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the Great (Russian: Пётр Вели́кий, tr. Pyotr Velikiy, IPA: [ˈpʲɵtr vʲɪˈlʲikʲɪj]), Peter I (Russian: Пётр Первый, tr. Pyotr Pyerviy, IPA: [ˈpʲɵtr ˈpʲɛrvɨj]) or Pyotr Alekseevich (Russian: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IPA: [ˈpʲɵtr ɐlʲɪˈksʲejɪvʲɪtɕ]; 9 June [O.S. 30 May] 1672 – 8 February [O.S. 28 January] 1725)[b] ruled the Tsardom of Russia and later the Russian Empire from 7 May [O.S. 27 April] 1682 until his death in 1725, jointly ruling before 1696 with his elder half-brother, Ivan V.
표트르 벨리키. 벨리키 라며 그레이트 호칭을 써준건데. 성은 알렉세이비치 야. 아빠 이름 따서. 1672-1725. 53세 에 죽고. 차르 에 1682, 10세에 오르고, 이복형제 이반5세 와 같이하다가, 섭정은 이복 누나 여. 1689 년에 끝나 이 누나의 섭정이. 17세.
이 표트르 이야기가 참 재밌어. 의외로 말이야, 저 슬라브 애들 이야기가 참 재밌어 이게. 망한 애들이. 망한 애들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재미 없고, 이야기 자체도 없는게 또한 이 조선 오백년 역사고.
Alexei Mikhailovich (Russian: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1629 – 1676) was the Tsar of Russia from 1645 until his death in 1676.[2] His reign saw wars with Poland and Sweden, schism in the Russian Orthodox Church, and the major Cossack revolt of Stenka Razin.[2] Nevertheless, at the time of his death Russia spanned almost 2,000,000,000 acres (8,100,000 km2).
아빠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로마노프 시작 미하일1세 가 30년 하고, 다음이야. 16세 1645 에 올라서, 역시 30년 하고, 죽어. 앞에서 이렇게 좀 오래 잡아서 다져 줘야 해. 알렉세이 때 스텐카 라진 봉기 가 있었고. 이전 썰
차르 의 부인이, 차리나, 차리차 라고 해. 라틴어발음 엠퍼러 리스 도 쓰고.
Maria Ilyinichna Miloslavskaya (Russian: Мария Ильинична Милославская, 1 April 1624 – 1669)
첫부인이 밀로슬라브스카야.
Sophia Alekseyevna (Russian: Со́фья Алексе́евна, 1657 – 1704) ruled as regent of Russia from 1682 to 1689.
Feodor III Alexeyevich (in Russian: Фёдор III Алексеевич) or Fyodor III Alekseevich (9 June 1661 – 7 May 1682) was the Tsar of Russia between 1676 and 1682.
Ivan V Alekseyevich (Russian: Иван V Алексеевич, 6 September [O.S. 27 August] 1666 – 8 February [O.S. 29 January] 1696)
밀로슬라브스카야 에서 딸 소피아, 아들 표도르3세, 이반5세.
Natalya Kirillovna Naryshkina (Russian: Ната́лья Кири́лловна Нары́шкина; 1 September 1651 – 4 February 1694)
두번째 차리나 가 나리시키나. 여기사 나온게 표트르. 1672년생. 배다른 누나 소피아 가 1657년생 이야. .
소피아 가 엄마 나리시키나 보다 6년 어려. 차르 알렉세이 가 딸뻘이랑 낳은거고. 표트르 보다도 15년 누나여.
1676년에 알렉세이1세 가 죽어. 표도르3세 가 15세 에 차르 가 돼. 6년후 1682에 21세 로 죽어. 첫결혼여자는 애낳고 죽고 애도죽고. 두번째 결혼식때는 서있지도 못했대 너무 몸이 약해서. 바로 죽어.
