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eaty of Preobrazhenskoye (or the Treaty of Preobrazhenskoe) was negotiated by Johann Patkul and signed on 22 November 1699 in Preobrazhenskoye (now a part of Moscow), a favoured residence of the tsar Peter the Great. It followed an informal meeting of Peter and Augustus at Rava (Rawa, Rava-Ruska, Rava-Ruskaya) in August 1698. The treaty called for the partition of the Swedish Empire among Denmark-Norway, Russia, Saxony and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Following the treaty, the Great Northern War began.
프레아브라젠스케 조약. 1699년 11월 22일. 요한 파트쿨.이 표트르 대제 의 집 이었던 지역 에서 맺은 조약 이야. 표트르 가 서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라바, 지금 폴란드 우크라이나 접경이야. 여기서 폴란드 킹 아우구스투스 와 만난겨. 이때가 1698년 8월 이야. 이걸 일년 지나서 정식 으로 싸인한거야. 같이 스위든 쳐서 나눠먹자는겨 이게. 폴란드 와 러시아 에겐 스위든이 철천지 웬수였으니. 폴란드 는 지기스문트 바싸부터지만, 러시아는 노브고로드 시작부터여 스위든 과는. 러시아는 발트해가 막힌거고, 폴란드는 오십년전에 수도까지 당해서 도망간거고.
그런데, 표트르 는 저런걸 할 여유가 없어. 여전히. 러시아 는 아무것도 없어 여전히 농노제에 얘들은 반란에 반란 의 역사여 민란 에 민란 이고, 시베리아 까지 점령했다지만 실속은 없어. 서유럽 에 비하면 그지여 그지. 표트르 는 아직 20대고 막 서유럽 구경하고 온거고, 군대도 엉망이여 스트릴치 반란했대 돈 못주고 거지라서. 가서 저거 작살낼거거든 아빠때도 얘들이 소금폭동 핑게로 모스크바 관리자 는 토막으로 죽었어.
폴란드 도, 답이 없어. 여긴 갓 작센 선제후 가 폴란드 킹 에 어거지로 올랐거든. 그런데 폴란드 셰임 이란 귀족 체제 의 나라야. 아무것도 못해 킹은. 얘도 왕권강화 가 목적이야. 폴란드 귀족들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 세습귀족이고 자기 돈 들어가는거 싫어. 킹이 아무것도 못하는 이 속내 를 전쟁으로 풀려는겨 이게.
가장 전쟁을 하고 싶은게, 폴란드 킹 이 된 아우구스투스 야. 얘가 표트르를 꼬신거고, 덴마크 프레데릭 은 작센의 엄마쪽으로 사촌이야. 덴마크 는 힘 없고 분풀이 하고픈거고, 작센에게 필요한건 러시아여.
전쟁을 시작한게 아우구스투스 여. 그런데 또 얘를 부추긴건 따른 애야. 저 프레아브라젠스케 조약 을 대리로 가서 한 요한 파트쿨.
Johann Reinhold Patkul (27 July 1660 – 10 October 1707) was a Livonian nobleman, politician and agitator of Baltic German extraction.
요한 하인홀트 파트쿨. 리보니안 귀족 이야. 스톡홀롬 감옥에서 태어났어. 아빠가 반역으로 가족이 다 들어간거고. 아마 커서 아빠땅을 이어받아서 스위든 군인을 해. 칼11세 가 절대군주 선언하면서 군제개편다시 하고, 세수 늘리려고 땅을 다시 몰수 하는겨. 여기에 불만 품은 젠트리 지주 대표로 파트쿨 이 뽑혀서 킹에 청원 을 하러 간거고, 말이 거세지면서, 또 반역으로 찍혀. 도망을 가. 간곳이 폴란드 킹 이야. 리보니안 귀족들 입장에선 스위든 보다 폴란드 가 더 낫다며, 폴란드 를 부추기는겨 리보니아 갖고 오라고.
리보니아 란 곳은, 레반트 십자군 후반에, 북쪽도 십자가 국가 만든다면서 게르만 들이 온겨. 이 아래에 튜튼 들이 프로이센 으로 그 다음에 온거고. 그래서 게르만 귀족들이야 시작부터. 여기가 스위든 이 독립하면서, 동시에 리보니안십자군 해체하고, 에스토니아 는 스위든으로 가고, 리보니아 도 러시아 와 전쟁승리 하면서 갖고 온거거든. 아래 쿠를란트 젬갈리아 는 리투아니아에 하미지 하는거고. 리보니안 입장에선 스위든이 너무 빡빡해, 느슨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로 다들 가자고 파트쿨 이 꼬시는겨 저게. 어차피 스위든 킹한텐 반역인거고 몰수 당한거고, 아빠도 똑같은 불만으로 반역자 된거였고.
