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viWwyjAFWk

아래내용들은 오류가 있습니다. 위 칸트시리즈 대여섯개 영상들로 대신합니다

.

 

Kant defines metaphysics in terms of “the cognitions after which reason might strive independently of all experience,”

hus metaphysics for Kant concerns a priori knowledge, or knowledge whose justification does not depend on experience; and he associates a priori knowledge with reason. The project of the Critique is to examine whether, how, and to what extent human reason is capable of a priori knowledge.

처음에 언급했던걸, 다시 상기를 시키면, 칸트 의 메타피직스 는, 코그니션즈, 야. 이성이 에프터 코그니션즈, 코그니션즈 에 따라서, 코그니션즈 를 따라다니면서, 모든 경험과 독립적인, 별개인 것을 추구 투쟁하며 쟁취하는게 메타피직스 야.

경험 과 별개야. 이게 머여? 아프리오리 날리지 야. 경험 이란건, 뉴튼 싸이언스고 쎈써블 월드 그 자체야. 아포스테리오리 날리지 의 세상이야. 이 아포스테리오리 는 메타피직스 가 아녀. 경험과 전혀 별개 인 그러면서도 경험에 앞선, 아프리오리 의 앎 이란게 분명히 있다는겨. 있다는걸 전제하고, 그리고 나서, 이성 이 이걸 얼마나 수용할 능력이 있는가, 이게 메타피직스 의 과제상황 이야. 아프리오리 앎 을 이성이 수용 못하면, 메타피직스 란건 없어도 되는 분야 인겨.

나는 오직, 리즌, 만을 이성, 으로 번역하는겨. 혹 다른걸 이성 이라하면 반드시 써줘야해 그 원어가 리즌 외에 무얼 이성으로 썼나를.

이 조선 글 들은, 전혀 단어, 언어, 말, 글 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 없어서, 한글 문장은 똥 그 자체야. 조선 인문학은, 걍 똥 그 자체야.

But scholars disagree widely on how to interpret these claims, and there is no such thing as the standard interpretation of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Two general types of interpretation have been especially influential, however. This section provides an overview of these two interpretations, although it should be emphasized that much important scholarship on transcendental idealism does not fall neatly into either of these two camps.

어제 이어서 보면,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의 내용이란게,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으로 리얼하고 초월적으로 아이디얼하다. 칸트 의 문장을 단 하나 뽑아라. 저 문장이야. 트랜쎈덴털, 을 초월 이라 쓰고, 기니까, 이 초월은, 인간의 마인드 를 넘어서는것이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거야. 초월적 으로 아이디얼하다, 아주 애매한 말이고, 정말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야 이건. 저건, 학문이 아냐. 걍 신앙 주술 영역이야.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게 아냐. 저렇게 선언해 버리면, 그 이상 무얼 어찌 할 수가 없어. 사제복 쳐입고 촛불놀이나 해야 하는겨 알레고리 놀이나 해대고.

저건, 내 말이거니와, 똑같이, 칸트 의 말을 이해한 사람이면 당연히 하는 말이야. 칸트 가 나름 새로운 프레임 판을 만들어준듯 해도, 가만 디다보면, 토마스 아퀴나스 에 이전 성 오거스틴 의 똑같은 반복질이여 저게. 이성과 믿음 의 두 개. 그 이상 아닌겨. 아 이거 지랄 맞은 겨이건. 오직 믿음 믿음. 이 믿음 의 영역은, 언어가 필요 없는겨. 결국 이 말로의 회귀 일 뿐이야 칸트 의 선언은.

돌아가면, 칸트 는 인라이트먼트 의 시대에, 뉴튼 과학 이 모랄리티 와 릴리전 까지 파고 드는 것에서, 이에 대한 반발로 비판시리즈를 낸거야. 화해 공존 시킨다는 명분으로. 저당시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여전한거야 칸트 시대의 어설픈 답이 머였냐면, 뉴튼 과학의 이성의 길 그대로 가면, 똑같은 방식으로, 모랄리티 와 릴리전 의 법칙 들을 인간이성이 드러낼 수 있다 는 거야. 인간은 그 러면 그 드러낸 법칙대로, 살면 되는겨 언젠가는. 이건 머여? 완벽하게 프로그램 된 삶대로 사는겨. 전혀 자유 라는게 없어 이런건. 전혀 범죄 도 없어 저런 세상은. 결국 로봇 의 세상이야. 철저한 공산사회여 ㅋㅋㅋ. 이게 칸트 이후에도 19세기 에 아주 렬렬한 논쟁에, 지식인 자연 해대는 애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야. 저 생각의 절정이 머냐? 마르크스 들이야. 얘들은 자기들 역시 자유사상가 리버럴리스트 라고 하거든. 여기서의 리버럴 은 무슨 의미여? 트러디셔널 모랄 과 릴리전 의 레걸레이터 인 기존의 종교 사제권력과 정치세속권력을 때려엎겠다는 의미의 리버럴 일 뿐이야. 그리고, 이 몇몇만의 리버럴리스트 의 개인창녀촌 을 꾸리는 세상일 뿐이고.

내말이 황당하냐? ㅋㅋㅋ. 저게 중국 이고 북조선 이야 결국. 남조선 애들의 이상사회야. 그게 레닌에 스탈린 이었던거고. 스탈린 은 뒈질때 침상의 양 을 가리켜 자기는 양 이었다며 ㅋㅋㅋ.

