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ntess Elizabeth Báthory de Ecsed (Hungarian: Báthory Erzsébet, pronounced [ˈbaːtori ˈɛrʒeːbɛt]; Slovak: Alžbeta Bátoriová; 7 August 1560 – 21 August 1614)[1] was a Hungarian noblewoman and purported serial killer from the family of Báthory, who owned land in the Kingdom of Hungary (now Hungary, Slovakia and Romania).
헝가리는 성 이 극동처럼 앞이고. 1560-1614. 씨리얼 킬러 로 주장되어지는 백작부인. ≥80; up to 650 alleged 피해자 가 80명 에서 650명. 죽은겨 수백명이.
퍼포티드 라고 굳이 지금 써. 왜냐면, 사가들은, 당시의 조작된 정치공작 으로, 지금, 본다는거거든. 사가 라함은 헝가리 애들이야. 얘들은, 역사 조작 되었다 는 입장 이야, 당시 오스트리아 가 억지로 공작한.
적폐 가 역사 주작 한거지.
그래서, 역으로 보면, 저건, 역사적 사실로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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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áthory and four of her servants were accused of torturing and killing hundreds of girls and women between 1590 and 1610.[2] Her servants were put on trial and convicted, whereas Báthory was confined to her home.[3] She was imprisoned within Castle of Csejte[4] in December 1610
바토리 와 네 하인들이 고발돼. 수백명의 소녀들과 부인들을 고문하고 죽인 죄. 20년동안. 하인들은 유죄판결 사형. 바토리 는 백작부인 이고 가택연금. 체이테 성 이 슬로바키아 서쪽에 이여자 남편집 이고, 4년 후 죽어.
Many insist she inspired Bram Stoker's Dracula (1897),[11] although Stoker's notes on the novel provide no direct evidence to support this hypothesis.[12] Nicknames and literary epithets attributed to her include The Blood Countess and Countess Dracula.
드라큘라 를 이여자에서 갖고왔다, 무식한겨 이게. 평론가들이 참 무식해. 드라큘라 책을 찐하게 안봤고, 저쪽역사 무지. 드라큘라는 블라드3세. 분명해. 끝에가면 메메드2세를 야습하고, 끝까지 추격해서 괴롭히는 이야기 가 대사로 나와. 블라드3세 의 역사가 그대로 대사치는거거든.
이여자는 진짜 수백명 죽인겨 이게. 헝가리애들은, 오스트리아적폐가 우리 헝가리 나쁘게 서술한 식민사관 탓 하는거고.
저 당시 역사 가 재밌어. 왜 현대 쟤들 사가는 왜 저따위 열폭분석 하는가 를 보면.
이여자는 바토리 가문이야.
헝가리 는 거대한 적폐가, 두개여. 오스만 과 합스부르크 여. 이 두적폐 탈출 의 핵 이자 얘들 정체성 의 상징 은, 초기 오스만 적폐로 바토리 가 핵심이고, 합스부르크 가 지배할때 라코치 야.
바토리 와 라코치 가 헝가리 내셔널리티 의 중심이야.
이 둘의 거점은, 트랜실베니아 야.
정작 이 트랜실베니아 는 지금 로마니아 와 슬로바키아 가 갖고간겨. 이 헝가리 란 나라가 이게 웃긴나라야. 20세기에 마션즈 라는 헝가리 과학자들, 폰노이만 주축의. 엄청난 인물들을 만든 나라. 이건, 마갸르 들이 게르만의 오스트리아 와 슬라브 의 보헤미아 투르크 의 오스만 을 다 더한겨. 정작 이들이 똑같이 내셔널리즘 으로 망가진거고. 내셔널리즘 이란건 자살 하자 주의야
스티븐 바토리 의 바토리 야. 폴란드 킹 가면서 트랜실베니아는 형에게 주거든. 이 형의 아들이 지기스문트고 얜 카톨릭 이여. 여긴 칼뱅들 땅이고.
서기 1600년 에 헝가리는 칼뱅 땅이야.
지기스문트 가 엄마 밑에서 카톨릭 이고, 얘가 어려서 정치가 약하고 내분에 전쟁으로 역시 카톨릭인 사촌 추기경 바토리에게 넘기고 프라하 가서 죽어. 추기경 바토리는 애들이 목짤라 죽여. 그리고 보츠카이 가 칼뱅으로 수습해서 합스부르크 와 손잡아. 다음 라코치 에 바로 가브리엘 바토리 야. 헝가리어 성경 만든.
보츠카이 가 1605에 친구인 라코치 이어서 할배 가브리엘 바토리 가 1608-13. 십여년 이 칼뱅 이 군주인 트랜실베니아 야. 이들은 이때 합스부르크 에 더 붙은거야. 이후 베뜰렌 이 잡고서 오스만으로 들어가.
저 바토리 백작부인 이 기소되는게, 1610년 이야.
이때 황제는 합스부르크 루돌프2세 1576-1612재임
헝가리 킹은 루돌프 의 동생 마티아스 1608-18
동생 마티아스 가 나이 50에 헝가리 킹을 먼저 받은겨.
