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0txS6_N3krw

아래 내용들은 오류가 있습니다. 위 칸트시리즈 대여섯개 영상들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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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pernican Revolution was the paradigm shift from the Ptolemaic model of the heavens, which described the cosmos as having Earth stationary at the center of the universe, to the heliocentric model with the Sun at the center of the Solar System.

코페르니칸 레볼루션. 이건 코페르니쿠스 의 책 제목이야. 하늘의 공 의 레볼루션 에 대하여. 데 레볼루티온이부쓰. 레볼보, 돌다 회전하다. 레볼루티오 의 탈격이고. 걍 회전 이야. 이걸 메타피직스 에선 패러다임 시프트 로 같이 써. 패러다임, 파라 데이쿠누미 의 데이그마. 옆에서 보여주기. 진짜 가 없으니까, 진짜 비슷한 파라 를 보여주는겨. 이게 틀 본보기 라고 번역할 뿐인거고. 관점을 전혀 다르게 바꾸는거야. 코페르니쿠스 가 관찰자 가 가만히 하늘이 돈다, 에서, 하늘은 가만히 관찰자가 돈다, 라며. 코페르니쿠스 라는 이름의 회전 은 관점을 이전과 완전히반대로, 라는 뜻이 들어간겨.

コペルニクス的転回. 일본애들은 전회, 자기들말 회전 이야.

哥白尼革命. 중국애들은, 혁명 이라고 하거든. 무식한겨.

일본애들이, 저걸 혁명 이라고 번역했다가, 슬쩍 쪽팔려서, 혁명을 지우고 전회, 라고 굳히는거거든. 레볼루션 하면 혁명 이지랄 해대며 정치사회적으로 쓰고. 이 극동빠닥이 혁명 이란 단어가 익숙해서 이도저도 혁명 해대거든.

저걸 조선빠닥은 무조껀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야. 너무나 무식한겨 저게. 걍 코페르니쿠스 가 제대로 보게 된 하늘의 회전 일 뿐이야. 이걸 얘가 오  나의 혁명적 사고! 이지랄 했겄니. 칸트 도 자기 의 생각틀이, 코페르니쿠스 의 것처럼, 전혀 다르게 반대 의 관점으로 보자 라는 "가정" 이야 가정. 이 가정이 참 이다 라는걸 전제로 이야기 하면 메타피직스 의 진도 가 좀 나가지 않을까? 하는겨. 오  혁명적인 내 철학! 앞으로 나의 위대한 혁명의 철학을 인도할테니 따라오라우, 이따위 감정이 전혀 아니야.

칸트 의 철학은 코페르니쿠스 적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직관없는 사고 는 공허에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걍 무식들이 일본 옛 번역을 그대로 뻬끼면서, 저건 번역이 아냐. 조작질이야 조작질. 쌩거짓말. 칸트는 전혀 관심없는 문장을 웨스턴  의 사상사 에서 이해되는 것만 꺼낸걸 일본애들단어로 다시 번역해서 논어에 비슷한 말 있으니까 오메  저거 꺼내면서 칸트는 공자의 아류  이 극똥은 진짜 모든게 똥이야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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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들이 위대한 석학 놀이 도포자락 놀이를 하는겨. 쪽팔린게 없어 저 조선 들은. 저딴 들을 또 슨상님 교사님 해대미 따라요 조폭 고개수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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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어서 바로 다음 문장을 보면, 생략하려다가 , 저 스탠포드 의 칸트 를 되도록이면 하나도 안 빼고 다 보자고.

I can assume either that the concepts through which I bring about this determination also conform to the objects....or else I assume that the objects, or what is the same thing, the experience in which alone they can be cognized (as given objects) conforms to those concepts

앞의 인용문의 핵심을 다시 빼면, 원래의 흔한 사고방식은, 콘셉들 은 오브젝트들 에 콘포름 해. 콘셉은 오브젝트 의 포름을 강력히 따른다는겨. 과격하게 말하면, 콘포름은 노예고 카피하는겨. 콘셉 은 오브젝트 의 노예 일 뿐이야.

계속 칸트 이야기에서 무얼 생각하랬냐. 싸이언스 vs 모랄리티릴리전. 이걸 절대 잊으면 안돼. 쎈써블 월드 vs 인텔리저블 월드. 이걸로 렐리게이트 자리배정 시켰거든 칸트의 문법에서.

지금 은 싸이언스 세상 이야기 하는겨. 쎈써블 월드 의.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오브젝트들, 띵즈, 이 오브젝트 는 콘크리트 더하기 콘크리트 를 지배하는 앱스트랙트 야. 오브젝트 는 오브젝트여 이걸 극동한자 사물 물건 물체 객체 객관  그 어떤걸로도 번역하면 절대 안돼. 오브젝트 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어. 저런걸로 번역되는 순간, 개똥 철학이 되고 세상에 없는 듣보이야기에 별 벼라별 개소리도 저따위 개소리가 없어 특히나 칸트 부터의 한글 철학책들은. 당연히 일본 철학책은 별개 겄니. 그래서 일본애들은, 저걸 번역을 안해 이제, 소리나는 대로 그대로 쓰는겨 가타카나 로. 일본애들이 왜 저런 가타카나 의 번역을 하는지, 이 조선 인문학 애들은, 전혀 그 이유를 모르는겨. 단지, 야 저 일본들 주체성 없이 양키 말들 그대로 쓰는군 저 양키의 노예들. 진짜 얘들이 이런 수준이라니까? 이 조선 인문학계가? 아니 일단 저런 번역의 흐름 자체도 모르는 조선들이 태반일테고. 어떤 늙은 이는 저런걸 강하게 부정하는겨 저게 잘못이라고

콘셉 이란게 갑자기 듣보로 나온겨 칸트 이야기에서, 얘만의 콘셉 개념이 따로 있어. 이걸 얘가 자기만의 사전으로 자기책에서 문장에 담는거거든. 그 문장에서 자기 단어의 자기개념정리를 해버려. 뒤로 가면, 언더스탠딩의 카테고리 를 콘셉 이라고 하거든.