웃기게도 말이지, 칸트 가 저걸 막겠다면서 비판 시리즈 를 쓴거지만, 일단 화해 의 첫번째 문장 이 머여? 저 관계를 끊어버린겨, 뉴튼 세상 과, 모랄리티릴리전 세상을. 가만보니 서로 콘포름, 패러다임이 같은 세상이 전혀 아닐수도 있어. 그럴 확률이 아주 높아. 뉴튼세상을 휴먼마인드로 언더스탠딩 하듯이, 모랄리티릴리전 세상을 똑같이 봐서는 안돼. 칸트 딴에는 신선한 문장인겨 이게. 그래서, 여러분, 뉴튼과학의 사고방식을 모랄리티릴리전 에 적용하지 마세요! 이게 칸트 가 꺼낸 엄격한 선언문 이야. 이건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 의, 이성의 세상이 따로 있고 신의 세상은 믿음의 삽 으로만 파야 합니다, 로 가는 문을 연 것일 뿐이야.

칸트 가 저 문장을 만들고 나서, 아쉽거든 먼가 모랄리티릴리전의 인텔리저블 월드 의 아프리오리 앎을 쌩으로 다 버리기엔. 가만, 경험세상이란 싸이언스 라는 쎈써블월드 는 전적으로 아포스테리오리 앎 인거야? 아포스테리오리 앎 이란건 머여? 오브젝트 가 주인이고 콘셉 이 노예야. 오브젝트 를 경험하고 나서, 아포스테리오리, 한 콘셉의 앎이 되어 버리는 구조 인건가? 가만, 오브젝트 가 콘셉의 노예 일 수는 없을까? 이러면, 콘셉 이 주인이고, 콘셉 에 원래 있던, 경험과 무관한, 아프리오리 앎 으로, 오브젝트 를 만들어나가는 것 아닌가?

논리 전개 가 이렇게 가. 그리고 나서, 공간과 시간을 꺼내. 왜 꺼내 얘들을? 쎈써블 월드 와 인텔리저블 월드 를 가름하는게 이놈의 공간과시간 이란겨. 모든게 이탓이야 공간과시간. 얜 써브젝티브 포름 이래. 칸트가 이 워드들의 조합을 참 기가막히게 꺼낸건데, 오브젝티브 포름 이 아냐. 써브젝티브 포름이야. 오브젝트 란건, 동떨어져서 작동하는겨 이건. 써브젝티브 란건, 써브젝트 안에서 작동하는겨. 포름이야. 몰라 그 시스템은, 그러나 배후로 확실히 작동하는 먼가 있어 포름 이란건. 이 공간과시간 이란건, 써브젝트 를 제거 하면 소멸돼. 더가서 구체적인 타겟을 풀면, 써브젝트 의 쎈쓰들을 이루는 콘스티튜션, 쎈쎄이션해서 휴먼마인드에 언더스탠딩 하게 하는 그 입구, 쎈쓰들을 작동시키는 총체,를 제거하면 공간시간은 소멸돼. 왜? 공간 시간으로 인해, 인간은 쎈써블 월드 를 쎈쎄이션 해서 언더스탠딩을 하는겨. 쎈써블 월드 의 대전제 는 공간과 시간 인거야. 얘들은 쎈쓰들의 콘스티튜션 과 관계되는 무엇이야. 공간과 시간은 그래서 경험적으로 리얼한 것이지만, 초월적으로 아이디얼 한 것이야. 경험을 넘어서 다른 곳에 있는겨 이게, 포름 으로. 이걸 인간은 인튜이션 으로 느껴. 너무나 무책임한 말  인튜이션. 직관 어쩌고 하는.

공간과 시간은 물자체 도 오브젝트 도 아냐. 써브젝트적인 포름 이야.

공간과 시간 이라는 시안한 장치, 때문에, 물자체, 앱스트랙트 오브젝트 세상인 리앨리티 를 알 수 없다 는겨. 이 물자체 의 세상은 공간과 시간 이라는 초월적으로 아이디얼한 것들 의 너머 에 있는겨 이게.

칸트 가 이런 말들을 해대니까, 논쟁이 붙어. 쟤 말을 뜯어보는겨. 일단 저  말을 한번 정리해보자, 이게 당대 와 현재 도 진행되는 과제상황이야. 두 진영으로 나뉘는데, 아직 어느 하나 가 주류이다 라고 말을 못한다는겨 저거 정리한 애는.

3.1 The two-objects interpretation

The two-objects reading is the traditional interpretation of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It goes back to the earliest review of the Critique – the so-called Göttingen review by Christian Garve (1742–1798) and J. G. Feder (1740–1821)[9] – and it was the dominant way of interpreting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during his own lifetime. It has been a live interpretive option since then and remains so today, although it no longer enjoys the dominance that it once did.[10]

칸트 의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을 이해하는 하나가, 두개 오브젝트들 로 보는 해석. 이게 칸트 당대와 그 직후 의 해석이야. 이게 과거의 주류였어. 칸트 의 리얼타임 시대의 해석이었고 오늘날도 이런 해석을 따르기도 한다, 물론 과거처럼 지배적인 관점은 아니다.

According to the two-objects interpretation, transcendental idealism is essentially a metaphysical thesis that distinguishes between two classes of objects: appearances and things in themselves. Another name for this view is the two-worlds interpretation, since it can also be expressed by saying that transcendental idealism essentially distinguishes between a world of appearances and another world of things in themselves.

