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의 본론 만 풀자고. 원래 명제 부터 논리학 용어들 을 좀 사전설명하고 하려 했는데, 걍 너무 구찮아 번거롭고. 주절대다보믄 자꾸 새고.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What we cannot speak about we must pass over in silence.
트락타투스 의 마지막 문장이, 영역으로 스탠포드 에 있는게 저 두개인데, 말할 수 없는 "곳"에 대하여, 거기에 대고는 침묵해야 한다. 우리가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선 우리는 침묵으로 지나가야 한다.
이게, 비트겐슈타인 의 최종 선언이야. 언뜻보면 별거 아니거든. 대체 저게 머라고 인간들이 쟤를 보고 저리 난리지?
비트겐슈타인은, 저걸, 자기 딴엔 논리적으로 도출을 한거야. 이 논리학이란게 한편으론 이어령비어령 틱해 이게. 얘도 저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또한, 자기만의 공리 를 슬쩍 집어 넣거든.
칸트 의 문장들도, 아니, 모든 문장들은 말이지, 결국 그 바닥엔, 하나님 을 갖고 와야 해. 이게 공리 고 이게 연역 이야. 칸트 가 존재론을 증명거부하는건, 저건 귀납으로 설명 못하는겨 저게. 시공간 이 써브젝트적으로 존재한다 는 그야말로 산뜻한 듯한 문장 끄집어내면서 칸트는 환호하는거야, 보는 이도 문장 하나 잘 뽑았네 궁디팡팡 해주는거고. 저런 궁리 에 로직의 꼬리들을 잡아가면서, 쟤들만의 문법으로 관념 이 폭넓어지고, 쟤들만의 문명을 만든거야. 이런걸 극똥 은 전혀 하지 않은거고. 오직 공자 라는 희대의 x의 문장들을, 저건 모두 연역의 공리들이야. 교언하고 영색하면 인하지 않느니라~ 아는걸 안다하고 모르는걸 모른다 하는게 아는거니라~ 오잉 하미 저런문장 달달 외우며 2천5백년 산거야. 북극성 주위로 별들이 도느니라. 조폭 두목 도 그리 모시야 하느니라. 그러면서 주례 에 그걸 뽑은 소학 에 인간생활을 세세하게 규제하고, 고기씹어 먹을때 입안에서 끊어야 하니 끊은고기 먹어야 하니, 여자는 겸상을 하니 시집다녀 온 딸은 수저를 어찌 드니, 어른이 지나가면 손을 어찌 내밀미 왼쪽을 가니 오른을 가니
소크라테스 왈, 인간사 의 방식을 세세하게 규정해서는 안돼. 그따위 지x을 한대?
헤겔 왈, 아니 저 극동들은, 밥먹고 똥싸고 교미하는것 자체를 예의라며 규정질 하네? 먼 저런 집단이 다있어?
.비트겐슈타인 은, 저 선언 을 한 근본적 이유는, 소크라테스 와 칸트 의 물자체 에 대한, 로직스 를 도구로 접근하는것을 분명하게 거부 하는겨.
소크라테스 의 알레떼이아 를 인정해. 이런 문장을 쓰지는 않아.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의 사회적 써클, 비트겐슈타인의 나름 인간관계를 깊이 디다보면, 나같은 그야말로 쌩추어리 에 인트린씩에 스펙테큘러 한 안목을 지닌 분이 파악하건데, 인정해 소크라테스 의 오브젝트적 진짜 를. 내가 저 이유를 대기가 너무나 귀찮아. 이건 확실해.
그러나, 소크라테스 는 저걸 소크라테스적 대화 로, 찾아갈수 있고 찾아가야 한다 라고 하거든.
플라톤이 말하는 소크라테스는
로지칼한 문장들의 주고받음 로직스 로 리앨리티를 찾아낼 수 있다
라고 했거든.
비트겐슈타인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말하는거야.
로직스로 찾아낼수 없다. 드러낼수 없다.
그러나, 비트는 화면, 픽쳐를 드러내. 생각은 화면 픽쳐이다.
리앨리티 는, 화면으로 눈밖에 드러나는겨 미래에 ㅋㅋ. 비트는 이 힌트를 우연히 제공한거야.
.
조지 무어 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의 저 오브젝트적인 리앨리티 가 드러나고 이슈가 된겨.