언더스탠딩 은 쎈써블월드 세상 이야기야. 이걸 그대로 이 언더스탠딩 을 인텔리저블 에 써먹었다가 잠시 보류한겨. 두 세상은 콘포름 하다는걸 전제로 해서, 언더스탠딩 을 같이 써댄거거든 그 방식이, 즉 세상의 오브젝트를 받아서 화면에 쏴서 바라보고 는 방식이 같을 거란걸 전제 한거거든. 원래 언더스탠딩 이란건, 쎈써블 월드 의 단어야.

가장 좋은 프레임 이. 데카르트 이야기 할때의, 새 야 새. 내가 , 오직 나만의 문법과 단어인 새.

데카르트 가, 생각해서 존재한다 할때의 그 떨림은, 새, 야 새. 데카르트 의 주 팡스 동 주 쒸, 에서 주 팡쓰, 가 코기토 잖아. 이 심각하게 생각한다 는건, 스크린에 쏜 화면을 보는, 이라는 것이, 팡쓰 고 코기토 여. 이걸 보는게 누구여? 새 여 새. 이 새 가, 존재한다는겨. 아주 독보적 독단적으로. 이 새가 쎈써빌리티 로 다 받아서 자기만의 스크린에 자기만의 화면을 바라보는겨. 이 바라보는게 언더스탠딩 이야. 이건, 데카르트 의 단어 와 그 뜻이야. 이걸 그대로 칸트 까지 그 단어와 그 뜻대로 쓰는거야 이렇게. 로크 도 비슷하게 쓴거고. 저걸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게, 윌 의 액션 이야. 판단 은 액션이야, 언더스탠딩 이 아냐. 이것도 데카르트 문장이여.

모든 인간은, 세상을 겪는걸, 유식하게 쟤들표현으로 수많은 오브젝트들을 접하는거야. 이걸 다이렉트 로 접하는게 아냐. 모두 저마다의 스크린에 보여지는 화면들만을 볼 뿐이야. 즉 머여? 오브젝트에 따라서, 언더스탠딩 할 뿐이야. 오브젝트 에 영향받은 영혼이, 오브젝트 의 변화에 따라 영혼이 모디파이 수정해서 화면에 쏘는거다, 라고 칸트가 매우 유식한듯 쓰는게 아니라, 아주 그대로 쓴거야. 저런거 하나하나 먼말인지 알아야 해. 걍 그대로 보면 돼. 모든 극동애들이, 쟤들 말글을 그대로 듣볼줄을 모르는겨.

당연한거야. 오브젝트 가 주인이고, 언더스탠딩 은 저것에 콘포름 하는 노예야.

더가서, 칸트 가, 언더스탠딩 이란게, 무작위 하양 바닥에서 걍 바라보는게 아니란겨. 언더스탠딩 이란건, 맹목적인 처다보기 가 아냐. 언더스탠딩 은 코그니션 으로 가는거야. 숙고해서 앎의 디비 에 저장하는거거든. 조선한자 이해 라는겨 그게. 언더스탠딩 은, 유형별로 구분이 되어있는 세상이야. 이건 칸트 만의 사고가 아냐. 이걸 칸트 특허품으로 주장질 해대는데 이건 걍 기본이야. 아리스토텔레스 가 그걸 카테고리 로 설명한 것일 뿐이야. 어떻게 저런게 칸트 특허냐고.

카테고리화된 언더스탠딩. 이 콘셉 이란겨. 언더스탠딩 이 곧 콘셉 이야. 콘셉 안에는 언더스탠딩 은 카테고리로 되어있다 는 걸 풀어설명 확인해주는것일 뿐이야. 이 콘셉 은 라틴어고, 이건 어디서 나온겨 시작이, 스코투스 오컴 애들때 본격 등장하는게 콘셉 이야. 아리스토의 카테고리가 중세 스콜라에 콘셉으로 등장하는겨.

칸트 의 코페루니쿠스 회전 은, 똑같이, 저걸 완전히 반대 로 바라보자는겨. 이것도 얘의 어쓤, 가정 이야. 두가지 가정 이 하나가 원래 의 문장이고, 다른하나가, 꺼꾸로회전, 오브젝트 가 콘셉 에 콘포름 한다.

오브젝트 가 콘셉의 노예 라고, 가정가정가정 해보자. 이러면, 그동안 진도 안나갔던 메타피직스 의 문제들이, 쉽게 풀린다는겨. 칸트 이야긴, 여기서 시작하는겨. 아주 신선한겨 이거.

전혀 다른거야.

대체, 이 전혀 다른 느낌을, 니덜이 한번 느껴보라고, 얼마나 시안한 사고방식인지를.

저런걸 말이야, 저런 문장이 나오는 그 과정과, 그래서 저런 문장의 그 느낌을, 리얼하게 진짜로 느끼게 해줘야 해. 가르치는 들이. 저런걸 전혀 몰라요 . 제대로 읽은  제대로 번역한 이가 단 단 하나 없거든. 그리고 쑈를 하는겨, 캬 여러분, 이런 거 느껴보쇼 엄청나지 않수? 완벽한 거짓말을 지잘 대면서, 이 조선들의 종특이 쑈 인데 이 쑈 라는건, 시작부터가 인문학계야. 이 조선 인문학계 는 정말 너무나 추악한겨 이게. 저런 이와 그 후배와 그 제자들이 아주 완벽하게 언론에 방송도 동시에 장악해 버린겨 지금. 이 나라는, 아주 완벽하게 북조선과 하나되어 중국 자치구 로 갈 수밖에 없어. 쟤들의 꿈이야 중국몽이란게. 저게 괜히 나온말이 아니라, 이 조선 인문학계의 이상사회거든. 이들이 주장하는게 사마천 사기 에 공자의 대동사회여. 중국 위대한겨. 시진핑 만세여 공산당은 일당독재 아녀