둘-오브젝트 해석. 오브젝트 를 두 층으로 분류를 해. 어피어런스 과 물자체. 다른 이름으론 둘-세상 해석. 물자체들 세상과 보임들세상 으로 구분을 한겨. 어피어런스 란건, 휴먼마인드 의 언더스탠딩 의 레프리젠테이션 이야. 내면에서 새가 바라보는 화면들, 이 어피어런스 야. 이것도 역시 머여? 오브젝트 여. 물자체 도 오브젝트 고, 인간의 마인드 세상의 것들도 오브젝트 야. 오브젝트 로 보는겨 이걸. 물자체 도 오브젝트, 그 오브젝트 를 느끼는 화면들 도 오브젝트. 이걸 뒤로 가서, 어피어런스 라는 오브젝트 를 콘크리트 오브젝트, 물자체 오브젝트 를 앱스트랙트 오브젝트 라고 콰인 애들이 산뜻하게 이름짓는거야.

어려울게 없어 이게.

Things in themselves, on this interpretation, are absolutely real in the sense that they would exist and have whatever properties they have even if no human beings were around to perceive them. Appearances, on the other hand, are not absolutely real in that sense, because their existence and properties depend on human perceivers. Moreover, whenever appearances do exist, in some sense they exist in the mind of human perceivers. So appearances are mental entities or mental representations. This, coupled with the claim that we experience only appearances, makes transcendental idealism a form of phenomenalism on this interpretation, because it reduces the objects of experience to mental representations. All of our experiences – all of our perceptions of objects and events in space, even those objects and events themselves, and all non-spatial but still temporal thoughts and feelings – fall into the class of appearances that exist in the mind of human perceivers.

물자체 라는 앱스트랙트 오브젝트 는 절대적으로 리얼한겨. 리얼리즘 이란건 이런거야, 정치사회적인 없는인간들의 구질구질이 리얼리즘 어쩌고 가 아니라. 얘는 존재 하는겨. 그러나, 인간 은, 퍼시브 포착 인식 못해. 어피어런스 는, 경험적으로 리얼한거야, 칸트 의 표현으론. 절대적으로 리얼한게 아냐. 리얼하긴 리얼한데,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 인겨. 불교 세상의  저 보이는게 다 허상이고 거짓이고, 이따위 개소리가 아녀. 우리가 이 어설픈 유불도 로 대갈통이 프로그램이 되서 쟤들말이 먼말인지 모르고 걍 어 불교얘기네? 장자얘기네? 매우 무식한겨 이게. 끔찍할정도의 개무식이야. 근본적으로, 영어를 못해. 그러니 일본애들의 발음기호나 뻬껴 쓰면서 적폐놀이 하면 인간취급 받는게 조선 사회야.

어피어런스 라는건 그래서, 퍼시버, 포착해서 가져와서 언더스탠딩 의 화면에 뿌리는, 받아들이는 자 에 전적으로 의지하는겨. 우리는 눈밖의 것을 절대 그 자체로 전체 를 인식하지 않아. 자기들마다 느끼는 것만 취할 뿐이야. 오브젝트 는 콘셉의 노예야. 이 문장은, 참이야. 그래서 어피어런스 라는 콘크리트 오브젝트 란건, 멘탈의 단위들이고 멘탈의 화면들 일 뿐이야. 멘탈 이 마인드 고 마인드 란건 퍼시브 해서 언더스탠딩 하는 내면시스템 이야. 어피어런스 란건 멘탈의 하얀스크린에 비추어진 형형색색의 화면들 이다.

우리는, 오직 어피어런스 만을 경험한다.

따라서,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은 일종의 피노미날리즘, 현상주의, 이다. 라며 현상학 으로 번역되는 피노미날리즘 이라는 단어가 나와. 이 워드는, 칸트 가 처음 쓴거지만, 편지 들에서 쓴거고, 정작 칸트 의 비판시리즈 에는 등장하지 않아. 이 단어는 그리스어야. 이걸 전적으로 헤겔부터 갖고 가는겨. 저놈의 현상학 이 먼가는, 칸트 가 해결이 되어야 제대로 풀리는겨.

오직 인간의 경험가능한 오브젝트들은, 멘탈의 화면들 일 뿐이야.

우리의 공간 속의 모~~~~든 오브젝트들과 이벤트들 사건들, 모든 오브젝트들 모든 그자신들, 잠시든 안잠시든 순간의 생각들 느낌들은 모두 어피어런스 의 세상이고, 이 세상은, 인간이라는 수용체 의 마인드 안에 있다.

These appearances cut us off entirely from the reality of things in themselves, which are non-spatial and non-temporal. Yet Kant’s theory, on this interpretation, nevertheless requires that things in themselves exist, because they must transmit to us the sensory data from which we construct appearances. In principle we cannot know how things in themselves affect our senses, because our experience and knowledge is limited to the world of appearances constructed by and in the mind. Things in themselves are therefore a sort of theoretical posit, whose existence and role are required by the theory but are not directly verifiable.

이러면 말이지, 우리는, 진짜 리앨리티 와 결별 되는겨. 물자체 의 절대적인리얼함, 이것은 비공간적이고 비시간적 인거거든. 칸트 이야길 가만 듣보면 그렇다는겨 이쪽 입장은. 칸트의 이론은, 물자체 라는건 존재 해야만해, 왜냐면 존재하는 물자체 가 우리에게, 우리의 쎈서로 들어오는 정보를 전송해야만이, 우리가 어피어런스 를 멘탈 안에서 화면으로 만드는거거든. 그러나 원칙적으로, 우리는 물자체 를 알 수 가 없어, 물자체 가 어떻게 우리 쎈쓰들에 관여하는지, 몰라, 왜냐면 우리의 경험과 앎은, 보임의 세상에 만 한정된거거든, 이 보임이란건 마인드 안에서 만들어지는거고. 물자체라는것은 그러므로 일종의, 띠오레티컬 포짓 이고, 그 존재와 역할 은 단지 띠오리 로 요구되는거지 증명될 수는 없다.

