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EIYIm-aBQE

아래 내용들은 오류가 있습니다. 위 칸트시리즈 영상들로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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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t’s main goal is to show that a critique of reason by reason itself, unaided and unrestrained by traditional authorities, establishes a secure and consistent basis for both Newtonian science and traditional morality and religion. In other words, free rational inquiry adequately supports all of these essential human interests and shows them to be mutually consistent. 

 

이 문장을 잊으면 안돼. 칸트 가 해결하려는 건, 뉴튼과학 과 기존의 모랄리티릴리전 의 안전한 공존의 터를 세워주려는거야. 인간의 본질적인 관심이자이로움들의영역은 머여? 저거 세개야. 과학 과 모랄리티릴리전. 모랄리티릴리전 은 뗄 수 없는 하나고. 즉 일단 두 가지로 생각하고, 이걸 프리한 래셔널한 탐색으로 해야만이, 해결된다는겨.

 

저걸 . 잊지마러. 칸트 이야기 에선.

 

프로이트 는 머여? 꿈은 듣보의 결과물이 아니라, 내가 일상에서 겪은 것들이 티나오는것일뿐, 예언성 따위 니 점술 따위니, 없어 이 ㅇㅇ들아. 이게 프로이트 여. 프로이트 의 절대적 문장은 저거여. 

 

이 칸트 이야긴, 정말 재밌는거야. 아주 진지한거고, 너무나 리얼한거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의 플라톤 이야기 역시나 너무나 재밌고 리얼한 거거든. 

 

칸트 이야기 에, 우리의 모든 궁금 과 미래의 힌트 들이 있는건데. 말이지. 

 

2.2 Kant’s Copernican revolution in philosophy

To see how Kant attempts to achieve this goal in the Critique, it helps to reflect on his grounds for rejecting the Platonism of the Inaugural Dissertation. The Inaugural Dissertation also tries to reconcile Newtonian science with traditional morality and religion in a way, but its strategy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Critique. According to the Inaugural Dissertation, Newtonian science is true of the sensible world, to which sensibility gives us access; and the understanding grasps principles of divine and moral perfection in a distinct intelligible world, which are paradigms for measuring everything in the sensible world. So on this view our knowledge of the intelligible world is a priori because it does not depend on sensibility, and this a priori knowledge furnishes principles for judging the sensible world because in some way the sensible world itself conforms to or imitates the intelligible world.

 

칸트. 1724-1804. 의 박사논문이 1755년 31세고. 순수이성비판이 1781년 57세. 26년 이 지난겨. 칸트 이야긴 31세 1755년의 박사논문 을 부정하면서 시작하는거야. 순수이성비판 이란건, 26년전의 박사논문 을 칸트가 직접 자기부정 하면서 내놓은 것이고, 이건 자기가 생각하기에 너무나 획기적인거야. 쇼킹한겨 이건. 이런 쇼킹 을 이걸 느껴야 해. 칸트 가 느낀 것 만큼. 이 글을 보는 니덜도 느껴봐. 데카르트 의 절절함을 데카르트 가 느끼듯이 그 감정 을 그대로 내가 전달해 줬잖니. 소크라테스 의 플라톤 의 그 찐한 감정을 내가 전해 줬듯이. 이건 말이지, 내가 그만큼 저들 의 이야길, 아주 완벽하게 습득해서, "우리들 유전자에 새겨진 조선어의 문법"으로 내가 전해주기 때문에, 나의 플라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이야기 가 니덜 몇몇에게 스민거야. 이 나라에, 아니 전 세계에서, 웨스턴 애들 빼고, 비 웨스턴에서, 자기나라의 보편문법으로 쟤들 이야길 전해주는 애들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어. 이걸 내가 조선어 세상에서 유일하게 니덜에게 전해주는거야. 

 

칸트의 질문과 의문은 저당시부터도 심각한 문장이야 저게. 지금도 여전히 칸트의 질문의 문장은 유효해. 저걸 이해를 못하는 애들이, 권력과 제도에서 인민들을 죽이는거야. 쌩 무식한 들이 학계와 권력과 하나되서 문명을 죽이는거고. 

 

나는, 저 칸트 의 문장들을 풀면서, 나만의 질문들이 따로 있거든. 이걸 칸트 의 것들을 통해서 그 팁으로, 답을 찾고자 하는건데. 내가 저 칸트 따위 인간 헤겔 따위 의 것들을 니덜에게 전해봤자 뭔 의미가 있겄니. 니덜따위 우주역사에서 가장 미개한 생체들에게 잘난 척 해보이 뭔 낙이 있겄니. 아 되도록 쓰잘덱 없는 말 말고 본론만 말하자. 

 

칸트 의 박사논문이란건, 흔한 생각의 뻔한 말들이야. 저당시도 지금도, 그 생각의 틀 그대로 해오던 방식에서, 걍 뻔한 문장들을 쓴게 칸트 박사 논문이야. 박사 논문이라는게, 어차피 로직 을 보는거거든. 아 이 애들 가르칠 기본 로직을 갖추었네. 그래 너 애들 가르칠 자격증을 주겠다. 이게 닥터 라는겨. 그런데, 26년 지나서, 그 뻔한 로직의 자기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틀렸던거야. 이게 쇼킹한거고, 이 사고의 전환 이 코페르니쿠스 의 회전과 같은, 생각틀의 전환이자, 세상틀의 전환이었다며 자기가 자기이론을 갖고 그 느낌을 지가 작명을 해 코페르니쿠스 전 레볼루션 이라고. 뻘쭘한거지만 지딴엔  대단했던겨. 그리고, 저걸, 사람들은 인정하는건가? 그건 별개지, 칸트 가 지 이야길 대단하다며 자찬하는것과, 사람들이 평가 하는건. 과연 코페르니쿠스 적인가? 이걸 니덜도 판단을 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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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논문도 똑같은 주제여. 뉴튼과학 과 모랄리티릴리전 의 화해여. 뉴튼과학 은 쎈써블한 세상에 참 이고, 쎈써빌리티 를 통해 우리는 쎈써블 세상에 접근을 해. 쎈써블 세상을 쎈써빌리티로 접근을 해서 뉴튼 과학 을 알게돼. 언더스탠딩 이생기는겨 이게. 쎈서블한 세상에 대한 언더스탠딩. 이런 언더스탠딩 으로, 별개의 인텔리저블 세상 속에서, 디바인 과 모랄의 완벽한 원칙들을 포착하는거야. 이런 포착되는 원칙들은, 쎈서블한 세상속에서 메져하는 패러다임 틀과 그 방식 유형이 같은겨 이게. conform 콘포름 한다고 해 칸트 문장들에서. 이런 관점으로, 인텔리저블 세상의 앎, 이란건 아프리오리 이다, 왜냐면 쎈써블월드의 쎈서빌리티로 얻은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아프리오리 인 이 앎은 쎈서블월드 의 세상을 판단하는 원칙을드러내게 해준다. 왜냐면, 쎈써블 세상은 그 자체로 인텔리저블 세상을 콘포름 근본방식을 따르거나 더가서 모방하는 세상이니까. 

