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udies were continued at the higher Real Gymnasium in Carlstadt, Croatia, where one of my aunts resided. She was a distinguished lady, the wife of a Colonel who was an old war-horse having participated in many battles. I never can forget the three years I past at their home. No fortress in time of war was under a more rigid discipline. I was fed like a canary bird. All the meals were of the highest quality and deliciously prepared but short in quantity by a thousand percent. The slices of ham cut by my aunt were like tissue paper. When the Colonel would put something substantial on my plate she would snatch it away and say excitedly to him: "Be careful, Niko is very delicate." I had a voracious appetite and suffered like Tantalus. But I lived in an atmosphere of refinement and artistic taste quite unusual for those times and conditions. The land was low and marshy and malaria fever never left me while there despite of the enormous amounts of quinin I consumed. Occasionally the river would rise and drive an army of rats into the buildings, devouring everything even to the bundles of the fierce paprika. These pests were to me a welcome diversion. I thinned their ranks by all sorts of means, which won me the unenviable distinction of rat-catcher in the community. At last, however, my course was completed, the misery ended, and I obtained the certificate of maturity which brought me to the cross-roads.

 

나의 학업들은 계속 되었다 고등 레알김나지움 에서, 크로아티아 의 칼슈타트 였는데, 거긴 나의 숙모들 중 한명이 거주했다. 그녀는 독특한 여인이었다, 많은 전투에 참전했었던 늙은 기마병이었던 영관급 의 부인이었다. 나는 그들의 집에서 보냈던 3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전시의 요새는 그리 엄격한 규율하에 있지는 않았다. 나는 카나리아 새처럼 음식을 먹었다. 모든 음식들은 최고의 품질이었고 맛있게 차려졌지만 양은 적었다 천퍼센트. 햄 조각들은 내 숙모가 잘랐는데 티슈 종이 같았다. 그 장교가 좀 많이 내 접시에 놓으려 하면 그녀는 잽싸게 쳐내고는 흥분한 채 그에게 말했다: "조심하셔, 니코 는 지금 아주 예민해." 나는 굉장한 식욕을 가졌었고 그래서 탄탈루스 처럼 괴로웠다. 그러나 나는 정제된 분위기 와 예술적 취향속에 살았는데 그당시 그런 환경들에서 보면 아주 별다른 거였다. 땅은 저지대였고 습지여서 말라리아 열병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고, 퀴닌 약은 엄청나게 먹어댔다. 때로 강물이 차오르면 쥐 부대들이 건물들로 몰려와서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하물며 지독한 파프리카 더미들 조차. 이 페스트(숙주)들은 나에게 반가운 취미꺼리 였다. 나는 모든 종류의 수단을 다해 그들의 세력을 줄였고, 그 지역에서 나는 쥐잘잡는 인간 이란 낙인을 얻었다. 여하튼 결국 나의 교육과정은 마쳤고 비극은 끝났고, 성숙함의 자격증을 얻었고 그것은 나를 십자로 갈림길로 인도했다. 

 

칼슈타트, Karlovac 지금 칼로와츠, 수도 자그레브 의 바로 왼쪽 도시고, 여기서 3년 고등학교과정을 다녔고, 집은 숙모 집이었고, 몸은 약해서 먹는걸 조심했다는 거인듯 하고. 쥐 잡아도 시큰둥 한겨. 전염병에 대한 인식이 없어 저때도. 

During all those years my parents never wavered in their resolve to make me embrace the clergy, the mere thought of which filled me with dread. I had become intensely interested in electricity under the stimulating influence of my Professor of Physics, who was an ingenious man and often demonstrated the principles by apparatus of his own invention. Among these I recall a device in the shape of a freely rotatable bulb, with tinfoil coatings, which was made to spin rapidly when connected to a static machine. It is impossible for me to convey an adequate idea of the intensity of feeling I experienced in witnessing his exhibitions of these mysterious phenomena. Every impression produced a thousand echoes in my mind. I wanted to know more of this wonderful force; I longed for experiment and investigation and resigned myself to the inevitable with aching heart.  

 

그 모든 기간동안 나의 부모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결심이, 내가 성직을 품도록 하려는. 성직자가 된다는 단순한 생각 은 나를 두려움으로 가득 채웠다. 나는 전기에 강렬한 흥미를 갖게 되었었다 나의 물리학교수의 자극적인 영향으로. 그는 타고난 사람이었고 종종 자기가 발명한 기구로 그 원칙들을 보여줬다. 이들 기구중에 내가 기억하는 하나는 자유롭게 회전하는 구체 모양에, 주석으로 코팅 된 거였는데 고정된 기계에 연결되었을때 빨리 회전을 했다. 이런 미스테리한 현상들을 만드는 그의 실험을 내가 봤을때의 그 강렬한 느낌에 딱맞는 표현을 내가 한다는게 지금 불가능하다. 그때의 모든 인상들은 내 마음 속에 천가지의 메아리를 울렸다. 나는 더 알고 싶었다 (전기라는) 이 원더풀한 힘에 대해서; 나는 실험과 탐구를 갈망했고, (그러나) 아픈 심정으로 어찌할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Just as I was making ready for the long journey home I received word that my father wished me to go on a shooting expedition. It was a strange request as he had been always strenuously opposed to this kind of sport. But a few days later I learned that the cholera was raging in that district and, taking advantage of an opportunity, I returned to Gospic in disregard of my parents' wishes. It is incredible how absolutely ignorant people were as to the causes of this scourge which visited the country in intervals of from fifteen to twenty years. They thought that the deadly agents were transmitted thru the air and filled it with pungent odors and smoke. In the meantime they drank the infected water and died in heaps. I contracted the awful disease on the very day of my arrival and altho surviving the crisis, I was confined to bed for nine months with scarcely any ability to move. My energy was completely exhausted and for the second time I found myself at death's door. In one of the sinking spells which was thought to be the last, my father rushed into the room. I still see his pallid face as he tried to cheer me in tones belying his assurance. "Perhaps," I said, "I may get well if you will let me study engineering." "You will go to the best technical institution in the world," he solemnly replied, and I knew that he meant it. A heavy weight was lifted from my mind but the relief would have come too late had it not been for a marvelous cure brought about thru a bitter decoction of a peculiar bean. I came to life like another Lazarus to the utter amazement of everybody. 

 

내가 집으로 돌아갈 긴 여행을 준비하자마자, 나의 아빠는 내가 사냥하러 가길 원한다는 전언을 나는 받았다. 그건 이상한 요구였다 왜냐면 그는 언제나 그런 활동에 강력히 반대해왔었으니까. 그런데 며칠후에 나는 알았다 콜레라 가 그지역에 퍼졌다는걸. 그래도 (가는 이동편의) 기회를 잡아서 고스피치 로 돌아갔다 내 부모의 바램을 무시하고. 믿을수 가 없다 얼마나 그야말로 무지한 사람들이었던가 당시. 15년 에서 20년 을 간격으로 그 지역에 지독하게 벌어진 것의 이유에 대한 무지. 그들은 그 끔찍한 매개체들이 공기를 통해서 전달되는 거라 생각했고, (쫓아내려고) 공기를 지독한 냄새로 채웠고 연기를 피웠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오염된 물을 마셨고 죽어서 산더미를 이뤘다. 나는 도착한 그 당일에 그 끔찍한 병에 걸렸고, 그 위기에서 살아남았지만, 9개월동안 침대에만 있었고 움직일 힘도 없었다. 나의 에너지는 완벽하게 사라졌고, 나는 두번째 죽음의 문에 있는 나자신을 보았다. 마지막 시간(죽음) 이라 생각되는 어느 순간에, 나의 아빠가 그 방으로 달려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본다, 그가 나를 복돋우려고 확신에 찬 톤으로 말할때의. "아마도" 나는 말했다, "나는 나아질거 같아 당신(아빠)이 나를 엔지니어링 공부하게 해준다면" "당신(아들)은 세상에서 최고의 기술학교를 갈거야" 그는 엄숙히 답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가 진심인걸. 어떤 무거움이 내 마음에서 올려져서 사라졌다. 그러나, 어떤 특이한 콩을 응축한 쓴 액체의 마법같은 치료가 없었다면 구원은 너무 늦게서야 왔을게다. 나는 또다른 라자루스 처럼, 모두를 완전히 놀래키면서, 삶으로 돌아왔다. 

 

you 아 이놈의 유. 2인칭 이 조선반도엔 없는건데. 이게 근본적으로 아 조선 땅이 미개한 조폭 사회가 된거고 이 2인칭 화법의 없음 이. 아주 심각한겨. 이 조선 땅 애들이 가장 모랄이 없고 가장 야만의  마음인 이유이자 결과가 이 2인칭 어법이지. 쟤들은 다우, 튀, 라는 반말 의 2인칭은 사라지고, 존칭의 유, 부, you vous 가 영어 로 남은겨 불어는 너 가 있는거고. 영어는 이게 사라졌어. 즉, 유 는 존칭 이여. 아래 나 위 나, 당신 그대, 존칭 이여 저건. 저 문법의 바닥은. 어른 이나 애 나 유 유 해대는건, 당신, 그대, 하는거야. 똑같은 단어를  님, 너, 당신, 이렇게 나누는건 거짓번역이고 거짓말이야. 쟤들은 당신 그대 하는겨 조선식으로. 번역이란건 쟤들 문화 풍습 그대로 해야 해. 저걸 조선인간 으로 둔갑시켜서 존대 와 하대 로 나눠서 번역하면 당연히 안되는거야. 이 조선들 번역이 이런 문제의식이 전혀 없어. 그래서 쟤들의 리터러쳐 를 전혀 읽을 수 가 없는겨. 

My father insisted that I spend a year in healthful physical outdoor exercises to which I reluctantly consented. For most of this term I roamed in the mountains, loaded with a hunter's outfit and a bundle of books, and this contact with nature made me stronger in body as well as in mind. I thought and planned, and conceived many ideas almost as a rule delusive. The vision was clear enough but the knowledge of principles was very limited. In one of my inventions I proposed to convey letters and packages across the seas, thru a submarine tube, in spherical containers of sufficient strength to resist the hydraulic pressure. The pumping plant, intended to force the water thru the tube, was accurately figured and designed and all other particulars carefully worked out. Only one trifling detail, of no consequence, was lightly dismist. I assumed an arbitrary velocity of the water and, what is more, took pleasure in making it high, thus arriving at a stupendous performance supported by faultless calculations. Subsequent reflections, however, on the resistance of pipes to fluid flow determined me to make this invention public property. 