띠오리 띠오레티컬 이란건, 이론 이라고 번역하지만, 테오쓰, 저건 신 갓 이야. 갓이 보는 극장의 화면이 떼오리 야. 이걸 단순히 이론 이라지만, 너무나 무거운 말이야 이론 이란건. 아이디얼 세상이야. 관념 이라 굳이 번역하지만, 걍 아이디얼 이여 먼놈의 관념이야 관념은. 이따위가 모두 불교용어거든. 정말  저 유불도 의 모든 문장을 다 태워 버려야 해.

The main problems with the two-objects interpretation are philosophical. Most readers of Kant who have interpreted his transcendental idealism in this way have been – often very – critical of it, for reasons such as the following:
First, at best Kant is walking a fine line in claiming on the one hand that we can have no knowledge about things in themselves, but on the other hand that we know that things in themselves exist, that they affect our senses, and that they are non-spatial and non-temporal. At worst his theory depends on contradictory claims about what we can and cannot know about things in themselves. This objection was influentially articulated by Jacobi, when he complained that “without that presupposition [of things in themselves] I could not enter into the system, but with it I could not stay within it” (Jacobi 1787, 336).

이런 해식에서 칸트 이야기 의 근본적인 문제야. 저게 둘오브젝트 해석이 잘못되서 문제 라는게 아니라. 이런 해석으로 볼때 이 칸트  문장이 얼마나 개떡같냐 하면, 필로소피컬 을 쟤가 무슨 의도로 썼는가 몰겄는데, 걍 공허 한겨. 아주 의미 없다는겨.

칸트를 이런식으로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크리티컬 해왔고, 그것도 매우 비판적 부정적 이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첫째, 끽해야 칸트 는 편안한 길을 걷는것일 뿐이다, 한 편에서는, 물자체 라는 것을 알수 없다고 주장하고, 다른 편에선 물자체들이 존재하는고 그것들이 우리 감각들에 관여하고 그것들은 비공간비시간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되었다고.

엄격히 최악으로 비판해보면 얘 말을, 그의 이론은 상충 반대되는 주장에 근거를 둔다, 우리가 물자체에 대해 알수 있고 알수 없다 라며. 칸트가 후지다 라는 견해는 야코비 가 선두주자인데, 그는 불평한다, 물자체 에 대한 가정 없이, 나는 칸트 생각에 들어갈 수 없다, 물자체를 가정해도, 나는 칸트 생각에 머물수 없다.

물자체 라는 진짜 리앨리티 는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알수 없어요.

어쩌자는겨?

아니요 너무 그러지 머라하지 마세요, 물자체 라는게 있다 라는 것, 물자체 는 비공간 비시간적이라는 것. 이것만도 엄청난 발견이무니다.

그래서 어쩌나는겨?

Second, even if that problem is surmounted, it has seemed to many that Kant’s theory, interpreted in this way, implies a radical form of skepticism that traps each of us within the contents of our own mind and cuts us off from reality. Some versions of this objection proceed from premises that Kant rejects. One version maintains that things in themselves are real while appearances are not, and hence that on Kant’s view we cannot have experience or knowledge of reality. But Kant denies that appearances are unreal: they are just as real as things in themselves but are in a different metaphysical class. Another version claims that truth always involves a correspondence between mental representations and things in themselves, from which it would follow that on Kant’s view it is impossible for us to have true beliefs about the world. But just as Kant denies that things in themselves are the only (or privileged) reality, he also denies that correspondence with things in themselves is the only kind of truth. Empirical judgments are true just in case they correspond with their empirical objects in accordance with the a priori principles that structure all possible human experience. But the fact that Kant can appeal in this way to an objective criterion of empirical truth that is internal to our experience has not been enough to convince some critics that Kant is innocent of an unacceptable form of skepticism, mainly because of his insistence on our irreparable ignorance about things in themselves.

두 층의 오브젝트 세상 이란 해석. 물자체 의 오브젝트 세상은 있으나, 알수 없다, 라고 해석하면, 칸트 의 이론이란건, 우리 자신의 마인드의 내용들 안에서, 회의주의 라는 덫에 우리를 가두게 되고, 우리를 리앨리티 로 부터 단절한다. 이런 진단은 칸트가 부정하는 문장들에서 오히려 드러난다. 물자체는 리얼한데 어피어런스 는 안리얼하다, 그러므로 이런 칸트의 견해에서 우리는 리앨리티 를 경험할수도 알수도 없다. 그러나 칸트 는 부정한다, 어피어런스 는 언리얼하다 는 것을: 어피어런스 는 물자체들 만큼 리얼하지만, 그러한 리얼함의 어피어런스 는 다른 메타피지칼한 층 속에 있다. 라며.