Relation to the mind[edit]
In relation to the mind, propositions are discussed primarily as they fit into propositional attitudes. Propositional attitudes are simply attitudes characteristic of folk psychology (belief, desire, etc.) that one can take toward a proposition (e.g. 'it is raining,' 'snow is white,' etc.). In English, propositions usually follow folk psychological attitudes by a "that clause" (e.g. "Jane believes that it is raining"). In philosophy of mind and psychology, mental states are often taken to primarily consist in propositional attitudes. The propositions are usually said to be the "mental content" of the attitude. For example, if Jane has a mental state of believing that it is raining, her mental content is the proposition 'it is raining.' Furthermore, since such mental states are about something (namely, propositions), they are said to be intentional mental states.
프로포지션 영어위키 의 문장들인데, 마인드와 관계되는 명제. 아 이런게 ㅈ나게 재밌는겨. 프로포지셔널 애티튜드. 저런걸 신학하는 애들이 보면 진짜 다가올텐데. 아 물론 조선땅엔 신학자 가 없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 챕터 가 너무나 신선하던데, 넘어가고.
비트겐슈타인은,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리앨리티 를 오브젝트적인 존재 로 믿어. 물론 이런 문장은 쓰지 않아. 그러나, 이걸 믿으니까! 트락타투스 의 결론 문장 을 쓴거야 비트형은.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말할수 없는 것 이, 플라톤 소크라테스 의 리앨리티 야. 칸트 의 물자체 이고.
말할수 없어. 말할수 없다는 것은, 이게 로직스 에 로지칼 이야. 프로포지션 에 쎈턴스 에 그램머 에 랭귀지 여. 생각 이고 세상 이고. 생각 이란것은 세상 이고 그래서 픽쳐 화면 이야. 생각은 화면 이고 화면 은 세상 이야. 생각 화면 을 문장 으로 말로 말하면서 생각 하고 그리고 세상과 매치 하는겨.
리앨리티 는 말할수 없는 영역의 것이야.
침묵해야 한다. 이건, 말할 수 없다 는겨. 이건 머 당위 어쩌고 가 아니라, 할 수 없는겨. 입도 뻥긋 마라 시안한 말 해서 혼돈주지마라 이런 엄명이 아냐.
소크라테스 의 의지 는, 틀렸다, 야.
더하여, 신학도, 신앙도, 저걸 문장들로 접근하는것 역시나, 틀렸다, 야.
울부짖는다 고, 신 이 너에게 가는건 아니다, 인겨.
다음에 돌아와서 쓴 유고작 은, 말할수 있는 것 에 대해서 푼 것일 뿐이야. 이놈의 말 말 말,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언어게임좀 제대로 합시다 니덜 이런저런 이유로 통신이 안되고 오해 생기고 하는겨 인간사라는게. 이 말이란것을 좀 제대로 이해해라, 이게 유고작이야 자기가 틈틈이 쓴. 아 물론 나야 안봐서 상세한 내용은 몰라. 내가 저런거 볼 짬빱은 아니잖니.
인간 문명은 이 말 로 만든거야. 말이란건 ㅈ나게 중요한겨 그래서. 문법 과 로직스 는 세상의 천재 들이 하는 영역이고, 컴퓨터 라는게 문법과 로직스 로 만든거야. 인문학 이 만든거야 이건. 조선땅에선 절대 어떤 무엇도 설 수가 없어. 교육 자체를 제대로 하는 인간이 없고, 제대로 문제인식 을 갖은이가 이씨조선 이래 육백년 넘어 단 한명도 없거든.
그래서, 참 궁금한게 말이지, 비트겐슈타인의 신앙 이야.
그럼, 비트겐슈타인은, 무신론자 인가? 절대 그럴수가 없어. 버틀란드 럿셀 따위 처럼 후질수는 없지. 이 럿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학을 소개한거지만, 럿셀은 정말 후진 개 이야. 얘 철학이 후질수 밖에 없는건, 역사 서술을 보면 알아. 얘 역사 서술은 너무나 후져. 그래서, 럿셀의 신학 이야기 수학 이야기 조차 후져. 얜 자기 자서전 대로, 어릴때 자살해서 뒤졌어야 해. 이런 이가 지금 잉글랜드를 후지게 하는 진영을 공고히 하거든. 이 조선땅에선, 비판 할 아무런 잣대 가진 애가 없으니, 럿셀 하면 무슨 경님 위대하신 분 어쩌고 떠받들거든.