 

이게, 박사논문 이었어. 칸트가 31세 1755년 에 쓴. 

 

싸이언스 란게 뉴튼 이 붙으면서, 이게 지금식 자연과학 으로 쓰는겨 칸트는. 베이컨 의 학문의진보 라는 에쎄이 의 학문은 싸이언스 를 번역한겨. 저때는 싸이언스 가 필로소피 여. 과학이 아냐. 워드가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다른겨 이게. 그래서 작가 에 시대 별로, 워드 의 의미를 구분할 줄 알아야해. 

 

얘들이 워드의 문법은, 아주 꼼꼼하게 봐야 하는겨. 조선 애들 말글 보듯이 웨스턴 애들 글을 봐서 이 조선 인문학이 개떡이 된겨 이게. 쟤들은 그리스로마 를 이어서 2500년의 아주 완벽한 산뜻한 문법 속에서 살아온 인간들이고, 쟤들 글은 아주 분명해. 조선말글은  티미하고 뿌옇고, 글을 봐도 뭔말인지 몰라. 근본적으로, 사성소인식 글쓰기를 해서. 일본도 마찬가지였거든. 얘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메이지때 사생적 글쓰기를 한겨. 웨스턴엔 이런 글쓰기란게 없어. 독자적으로 일본애들이 끄집어 낸 개념이야. 그런데 조선들은 이따위 문제인식도 없어. 주원장이란 애가 중국 유자들의 이런 글쓰기 문제를 파악한거거든. 그러면서  오히려 이걸 즐겨 자기 정권 유지를 위해. 

 

쟤들 글은 그 자체로 보는겨. 나의 번역이 너무나 탁월한 이유야. 쟤들의 문법을 내가 아주 속속들이 알고, 다른 세상의 문법과 이 조선에 극동 드러운 문법을 나만이 아주 총체적으로 알고 있거든. 이런 인식을 하는이가 단 하나도 없는게, 당연한거야 여긴 지능 이 없는 애들이니까. 아  자꾸 스잘덱 없는 말. 

 

과학 은, 쎈써블 월드 세상이고, 쎈써빌리티 로 접근하는겨. 그래서 이런 언더스탠딩 으로 뉴튼 과학이 나온거야. 이건 머여? 프린시플. 법칙 이야. 

 

모랄리티 릴리전.의 세상은, 칸트 가, 인텔리저블 월드, 라고 워드를 써. 

 

게르만어 라는게, 로망쉬 가 아냐. 로망쉬 라는건, 라틴어의 버내큘러 구어, 라틴어 의 토착화된 발음의 변형된 글자 가 로망쉬야. 게르만어는 라틴어의 변형이 아냐. 얘들만의 독자적인 워드 들이야. 영어는 저 두개가 같이 온거야. 그만큼 영어라는게 풍부한겨 워드가. 영어는 저들 각각의 어원들의 소리를 이은거야. 그래서 번역해도 그 어원을 거의 살려. 물론 완벽하진 않아. 얘들끼리의 번역의 문제도 주제여. 그러나, 이건 5에서 10퍼 내외여 얘들 번역 문제는. 넘어가도 돼.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으로 가면 자기 독어의 문장을 영어로 풀때의 문제제기를 하거든, 자기의 독어문법으로 푼 내용을 영어로 설명하는 한계 에 대해. 그러나 여하튼 쟤들끼리의 번역은 주류 에서는 영어 로 제대로 풀이된 건, 95퍼 이해 가능해 원작자의 의미를. 그러나, 극동 일본한자 의 조선글은. 단 10퍼 10퍼 조차 이해 불가야 ㅋㅋㅋ. 특히 데카르트 부터의 글들을 보면, 정말 이 조선 의 근대서양철학 은 완벽한 사기야 저건. 철학 전공 한 들은 알아 이걸. 얘들 더 웃긴건, 자기는 이해못한걸 남은 이해한줄 알아, 그래서 자기도 이해한척 ㅋㅋㅋ. 서로서로, 이해한 척 하는겨 저 들. ㅋㅋㅋ 저게 코메디인겨. 저 어떤 저거, 아무것도 모르는게 테레비에서 공중파로 데카르트 가 어쩌니 소크라테스가 저쩌니 칸트 가 그쩌니. 그리고 위대한 조선 공자 중국 공산당. 아, 정말 조선 이란건 똥 그 자체야. 

 

그래서, 모랄리티 릴리전 의 인텔리저블 월드 . 이런 영어 를 그대로 인정 해도 된다는겨. 저걸 일일이 독어 를 내가 안 찾는 이유여. 아 일단 힘에 부치고 내가. 예전에 저렇게 찾은건, 저렇게 안찾으면 내가 이해가 안돼서 찾은거고, 저걸 원래 워드 에 문장을 봐야 이해가 되는거거든. 이게 아프리오리 라는겨. 이게 애널리틱 이란거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애널리틱 씬떼씨쓰 가 머  분석적에 종합적 어쩌고 그따위께 아냐. 저런 시안한 단어와 용법이 대체 왜 나오까 저게 저런이야기들이 나올 수 밖에 없고 나와야 하고 아하 애널리틱 씬떼씨쓰 아프리오리 가 그런거구나 , 하는게 이게 모두 결국 언어 의 문법 문제고 메타피직스 란게 문법 이야기 일 뿐이야. 이게 근대철학 일 뿐이고, 더 가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야기 일 뿐이야. 이런 아주 근본적 기본적 인 것에 대해, 너무나 모르는겨. 왜? 안가르쳐주니까? 왜? 아는 이가 없으니까. 