다른 버전을 보면, 트루뜨, 진실 참 의 문장은 말한다, 멘탈의 화면들과 물자체 는 교류 소통 함을 전제한다고. 이런 식이면 나오는 문장은, 칸트의 견해에 따라,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진짜 믿음들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다. 그러나, 물자체 들이 유일한(또는 권위받은 인정된) 리앨리티 라는걸 칸트는 부정한다, 그만큼 또한 그는 부정한다, 물자체와의 소통이 유일한 참이란건. 인간의 모든가능한 경험을 구조화해서 드러내는 아프리오리 원칙들과, 연계되어있는, 경험적 오브젝트들과 소통하는 경우에는, 그 소통하는 만큼 경험적 판단들은 참이다(리얼하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우리의 경험과 관련된 내면적인 경험적참 의 오브젝트적 기준에게 칸트 는 나름 의지하고 기댈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기엔 칸트 가 저 래디칼한 회의주의를 이끌어냈다는 것에 무죄다, 라고 항변하기엔 충분치 않다, 왜냐면 그는 어쨌거나 물자체 에 대해 절대적으로 알수 없다 라고 강력히 주장했기에.

칸트 는 어피어런스 는 경험적으로 리얼 한거지, 절대적 리얼은 아니거든. 리얼 이란것도 농도 의 문제고. 어쨌거나 칸트 의 말을 빌리면, 이 쎈써블 세상에서 제대로 보이는 것들은 리얼하지 않고, 진짜 리얼은 알수없다고 했거든. 경험적 판단들 자체가 옳다 그르다 의 문제로 가는거고, 여기서의 답은, 경험을 이루는 마인드의 법칙 잣대 가 경험세상의 판단기준 이란겨. 화면의 오브젝트 들을 내면의 저 아프리오리 잣대 와 비교해서 옳은 만큼 참인거고. 뜬금포 물자체 와 화면의 소통 이야기 가 나오거든. 칸트 를 변명하고 자 하는 입장에서. 이렇거나 저렇거나, 물자체 는 알수 없어.

Third and finally, Kant’s denial that things in themselves are spatial or temporal has struck many of his readers as incoherent. The role of things in themselves, on the two-object interpretation, is to affect our senses and thereby to provide the sensory data from which our cognitive faculties construct appearances within the framework of our a priori intuitions of space and time and a priori concepts such as causality. But if there is no space, time, change, or causation in the realm of things in themselves, then how can things in themselves affect us? Transcendental affection seems to involve a causal relation between things in themselves and our sensibility. If this is simply the way we unavoidably think about transcendental affection, because we can give positive content to this thought only by employing the concept of a cause, while it is nevertheless strictly false that things in themselves affect us causally, then it seems not only that we are ignorant of how things in themselves really affect us. It seems, rather, to be incoherent that things in themselves could affect us at all if they are not in space or time.

세번째 와 마지막의 칸트라는 개떡 이유는, 물자체 가 공간적 시간적 이다 라는걸 칸트 가 부정 하면서, 독자들이 쇼크 먹어서 먼가 어긋나는겨. 인코히어런트 는 아랍애들 말을 번역하다 생긴 단어야. 논리적으로 어긋나서 회로가 엉킨겨 이게. 칸트 만의 문장이야 이게, 공간 시간 을 갑툭튀로 갖고와서 이건 써브젝트적 포름 이고, 이것이 쎈써블월드 를 지배하고 물자체 라는 리앨리티 세상은 이 장벽의 밖에 있다는겨. 대체 먼소린교? 인코히어런트.

그러면서 칸트 생각으로 들어가보려는겨 저게 먼 개소린지. 물자체 의 역할이란건, 두층의 오브젝트 해석입장에선, 우리 쎈쓰들에 간섭해서 쎈써의 데이타를 제공하고, 이걸 통해서 우리의 시스템화된이성의기능들은 화면들을 구성해, 아프리오리 이미 공리적으로 이미 내재된 인튜이션 의 틀로 공간과시간을 조물딱거리고, 인과론 같은 아프리오리 콘셉들로도 쪼물딱 거리고 해서. 그러나, 공간 시간 변화 인과 가 물자체 의 영역에서 없다면, 물자체 는 우리에게 어떻게 간섭하는가? 초월적 간섭은 물자체 와 우리의쎈씨빌리티 사이에서 인과적 관계를 지니는 것 같다. 우리가 초월적 간섭에 대해 이런식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면, 인과 라는 콘셉을 채택해서만이 이런 생각에 나름의 내용을 갖출수 있기 때문에, 물자체란 것이 우리에게 인과적으로 간섭한다는게 엄격히는 틀리지만서도,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물자체가 진짜루 우리에게 간섭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지만, 개떡같이 어그러져 억지로는 이런 생각이 들긴 하다, 즉, 물자체가 공간 시간에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간섭할수 있는것 같긴 하다. 라며.

걍, 어거지로, 그래 칸트야 니 말 에서 긍정의 면을 찾아주께, 물자체가 공간 과 시간 의 밖에서 인과율에 따라 쎈써블월드 에 관여 간섭한다고 치자. 둘-오브젝트 의 칸트 당대 해석은, 칸트 의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에 매우 부정적 이야.

다른 하나 는 칸트 를 옹호 하는 입장이야.

3.2 The two-aspects interpretation

The two-aspects reading attempts to interpret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in a way that enables it to be defended against at least some of these objections. On this view, transcendental idealism does not distinguish between two classes of objects but rather between two different aspects of one and the same class of objects. For this reason it is also called the one-world interpretation, since it holds that there is only one world in Kant’s ontology, and that at least some objects in that world have two different aspects: one aspect that appears to us, and another aspect that does not appear to us. That is, appearances are aspects of the same objects that also exist in themselves. So, on this reading, appearances are not mental representations, and transcendental idealism is not a form of phenomenalism.[11]

둘-측면 애스펙트 해석.은 칸트 를 옹호 하는겨. 여기선, 오브젝트 를 둘로 보지 않아, 오브젝트 는 같은 하나 로 보고, 하나 가 다른 둘로 보이는 입장이야. 그래서 한-세상 해석, 이라고도 불러, 칸트 의 존재론 은 단지 하나-세상 에 있어. 이 세상에서 같은 오브젝트 가 두가지 측면 을 지닌겨. 한 측면은 우리에게 보이고, 또다른 면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아. 나타나지 않아. 나타나다 가 더 적당하겠다. 어피어런스 나타남들 은 같은 오브젝트 의 면들 이고, 또한 그 자체들로 존재 한다 오브젝트는. 그래서 이런 독서법 의 독자에겐, 나타남들 은 멘탈 의 화면들이 아니고,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은 그래서 같은 말인 현상주의 의 형태 도 아니다.