농담이야. 아 쓰잘덱없는소리 진도 안나가게

How does Kant’s Copernican revolution in philosophy improve on the strategy of the Inaugural Dissertation for reconciling modern science with traditional morality and religion? First, it gives Kant a new and ingenious way of placing modern science on an a priori foundation. He is now in a position to argue that we can have a priori knowledge about the basic laws of modern science because those laws reflect the human mind’s contribution to structuring our experience. In other words, the sensible world necessarily conforms to certain fundamental laws – such as that every event has a cause – because the human mind constructs it according to those laws. Moreover, we can identify those laws by reflecting on the conditions of possible experience, which reveals that it would be impossible for us to experience a world in which, for example, any given event fails to have a cause. From this Kant concludes that metaphysics is indeed possible in the sense that we can have a priori knowledge that the entire sensible world – not just our actual experience, but any possible human experience – necessarily conforms to certain laws. Kant calls this immanent metaphysics or the metaphysics of experience, because it deals with the essential principles that are immanent to human experience.

그래서 다음에, 칸트 의 저런 전혀반대회전의 사고방식이, 박사논문의 틀을 어떻게 개선돼서, 현대 과학과, 기존의 모랄리티릴리전과의 화해 를 이루는것인가? 첫번째, 이렇게 오브젝트 와 콘셉의 주인 노예 관계를 바꾸어서, 현대 과학을, 아프리오리적인 바탕에 놓게 되는 새롭고 창조적인 방식을 "칸트에게" 제공한다. 그는 이제 새로운 자리에서 주장한다, 우리는 현대과학의 기본법칙들에 대해, 아프리오리 앎을 갖을 수 있다고, 왜냐면 그런 (과학의)법칙들은 인간의 마인드를 비추고 드러내고, 그런 인간 마인드는 우리의 경험들을 구조화하는데 기여하니까. 다시 말해서, 쎈써블 월드 는 필수적으로 콘포름한다 어떤 근본적인 법칙들에게 - 그런 법칙들은, 모든 이벤트 사건이 원인 을 갖는다,를 품는다 - 인간의 마인드 는 그것을(쎈써블월드) 그러한 법칙들에 따라 건축하는거니까. 더가서, 우리는 그러한 법칙들을 확인할 수 있다, 가능한 경험의 조건들을 비춤으로써, 그 경험은 드러낸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게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그런 불가능경험은, 예로 들면, 원인을 갖는데 실패하는 이벤트 라는경험이다. 이로부터 칸트 는 결론짓는다, 메타피직스 는 진실로 가능하다가고, 우리가 아프리오리 앎을 갖을수 있다 는 면에서. 이 아프리오리 앎이란건 "모든 쎈써블 월드 는 -단지 우리의 실제 경험이 아니라 어떤 모든 가능한 인간의 경험 의 세상- 반드시 콘포름한다고 어떤 법칙들에 대해". 칸트 는 이것을 임머넌트 메타피직스, 경험의 메타피직스, 라고 부른다, 왜냐면, 이건 인간경험에 임머넌트되어있는 본질적 원칙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지금 싸이언스 의 쎈써블 월드 이야기를 하는겨. 항상 이걸 주지해.

칸트 는 아프리오리 라는 말을, 공리적, 악시오마틱 이란 무게로 쓰는겨. 얜 이 아프리오리 란 워드에 꽃혔어. 나는 공리 공리적 이란 말을 좋아해. 이렇게 세상에서 위대하시고 그레이트에 어마어마하신분들은 선호하는 워드들이 따로들 있는겨.

오브젝트 는 콘셉 의 노예다. 콘포름 을 걍 딱 까놓고, 노예 라고 번역하자고. 이게 훨 느낌적 느낌으로다가 느낌이 다가오니까. 자 이문장은 말이야, 항상 머라고, 지금 어디세상 이야기여? 쎈써블 월드 의 쎈씨빌리티 세상 의 싸이언스 이야기야. 콘셉 이 오브젝트 의 노예 인줄 알았는데, 반대로 가정해서 오브젝트 가 콘셉 의 노예 라 하자, 고 할때, 법칙들 로 프린시플 이란건, 이건 머여? 콘셉 이야. 과학세상의 오브젝트 들은, 콘셉의 노예고, 곧, 법칙의 노예야. 법 이란건, 어떤 문장이야? 이벤트 라는 것은 원인을 갖고있다. 이게 법의 절대문장이야. 절대 속성이고.

쎈써블월드 는 오브젝트의 이벤트들의 세상 이야.

쎈써블월드 는 인간이 오브젝트들의 이벤트들을 경험하는 세상이야.

쎈써블월드 는 콘셉 의 노예야. 법칙이란건 콘셉이야.

쎈써블월드 는 법칙의 노예야

법칙이란건, 모든 이벤트 는 반드시 원인을 갖고 있다. 라는것이고

그래서, 싸이언스 라는 쎈써블월드 는, 법 을 벗어날 수 가 없어.

법을 벗어나는 어떠한 것도, 경험할 수 없어.

저런 문장들이, 저런 날리지, 저런 앎이, 모두, 아프리오리 날리지 여. 칸트 의 코페르니투스 의 회전을 메타피직스로 갖고 와서, 오브젝트 와 콘셉 의 자리 변경으로 인해서, 경험없이알게되었다며 아프리오리 날리지, 하는겨.

마던 싸이언스 라는건, 저 아프리오리 날리지 를 바닥에 깔아야 한다는거야. 아프리오리 파운데이션. 마던 싸이언스 의 확고한 유일한 주춧돌 이야 저게.

인간 은 싸이언스 의 쎈써블월드 의 쎈써빌리티 짓 외엔, 그 어떤 짓도 경험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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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참 무척이나 뻔한 문장인것 같으나, 칸트 의 중심은 저걸 계속 이어가는겨. 이게 재밌어. 점점 신선 산뜻해지는데.