1682년. 다음 짜르 가, 이반5세 인데, 1666년생. 16세 여. 배다른 동생 표트르 는 10세. 이걸 섭정을, 이반5세의 누나 소피아 가 하는겨. 25세. 코트 의 권력 보야르 가 민거지. 유부남인데 연애를 했니 마니 하는거고. 소피아 는 결혼을 안해.
이반5세 가 죽은 형 표도르 3세 닮아서 몸이 약해. 소피아 만 괄괄해. 회의 할때 배다른 형제 둘이 붙어 앉고, 그 뒤에 구멍을 뚫어서 소피아 가 들으면서 차르 동생들에게 지시를 내리는겨. 소피아 가 실세여.
소피아 의 세력 이 군부 야.
Streltsy (Russian: стрельцы́, IPA: [strʲɪlʲˈt͡sɨ], lit. 'shooters'; sg. стреле́ц IPA: [strʲɪˈlʲet͡s]) were the units of Russian firearm infantry from the 16th to the early 18th centuries and also a social stratum, from which personnel for Streltsy troops were traditionally recruited. They are also collectively known as streletskoye voysko (стрелецкое войско). These infantry troops reinforced feudal levy horsemen or pomestnoye voysko (поместное войско).
스트릴치. 16세기에서 18세기초 러시아 의 총기부대 여. 아키버스 생기고, 이반4세 가 만든 보병부대고, 오직 직업군인이고 세습이고, 이게 2백여년 가는겨. 표트르 가 결국 다 없애. 기병대 를 포메스토예 보이스코. 보이스코 가 아미 군대고, 땅가진 지주 의 기병대여. 얘들이 권력 기반이고, 소피아 가 얘들 동의 를 받은거야. 그래서 섭정을 하는겨.
1689년. 7년 이 지났어. 이반5세 는 병약한거고, 17세 가 된 표트르 가 꼭두각시 노릇이 싫은겨. 소피아 는 차리나 를 하려 해 스스로. 표트르 가 벗어나려고 하고. 소피아 가 눈치를 채.
Sophia conspired with some leaders of the Streltsy, who continually aroused disorder and dissent. Peter, warned by others from the Streltsy, escaped in the middle of the night to the impenetrable monastery of Troitse-Sergiyeva Lavra; there he slowly gathered adherents who perceived he would win the power struggle. Sophia was eventually overthrown, with Peter I and Ivan V continuing to act as co-tsars. Peter forced Sophia to enter a convent, where she gave up her name and her position as a member of the royal family
소피아 가 스트릴치 의 리더 들과 함께 권력이 된거고, 표트르 를 아예 내치려는거지. 표트르 가 스트릴치 의 다른 세력들에게 경고를 받고 탈출을 해. 모스크바 근처 수도원 으로. 여기서 세력을 모아서, 소피아 에 대든거야. 소피아 가 물러나고, 표트르 는 이반5세 와 같이 차르를 계속 해 섭정을 치우고. 소피아 는 수도원으로 가기로 한거고. 그러다가, 나중에
The Streltsy uprising of 1698 (Russian: Стрелецкий бунт 1698 года) was an uprising of the Moscow Streltsy regiments.
10년 다 되서, 1698년 에, 스트릴치 봉기, 표트르 가 요때 18개월을 서유럽 여행 을 몰래 해. 1697년 3월 초에서 1698년 8월 말 까지. 25세에. 이반 5세 가 죽고서 바로 출발한겨. 이때 신분숨기고 선박공장 가서 배만드는거 배우고, 어릴때 부터 기계를 좋아했거든, 쟤들 꺼에 완전히 눈돌아간겨. 오렌지 윌리엄 따라서 잉글랜드 도 가. 이 인간은 이 활력으로, 대북방전쟁 을 바로 한거고, 이 힘으로 이긴겨. 이 힘으로 근대 러시아 를 만든거고.
