan is still commonly used to describe the Indic half of the Indo-Iranian languages

이 단어가 인도이란어족 으로, 때론 인도아리안어족 이라며, 동쪽으로만 지금 한정된겨. 여전히 사용해 인도아리안 으로 언오피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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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게, 자기의 열등함 의 장난질이야.

열등한 애들이, 아이덴티티 레이스 내셔널리즘 을 내세워. 역사적 팩트 들이야. 아직은 지저스의 문장들중 이런 문장 때문에 유지가 되는건데.

19세기 유럽은 소위 극동식 민족 이란 단어를 레이스 race 를 쓰지, 네이션 을 쓰지 않아. 지금도 변함없어. 에뜨닉 그룹 이 레이스 야. 네이션 내셔널리티가 블러드 의 민족 이 된건 일본어가 퍼트린 극동만의 단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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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등한 애들은, 원인을 자기에서 절대 안찾아. 남탓이야. 더하여 자긴 자기들은 어메이징 해. 이게 쌓이고 쌓이면, 답이 없어. 전쟁 외엔. 이게 플라톤 을 부정하고 리앨리티 부정하고 모두가 참이요 하는 다양성 이란 가짜오브젝트의 포름이 부추기는겨 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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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름 은 오브젝트 가 갖고 있는 네이처 야.

네이처 는 오브젝트와 포름, 그리고 그들의 콤비네이션 의 배후 의 포름이야. 개념이 훨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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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 하려는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 이 말이지. 졸라 재벌 이거든. 그렇다고 경영자도 아니고 회장님도 아니고, 걍 세상 마음껏 즐기면 되는겨.

그냥 재벌이 아녀. 조오오오오올라 재벌이야.

당시의 삼성 열개 더해도 돼. 탑텐 급이여. 그타고 회사 운영하는것도 아니고.

아니, 이런 주제의 인간이, 그것도 일개 사병 으로 참전해. 여기서 거룩하게 자유의지를 실험을 해 ㅋㅋ.

1차세계대전 끝나고, 사범대학 교사자격증 따서 초등학교 선생을 해, 이 조오올라 재벌은

더하여, 케임브리지 에서도, 이 조올라 재벌은 아파트에서 가구도 안갖춰. 침대와 옷장만 있어. 그렇게 살다가 걍 가신겨.

모랄이 특이한건데

생각해서 나도 그리되면 그렇게 살아야지 는, 진짜 그런처지에 서면 그렇게 살아지지 않아. 결코. 이게 역사의 힘 이고 진화의 힘이야. 역사없는 땅 애들은, 나는 인민들을 위해 살텨 하고는, 주위를 보라고, 그런 이이 단 하나 있나. ㅋㅋ. 세상바꾸겠다, 다 xx끼야.

According to a family tree prepared in Jerusalem after World War II, Wittgenstein's paternal great-great-grandfather was Moses Meier,[25] a Jewish land agent who lived with his wife, Brendel Simon, in Bad Laasphe in the Principality of Wittgenstein, Westphalia.[26] In July 1808, Napoleon issued a decree that everyone, including Jews, must adopt an inheritable family surname, so Meier's son, also Moses, took the name of his employers, the Sayn-Wittgensteins, and became Moses Meier Wittgenstein.[27]

고조할배 가 비트겐슈타인 의 바트라쓰페 에서 부동산중개업 을 해. 여긴 아래 헷세 와 왼쪽 쾰른 의 라인강 접하는 그 사이야. 베스트팔리아 의 남부 꼭지여. 나폴레옹 이 고조 때 오신겨. 칙령으로 가족이름 을 성씨를 만들어 잇게 하라고. 그래서 아들, 즉 증조할배 부터 성씨를 만들어. 여긴 고용주 들이 자인ㅡ비트겐슈타인 들이야. 이게 카운티 였어. 자인 그라프 와 비트겐슈타인 그라프 가 합쳐진겨. 이 두 도시가 지금 여기 있어 이름으로. 비트겐슈타인 을 증조할배부터 잇는거야.

His son, Hermann Christian Wittgenstein – who took the middle name "Christian" to distance himself from his Jewish background – married Fanny Figdor, also Jewish, who converted to Protestantism just before they married, and the couple founded a successful business trading in wool in Leipzig.[28] Ludwig's grandmother Fanny was a first cousin of the violinist Joseph Joachim

아들 즉 할배여 비트의. 미들네임 으로 크리스찬 을 넣어. 유대계와 거리를 두기위해서. 할머니 는 역시 유대인 인데, 결혼전에 프로테스탄트 로 개종을 해. 루터인지 칼뱅인지 몰라. 이 할배 가 라이프치히 에서 사업을 성공한겨.

Wittgenstein's mother was Leopoldine Maria Josefa Kalmus, known among friends as Poldi. Her father was a Bohemian Jew and her mother was Austrian-Slovene Catholic – she was Wittgenstein's only non-Jewish grandparent.[33][34][35][36][37] She was an aunt of the Nobel Prize laureate Friedrich Hayek on her maternal side.

아빠쪽들은 유대계 와 거리를 둘 뿐, 유대종교는 안버린겨, 못버려 저때는, 버릴수가 없어. 버린다고 게르만 취급되는 것도 아니고, 남자는 살아가줘야해. 집안에서만 버리는겨. 엄마 가 유일한 비유대인 이야. 엄마는 나중 노벨경제학상 하이에크 의 숙모 야.

비트의 할머니는 개신교 이고, 엄마는 카톨릭 이여. 비트는 로마카톨릭 으로 자란겨. 유대인 이.

아빠가 재벌로 키운겨.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의 철강왕 이야.

Karl and Poldi had nine children in all – four girls: Hermine, Margaret (Gretl), Helene, and a fourth daughter Dora who died as a baby; and five boys: Johannes (Hans), Kurt, Rudolf (Rudi), Paul – who became a concert pianist despite losing an arm in World War I – and Ludwig, who was the youngest of the family

아홉명. 5남4녀 중 막내야.

아빠는 엄격하게 키우는겨. 마치 코트, 엄격한 군주와 신하들의 마당 을 보는듯 했다. 자기 사업을 다들 잇게 하려고도 하고.

1차대전 직전까지, 첫째 셋째 둘째 형들이 자살들을 해. 아빠가 엄혹하고, 엄마는 이런걸 못버텨 정신에 문제가 있어.

넷째형 이 폴 인데, 두살 많아. 비트 죽고 십년후 죽어 뉴욕에서. 미국인 이고, 유명한 피아니스트 야.

예전에 듬성듬성 언급했던건 넘어가고,

In September 1919 he enrolled in the Lehrerbildungsanstalt (teacher training college) in the Kundmanngasse in Vienna.