두-오브젝트 입장은, 칸트 의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은 현상주의 로 현상학 으로 가는겨. 칸트 는 이 입장에서는, 물자체 는 몰라, 관심을 갖아도 멀 어쩔수 없어. 당연히 어디에 치중해? 멘탈의 화면들 에 치중할 수 밖에 없어 이게.

There are at least two main versions of the two-aspects theory. One version treats transcendental idealism as a metaphysical theory according to which objects have two aspects in the sense that they have two sets of properties: one set of relational properties that appear to us and are spatial and temporal, and another set of intrinsic properties that do not appear to us and are not spatial or temporal (Langton 1998). This property-dualist interpretation faces epistemological objections similar to those faced by the two-objects interpretation, because we are in no better position to acquire knowledge about properties that do not appear to us than we are to acquire knowledge about objects that do not appear to us. Moreover, this interpretation also seems to imply that things in themselves are spatial and temporal, since appearances have spatial and temporal properties, and on this view appearances are the same objects as things in themselves. But Kant explicitly denies that space and time are properties of things in themselves.

두 측면 해석은, 애스펙트 를 측면 이라 하자고. 여기도 버전이 두개 야. 하나는, 오브젝트 가 두 측면을 지녀, 측면 은 다시말해서, 프라퍼티, 속성 이야. 속성이 두 쎄트 인데, 관계되는속성들의 한 쎄트 는 우리에게 나타나고 이건 공간적 시간적 이다, 다른 한 쎄트의 속성은, 인트린씩 속성들, 안쪽에 숨겨진겨. 잠재 라고 하자고, 안보여 숨겨져서.

이러한, 속성-이원론자 해석 은, 인식론적으로 반대 에 직면한다, 두-오브젝트 해석이 직면한 방식과 비슷하게. 왜냐면, 잠재된 속성이나 물자체라는안보이는오브젝트 나,  먼 차이냐 모르는건 똑같은데, 더구나, 이 해석은, 물자체 가 공간적 시간적 이다, 라고 함의하는거야, 왜냐면 나타남들 보임들은 공간과 시간의 속성들을 갖는것이니까,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는 나타남들은 물자체 와 같은 오브젝트들이다 도 참이되는 문장이 돼. 그러나 칸트 는 분명히 부정한다, 공간과 시간은 물자체의 속성들이란걸, 초강력히 부정한다.

칸트 가 뭐라고 하던 말던 간에, 우리가 칸트 이론을, 칸트 의 문장만을 절대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겨 저런 해석들은. 칸트 가 던진 걸 힌트 로 다른 더 적합한 생각을 만들어 가면 돼. 창작자 가 머라 하던 말던. 칸트 의 주장에선 저게 틀렸지만, 칸트 를 무시하고, 칸트 의 판 을 힌트로, 정답을 찾아보자 는거야. 그래서 저런 버전을 인정해보자, 칸트가 머라던 말던,

여기서의 시도는, 칸트 를 이건 디펜딩 하는게 아냐. 칸트 의 뼈대 를 갖고 새로 쓰는 관점이야. 두측면 의 해석이란건. 칸트 는, 틀렸다 야.

물자체 를 공간시간 의 밖에서, 안으로 갖고 오는겨 이건. 공간시간 의 밖으로 내던지면, 이거 골때리는겨. 완벽하게 차단시킨거거든.

쎈써블 월드 의 세상안으로 물자체 를 갖고 와서, 어머 안보이네, 이것과, 철저히 저 귀신세상에 두고, 몰라요, 는 이건 천지차이여.
.

두번째는 아예 더 칸트 를 깡그리 무시하고 새로 짓는겨 칸트 의 용골만 취하고.

A second version of the two-aspects theory departs more radically from the traditional two-objects interpretation by denying that transcendental idealism is at bottom a metaphysical theory. Instead, it interprets transcendental idealism as a fundamentally epistemological theory that distinguishes between two standpoints on the objects of experience: the human standpoint, from which objects are viewed relative to epistemic conditions that are peculiar to human cognitive faculties (namely, the a priori forms of our sensible intuition); and the standpoint of an intuitive intellect, from which the same objects could be known in themselves and independently of any epistemic conditions (Allison 2004). Human beings cannot really take up the latter standpoint but can form only an empty concept of things as they exist in themselves by abstracting from all the content of our experience and leaving only the purely formal thought of an object in general. So transcendental idealism, on this interpretation, is essentially the thesis that we are limited to the human standpoint, and the concept of a thing in itself plays the role of enabling us to chart the boundaries of the human standpoint by stepping beyond them in abstract (but empty) thought.