할때, 표트르 가 없을대, 모스크바 의 스트릴치 들이 봉기 를 일으켜. 이 전에, 대투르크전쟁 1683-99 때, 러시아 가 뒤에 들어오는거고, 러시아 는 흑해 진출이 꿈이야. 이반 4세 가 시베리아 개척에 아래 카스피해 에 서쪽으로 도 뻗을때 오스만이랑 처음 부딪히고 이때부터 흑해 진출이 꿈이야. 소피아 섭정때도 아조프 실패 하고, 표트르 가 직접 캠페인 가서도 실패를 해. 그리고 스트릴치 애들을 떨궈놓고 모스크바 혼자 왔다가 서유럽 놀러간겨. 일백여명 의 스트릴치 들이 남아서 아무것도 못하고, 거지가 되어서 겨우 모스크바 로 오고, 표트르 는 없어, 항의를 해. 들어주는 사람 없어.
수도원에 있는 소피아 를 찾아가는겨.
그리고, 이들이 이삼천명 모여서, 봉기 를 하는거야. 이게 여름이고, 일차 진압되고, 바로 표트르 가 귀국 을 한거야. 스트릴치 들은 소피아 를 차리나 로 세우려 한거였고.
As a result of a major investigation, 57 Streltsy were executed and the rest sent into exile. Upon his hurried return from London on 25 August 1698, Peter I ordered another investigation. Between September 1698 and February 1699, 1,182 Streltsy were executed and 601 were whipped, branded with iron, or (mostly the young ones) sent into exile. The investigation and executions continued up until 1707. The Moscow regiments, which had not participated in the uprising, were later disbanded. Streltsy and their family members were removed from Moscow.
57명을 사형시키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이때부터 보낸겨 시베리아 유형지는. 그리고 표트르 가 돌아왔어. 재수사 를 지시하고, 1182명 을 사형시키고, 601명은 채찍형, 낙인형, 유배형. 이게 서기 1707년 까지 계속 되었다. 스트릴치 가 이때 해산이 된겨. 기병대 도 함께. 저때 시체들을 얘가 소피아 의 창문에 걸어놓게 해. 소피아 는 더 격리시키고 곧 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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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와 표도르 는 전혀 달라. 얘의 배다른 형 표도르3세 는
θεός (theós, “god”) + δῶρον (dôron, “gift”) . 표도르 라는게, 떼오스 도론. 영어 띠어도어 Theodore 의 러시안 이야. 신의 선물 이 표도르 이고, 표트르 는 베드로 피터 고.
The Grand Embassy (Russian: Вели́кое посо́льство, romanized: Velíkoye posól'stvo) was a Russian diplomatic mission to Western Europe from March 9, 1697 to August 25, 1698 led by Peter the Great.
표트르 가 25세에, 공동차르 이반5세가 죽고 바로 출발한게, 그랜드 엠버씨. 대규모 파견단 이야. 엠버씨 라는게 프랜취의 미션 보내는겨. 여기서 나온게 앰베서더 고. 여기에 얘가 신분 위장 하고 들어간거야. 얘가 키가 2미터 야. 203센치. 그런데 얇아. 키큰게 삐쩍 말라보이는겨. 잘 안숨겨지는겨 개성이. 워낙 커서.
목적은, 대투르크전쟁 때 홀리리그 에 러시아 가 들어가면서, 중원에 처음 등장하는겨 이 촌놈들이. 명목은 이 홀리리그 강화 여. 러시아 의 최대 적은 오스만이고, 당연히 프랑스 는 안 가.
Officially, the Grand Embassy was headed by the "grand ambassadors" Franz Lefort, Fedor Golovin and Prokopy Voznitsyn. In fact, it was led by Peter himself, who went along incognito under the name of Peter Mikhailov. At 6 feet 8 inches (2.03 m) Peter was one of the tallest men in Europe, a fact very hard to disguise.
Peter conducted negotiations with Friedrich Casimir Kettler, the Duke of Courland, and concluded an alliance with King Frederick I of Prussia. He arrived in the Dutch Republic at the start of August 1697, where he worked incognito as a shipbuilder.