저 마지막이, 메타피직스 의 학문적 입장이야. 칸트 시대 조차, 메타피직스 가 필요한가? 뉴튼의 프린키피아 서문 이 이 질문을 담은겨, 대체 메타피직스 니 필로소피 니 니덜이 인간문명에 기여한게 머냐 대체. 저 쓰잘덱 없는 학문. 이 태클은 똑같이 소크라테스 도 겪은겨. 플라톤 전집 구석구석이, 어이  테스형, 대체 늙어 빠져서  머하는 짓이니 그게, 그런 철학 이란건 이 늙은 이야 젊을때 겉멋으로 하는거지 다 늙어서 여전히 그런 공허한 의미없는 짓거리를 하고 앉았냐 가서 노가다나 벽돌이나 날러 뻘짓좀 그만하고. 조선 땅에 태어났으면  ㅂㄹㅈ 들처럼 위선질이나 사기질에 시체장사에 감성팔이  쓰잘덱없는 짓 그만하고 하민서리, 저러한 아프리오리 날리지 를 우리가 갖게 되면서, 메타피직스 가 학문으로써 의미를 갖게 된다는거야.

왜? 메타피직스 의 콘셉 세상이 주인 이 된겨 이게.

왜? 싸이언스 의 법칙들이란건, 리플렉트 휴먼 마인드, 언더스탠딩 의 콘셉들이 담겨있는 마인드를 구부리고 비추고 쪼물락 거려야 나오는거걸랑. 마인드 가 주인이여. 쎈써블 월드 의 오브젝트들은 노예여. 이 콘셉 언더스탠딩 마인드 는 코그니션즈 라는 메타피직스 세상이야.

 메타피직스 가 쓰잘덱 없다니 버려야한다느니, 말도 안된다는겨.

그래서, 이러한 메타피직스 를, 경험의 메타피직스 라고 작명을 한거야. 임머넌트, 이건 쎈써블월드쪽 의 경험에 들러붙은겨.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멋진 말인듯 지랄 대지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먼 개소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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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뒤에 이제 공간과 시간 을 꺼내면서, 이어가는겨. 일단 그전에 마지막 단락. 이 기니까 쪼개면

But, second, if “we can cognize of things a priori only what we ourselves have put into them,” then we cannot have a priori knowledge about things whose existence and nature are entirely independent of the human mind, which Kant calls things in themselves (Bxviii). In his words: “[F]rom this deduction of our faculty of cognizing a priori […] there emerges a very strange result […], namely that with this faculty we can never get beyond the boundaries of possible experience, […and] that such cognition reaches appearances only, leaving the thing in itself as something actual for itself but uncognized by us” (Bxix–xx).

화해의 첫번째가 저렇고, 두번째가, 우리가 띵즈 를 아프리오리 의 콘셉 앎으로 띵즈에 적용해서 코그나이즈 하는거라면, 우리는 인간의 마인드 와 완벽히 별개인 존재와네이쳐의 것들에 대해서는 아프리오리 앎을 갖을 수 없다는 거고, 이런걸 칸트는 띵즈인뎀쎌브즈, 물자체 로 부른다. 그의 워드로 "아프리오리 적 코그나이즈를 기능의 이런 디덕션 갑툭튀 참인문장으로 부터, 아주 낯선 이상한 결론이 티나오게 된다, 즉, 이러한 기능으로 우리가 결코 절대, 경험 가능한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그러한 코그니션 은 어피어런스들, 보이는것들에만 닿는다, 물자체 는 그것자체로 실제로는 그냥 남긴 상태로 두고, 그 물자체는 우리가 코그나이즈 못한 상태로.

자, 계속 계속 말하지만, 잊지 말것은, 머라고? 쎈써블 월드 라는 싸이언스 세상이야. 이 세상은 콘셉이 주인인 세상이야 이제. 콘셉이란건 언더스탠딩이 카테고리 하는 휴먼 마인드 의 코그나이즈 코그니션 세상이야. 콘셉 이란 말 자체가, 이건, 아프리오리 야. 공리적 이란걸 걍 쓰는겨 칸트가 자기 의 워드 로.

휴먼마인드 의 코그니션즈 언더스탠딩 콘셉 월드 는, 쎈써블월드 를 쎈써빌리티 로 접한걸 받아서 자기만의 포름으로 쟤들을 매터 로 활용해서 스크린에 뿌려서 보고 판단하는 세상이야. 거대한 재료는 머여? 단지 쎈써블 월드 여. 쎈써블 월드 의 어피어런스들, 직접보임들의, 쎈써리 매터 오감으로만 닿는 것들만 다루는게 휴먼 마인드야. 이 이상의, 존재 니 네이쳐니, 이걸 따로 또 이인간은 Ding an sich 딩안지히, 라고 귀찮게 단어 하나 만들었는데, 이건, 쎈써블월드 의 것이 아닌겨. 쎈써빌리티 가 리치 닿지 않아. 그래서, 코그나이즈 안돼.

That is, Kant’s constructivist foundation for scientific knowledge restricts science to the realm of appearances and implies that transcendent metaphysics – i.e., a priori knowledge of things in themselves that transcend possible human experience – is impossible. In the Critique Kant thus rejects the insight into an intelligible world that he defended in the Inaugural Dissertation, and he now claims that rejecting knowledge about things in themselves is necessary for reconciling science with traditional morality and religion. This is because he claims that belief in God, freedom, and immortality have a strictly moral basis, and yet adopting these beliefs on moral grounds would be unjustified if we could know that they were false. “Thus,” Kant says, “I had to deny knowledge in order to make room for faith” (Bxxx). Restricting knowledge to appearances and relegating God and the soul to an unknowable realm of things in themselves guarantees that it is impossible to disprove claims about God and the freedom or immortality of the soul, which moral arguments may therefore justify us in believing. Moreover, the determinism of modern science no longer threatens the freedom required by traditional morality, because science and therefore determinism apply only to appearances, and there is room for freedom in the realm of things in themselves, where the self or soul is located. We cannot know (theoretically) that we are free, because we cannot know anything about things in themselves. But there are especially strong moral grounds for the belief in human freedom, which acts as “the keystone” supporting other morally grounded beliefs (5:3–4). In this way, Kant replaces transcendent metaphysics with a new practical science that he calls the metaphysics of morals. It thus turns out that two kinds of metaphysics are possible: the metaphysics of experience (or nature) and the metaphysics of morals, both of which depend on Kant’s Copernican revolution in philosophy.