비트겐슈타인 의 신앙관 이 키에케고, 도스토예프스키 와 비슷해. 이 셋 이 신앙관이 비슷해. 지금 인류역사 에서, 가장 깊고 진보적인 신앙관 은 이 세명이야.
Faith[edit]
Wittgenstein was baptized as an infant by a Catholic priest and received formal instruction in Catholic doctrine as a child, as was common at the time.[41][page needed] In an interview, his sister Gretl Stonborough-Wittgenstein says that their grandfather's "strong, severe, partly ascetic Christianity" was a strong influence on all the Wittgenstein children.[67] While he was at the Realschule, he decided he lacked religious faith and began reading Arthur Schopenhauer per Gretl's recommendation.[68] He nevertheless believed in the importance of the idea of confession. He wrote in his diaries about having made a major confession to his oldest sister, Hermine, while he was at the Realschule; Monk speculates that it may have been about his loss of faith. He also discussed it with Gretl, his other sister, who directed him to Schopenhauer's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68] As a teenager, Wittgenstein adopted Schopenhauer's epistemological idealism. However, after his study of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he abandoned epistemological idealism for Gottlob Frege's conceptual realism.[69] In later years, Wittgenstein was highly dismissive of Schopenhauer, describing him as an ultimately "shallow" thinker:
비트겐슈타인은 유대인이지만, 어릴때 로마카톨릭 세례를 받은거고, 로마카톨릭 을 배웠어. 할아버지 가 강렬 심각 때론 금욕의 크리스찬 이었다. 이게 모든 비트겐아이들에게 영향주다. 중고등학교일때, 자기가 신앙적 믿음이 부족하다는걸 알아. 좀 삐딱하게 나간겨. 쇼펜하우어, 얘도, 불교 를 힌두교 를 최고로 치는 애야. 별거 아닌 게르만 인간. 유대인 이 가장 드러운 종교의 인간들인겨 얘한텐. 이런 애가 나치 를 맹근거고. 조선땅에선 쇼펜하우어 가 대단한 위인인거고. 이 조선에겐 걍 서양철학 하믄 ㅈ나게 위대한겨.
그러나 그럼에도, 콘페션, 자기고백, 참회, 이건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 누나 에게, 큰 참회고백을 했다고 일기에 썼다 중고등학교때. 몽크 가 보기엔 신앙을 잃었던듯 하다. 그레틀 이 누나여, 헤르미네 는 큰누나고. 이 그레틀 이 결혼초상화 를 클림트 가 그린겨. 이때 있는집 애들은 벌써, 당시의 크리스찬 신앙 방법 과 그 교리에 회의감이 드는거고, 그레틀 도 인격적 신 을 거부하면서 겉도는겨. 오직 쇼펜하우어 의 인식론적 아이디얼리즘 에 관심있는겨 그레틀 은. 칸트 애들이야. 칸트 의 트랜쌘덴털, 아이디얼 한것은 초월적으로 있어. 이게 더가서 아이디얼 한 신 쩍인것은, 인식, 인간 인식 의 문제인거야. 따로 어디 있는지 없는지 알수 없거니와, 인식에서 주작질 하는겨 초월적 신 의 물자체 라는건.
비트겐슈타인 은, 프레게 의 리얼리즘 을 믿어. 비트겐슈타인 은 말이지, 말할수없는것 은, "리얼하게" 오브젝트적으로, 어딘가 있는겨. 그게 신 이든 무엇이든.
지금 소위 영미 에 대륙 의 진보적 이라는, 서점을 지배하는 그러면서 소개되는 모든 유럽애들이, 소설들 조차, 2차대전 이후로, 쟤들이 모두, 헤겔 과 쇼펜하우어 의 아이들이야. 얘들이, 포스트 모던 이즘 을 만든거고. 전적으로 신을 짓밟은겨. 이런애들이 믿는게, 웃기게도, 불교 야 ㅋㅋㅋ.
이 불교 란건 정말, 너무나 유치하고, 너무나 얄팍한겨 이게.
불교란건 너무나 후져.