 

나의 아빠는 나보고 일년을 건강한 육체적 바깥 활동을 하면서 보내라고 강제했고 나는 싫었지만 동의했다. 이 기간의 대부분 나는 산들을 돌아다녔다, 사냥꾼 복장을 하고, 그리고 책들 꾸러미와. 네이쳐 와의 이런 접촉은 내 몸과 마음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나는 생각했고 계획했다 기록, 많은 아이디어를 품었지만 거의 잘못된 법칙이었다. 그 비전은 분명했지만 법칙들에 대한 지식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나의 발명들 중 하나에서, 나는 제안했다 글자들과 문장들을 바다를지나 전달하는 걸, 해저의 튜브를 통하는데, 그 튜브는 수압을 견딜만큼 충분한 힘의 구체로된용기들에 둔다.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은, 물이 튜브를 통해 지나가도록 하는건데, 정확하게 모양짓고 설계되었고 다른 모든 특정부분들도 제대로 작동되었다. 단지 하나의 해결안된 부분이, 결과 없이 가볍게 잊혀졌다. 나는 물의 임의의 속도를 감당했고, 그럴수록, 즐거웠다, 그걸 더 고차원으로 만드는게, 그러면서 굉장히 인상적인 의미있는 성과에 다다르고, 계산은 오류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반사적 움직임이 파이프들의 저항을 지나면서 흘러들어와서는, 내가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발명은 공적 자산으로 하자고. 

 

모두 자기가 상상 놀이 하는거고, 상상속에서 다 계산하고 설계 하는거고, 만든건 공공의 자산으로 돌려줘서 자기 욕심 안부리겠다며 흐뭇해 하는거고 혼자. 그런데 이 사람은, 이 공쩍 부분은 어느정도 이때 생각으로 행동해 나중에. 

 

Another one of my projects was to construct a ring around the equator which would, of course, float freely and could be arrested in its spinning motion by reactionary forces, thus enabling travel at a rate of about one thousand miles an hour, impracticable by rail. The reader will smile. The plan was difficult of execution, I will admit, but not nearly so bad as that of a well-known New York professor, who wanted to pump the air from the torrid to the temperate zones, entirely forgetful of the fact that the Lord had provided a gigantic machine for this very purpose.

 

내 프로젝트들 중 또다른 것은, 적도 주위로 (지구 크기의 거대한) 링 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허공에서 떠 있어야 하고, 회전운동 속에서 반사적 힘들로 그 위치에 자리잡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속 1천마일의 속도록 여행이 가능할 수 있고 이건 레일 (의 기차)로는 이속도는 불가능하다. 독자는 웃을 것이다. 그 계획은 시행하기 어려웠다. 나는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잘알려진 뉴욕 교수의 것만큼은 나쁘진 않다, 그는 대기를 열대에서 온대 지역으로 펌프질 하고 싶어했는데, 완벽히 잊고 있는 게다 그건, 로어드 가 이미 바로 이목적을 위해서 거대한 기계를 제공해놓았었다는 사실을. 

Still another scheme, far more important and attractive, was to derive power from the rotational energy of terrestrial bodies. I had discovered that objects on the earth's surface, owing to the diurnal rotation of the globe, are carried by the same alternately in and against the direction of translatory movement. From this results a great change in momentum which could be utilized in the simplest imaginable manner to furnish motive effort in any habitable region of the world. I cannot find words to describe my disappointment when later I realized that I was in the predicament of Archimedes, who vainly sought for a fixt point in the universe. 

 

또다른 계획은, 더 중요하고 매력적인데, 지구 몸체의 회전하는 에너지에서 힘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발견했었다, 지구 표면의 물체들이 자전 때문에 움직이는 방향 에서 그방향으로 움직이면서도 반대로 맞서는 운동량도 있다는걸. 여기서 나오는 운동량의 거대한 변화를 아주간단하게상상할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 어느 거주지에서든 이 에너지를 써먹을 수 있게끔. 나중에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아르키메데스 의 문장속에 있었다는걸, 그는 허무하게도 우주의 고정점을 찾고 있었다. 

 

At the termination of my vacation I was sent to the Polytechnic School in Gratz, Styria, which my father had chosen as one of the oldest and best reputed institutions. That was the moment I had eagerly awaited and I began my studies under good auspices and firmly resolved to succeed. My previous training was above the average, due to my father's teaching and opportunities afforded. I had acquired the knowledge of a number of languages and waded thru the books of several libraries, picking up information more or less useful. Then again, for the first time, I could choose my subjects as I liked, and free-hand drawing was to bother me no more. 

 

나의 방학이 끝나고, 스튀리아의 그라츠 에 폴리텍 학교에 보내졌다. 거긴 나의 아빠가 찾아낸 가장 오래되고 최고 유명한 기관들 중 하나였다. 그것은 내가 렬렬히 기다린 순간이었고, 나는 내 학업들을 훌륭한 지원하게 시작했다, 그래서 굳게 결심했다 성공하리라고. 나의 이전 학습은 그냥 평균 이상 이었다, 아빠의 가르침과 주어진 기회들 덕택에. 나는 많은 언어들의 지식을 습득했고, 몇몇 도서관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다소 유용한 정보들을 취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주제들을 고를수가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그리며 표현하는것은,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I had made up my mind to give my parents a surprise, and during the whole first year I regularly started my work at three o'clock in the morning and continued until eleven at night, no Sundays or holidays excepted. As most of my fellow-students took thinks easily, naturally enough I eclipsed all records. In the course of that year I past thru nine exams and the professors thought I deserved more than the highest qualifications. Armed with their flattering certificates, I went home for a short rest, expecting a triumph, and was mortified when my father made light of these hard won honors. That almost killed my ambition; but later, after he had died, I was pained to find a package of letters which the professors had written him to the effect that unless he took me away from the Institution I would be killed thru overwork. 

 

나는 결심했다 내 부모에게 놀라움을 주리라고, 그래서 1학년 일년 내내, 나는 규칙적으로 내 일을 오전 3시에 시작했고, 밤 11시까지 계속 했다, 일요일도 공유일도 예외는 없었다. 대부분의 내 동료학생들은 생각들을 쉽게 취했고, 당연히 나는 모든 기록들을 갈아엎었다. 그해 과정에서, 나는 9개의 시험을 치뤘는데, 교수들은 생각했다 내가 가장최고점수보다 그 이상의 점수를 받아도 된다고. 그들이 칭찬하는 성적표를 갖고, 나는 잠깐 쉬러 집에 갔다, 개선식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참담했다 나의 아빠는 이 어렵게 성취한 명예들을 하찮게 취급하더라. 그건 거의 내 야망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나중, 그가 죽었을때, 교수들이 그에게 써 보냈던 편지들 뭉치를 보고 나는 아팠다, 그가(아빠) 나를 학교에서 데려가지 않으면 아마 나는 과로로 죽게 될거라는. 

Thereafter I devoted myself chiefly to physics, mechanics and mathematical studies, spending the hours of leisure in the libraries. I had a veritable rnania for finishing whatever I began, which often got me into difficulties. On one occasion I started to read the works of Voltaire when I learned, to my dismay, that there were close on one hundred large volumes in small print which that monster had written while drinking seventy-two cups of black coffee per diem. It had to be done, but when I laid aside the last book I was very glad, and said, "Never more!" 

 

그이후 나는 주로 물리학 기계학 그리고 수학적 학업들에 몰입했다, 한가한 시간들은 도서관에서 보내면서. 나는 무엇을 시작하든 끝내야만 하는 분명한 기질을 갖고 있었고, 이 성질은 종종 나를 어렵게 몰아넣곤 한다. 한번은 볼테르의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서야 알게되었다, 슬프게도, 거의 1백권이라는 걸, 자잘한 글씨로, 그건 괴물(볼테르)이 썼던 것이다 하루에 블랙커피를 72잔씩 먹으면서. 다 읽었을때, 나는 마지막 책을 치우면서 매우 기뻤지만, 말했었다 "더이상은 안해"

My first year's showing had won me the appreciation and friendship of several professors. Among these were Prof. Rogner, who was teaching arithmetical subjects and geometry; Prof. Poeschl, who held the chair of theoretical and experimental physics, and Dr. Alle, who taught integral calculus and specialized in differential equations. This scientist was the most brilliant lecturer to whom I ever listened. He took a special interest in my progress and would frequently remain for an hour or two in the lecture room, giving me problems to solve, in which I delighted. To him I explained a flying machine I had conceived, not an illusionary invention, but one based on sound, scientific principles, which has become realizable thru my turbine and will soon be given to the world. Both Professors Rogner and Poeschl were curious men. The former had peculiar ways of expressing himself and whenever he did so there was a riot, followed by a long and embarrassing pause. Prof. Poeschl was a methodical and thoroly grounded German. He had enormous feet and hands like the paws of a bear, but all of his experiments were skillfully performed with lock-like precision and without a miss. 

 

내 첫 연도의 출현은 나에게 몇몇 교수들의 시선과 우정을 얻게 해주었다. 이들중 로그너 교수는 수학적 주제들과 기하학을 가르쳤었고, 푀슐 교수 는 이론 과 실험 물리학에서 수장 자리였고, 닥터 알레 는 적분을 가르쳤고 미분방정식에 전문이었다. 이 과학자는 아주 뛰어난 강사였다 내가 들어본 중에서. 그는 내 진전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는 강의실에 한두시간 빈번히 남아서 나에게 풀 문제를 주었고 그게 나는 좋았다. 그에게 나는 내가 품었던 비행 기계를 설명했다, 몽상적인 발명이 아니라 정석의 과학적인 원칙을 기반으로 둔 것이었고, 나의 터빈을 통해 실현되었고 앞으로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로그너 와 푀슐 교수는 호기심있는 사람들이었다. 전자 는 자기를 표현하는데 특이한 방식들이 있었고, 그가 그럴때마다 싸움이 났고 이어 긴 당황스런 침묵이 따랐다. 푀슐 교슈 는 방법론적이었고 완전히 철저한 독일인이었다. 그는 엄청난 발과 손을 지녔는데, 곰 발바닥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실험들은 시계처럼 정밀하게 오차없이 시연되었다. 

It was in the second year of my studies that we received a Gramme dynamo from Paris, having the horseshoe form of a laminated field magnet, and a wire-wound armature with a commutator. It was connected up and various effects of the currents were shown. While Prof. Poeschl was making demonstrations, running the machine as a motor, the brushes gave trouble, sparking badly, and I observed that it might be possible to operate a motor without these appliances. But he declared that it could not be done and did me the honor of delivering a lecture on the subject, at the conclusion of which he remarked: "Mr. Tesla may accomplish great things, but he certainly never will do this. It would be equivalent to converting a steadily pulling force, like that of gravity, into a rotary effort. It is a perpetual motion scheme, an impossible idea." But instinct is something which transcends knowledge. We have, undoubtedly, certain finer fibers that enable us to perceive truths when logical deduction, or any other willful effort of the brain, is futile. For a time I wavered, imprest by the professor's authority, but soon became convinced I was right and undertook the task with all the fire and boundless confidence of youth. 