1차대전 끝나고, 30살. 1919. 비엔나 에 사범대학에 등록해.

In the summer of 1920, Wittgenstein worked as a gardener for a monastery. At first he applied, under a false name, for a teaching post at Reichenau, was awarded the job, but he declined it when his identity was discovered. As a teacher, he wished to no longer be recognized as a member of the Wittgenstein family. In response, his brother Paul wrote:

31살. 1920. 수도원 정원사 일을 해 가명 으로. 학교 일자릴 받았는데 이름이 드러나서 거부한 후. 비트 집안 에 비트 는 유명한거야 저 당시. 재드래곤 이 우리학교 선생이래.

비트겐슈타인 이라는 정체성 을 지우고 싶은거고 알려지고 싶지 않아 비트로. 형 폴 에게 그렇게 써. 폴의 답장.

It is out of the question, really completely out of the question, that anybody bearing our name and whose elegant and gentle upbringing can be seen a thousand paces off, would not be identified as a member of our family ... That one can neither simulate nor dissimulate anything including a refined education I need hardly tell you

너무나 너무나 확실 분명해, 어떤 누가 우리의 이름을 지니고(진짜 비트겐슈타인 사람인양) 천걸음 밖에서도 눈에 띄울만큼 비트사람으로 보여도, 그이가 최고의 젠틀한 보살핌 에 자랐다 해도 우리가족의 하나 라고 특정될 수 없어. 어느 누구도 우리가 갖은 그 어떠한 것도 ㅡ정제된 교육 이든지를 포함해서, 내가 너에게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ㅡ 모방하거나 비슷하게라도 할 수 없어.

유일하게 남은 남자형제인 형 폴 은 비트겐슈타인 이라는 가문 에 자부심이 남다른겨. 개소리하지말어 라 는 일갈이야 동생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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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가서 또오옥같아 너와나는, 가족 이란것은. 거기서 너가 특정 개인으로 다른정체성을 단 일푼어치도 취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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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은, 똑 같은겨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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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아무리 지랄발광해봤자, 닌 비트겐슈타인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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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20, Wittgenstein was given his first job as a primary school teacher in Trattenbach, under his real name, in a remote village of a few hundred people. His first letters describe it as beautiful, but in October 1921, he wrote to Russell: "I am still at Trattenbach, surrounded, as ever, by odiousness and baseness. I know that human beings on the average are not worth much anywhere, but here they are much more good-for-nothing and irresponsible than elsewhere."

그리고 그해, 정원사 나오고, 트라텐바흐 의 초등학교선생. 스튀리아 접경 저지대오스트리아 고, 주민 일이백명 의 깡촌 산골 마을이야. 32살 1921년 10월 럿셀에게. 여긴 냄새나고 바닥 생활이야 환경이. 인간이란건 평균적으로 별로야 어디의 인간이든 다 그놈이 그놈이야. 그런데 여기사람들은 없는자들이라서 선하고 그만큼 책임감은 없어 다른 어디보다도.

his sister Hermine occasionally watched him teach and said the students "literally crawled over each other in their desire to be chosen for answers or demonstrations

누나가 와서 수업을 구경해. 애들이 문자그대로 저요 저요 답하려고 서로 난리다.

오후늦게 공부도 시키고, 학부모도 갈리는거지 싫어하거나 존경하거나. 깡촌이라 애들 잡아두면 손이부족하거든.

To the less able, it seems that he became something of a tyrant. The first two hours of each day were devoted to mathematics, hours that Monk writes some of the pupils recalled years later with horror.[181] They reported that he caned the boys and boxed their ears, and also that he pulled the girls' hair;[182] this was not unusual at the time for boys, but for the villagers he went too far in doing it to the girls too; girls were not expected to understand algebra, much less have their ears boxed over it. The violence apart, Monk writes that he quickly became a village legend, shouting "Krautsalat!" ("coleslaw" – i.e. shredded cabbage) when the headmaster played the piano, and "Nonsense!" when a priest was answering children's questions.

빡쓰 이어즈 가 귀때기 때리는겨 싸다구로. 케인 은 얇은 작대기로 때리고. 누구의 회상엔 공포 였다는거지. 여자애들은 머리칼 을 쥐어 잡아 땡겨 벌로. 때리기도 해. 여자들은 수학 못해도 된다고 생각하던 시대인데, 용납안돼 그따위 성차별은. 여자애들도 똑같이 처 맞아야지.

저문장에서 익스펙트 의 주어는 마을사람들 이고 여자애들 귀싸대기 때리는건 더 생각도 못했는데, 비트는 때렸다는겨.

초딩 들도, 못하면, 줘패라, 성차별 말고.

코울슬로 가 양배추썰은 샐러드야. 쌍욕이고 슬랭이여 창년이란 뜻이여. 교장이 피아노를 치는거에 쌍욕을 해댄겨. 마을에 전설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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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918 that he completed the Tractatus, which he submitted with the title Der Satz (German: proposition, sentence, phrase, set, but also "leap") to the publishers Jahoda and Siegel

트락타투스 를 1918년 8월에 완성해. 이때 전쟁 끝나고 군복 벗은겨 이해 여름에. 이건, 1차대전 전쟁터 에서 쓴겨이게. 그래서 문장들 하나하나가 두꺼운거야. 저건 죽음의 현장에서 나온겨. 응축된거고 강력하게. 칸트 왈 말이 많을 필요 가 없다고 하거든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어차피 하고자 하는 말은 정해진겨 몇개 문장으로. 자기도 이렇게 그 몇개문장을 설명하기 위해 장황하게 해설할 뿐이라며. 비트 만이 전쟁 속에서, 저런 글을 쓸 수 있고 전쟁 속에서 장황한 글쓰긴 할 수도 없었던거고

저때 제목은 데어 잣쓰. 잣쓰 가 setzen 젯쩬, 영어의 set 쎄트 로 가고 독어는 문장, 어구, 로 가는겨. 쎈턴스 프레이즈.

비트의 독어 트락타투스는 프로포지션 의 라틴어 독어를 안써. 오직 잣쓰 야 본문도.

저걸 출판을, 저 초딩 애들 가르치는 기간에 한거야.

While Wittgenstein was living in isolation in rural Austria, the Tractatus was published to considerable interest, first in German in 1921 as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part of Wilhelm Ostwald's journal Annalen der Naturphilosophie, though Wittgenstein was not happy with the result and called it a pirate edition.

1921년 32살 독일어로. 흥행은 별로. 저 판을 비트는 해적판으로 부르다.