유불도 세상은 2500년 실험이 증명해, 철저히 실패했음을.
유불도 자체 이야기가 너무나 후져. 너무나 미개해
유불도는 버려야해. 실패한걸 인정해야해.
유불도 갖고 돈벌이하는 ㅇㅇㅇㅇ마땅해
인간의 이성이 아니니까 저런 지능인겨
이씨조선 역시나 마찬가지고.
철저히 실패한 내용들에서 배울건 단 하나 없어.
유불도 꺼내는 ㅇㅇ는 하수도 아니고, 걍 ㅇㅇㅇ여.
.
비트겐슈타인이 그래서, 저따위 쇼펜하우어 는, 그야말로 얕은 놈, 정말 너무나 잘본겨 비트겐슈타인이.
Wittgenstein's relationship with Christianity and with religion in general, for which he always professed a sincere and devoted sympathy, would change over time, much like his philosophical ideas.[71] In 1912, Wittgenstein wrote to Russell saying that Mozart and Beethoven were the actual sons of God.[72] However, Wittgenstein resisted formal religion, saying it was hard for him to "bend the knee",[73] though his grandfather's beliefs continued to influence Wittgenstein – as he said,
I cannot help seeing every problem from a religious point of view.[74]
비트형의 그리스도 와 신앙의 관계에 대해 그는 언제나 선언했다 진솔하고 헌신적인 공감을,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의 철학적 사상과 함께 해서 더욱 더 그리스도 와 신앙 에 깊어진겨. 1912년 23세 럿셀에게 썼다, 모짜르트 베토벤 은 신의 진짜 아들들 이라고. 그러나, 비트형은, 포멀한 신앙 을 거부했다, 무릎꿇는짓은 너무 버거워 라며. 그의 할아버지의 믿음이 그를 지배해 왔다. 그는 말했다. 나는 신앙적 관점의 모든문제가 보이는데 이거 어째. 이따위 신앙질 은 문제가 많은겨.
Wittgenstein referred to Augustine of Hippo in hi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Philosophically, Wittgenstein's thought shows alignment with religious discourse.[75] For example, he would become one of the century's fiercest critics of scientism.[76] Wittgenstein's religious belief emerged during his service for the Austrian army in World War I,[77] and he was a devoted reader of Dostoevsky's and Tolstoy's religious writings.[78] He viewed his wartime experiences as a trial in which he strived to conform to the will of God, and in a journal entry from 29 April 1915, he writes:
Perhaps the nearness of death will bring me the light of life. May God enlighten me. I am a worm, but through God I become a man. God be with me. Amen.[79]
히포 오거스틴 언급. 철학적으로, 신앙적 담론 을 유고작에서 보여줘. 싸이언티즘 에 극도로 반대했을것이다. 이건 내추럴싸이언스 인 자연과학 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오브젝트 라는겨. 강력 반대 이런의견은. 비트형의 신앙 믿음 은, 1차대전 중에 생겼다. 그리고 그는, 도톱이 와 톨스토이 의 신앙적 작품들을 몰입해서 보다. 그는 그의 전시 경험들을 시험대로 여겨서, 그 속에서 그는 신의 의지대로 하려했다. 그리고 1915년 26세 일기 에서 쓴다.
아마도 죽음 근처 가 나를 삶의 빛으로 데려올 것이다. 신이여 나를 비춰주길. 나는 벌레다, 그러나 신을 통해서 나는 인간이 된다. 신이여 나와 함께 하자. 아멘.
Around this time, Wittgenstein wrote that "Christianity is indeed the only sure way to happiness", but he rejected the idea that religious belief was merely thinking that a certain doctrine was true.[80] From this time on, Wittgenstein viewed religious faith as a way of living and opposed rational argumentation or proofs for God. With age, a deepening personal spirituality led to several elucidations and clarifications, as he untangled language problems in religion—attacking, for example, the temptation to think of God's existence as a matter of scientific evidence.[81] In 1947, finding it more difficult to work, he wrote:
I have had a letter from an old friend in Austria, a priest. In it he says that he hopes my work will go well, if it should be God's will. Now that is all I want: if it should be God's will.[82]
이즈음에 비트형은 썼다, 그리스도 가 진실로 유일한 확실한 길이다 행복으로의.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어떤 교리가 참이다 라는 단순한 생각이 신앙적믿음이다, 라는 사상을. 이때부터 비트형은 신앙적 믿음을 보았다, 생의 길로써, 그리고 반대했다 이성적인 논쟁이나 증거들을, 신에 대한. 나이처먹으면서, 깊어지는 비트의 영성은 몇개 더 분명해졌다. 종교 신앙에 대해서 언어의 문제들을 풀었다, 신의 존재를 과학적 증거의 문제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공격하면서. 1947년 58세 에, 이런건 너무 힘든 일이라면서 썼다.