 

황당하잖냐. 아니 그럼 대체, 유학가서 학위 딴 애들은 머란 말이요? 시중에 그 어마어마한 책들이란게 머란말이요? 모두 다 개 사기란 말입니까?

 

응. 다 개사기야. 이 조선 땅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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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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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랄리티 릴리전 은 인텔리저블 월드 야.  여기도 나름의 디바인 과 모랄 의 퍼펙트 한 법칙들이 있다,는건 칸트만의 박사논문의 가정이고, 뉴튼 과학이란게 쎈써블한 세상의 퍼펙트한 법칙들을 언더스탠딩 하게 해줬듯이. 모랄 릴리전 의 인텔리저블 도 저런 프레임일테고, 여기서 칸트 가 적용한게, 저 두 세상은, 패러다임이 같을 것이다, 라는 자기만의 참인명제를 들이민겨. 공리적으로. 두세상의 작동방식이, 콘포름. 포름, 을 같이 쓰는겨. 모방 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 인텔리저블 의 앎들을 쎈써블 세상에 적용도 해. 걍 두세상의 방식이 같을거니까. 인텔리저블 의 세상에서 의 앎 이란건 쎈서블 세상의 쎈써빌리티 를 통해 얻은게 아니니까, 아프리오리, 이걸 선험적 머 이렇게 번역하는데, 걍 아프리오리 라고 하자고, 쎈써블 을 통한 앎은 아포스테리오리, 야. 아프리오리 의 앎이 쎈써블세상의 법칙 파악에 도움을 줄거라는겨. 

 

저게 박사논문이야. 

 

너무너무너무 뻔한 문장들 이야. 

 

모랄리티 릴리전 의 인텔리저블 한 세상과, 쎈써빌리티 의 쎈써블한 세상 은, 콘포름 에 이미테이트 모방하는 관계이고, 서로들 법칙들에 의해 구현되는것일테고, 그 앎이란것으로 각각 세상의 법칙을 알게 해줄것이다. 

 

31세에  뻔한 이야길. 그러다 나이 더 처먹어서, 자기의 26년전 문장을 하나하나 깨부수는겨. 그리고 나온게 순수이성비판인거야. 

 

즉, 머겠냐. 저 두 세상은, 전혀, 별개 의 세상인겨. 과학 을 보던 방식 으로, 모랄리티릴리전의 인텔리저블 세상을 볼 수 가 없다는겨. 

 

더 쇼킹한건, 과학을 보던 방식 자체가, 그 언더스탠딩의 방식이, 완전 반대로 이해 해왔다는거야. 여기서 나온게 코페르니쿠스 여 너무나 반대로 알고 있었다며 내가 진짜 를 알려주마 진짜는 완전히 반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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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길 하는겨 이 다음부터. 

 

Soon after writing the Inaugural Dissertation, however, Kant expressed doubts about this view. As he explained in a February 21, 1772 letter to his friend and former student, Marcus Herz: 

박사논문을 쓰고, 자기 문장이 잘못된걸 20년이 지나서 표현해. 저런게 왜 잘못되냐면 모든 이론들이란게, 처음에 공리적으로 던지는 참이라며 연역적 문장이 대게 책임없는 지들만의 절대적 참이라며 쎄우는거거든. 칸트 는 저기서 자기만의 아무런 로직 없는 문장, 두 세상이 모방지경의 같은 판이다, 서로 관계되는 세상이다, 아무런 근거없이 저런 판에서 자기 건물 세우는겨. 이게 모든 머리들의 근본적인 문제거든. 이념놀이 해대기 좋아하는. 

 

조선 정치판 들의 아주 고질적 문제고, 저런게 문명 후지고 역사 없는 모든 땅들의 문제여. 그래서 인민들은 거지 되고 여자들은 창녀되서 몇몇만 자기만의 창녀촌에서 사는 세상 만드는걸, 오 평등사회 여 이상사회 여 지랄 대는거거든. 

 

1772년, 48세. 박사논문쓰고 17년후에, 자기 친구이자 이전 학생이었던 마르쿠스 헤르츠 에게, 쓴 편지.

In my dissertation I was content to explain the nature of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in a merely negative way, namely, to state that they were not modifications of the soul brought about by the object. However, I silently passed over the further question of how a representation that refers to an object without being in any way affected by it can be possible…. [B]y what means are these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given to us, if not by the way in which they affect us? And if such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depend on our inner activity, whence comes the agreement that they are supposed to have with objects – objects that are nevertheless not possibly produced thereby?…[A]s to how my understanding may form for itself concepts of things completely a priori, with which concepts the things must necessarily agree, and as to how my understanding may formulate real principles concerning the possibility of such concepts, with which principles experience must be in exact agreement and which nevertheless are independent of experience – this question, of how the faculty of understanding achieves this conformity with the things themselves, is still left in a state of obscurity. (10:130–131)

내 박사논문에서, 나는 인털렉추얼 레프리젠테이션들의 네이처를 걍 부정적인 방식으로 설명했었는데, 즉, 그것들은 오브젝트 에 영향받아서 영혼이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서술했거든. 그런데, 내가 가만히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봤거든, 머냐면, 어떤 오브젝트에 관련된 어떤 레프리젠테이션 이라는게, 그 오브젝트 에 영향받는 방식과 상관없이, 가능할수 있을까...이들 인털렉추얼 레프리젠테이션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거야,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주는 방식 없이. 이게 그래서 이런 문장이 참이 되게 되는건데, 즉 그러한 인털렉추얼 레프리젠테이션들(표상들)이 우리의 내적인 활동에 달려있다면, 그때부터는 그 표상들은 오브젝트들을 지닌다 로 여겨진다 라는 게 되는거지, 그 오브젝트들은 그럼에도 그렇게 낳아질수는 없는거잖아?...나의 이런 생각이 더 가서 어떻게 띵즈 것들의 콘셉들을 아프리오리 로 포름 만들어낼지, 그런 콘셉들은 것들(띵즈) 과 반드시 일치되어져야 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나의 방식이 그러한 컨셉들의 가능성에 대해 진짜 법칙들을 포뮬레이트 어떻게 이론화할지, 그러한 법칙들에 경험은 정확히 일치해야 하는거고, 그럼에도 경험과는 무관한 - 이게 문제인데 말이야, 언더스탠딩의 기능이 것들(띵즈) 그자체와 의 이러한 콘포름이티, 포름의 일치 를 구현하는것, 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어. 