이사람이, 폴란드 킹 을 부추기는겨. 저 작센에서 온 촌놈을. 이게 1698년 38세 고, 아우구스투스 나 표트르 나 프레데릭 이나 얘들이 모두 20대 후반이야. 창창한 젊은 애들 셋이서 뭉친겨. 그 뒤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파트쿨 이 스킴을 다짠겨. 얘가 아우구스투스 대리인 하다가, 이 작센 애가 별볼일없는걸 알고, 표트르 한테 가. 표트르 는 서유럽애면 무조껀 좋아해 인재라며. 작센한텐 배신자야. 다시 들른 파트쿨 을 체포하고, 얘를 칼12세 에게 넘기고, 칼12세 가, 브레이킹 휠, 산 채로 눕혀서 수레바퀴 로 걍 전신을 조지는겨.
Augustus II[a] (12 May 1670 – 1 February 1733), most commonly known as Augustus the Strong, was Elector of Saxony from 1694 as well as King of Poland and Grand Duke of Lithuania in the years 1697–1706 and from 1709 until his death in 1733. He belonged to the Albertine line of the House of Wettin.
모든 시작은, 작센선제후 에 폴란드 킹 인 아우구스투스 2세 선제후여. 1670년 생, 24세 1694년에 선제후 에 올라. 3년 후 에 폴란드 킹 에 억지로 올라 뇌물 써대고. 얘가 아주 작센 과 폴란드 를 망친겨. 어차피 망할 애들이었지만.
이사람도 형이 죽어서 선제후 가 된겨. 저 때 셋이 아주 똑같아 이게.
John George IV (18 October 1668 in Dresden – 27 April 1694 in Dresden) was Elector of Saxony from 1691 to 1694.
아우구스투스 형이, 요한 게오르크4세 인데, 26세 에 천연두로 죽었는데, 이사람은 사연이 재밌어.
Princess Eleonore Erdmuthe Louise of Saxe-Eisenach (13 April 1662 – 9 September 1696), was a German princess member of the House of Wettin and through her two marriages was Margravine of Brandenburg-Ansbach (from 1681 to 1686) and Electress of Saxony (from 1692 to 1694).
요한 게오르크4세 가, 선제후 되서 결혼하는 여자가, 미망인 이야. 베틴가문의 엘레노어 에르트무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마그러빈, 안스부흐 는 마크그라프 라는 자리보다 아래야. 마크그라프샤프트. 그라프 라는건 카운트 고, 마크 에 있는 카운트 란겨. 샤프트 가 더해지면 그 아래고. 브란덴부르크 가 앞이면, 호헨촐레른 가문 이란겨. 여기 갔다가 신랑이 죽었어. 여기서 남매를 낳고, 딸이 나중 영국 조지2세 의 부인이 돼. 애들 둘을 데리고, 작센 선제후 로 재혼들어와. 나이가 6세 가 많아. 1692년 이면 남자 24세 여자 30세 에 애둘.
The wedding was concluded at the insistence of Frederick III, Elector of Brandenburg (who wanted to secure an alliance with Saxony)[a][6] and the Dowager Electress Anna Sophie of Denmark, ostensibly to produce legitimate heirs to the Electorate of Saxony but truly to end the liaison between her son and his mistress, Magdalene Sibylle "Billa" of Neidschutz.
저 말도 안되는 결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뒤에 프러시아 킹 이 되는. 안스부흐 가 호헨촐레른 이고, 죽어서 과부 인 베틴가문과는 족보가 없지만 애들은 자기가문이야. 작센 이랑 동맹을 위해 저 애들의 엄마 를 작센에 넣고, 이 작센의 엄마 가 덴마크의 안나소피 인데, 신랑이 일찍 죽어서 장남 이 선제후 에 올랐지만, 얘 애인 이 빌라 라고 불리는 여자인데, 이 여자 와 요한게오르크4세 는 배가다른 남매 걸랑. 서로 몰라 이걸. 이 사이를 떼놓으려고 엄마가 저 말도 안되는 결혼을 시킨겨.