공식적으로, 러시아 코트 의 정치 군사 참모들 이고, 가명으로 피터 미하일로프. 표트르 가 주도 하는거고. 쿠를란트 젬갈리아 공작 은 리투아니아 리가 지역이고, 여기 공작이, 프러시아 아직 킹은 아니지 저때는. 저 공작이 프러시아 킹될 쪽과 사돈이거든. 여기서 나오는 공작 이, 표트르 의 조카, 즉 배다른 형 이반5세 의 딸 안나 와 결혼을해. 이 안나 도 차리나 를 하고. 안나 다음에 안나의 언니 핏줄이 차르 하다가, 표트르 의 딸 엘리자베타 에게 쫓겨나는겨. 그리곤 표트르 핏줄들이 차르 를 끝까지 하는거고.
where he visited, among others, the upper-class de Wilde family. Jacob de Wilde, a collector-general with the Admiralty of Amsterdam, had a well-known collection of art and coins,
암스테르담 에서 야콥 더 빌더 집에서 잤는데, 암스테르담 애드머럴티 의 세금징수 짱 인거고, 동전과 예술품 수집가 겸하고, 이사람 집이 그래서 지금 박물관 이고. 여기서 자기도 컬렉션을 구입했다는거고.
Thanks to the mediation of Nicolaes Witsen, mayor of Amsterdam and expert on Russia, the Tsar was given the opportunity to gain practical experience in the largest shipyard in the world, belonging to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for a period of four months. The Tsar helped with the construction of an East Indiaman ship especially laid down for him: Peter and Paul. During his stay the Tsar engaged many skilled workers such as builders of locks, fortresses, shipwrights, and seamen—including Cornelis Cruys, a vice-admiral who became, under Franz Lefort, the Tsar's advisor in maritime affairs. Peter later put his knowledge of shipbuilding to use in helping build Russia's navy.[19] Peter paid a visit to surgeon Frederik Ruysch, who taught him how to draw teeth and catch butterflies, and to Ludolf Bakhuysen, a painter of seascapes. Jan van der Heyden, the inventor of the fire hose, received Peter, who was keen to learn and pass on his knowledge to his countrymen. On 16 January 1698 Peter organized a farewell party and invited Johan Huydecoper van Maarsseveen, who had to sit between Lefort and the Tsar and drink
니콜라스 빗센. 암스테르담 시장에 러시아 전문가, 덕으로, 세계 최고의 선박 야드 를 경험하다, 더치 동인도 회사 소속, 네달 머물러. 이스트 인디아맨 이라는 선박유형의 선박제조에 참여. 이 배 이름을 피터 와 폴 로 명명했대. 여기서 차르는 많은 기술직 일꾼들, 로크, 요새 건설자들, 조선공들, 선원들, 과 친해지고, 코르넬리스 크루이스 는 부제독 인데, 뒤에 러시아 함대 제독 되고, 나중에 러시아 해군 지을때 자기의 선박 제조 지식을 제공하다 여기서 배웠던. 의사 프레데릭 라우시 를 방문해서 이빨 그리기, 나비 채집을 배우다. 루돌프 바크하우젠 화가, 얀판 데어 하이덴, 화가이자 불호스 발명가, 도 표트르를 맞았고, 그는 주의깊게 배웠고, 자기가 배운 것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이별파티 를 주최하고 판마르세페인 은 레포르트 와 차르 사이에 앉아서 마셔야 했다.
Cornelius Cruys (Norwegian: Niels Creutz, Russian: Корнелий Крюйс; 14 June 1655 – 14 June 1727) was a Norwegian–Dutch admiral of the Imperial Russian Navy, and the first commander of the Russian Baltic Fleet.
저때, 만난 부제독 이 러시아로 와서, 발틱함대 첫 제독이 되고, 이사람이 바로 대북방전쟁 때 투입되서 발틱해 에서 스위든 에 맞서는거고, 아조브해 도 나중 챙기고.
저때의 의사는 해부학자에 동식물학자고, 화가 등 모두 네덜란드 의 최고 인물들이고, 당시 네덜란드가 최고 니 당연히 세계에서 최고 고.