두번째 버전은, 근본적으로, 초월적 아이디얼리즘이 근본적으로 메타피지칼 이론인걸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신, 초월적 아이디얼리즘을, 메타피지칼 이 아닌, 인식론적 이론 으로 해석해서, 스탠드 포인트, 보려고 서있는 지점의 시선, 오브젝트 를 바라보는방향 을 두개로 구분해. 휴먼, 인간적인 시선, 에서는 오브젝트 가 인식론적 조건들에 좌우되서 보여, 이 인식론적 조건들이란건, 인간의 코그니션의 기능들(즉, 쎈써블한 인튜이션으로 접하는 이루어진 만들어진 아프리오리 포름들)에 따라 서로들 유별나, 달라들. 다른 하나의 시선 은, 인튜이티브 인털렉트, 이 시선에서는 같은 오브젝트들은 그 자체로 알아질수 있고, 인식론적 조건들과는 독립적이고 별개의 것들이야. 인간은 후자의 시선을 실제로는 차지해서 머 어떻게 못해, 단지 인간은 것들 띵즈 에 대해 텅빈 콘셉 을 포름이란 형태로 만들 수 있어, 그 것들이 그 자체로 존재 하듯이, 이런 텅빈 콘셉으로 만든다는게 먼말이냐면, 우리경험의 모든 내용들을 응축해서, 오브젝트 를 오직 포름의 생각으로 일반적으로 여기는거지. 이런 해석에선,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보는시선에서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것, 그리고 물자체 라는 콘셉은 우리가 이런걸 할 수 있도록 해줘, 인간의 시선의 한계선들을 경계들을 그리게끔, 그래서, 그 경계들을 넘어 밟을 수 있게 해줘, 앱스트랙트, 추상의 그렇지만 텅빈, 사유 속에서.

업그레이드 가 된거야 이건. 자 물자체 를 갖고 왔어. 그리곤 속성을 두개로 취해. 인트린씩 프라퍼티 라며, 이게 첫번째 버전이고, 다음은, 저 잠재된 속성을 보는 툴 을 작명 하고 갖고 오는겨. 이게 인트린씩 인털렉트 의 시선 이야. 얘들은 이렇게해서 물자체 를 봐야 만 하겠다는겨.

우리 인간이란게 시이발 이 칸트 개새꺄, 물자체 를 세상 저짝 밖에다 두고, 현상에만 만족 못하겠다 물자체와의 통신편지들주고받은것만으론 만족못하것다 이 칸트 쪼다 색햐. 선배들이 다시 갖고 온걸, 니가 꺼낸 단어 인털렉트 로 보겄다 우린. 봐야 겄다. 그러면서, 진짜 오브젝트 그 리앨리티 리얼은, 포름적 이지만, 저걸 계속 디다 보면서 구체화 하겠다는 의지여. 경계선 들을 언어로 드러내면서, 더 밝히고 더 넓히겠다는 의지여. 생각속에서 경계넘어에 서서, 진짜 리앨리티 가 무엇일까 를.

저런건 진짜 칸트 생각 은 쓰레기 통에 버리고, 칸트 의 판에서 다시 쓰기 시작 하는거야.

One criticism of this epistemological version of the two-aspects theory is that it avoids the objections to other interpretations by attributing to Kant a more limited project than the text of the Critique warrants. There are passages that support this reading.[12] But there are also many passages in both editions of the Critique in which Kant describes appearances as representations in the mind and in which his distinction between appearances and things in themselves is given not only epistemological but metaphysical significance.[13] It is unclear whether all of these texts admit of a single, consistent interpretation.

이러한 두측면 해석이론의 인식론 버전의 사상들은, 칸트의 비판 텍스트 가 주장하는 것들 보다, 칸트 를 더 좁게 해석함으로서 다른 해석들에 대한 반대들을 피한다. 이러한 읽기 해석을 지지하는 구절들이 (칸트 책들에) 있다. 그러나 또한 칸트 비판 두개의 에디션들 에서 많은 구절들은, 나타남들 보임들은 마인드의 화면들이라고 기술하고, 화면들과 물자체의 구분은 인식론적이 아닌 메타피직스적으로 중요하다 고 서술한다. 칸트의 이 모든 텍스트들이, 하나로 일관된 해석인지는 불분명 하다.
.

스탠포드 애들이, 말을 참 뿌옇게 하는데, 두측면 해석은, 정확하게, 칸트 를 부정하는 겨. 칸트 는 두개오브젝트 입장이지 두측면 입장이 절대  될 수 없어.
.

여하튼, 저것은, 어느 세상이여? 쎈써블 월드 의 싸이언스 세상이야. 이걸 항상 유념해. 그러면서 언뜻 언뜻 저게 물자체 이야기 나오면서 모랄리티 릴리전 의 인텔리저블 세상인듯 헷갈릴수 가 있어.

기본적으로다가, 저건, 쎈써블 월드 의 이야기야.

물자체 라는게, 콘크리트 오브젝트 의 직접적 배후 인 앱스트랙트 오브젝트 야.

이 앱스트랙트 란 단어도, 이게 , 16세기 에서야 요약, 써머리 로 등장 하는단어고, 백년 지나서, 응축 개념이 들어오고, 그리고나서 19세기 와서 관념의 아이디얼 그야말로 추상적, 구체적의 반대 라는 개념이 등장해.

.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이라며 이 아이디얼리즘 이 독일 관념론 의 시작이 되는데. 칸트 부터.

The word "idealism" has multiple meanings. The philosophical meaning of idealism are those properties we discover in objects that are dependent on the way that those objects appear to us, as perceived subjects. These properties only belong to the perceived appearance of the objects, and not something they possess "in themselves". The term "idea-ism" is closer to this intended meaning than the common notion of idealism. The question of what properties a thing might have "independently of the mind" is thus unknowable and a moot point, within the idealist tradition.