In a letter to Russell, Wittgenstein wrote "The main point is the theory of what can be expressed (gesagt) by prop[osition]s – i.e. by language – (and, which comes to the same thing, what can be thought) and what can not be expressed by pro[position]s, but only shown (gezeigt); which, I believe, is the cardinal problem of philosophy."[185] But Wittgenstein was not happy with Russell's help. He had lost faith in Russell, finding him glib and his philosophy mechanistic, and felt he had fundamentally misunderstood the Tractatus

출판 후 럿셀 과의 서신.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 명제 즉 언어로 표현 될 수 있는 것, 그리고 없는 것, 없으나 화면으로 생각에 보이는것. 이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것. 이다.


비트의 본 뜻을 난 분명히 저것이라고 봤거든. 자세히 비트인생을 보려고 지금 직접 번역하려는 거거든.

저기서, 비트가 왜 저런 문장을 썼냐면, 왜 비트가 중요하냐면,

생각한다는 게 그야말로 미스테리거든.

저기서 중심은 말이지, 연역적인 공리는, 비트는 말을 안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핵심이야

"생각하는 내용 그 자체를, 세상의 화면, 즉 리앨리티, 라고 두는거야. 가정하는거야"

이게 비트 사상의 뼈대야. 비트 의 트락타투쓰 의 보이지않는 공리야.

이걸 토대로, 세상 과 언어 를 푼거야. 바닥에 세상, 표면에 언어 이자 명제 로.

생각화면이 리앨리티 임을 증명 검증 하는건 로직이고, 로직에서뿜어내는네이쳐이포름 이야.

세상은 화면이다 는 오직 생각은 화면이다 에서 나온 가정문일 뿐이야. 그만큼 생각한다는 것 자체를 말할수없는곳 으로 판단한겨. 말할수없는것 곳 이란, 생각하게하는그무엇 이야 비트가 보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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럿셀 이, 먼 x소리여 해대고 이때부터 럿셀 을 버려. 선생에서 하치리로 취급해. 이전엔 얘를 따랐거든. 무식한거야 지능이 후진걸 알게 돼.

근본적으로 트락타투스 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라고 저때 판단해 비트는.

In September 1922 he moved to a secondary school in a nearby village, Hassbach, but considered the people there just as bad – "These people are not human at all but loathsome worms," he wrote to a friend – and he left after a month. In November he began work at another primary school, this time in Puchberg in the Schneeberg mountains. There, he told Russell, the villagers were "one-quarter animal and three-quarters human."

1922년 9월 33살.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옮겨. 바로 근처 마을 이야. 여기 인간들은 전혀 사람이 아니다, 혐오스런 벌레들이다. 한달 후 떠나고 11월에 근처 다른 초등학교로 옮겨 슈니베르크 산의 푸흐베르크. 여기 사람들의 정체성은 사분의일 은 짐승 사분의삼 은 사람이다.

Frank P. Ramsey visited him on 17 September 1923 to discuss the Tractatus; he had agreed to write a review of it for Mind

램지 가 이때 오는겨. 램지 가 케인즈 제자 이고, 1903년생 27세에 죽어. 램지 가 비트를 케임브리지로 들인 이야. 램지 는 비트가 1929년에 케임브리지 오고 다음해 죽어

럿셀은 1872년생 조지 무어는 1873년생 이야.

He moved schools again in September 1924, this time to Otterthal, near Trattenbach;

1924년 35살. 초등학교 로 옮겨 처음 온곳 근처.

On 28 April 1926, Wittgenstein handed in his resignation

여기서 사표를 내고, 애들 가르치는걸 종결해. 1926년 37살. 11살 학생 머리를 두세대 때렸는데, 기절을 해. 아이가 느려 배움이. 얘 누이는 비트가 귀를 잡아 땡겨서 피가 났어. 학부모가 비트를 보고, 넌 선생이 아니고 동물사육사 다. 경찰서가자 라고 소리를 질러.

Wittgenstein carried him to the headmaster's office, then quickly left the school, bumping into a parent, Herr Piribauer, on the way out. Piribauer had been sent for by the children when they saw Haidbauer collapse; Wittgenstein had previously pulled Piribauer's daughter, Hermine, so hard by the ears that her ears had bled

아이가 기절할때 비트가 소위 후진겨 이게. 아이를 교장실에 데려가고 학교를 나가다가 아이아빠가 주위애들이전한소식듣고 부랴부랴오거든. 마주치는겨. 비트가 이전에도 자기딸 귀에 피가 나게 했거든. 청력에 이상은 없지만. 경찰서 끌고 갔는데 아무도 없어. 다음에 잡아가려는데 안보여. 학교에 사표를 제출한겨.

재판받고, 비트가 정신병이다. 합의를 봐 재벌이니까.

비트가 어릴때 저렇게 교육을 받은거야. 형셋 은 자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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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도, 비트 의 교육철학은, 지진아 라고, 우쭈쭈 하면 안되는겨. 시발 평생 우쭈쭈 배려 해줄꺼야? 쟤는 저 남매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만 해? 반드시 이상한 애들 만나서 염전노예 끌려가 확률상. 더 줘 패야해! 니가 더 후지니까 넌 더 분발해! 더 처맞아!! 아 마 이게 비트의 속내 일거야 저당시. 그것에 대해 잘못이다 라고 판단 못해.

저능 열등 이란, 징징댐과 남탓과 우쭈쭈와 특별대우 에서 오는거고, 절대 저런 단어로는 저능 열등 을 벗을 수 없어.

굿 잡! 교육현장에선 써선 안되는 잣쓰 야

칭찬은 고래한테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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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는 저렇게라도 해야, 아이의 생각화면이 바뀌고 언어를 바꿀수 있다는거야. 확실해, 인간의말을 하는 자라면 반드시 바꿀수 있어! 넌 더 더 자각하고 천배 만배 더 해야해! 반드시 가능해!

대게 선생들은, 지들 내면 그림자 털기 위해 지 분노풀이로 애들 팼던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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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의 잘못은, 자기가 저렇게라도 해서, 세상의 화면을 제대로 작동시키려는데 일조하고픈 거였지.

저 애들 체벌하는데 일말의 자기감정 들어간 이는 그야말로 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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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k says he died when he was 14 of leukaemia.[200][201] Ten years later, in 1936, as part of a series of "confessions" he engaged in that year, Wittgenstein appeared without warning at the village saying he wanted to confess personally and ask for pardon from the children he had hit. He visited at least four of the children, including Hermine Piribauer, who apparently replied only with a "Ja, ja," though other former students were more hospitable. Monk writes that the purpose of these confessions was not

to hurt his pride, as a form of punishment; it was to dismantle it – to remove a barrier, as it were, that stood in the way of honest and decent thought.

Of the apologies, Wittgenstein wrote,

This brought me into more settled waters... and to greater seriousness.