 

자기의 논문에서의 하나의 문장 이 계속 걸린거야 17년 동안. 레프리젠테이션 이란건, 프리젠트, 주는거야, 리, 쎄게 주는겨. 의미있게 쏘는거야. 인털렉추얼, 분간 하는겨 구분하는거고. 인텔리전스 리즌 언더스탠딩 이딴걸 얘들이 막 그냥 쓰는게 아냐. 그래서 이 조선의 일본한자번역을 보면  모든게 이성 지성 오성 이해 벼라별 짬뽕 언어들로 도배를 해놔서, 절대 이해불가여. 

 

칸트 이야기에서, 저걸 얘나 설명하는 애들이나, 처음부터 구분하면 참 좋은데. 저게 뒤에가면 언뜻 비슷하게 설명은 해주는듯 하지만, 

 

오브젝트 라는건 말이야. 콘크리트 와 앱스트랙트 를 칸트 가 같이 말하는겨. 물론 이런 콘크리트 니 앱스트랙트 니 의 단어는 전혀 쓰지 않아. 

 

과학의 세상은 콘크리트 오브젝트야. 쎈써블 월드 의 쎈써빌리티 로 접하는건 이 콘크리트 오브젝트 야. 더가서 이 콘크리트 오브젝트 는 배후가 앱스트랙트 오브젝트야. 나중에 칸트 가 생각을 더 가서, 저 앱스트랙트 오브젝트 를 띵즈인잇셀프 라는 물자체 라고 하는겨. 오브젝트 는 이 둘을 다 포함해. 띵즈 것들 것 이란게 콘크리트 오브젝트 야. 얜 안에 물자체 라는 앱스트랙트 오브젝트 를 갖고 있는겨. 

 

인간이 쎈써블 세상을 접할때, 띵즈 띵 을 다이렉트 로 접하는게 아냐. 인털렉추얼 레프리젠테이션 으로 접하는겨. 무얼 통해서? 쎈써빌리티 를 통해서, 이게 조선한자 의식 의 세상으로 들어와서, 분간 구분되는 표상 으로, 쎈써블한 세상을 인간은 언더스탠딩 하는거야. 

 

똑같은 띵즈 를 접하지만, 인간마다, 인털렉추얼 레프리젠테이션 이 다른겨. 분간하는 표상 이 다른겨. 레프리젠테이션 이란건, 화면 이야. 영화관 의 스크린의 화면 이야. 레프리젠테이션 대신 심리학은 프로젝트 라고 쓰는겨 융 애들은. 자기만의 인털렉추얼 한 프로젝션 영사기로 프로젝트 뿌리는겨 스크린에. 이 스크린 이, 인간마다의 이데아 세상인거야. 노션 notion 과 이데아는 달라. 노션 은 이데아 에 뿌린 화면 각각이야, 라고 칸트 가 로크 한테 야 이 경험주의  단어좀 확실히 구분해서 써 라고 하거든. 

 

칸트 가 박사논문에서 자기도 모르게 저 문장을 쓴거야. 우리의 스크린 화면 이라는게, 오브젝트 를 영사기로 찍어서 쏘는건데 말이지, 과연 저 화면, 레프리젠테이션들 이란게, 오브젝트 의 영향을 받은걸까? 아니야, 이것과 무관하게, 우리는 화면을 만들고 보는거야! 

 

이런 문장을 칸트 가 걍 쓴겨 31세 박사논문에서. 이 문장이 계속 생각난거야. 말도 안되는거거든 상식적으로. 

 

칸트 의 코페르니쿠스 적 전환 이란건, 저 문장 에서 시작한겨. 저게, 칸트 에겐, 정답 인거야 결국. 저때는 저렇게 찍 갈기고 걍 딴소리 한거거든. 평범한 사고의 평범한 문장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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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걸, 저 모호하게 남은 걸, 구체화 한게 순수이성비판 이야. 어떻게 나아가는지 보자고. 

 

Here Kant entertains doubts about how a priori knowledge of an intelligible world would be possible. The position of the Inaugural Dissertation is that the intelligible world is independent of the human understanding and of the sensible world, both of which (in different ways) conform to the intelligible world. But, leaving aside questions about what it means for the sensible world to conform to an intelligible world, how is it possible for the human understanding to conform to or grasp an intelligible world? If the intelligible world is independent of our understanding, then it seems that we could grasp it only if we are passively affected by it in some way. But for Kant sensibility is our passive or receptive capacity to be affected by objects that are independent of us (2:392, A51/B75). So the only way we could grasp an intelligible world that is independent of us is through sensibility, which means that our knowledge of it could not be a priori. The pure understanding alone could at best enable us to form representations of an intelligible world. But since these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would entirely “depend on our inner activity,” as Kant says to Herz, we have no good reason to believe that they would conform to an independent intelligible world. Such a priori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could well be figments of the brain that do not correspond to anything independent of the human mind. In any case, it is completely mysterious how there might come to be a correspondence between purely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and an independent intelligible world. 

 

여기서 칸트 는 더 가서, 인텔리저블 세상의 아프리오리 앎이 어떻게 가능한가 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해. 박사논문에선 걍 아무생각없이 저게 가능하다 로 쓴거야. 인텔리저블 세상은 언더스탠딩 과 별개고 쎈써블 세상과 별개야. 이 두 개는 인텔리저블 세상과 콘포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며. 