원래 아이디얼이즘 이란건, 칸트 가 공간시간은 초월적으로 아이디얼,하다 가 아녀 이게. 칸트 의 작명 과 그 내용은 인코히어런트, 어긋나. 보다 간접적인 작명이야. 원래 아이디얼리즘 이란건 칸트 의 저런게 아냐.

저 아이디얼 더하기 이즘 이 아니야. 이데아 이즘 이야. 이데아 가 리앨리티 란겨 이건.

Idealism is a term with several related meanings. It comes via Latin idea from the Ancient Greek idea (ἰδέα) from idein (ἰδεῖν), meaning "to see". The term entered the English language by 1743.[10][11] It was first used in the abstract metaphysical sense "belief that reality is made up only of ideas" by Christian Wolff in 1747.[8] The term re-entered the English language in this abstract sense by 1796

고대그리스어 이데인 의 이데아 를 라틴어 이데아 로 쓰고 보다 보이는 것 일 뿐이야. 플라톤 의 에(이)도스, 이데아, 걍 보이는 것, 이게 다여. 소크라테스 가 저 안보이는 이데아 세상에 어쩌고 저쩌고 이따위 말 없어. 모두 아리스토텔레스 개개끼의 주작이야 얜 저런거 철저히 부정하는 애야. 이 소크라테스 의 리앨리티 는 완벽히 잊혀졌다가 20세기 에야 살아난거고. 아이디얼리즘 은 크리스티안 볼프 가 꺼낸겨. 볼프 는 라이프니츠 와 칸트 의 사이고. 영어로는 1796년 에야. 리앨리티 는 단지 이데아들에서 만들어진 것 이라는 믿음 에서. 이때 볼프 가 이데아들 을 무어라 정의한건지 는 디다봐야 하고.

아이디얼리즘 의 최고봉은 플라톤 이야. 플라톤 의 여러 단어들로, 저 자체 들이 어딘가 있는겨. 인류 최고의 리얼리스트 야. 플라톤 의 소크라테스 는 이걸 찾는게 사는이유야. 이것에 따라 사는게 사는 목적이고 이것에 따라야 더 고등해지는겨. 저게 어딘가 있어. 있음은 물론이고 알수 있어.

칸트 가 저걸,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공간과시간이 초월적으로 아이디얼 하다, 해서 아이디얼리즘 ㅋㅋㅋㅋ. 정말 말도 안되는 작명이다 이게. 여기서 시작하는 독일 아이디얼리즘. 이 독일 관념론 이란 것과, 칸트 의 저따위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은 이건 전혀 다른겨. 진짜 불편한 애들끼리 모인게 칸트 초월 아이디얼리즘에 헤겔 애들이다. 아  불편하네 저 단어의 모임체는.

Kant criticized pure reason. He wanted to restrict reasoning, judging, and speaking only to objects of possible experience. The main German Idealists, who had been theology students,[11] reacted against Kant's stringent limits.[12] "It was Kant’s criticism of all attempts to prove the existence of God which led to the romantic reaction of Fichte, Schelling, and Hegel."[13] "Kant sets out to smash not only the proofs of God but the very foundations of Christian metaphysics, then turns around and 'postulates' God and the immortality of the soul, preparing the way for Fichte and idealism."[14]

독일관념론 위키영어의 칸트 를 보면, 칸트 는 순수이성을 비판했다. 그는 이성작용, 판단작용, 그리고 말하기 를 제한하고 싶어했다, 오직, 가능한 경험의 오브젝트들에 한해서만. 주류 독일 관념론자들은, 신학 학생들이었는데, 칸트 의 이런 엄격하게 좁다란 한계 경계선들에 반발하며 행동했다.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모든 시도들을 칸트는 부정적으로 비판했는데, 이런 칸트의 짓들은, 피히테 셸링 헤겔의 로맨틱한 반발로 이어졌다" 칸트 는 신의 증거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형이상학의 아주 근간을 작살내려고 작정한다, 그리고 나서, 돌아서서는, 신 과 영혼의 불멸 을 공리적으로 무작정 참이다 라며 세워 버리고, 피히테 와 아이디얼리즘 으로 가는 길을 마련한다.

.지금까지 3번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을 전부 했는데, 그래서, 이게 뒤로 가면 이건, 무당 주술 로 가는겨 이게 칸트 이야긴.
.
.
오브젝트, 앱스트랙트 오브젝트, 의 리앨리티 세상은, 공간 과 시간 안에 있으까?  

저런 리앨리티 의 오브젝트 는 텅빈 포름 이 아냐.

인튜이티브 인털렉트 의 스탠드 포인트 로도 보이지 않아.

저건, 별도의 수신기 가, 휴먼 마인드 의 코그니티브 패큘티 에 장착이 되어야 보여.

있어서 보이는게 아냐

수신기가 장착이 되었을때, 저 리앨리티 오브젝트들이, 오셔, 우리의 공간 시간 으로. 그럼 저걸 쎈써블 월드 에서, 쎈써리 의 매터 로, 쎈쎄이션 하는겨.

먼말인지,

니덜이 알겄니

이 무시기덜 

대체 은제 잉가니노 댈텨. 니넨. .

'세계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449. 헤겔 1  (2) 2021.11.03
448. 칸트 5  (2) 2021.11.02
446. 칸트 3  (4) 2021.10.31
Émile de La Roncière  (4) 2021.10.30
445. 칸트 2  (2) 2021.10.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