기절한 아이는 14살에 백혈병으로 죽었다. 십년후 1936년 에 비트가 고해 한다며, 예고없이 마을에 방문을 해. 47살. 개인적으로 고해하고 싶다고 말해. 자기가 때린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며. 이때는 아이들이 20대인거지. 그때 학생들 네명 을 만나. 귀에 피난 그 여누이, 백혈병 기절해 죽은애의, 야 야 , 예 예 라고만 답을 했다. 나머지 이전의 학생들은 보다 환대를 해주다. 이 고해들의 목적은

그의 프라이드를 징벌의형태로 벌주는 게 아니었다. 프라이드를 허물고자 하는것이었다. 아니스트 와 고귀한 사상의 길에 가로놓인 장벽을 제거하는.

비트는 사죄들의본질에대하여 에서, 썼다

그것은 보다 안정된 물들, 보다 거대한 진지함 으로 나를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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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가 1926년 4월이고, 이때에 비엔나 서클 과 만나. 이 비엔나 서클 이 이즈음 생긴 그룹 이 현대철학을 이끌어. 여기서 콰인 이니 그라츠학파 가 나오는거고. 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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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urging of Ramsey and others, Wittgenstein returned to Cambridge in 1929.

그리고 3년후에 케임브리지 로 가는겨. 영국 시민권자야. 비트는 1951년 4월 생일 3일후에 이곳 케임브리지 에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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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가 런던와서, 만나는 이들 중 하나가 앨런 튜링 이야

Alan Mathison Turing OBE FRS (/ˈtjʊərɪŋ/; 23 June 1912 – 7 June 1954) was an English mathematician, computer scientist, logician, cryptanalyst, philosopher, and theoretical biologist.[6][7] Turing was highly influential in the development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providing a formalisation of the concepts of algorithm and computation with the Turing machine, which can be considered a model of a general-purpose computer.[8][9][10] Turing is widely considered to be the father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and artificial intelligence.

튜어링 이여 정확한 소리는. 이론컴퓨터과학 과 에이아이 의 아버지.

로직 의 세계야.

로직의 포름 으로 작동 되는.

로직칼 포름 이란건, 그 약속된 기호들 이 란게, 그게 로직칼 포름 이 아녀 근본적인의미가. 비트의 트락타투스 에서 흔히 언급되는 로직칼 포름 이란건, 오브젝트 에서 뿜는 포름 이 팩트 이듯이, 로직이 뿜는 무언가 말할수없는것이작동되어서 인간내면에서 동의되고 안되게 하는 그 무엇 이 있거든. 이런걸 포름 이라고 한거야. 그걸 단지 기호로 표현한게 로직칼포름 이라는 논리학 기호들 일 뿐이야.

컴퓨터 와 에이아이는 이 로직 이 만드는겨.

저게, 리앨리티 여. 생각화면을 언어의 명제들로 풀어서 로직 으로 검증되어서 어그리먼트 동의된 것들 만이 화면으로 구성되는거야.

이걸, 역시나 세상의 화면, 리앨리티 로 간주 하는거야.

리앨리티의 본격적 시작은, 컴퓨터 와 에이아이 야.

이건, 분명하게 명명백백하게, 소크라테스 가 만든거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가 만든겨 컴퓨터 와 에이아이는.

앨런 튜링 이 아버지면, 소크라테스는 아버지를 낳은 하나님 이야.

소크라테스 라는 사람 을, 정 말 너 문 나 모 르 는 겨

기원전 5세기 가 위대한건, 단 하나야. 오직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는, 인류에서 가장 가장 위대한 인간이야.

모ㅡ든 인간들 과거부터, 에서 단 하나 를 뽑아라!

단연코 분명코 소크라테스!!!

오직, 극동에서 만이 자 신 있 게, 선언 할 수 있고 심사 할 수 있는거지. 인간 역사를 제대로 설명 해주는 인간은 오직 조선어 인간이야만 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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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의 자체, 소위 이데아 로 불리는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화면이고 로직의 포름 이고 팩트들의 총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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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들을 쓰면서, 소크라테스 를 찾아낸게 너무나 기쁘고 후련해. 아! 소크라테스!

Turing was born in Maida Vale, London,[7] while his father, Julius Mathison Turing (1873–1947), was on leave from his position with the Indian Civil Service

튜어링 이 런던태생 인데, 아빠는 인도 아이씨에쓰 공무원 이야. 영국이 인도를 컴퍼니 에서 왕권으로 갖고와 지배한게 1백년 이야 2차대전 끝날때까지. 조선식 총독부가 인도는 아이씨에쓰 야. 영국 내각 에 인도장관 이 있어.

아빠는 스콧 상인 핏줄, 엄마는 앵글로아이리쉬, 앵글리칸으로 아일랜드에 이주한 사람들 이야.

He gave a series of lectures on mathematics, discussing this and other topics, documented in a book, with lectures by Wittgenstein and discussions between him and several students, including the young Alan Turing who described Wittgenstein as "a very peculiar man". The two had many discussion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computational logic and everyday notions of truth.

비트 가 1889 튜어링 1912생. 화이트헤드 가 1861 와 의외로 할배인데 백두형. 이 케임브리지 가 엄청난겨 이게.

비트 가 영국 갔을때가 40대고 튜어링 은 20대에 학생이야. 어린 튜어링 이 말하길, 비트는 매우피큘리어 유별 독특 유니크 한 사람이다. 피큘리어 는, 자기만의간직한것 이 있는 사람 이야.

이 둘은 서로 많은 대화를 했다, 컴퓨테이셔널로직 과 트루뜨에대한매일의관념 의 관계 에 대해.

저런서술도, 트루뜨가 리앨리티 로 쓴건지 어그리먼트의 트루뜨로 쓴건지, 확인하고 이해해야해. 저 문장만 달랑, 먼뜻인지 알수없어.

컴퓨터 와 에이아이 에, 비트겐슈타인 이 있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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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Wittgenstein died on 20 January 1913, and after receiving his inheritance Wittgenstein became one of the wealthiest men in Europe.

아빠가 1913년. 24살에 죽어.

he retreated to the village of Skjolden in Norway, where he rented the second floor of a house for the winter.[149] He later saw this as one of the most productive periods of his life, writing Logik (Notes on Logic), the predecessor of much of the Tractatus

저때 비트가 노르웨이의 숄든 으로 들어가 2층을 렌트해. 여길 1930년대 까지 써 가끔. 여기가 위도 61도 야. 스콧 위의 오크니섬 위, 셰틀랜드 Shetland 제도 가 60도 여. 여기보다 더 높아. 졸 추워. 그야말로 고요 조용 오로라 백야여.