나는 오스트리아 의 사제 인 오랜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속에서 그는 말한다, 내 작업이 잘 되길 바란다고, 그게 신의 뜻이라면. 그 작업은 내가 원하는 전부이다; 그게 신의 뜻이라면.
In Culture and Value, Wittgenstein writes:
Is what I am doing [my work in philosophy] really worth the effort? Yes, but only if a light shines on it from above.
His close friend Norman Malcolm would write:
Wittgenstein's mature life was strongly marked by religious thought and feeling. I am inclined to think that he was more deeply religious than are many people who correctly regard themselves as religious believers.[41][page needed]
Toward the end, Wittgenstein wrote:
Bach wrote on the title page of his Orgelbüchlein, 'To the glory of the most high God, and that my neighbour may be benefited thereby.' That is what I would have liked to say about my work.
내가 지금하는 철학작업이 진짜 할 가치가 있는가? 물론이지, 그러나 단지 빛이 그것위에 비출때 만이, 저 위에서.
비트형의 성숙된 삶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 신앙적 사고 와 느낌 의 삶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짜 종교적 믿는자들이라 스스로 여기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는 그런자들보다 더 신앙적이었다.
바흐 글은 예전에 인용했었고 내가
.
비트겐슈타인 은, 철저한 신앙인이야. 키에케고 와 도톱이와 같아 이건. 그리고, 오컬트 식 믿음 은 결사 반대여.
키에케고 도, 절친했던 사제 한테 격렬하게 편지를 쓰거든. 어떻게 그리스도를 그렇게 오컬트식으로 믿고 그따위껄 전파하냐고.
도톱이는, 아잉 정말 차원이 달러 이 도톱이는. 저 맨 구석 변방 러시안 주제가. 아 얜 런던 에 더 살았고 더 다녔으면 더 좋았을 텐데.
.
비트겐슈타인 은, 저거여. 신 에 대해, 로직스 로 접근 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 는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로직스 로 찾으려고 하지 말라. 그시간에 차라리 로직스 로 말하는 것에 대해 더 탐구 하자. 는겨.
즉 비트겐슈타인 은, 칸트 의 또다른 버전 이야.
.
로직스 가 또한, 전부 가 아니라는거지.
그러나, 조선어족 인간들에겐, 모두 뜬구름잡는 소리야. 로직스 가 먼지 문법이 먼지, 전혀 아는이 없이, 어머 칸트 도 비트도 저게 저런게 전부가 아니래. 땡. 이러고 마는거지.
Subsequently, he ends the journey with the admonition concerning what can (or cannot) and what should (or should not) be said (7), leaving outside the realm of the sayable propositions of ethics, aesthetics, and metaphysics.
그러면 무엇이 말하여질수 있나 없나 의 그 선은 무엇인가 에 대해 정중히 사양을 해. 에띡쓰 에쓰틱쓰 메타피직쓰 의 말할수 있는 명제들 의 영역 밖으로 그런건 남겨두는겨.
2.2 Sense and Nonsense
In the Tractatus Wittgenstein’s logical construction of a philosophical system has a purpose—to find the limits of world, thought, and language; in other words, to distinguish between sense and nonsense. “The book will … draw a limit to thinking, or rather—not to thinking, but to the expression of thoughts …. The limit can … only be drawn in language and what lies on the other side of the limit will be simply nonsense” (TLP Preface).
스탠포드 가 학실히 , 제일 설명 이 잘 되어있어. 서문에서 이미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언해. 생각하기의 한계선 이 아니라, 생각들의 표현들에 대한 한계가 있음을 말하려는거고, 그 한계선은 오직 언어로 그어지는것이고, 그 경계선 의 바깥은 단지, 논쎈쓰 일 뿐이야.