 

2학년 때 우리는 그람 다이나모 를 파리에서 받았다, 그건 말 편자 모양에 얇은층으로 된 자석, 그리고 구리선이 감긴 아마쳐 에 커뮤테이터 였다. 그것이 연결되고, 전류의 다양한 효력들이 보여졌다. 푀슐 교수는 시연을 했었고, 기계를 모터로 사용해보다가 브러시 가 문제가 되서는 안좋게 스파크를 내었다. 내가 보기엔 이런 부품들 없이 모터를 작동하는게 가능할 듯 보였다. 그러나 그가 단언하길 불가능 할텐데 라며, 그러면서 나에게 그 주제에 대해 강연할 영광을 주었고, 말미에 그는 재확언했다 "미스터 테슬라는 아마 굉장한 것들을 이룰거야, 그러나 그래도 이건 못할거야 결코. 그건 지속적으로 당기는 힘을, 중력의 그것처럼, 회전력으로 바꾼다는 건데, 그건 어떤 영구적인 운동 스킴이고 불가능한 아이디어야." 그러나 본능은 지식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어떤 더 좋은 섬유들을 갖고 있어서, 그것들이 우리가 진짜들 진리들을 인식하게 해준다, 로지칼한 연역, 또는 뇌의 의지에 찬 노력 이 소용없어져 버릴때도. 교수의 권위에 압도되어서 한동안 나는 흔들렸지만, 곧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옳았음을, 그리고 시도했다 그 작업을, 젊음이라는 불같은 온갖 열정과 무한한 자신감을 지니고. 

I started by first picturing in my mind a direct-current machine, running it and following the changing flow of the currents in the armature. Then I would imagine an alternator and investigate the processes taking place in a similar manner. Next I would visualize systems comprising motors and generators and operate them in various ways. The images I saw were to me perfectly real and tangible. All my remaining term in Gratz was passed in intense but fruitless efforts of this kind, and I almost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problem was insolvable. 

 

나는 처음으로 내 생각 속에서 직류 기계를  그리고 그것을 작동해보고 아마쳐 속의 전류의 변하는 흐름을 따라가봤다. 그리곤 올테네이터 를 상상해보고 그 과정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나는걸 좇아가봤다. 다음 나는 시각화 했다 모터들과 제너레이터들로 구성된 시스템들을, 그리곤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해보곤 했다. 내가 본 (상상의) 이미지들은 완벽하게 리얼했고 만져졌다. 그라츠 에서의 남은 기간은 찐하게 보내졌지만, 이것에선 성과가 없었고, 그 문제는 해결 될 수 없다는 결론에 거의 다다랐다. 

In 1880 I went to Prague, Bohemia, carrying out my father's wish to complete my education at the University there. It was in that city that I made a decided advance, which consisted in detaching the commutator from the machine and studying the phenomena in this new aspect, but still without result. In the year following there was a sudden change in my views of life. I realized that my parents had been making too great sacrifices on my account and resolved to relieve them of the burden. The wave of the American telephone had just reached the European continent and the system was to be installed in Budapest, Hungary. It appeared an ideal opportunity, all the more as a friend of our family was at the head of the enterprise. It was here that I suffered the complete breakdown of the nerves to which I have referred. 

 

서기 1880년, 24세 에 나는 보헤미아 의 프라하 에 갔다, 그 대학에서 나의 학업을 끝내라는 아빠의 바램을 이행하러. 내가 결정적인 진전을 본 것은 그 도시 에서였다. 그 진전이란건, 코뮤테이터를 그 기계에서 떼어내 버리고 그 새 국면에서 그 현상을 연구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결론은 없었다. 다음 해에 내 인생관에 갑작스런 변화가 왔다. 나는 깨달았다 내 부모가 나로 인해 굉장한 희생을 하고 있었다는걸, 그래서 결심했다 그들에게서 짐을 덜고자. 미국 전화 의 물결은 막 유럽 대륙에 닿았고 그 시스템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에 설치 되었다. 그건 아주 좋은 기회로 보였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 의 한 친구가 그 회사의 경영진에 있었다. 그게 여기였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신경계가 완벽히 무너진걸 겪은 때가. 

What I experienced during the period of that illness surpasses all belief. My sight and hearing were always extraordinary. I could clearly discern objects in the distance when others saw no trace of them. Several times in my boyhood I saved the houses of our neighbors from fire by hearing the faint crackling sounds which did not disturb their sleep, and calling for help.  

 

내가 그 아픈시기동안 겪었던것은 모든 믿음을 초월한다. 나의 시각과 청각은 언제나 유별났다. 나는 떨어져 있는 물체들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는데, 남들은 그리 볼 수 없었다. 내 어린시절 두세번 나는 우리 이웃의 집들을 화재에서 구했는데, 그들의 잠을 방해않는 희미한 타는 소리들을 내가 듣고서 헬프 를 부르짖었었다. 


In 1899, when I was past forty and carrying on my experiments in Colorado, I could hear very distinctly thunderclaps at a distance of 550 miles. The limit of audition for my young assistants was scarcely more than 150 miles. My ear was thus over thirteen times more sensitive. Yet at that time I was, so to speak, stone deaf in comparison with the acuteness of my hearing while under the nervous strain. In Budapest I could hear the ticking of a watch with three rooms between me and the time-piece. A fly alighting on a table in the room would cause a dull thud in my ear. A carriage passing at a distance of a few miles fairly shook my whole body. The whistle of a locomotive twenty or thirty miles away made the bench or chair on which I sat vibrate so strongly that the pain was unbearable. The ground under my feet trembled continuously. I had to support my bed on rubber cushions to get any rest at all. The roaring noises from near and far often produced the effect of spoken words which would have frightened me had I not been able to resolve them into their accidental components. The sun's rays, when periodically intercepted, would cause blows of such force on my brain that they would stun me. I had to summon all my will power to pass under a bridge or other structure as I experienced a crushing pressure on the skull. In the dark I had the sense of a bat and could detect the presence of an object at a distance of twelve feet by a peculiar creepy sensation on the forehead. My pulse varied from a few to two hundred and sixty beats and all the tissues of the body quivered with twitchings and tremors which was perhaps the hardest to bear. A renowned physician who gave me daily large doses of Bromide of Potassium pronounced my malady unique and incurable. 

 

서기 1899년, 43세, 나는 40세가 지났고 콜로라도 에서 내 실험을 수행할때, 나는 550마일 떨어진 곳의 번개 소리를 매우 분명하게 들을수 있었다. 나의 젊은 조수들의 청력의 한계는 끽해야 150마일 이었다. 나의 귀는 13배 더 민감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신경불안일때 내 청력이 민감할때와 비교하면, 그 귀는 돌처럼 귀머거리였다. 부다페스트 에서 나는 내 방옆의 연이은 세 개의 방들의 시계 틱틱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파리 하나가 그방의 테이블에 닿는 소리도 내 귀에 둔탁 소리를 내었다. 몇마일 떨어진 거리의 지나가는 바퀴소리 도 내 온 몸을 흔들었다. 이삼십 마일 떨어진 기차 휘슬 소리는 내가 앉은 벤치 나 의자 를 아주 강하게 진동하게 했고, 그 고통은 참을 수 없었다. 내 발 아래의 땅은 계속 흔들렸다. 나는 내 침대밑에 고무 쿠션들을 대어서 조금의 충격이라도 막아야만 했다. 가깝고 먼 곳에서의 울리는 소리들은 종종 사람 말소리의 단어들 처럼 들렸고, 내가 이 단어들을 분해해서의미없게만들어버리지않았다면 나는 공포스러웠을게다. (나한테만 나타나는) 해의 광선들은 주기적으로 등장했는데, 내 뇌 에 강력한 타격을 주어서 나를 아주 괴롭게 했다. 나는 온 힘을 동원해서 다리 아래나 다른 구조물을 지나가야했다, 내가 해골에 끔찍한 압력을 경험했을 때. 밤에 나는 박쥐 의 감각을 지녀서 12피트 삼사미터 거리의 물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내 이마의 특이한 감각으로. 내 맥박은 수번에서 260번으로 뛰었고 몸의 모든 조직은 떨렸고 참을 수 없었다. 어느 유명한 의사가 나에게 매일의 과다한 브롬화물의 포타시움 을 주었는데, 말하길 나의 병은 유일하고 치료불가 라고 했다. 

It is my eternal regret that I was not under the observation of experts in physiology and psychology at that time. I clung desperately to life, but never expected to recover. Can anyone believe that so hopeless a physical wreck could ever be transformed into a man of astonishing strength and tenacity, able to work thirty-eight years almost without a day's interruption, and find himself still strong and fresh in body and mind? Such is my case. A powerful desire to live and to continue the work, and the assistance of a devoted friend and athlete accomplished the wonder. My health returned and with it the vigor of mind. In attacking the problem again I almost regretted that the struggle was soon to end. I had so much energy to spare. When I undertook the task it was not with a resolve such as men often make. With me it was a sacred vow, a question of life and death. I knew that I would perish if I failed. Now I felt that the battle was won. Back in the deep recesses of the brain was the solution, but I could not yet give it outward expression. One afternoon, which is ever present in my recollection, I was enjoying a walk with my friend in the City Park and reciting poetry. At that age I knew entire books by heart, word for word. One of these was Goethe's "Faust." The sun was just setting and reminded me of the glorious passage:

 

그때 생리학과 심리학의 전문가들에게 가보지 않은것이 나의 오랜 후회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에 들러붙었다, 그러나 결코 회복한다고 기대하지 않았다. 누가 믿을 수 있겠나, 그렇게 절망적인 육체적 파산자가 놀라운 힘과 끈기의 남자로 변모해서 38년을 하루도 쉼없이 일할수 있게 되고, 몸과 마음이 여전히 강한 자신을 발견하는걸? 나의 경우가 이러한 것이다. 살아서 계속 일하려는 강력한 소망, 그리고 헌신적인 친구의 지원과 운동 은 놀라움을 이루었다. 나의 건강은 돌아왔고 그것과 함께 마음의 활력도 돌아왔다. 그 문제를 다시 공격하면서, 나는 섭섭했다 그 싸움이 곧 끝나는 것에 대해. 나는 여전히 남은 에너지가 많았다. 나는 일을 착수할때,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종종 지니는 결심과는 달랐다. 나에겐, 그것은, 성스러운 맹세였고,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나는 알았다 내가 실패하면 나는 사라지는걸. 지금 나는 느꼈다 전투에서 승리한걸. 뇌의깊은뒷부분의뒤 에 해결책 이었다. (먼말이냐고? 글쎄) 나는 그걸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어느 오후, 지금도 내 기억에서 생생한데, 나는 내 친구와 시티 파크 에서 걸음을 즐기고 있었고 시 를 읊었었다. 그 나이에 나는 진짜 워드 그대로 걍 책들 전체를 진짜로 알았다. 이것들 중에 하나가 괴테 의 파우스트 였다. 태양은 막 저물었고 그건 나에게 찬란한 문구를 되새겼다

"Sie ruckt und weicht, der Tag ist uberlebt,
Dort eilt sie hin und fordert neues Leben.
Oh, dass kein Flugel mich vom Boden hebt
Ihr nach und immer nach zu streben!
Ein schoner Traum indessen sie entweicht,
Ach, zu des Geistes Flugeln wird so leicht
Kein korperlicher Flugel sich gesellen!"