Magdalena Sibylla of Neidschütz (8 February 1675 – 14 April 1694), later Countess of Rochlitz, was a German noblewoman and the mistress of John George IV, Elector of Saxony. She was the first ever Official Mistress (Favoritin) of an Elector of Saxony.
나이트슈츠 의 막달레나 지빌라. 후에 로흘리츠 백작부인. 빌라 라고 불려. 7세 어려. 공식 애인 파보리틴 이야. 죽은 아빠의 애인이 낳은 딸이고, 이 사이를 떼놓으려고 6년 연상 과부 를 들인거야 급히. 요한 게오르크 는 부인 을 죽이려 해 칼을 들고. 이걸 동생 아우구스투스 가 말려. 그러다가, 빌라 가 천연두 로 죽어. 죽는 빌라 를 안고 울어. 남자도 천연두 걸려 죽어. 그리고 동생 아우구스투스 가 선제후 에 올라. 1697년 27세. 닉이 더스트롱. 강력 아우구스투스 여.
이사람이 개인적으로 특이한게, 두 가지인데.
Fox tossing (German: Fuchsprellen) was a competitive blood sport popular in parts of Europe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It involved throwing live foxes and other animals high into the air.
푹 스프렐렌, 여우 바운싱 토씽 던지기. 모포 덜때 양쪽에서 두손으로 모포 끝을 서로 잡고 털잖냐. 긴 천을 서로 잡고, 여우가 요 천에 오를때 휙 하늘로 던지는겨 타이밍 잡아서. 이걸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서로들 천 잡고 수십명이, 여우 풀어놓고 이걸 하는겨. 그중 더 높이 여우 올라간 팀이 이기는거고. 여우는 떨어지면 부상에 죽는거고. 잘못던져서 사람에 오면 물려 죽을수도 있고.
The result was often fatal for the tossed animal. Augustus II the Strong, the King of Poland and Elector of Saxony, held a famous tossing contest in Dresden at which 647 foxes, 533 hares, 34 badgers and 21 wildcats were tossed and killed
이걸 특히 즐긴 인간이 강력 아우구스투스 야. 전문가는 칠팔미터 던지는거고. 드레스덴 에서 이걸 즐긴겨. 여우, 토끼, 배저 오소리류, 고양이류. 천여마리가 이걸로 던짐당하고 대부분 죽는거고.
하나가 저 푹 스프렐렌.이고, 다른 하나가 여자문제 인데.
이 사람이, 폴란드 킹 선거에 뛰어들어. 3년 후에. 폴란드 킹 을 하려면, 로마 카톨릭 이어야 해. 작센 은 프로테스탄트 의 성지야. 폴란드 킹 을 하려고 카톨릭으로 바꾼겨. 당연히 작센 에서 좋아할 수가 없어.
작센 이란게, 원래는 올드 스템에 영거스템 인 게르만 시작부터 인거고, 이게 호헨슈타우펜 황제와 겔피 가 싸우면서, 이 작센 자리가, 아스카니아 가문에 12세기에 가고, 곰알베르트 가 브란덴부르크 만들고, 작센 쪽 아스카니아 끊긴걸 베틴 가문이 꿰차고, 에른스트 가 비텐베르크 에서 선제후 자리, 동생 알베르트 가 드레스덴 마이센 에서 후작 으로 나뉘고, 선제후 에른스트 계열에서 루터 티나와서 종교전쟁하는겨. 이걸 알베르트 계열 모리스 가 칼5세 황제편으로 갈아타서 에른스트계열 을 투링기아로 쫓아내서 선제후 자리를 갖고 오거든. 그런데 이때 중앙코트 는 드레스덴 인겨. 그래도 작센은 루터 여 황제편을 들었어도. 루터파 모임에서 얘들이 주인이었던거고.
혼자서 폴란드 킹을 한다고, 카톨릭으로 바꾼겨 이 인간이. 얘 때부터, 작센 선제후 자리인 드레스덴 은, 카톨릭인겨 이후 2백년을. 영주 가 카톨릭 이면 민들은 모두 카톨릭, 이따위 원칙도 이제 의미 없는 시대가 된거고.
Christiane Eberhardine of Brandenburg-Bayreuth (19 December 1671 – 4 September 1727) was Electress of Saxony from 1694 to 1727 (her death) and titular Queen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from 1697 to 1727 by marriage to Augustus II the Strong.