헝가리는 이전 위대한마티아스 가 있어서 얜2세야
저 사건 조사 는, 이 마티아스 가 한거야.
헝가리 사가들이, 저 합스부르크 로마카톨릭 꼴통 적폐가 트랜실베니아 의 칼뱅 권력을 흡집내기 위해서, 저 가브리엘 바토리 가 보이보드 로 있는 바토리 가문을 욕보이고 세력 죽이려고, 저 말도 안되는 연쇄살인범 이야기를 공작해서 만들어 낸거다, 라고 지금 새역사 라며 쓰는거지.
개거짓말 이고 졸렬한 분석이야.
마티아스 를 몰라 쟤들이.
형 루돌프의 프라하 코트는 저때 르네상스여. 별놈의 인간들 다 모여. 루돌프는 연금술에 오컬트에 미친인간이지만 티코브라허 덴마크서 피난온 천문학자에 케플러도 가 있는 코트야. 오스만과 투르크전쟁 재개하는 카톨릭 사명감도 있으나, 꼴통 이 아녀 얘들이
동생 마티아스 는, 20대에, 네덜란드 가서, 쟤들 독립한다며 80년전쟁 시작할때, 이 마티아스 가 네덜란드애들의 대표여. 얘 삼촌이 당시 스페인 펠리페2세고. 삼촌 한테 맞서서 내가 니덜 지켜줄께 ㅋㅋ. 저긴 칼뱅의 나라여.
루돌프2세 의 아들 이 이발사의 딸을 불러서 머리와 사지를 짤라죽여. 얜 정신분열증 이야. 아빠가 황제지만 유죄고 종신형 이야. 얜 일년후 죽어.
쟤들이 꼴통 종교병자도 아니고 법 이란건 오히려 권력에 더 가혹해.
마티아스 다음 이 페르디난트2세고, 얘가 카톨릭 을 강제하면서 30년 전쟁이 터지는거고, 마티아스 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겨. 마티아스는 칼뱅의 네덜란드를 사랑한 인간이야. 보헤미아도 이미 후사이트 천지고, 이걸 마티아스 가 막지 않아. 트랜실베니아 와 종교 타협 에 자치도 인정한 건, 보츠카이 의 상대는 마티아스 야 헝가리킹 되기전에.
마티아스 가 미쳤나고, 저 여자 를, 연쇄살인범 주작질 해서 바토리 를 어쩌고 헝가리를 저쩌고.
말도 안되는 분석이야.
쓰레기 나라의 연쇄살인범 권력은, 적폐 치하에서, 모든 죄는 적폐 탓이고 연쇄살인 년놈들은 억울한 천사가 되는거지. 오백년조선 처럼
Báthory was born in 1560 on a family estate in Nyírbátor, Royal Hungary. She spent her childhood at Ecsed Castle. Her father was Baron George VI Báthory of the Ecsed branch of the family, brother of Andrew Bonaventura Báthory, who had been voivode of Transylvania. Her mother was Baroness Anna Báthory (1539–1570), daughter of Stephen Báthory of Somlyó, also voivode of Transylvania, who was of the Somlyó branch
에르제벳 바토리. 니르바토리 태생. 아빠는 Ecsed 에체드, 엄마는 Somlyó 쏘미요.
트랜실베니아 프린스 인 보이보드 가문은 쏘미요, 이고 얘들 동생계열이 에체드 야. 바토리 의 두개.
바토리는 슈바벤 알레마니 게르만이 이리온겨. 이때는 3백년 된 가문이야. 최고 가문이야 아르파드 다음의.
그래서 이여자가 바토리 의 최고 부자 여. 그런데, 씨져, 에플립씨, 간질 발작 이 있어. 어릴때 수시로 이게 오고, 이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된거로 봐.
Báthory was raised a Calvinist Protestant.[4] As a young woman, she learned Latin, German, Hungarian, and Greek.[2][16][13] Born into a privileged family of nobility, Báthory was endowed with wealth, education, and a prominent social rank.
칼뱅 이야. 라틴 게르만 헝가리안 그리스어. 최고 교육을 받아 당대 귀족들은 이 깡촌도. 헝가리 외계인 과학자들이 이게 그냥 나온게 아냐.
At the age of 13, before her first marriage, Báthory allegedly gave birth to a child.[15] The child, said to have been fathered by a peasant boy,
결혼전에 13세에 애를 낳은거로 봐. 애를 농부에게 줘. 논쟁이라지만, 사실일거야.
In 1573,[9] Báthory was engaged to Count Ferenc Nádasdy, a member of Nadasdy family, in what was probably a political arrangement within the circles of the aristocracy.
13세에 페렌츠 나다스디 백작 에 시집가. 나다스디 도 고급귀족가문이고. 이 부부의 자식들이 헝가리 역사에서 중요하거든. 그래서, 헝가리 사가들은 이 여자를 연쇄살인범 으로 만들면 안되는겨. 모든건 적폐의 주작이어야만 해.