폴쓰, 거짓 이 아니라, 논쎈쓰, 쎈써가 닿지 않는거야. 비트형 식 표현인 알수없다 가 논쎈쓰 야.
저 비트 강의는 내가 귀찮아서 안할거고. 걍 저런게있고.
.
저런 이들이, 모두, 잊혀지는거야. 신이 없다, 오직 인식론의 문제일뿐. 오브젝트적으로 없다. 막살아라, 이거저거 다 정답이다. 이런 인식이, 지금 현재 남조선 의 모습이야. 이 남조선 의 엔엘 피디 권력애들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어. 물론 자유 어쩌고 보수라미 떠드는 애들역시도 아무 생각 없는건 마찬가지고.
.
문제는 저러한 현실에서의 신앙관 이고, 모랄리티 에띡쓰 인데, 왜냐면 이게 이때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야할것이, 미래에 인간의 새로운 스피시즈 로 진화를 함에 있어서,
그 종에, 어떻게 진입하게 되는가.
이게 절대절명 의 문제야.
키에케고 도톱이 비트겐슈타인 아인슈타인 은 저런 신인류 새 종에 진입하거든. 최근 죽은생체 호킹 형 도.
나도 , 저길 진입하게 돼. 이번생엔 조선 피로 살다가 뒈지지만, 천년이후엔 저 스피시즈로 나는 거듭나게 돼. 나는 장미의 계곡에서 커다란 궁궐속에서 만인의 존경을 받지만 겸허하게 살아가며 통계적으로 인간들 관리하고 영적으로 가이드를 해주는거거든. 거기에 조선애들은 원래 하나도 없이 모두 구데기 로 거듭날때 나를 따른 몇몇 오브젝트 만 재수좋게 극동에서 벌레 아닌 인간이 되는건데.
그러기 위한 신앙관을 어찌 취하는가.
에띡쓰 는 어드래 갖는가.
기존의 크리스채니티 는 납득되는가 의 문제거든.
기본적으로는, 보이는 세상 의 내츄럴싸이언스 를 해야하고, 그동안 인류의 리터러쳐를 복습해서 내적 마인드를 넓혀놓아야 만 해. 이때 재료는 웨스턴이지 아시아는 똥 의 역사라 진화에 방해안 될 뿐.
이런관점에서, 저 말할수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행할것인가. 등등
천년 이후의 새로운 스피시즈 에 진입하기 위해서.
이건 고민하도록 해. 핵샤워를 피하고 구데기 영원 환생 피하고
저때 저 시대에는,
비트형의 픽쳐라는 화면으로 생각세상에서 표현되는 , 지금은 말할수없는, 그 세상이 말이지,
그 화면이, 보여지는 때가 오는거야.
그것도, 개인 각각이 몇몇이 내면의 직관이니 어쩌고 사기치기 쉽게 봤니 마니 하는게 아니라
모두, 모두 가 같이, 물자체, 말할수없던것, 생각도 그림도 못했던 그것, 을 , 보게 돼. 그것도, 모두 모두 다 함께. 그게, 신 이라고도 할수 있고, 그러나 그때 보이는건, 니덜이 상상해온 인격적 모습의 그런게 아냐.
그러나 또한, 생각 궁리해오던 것과 그렇게 별다른건 아닐거야. 플라톤 의 말 과 당시 의 이야기들 에서 약간 틀어진 다른 모습이야 그 말할수 없는건.
저들이 생각해온 만들어온 믿어온 그런 것과 전혀 쌩뚱맞은 그런게 아냐.
그렇지만 먼가 다르고 놀라운거지. 화면으로 보이게 되는 그 말할수없는 지금의 그것은.
.
그때까진,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의 세상에서 살아가는거야.
.
비트겐슈타인 키에케고 도스토예프스키 칸트.
를 알고서, 자매님 영상보면서 이 ㅁㅊㅇ덜아, 자매님 찬양하고 구독하고, 자매님 말씀 한땀 한땀 되새기고,
니덜도 좀 인간이 되어라 벌레에서. 비트형도 벌레였다가 인간 되었다잖냐. 니덜도 할수 있어. 자매님 음악들으면서 하나님 묵상 하면서 니덜도 좀 시바 차카게좀 사는 인간이 되거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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