In England, Peter met with King William III, visited Greenwich and Oxford, posed for Sir Godfrey Kneller, and saw a Royal Navy Fleet Review at Deptford. He studied the English techniques of city-building he would later use to great effect at Saint Petersburg.[21] When he left he gave the singer, and his mistress, Letitia Cross £500 to thank her for her hospitality. Cross said it was not enough.[22] The Embassy next went to Leipzig, Dresden, Prague and Vienna. He spoke with Augustus II the Strong and Leopold I, Holy Roman Emperor
네덜란드에서 오렌지 윌리엄 만나고, 같이 그린위치 옥스포드 로 가 잉글ㄹ내드의. 그리고 로얄 네이비 도 구경 해. 도시 건설 기술들을 공부하다. 나중 생트페테르부르크 를 설계할때 사용하다. 리티샤 크로스, 배우이자 가수. 스물이 안돼. 이때 애인. 오백파운드를 주다 환대해줬다고. 크로스 는 말했다 그걸로 충분치 않은데. 표트르는 너무 많이 줬다고 하고, 이 여잔 또 다음 프랑스 갈땐 다른 배로넷 끼고 갔대. 다음엔 라이프치히, 드레스텐 프라하 비엔나 로 돌고, 작센 에 폴란드 킹 인 아우구스투스 와, 레오폴트1세 황제 도 만나서 이야기 하다.
그리고 와서, 스트릴치 봉기 재조사 하고, 혹독하게 벌하고. 그리고서, 대북방 전쟁 을 한거야.
Peter implemented social modernization in an absolute manner by introducing French and western dress to his court and requiring courtiers, state officials, and the military to shave their beards and adopt modern clothing styles.[12] One means of achieving this end was the introduction of taxes for long beards and robes in September 1698.
돌아와서, 서유럽 스타일 로 개조 하는겨. 사회 의 모더나이제이션.
모던 modern 이란건, modo 모도, 져스트 나우. 바로 지금 이란 라틴어여. 이게 프랜치로 가서 모던 이 된겨 모데르누스 라는 라틴어를 새로 만들고. 모더나이제이션, 근대화 라는게 아니라, 지금 시대 에 좇아 따라 감 이란 뜻이야. 근대화 니 현대화 니 가 아니고.
모든게 다 너무 뒤쳐진거야. 프랑스 는 못갔지만, 서유럽은 프랑스 가 최고여 문화는. 프랑스 가 알프스 넘어가서 다 퍼나른겨. 이전 카이사르 부터의 로마 에 더해서. 모든걸 다 바꿔. 자기 코트 를 아예 바꿔. 코티어, 코트인간들에, 공무원들, 군바리들. 모두 턱수염들 깎아라. 웨스턴 식 옷 입어라.
턱수염 세금 도입. 외투세 도입. 오자마자 바로 한겨 9월에. 8월에 와서. 턱수염 안깎으면, 일년마다 몇십루블 돈을 내야해. 계급별로 또 세금이 달라.
상투 를 짜르라니! ㅋㅋㅋㅋ 아 우리나라 이 이름도 정말 후진겨 이게.
민족정기 야 상투가 ㅋㅋㅋ. 아마 다시 상투 틀어라, 도포자락 입어라, 할꺼야 분명. 역사 왜곡방지법 한다미, 지들 이념에 반하면 깜빵 칠년이고, 지들 이 규정한 역사 외의 말을 하면 왜곡 한겨. 아마 곧, 조선 왕조 찬양 안하면 조지기 법. 도포자락 입히기법. 상투틀기법. 하루 세번 조선 만세법. 벼라별 법들이 나올거야 ㅋㅋㅋ
In his process to westernize Russia, he wanted members of his family to marry other European royalty. In the past, his ancestors had been snubbed at the idea, but now, it was proving fruitful. He negotiated with Frederick William, Duke of Courland to marry his niece, Anna Ivanovna. He used the wedding in order to launch his new capital, St Petersburg, where he had already ordered building projects of westernized palaces and buildings. Peter hired Italian and German architects to design it
특히 이사람이 한게, 서유럽 인간들과 의 결혼 이야. 과거엔 이런 말하면 비웃음 당했어, 우리 슬라브 가 감히 게르만이랑 결혼이라니. 쿠를란트 젬갈리아 공작 프레데릭 빌헬름.과 자기 조카 안나, 랑 결혼시켜. 안나 는 뒤에 차리나 가 돼. 저 공작은 엄마가 프러시아 위대한 프레데릭 의 딸이고 오래비가 킹이야. 표트르 가 만든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드로의 도시. 에서 결혼식을 이용해서, 건물들을 서유럽화 해서, 이탈리안 게르만 설계사들보고 디자인하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강력히 심어.