In 1578, Nádasdy became the chief commander of Hungarian troops, leading them to war against the Ottomans
Báthory's daughter, Anna Nádasdy, was born in 1585 and was later to become the wife of Nikola VI Zrinski
나다스디 는 당시 오스만 전쟁때 사령관, 딸이 뒤에 즈린스키 6세의 부인이 돼. 이 즈린스키 는, 시게트바 전투 로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위대한 술레이만 죽은 직후의 전투 고 가장 자부심 있는 헝가리 크로아티아 의 사건이야. 이 즈린스키 의 증손자 야. 이 즈린스키 형제들과 나다스디 바토리 부부의 자식들이, 합스부르크 황제 레오폴트 를 암살하려하거든. 자기들 주권을 오스만에 넘긴 분노로. 이때부터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와 갈라서는거야. 이 중심 인물 이 이 부부의 핏줄들인겨 이게.
András Nádasdy (1596–1603); and Pál (Paul) Nádasdy (1598–1650), father of Franz III Nádasdy, who was one of the leaders of the Magnate conspiracy against Holy Roman Emperor Leopold I
Between 1602 and 1604, after rumors of Báthory's atrocities had spread throughout the kingdom, Lutheran minister István Magyari made complaints against her, both publicly and at the court in Vienna.[17] In 1610, King Matthias II assigned György Thurzó, the Palatine of Hungary, to investigate. Thurzó ordered two notaries, András Keresztúry and Mózes Cziráky,[18] to collect evidence in March 1610.[19] By October 1610 they had collected 52 witness statements;[18] by 1611, that number had risen to over 300
이전에, 루터파 목사 가 소문을 듣고 문제제기를 해. 1610에 마티아스 가 자기 대리로 기요르기 투르조 를 임명해서 두 노타리 법적공증인들 에게 조사를 시켜.
3월에서 10월 까지 증거수집. 52명의 증언. 다음해까지 증인들이 300명 이 넘어.
According to the testimonies, Báthory's first victims were girls aged 10 to 14 years.[citation needed] Báthory is said to have begun killing daughters of the lesser gentry, who were sent to her gynaeceum by their parents to learn courtly etiquette.[
상류귀족 코트 나 중앙코트에 애들을 일부러 보내. 에티켓을 배우라고. 이게 페이지보이 메이드 야. 헝가리도 이걸 그대로 해. 10세에서 14세. 여자애들 전용 숙사 가 가이서시엄. 기나이케이온. 얘들을 고문하고 죽이는겨. 하인여자들도 당해.
On 12 December 1610, Nikola VI Zrinski confirmed the agreement with Thurzó about the imprisonment of Báthory and distribution of the estate.
3월부터 시작해서 12월에 남편 나다스디 도 투르조 의 조사결과 에 수긍하고 감금해. 이 여자 재산은 자식들에게 상속을 시켜.
Most of the witnesses testified that they had heard the accusations from others, but did not see it themselves. The servants confessed under torture, which is not credible in contemporary proceedings. They were the king's witnesses, but they were executed quickly. The accusations of murder were based on rumors. There is no document to prove that anyone in the area complained about the Countess. In this time period, if someone was harmed, or someone even stole a chicken, a letter of complaint was written.[4][7][22] Two trials were held in the wake of Báthory's arrest: the first was held on 2 January 1611, and the second on 7 January 1611.
지금보면, 저건 모두 소문 만 있고, 직접 본건 없고 들은게 증언들 대부분이란거고. 네명의 하인들은 바로 사형시켰다 그래서 수상하다. 불평이니 사건 이니 기록은 없다. 다 주작이다 저거. 재판은 다음해 두번 열리.
원래 사형판결이면 바로 사형시켜. 귀족들은 감금해. 저당시 사법이 원래 저래.
The highest number of victims cited during the trial of Báthory's accomplices was 650 but this number comes from the claim by a servant girl named Susannah that Jakab Szilvássy, Báthory's court official, had seen the figure in one of Báthory's private books. The book was never revealed and Szilvássy never mentioned it in his testimony
피해자가 650명 이란 숫자는 어느 하녀 의 발언. 이 여자 를 바토리 코트 직원 이 바토리 개인 책에서 봤대. 이책은 뭔지도 모르겠고 그 직원도 그책을 언급하지 않다 증언해서.
머 지들이 보기엔 전부 사기 란거지.
이여자가 드라큘라 백작부인 으로, 드라큘라 모티브 란건데, 아주 잘못 본거고, 역사해석도 잘못된거고.
신랑이 짜고 마누라 재산 뺏고 마티아스랑 꿍짝 맞은거라는둥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지들 시선에만 보이는 사료만 취해서 해석하는거지.
사라진 사람들 이 당연히 있을거고,
카더라 란 말들에 속아서 유죄했겄니,
바토리 란 이름이 저때 헝가리의 최고가문이야 끝물이지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여. 역사에서 지우는겨 모든 조사자료들은. 배워선 안될 짓인거라.
역사 조작질은, 후진역사 애들이 하는거야.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 아냐 대부분은.
역사 란건, 패자 들의 열폭의 주작질이 대부분 이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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