 

포름 form. 콘포름 conform 이란건 쎈말이야. 포름 매터 의 포름이야. 이 포름 이란건, 거의 신끕이여. 물리계에서 이 포름은 네이처끕이야. 설계도여. 포름 앱스트랙트 오브젝트에 물자체 끕이야. 얘들은 이 비중으로 쓰는겨. 콘포름, 거의 모방하다시피 따르는겨 이건. 이 단어의 어감을 갖고 가 항상. 

 

언더스탠딩 은 뉴튼 싸이언스 의 쎈써블 월드 에서 법칙들을 구현할때 쓴 단어야. 이 언더스탠딩 으로 인텔리저블 세상의 법칙들을 파악한다 고 쓴거야. 문장은 꼼꼼히 봐 항상. 그래서 언더스탠딩 은 쎈써블 월드 에 써먹은 단어야 주로. 이 두 단어는 인텔리저블 세상 속의 단어가 아냐. 구분 되는 단어고, 콘포름 하지만, 별개 인겨. 인텔리저블 세상은 언더스탠딩 과 별개라면, 즉 인텔리저블 과 쎈써블 이 콘포름 에 이미테이션 으로 전제 했거든 얘가. 가만, 별개 일수도? 전혀 다를수도? 이제서야 이런 가정을 하는겨 이 칸트가. 26년 지나서야. 아 이 들이 말이야. 공리적으로 연역적 문장 만드는걸 당연시 해대는 습성을 그래도 이인간은 26년 지나서 깬거야. 자기만의 공리를 깨는게 그래도 어디니. 어떤 들은 대가리 깨져도 충성이란걸 스스로 자랑스레 생각하잖니. 저건 똥 속 구데기 보다 못한겨 저건. 저런 들의 나라는 하루빨리 사라져야해. 저 돼지 머하나 몰라 빨랑 핵샤워하고 공멸하지. 왜냐면, 자기는 다 살고 핵샤워 하겠지. 

 

쎈써빌리티, 인간의 감각들 오감이란건, 수동적인거고, 수용적 받아들이는 기능이고, 그 대상들은 오브젝트 들이야. 이 오브젝트 는 오감을갖은 그당사자와 전혀 별개야. 

 

인텔리저블 세상 은, 쎈써블월드를 쎈써빌리티로 접하고 언더스탠딩 하는 것과 는 별개 인거고, 역시나 그래서, 이 세상을 알려면, 쎈써빌리티 오감 으로 알아야 해. 결국 아프리오리 의 앎 이 아니라는겨. 아포스테오리 경험해서 사후적으로 알아야 한다는겨.  

 

The pure understanding alone could at best enable us to form representations of an intelligible world. But since these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would entirely “depend on our inner activity,”   

 

언더스탠딩 그 자체만으로는 끽해야 우리에게 주는건, 인텔리저블 세상에서의 표상들 화면들만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화면들은 완벽하게, 우리 내부의 활동에 의존한다. 

 

언더스탠딩 이란게 싸이언스 의 언더스탠딩에, 그 언더스탠딩 기계를 그대로 인텔리저블 세상에 사용하는거야. 모랄리티 와 릴리전 의 세상이 인텔리저블 세상이야. 언더스탠딩 이란건, 어느 세상이건, 영사기로 찍은걸 스크린에 쏘고 보는겨. 데카르트 의 새. 인텔리저블 에서도 똑같은 방식의 작용을 해. 그런데, 인텔리저블 세상의 화면들 이란건, 순전히, 내부 활동의 화면이란거야. 

 

과학의 쎈써블 세상의 극장은, 오브젝트 들을 찍어서 스크린에 뿌린거야. 

 

인텔리저블 세상의 화면은, 이건, 전혀, 근거 없는, 인너 액티비티 가 주작질 한 화면 이란겨. 여긴 어떤 오브젝트 를 찍어서 뿌린 화면이 아냐. 저 문단만 제대로 이해하면, 칸트가  쉽게 다가와. 그래서 내가 일일이 쓰는건데. 

 

칸트가 맞든 틀리든 쟤가 먼 이야길 하는지 알자 는겨 . 제대로 쟤 말을 알려주는 애도 아는애도 단 하나 없잖냐. 솔직하자고. 

 

as Kant says to Herz, we have no good reason to believe that they would conform to an independent intelligible world.

 

인털렉추얼 레프리젠테이션즈 라는건, 어디까지나, 쎈써블월드 의 포름 이고 패러다임 이야. 이 판이 그대로 인텔리저블 월드 와 일치한다 라고 믿을 근거가 없어 생각해보니까. 저 때의 화면들은, 인텔리저블 의 오브젝트 를 찍은게 아냐. 무슨 화면일까 그럼?

 

Such a priori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could well be figments of the brain that do not correspond to anything independent of the human mind. In any case, it is completely mysterious how there might come to be a correspondence between purely intellectual representations and an independent intelligible world.   

 

걍 브레인의 피그먼트들, 뇌의 장난질 사기질 이란겨. 인간의 마인드 와 전혀 상관 없는겨 저 화면들은. 여기서 마인드 는 쎈써빌리티 의 세상이야. 

 

완벽히 미스테리 라는겨, 인텔리저블 세상과 그 화면들이란게 어떤 관계고 어떻게 통신하는가는. 걍, 뇌의 장난질 인듯., 

 

.

그러면서, 자기 박사논문을 완벽히 부정해. 그래서 얘 박사논문을 취소 해야 하는데. 소송걸어야 해 이거. 칸트 는 박사 가 아냐 그래서. 

 

아프리오리 란건, 인텔리저블 월드 의 앎이야. 아포스테리오리 는 쎈써블월드 의 쎈써빌리티를 통한 경험후의 앎이야. 경험 이란 익스피리언스 는 쎈써블월드 의 단어야. 얘 문법이야 이게. 