야 난 아직 그 토지 가 생각나. 조선 여자가 일본애 랑 결혼을 해야 하나? ㅋㅋㅋ. 이게 저 여자 의 고민이야 저 작가의. 늙어서도 민족주의 가 왜 나빠유? 민족주의 는 후진 니덜 조선 모두 를 악랄하게 살해 당하게 하는 이념 이라서, 나빠 이 개미게한 종족의 여자야. 역사 를 배워라. 저런 여자 의 이름으로 뭔놈의 세계상을 주는 나라.
이 땅은, 학자 소설가 가, 걍 살인 기계 여. 대규모 학살 기계. 의 배후 야 쟤들이.
그러면서 지들이 정의래 ㅋㅋㅋ. 지들이 지선 이래.
이당시 인간들 보면 참 짱짱한데, 머 이당시 뿐이겠냐마는. 아 가장 후진게 저 작센 선제후 에 폴란드 킹 된 아우구스투스.
Frederick IV (Danish: Frederik; 11 October 1671 – 12 October 1730) was the king of Denmark and Norway from 1699 until his death. Frederick was the son of Christian V of Denmark-Norway and his consort Charlotte Amalie of Hesse-Kassel.
덴마크 킹 프레데릭4세. 이사람은 원래 킹 될 생각이 없는거지. 형이 있었걸랑. 그런데, 형이 병으로 죽은겨. 1699년 18세 에 킹이 돼. 결혼 도 하고픈 여자랑 하라고 했거든, 이것도 안된거지 형수될 뻔한 여자랑 한걸..꺼야.
As crown prince, Frederick broadened his education by travelling in Europe, led by his chamberlain Ditlev Wibe. He was particularly impressed by the architecture in Italy and, on his return to Denmark, asked his father, Christian V, for permission to build a summer palace
얜, 걍 왕실 집사 따라서, 유럽 여행 하면서 돌아다닌겨. 이탈리아 가서 인상 졸 받았다는거고. 돌아오는길에 아빠한테 나 여름별장 지어줘. 아 얼매나 팔자 편하냐고.
Frederick was allowed to choose his future wife from a number of Protestant royal daughters in northern Germany. In 1695, he visited the court of Gustav-Adolph in Güstrow. But his visit there was cut short by a message telling of his brother Christian's serious illness (he had, in fact, already died in Ulm). Frederick later returned to Güstrow, where he was forced to choose the eldest of the unmarried princesses
원래, 독일북부에서 여러 프로테스탄트 의 여자들 중에서 자기 부인을 선택하는걸 허락받았는데, 퀴스트로 에 메클렌부르크 공작 에 놀러 갔다가 바로 온겨 자기 형 죽었다고. 나중에 여기 다시 와야했대, 결혼해야 할 여자가, 귀스토르 에 있는 원래 형이 결혼하기로 했던 여자 였걸랑.