이사람 부인이,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디네. 안스바흐 나 바이로이트 나 마인강 상류 의 프랑코니아 고, 호헨촐레른 가문의 프랑코니안 이 브란덴부르크 에 프러시아 를 만든거고, 나머지 한 계열은 시작인 슈바벤에 있는거고. 이 프랑코니안 의 바이로이트 에 안스바흐 에 뉘렌베르크 가 프러시아 킹덤 들의 고향이야. 이 여자는 당연히 프로테스탄트 인거고, 폴란드 에 단 한번 가지를 않아.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로 시집가는 여자가 뒤에 프러시아 더 그레이트, 붙는 올드 프리츠 영감 . 의 누나가 여기로 시집을 가. Princess Wilhelmine of Prussia (Friederike Sophie Wilhelmine; 3 July 1709 – 14 October 1758) 프러시아 의 빌헬미네. 이 여자가 말하길, 저 아우구스투스 선제후겸 폴란드 킹 의 자식들이,
Some contemporary sources, including Wilhelmine of Bayreuth, claimed that Augustus had as many as 365 or 382 children. The number is extremely difficult to verify. Perhaps the number refers not to the king's children but to the nights that he spent with his mistresses. Augustus officially recognised only a tiny fraction of that number as his bastards (the mothers of these "chosen ones,"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Fatima,[b] were all aristocratic ladies):
365명 또는 382명 이란거지. 저 여자 포함 몇몇 동시대 쏘스 에 의하면. Augustus, a voracious womanizer, 버레이셔스 우머나이저. 음식을 게걸스레먹는걸 버레이셔스 라 하걸랑. 오직 고급귀족 의 여자 애인 에서만 낳은 자식을 배스타드 로 인정했다 고. 열명 정도. 이 중 유명한 이가 단 한명인데 프랑스 마샬 을 한 모리스. 이 사람이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의 증조 할아버지 야. 이 조르주 상드 가 당대 최고의 작가 야.
Amantine Lucile Aurore Dupin[1] (French: [amɑ̃tin lysil oʁɔʁ dypɛ̃]; 1 July 1804 – 8 June 1876), best known by her pen name George Sand (French: [ʒɔʁʒ sɑ̃d]), was a French novelist, memoirist, and journalist.[2][3] One of the most popular writers in Europe in her lifetime,[4] being more renowned than both Victor Hugo and Honoré de Balzac in England in the 1830s and 1840s
필명 조르주 상드, 가 빅토르 위고, 와 발자크 와 동갑 이여 거의. 한두살 차이여. 이여자가 당대에는 저 머스마들 보다 훨씬 유명했고, 이여자가 바로 쇼팽 의 애인 이야. 연상의 애인. 이 조르주 상드 의 책을 내가 아직 못봤는데, 언제 볼라나, 그래서 내가 먼 말을 몬해. 이여자껀. 영국에 조지 앨리엇 이 15년 정도 뒤에 태어나. 아 이 조지 앨리엇 껀 정말 너무 쎄.
웨스턴에선, 정자은행 에 몰몬교도 빼고, 이 인간이 자식이 최고 많아 저 말이 맞다면. 그런데, 저 시집간 여자가 거짓 말 할 수도 있는거고, 열받아서.
At the time, some questioned the legality of Augustus' elevation, since another candidate, François Louis, Prince of Conti, had received more votes. Each candidate, Conti and Augustus, was proclaimed as king by a different ecclesiastical authority: (the Primate Michaŀ Radziejowski proclaimed Conti and the bishop of Kujawy, Stanisław Dąmbski proclaimed Augustus, with Jacob Heinrich von Flemming swearing to the pacta conventa as Augustus's proxy). However, Augustus hurried to the Commonwealth with a Saxon army, while Conti stayed in France for two months
아우구스투스 가 폴란드 선거 에서 상대가 프랑스와 루이, 그랑콩데 의 조카 여. 콩티 의 프린스. 콩티 라 불러. 콩티 가 표를 더 받았어. 서로의 교구 에서 승리 를 선언하고, 아우구스투스 가 걍 지 군대 데리고 먼저 온겨. 콩티 가 두달 지나서 단치히 로 배타고 왔거든. 걍 돌아가. 얜 관시미가 없어 이 촌동네 킹 자리가 ㅋㅋㅋ. 태양왕 루이 때문에 억지로 온거거든.