 

Kant’s strategy in the Critique is similar to that of the Inaugural Dissertation in that both works attempt to reconcile modern science with traditional morality and religion by relegating them to distinct sensible and intelligible worlds, respectively. But the Critique gives a far more modest and yet revolutionary account of a priori knowledge. As Kant’s letter to Herz suggests, the main problem with his view in the Inaugural Dissertation is that it tries to explain the possibility of a priori knowledge about a world that is entirely independent of the human mind. This turned out to be a dead end, and Kant never again maintained that we can have a priori knowledge about an intelligible world precisely because such a world would be entirely independent of us. However, Kant’s revolutionary position in the Critique is that we can have a priori knowledge about the general structure of the sensible world because it is not entirely independent of the human mind. The sensible world, or the world of appearances, is constructed by the human mind from a combination of sensory matter that we receive passively and a priori forms that are supplied by our cognitive faculties. We can have a priori knowledge only about aspects of the sensible world that reflect the a priori forms supplied by our cognitive faculties. In Kant’s words, “we can cognize of things a priori only what we ourselves have put into them” (Bxviii). So according to the Critique, a priori knowledge is possible only if and to the extent that the sensible world itself depends on the way the human mind structures its experience.

 

칸트 가 순수이성비판에서도 전략은 박사논문과 같어. 얜 지금 박사논문 을 다시 쓰는겨. 논문은 거짓이야. 그러나, 답은 같아야만 하는겨. 정답은 같은데, 내용은 전혀 딴판 인겨 이게. 

 

싸이언스 와 모랄리티릴리전 을 화해 공존 시키는게 얘 목적이야. 이미 정답은 정해진겨. 어드래 이걸 자기만의 로직으로 썰 풀까, 이짓 하는겨 얜. 저기서 봐라, 쎈써블 과 인텔리저블 로 구분 해서 재 배치 하는겨. 저런걸 아주 꼼꼼히 제대로 봐야해. 저런 얘만의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면, 아주  쉽게 이해가 돼.

 

휴먼마인드 와 완전히 별개인 세상, 즉 머여? 인텔리저블 월드 에 대해 아프리오리 앎을 가질수 있다고 주장했거든. 원래 이 논리는 머였어? 과학이란 경험세상을 파악하는데, 인텔리저블세상의 앎으로 활용한다고 했거든 가정으로. 그럴때 인텔리저블 의 앎은 경험 쎈써블의 앎과는 별개라서 아프리오리 라고 작명한 것일 뿐이야. 걍 얘 로직이야. 

 

그러나, 인텔리저블 세상 자체 의 화면들이란건, 뇌의 피그먼트 조작질 장난질 사기질 일 뿐이야 딱 까놓고. 또는, 몰라 저 상관관계를. 전혀 알수 없어. 인텔리저블 세상에 대해 일단 , 몰라, 앎 이란게 없어 지금 당장. 아프리오리 란게 당연히 없어  앎이 라는 아는게 없는데 선험적으로 아니 마니 라는 수식어가 무슨 의미가 있니. 완벽하게 데드엔드, 막다른 골목에 온겨. 그래서 이주장은 폐기. 절대 써선 안돼. 

 

그런데, 여기서, 시선이 전혀 다른 곳에 가는겨. 일단 인텔리저블 세상은 포기해, 일단은. 

 

반대로, 쎈써블 월드 에 대한 언더스탠딩 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 되는거 아닌가. 

 

The sensible world, or the world of appearances, is constructed by the human mind from a combination of sensory matter that we receive passively and a priori forms that are supplied by our cognitive faculties.   

 

쎈써블 월드 라는건, 어피어런스들 보임들의 세상 인데, 이건, 인간의 마인드 가 건축한 세상이야, 이 건축자재 가 두개 야. 하나가 쎈써리 매터, 이 감각되는 매터를 우리는 수동적으로 받아, 다른하나가 아프리오리 포름즈, 이건 우리의 코그니티브 기능들이 제공을 해. 이 매터 와 포름 을 콤비네이션 하는 것이, 휴먼 마인드 라는겨. 얘가 은근히 자기만의 사전을 만드는겨. 

 

어피어런스,  pareo 파레오, 가 내가 보이는겨. 보이게끔하는거야. 이걸, 현상, 이렇게 번역하지만, 현상 이란게 일본애들 번역이고 안 와닿는겨 이게. 

 

쎈써블 월드 의 보임들 세상이란건, 이게 뭐여? 인털렉추얼 레프리젠테이션즈. 여. 우리는 모두들 각각 저마다의 극장 화면들을 보면서 이 쎈써블 세상에 임하는거야. 자기만의 쎈써빌리티들을 갖고, 수동적으로 들어오는, 감각의 매터, 를 받아, 이걸 지어, 이걸 무엇으로 짓는겨? 아프리오리 포름. 자기만의 포름 이 있는겨.  아리스토텔레스 의 매터 포름을 얘가 그대로 여기에 써먹어. 인간마다 자기의 포름 이 내장이 된거야. 이건 코그니티브 기능이야. 

 

메타피직스 를 칸트 는 머라 정의했냐? 코그니션즈. 라고 정의 했잖니 시작에서. 인간이성 이 모든경험과 별개로, 스트라이브 추구해서 쟁취해나가는 것들.이 코그니션즈 이고 이게 메타피직스 라 며 시작하잖냐. 

 

코그니션 이란건, 그노씨스 의 그니션이여. 코 는 쎈거고. 쎄게 강력히 아는거야. 앎을 위한 핵심부품조합 이 코그니티브여. 여기에 이미 포름 으로 내장된겨. 포름 이란건 머라고?  쎈겨 안보이는 설계도에 네이쳐끕이야. 신이여 이건. 몰라. 앱스트랙트여. 이건, 아프리오리, 이미 내장이 된겨. 아프리오리 자체가  모른다 여 모른다. 포름 자체도 모른다 고. 모르는 모르는것 이미 내장된. 아프리오리 포름. 으로 감각에 들어온 매터 들을 조합하는게, 휴먼 마인드고, 이 건축물이 보이는 세상 이야. 화면대로 보이는 세상을 보고 또 만들 뿐이야. 

 

In Kant’s words, “we can cognize of things a priori only what we ourselves have put into them” (Bxviii). So according to the Critique, a priori knowledge is possible only if and to the extent that the sensible world itself depends on the way the human mind structures its experience.  