[The glow retreats, done is the day of toil;
It yonder hastes, new fields of life exploring;
Ah, that no wing can lift me from the soil
Upon its track to follow, follow soaring!
A glorious dream! though now the glories fade.
Alas! the wings that lift the mind no aid
Of wings to lift the body can bequeath me.] 

 

태양은 물러나고 낮은 힘을 다하네

그것이 저기로 서두르고, 새로운 삶이 드러나네

아, 날개는 나를 땅에서 들어 올려서

그 길을 따라 따라 올라갈 수 없어!

찬란한 꿈이여! 지금 그 영광들은 졌지만.

아! 마음을 날아올리는 것은 쉬운데

그만큼 몸을 날게 할 날개는 없다니


As I uttered these inspiring words the idea came like a flash of lightning and in an instant the truth was revealed. I drew with a stick on the sand the diagrams shown six years later in my address before the American Institute of Electrical Engineers, and my companion understood them perfectly. The images I saw were wonderfully sharp and clear and had the solidity of metal and stone, so much so that I told him: "See my motor here; watch me reverse it." I cannot begin to describe my emotions. Pygmalion seeing his statue come to life could not have been more deeply moved. A thousand secrets of nature which I might have stumbled upon accidentally I would have given for that one which I had wrested from her against all odds and at the peril of my existence.  

 

내가 이 영적인 워드들을 뱉었을때, 그 아이디어 가 번개 치듯 떠올랐고, 한순간에 진리 는 드러났다. 나는 작대기로 모래밭에 그 도형들을 그렸고, 그것은 6년 후에 내 이름으로 미국 전기엔지니어 협회 앞으로 실렸고, 나의 동료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내가 보았던 그 이미지들은 환상적으로 샤프 했고 분명했고 금속과 암석의 견고함을 지녔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여기 내 모터를 봐; 내가 그걸 반대로 돌리는 걸 봐" 작동했다. 내가 우연히 접했을 네이쳐의 천가지 비밀들을, 나는 그것 하나를 위해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네이쳐 그녀로부터 온갖것으로, 내 존재를 걸고 씨름해왔던 것이었다. 

 

마지막 에서, 테슬라 가 괴테 의 문장들을 읊고 떠오르며 그리는게, 회전 자기장 에 테슬라 모터 여. 

 

저때가 서기 1882년, 36세 여. 공원 에서 저게 떠오르는게. 저긴,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 미국 가기 전에 이미 떠오른거야. 

 

rotating magnetic field is the resultant magnetic field produced by a system of coils symmetrically placed and supplied with polyphase currents.[1] A rotating magnetic field can be produced by a poly-phase (two or more phases) current or by a single phase current provided that, in the latter case, two field windings are supplied and are so designed that the two resulting magnetic fields generated thereby are out of phase.[2]

Rotating magnetic fields are often utilized for electromechanical applications, such as induction motorselectric generators and induction regulators.   

 

Tesla claimed in his autobiography that the idea came to him in 1882 when he was walking in a park, drawing it in the sand to illustrate how it worked to a friend.[10] Ferraris wrote about researching the concept and built a working model in 1885.[11] In 1888, Ferraris published his research in a paper to the Royal Academy of Sciences in Turin and Tesla obtained a United States patent (U.S. Patent 0,381,968) for his design  

 

테슬라 는 1882년에 생각났다고 자서전에서 썼다. 이탈리아 페라리스 가 콘셉 찾고 모델 만든게 서기 1885년. 페이퍼 에 실은게 1888년, 테슬라 의 미국 논문이 1887년 이야. 역사에선 페라리스 가 먼저 보인거고, 방식이 서로 다른거고. 웨스팅하우스 는 페라리스 의 특허권도 같이 쓰는거고, 테슬라 것에 더하여. 

 

The battery made by Volta is credited as one of the first electrochemical cells. It consists of two electrodes: one made of zinc, the other of copper. The electrolyte is either sulfuric acid mixed with water or a form of saltwater brine.  

알렛산드로 볼타. 가 서기 1800년에 전기를 만들고 인위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발표해. 이사람 이름 따서 전압 이라는 볼트 가 뒤에 생긴겨. 이전엔, 전기라는건, 생명체 에서나 발생하는 거로 생각 했걸랑. 그리고 나서 화학전지 를 만들어내. 아연 과 구리 를 쌓는겨. 전해질은 물섞인 황산이나 소금물. 

 

그러다가, 패러데이 를 통해서, 자석 에서 전기 를 유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돼. 전기장 과 자기장 의 합 전자기장 이 나오는거고. 필드 라는 장, 부터 이 장 이 머고, 이게 모두 영어로 이해가 되어야 해. 전기장 과 자기장 은 같은 말의 다른표현이 전혀 아니고, 전기장 없는 자기장 은 가능? 자기장 없는 전기장 은 가능? 이런 문장 하나하나 구분해야 해. 같은 전자기장 이라도 서로 애들 영역이 다른겨 이게. 

 

여하튼 자석을 통해서 전기 가 만들어지는겨.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하는겨 이게. 

 

페러데이 디스크 라는게, 

 

www.youtube.com/watch?v=yMA6WwAzLZk

저 영상 보믄, 말굽 자석 사이에 원판을, 손잡이 잡고 막 돌리는겨. 아잉 전류가 흐르넹. 이게 1831년 이야. 

 

Hippolyte Pixii (1808–1835) was an instrument maker from Paris, France. In 1832 he built an early form of alternating current electrical generator, based on the principle of electromagnetic induction discovered by Michael Faraday  

 

히폴리트 픽시. 바로 다음해 1832년, 패러데이 말 듣고, 자기도 나름 전기 를 만들어 보는겨. 

 

www.youtube.com/watch?v=3Z0DzGEBOsU

이사람은 걍 해본겨 심심해서. 저것도, 그냥 자석 사이에 구리선 두면 머 걍 막 도는 그런게 아녀. 손잡이 잡고 저 자석을 막 돌리는겨 이사람은. 여기서 자석의 극이 바뀌면서 당연히 전류가 반대로 흘러. 지속적으로 한방향 반대방향 왔다갔다 하는겨. 요걸, 번역해서 교류 라고 해. 올터레이팅 은 교 가 아녀, 반대 에 반대 여 계속 반대 반대 왔다 갔다 하는거야. 

 

교류 라는걸 이때 알게 된겨. 전기 시작하자 마자 이 픽시 가 교류 라는걸 보게 되는데, 왔다 갔다 이게 머여  통제 가 안되는겨. 이걸 직류 로 바꾸려고 이사람이 만든게 commutator 코뮤테이터 라는 정류기 로 번역되는겨. 

 

www.youtube.com/watch?v=LAtPHANEfQo

 

직류 모터. 인데. 이 영상이 저 코뮤테이터 라는 정류기 를 제일 잘 보여줘. 저 영상을 잘 봐야 해. 전선 연결된 저 정류기 가 색깔이 바뀌어, 물론 설명을 위해서. 얘가 안바뀌면 발전기에선 교류가 되거나 모터에선 회전이 일방향으로 안돼. 얘를 잡고 있는게 브러쉬 라는겨. 이 브러쉬 bursh 라는거 사이에서 코뮤테이터 가 계속 도는거걸랑. 당연히 닳아. 이게 잘 닳아서 브러쉬 라고 표현한겨. 빗 처럼 빗질하면서 닳걸랑. 별 시안한 한자 번역을 했지만. 저게 아주 제일 잘 설명한 거고. 

 

www.youtube.com/watch?v=CWulQ1ZSE3c

요게 정류기 설명이 그림이 별로라서, 한데 얘가 더 기초적 설명일텐데, 얜 한글번역이 없을낀데. 

 

dynamo is an electrical generator that creates direct current using a commutator.  

 

다이나모, 라는게, 픽시 가 만든 것 부터, 코뮤테이터 사용하는 정류기 라며, 다이나모 하는겨. 그리스어 뒤나미스, 힘 이여. 

 

Gramme machineGramme ringGramme magneto, or Gramme dynamo is an electrical generator that produces direct current, named for its Belgian inventor, Zénobe Gramme, and was built as either a dynamo or a magneto.  

 

그람 다이나모, 지노베 그람 벨기에사람. 저기에 언급되는. 하튼 막  벼라별 전기 만드는 제너레이터 전기 발전기 를 막막 난드는겨 저때. 저런걸 테슬라 가 고딩때 봐서 신기해하고 그라츠 의 폴리텍 가서도 하는겨. 너무나 신기해서,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다 하는거고. 미쳐 버린겨 . 저 알수없는 힘을 알아야 겠다며. 콜레라 로 다 죽어가는데, 아빠는 사제 시키려 했걸랑 기본 공부 마치면. 나 공대 보내줘유, 보내주께 라는 말에 힘 생기서 산겨. 저 전기 의 마력 때문에. 

 

코뮤테이터 란게, 뮤턴트 무브 움직이는거고 강력히 변환시키는겨 전기 흐름을, 양쪽 브러쉬가 밀착해서 잡고 있어, 회전하면서 브러쉬에 부딪히면서, 스파크 터지는걸 보는겨. 테슬라 는 저런 부품 없어도 되는거 아닐까 해대는거고. 그러다가, 직류 보다 교류 가 더 효율적인걸 눈치깐거고, 여기서 나온게 회전자기장 을 이용해서 만든 교류 모터. 야. 저 둘이 저걸 따로 같이 만들어. 동시대에발견 한거고. 그러다 테슬라 모터 라는 닉이 붙은거고.

 

www.youtube.com/watch?v=AQqyGNOP_3o

걍 저런게 있어. 

 

In 1928, Nikola Tesla registered a controversial patent. The patent claimed itself to be the “World’s First Flying Saucer”. 

 

저기 나오는, 테슬라 의 비행 체. 이걸 서기 1928년에 특허내. 비행접시체. 세계 최초의 나는 접시. 라며. 스스로.