이렇게해서, 칸트라는 건축가는 지금 과학적 앎을 이야기하는거고, 과학이란건 보임의 영역에 한정 하는거고, 트랜쎈던트 메타피직스 - 이건, 가능한경험 을 트랜쎈드 넘어서는 물자체 에 대한 아프리오리 앎 - 는 불가능하다. 비판에서 칸트는, 박사논문에서 옹호했던 인텔리저블 세상에 대한 무당뻘짓직감을 부정한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주장한다, 물자체에 대한 앎을 거부하는것이야 말로, 과학과 기존모랄리티릴리전과의 화해 에 필수적이라고. 왜냐면, 그가 주장하길, 신 자유 불멸, 에 대한 믿음은 엄격하게 모랄의 바탕을 갖고 있는데, 그 믿음들이 틀렸다 라는것을 우리가 알고있다면, 모랄의 바탕에서 이런 믿음들을 채택한다는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말한다 "나는 앎을 부정해야만 했다, 페이뜨 믿음을 위한 방을 만들기 위해서". 앎 을 보임들에만 한정하고, 신과영혼 을 알수없는 영역인 물자체 로 재할당하면, 신 자유 영혼불멸에 대한 문장들을 거부하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보장이 된다, 모랄의 문장들은 저 믿음들에서 만이 우리를 정당화하는것 같다. 더구나, 현대과학의 결정론, 정해진 벽 정해진 법칙 정해진 울타리 개념은 더이상 자유 를 위협하지 않는다, 이 자유란건 모랄리티 에 필요한 것이고, 과학 과 과학적 결정론은 단지 보임들세상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그래서 자유 를 위한 공간은 여지는 물자체 의 영역에서 있는 것이고, 이곳에 쎌프 니 영혼 이니 하는것이 위치한다. 우리는 알수 없다(이론적으로) 우리가 자유 이다 라는걸, 왜냐면 우리는 물자체 에 대해 어떤 것도 알수 없으니까. 그러나, 특별히 유별나게(알길없어 걍 언젠가부터인지 모르지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믿음 에 대한 강렬한 모랄의 터 가 있다, 이 인간의자유에대한믿음 은 삶의 다른 근본적인 믿음들을 버티는데 "주춧돌"로서 작용한다. 이런 논리로, 칸트 는 트랜쎈덴트 메타피직스 를, 새로운 실제적인 싸이언스 로 대체 하고, 그는 이걸, 모랄들의 메타피직스 라고 부른다. 그래서 두가지 메타피직스가 가능하다, 경험의 메타피직스, 그리고 모랄의 메타피직스, 이 두개는 칸트 의 철학적 코페르니칸 회전에 근거한다.

너무나 번역이 훌륭해서, 부차적 설명이 필요가 없다. 꼼꼼히 수백번 암송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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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튼  신났어 이거. 자기가 막 학문을 만들고 이름짓고. 신 자유 영혼. 이건 어피어런스 가 아냐. 쎈써블 월드 의 싸이언스 가 아냐. 휴먼 마인드 의 언더스탠딩 콘셉 코그니션 으로 이걸 알 수 없어. 쎈써블 세상의 로직으로는 저 세개에 대한 믿음의 문장 은 거짓 인데 억지로 채택할 수 가 없어 양심상. 따로 만든게, 물자체 여. 쎈써블 월드 의 싸이언스 가 아냐. 그래놓고 저것에 굳이 인텔리저블 월드 로 이름 붙이는겨 저건. 여긴 아프리오리 의 오브젝트 콘셉 이따위 단어를 쓰는게 아니야 아직은. 일단 저런 세상을 따로 만들고, 신 자유 영혼 에 대한 믿음 의 세상은 결국 물자체 의 방안에 두는거야. 영혼도 여기에 방을 만들어. 물자체 를 부정하는건 불가능해. 물자체 가 없어, 가 아냐. 물자체 는 있어. 칸트에게는, 물자체 는 있는겨. 이게  결국 죽죽 가면 말이지, 결국 똑같은 이야기 하는겨 플라톤과. 그렇다고, 아이 플라톤 이고 칸트고 똑같고 다 똑같고 이런들 어때 저런들 어때 하믄, 조선 되는거고.

내가 계속 이짓들을, 칸트관련 번역을 하는것도, 아 이놈의 콘셉, 언더스탠딩, 휴먼 마인드, 지금 이걸 문장으로 정리해서, 나의 생각들을 깔끔하게 산뜻하게, 청초하게 좀 정리를 하려는건데. 그리고 나서, 주술을 걸면, 도메인에 갈 거 같단 말이야 난. 니덜을 여기에 남겨두고, 나 혼자 떠날라는거걸랑. 어느덧 칸트 까지 와버렸걸랑.

하튼 여기까지 이해 되었으면, 다음 3번 가자우.

3. Transcendental idealism

Perhaps the central and most controversial thesis of the Critique of Pure Reason is that human beings experience only appearances, not things in themselves; and that space and time are only subjective forms of human intuition that would not subsist in themselves if one were to abstract from all subjective conditions of human intuition. Kant calls this thesis transcendental idealism.[7] One of his best summaries of it is arguably the following:

트랜쎈덴털 아이디얼리즘. 칸트이야기는 저게 계속 이어가는겨. 별개 가 아냐. 저 맥락을 잊으면 안돼. 칸트 의 이론은 트랜쎈덴털 아이디얼리즘 인데 그래서, 앞의 것들도 다 포함하는겨 이 워드 는. 그러다가, 이 워드 로 모아져서 자기이론을 풀어나가는건데, 이게 지금도 현재 논쟁중 이다 라는겨. 아직 승부 가 안 났어, 두 파벌이 나뉘어진 상태에서.