Frederick IV holds a memorable place in the social history of the city of Venice for a visit he made during the winter of 1708–09, the king stayed in city with an entourage of at least 70 people, formally incognito as Count of Oldenburg, not to be unknown, but to get rid of the cumbersome and more costly etiquette that belonged to a king's conduct. While the nine weeks stay lasted, the king was a frequent guest on operas and comedies and a generous buyer of Venetian glass. During the visit to the state armory, he received the republic's upscale gift: two large ore guns and an ore mortar. A regatta on the Grand Canal was held in his honour and is immortalized in a painting by Luca Carlevarijs. The winter that season was particularly cold, so cold that the lagoon of Venice froze over, and the Venetians were able to walk from the city to the mainland. It was joked that the king of Denmark had brought the cold weather with him. He also paid a visit to the dowager grand-princess Violante at the grand-ducal court of the Medicis.
프레데릭 4세 킹이, 베네치아 에 또 가. 1708년 겨울 에. 어릴때 가본 곳을 다시 간겨. 이때가 대북방전쟁 한창 일때고, 덴마크 는 초반에 스위든 에 게겼다가 아주 호온났걸랑. 시작하자 마자 얘들은 빠진겨. 러시아 와 폴란드 가 상대할 뿐인거고. 요 와중에 얜 베네치아 다시 간겨 놀러. 최소 70명의 수행단과 함께 이름은 숨기고, 올덴부르크 공작 이라며 있던거고, 결국 뽀록은 났지만, 킹의 코트에 무겁고 비싼 에티켓은 버렸다. 9주 동안 머물다. 킹은 오페라들 코메디들에 자주 보러 갔고, 베네치아 유리 의 주요 고객. 베네치아 병기고 갔다가 선물을 받았다. 오어건 오어모타르. 건 은 대포 고, 모타르 는 휴대용대포여. 오어 라는게, 탄알이 철탄 이란겨 저게. 철덩어리야. 탄 안에 화약을 넣어서 탄 자체가 터지는게 아냐 저때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베네치아 그랜드 운하 에서 레가타 보트경주 를 하고, 화가 루카 갈리브리스 가 그림을 남기다. 모두 베네치아 공화국 에서 해준거고. 그해 겨울은 특히 추워서 베네치아 의 석호 가 전체 얼어서 도시에서 걸어 들어갈수 있었다. 덴마크 킹이 추위를 함께 데려왔다 라는 농담이 있었고. 또한 메디치 의 대공작 코트 의 비올란테 도 방문했었다.
쟤들은 전쟁 중에도 저리 놀아.
표트르 가 서유럽 돌땐, 스페인 후계자 전쟁 이 곧 터질 분위길 알아. 모두 전쟁 준비 하거든. 그래도 저리 돌아다녀.
조선 오백년 역사를 보라고. 다른 나라 라는게 있나. 외교 라는게 있나. 일본들만 정말 열심인겨. 단 하나 있는 조선 아 부디 좀 와라. 조선 들은 일본애들 왜 안불렀지? 왜? 왜놈들한테 볼게 머가 있을거며 미개한 식인종들이 멀 알겠으며, 혹시나 오면서 길 익혀서 나중에 쳐들어오면 어째 ㅋㅋㅋ. 중국애들 사신들 오면 킹이 대가리 박으면서 춤추면서 황제 서신 들어야 하고, 사신들 접대부 로 잠자리 시중 들어줘야 하고. 이 조선들은. 이건 이건. 대체 뭔놈의 집단이냐고 이게
위대한 조선이여~~~ ㅋㅋㅋ.
Frederick's most important domestic reform was the abolition in 1702 of the so-called vornedskab, a kind of serfdom which had fallen on the peasants of Zealand in the Late Middle Ages. His efforts were largely in vain because of the introduction in 1733 of adscription (stavnsbånd), a law that forced peasants to remain in their home regions, and by which the peasantry was subjected to both the local nobility and the army
이 덴마크 가, 프레데릭4세 가 어릴때 도 돌아다녀봐서, 자기 나라가 너무나 쳐진걸 알아. 표트르 랑 똑같은겨 이 문제 인식이. 농노제 를 폐지 하려해. 서기 1702. 보네스갭. 이게 실패하고, 그외 극장 에 대학 도 세우기도 하고. 그래도 이사람부터 좀 꿈틀대기 시작하는겨 덴마크 는. 이 대북방 전쟁 와중에.