 

전기 이야길 죽 보면, 저게 가만 디다보면, 졸 헷갈리. 저걸 구분을 확실히 해야해. 전기 를 만들어내는건지, 전기 를 갖고 기계적힘을 활용하는건지.

 

An electric motor is an electrical machine that converts electrical energy into mechanical energy. Most electric motors operate through the interaction between the motor's magnetic field and electric current in a wire winding to generate force in the form of torque applied on the motor's shaft. Electric motors can be powered by direct current (DC) sources, such as from batteries, or rectifiers, or by alternating current (AC) sources, such as a power grid, inverters or electrical generators. An electric generator is mechanically identical to an electric motor, but operates with a reversed flow of power, converting mechanical energy into electrical energy.  

 

직류 모터, 교류 모터 라는건, 전기적 기계 야. 이건, 전기 를 만들어 내는 게 아냐. 전기에너지 를 갖고, 미케니컬 에너지, 기계적 힘을 만들어 내는거야. 배터리에서 생기든 콘덴서 니 하는 충전기 에서 생긴 전기 를 갖고 토크, 회전운동을 시켜서 힘 을 만들어내는거야 지금 모터 라고 하는것은. 

 

그런데 이 구조가 발전기 , 일렉트릭 제너레이터 , 전기 를 만드는 것과 구조적으로 똑같은겨 이게. 

 

지금 테슬라 이야기 하는데, 테슬라 가 고딩때 보는 실험 이나 대학때 가서 그람다이나모 니 본다는건, 저건 발전기 여. 외부의 에너지를 통해서 전기 를 만드는 것을 보는거야. 

 

 

dynamo is an electrical generator that creates direct current using a commutator. Dynamos were the first electrical generators capable of delivering power for industry, and the foundation upon which many other later electric-power conversion devices were based, including the electric motor, the alternating-current alternator, and the rotary converter.  

 

다이나모 라는 건 발전기, 전기 만드는 장치 야. 외부 힘을 어디서 갖고와?  핸들 잡고 막막 돌리는겨 ㅋㅋㅋ. 다이나모 는 직류 전기 를 만드는 장치 이고, 코뮤테이터(정류기) 를 사용해야 해. 코뮤테이터 가 없으면, 교류 가 나오는겨. 

 

제너레이터(발전기) 와 모터 는 전혀 다른겨 지금 이야기가. 그런데 기본 구조는 아주 또옥 같은겨 이게.

 

commutator is a rotary electrical switch in certain types of electric motors and electrical generators that periodically reverses the current direction between the rotor and the external circuit. 

 

코뮤테이터, 가 회전하는 스위치 인데, 가운데 가 떴어, 쪼개진 팔찌 모양이야. 모터 나 제너레이터 나 똑같이 쓰이지만, 내용이 전혀 다른겨. 

 

Commutators are used in direct current (DC) machines: dynamos (DC generators) and many DC motors as well as universal motors. In a motor the commutator applies electric current to the windings. By reversing the current direction in the rotating windings each half turn, a steady rotating force (torque) is produced. In a generator the commutator picks off the current generated in the windings, reversing the direction of the current with each half turn, serving as a mechanical rectifier to convert the alternating current from the windings to unidirectional direct current in the external load circuit. The first direct current commutator-type machine, the dynamo, was built by Hippolyte Pixii in 1832, based on a suggestion by André-Marie Ampère.  

 

직류 기계에서 쓰는거야. 다이나모 라는건 직류 발전기 이고, 직류 모터 라는건 직류를 받아서 회전의힘을시켜서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거야. 직류 모터 가 직류 라는 전기 를 만드는게 아녀 이 멍청이들아. 

 

모터 에선, 코뮤테이터 가, 직류를 받아서 와인딩된 감겨진 곳으로 전달하는데, 이때 회전하는 와인딩이 절반 돌 때, 그 방향으로 계속 돌게끔 전류 방향을 바꿔주는 리버씽 하는 부품 이야. 회전을 계속 그 방향으로 잘 돌게 하는 거야 모터 에서. 같은 방향으로 돌게 하고 회전의 그 로터 rotor 로 연결된 샤프트 를 통해서 기계를 인간이 쓰는거고

샤프트 란건 긴 짝대기고 축이고, 크랭크 란건 구브러진거야 그 말이. 축에서 구브린 걸로 연결해서 축의 힘을 주고받는게 구브러진 크랭크 야

 

제너레이터 는, 발전기야, 전기를 만드는겨 이건. 외부의 힘을 받아서, 손으로 돌리던  수력으로 돌리던, 그 힘을 받아서 회전시켜서 전자기장을 형성해서 여기서 형성된 교류 를 직류 로 만드는겨 코뮤테이터 가. 

아마쳐 armature 를 전기자 냐 번역인데 arm 무장한거고 와이어로 무장된, 오직 교류 만 지닌 부분 이야.

 

The Woolrich Electrical Generator of 1844, now in Thinktank, Birmingham Science Museum, is the earliest electrical generator used in an industrial process.[7] It was used by the firm of Elkingtons for commercial electroplating

 

전기 라는걸 제너레이터 로 만들어서, 처음 쓰여지는 곳이, 일렉트로플레이팅. 플레이트 가 얇게 덮는거야. 전기로 금속 피막을 씌우는겨. 일정하게 방출되는 전류 즉 직류 를 직접 물체에 대고 쓰는거야. 저게 페러데이 디스크 직후 바로 픽시 의 발전기 가 1832에 나오고, 10년 되서 산업현장에 쓰이는겨 전기 가. 1844년 에. 

 

저건, 배터리 의 전기 나 증기 의 열에너지 같은 외부의 에너지 를 갖고 전기 자체 를 만들어쓰는거고, 핸들 잡고 손으로 돌리든지.

 

당연히, 전기 를 갖고, 직후 에 나오는게 머여? 전신 이고 전화 잖냐? 더하여 머여? 빛, 조명 이잖냐? 

 

제너레이터 에 대한 수요가 급증 한거야. 이 전에는, 제너레이터 라 봐야, 화학전지 에 소규모 축전기 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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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이라봤자, 1840년이여. 전화 의 그레이엄 벨이 1870년 지나야해. 전신 생기고, 철도 레일 따라서, 전선 깔리는겨. 증기기관차 가 끽해야 1814야. 기차레일 깔고 전신 생기고 전선 바로 까는겨. 기차역 옆엔 변전소 가 있어

 

19세기 라는건 어마어마한거고. 게르만 애들이 그리스 로마 를 2천년 배우고 만든, 인류 의 가장 독보적인 시대야 이건. 19세기 에 모든게 나온거야. 눈 돌아가 이거. 일본 애들도 저걸알고 완전히 눈돌아간거고. 조선은 지금도 양키고홈 중국 만세 인거고.

 

이때도 여전히, 나무 공자불 나무 주자불 해대며, 인간 살육질 해대던, 세상 유일한 종족  집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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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들은, 개무식한 드른, 웨스턴이 먼 수학 하나 해서 ㅋㅋㅋ 저리 된 줄 알아. 이스턴  위대해유, 아 그런데 수학 을 푸대접 했슈 ㅋㅋㅋ. . 아 얼마나 무식한지 이  집단. 

 

어디 짤보니, 하멜 표류기 를 방송에서 했나보지? 야 그거 갖고, 하멜이 일본 생활 잠깐 했는데요, 일본 애들의 짓, 여자 가 바람 피면 땅에 파묻고 목만 보이게 하고 지나가는 남자들이 목 에 톱질하게 했다 는건, 일본애들 풍습이예요, 하멜이 착각한거예요.

 

위대한 조선 이 그럴 수가 없어요. 조선 이 얼마나 위대한대요. ㅋㅋㅋ. 조선 의 위대한 자기들만의 일기 실록에 그런거 없어요. 이에야스 이야기 나올때 의 저 간첩 을 저리 죽이거든요 아마 착각한걸거예요. 위대한 조선이 저럴 수가 없어요. 

 

 

 

완전 사기판이야. 조선은 인간 살육 집단이야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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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s lighting is production of artificial light from combustion of a gaseous fuel, such as hydrogenmethanecarbon monoxidepropanebutaneacetyleneethylene, coal gas (town gas) or natural gas.  

 

램프 는 가스 라이팅 이, 서기 1800년 직후 에 바로 흔해 져 이게. 20년 전인 1780년 에 오일램프 인 아르강램프 가 나오고, 집엔 아르강 오일램프 거리엔 까스 등. 19세기 에 이들이 불을 밝혀. 

 

Gas lighting was economical enough to power street lights in major cities starting in the early 1800s, and was also used in some commercial buildings and in the homes of wealthy people. The gas mantle boosted the luminosity of utility lighting and of kerosene lanterns. The next major drop in price came about in the 1880s with the introduction of electric lighting in the form of arc lights for large space and street lighting, followed by incandescent light bulb-based utilities for indoor and outdoor lighting  

 

아크방전 의 전기 조명 이 등장하는게, 1880년대여. 1802년 아크방전 처음 나오고 패러데이 의 스승이. 80년지나 백열등의 에디슨 조명사업이 등장하는거고.  거리의 가스라이팅 을 이게 대체 하는겨.

 

미국의 길디드 시대, 도금시대라는 비웃음이거든 원래. 황금 시대가 아니라 도금 시대란겨. 그러거나 말거나 저게 1870-1900 이고, 이 중심에 에디슨 과 테슬라 고. 서부까지 철도 가 깔리면서, 동시에 깔리는게, 전선 이여 전선. 

 

전선 으로 전신에 다음 전화 가 연결 되고, 그다음 바로 전선으로 발전소 의 전기 들이 전력을 공급하는겨. 모든 이야기가 모두  저때 다 터진거야. 

 

할때, 문제는 이놈의 전기 야. 전기 를 활용해대는, 전신, 전화, 조명, 이건 전기 를 동력으로 쓰는게 아니라, 전기 자체 를 인간이 쓰는겨. 다른 증기 니 열 이니 하는 에너지 는 저런걸 못해. 전기에너지 를 동력으로 쓰는건 지금 관심 이 아냐 . 오직 전기 여 전기. 동력으로 쓸 건 열에너지 활용한 증기 쓰면 되잖아? 오직 전기 그 자체 가 필요한겨 저때는. 

 

capacitor is a device that stores electric charge in an electric field. It is a passive electronic component with two terminals.

The effect of a capacitor is known as capacitance. While some capacitance exists between any two electrical conductors in proximity in a circuit, a capacitor is a component designed to add capacitance to a circuit. The capacitor was originally known as a condenser or condensator.[1] This name and its cognates are still widely used in many languages, but rarely in English, one notable exception being condenser microphones, also called capacitor microphones. 