공간과 시간, 이 두개인듯 하나인듯 한게, 결국 쎈써블월드 와 인텔리저블월드, 어피어런스 와 물자체, 경험 과 경험불가, 휴먼마인드의 바운더리, 를 만들게 하는, 거대한 신이야 이건. 인간의 경험세상을 가두는 거대한 신의장벽 이야. 장벽 이란건 두가지 의미야. 하나는, 안전한거고, 하나는, 노예에 죄수인거고.

앞에서, 공간과 시간은, 인튜이션의 포름 이라고 언뜻 한문장 찍 갈겼거든. 더 가서, 인튜이션 의 써브젝티브 포름들 이야. 두개니까. 써브젝티브 가 처음 티나오는건데.

공간 시간은, 오직, 써브젝티브 포름 이야, 이건 인튜이션 의 대상이고, 다음 문장 써브씨스트 인 뎀쎌브즈 의 주어는 공간시간의 포름들이야, 인튜이션의 대상들인 모든 써브젝티브적인 조건들에서, 공간과 시간을 추출 하려고 해도, 할수 없어. 왜? 얜 거기 에 없어. 부질없는 문장이지. 포름에 써브젝트 란 단어 가 들어가면 초강력 신쩍인겨. 이걸 따로 멀 뽑아내니 마니.

공간과 시간은 각각, 포름 이야.

포름 이란건, 인튜이션 으로 접근하는겨. 인튜이션 은 깊게바라보는것이고, 직관으로 번역하고. 애매한 단어야 인튜이션

써브젝트 는, 바라보는 새 인 나 여 나. 관찰자 어쩌고 하지만,

오브젝트 나 써브젝트 는, 입장만 다른거야. 상대 와 나 일 뿐이야. 오브젝트 도 그 바닥엔 앱스트랙트 이고, 이게 물자체 여. 오브젝트 도 그 바닥 배후 는 신 이야 신. 몰라. 포름 물자체 앱스트랙트 다 같은 말이고, 오브젝트 가 이런걸 다 포함하는겨. 그래서 띵즈, 하면 굳이 콘크리트 에 중점두고, 띵즈인잇쎌프 하면 포름에 앱스트랙트 인듯 보이려는겨. 단어를 참 애매하게 쓰는건데.

저런 단어들이, 모두 깊게 들어가면, 포름 이고 써브젝트적인거야. 써브젝트적이다, 이건 신쩍이고 물자체고 앱스트랙트적인겨. 오브젝트도 써브젝트적 인겨. 써브젝트 라는 말은, 관찰자 인 영혼 의 새 를 부각 시키는 단어야. 써브젝트적이다, 이건 영혼에 신이 더 깊게 연상이 되는거야. 이 단어의 느낌이 있어야 해. 이런 기본 배경이 없으면, 저 칸트 이야기 문장 단 하나 조차, 이해가 안돼 저게. 저걸  대체 누가 이해하겄냐고 저걸 공간과 시간은 주관적 형식이고 직관의 대상이다. 먼 개소리냐고 저런 발음기호들의 한글 조합이.

공간 시간은, 포름 이야, 써브젝트적인 포름 이고 인튜이션 으로만의 포름 이야. 포름, 몰라 이거, 있긴있고 작동하는거 같은데, 졸 미스테리야. 포름이 매터를 재료로 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매타 는 안보이는 설계도 포름에 따라 자기가 막 움직여 자기만의 길을 가는듯, 포름 이라는 길을 따라서 매터가 저절로 움직여. 거대한 벽이고 신이야 매터에겐 포름 이. 공간 시간은 그런거야.

써브젝티브 포름이야. 써브젝트 마다의 포름이야. 새들마다 자기들만의 인튜이션으로 닿는 포름이야. 서로들 달라. 이건 쎈써블월드 의 쎈씨티빌리티 로 접수해서 휴먼마인드 로 받아서 화면만들어 바라보는, 그 대상이 아냐.

다시말해서, 공간 과 시간 은, 오브젝트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그 무엇 이 아니란겨 이건. 오브젝트로 내밖에 별개로 있는 포름이 아니란겨. 내 안에 있는 포름 이란거야. 내안에 별개로 구성되어있는 포름도 아냐. 내안에 이걸 따로 분별해서 꺼내서 지울 수 있는 그러한 별개 가 아니란겨. 오브젝트적 이지 않고 써브젝트적이다, 의 의미야 이게.


칸트 의 문장을 보면

We have therefore wanted to say that all our intuition is nothing but the representation of appearance; that the things that we intuit are not in themselves what we intuit them to be, nor are their relations so constituted in themselves as they appear to us; and that if we remove our own subject or even only the subjective constitution of the senses in general, then all constitution, all relations of objects in space and time, indeed space and time themselves would disappear, and as appearances they cannot exist in themselves, but only in us. What may be the case with objects in themselves and abstracted from all this receptivity of our sensibility remains entirely unknown to us. We are acquainted with nothing except our way of perceiving them, which is peculiar to us, and which therefore does not necessarily pertain to every being, though to be sure it pertains to every human being. We are concerned solely with this. Space and time are its pure forms, sensation in general its matter. We can cognize only the former a priori, i.e., prior to all actual perception, and they are therefore called pure intuition; the latter, however, is that in our cognition that is responsible for its being called a posteriori cognition, i.e., empirical intuition. The former adheres to our sensibility absolutely necessarily, whatever sort of sensations we may have; the latter can be very different. (A42/B59–60)[8]