The Landing at Humlebæk took place on August 4, 1700, in the Swedish invasion of Denmark during the Great Northern War 1700-1721. It was the first offensive during the war by the Swedish army, and it was directly led by Charles XII of Sweden commanding the right flank and Arvid Horn together with Carl Gustav Rehnskiöld at the left. The Swedes were victorious and utterly routed the Danish forces led by Jens Rostgaard.
룸레백 착륙. 서기 1700년 8월 4일. 덴마크 가 시작을 알리는겨 대북방전쟁 1700-21 을. 덴마크 는 거의 독단적으로 움직인겨 이게. 폴란드 와 러시아 는 킹 에 차르 가 만나 몰래. 덴마크 는 걍 저쪽에서 한대, 우리가 먼저 치러 가마 해댄겨.
얘들이 3월에 고토르프 를 쳐들어가는겨. 자기 반도 아래 지역을. 스위든 이 열받아서 바다 건너 오는데, 고토르프 로 안가고 말이지, 코펜하겐 으로 가는겨. 완전히 뒷통수를 쳐. 아예 본진을 작살 내려고. 이게 룸레백 착륙 이야. 칼10세 가 바다건너 코펜하겐 걸어 가고, 간만에 배타고 아예 오는겨 이게. 이때 덴마크킹은 고토르프 쪽에 가있고, 코펜하겐 은 엄마 가 있어.
Charlotte Amalie of Hesse-Kassel (27 April 1650 – 27 March 1714) was Queen of Denmark and Norway by marriage to King Christian V. Although she did not have much political influence, she was a successful businesswoman in her many estates and protected foreign Protestant non-Lutherans from oppression. She gained popularity for defending Copenhagen from Swedish forces in 1700.
덴마크 의 엄마 가 헷세칼셀 의 샬롯데 마말리에. 이 여자 가 아들 대신에, 코펜하겐 을 지키라며 독려 하는겨. 이 일로 덴마크 의 영웅 이야 이여잔. 아 조선 들은 지들 창년들 데리고 아예 수도를 버리고 토끼는데, 차원이 달라 얘들은.
In 1700, ... The capital was unprepared for attack, the King was absent in the Duchies, and the city commander Schack could not handle the situation. During this incident, the Queen Dowager strengthened the resolve of the people and helped to organize the defense by convincing the city commandant to give the people access to the cannons and successfully asking the garrison to protect the capital out of loyalty, while she would herself stay and die with them if need be.[1] For this act, she was hailed as a heroine.
스위든의 칼12세 는 천천히 들어와. 이사람은 대북방전쟁때 역시나 대륙 건너와서 누비는겨. 나중에 우크라이나 땅에서 러시아 애들과 전쟁하다 패해서 이게 결정적으로 스위든이 지는거거든. 몰도바로 도망가서 오스만에 피해서 몇년 있다가 돌아오고 끝나는게 대북방전쟁 이란게. 이 시작이 저 코펜하겐 착륙 이야. 이 칼12세 라는 젊은킹도 엄청나 이게.
코펜하겐 에 킹이 없어.도시 사령관 이 상황을 다스릴 수 없어. 이때 과부 퀸 인 엄마가 사람들을 독려하고 수비 조직화 시키고, 수뇌부애들에게 지시해서 사람들에게 대포 챙기라 하고 수비대들에게 충심으로 도시 지키라고 하고. 그녀 스스로 머물면서 그들과 함께 죽겠다고. 이런 행동으로 그녀는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덴마크킹 이 저 소식을 듣고, 고토르프 절대 안 건드리겠다고 맹세하는 서신을 칼12세 에게 주는겨. 이걸 확답을 받고, 고토르프 다신 안건드린다는 조약 맺고, 칼12세 가 코펜하겐을 떠나는거야. 그리고 작센폴란드 와 러시아 를 상대하러 가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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