 

가장 중요한 개념이 그래서, 전기 의 만들어낸 것을 담은, 커패시터 야. 축전기 라고 일본애들이 번역한. 저걸 원래는 콘덴서 라고 영어로 썼다가, 얘들이 이 단어가 저 개념에 안맞아서 커패시터 를 갖고 온겨. 콘덴서 콘덴세이션 아란건, 콘덴소 라는어 콘 덴소 가 꾹꾹눌러서 찐하고 두껍게 하는거거든. 기체를 액체 로 응축 하는거에 맞아서 이 개념으로 만 쓰는거고. 콘덴서 를 버린거야. 이걸 일본애들이 소리대로 걍 콘덴서 한걸 우리도 지금 쓰는거고. 그래서 머  저걸 일본애들이 콘덴서 라고 번역했는데요 잘못번역한거예요 이 짓 하고 앉았으니. 

 

알레산드로 볼타 가 인위적으로 전류를 만들어서 축적해. 화학 전지를 만들어내. 이게 서기 1800년 이고, . 볼타 는 이걸 영구적 에너지 인줄 알았어. 닳는건 해결이 될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님을 패러데이 가 밝혀준거고. 

 

The voltaic pile was the first electrical battery that could continuously provide an electric current to a circuit. It was invented by Italian physicist Alessandro Volta, who published his experiments in 1799. The voltaic pile then enabled a rapid series of other discoveries including the electrical decomposition (electrolysis) of water into oxygen and hydrogen by William Nicholson and Anthony Carlisle (1800) and the discovery or isolation of the chemical elements sodium (1807), potassium (1807), calcium (1808), boron (1808), barium (1808), strontium (1808), and magnesium (1808) by Humphry Davy.[1][2]

The entire 19th-century electrical industry was powered by batteries related to Volta's (e.g. the Daniell cell and Grove cell) until the advent of the dynamo (the electrical generator) in the 1870s.  

 

볼테익 파일, 볼타 식 의 쌓음. 볼타 전지 라는겨. 19세기 의 전기 는, 오직 이 볼타 전지 여. 

 

일렉트리컬 제너레이터 가 생기기 전까지는. 일렉트리컬 제너레이터 라는건 머여? 자석, 자기장 으로 전자기장 을 통해 전기 를 만들어낸겨. 

 

전자기장 의 전기 가 없었으면, 현대문명이란 없어. 

 

볼타 이전 에도 전기를 만들어서 저장 을 했어. 다 그런 역사로 나중 볼타 가 되었지만, 볼타 가 트라이븃 감사해 하는 이들이 숱하고. 얘들은 서로서로들 무수수한 수천만명이  저 19세기 를 만든겨. 수천만명의 지식인들이. 이 조선 빠닥엔 지식인 딱지 의 인간이 정말 너무나 너무나 후지고 미개해.

 

Leyden jar (or Leiden jar or Kleistian jar) is an electrical component which stores a high-voltage electric charge (from an external source) between electrical conductors on the inside and outside of a glass jar. It typically consists of a glass jar with metal foil cemented to the inside and the outside surfaces, and a metal terminal projecting vertically through the jar lid to make contact with the inner foil. It was the original form of the capacitor[1] (also called condenser  

 

Its invention was a discovery made independently by German cleric Ewald Georg von Kleist on 11 October 1745 and by Dutch scientist Pieter van Musschenbroek of Leiden (Leyden) in 1745–1746.[3] The invention was named after the city.  

 

라이덴 자. 라이덴 병. 높은 전압의 전하 를 축적한겨 어쨌거나. 이게 서기 1745년. 볼타 는 이후 55년 이고. 동포메라니아 태생 루터파 성직자, 에발트 게오르크 폰 클라이스트. 네덜란드 과학자, 라이덴의 피터 판 무슈브루크. 

 

저 그림을 보면, 바 에다가 쇠사슬로 구 를 연결해서, 조수가 저걸 공을 막 굴리면, 거기서 정전기가 나고, 이 정전기가 쇠사슬에 바 를 타고 저걸 와이어를 따라서 물병에 담는겨. 판 무슈브루크 가 저 물병의 와이어 를 만졌다가 쇼크가 왔대, 엄청난 고압의 전기가 물병에 쌓이는겨 저게. 

 

Georg Matthias Bose (22 September 1710 – 17 September 1761), also known as Mathias Bose, was a famous electrical experimenter in the early days of the development of electrostatics. He is credited with being the first to develop a way of temporarily storing static charges by using an insulated conductor (called a prime conductor). His demonstrations and experiments raised the interests of the German scientific community and the public in the development of electrical research.  

 

클라이스트 와 무슈브루크 보다 먼저 직전에, 전기 를 저장한 이는 게오르크 마티아스 보제.로 봐, 마티아스 보제. 저게 모두 마찰일으켜 만드는 정전기 야. 이 보제 의 일화 가 재밌는데.

 

Bose's "Electric Kiss" (also called "Electric Venus") demonstration was immensely popular with spectators, and it was little more than a variation on Stephen Gray's "Flying Boy" demonstration.[3] An attractive young lady was invited to stand on a block of insulating resin, and she was given a moderate static charge from a spinning globe. A young man from the audience was then invited to give her a kiss, and, in the process, the pair received a reasonable shock.[4]

This demonstration combined both the scientific illustration of charge accumulation with the naughtiness of a stolen kiss, so it became a mainstay of all electrical showmen and scientific demonstrators.  

 

일렉트릭 키쓰. 일렉트릭 비너스. 보제 가 한 실험이고, 구경꾼들에 의해 굉장히 유행했다. 스티븐 그레이 실험의 약간 변형인데, 매력적인 젊은 여자를 초빙해서 전기안통하는 레진 블락에 서게 하고, 옆에 회전하는 구체 를 통해서 전전기 를 받아놓게 해. 관람자들 중 젊은 남자를 불러서 그녀에게 키스 하도록 해, 그러면 그 쌍은 쇼크 를 받는거지. 

 

보제 가, 쇼를 보이는게 강에서 알코올 증기 를 풀어놓고, 정전기 로 스파크를 일으켜서 물위의 불쇼 를 하걸랑. 동포메라니아 태생 클라이스트 와 같은 라이프치히 대학 출신이야. 저 불쇼 를 보고, 전기 가 물을 통해 이동하는건가 해서 병에 담는 실험을 한겨 이사람이. 

 

저러다가, 볼타 전지 가 나와서, 이걸로 겨우겨우 쓴겨 19세기에 전기를. 

 

 Benjamin Franklin investigated the Leyden jar and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charge was stored on the glass, not in the water as others had assumed. He also adopted the term "battery",[8][9] (denoting the increase of power with a row of similar units as in a battery of cannon), subsequently applied to clusters of electrochemical cells.[10]  

 

벤자민 프랭클린 이, 라이덴병 을 연구하고는, 전하가 병면에 붙어있는거지 물에 담겨지는게 아님을 알아내. 그때 다들 물에 담은 줄 알았거든. 프랭클린 이 또한 배터리 라는 말을 만들어내. 배터리 가 battuo 바투오, 때리는겨. 배틀 배터리 같은 라틴어 에서 온거고, 비트 beat 는 게르만말이고, 대포 가 때리는 거고 배터리오브캐논 해서 대포들의모임 이야. 볼타전지 가 아연 구리 를 쌓은 층이야. 

 

Early capacitors were known as condensers, a term that is still occasionally used today, particularly in high power applications, such as automotive systems. The term was first used for this purpose by Alessandro Volta in 1782, with reference to the device's ability to store a higher density of electric charge than was possible with an isolated conductor.[12][1] The term became deprecated because of the ambiguous meaning of steam condenser, with capacitor becoming the recommended term from 1926.   

 

콘덴서 란 워드 는 볼타 가 처음 만든 단어고, 이게 계속 쓰이다가, 증기 콘덴서 와 말이 겹치면서, 콘덴서 라는 말을 버려야 해 안맞아 전혀 개념상. 서기 1926년에 갖고온게 커패시터 야. 메이지 때 일본 애들에겐 콘덴서 로 썼다가 이게 우리도 굳어진거고

AC power plugs and sockets connect electric equipment to the alternating current (AC) power supply in buildings and at other sites. Electrical plugs and sockets differ from one another in voltage and current rating, shape, size, and connector type. Different standard systems of plugs and sockets are used around the world.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단어, 콘센트. 이건 일본사전에도 지금 사라진 단어. 소켓의 한방식 의 일본 발음을 여전히 쓰는겨. 모든 조선말은 일본말. 일본님들도 이제 안쓰는.

 

コンデンサ: Kondensator、: capacitor)は、電気電荷)を蓄えたり、放出したりする電子部品である。蓄電器[1]キャパシタとも呼ばれる。  

 

축전기, 로 한자, 캬파시타 로도 불린다. 이름을 바꿔야 해. 

 

저 볼타 전지 로,  전기를 쓴겨 19세기 내내. 초기에는 금속피막 하는데 쓰고, 전신 보내는데 좀 쓰고 하다가, 1870년 지나면서, 전화 티나오고, 전기조명 티나오고, 저걸로 절대 받칠 수가 없어. 패러데이 의 전자기장 의 유도전기 나오면서 저기서 자기를 이용한 제너레이터 인 다이나모 가 바로 시작한겨 서기 1830년 대 부터. 

 

 The Gramme dynamo was one of the first machines to generate commercial quantities of power for industry.[16] Further improvements were made on the Gramme ring, but the basic concept of a spinning endless loop of wire remains at the heart of all modern dynamos.[17]

Charles F. Brush assembled his first dynamo in the summer of 1876 using a horse-drawn treadmill to power it. Brush's design modified the Gramme dynamo by shaping the ring armature like a disc rather than a cylinder shape. The field electromagnets were also positioned on the sides of the armature disc rather than around the circumference   

 

그람 다이나모 가 1871년 이야. 벨기에 사람이고, 파리 에서 연구하다가 저때 저걸 상업적으로 쓰는겨. 의미잇는 전기 를 만든거야 

 

그리고, 찰스 브러쉬 가 1876년 에, 말이 끄는 회전 수레 의 동력 을 이용해서 전기 를 만들어 내. 모두 제너레이터 여. 

 

그람다이나모 가 나오는게 1871년 이고, 테슬라 가 15세 일때고, 저걸 그라츠 에서 본겨. 다이나모 가 1832년 에 픽스 에서 시작해서 40년 만에 그람 다이나모 고, 따끈따끈 한 걸 테슬라 가 학교 서 본거야. 

 

저때는 모두 직류 를 만들어 쓴거고. 

 

나이아가라 수력 발전 대규모 로 교류 를 만드는게, 이게 최초 의 수력발전 이여. 이전 에도 수력발전 이 있는데 방앗간 돌릴 규모로 만든거라 크게 의미부여 를 안해. 