그래서 우리는 이런말을 하고 싶게 된다, 우리의 모든 인튜이션 이란건, 단지 보임의 화면 일뿐. 우리가 인튜이트 하는 것들이란, 우리가 그것을 깊게 인튜이트해서 바라는 그자체 도 아니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보이도록 그 자체를 굳게 정밀하게 이루는 관계들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는 써브젝트 를 제거한다면, 아니 단지 일반적으로, 쎈쓰들 감각들을 이루는 총체를 관찰자에게서 제거한다면, 그러면 모든 총체, 공간시간속의 오브젝트들의모든관계들, 직접적으로는, 공간과 시간 자체들이란건 사라질 것이다, 이게 먼말이냐면, 어피어런스 보임의현상들 로서는 공간시간이 그자체로 존재할수는 없지만, 우리들 안에만 존재하는것이다. 오브젝트들이 그 자체로는 존재해도, 우리의 쎈씨빌리티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겐 완벽하게 안알려진채 남게된다. 우리는 오브젝트들을 퍼시브, 감각으로 포착 인식 하는 방법 외로는 아무것도 친숙하지 않다, 예외적인 것 즉 친숙하지 않은 이런 것은 우리에게 유별난것인데, 이런것은 에브리 빙 에게는 필연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에브리 휴먼빙 에게는 확실히 관계할 지언정. 우리 인간은 유달리 이것에 묶이다 시피 한다.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포름들, 이고, 쎈쎄이션, 감각으로느낌 은 그것의 매터 이다. 우리는 단지 전자 를 아프리오리, 즉, 모든 실제적 인식에 앞서서, 선험적으로 경험없이, 전자를 코그나이즈 할수 있다, 이해하고 파악하고 판단할수 있다. 그것들은 그래서 순수한 직관 으로 불린다; 그러나 후자 는, 우리의 코그니션에서는, 아포스테리오리 의 대상으로, 경험후 사후적 앎의 것으로, 즉 경험적 인튜이션 이라고 불린다. 전자 는 우리의 쎈씨빌리티에, 절대적으로, 필연적으로, 들러붙어있다, 어떤 종류의 감각체계를 우리가 지녔던 간에; 후자 는 매우 다를 수 있다.

공간 과 시간은, 써브젝트들 우리들 안에 있다는겨. 나를 지우면, 보다 직접적으로는 나의 쎈쓰들을 이루는 총체를 지워버리면, 공간시간은 사라진다는겨. 이건 오브젝트적으로 따로 작동해서 우리 인간에게 간섭 퍼테인 하는게 아니란겨. 에브리빙 이 아니라 휴먼 빙이야. 저게 전혀 다른 단어야. 오직 휴먼빙 만이 공간시간에 신경을 쓰는거 라는겨. 그러면서, 공간시간이란것이 전자 이고, 얜 포름 이고, 인튜이션 의 대상 이고, 아프리오리 로 안다 는거야. 후자 인 감각체계 는 상대적으로 그냥 쓴거고. 여기서 친절하게 아프리오리 아포스테리오리 의 데피니션을 얘가 하는거고.

공간시간은, 포름이고 인튜이션의 대상이지만, 아 얘가 문장이 너무나 애매한데 여기와서, 일단, 공간시간은 퓨어 포름. 그야말로 포름그자체 인겨. 물자체 가 아니라, 순수한 포름 인거야. 얘는 인튜이션 을 또한 퓨어 인튜이션 과 경험적 인튜이션 으로 나누면서, 공간과 시간을 저런 인튜이션 으로 우리가 상대한다는거야. 우리가 쎈써블 월드 의 것들을 어차피 쎈써로 받아서 레프리젠테이션 스크린에 화면으로 뿌리는거거든 휴먼 마인드 에서, 그럴때 여기에 공간과 시간이 담아진겨 우리 화면에는. 공간과 시간이 포함된거고 그걸 저런 인튜이션 으로 또한 구분해서 안다는 거지.

Kant introduces transcendental idealism in the part of the Critique called the Transcendental Aesthetic, and scholars generally agree that for Kant transcendental idealism encompasses at least the following claims:

  • In some sense, human beings experience only appearances, not things in themselves.
  • Space and time are not things in themselves, or determinations of things in themselves that would remain if one abstracted from all subjective conditions of human intuition. [Kant labels this conclusion a) at A26/B42 and again at A32–33/B49. It is at least a crucial part of what he means by calling space and time transcendentally ideal (A28/B44, A35–36/B52)].
  • Space and time are nothing other than the subjective forms of human sensible intuition. [Kant labels this conclusion b) at A26/B42 and again at A33/B49–50].
  • Space and time are empirically real, which means that “everything that can come before us externally as an object” is in both space and time, and that our internal intuitions of ourselves are in time (A28/B44, A34–35/B51–51).


학자들이 정리하는 칸트 의 트랜쎈덴털 아이디얼리즘.

.어떤 감감으로는, 인간들은 경험한다 단지 어피어런스들만들, 물자체들은 아니고.
.공간과 시간은 물자체 가 아니다, 인간의 인튜이션의 모든써브젝트인조건들에서 추출해서 뽑아낼수 있는 것도 아니다. 칸트는 이 결론문장을 여기저기 쓴다. 적어도 이 문장이 그가 의미하는, 공간과 시간을 트랜센던틀리 로 아이디얼 로 칭하는 중요한 이유다.
.공간과 시간은 인간의 쎈써블한 인튜이션의 써브젝티브 포름 이상도이하도 아니다. 이 문장도 여기저기 쓴다.
.공간과 시간은 경험적으로 리얼하다, 이건 의미한다 "우리 앞에 외부에서 오브젝트로서 다가올수있는 모든것" 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다, 그리고, 우리의 우리자신의 인터널 인튜이션즈, 내부의 직관들은 시간속에 있다.

It is at least a crucial part of what he means by calling space and time transcendentally ideal (A28/B44, A35–36/B52)]. '
여기서, 공간과 시간을, 트랜쎈덜틀리 아이디얼 로 불러서, 이게 트랜쓰덴털 아이디얼리즘 인데.