François Louis de Bourbon, le Grand Conti (30 April 1664 – 22 February 1709),[1] was Prince de Conti, succeeding his brother, Louis Armand de Bourbon, in 1685. Until this date, he used the title of Prince of La Roche-sur-Yon. He was son of Armand de Bourbon, Prince of Conti and Anne Marie Martinozzi, daughter of Girolamo Martinozzi and niece of Cardinal Mazarin, through her mother.
부르봉의 프랑스와 루이, 그랑콩티. 아빠가 아르망 이고 엄마 쪽은 마자랭 피고. 아빠 아르망 이 그랑콩데 의 동생 이야. 뤽상부흐 가 삼촌뻘이고 할배급이고 같이 다니는거고. 9년전쟁 때 사령관 중 하나여. 전쟁 아주 잘해 그랑콩데 피를 받았어. 그랑콩데 가 protégé 프로티지, 후견인 이었어 아빠가 일찍 죽었거든. 부인이 그랑콩데 의 손녀 여.
The bride was passionately in love with her husband, but his attentions focused elsewhere. It was well known at court that he was in love with his wife's sister-in-law, Louise-Françoise de Bourbon, wife of Louis III, Prince of Condé, who was the eldest legitimated daughter of King Louis XIV and his mistress, Madame de Montespan.
부인이 신랑인 콩티 를 열정적으로 좋아해. 그런데 이 인간은 천하의 바람둥이야. 그래서 그랑 콩티 의 그랑 이야 얜. 얜 양성애자 야. 이때 빠진게, 자기 마누라 의 동생부인. 이 여자가 태양왕 루이 와 몽테스판 마담 의 딸이거든. 콩데의 루이3세 에게 간거고, 태양왕 루이 가 이 그랑콩데 와 찐한거야. 화해를 하고. 그런데 그랑콩데 의 손자 보다는 조카 인 콩티 가 더 탁월해. 인물도 좋고.
태양왕 루이 가, 콩티 에게 9년 전쟁 의 성과 로, 챙겨줄려고, 폴란드 킹 자리를 밀어주고 얘가 다득표로 된겨. 그런데 이 인간은, 자기 애인 인 태양왕의 딸 때문에 미루는거고, 그러다 두달만에 갔는데, 벌써 작센 애가 킹을 한대. 걍 오고, 태양왕은 또 좀 미안한겨 이게. 나중에 폴란드 승계전쟁 때 이인간이 사령도 해.
Louis de Bourbon, Légitimé de France, Count of Vermandois (2 October 1667 – 18 November 1683) was the eldest surviving son of Louis XIV of France and his mistress Louise de La Vallière
루이 14세 의 장남 그랑도팽 이 50세에 죽어 1711년. 손자 루이15세 가 잇는거고,
루이 14세 의 배스타드 아들들 중에 유년기를 벗어나는 애들이 극히 드물어. 이중 제일 큰 애가, 베흐먼드와 백작 루이. 그랑도팽 보다 6세 어려. 16세 에 죽는데, 애인 발리에 에서 나왔는데.
While he was at the court of his libertine uncle, he met the Chevalier de Lorraine, his uncle's most famous lover. The young count got involved with the older chevalier and his set (including the Prince of Conti), joining a secret group of young aristocrats[3] called, "La Sainte Congregation des Glorieux Pédérastes" (The Holy Fraternity of Glorious Pederasts) and practicing le vice italien (the contemporary appellation for sodomy).
베흐몬드와 의 루이 는, 태양왕 루이의 동생 필립 코트에서 살았는데, 이 필립 도 호모 고, 얘 애인이 세발리어 드 로렌. 이야. 루이 보다 20년 이상 아빠뻘이고. 그런데 이 어린 루이 가 저 세발리에 랑, 저짝 콩티 랑 연애 로 엮이는겨 호모천국 . 피디라스트, 어린애성애 여. 영광스런 어린애사랑의 신성한 모임. 파이스 에라스테스. 고대그리스 때 부터의 이 컬쳐가 이때 코트에 있는겨 이 태양왕 루이때. 르 비시 이탈리앙. 사악한 이태리 짓.을 했다. 쏘도미, 소돔 과 고모라 의 소돔 이야 성적타락짓. 인터코스 성교 의 비유야. 소도미 를 애 데리고 한겨 서로.