인버터 라는건 꺼꾸로잖니 교류 가 승자되면서 교류만드는 부품이 나오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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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 가 1882년 에  부다페스트 공원 산책하다가, 회전자기장 을 머리속에서 그리고 교류모터기 를 이때 다 그린겨. 이때가 26세 이고. 부다페스트 의 중앙 전신국 에 근무하고. 이해에 프랑스 파리 로 옮겨 에디슨 회사 의 파리 지사 로. 

 

나이아가라 발전소 가 1895년 이야. 이때부터 의미있는 전선들이 미국 전역에 본격적으로 깔리는겨 이게. 

 

이전에는 단지 전신 전화 를 위한 전력소 에 전기 공급 이고. 또한 이전에는, 화력 발전소로 전기 를 만드는거야. 오직 전기 를 쓰기 위해서. 

 

수력 발전소 라는 게 생기면서, 거대한 전기 가 만들어지면서, 이걸 동력으로 하는 가전제품 이 만들어지는겨. 이게 또한 19세기 이고 서기 1900년 이 지나는거고. 

 

엄청난 문명의 해일이야. 이게 감당이 안되서 터진게, 세계대전 이란거야. 

 

서기 1900년은, 미친 시대야 저게. 인간들 정신도 완벽하게 미치는거야.

 

저 시대 한가운데, 테슬라 가 있는겨. 인류문명의 가장 독보적인 시대는 19세기 말이고 서기 1900년 이고.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기 여. 이 중심의 인간은 테슬라 야. 

 

니콜라 테슬라 라는 인간은, 굉장히 중요한 인간이야. 이 인간 안에 보든 인간들 의 이야기 가 있는겨 이게. 

 

저런 어마어마한 시대에. 세상에서 가장 미개한 나라 가 하나 있어. 여전히 사람 죽이길 파리 목숨 죽이듯 하는.

 

 

 

 

저런 기본적인 걸 좀 알아야, 이해가 돼. 테슬라 는. 

 

IV. The Discovery of the Tesla Coil and Transformer

For a while I gave myself up entirely to the intense enjoyment of picturing machines and devising new forms. It was a mental state of happiness about as complete as I have ever known in life. Ideas came in an uninterrupted stream and the only difficulty I had was to hold them fast. The pieces of apparatus I conceived were to me absolutely real and tangible in every detail, even to the minute marks and signs of wear. I delighted in imagining the motors constantly running, for in this way they presented to mind's eye a more fascinating sight. When natural inclination develops into a passionate desire, one advances towards his goal in seven-league boots. In less than two months I evolved virtually all the types of motors and modifications of the system which are now identified with my name. It was, perhaps, providential that the necessities of existence commanded a temporary halt to this consuming activity of the mind. I came to Budapest prompted by a premature report concerning the telephone enterprise and, as irony of fate willed it, I had to accept a position as draftsman in the Central Telegraph Office of the Hungarian Government at a salary which I deem it my privilege not to disclose! Fortunately, I soon won the interest of the Inspector-in-Chief and was thereafter employed on calculations, designs and estimates in connection with new installations, until the Telephone Exchange was started, when I took charge of the same. The knowledge and practical experience I gained in the course of this work was most valuable and the employment gave me ample opportunities for the exercise of my inventive faculties. I made several improvements in the Central Station apparatus and perfected a telephone repeater or amplifier which was never patented or publicly described but would be creditable to me even today. In recognition of my efficient assistance the organizer of the undertaking, Mr. Puskas, upon disposing of his business in Budapest, offered me a position in Paris which I gladly accepted. 

 

4. 테슬라 코일 과 트랜스포머 의 발견

그때 잠시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맡겼다, 기계들을 그리고 새로운 형태를 설계하는 찐한 즐거움에. 그것은 내가 삶 에서 알아왔던 것에서 가장 완벽한 수준의 행복의정신상태 였는데. 내가 생각으로 품었던 장치 조각들은 나에겐 완벽하게 리얼했고 만져지는 것이었다 모두 상세하게, 겉의 사소한 기호들과 표시들 조차도. 나는 그 모터들이 계속 도는걸 상상하는게 즐거웠다, 왜냐면, 이런식으로 그것들은 마음의 눈 으로, 아주 환상적인 광경을 보여주니까. 네이처의 관성이 열정적인 갈망으로 발전할때, 사람은 7리그 의 부츠들로 그의 목표점을 향해 나아간다. 두달도 안돼서 나는 머리속에서 모든 타입들의 모터들과 그 시스템의 보완점들을 발전시켰고 지금은 나의 이름으로 드러나있다. 그것은 아마도 예언적 이어서, 존재의 필연들은 잠시의 휴식을 명령했다 내 정신의 이 지속적인 활동에. 나는 부다페스트 에 왔는데 여긴 전화 사업에 대한 때이른 보도로 (전화국 구축이) 시도된 도시였고, 운명의 아이러니는 그것을 강행하듯이, 나는 헝가리 정부의 중앙 전신국 의 설계사 자리 를 받아들여먀만 했는데, 월급은 내 자존심을 고려해서 밝히지 않겠다! 운이 좋게도, 나는 곧 최고감독관 의 관심을 얻었고 그래서 계산과 설계와 새로운설치들과연계하는 예측 관련 일들을 했다, 전화국 이 출범하기 전까지, 출범했을때도 나는 같은 책임을 맡았다. 그 지식과 현장의 경험을 내가 이런 일의 과정에서 얻었는데, 매우 가치있었고, 그 일은 나에게 풍부한 기회들을 주었다, 나의 발명 기능들을 활동시키는데. 나는 (전화국) 본부 장치에서 두세가지 개량을 했고 전화 중계기 나 증폭기 를 완벽히 했으나 특허되지도 않았고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지금도 그 크레딧은 나에게 해당될 수 있다. 나의 효율적인 지원을 알고, 그 업무의 설계자 인 미스터 푸스카스 는, 부다페스트 의 자기 사업을 떠날때, 나에게 파리의 자리를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받았다. 

 

I never can forget the deep impression that magic city produced on my mind. For several days after my arrival I roamed thru the streets in utter bewilderment of the new spectacle. The attractions were many and irresistible, but, alas, the income was spent as soon as received. When Mr. Puskas asked me how I was getting along in the new sphere, I described the situation accurately in the statement that "the last twenty-nine days of the month are the toughest!" I led a rather strenuous life in what would now be termed "Rooseveltian fashion." Every morning, regardless of weather, I would go from the Boulevard St. Marcel, where I resided, to a bathing house on the Seine, plunge into the water, loop the circuit twenty-seven times and then walk an hour to reach Ivry, where the Company's factory was located. There I would have a woodchopper's breakfast at half-past seven o'clock and then eagerly await the lunch hour, in the meanwhile cracking hard nuts for the Manager of the Works, Mr. Charles Batchellor, who was an intimate friend and assistant of Edison. Here I was thrown in contact with a few Americans who fairly fell in love with me because of my proficiency in billiards. To these men I explained my invention and one of them, Mr. D. Cunningham, Foreman of the Mechanical Department, offered to form a stock company. The proposal seemed to me comical in the extreme. I did not have the faintest conception of what that meant except that it was an American way of doing things. Nothing came of it, however, and during the next few months I had to travel from one to another place in France and Germany to cure the ills of the power plants. On my return to Paris I submitted to one of the administrators of the Company, Mr. Rau, a plan for improving their dynamos and was given an opportunity. My success was complete and the delighted directors accorded me the privilege of developing automatic regulators which were much desired. Shortly after there was some trouble with the lighting plant which had been installed at the new railroad station in Strassburg, Alsace. The wiring was defective and on the occasion of the opening ceremonies a large part of a wall was blown out thru a short-circuit right in the presence of old Emperor William I. The German Government refused to take the plant and the French Company was facing a serious loss. On account of my knowledge of the German language and past experience, I was entrusted with the difficult task of straightening out matters and early in 1883 1 went to Strassburg on that mission. 

 

나는 결코 그 깊은 인상을 잊을 수 없다 마법의 도시가 내 마음에 만들었던. 도착후 며칠동안 나는 그 새로운 광경에 완전히 넋놓고 거리들을 돌아다녔다. 끄는 것들은 많았고 저항불가였다, 그러나, 아까비, 수입은 받자마다 써버렸다. 나보고 이 새로운 행성에서 어떻게 지냈냐고 미스터 푸스카스 가 물었을때, 나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다음 문장으로 서사했다. "그 달의 마지막 29일은 가장 터프했다!" 나는 다소 규칙적인 생활을 했었는데, 지금 표현으로는 "로즈벨트 방식"으로 이름지을라나. 매일 아침, 날씨상관없이, 나는 성 마르셀 거리, 거기서 내가 살았는데, 거기서 나와서 센느 강의 수영장에 가서, 물로 들어가서, 27 바퀴를 돌고 다음 한시간 걸어서, 회사의 공장이 있는 이브리 에 닿았다. 거기서 나는 땔깜장인의 아침을 7시 반에 먹고는 격렬히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그 사이엔 그 공장의 매니저 인 찰스 배철러 를 위해 호두류를 깨면서. 그는 친한 친구였고 에디슨의 동료였다. 여기서 나는 몇몇 미국인들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진짜 사랑에 빠졌다, 나의 당구 실력 때문에. 이들에게 나는 나의 발명을 설명했고, 그중 하나인, 기계 부문의 수장인 미스터 커닝햄 이 주식회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나에게 아주 코메디 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조금도 몰랐다, 단지 그냥 저런게 아메리칸 의 일하는 방식이구나 정도외엔. 그것에서 아무진도도 안나갔지만, 몇달동안 나는 프랑스 와 독일 의 이곳저곳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 발전기들의 병을 치료하려고. 파리로 돌아와서 그 회사의 관리자들중 한명인 미스터 로 에게 보내졌고, 그의 다이나모의 개량에 대한 일은 나에게 주어졌고 내가 완벽히 마무리해주었고 기뻐하는 임원들은 나에게 자율적인 권한을 주었다. 그 직후에,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에 신설된 기차역에 설치했었던 조명시설에 문제가 생겼다. 배선이 문제였고 개관 기념식에서 한 벽의 대부분이 꺼졌 버렸다 합선이 되면서, 그것도 늙은 빌헬름1세 황제 앞에서. 독일 정부는 그 공장 인수를 거절했고 프랑스 회사는 심각한 손실에 직면했었다. 내가 독일 언어를 잘알고 지난 경험 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그 일을 해결하라는 어려움 임무들 맡고 1883년 시작에 스트라스부르 로 갔다. 