In the "Transcendental Aesthetic" section of the Critique of Pure Reason, Kant outlines how space and time are pure forms of human intuition contributed by our own faculty of sensibility. Space and time do not have an existence "outside" of us, but are the "subjective" forms of our sensibility and hence the necessary a priori conditions under which the objects we encounter in our experience can appear to us at all. Kant describes time and space as "empirically real" but transcendentally ideal.[citation needed]

이걸, 위키영어 에서 갖고 오면, 여기도 그대로 갖고 오는거라 별다를게 없고. 저 인용 안써있는건 저거 가져다 쓰면 되겄네.

공간시간은 경험적으로 리얼이고, 트랜쎈던틀리 로 아이디얼 이다.

트랜쎈덴털 이란게, 경험을 넘어선겨. 초월 이란 단어의 뜻이야 여기선. 공간시간 이 써브젝트적 포름 에 인튜이션이 접근하는건데, 경험적으로 리얼하게 다가오는데, 그 본모습은 정작 몰라. 물자체 오브젝트로 따로 있는것도 아니야. 우리들 각각 안에 있어. 아주 슈퍼 내추럴틱 한걸 저리 쓴거고. 초월 이라 하자고 길게 쓰기 귀찮으니까.

아이디얼 은 아이디어적 인겨. 이데아적인게 아이디얼 이야. 리얼한것 의 반대가 아이디얼한 것. 인데 아이디얼은 관념적인겨? 아 이놈의 관념 이란 개같은 단어. 콘셉도 관념 이데아관념 이데알은 관념적. 언더스탠딩은 오성이냐지성이냐관념이냐이해야앎이냐 아 증말 개같은 단어들.
.

초월적인 아이디얼 의 공간시간 의 세상. 이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인데, 대체 이걸 왜 초월적 관념론. 이냐.

先验唯心论 중국애들은 선험유심론.

超越論哲学(ちょうえつろんてつがく、: Transzendentalphilosophie, : transcendental philosophy)とは、カントを中心とし、フィヒテシェリングなどにも見られる哲学に対する態度。超越論的哲学(ちょうえつろんてきてつがく)とも言われる。古くは、先験哲学先験的哲学という用語が使われていたが、アプリオリ(a priori)の訳語で与えられる「先天的」という表現と紛らわしいため、現在では見られない。なお、Transzendentalに「超越論的」という訳語を最初に提案したのは、九鬼周造であるといわれている。なお、カントに限定していえば、批判哲学(kritische Philosophie)と指している内容はほぼ同じであると言って良い。
認識論的分類では、超越論的観念論(先験的観念論、超越論的主観主義、: Transzendentaler Idealismus, : transcendental idealism)という括りに入れられたりもする

일본은 초월론철학, 선험철학 선험적 철학. 아프리오리 번역으로. 인식론적 분류에서 초월론적 관념론, 선험적 관념론, 초월론적 주관주의.

.
저게, 참, 저, 아이디얼 하다는걸, 관념, 이렇게들 번역한거거든. 공간과 시간이란 초월적인 아이디얼 이다.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이 칸트철학인데, 이건, 자 다시 또 말하지만, 쎈써블 월드, 싸이언스 세상 이야기 하는겨.

저게 작명이 초월적 이라서, 먼 뜬금포 공상 몽상적 느낌이 나고, 관념론 지랄하면서 머리속에서 별 시안한 이상놀이 를 연상하는데, 전혀 그런게 아냐.

쎈써블 월드 여. 싸이언스 세상의, 순수이성 이라지만, 아주 순수하게, 칸트 는, 보이는 세상속만의 사유방식 을 썰할 뿐이야.

공간시간 이란것도, 순수한 포름 이라지만, 얘는 어디 세상이야? 쎈써블월드 야. 얜 모랄리티 릴리전 의 인텔리저블 월드 가 아냐. 공간 시간은 쎈써블월드 에 작동하는 순수포름 이야.

우리는 공간시간이라는 하나님포름 속에서, 쎈써블월드 의 오브젝트들을, 코그나이즈 할 뿐이야. 인간 의 마인드 안에서. 오브젝트들을 쎈써들로 리쎕트 해서 이걸 퍼시브 해서 영사기로 스크린에 쏜 그 화면들 관련 이야길 하는겨.

이걸,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이라고 인식론적 으로 말할뿐이야. 독일철학 에선 초월적 아이디얼리즘 이란 단어는 없어. 초월적 에 아이디얼리즘 을 쟤들은 붙이지 않아. 유치한 작명이야 이게. 내용과 전혀 맞지 않아 간판이름이.

공간시간이 경험적리얼하고, 초월적 아이디얼하다, 라고 칸트가 자기문장을 만들지만,

공간시간의 오브젝트들은 모두 쎈써블월드 의 오브젝트들이야. 이 오브젝트들은 모두, 경험적 으로 리얼하고, 초월적 으로 아이디얼 한거야.

초월적 으로 아이디얼 한거는, 몰라, 어떤건지,

칸트 가 문제 가 되는게, 저걸, 초월적 으로 아이디얼 하다며, 아이디얼 한것이  그럼, 존재 하는거냐 마는거냐. 이게 웃긴겨.

칸트 는, 우습게도, 무의식중에라도 말이지, 저게, 존재하지 않을수도 로 가는겨. 그냥 억지로 믿으세요 로 가는겨. 이게 어찌할수 없어 논리적으로.

저게 제목 자체가 초월적 이라서 초월적 인 대단한 머리세상 으로 오해가 되는거지, 정작 디다보면, 경험외의 것은, 딴 로직으로 봐야 합니다, 기본적 언더스탠딩 의 세상이 아닙니다, 라며, 뒤로 갈수록 이게 애매해지면서, 칸트 의 본심은 신 자유 영혼 어쩌고 해대지만, 칸트 를 읽는 이들은, 점점 신 자유 영혼 을 버릴 수 밖에 없어.

칸트 는 정작, 신 자유 영혼 을 지킨게 아니라, 적그리스도 가 된겨 이게.

.
대체 저놈의 이데아세상. 콘셉, 언더스탠딩 코그니션, 대체 시이이이발 이게 머냐는거지 이게.

일단 다음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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