In June 1682, Louis was exiled to Normandy. In order to smooth things over between father and son, his aunt Eliz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suggested to the king that Louis be sent as a soldier to Flanders,
저짓들이 들키고, 다 쫓아내고, 어린 아이는 루이14세한테 걍 끔찍하게 혼이 났나봐, 쫓아내고 얘는 플랑드르 의 군인으로 보내지다. 저때 리유니온 전쟁 즈음 같고. 여기서 얘가 죽어. 병들어서.
His loving sister and aunt were greatly impacted by his death. His father, however, did not even shed a tear. His mother, still obsessed with the sin of her previous affair with the king, said upon hearing of her son's death:
I ought to weep for his birth far more than his death.[4]
Louis was later suspected of being the Man in the Iron Mask but this could not be true as he died in 1683, while the man in the iron mask died in 1703.
죽음에 누이들과 숙모는 굉장히 충격받았는데, 생부 인 태양왕은 한방울 눈물도 안흘리다. 그의 엄마는, 킹과의 연애로 낳은 죄로 죄의식이 있었는데, 아들의 죽음소식을 듣고는, 나는 그의 죽음보다 더 많이 태어날때 눈물 흘렸다.
루이가, 아이언마스크 맨 이 피네롤로 에 있다는 게 로장 에 의해서 실제로 드러나거든. 이 어린 루이 로 다들 생각했어. 저때 호모짓 했다고. 그런데 일찍 죽어서 사실이 아니다. 철가면은 1703년에 죽었다. 이 철가면이 누군지 몰라 여전히.
여하튼 그래서, 저놈의 아우구스투스 2세 선제후 가 폴란드 킹이 되는데.
폴란드 코트 도 관심이 없어 스위든 공격하는게. 표트르 도 관심이 원래 없어.
그런데 이 아우구스투스 가 체격도 좋고 한게, 대갈빡이 꼴통인듯. 버레이셔스 하게 허리아래만 신경쓰이고, 얘는 킹 이란 이름이 좋은겨. 선제후 란 것 보다. 더하여, 대단한 먼가를 하고 픈겨 저 슬라브 애들 땅에 가서. 땅을 졸 커다랗게 맹글고 싶고, 리보니아 갖고 오고 머 러시아 랑 나눠서 스위든 제국을 먹고 싶을라나. 능력은 전혀 없어. 작센 애들도 쟬 안좋아해 카톨릭으로 바꾼 애가 좋을리가 없어. 폴란드 는 셰임 애들의 땅이고, 킹 은 지들 꼭두각시 여야 해.
이 작센 인간이, 셰임과의 권력 쟁탈 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거고, 킹 의 이름으로 그래서 거대한 땅을 갖고 싶은, 정말 단순 무식한 이유 단 하나야. 더하여 그래서 애인들만 여자들만 더 얻고 싶은거고. 정말 유럽 역사 보면서, 가장 한심한 애야 이 작센 선제후 의 폴란드 킹 아우구스투스 는. 그리고 모든 판세는 칼12세 가 다 쥐었어. 바르샤바 에 크라크푸 까지 먹고, 작센 까지 쳐들어가. 쟤는 도망가고.
그리고서 칼12세 가 모스크바 로 향하는겨.
The Battle of Poltava[e] (8 July 1709)[f] was the decisive victory of Peter the Great (Peter I of Russia) over the Swedish Empire forces under Field Marshal Carl Gustav Rehnskiöld, in one of the battles of the Great Northern War.
1709년 7월 폴타바 전투. 9년동안 칼12세 를 아무도 못건드려. 폴타바 가 드네프르 강 건너서 여 우크라이나 땅의. 칼12세 가 여기서 패하면서, 전세가 완벽하게 바뀐거야. 저때도 표트르는 경황이 없었어. 그런데 이 표트르 가 십년전 에 구경했고 관찰했던 서유럽 애들의 건축 기술 을 익힌겨. 보방 과 메노 의 도시설계 군사 기지 를. 우연으로 이긴게 아냐 이건.
저 전투 하나로, 칼12세 가 오스만쪽으로 도망가고, 표트르 의 러시아 시대가 개막이 되는겨.
칼12세 는 오스만 에서 계속 러시아 쳐라 해대며 킹 대접 잘 받다가, 열받은 오스만 애들이 더이상 은 못받아줘서 전투하면서 쫓아낸겨,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아서 스위든으로 돌아온거고 칼12세는.