 

아프리오리 라는 걸, 인텔리저블 에서 써먹기 위해 만들었다가, 저 세상을 일단 폐기 하고, 아 이 단어 버리기 아깝걸랑. 쎈써블 세상은 저마다의 아프리오리 포름 이 있는게 인간들 마인드에. 띵즈 라는 것들 오브젝트들을, 우리는 아프리오리 포름 으로 언더스탠딩 할 뿐이야. 그래서 아프리오리 포름 으로 아프리오리 앎 이 가능한거고, 이것과  재료 의 조합이 쎈써블 월드 라는겨. 쎈써블 월드 는 인간의 마인드가 경험을 건축하는 방식에 의존하는거야. 

 

주인이 완벽하게 바뀐겨 이게.

 

쎈써블 월드 를 인간이 피동적으로 받아서 해석하는게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내장된 이미, 아프리오리 의 코그니티브 방식, 인식 방식 으로, 과학의세상 을 걍 저 눈에 띄는 세상을 건축할 뿐이야. 저 세상은 저 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내장된 포름 의 세상일 뿐인겨. 

 

Kant characterizes this new constructivist view of experience in the Critique through an analogy with the revolution wrought by Copernicus in astronomy: 

 

천문학의 코페르니쿠스에 쓰였던 회전 을 비유로 순수이성비판에서 경험의 새로운 건축가의 관점을 특징짓는다.

Up to now it has been assumed that all our cognition must conform to the objects; but all attempts to find out something about them a priori through concepts that would extend our cognition have, on this presupposition, come to nothing. Hence let us once try whether we do not get farther with the problems of metaphysics by assuming that the objects must conform to our cognition, which would agree better with the requested possibility of an a priori cognition of them, which is to establish something about objects before they are given to us. This would be just like the first thoughts of Copernicus, who, when he did not make good progress in the explanation of the celestial motions if he assumed that the entire celestial host revolves around the observer, tried to see if he might not have greater success if he made the observer revolve and left the stars at rest. Now in metaphysics we can try in a similar way regarding the intuition of objects. If intuition has to conform to the constitution of the objects, then I do not see how we can know anything of them a priori; but if the object (as an object of the senses) conforms to the constitution of our faculty of intuition, then I can very well represent this possibility to myself. Yet because I cannot stop with these intuitions, if they are to become cognitions, but must refer them as representations to something as their object and determine this object through them, I can assume either that the concepts through which I bring about this determination also conform to the objects, and then I am once again in the same difficulty about how I could know anything about them a priori, or else I assume that the objects, or what is the same thing, the experience in which alone they can be cognized (as given objects) conforms to those concepts, in which case I immediately see an easier way out of the difficulty, since experience itself is a kind of cognition requiring the understanding, whose rule I have to presuppose in myself before any object is given to me, hence a priori, which rule is expressed in concepts a priori, to which all objects of experience must therefore necessarily conform, and with which they must agree. (Bxvi–xviii)

지금까지는 이런 가정들이었다, 우리 모두의 코그니션 이란건 오브젝트들에 따라서 일치해야만 한다고; 그러나 모든 시도들로 오브젝트들에 대한 무언가를 아프리오리 로 찾으려 했고, 그 콘셉들을 통해 우리의 코그니션을 확장하리라 여겼지만, 이런 가정에선, 아무것도 된게 없다. 그래서, 다시 시도해 보자, 우리가 메타피직스의 문제들을 더 이상 갈수 없는지, 이번엔 다른 가정으로, 즉, 오브젝트들이 우리의 코그니션 을 따라서 일치해야 한다고, 이게 오히려 오브젝트들을 아프리오리로 앎 의 가능성에 더 부합될것이다. 오브젝트들을 아프리오리로 코그니션 한다는 뜻은,  오브젝트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오브젝트들에 대한 무언가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 의 첫번째 사유와 같다, 그가 하늘의 움직임들을 설명하는데 진도가 잘 안나갔을때, 그당시 그는 전제가 이랬었는데, 저 모든 하늘의 주인이 관찰자 주위를 돈다고. 진도가 안나가서 생각을 바꿨다, 관찰자롤 회전, 돌리고 별들은 그냥 둔거였다. 자 메타피직스 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시도할 수 있다, 오브젝트들을 깊게바라보는 것(인튜이션)에 대해. 인튜이션이 오브젝트들의 콘스티튜션 에 콘포름 해야 한다면, 그때는 나는 오브젝트들의 어떤것도 아프리오리 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브젝트 가 (쎈쓰들의 오브젝트로서) 우리의 인튜이션의 기능의 콘스티튜션에 콘포름 한다면, 그때는 나는 아주 잘 이 가능성, 오브젝트 를 아프리오리 로 알수 있음, 을 나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인튜이션들로는 통제가 안되기 때문에, 인튜이션들이 코그니션들로 된다면, 이것들로 그것들의 오브젝트로 서의 어떤 레프리젠테이션즈, 화면들 표상들 로 전환해야 하고, 그렇게 이 오브젝트들을 규정 한계지음 확인 디터미네이션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혀 다른 두개를) 가정할 수 있다, (하나는) 이러한 규정 디터미네이션 을 하게 해주는 이 콘셉들 은 오브젝트들 에 물론 콘포름 하고, 물론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오브젝트들에 대한 어떤것도 아프리오리 로 알수 있는가 에 대해 같은 어려움이 있고(반복적인 말이지만), 또한 (두번째의) 전혀 다른 가정은, 같은 방법이긴 한데, 오브젝트들이 코그나이즈 되는 (주어진 오브젝트들로서) 세상인 경험 이란건, 저들 콘셉들에 콘포름 된다 는 것, 이 경우에서는 나는 즉시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쉬운 길을 아는데, 경험 자체는 일종의 코그니션 이고, 코그니션이란건 언더스탠딩 을 필요로 하며 여기의 룰 법이란건 어떤 오브젝트 가 나에게 주어지기 전에, 내 스스로 정해야 하는거고, 그래서 아프리오리 이고, (경험들은) 아프리오리 의 콘셉들 로 표현이 되는 것이고, 모든 경험되는 오브젝트들은 따라서 반드시 이 콘셉들에 콘포름 해야만 하고 이 콘셉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

코페르니쿠스 가 태양중심설 만들때, 아예 시작을, 가정으로, 뒤바꿨다는거거든. 기존의 관찰자 주위를 도는 천체들 에서, 관찰자 가 돈다고 가정 해서야 모든 난점들이 풀리고 진도가 나갔다는거거든. 