그리고 바로 1차대전 터지고 군대 간겨

On the outbreak of World War I, Wittgenstein immediately volunteered for the Austro-Hungarian Army, despite being eligible for a medical exemption.[158][159] He served first on a ship and then in an artillery workshop 'several miles from the action'.[158] He was wounded in an accidental explosion, and hospitalised to Kraków.[158]

1차대전 발발하자 즉시 자원 입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의료진단으론 면제대상이어서 부적합자임에도. 처음엔 해군, 그리고 포병대 훈련소로 가. 엔지니어링 전공자야. 실전에서 몇마일 이란게 훈련소 의 비유고. 여기서 폭발사고 당하고 크라크푸 에 입원

In March 1916, he was posted to a fighting unit on the front line of the Russian front, as part of the Austrian 7th Army, where his unit was involved in some of the heaviest fighting, defending against the Brusilov Offensive.[160]

1916년 27살 3월, 러시아 전선 의 전투현장의 부대로 배치 돼. 오스트리아 제7사단, 비트의 부대는 극심한 전투에 처해서, 러시아 의 브루실로프 공격을 수비해. 이 브루실로프 가 러시아 1차대전 영웅이고. 1차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가 얼라이언스, 러시아 영국 프랑스 가 앙탕트 야.

Wittgenstein directed the fire of his own artillery from an observation post in no-man's land against Allied troops—one of the most dangerous jobs, since he was targeted by enemy fire.[159] In action against British (?) troops, he was decorated with the Military Merit with Swords on the Ribbon, and was commended by the army for
"His exceptionally courageous behaviour, calmness, sang-froid, and heroism," that "won the total admiration of the troops."

비트는 자기 포병부대의 포격 방향 위치 를 지정하는 위치여. 나폴레옹의 병꽈이고, 이건 수학 으로 하는겨. 전문적 이꽈지식이 포격을 지휘하는겨. 높은 곳에서 전망해야해. 가장 위험한 자리고 적의 저격의 타겟이 타겟이 돼.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포격지시하는애고 노출도 쉬운자리고. 비트는 군대 훈장으로 장식되다. 훈장 사유가,

그의 유별나게 용감한 행동, 침착함, 쌍프와 위기속에서도냉정한태도, 그리고 영웅적포스 는 부대의 모든 찬사를 받았다.

.In January 1917, he was sent as a member of a howitzer regiment to the Russian front, where he won several more medals for bravery including the Silver Medal for Valour, First Class.[162] In 1918, he was promoted to lieutenant and sent to the Italian front as part of an artillery regiment. For his part in the final Austrian offensive of June 1918, he was recommended for the Gold Medal for Valour, one of the highest honours in the Austrian army, but was instead awarded the Band of the Military Service Medal with Swords—it being decided that this particular action, although extraordinarily brave, had been insufficiently consequential to merit the highest honour.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훈장이 네등급 인데, 비트가 받은건 두번째 등급이야. 최고 가 골드 여. 여기 추천은 됐는데 이건 못받아. 중위까지 진급 돼. 그야말로 죽음 현장에서 최고의 영웅이야

1차대전은 비트는 독일과의 얼라이언스고, 영국 이 적이야

얘들은 전쟁 끝나면 친구야.

2천년 역사가 서로 적이 돼서 전쟁만 한거야. 그래도 악수하고 친구야.

그 적이었던, 영국 에 서 초청 하고 영국 두뇌의 상징 자리 써클로 들어가고 영국 시민권자 도 받고.

2차대전은 나치 의 독일 이 적이 돼

Monk writes that Wittgenstein found it intolerable that a war (World War II) was going on and he was teaching philosophy. He grew angry when any of his students wanted to become professional philosophers.[j]

In September 1941, he asked John Ryle, the brother of the philosopher Gilbert Ryle, if he could get a manual job at Guy's Hospital in London.

이땐 나이가 52세여. 나 군대 도움 되겠다. 병원 에가서 잡일 하는겨. 병원 병참일 이야. 환자 수송 에 보급.

The hospital staff were not told he was one of the world's most famous philosophers, though some of the medical staff did recognize him – at least one had attended Moral Sciences Club meetings – but they were discreet. "Good God, don't tell anybody who I am!" Wittgenstein begged one of them.

이때는 이미 책보는 이에겐 대스타여 비트는. 병원스탭 중 거의 몰랐다 그가 누군지. 그래도 세미나에서 만난 사람도 있고, 부디 나를 아는체 말아줘. 그럼에도 교수 라 불렀다.

당대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졸라게 리스펙트해.

책 의 내용 을 알고 그 깊이에 존경하는게 아냐.

비트의 책은 이해를 못해.

비트를 존경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비트라는 인간의 삶 자체를 높이 치는거야.

The extent to which The Gospel in Brief influenced Wittgenstein can be seen in the Tractatus, in the unique way both books number their sentences.[169] 1916 Wittgenstein read Dostoevsky's The Brothers Karamazov so often that he knew whole passages of it by heart, particularly the speeches of the elder Zosima, who represented for him a powerful Christian ideal, a holy man "who could see directly into the souls of other people"

톨스토이 의 복음해설서, 도톱 의 책들도 찐하게 봐. 전쟁중에. 카라마조프, 조시마 의 연설, 비트에게 강력한 그리스도적 이상을 제시하다, 조시마는 직접적으로 다른이들의 영혼들을 바라본다. 이 카라마조프 이건 미친다 이거.

While in Norway, Wittgenstein learned Norwegian to converse with the local villagers, and Danish to read the works of the Danish philosopher Søren Kierkegaard

1차대전의 군대가기전에 노르웨이에서 덴마크어를 공부해서 키에케고 를 읽어. 이런걸 다 읽고 트락타투스 를 쓴겨.

Throughout the war, he kept notebooks in which he frequently wrote philosophical reflections alongside personal remarks, including his contempt for the character of the other soldiers.[164] His notebooks also attest to his philosophical and spiritual reflections, and it was during this time that he experienced a kind of religious awakening.[77]

1차대전 전쟁 중 노트북들을 지니고 자주 썼다. 자기 외 군인들의 캐릭에 대한 경멸감을 포함해서. 일종의 신앙적 깨우침을 경험했다

In his entry from 11 June 1915, Wittgenstein states that

The meaning of life, i.e. the meaning of the world, we can call God.
And connect with this the comparison of God to a father.
To pray is to think about the meaning of life.[165]

삶의 의미, 예를 들어 세상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과, 신과어파더의대입비교 를 연결할수 있다.
기도라는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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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화면 이야. 세상의 화면 이 신 이야. 세상 이 모든팩트들의 총체 인 케이스 이고. 이게 세상의 화면이야 세상의 의미야 , 거대한 케이스 가 신 이야.

저건 노트북이고, 트락타투스 와 연결하면, 저래.