Ivan Stepanovych Mazepa (also spelled Mazeppa; 1639 – 1709)[2] served as the Hetman of Zaporizhian Host in 1687–1708. He was awarded a title of Prince of the Holy Roman Empire in 1707 for his efforts for the Holy League.[3] The historical events of Mazepa's life have inspired many literary, artistic and musical works. He was famous as a patron of the arts.
이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말이지, 이반 마제파, 라는 코사크 야. 자포리지안 코사크 가 드네프르강 동쪽에 흐멜니츠키 부터 러시아 와 동맹이거든, 코사크 가 불리하면 러시아 가 와줘야 해. 스위든이 치러 오는데, 러시아 표트르 가 니 혼자 해결하래 자기 병력 없다고. 조약 위반이야. 더하여 표트르 와 사이가 안좋아 이 마제파 가. 마제파 가 학교다니고 배운 인간이야. 자기 코사크 에 문학 예술 음악 을 전파해. 코사크 르네상스여 이 인간이. 코사크 라는게 러시아 의 총알받이 를 하면서 존재를 부각시켜왔어 흐멜니츠키 부터. 적극적으로 러시아 의 전쟁에 참여해서 자기 소리 와 지분을 늘리자며. 무기 도 최악 갑옷 도 없어 코사크 는. 그야말로 야만 의 야만, 시대에 가장 뒤쳐진겨. 러시아 보다 못해. 폴란드 에 스위든 에 아래 오스만 대항 싸울때도 가장 앞에서 당해. 잔인할 수 밖에 없는게 그래서 코사크고 한편으로는 가장 전투력 최고여. 코사크 라는게 이때부터, 본능적인 살아남기 하는겨 이게. 이게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 때 빛이 나는거야. 나폴레옹 의 몰락은 말이지, 코사크 여. 톨스토이 가 전쟁과 평화 쓰면서 가장 신날때가 코사크 의 나폴레옹 후장 공격 장면이걸랑. 나폴레옹 은 저 코사크 로 망한겨.
할때 코사크 는 흐멜니츠키 부터 150년 을 저렇게 버틴겨 . 엄청난 거야. 저 코사크 의 저력 이란건, 저력인지 아닌지 몰겄는데, 아무것도 없는 애들이 살아남아야 하고 자기 소리는 내야했고. 저게 나폴레옹을 조진거고, 저 코사크 가 러일전쟁 때 만주 벌판에서 일본애들과 싸우는겨 ㅋㅋㅋ. 저런 코사크 를 일본애들 의 당나귀 수준의 기병대가 저 코사크 를 이기는겨. 골때리는 역사여 이게.
할때, 마제파 가 저때 스위든 으로 돌아서. 스위든과 손잡고, 러시아 를 적으로 싸워. 스위든 은 자기들 독립 시켜준다며.
저때 하필 , 칼12세가 유일하게 지는겨 저 전투에서. ㅋㅋㅋ. 코사크 우크라이나 에게는 가장 아픈 장면이야 저건.
내가 보다가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저 마제파 야. 아무도 모르는
DUMA(translation by Dimitri Horbay in the newspaper Svoboda 22 March 1958)[30]
While all for peace sincerely preach,
Not all in one direction reach.
Some right, and some left do range,
Yet all are brothers, how very strange.
There is no love, nor does harmony rank
Since we quenched our thirst at the Zhovti's bank.
Through disagreement, non-are saved.
By our own endeavor have we become enslaved.
Aye, brothers, 'tis time to see
That we all cannot masters be!
Not all are grace with knowledge wide
Enough, to over all preside.
아 이사람 시 참 짠하고 찐해.
모두들 평화를 위해 진지하게들 말하는데
아무도 한방향으로는 닿지 않아
누구는 오른쪽 누구는 왼쪽으로 하자고 해
그러나 모두는 형제들이야, 참 이상하지
거기는 러브도 없어, 조화도 자리잡지 않지
우리가 조브티 뱅크 에서 승리하면서 우리의 갈증을 끝낸이후로.
의견불일치 만 나고, 아무도 구원되지 않아.
우리의 노력과 열정에 의해, 우리는 노예가 되어버렸네
어이, 형제들아, 알아 둘 시간이야
우리는 모두가 주인들이 될 수 없다는 걸!
아무도 영광스럽지 않아, 지식을 넓게 갖고
충분히, 모두를 주재하기엔.
.
.
아 좀 진지하게 대북방전쟁 할라다가, 너무 샜어. 대충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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