 

메타피직스도, 저런 시도를 하자는겨. 오브젝트 에 노예적으로 콘포름 된 콘셉트 코그니션 이 아니라, 주인이, 콘셉트 코그니션 이고, 눈밖의 세상 오브젝트 는 그야말로 객 이라는거지. 이러면, 메타피직스 이 그간의 과제상황 난점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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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기서 항상 유념해야 하는건, 지금 말이야, 오직 쎈써블 월드 를 이야기 하는겨. 인텔리저블 이 아냐. 아프리오리 도 인텔리저블 에서 써먹었다가, 인텔리저블 은 일단 폐기 시킨겨, 몰라, 갈곳잃은 아프리오리 가 갑자기 쎈써블 에서 집을 찾은겨. 

 

As this passage suggests, what Kant has changed in the Critique is primarily his view about the role and powers of the understanding, since he already held in the Inaugural Dissertation that sensibility contributes the forms of space and time – which he calls pure (or a priori) intuitions (2:397) – to our cognition of the sensible world. But the Critique claims that pure understanding too, rather than giving us insight into an intelligible world, is limited to providing forms – which he calls pure or a priori concepts – that structure our cognition of the sensible world. So now both sensibility and understanding work together to construct cognition of the sensible world, which therefore conforms to the a priori forms that are supplied by our cognitive faculties: the a priori intuitions of sensibility and the a priori concepts of the understanding. This account is analogous to the heliocentric revolution of Copernicus in astronomy because both require contributions from the observer to be factored into explanations of phenomena, although neither reduces phenomena to the contributions of observers alone.[6] The way celestial phenomena appear to us on earth, according to Copernicus, is affected by both the motions of celestial bodies and the motion of the earth, which is not a stationary body around which everything else revolves. For Kant, analogously, the phenomena of human experience depend on both the sensory data that we receive passively through sensibility and the way our mind actively processes this data according to its own a priori rules. These rules supply the general framework in which the sensible world and all the objects (or phenomena) in it appear to us. So the sensible world and its phenomena are not entirely independent of the human mind, which contributes its basic structure.

 

언더스탠딩 의 자리 와 파워 가 완전히 바뀐겨 박사논문과는. 수동 피동에서 능동이 되고, 완전히 얘가 주인이 된거야. 박사논문에서는, 쎈씨빌리티 가 공간과 시간의 포름들에 결정적이다 라고 이미 말 했어. 공간과 시간 을 칸트 는 순수한 또는 아프리오리 의 인튜이션즈. 라고 말해. 이건 쎈써블 월드 의 단어들이야. 퓨어 순수 와 아프리오리 는 같은 의미고, 인튜이션 도 같아 뿌얘. 코그니션 은 인튜이션 보다 이성적인겨. 인튜이션 은 무당의 점술 이고 나쁘게 말하면, 코그니션 은 과학적인겨. 공간과 시간은, 포름 이야. 얜 인튜이션 의 대상이지 코그니션 의 대상 이야 아냐. 이런건 외우는게 아니라, 이해하는겨. 중요한 문장이야. 칸트 의 문장이고, 헤겔 에서는 똥 취급 받는게 칸트 의 저놈의 공간시간이라는 인튜이션대상인 포름 이야. 칸트 는 이게 또한 목숨줄이고. 퓨어 니 아프리오리 의 언더스탠딩 이니 인튜이션이니 따위는, 쎈써블 세상의 앎을 건축하는 포름들 에게 제한적이다. 뜬금없는 무당짓 무기들은 의미 없다는겨 눈에보이는세상에. 쎈써빌리티 와 언더스탠딩 이 같이, 쎈써블 세상의 코그니션을 건축하고, 얘들 두개는 코그니티브 기능들에 의해 제공되는 아프리오리 포름들에 콘포름 해. 주인이 포름 이고, 쎈써빌리티 와 언더스탠딩 은 노예야. 저게 코페르니쿠스 의 것들과 비유된다 란건 넘어가고 이미 설명해서. 그래서 쎈써블 월드 와 그것의 현상들 보임들은 인간의 마인드 에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가 아닌겨. 

 

인간의 마인드 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건축 되는거야. 

 

카를로 로벨리 가, 시간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문법 으로 세상을 본다 라고 하거든. 비저블 월드 가, 인간의 마인드 의 인간의문법 과 별개 가 아냐. 비저블 월드 는 인간의 문법 의 노예 일 뿐이야. 인간의 마인드 로 설계 건축 되고, 인간의 마인드로 개발 되는 법칙들 이야. 발견 이 아닐 수 있어. 디스커버리 된게 아니라 크리에티트 된 것일 수도 있어. 이건 칸트 의 논법이야. 

 

전혀 다른겨 세계관이. 

 

저게 말이지, 일체유심조 라는 화엄경 이야기 하는게 아녀. 세상은 마음먹기 나름. 그야말로  개소리가 저 화엄경이야. 정말 이 불교 란건, 너무너무너무 너무한 미개한 페이건 이야. 야,  땡중ㅇㅇㅇ, 모든건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똥깐 똥을 보약이니 마음먹고 삼시세끼 처먹어라 이 사기꾼ㅇㅇ. 

 

풍취번동 이야기 했지만, 깃발 움직이는게 마음 먹기 나름 어쩌고는 오직 조선 불교 만의 주작 해석질이고. 정말 너무너무 너무한겨 이 조선땅 의 신앙 이란건. 모든게 사기야 이게. 

 

불교의 허접 일체유심조 이야기 하는게 아냐. 불교 는 철학도 신앙도 조또 아무것도 아냐. 걍 주술놀이 무당 굿할때나 노는거고. 

 

그래서, 다음 두개 문단 은 넘어가고, 다음 3번 트랜센덴털 아이디얼리즘.은 다음으로 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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