신 의 의미 란건 머냐 그럼. 신의 화면 은 아버지 야. 어떤 불특정 의 아빠 야. 아빠라는건 신의 화면 이야. 라고 일단 저 문장 그대로 난 푸는거고. 저문장 에 대한 말들이 많을것이며.

기도한다 라는 프레이 는, 에스크 리퀘스트 요구 간청 하는겨. 해달라고 강력하게 애걸 하는게 프레이 야

기도 라는 한자들은, 기 가 도끼에 활을 들고 신에게 전쟁가는데 이기게해주세요 보고하는겨. 도 라는 건 오래 건강히 살게 해달라고 하는겨.

기도 라는건 그런게 아니다, 단지 삶의 화면에 대해 생각하는것 이다.

and on 8 July that

To believe in God means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life.
To believe in God means to see that the facts of the world are not the end of the matter.
To believe in God means to see that life has a meaning [ ... ]
When my conscience upsets my equilibrium, then I am not in agreement with Something. But what is this? Is it the world?
Certainly it is correct to say: Conscience is the voice of God

한달 후 노트북

신을 믿는다, 는 의미한다 다음들을,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것
세상의팩트들이 더매터의끝 이 아니라는것,을 보는것
삶이 의미를 갖다,를 보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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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심이 내 균형상태를 당황시킬때, 그때 나는 썸띵과 동의상태 에 있지 않다. 썸띵 이게 머지? 이게 세상인가?
확실히 이렇게 말하는건 옳다, 양심은 신의 목소리다.

칸션스 는 싸이언스 의 스키오 고 알다 에 쎄게 알아. 내면의 잣대 야. 양심 이란 단어 가 딱 맞아 이건.

Norman Malcolm, at the time a post-graduate research fellow at Cambridge, describes his first impressions of Wittgenstein in 1938:

노만 맬컴 1911ㅡ90. 이 1938 년 27세, 비트 49세. 때 비트에 대한 첫인상.

At a meeting of the Moral Science Club, after the paper for the evening was read and the discussion started, someone began to stammer a remark. He had extreme difficulty in expressing himself and his words were unintelligible to me. I whispered to my neighbour, 'Who's that?': he replied, 'Wittgenstein'. I was astonished because I had expected the famous author of the Tractatus to be an elderly man, whereas this man looked young – perhaps about 35. (His actual age was 49.)

저녁 논문 낭독 후 토론이 시작, 누군가 평을 하는데 더듬거리는 말투, 자기를 표현하는데 극도로 힘들어 했다. 그의 단어들은 나에게 이해불가였다. 나는 내 옆에게 속삭였다. 저거 누구냐? 비트겐슈타인. 나는 놀랐다 왜냐면 트락타투스 의 그 유명한 저자는 늙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사람은 젊어 보였다 아마도 35세.

His face was lean and brown, his profile was aquiline and strikingly beautiful, his head was covered with a curly mass of brown hair. I observed the respectful attention that everyone in the room paid to him. After this unsuccessful beginning he did not speak for a time but was obviously struggling with his thoughts.

그의 얼굴은 말랐고 브라운 이었다, 얼굴윤곽은 독수리같고 눈에띄게 아름답다, 그의 머리는 브라운 헤어의 곱슬 에 숱이 많고. 나는 봤다 그방안 모든이가 그에게 주는 존경스런 시선을. 발언의 시작이 별로였는데, 그는 잠시 말하지 않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His look was concentrated, he made striking gestures with his hands as if he was discoursing ... Whether lecturing or conversing privately, Wittgenstein always spoke emphatically and with a distinctive intonation. He spoke excellent English, with the accent of an educated Englishman, although occasional Germanisms would appear in his constructions.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두손으로 시선끄는 제스쳐를 지었다 마치 토론하고 있는듯이... 강의든 사쩍 대화든 비트는 언제나 힘있게 그리고 분명한 억양으로 말했다. 그는 훌륭한 영어를 구사했다, 교육받은 잉글랜드사람의 액센트로, 문장 구성 스타일에서 종종 독일어 냄새가 보였지만.

His voice was resonant ... His words came out, not fluently, but with great force. Anyone who heard him say anything knew that this was a singular person. His face was remarkably mobile and expressive when he talked. His eyes were deep and often fierce in their expression. His whole personality was commanding, even imperial.[

목소리는 울림이 있었다 깊고 분명해서. 단어들 문장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힘있게 나왔다. 그가 무엇이든 말하는걸 들었던 사람은 이건 한사람 인걸 알았다. 그만큼 어법 스타일이 한결같았다. 그의 얼굴은 유난히 표정이 자유로왔고 표현력이 있었다, 그가 말할땐. 그의 두눈은 깊고 종종 날카로왔다. 그의 총체적 인상은 압도적 이었고 황제적 이기 조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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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부터 그리 자란거고, 아쉬울거 없이 큰거에, 세상 고민 다한거에 사병으로 전쟁질 하고, 애들 가르치고,

참 시안한 인간이야.

후기를 이어쓰길, 누구는 저 토론시간이 공포스럽다고. 너무 진지한겨 비트가. 마치 전쟁에 임하는듯 토론 강의 를 해 저 쎄미나 에서.

꼬마애들이 시바 저런 인간에게 배웠으니. 나중엔 패는 횟수에 강도가 더 쎄지는거고 그러다 기절 한거지.

철학을 전쟁하듯이 한겨 비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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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저 맬컴 이 뉴욕에서 교수할때 비트를 초대해. 미국에 다녀와. 1949. 60살. 다녀오고 전립선암 진단받고. 이미 골수까지 퍼졌어.

비트는 결혼하지않았고 자식도 없어.
비트가 호모라는 설은, 전혀 근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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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하늘이고 군사부 는 한몸, 얼마나 개좃같은 소리냐.

스승은 제자는 서로, 프랜드, 친구여 친구.

킹과 아빠와 선생은, 써브젝트 썬 도터 스튜던트 와 친구여.

하나님 더 갓 과 지저스 와, 다 같아 친구야 친구. 프랜드야. 자미뜨 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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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rote to Malcolm on 16 April, 13 days before his death:

"An extraordinary thing happened to me. About a month ago I suddenly found myself in the right frame of mind for doing philosophy. I had been absolutely certain that I'd never again be able to do it. It's the first time after more than 2 years that the curtain in my brain has gone up. – Of course, so far I've only worked for about 5 weeks & it may be all over by tomorrow; but it bucks me up a lot now."

저 맬컴 에게, 죽기 13일전 쓴 글.

나에게 특이한 일이 벌어졌어. 한달 전 즘 부터 내가 철학을 할 수있는 제대로된 기분을 갖게 됐어. 이런 기분 을 다시는 갖지 못하리라 절대적으로 확신해왔거든. 2년여 이후 처음 이야 내 뇌안에서 커튼이 사라져버린건. 당연히 5주간 일만했지. 그런데 내일이면 모든게 끝날것 같아. 그러나 지금은 기분 짱 이야.

Wittgenstein began work on his final manuscript, MS 177, on 25 April 1951. It was his 62nd birthday on 26 April. He went for a walk the next afternoon, and wrote his last entry that day, 27 April. That evening, he became very ill; when his doctor told him he might live only a few days, he reportedly replied, "Good!" Joan stayed with him throughout that night, and just before losing consciousness for the last time on 28 April, he told her: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 Norman Malcolm describes this as a "strangely moving utterance".


미래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모랄을 지닌 시민들만의 유니버셜 카먼월뜨 의 세상 이 서.

앞으로 천오백년 후.

그때에, 생각의 화면이, 거대한 케이스 로, 하늘에,

보여, 비트겐슈타인들은 모두 봐

배후인 거대한 오브젝트 를 보는겨.

케이스 인 세상 을 만들어 내는 물자체, 이데아 의 그레이트 오브젝트.

생각화면과 세상화면이 일치된 그 거대한 오브젝트를

그렛리쓰, 그레이스 한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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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에서 시작해서

비트겐슈타인 들을 만들어낸

위대한 웨스턴 의 역사.

저곳으로 진입해
저곳으로 합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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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Qe7n9PkCvE

https://youtu.be/xuAGROtju7M

https://youtu.be/T2H5D58kAd0

https://youtu.be/Dl9iXBdJQtI

ps

세상, 생각, 언어
이 세가지 판으로 비트겐슈타인은 필로소피 를 짠건데
필로소피 란 짐승세계와 다른 인간만의 문명의전부 야

생각은 화면이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 의 공리야. 연역적 문장 이야. 공리 연역 이란건, 하늘에서 떨어진겨. 신인지먼지 말할수없는썸띵 이 준거야.

중심문장은 저거야.

세상이 화면이고 언어가 저 세상이란화면이반사된듯생각화면 을 표현하는거야. 이건 저 연역문장에서 아래위로 덧댄거야

생각은 화면이다, 에서 언어는 생각을 표현한다 는 당연한 귀납적 문장이야

그러나, 그래서 세상은 화면이다, 이건 어설픈 가정이야. 그러나, 세상은 화면이어야만 해. 그래서 생각화면은 세상에 어태치 된 것으로 명분을 삼는겨. 그래서 저 문장을 처음에 놓은거야

화면이란건, 팩트 야. 오브젝트 에 일이발생한거야.

세상이란건, 오브젝트의 발생상황이지, 오브젝트 그 자체일 수는 없어.

오브젝트 그 자체는, 더욱 말할수 없어. 오브젝트 자체는 생각화면 에 뜰 수 없어

.
생각하는 건, 말하는게 아냐.

이 문장이 너무나 중요해. 모두들 간과하는거야

언어란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 말 이라는 언어가 생각 이 아냐.

"생각 은 말이다 생각은 언어이다

가 절대적으로 아니야."

우리는, 대부분 인간들은, 이 문장을 참으로 여기는거야. 비트겐슈타인 은 저건 잘못된것이다 라고 주장하는거야.

생각은 말이 아냐

생각은 화면일 뿐이야.

우리말이 정말 너무나 깊은게, 생각이 들다, 라고 해.

생각은 들어오는것이지, 생각을하는게 아냐.

생각하다 를 우리는, 그리고 웨스턴대부분은, "속으로 말하다"를 생각하다 라고 여기는거야.

그건, 말하는것이지,생각 그 자체를 하는게 아냐.

그건, 리즈닝 이라는, 로직의 포름 에 의해서, 말들을 해부하고 조합하는거야.

생각세상 에 대해 다른 단어들을 갖고와야 해 그래서.

생각한다 고 통상 여겨지는건, 가만히 생각해보라고 내 주장을, 그건말이지,

속으로말할뿐이야. 단지 귀에 소리로 안들릴 뿐이야

나는 지금 글을 써 핸폰으로 한글자한글자
이건, 리얼타임으로, 내안의 말들을 언어들을 그것그대로 카피해서 드러낼 뿐이야.

이건, 속의말들은, 말 랭귀지 언어 이지, 이건 생각이 아냐.

정확하게 이해 돼?

트락타투스 6번 에 로직은 세상의 리플렉션 이라고 했거든. 비트의 속내는, 로직이란게 신이 장착시켜준 검증도구 리즈닝 계산 연산 의 절대적 잣대 툴 이란거야.

컴퓨테이셔널 이야. 풀어가는겨 참이되는 팩트들로

이건, 말하는 걸, 풀어가는거야. 계속.

이건, 생각을 하는게 아니야!! 오직, 말, 언어,를 푸는거야. 이걸 사람들은 띵킹 이라고 하는데, 이건 띵킹 이 아냐. 리즈닝 컴퓨팅 이야 라고 비트겐슈타인 이 크리틱 선을 분명히 그어주는거야. 그리고, 이게, 맞아

웨스턴 문명이란것은, 이 컴퓨팅 리즈닝 을 해왔다는거야.

귀납적으로.

쟤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연역의 팩트들을 수도없이 받아서, 현대문명을 만든게 아냐!!

오직, 말 들 을 계속 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팩트들, 오브젝트 의 포름 으로 작동된 일들 이벤트들 을 찾아낸거야.

무수수한 팩트들을 드러내서 문명을 업그레이드 한거야

이스턴은 상대적으로 몇개의 팩트 그것도 의미없는 힘없는 팩트 단 몇개로만 살아온거야

저런것도 모두 세상이고 리앨리티 야. 그러나 이건, 쓸모가 미약한 팩트야.있는것 조차.

저 팩트들은, 귀납의 팩트야. 오직 말 언어를 계속 주고받고 새로운 말 단어 문장을 덧대면서 만들어내.

이건, 생각 이 아냐.

생각 이란건, 문득 문득 들어오는 화면이야.

저게 말 은 언어 는 아닌겨 이게. 이걸 굳이 빌트 픽쳐 화면 이라고, 화면 이외엔 딱히 다른 단어가 없어.

이 말 이란게 너무나 오묘한거야. 일본애들은 기묘 지만 우리네는 오묘 여. 깊고도 묘한겨.

너무나 심오해서, 아 이 말이란게, 생각을 드러내는 걸 꺼야 제대로, 이게 비트겐슈타인 의 로직에 숨은겨.

다시 정리하자고, 우리가, 통상 생각한다 라는건, 리즈닝 컴퓨팅 이지 띵킹 이 아니야. 내말이 뭔말인가 곰곰 생각해 보라고. 이건 생각하는게 아냐, 오직 말을 언어를 하는겨. 속으로 속으로 말을 하는거지 생각하는게 아냐

리즈닝 컴퓨팅 의 말을 하는겨. 이게자연과학이야. 여기에 어설픈 연역의 말들이 더해진게 문학에 예술이야

수학 이란것도 논리학 기호놀이 와 똑같아.
수학 이란 것도, 말 언어, 말하는겨. 단지 기호로 알지브라로 표시해서 쓸 뿐이야. 고대에는 역시나 수학은 말들의 문장이야. 비트는 수학을 쑤도 사이비 의 로직 이라 하는겨.

말 하는것 뿐이야 인간문명 이란것은.

이건, 절대, 생각 이란 또트 띵킹 이 아냐. 오직, 리즈닝 컴퓨팅 의 말들 주고받음 이야. 그래서, 트리비움 이 대학 의 커리큘럼 의 모든 것 이야.

트리비움 이 절대적 인 무기인겨. 리즈닝 컴퓨팅 의 말하기.

웨스턴은 저것을 제대로 파악해서 2500년을 해온것이고, 이스턴은 전혀 전혀 안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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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킹 은, 전혀 다른거야.

진짜 생각 은, ㅋㅋㅋ, 우리는 말야, 거의 거의, 일평생, 하지 않아요.

우리는, 속으로 멍때리거나, 속으로 잡다한 말을 할뿐, 더가서 로직에의해컴퓨팅의말을할뿐, 생각 을 하는게 아니야.

생각은 하는게 아냐.

생각이 드는거야.

흔한드는생각 조차, 대게들, 리즈닝 의 귀납이 드러나지, 연역의 공리적 팩트가 들어오는게 아냐.

진짜 생각 이란건, 릴리저쓰 어웨이크닝 이야. 신적인 깨달음 의 화면이야.

언어 가 드러내는 팩트들 이 생각의화면 을 제대로 푼다고 가정할 뿐이야. 그 생각의 화면은 세상의 화면이라고 역시 신성스레 가정했을 뿐이고.

언어가 생각화면을 표현못한다 라는 문장이, 시발 저 그림감상문을 말글로 표현못해 제대로. 그게 아녀ㅋㅋ

생각의화면이 뭔지 , 몰라, 오직 말로 풀어지면서 어설프게 그게 화면이고 세상이다 라고 어그리먼트 하는거지.

리즈닝 컴퓨팅 의 말들을 깊게 하면서 또한, 생각화면에 힘이 생겨. 뭔가 모르게, 생각에 무엇인가 들어가는겨 저기엔. 시쩍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어. 생각이 드는게, 이게 뭔지 우리는 몰라. 웨스턴 애들의 생각화면은 다를거야 이스턴애들의 그것보다. 리즈닝 컴퓨팅 의 말을 깊게 해온 애들은 생각이 드는게 다른겨 이건. 저 생각에는 저들 화면에는, 신 이 더많은 생각듬을 하게 해줘.

말도 못한거고,
든 생각도 없어, 여기는.
.

침묵하라 는건, 비 싸일런트 야. 청각적 시각적 행위를 말라 는 선언이야. 속으로 말만해 생각이 들어 그러면. 그때 속말할수 있는걸 말하라

https://youtu.be/p4GFQRyZpgg

이건 이게 제일 좋더라
.
베토벤 과 모차르트 가 신의아들들 같다는건, 저들은 공리적으로 연역적으로 받았다는거지.

바흐 와 기타들은 귀납의 음악 이란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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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하자.

pps
여기까지가, 비트겐슈타인 의 트락타투스 를 읽기 전에 갖추어야 할, 리즌 reason이야.

Perhaps this book will be understood only by someone who has himself already had the thoughts that are expressed in it—or at least similar thoughts.—So it is not a textbook.—Its purpose would be achieved if it gave pleasure to one person who read and understood it.

트락타투스 서문 시작.이야.
이책은 오직 누군가에서만 이해될 것이다, 그스스로 이미 벌써 그것, 즉 이 책안에 표현된 또트쓰 생각들ㅡ또는 그와같은 비스무레한 생각들ㅡ을 갖고 "있었던" 사람에게만. ㅡ그래서 이 책은 따분한 교과서가 아니다ㅡ이책의 목적은 성취될것이다 이책을 읽고 이해해버린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었다면.


맥기네쓰 번역인데, 오그덴 번역 은 갖고있었던 을 띵크의 과거 또트 로 번역을 해. 아주 잘못된 번역이야. 띵크 란 비트의 독어를 저렇게 함부로 쓰는게 아냐. 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트락타투스 를 전혀 이해를 못한애야. 포름 이라고 주작질 하는거며.

비트겐슈타인 의 그레이트함은, 띵크 를 리즌 에서 분리를 시킨거야. 리즌 언더스탠딩 로직 여서 완벽히 철저히 선을 근거야

뎅켄 게당켄 의 띵킹 또트 는 따로 써야한다!
여긴, 신이여. 몰라. 내가 ps 에서 정리한 것, 아 난 저게 뿌옇던거야 께름직했던거고. 저걸 비로소 말로 드러낸거야

비트에 대한 오해는, 오직 저놈의 뎅켄 띵크 의 개념이야. 저걸 정작 비트는 말로 문장으로 드러내지 못한거야 답답만하고.

저걸 유일하게, 다른 공기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 비트의 예언대로, 오직 조선어 인간 인, 그리고 말 이란것에 오묘함을 제대로 느낀 나! 만이 저 문장을 꺼낼 수 있던거야.

띵킹 을 리즌 과 분리를 하면서, 그리고, 말 언어 에 모든 책임을 물어, 그 말은, 불가사의 띵킹 을 제대로 드러낸다며 로지칼 포름을 하나님의 사도로 장착시켜.
산뜻해. 철학자는, 필요가 없어져버린겨 이제, 비트 이후로. 비트의 말이야. 그리고 이건, 맞아. 그냥 지금까지의 철학사나 해설하는 인간만 잔존할 뿐이야 앞으로는.

철학자는 이제, 할일이 없어, 골방 영감탱이 짓 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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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책은 그래서, 즐거움을 줘!!!

즐겁지 않으면, 이해를 못한겨.

이미, 개략 자기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 만이 이해를 할거야 내 트락타투스를, 그리고 그래서 제대로 다시 이해했다면, 넌 즐거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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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을 이해한 사람 은
오직 나 하나인거지. 그리고 이글을 따라온 몇몇들.

그래서, 시작을 못했어 ,

난 지금까지, 저 트락타투스 의 저 서문의 앞까지만 설한거야.

someone who has himself already had the thoughts that are expressed in it—or at least similar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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