 

Some of the incidents in that city have left an indelible record on my memory. By a curious coincidence, a number of men who subsequently achieved fame, lived there about that time. In later life I used to say, "There were bacteria of greatness in that old town. Others caught the disease but I escaped!" The practical work, correspondence, and conferences with officials kept me preoccupied day and night, but, as soon as I was able to manage I undertook the construction of a simple motor in a mechanical shop opposite the railroad station, having brought with me from Paris some material for that purpose. The consummation of the experiment was, however, delayed until the summer of that year when I finally had the satisfaction of seeing rotation effected by alternating currents of different phase, and without sliding contacts or commutator, as I had conceived a year before. It was an exquisite pleasure but not to compare with the delirium of joy following the first revelation. 

 

그 도시에서의 몇몇 일들은 내 기억에 지울수 없는 기록으로 남겨졌다. 재밌게도 일치하는데, 이어서 명성을 이뤄낸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에 거기서 살았다. 후에 나는 말하곤 했다, "그 오래된 도시엔 위대함 이라는 박테리아 가 있었다. 다른이들은 그 병에 걸렸지만, 나는 탈출했다!" 작업, 통신, 공무원들과의 회의 는 나의 밤낮을 지배했지만, 내가 주도할 수 있게 되자, 나는 기차역 맞은 편의 설비가게 에서 간단한 모터 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 그 가게는 파리에서 부품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 실험의 결론은 그해 여름까지 미뤄졌고 그때서야 나는 마침내 다른 단계의 교류 에 의해 발생하는 회전 보며 만족했다. 접촉면인 코뮤테이터 가 없어도 되는 거였고, 이건 내가 1년 전에 (공원에서) 떠올랐던 그것이었다. 그건 특별한 즐거움 이었지만, 그 첫번째 계시를 잇는 터지는 기쁨에 비할 것은 못되었다. 

 

Among my new friends was the former Mayor of the city, Mr. Bauzin, whom I had already in a measure acquainted with this and other inventions of mine and whose support I endeavored to enlist. He was sincerely devoted to me and put my project before several wealthy persons but, to my mortification, found no response. He wanted to help me in every possible way and the approach of the first of July, 1919, happens to remind me of a form of "assistance" I received from that charming man, which was not financial but none the less appreciated. In 1870, when the Germans invaded the country, Mr. Bauzin had buried a good sized allotment of St. Estephe of 1801 and he came to the conclusion that he knew no worthier person than myself to consume that precious beverage. This, I may say, is one of the unforgettable incidents to which I have referred. My friend urged me to return to Paris as soon as possible and seek support there. This I was anxious to do but my work and negotiations were protracted owing to all sorts of petty obstacles I encountered so that at times the situation seemed hopeless.  

 

내 새 친구들 중에, 그 도시(스트라스부르) 의 전 시장 미스터 보장. 이 있었는데, 이번 일과 더하여 다른 나의 발명들에 관심을 갖았고, 그의 지원을 나는 내 목록에 포함했다. 그는 진심 나에게 헌신했고 내 프로젝트를 몇몇 부자들에게 추천했으나, 창피하게도 아무런 답은 없었다. 그는 나를 모든 방면으로 돕고 싶어했고, 1919년 7월 1일이 다가오자, 나는 그가 나에게 주었던 "도움"의 형태가 생각난다. 나는 그 매력적인 사람으로 부터 재정적 지원은 아니지만 그에못지 않은 것을 받았다. 1870년에 독일인들은 그 지역을 침입했고, 미스터 보쟁 은 1801년 산 생테스페 포도주를 적당한 크기로 묻었었는데, 나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곤 그 귀한 음료를 소비하기로 한거다. 이 일은 내가 이미 언급했었던 그 잊을수 없는 사건 이다. 나의 친구는 나를 독촉해서 파리로 돌아가라고 했다 가능한한 빨리, 그리고 거기서 지원을 구하라고. 이것은 나에게 조바심을 일으켰지만, 나의 일과 과정들은 모든 사소한 방해들로 늘어지고, 그런 희망은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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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26세 때 부다페스트 공원 걷다가 리비얼 레벌레이션, 괴테의 시를 읊으면서 계시를 본겨 회전 자기장의. 그리고 몇달 후 바로 들어간 곳이, 헝가리 중앙전신국 이야. 전화국 을 바로 만들 때 요 사이에 들어간거고, 배선 설계에, 전화국 지점 놓는 등을 한겨. 헝가리 가 지금 듣보잡 처럼 보이지만, 저당시 대륙에선 웨스턴 못지않게 바로바로 얘들은 다 한겨. 얘들은 이게 하나야 이게. 유럽이란건 정말 신기한거야 이 극동 과 비교하면. 

 

전류 의 단위 암페어 의 앙페르 가 1775고 다음이 패러데이 고, 픽시 가 다이나모 만들어서 교류 될때 코뮤테이터 아이디어 준 이가 또한 앙페르 야. 모두 동시대여. 밀라노 사람 알레산드로 볼타 가 이 사이 1800 의 전압 에 화학 전지여. 앙페르 전 1745가 라이덴 병의 전기 를 물병에 모으는겨. 클라이스트 는 동포메라니아고 라이덴 무슈부르크 는 네덜란드에, 저걸 힌트 준 인간은 전기 키스 인 보제,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걸랑.  쟤들은 저게 국적 이란게 의미가 없어 저게. 

 

극동 조선 이란 들은 상상 조차 못하는거고, 이 들은 걍 공자 맹자 주자 만 달달달달 ㅋㅋㅋㅋ 딴 생각하면. 찢어죽여 이 조선들은. 그래서 지금도 지들 존엄 갖고 머라하면 조때요 다른 생각하면 조때요 지들 홍위병 풀어서 날리가 나고. 저런 홍위병이 쟤 와 쟤들 목숨줄이야. 정부 기관 들의 돈으로 광고 비 쳐 주면서 자본주의 논리 개랄지 해대는거고. 쟤 는 쟤들의 생존의 이유야. ㅋㅋㅋ. 

 

나아아가라 폭포 교류 발전기 세우면, 그게 바로 서는게 또한 헝가리야. 아 음청나 이 헝가리. 마션즈 라는 헝가리 싸이언티스트들. 저런 헝가리 가 민족주의 더하기 사회주의 로 들어가면서, 사람이 사라지는거야. 생각이 사라지는겨 이게. 희망이란 없는겨. 중국 애들 같은 종족 이 버티는건, 오직, 절도 여 절도. 훔치기. 훔치기 외에는 쟤들은 생존 할 수가 없어 양키 의 문명 속에서. 

 

부다페스트에 1882년 이고, 1년 정도 안돼 여기가. 바로 프랑스 파리로 가. 부다페스트 에서 일했던 상관 과 함께. 그리고 1883년 연초 에 스트라스부르 로 파견 나간거고. 미국에 가는게 1884년 이야 28세. 대륙에서 현장일은 2년 한겨. 

 

19세기 말 의 프랑스 파리여 저게. 크로아티아 에서 자란 세르비안 테슬라 의 눈에 비친. 폴리텍 인 그라츠 도 스튀리아 의 수도 여. 비엔나 아래고 여기도 나름 대도시야. 프라하 도 갔다가 부다페스트 도 가본겨. 그런데 파리 는 전혀 차원이 다른거야 이 사람 눈에. 저당시 파리 란건, 어마어마했던겨 슬라브 인간의 눈엔. 저게 그대로, 볼레스와프 프루스 가 본 파리여. 야 대체 우리 폴리쉬 라는 민족 은 머했냐 이 파리 와 비교하면. 더러운 민족것들. 한 짓이라곤 전혀 없으면서 민족 민족 찾기만 하는애들. 저런 소설이 지금 폴란드 인들이 가장 좋아해. 

 

저당시 파리는 자유 그 자체여 저게. 그런데, 알맹이가 없는 자유야. 지도층은 완벽히 타락한. 민중 선동 하는 데모크라시 의 절정이여 저게. 보오전쟁 1866 보불전쟁 1871. 외워 이건. 프러시아 가 오스트리아 조지고, 프러시아 는 북부동맹,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의 모나키, 를 만드는겨. 그리고서 프러시아 가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를 조지고, 프러시아는 북부동맹에서 독일동맹 으로 가는겨. 프랑스 는 보불전쟁에서 지고, 나폴레옹3세 쫓겨나고, 제3공화국 으로 세계대전 까지 거는거고 할때, 저때 의 파리여. 완벽한 자유 지만 완벽한 타락 의 파리. 를 보고 테슬라 가 눈돌아 가는겨. 

 

스트라스부르 가, 보불전쟁 1871때 다시 프러시아 가 갖고 온겨. 태양왕 루이 가 리유니온전쟁 에 9년전쟁 때 도장받고 갖고 온걸 170년 지나서 다시 갖고 오는겨. 저놈의 알자스  저건 독일땅이여 원래  중세 천년동안 시작이. 그럼서 머 저걸 갖고 마지막 수업 어쩌고 우리 언어 못쓰네 ㅋㅋㅋ 완벽한 개소리여 저건. 저런 이야길 교과서에 싣는건 이따위 조선 땅에서나 저런 말도 안되는 푸념을 쓰는거걸랑. 좀 제대로 알고나 교과서 에 번역한걸 실어라. 이 나라는 말야 정말 이 리더층의 지쩍 수준이란건 너무 미개한겨 이게. 

 

다 늙은 빌헬름1세 의 개관식에서 쇼트서킷, 합선 일어나서 조명이 날라가. 저걸 파리 에디슨 회사 에서 한겨. 저거 해결하러 간겨 테슬라 가. 

 

저러면서, 다음 뒤에 나오는게, 독일 인간들 이야기야. 조명등 하나 다는 것 조차, 육칠센치 차이 조차, 상관의 상관의 에 검사를 받아야 해. 테슬라 는 독일인의 엄격함 정밀함 신중함 에 대해 사례를 말하는거지만, 너무나 한심하다는거야 저게. 테슬라 는 절대 누구 욕을 하지 않아. 걍 완곡하게 표현할 뿐이야. 

 

쟤들의 저 고리타분한 철저함 과 질서. 피라미드적 지시 구조. 이걸로 한몸처럼 움직이는겨 이 독일애들이. 이 고지식함이 전쟁으로 가면 어마무시한 힘인겨 이게. 반대로 저 자유와 방종의 프랑스 는 아무런 힘매가리가 없는겨. 얘들은 독일애들에게 조차 안되는겨 이게. 19세기 지나면서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겨 그래서. 당연히 저런 미개한 독일 조차, 영국에 안되는거고. 

 

저런걸 다 담고 떠난게, 미국이야. 어마무시한 나라야. 얘들이 세계대전 두개를 다 마무리해주는겨. 그 경험을 그대로 테슬라 가 듣보는거야. 미국에 가자마자, 백년이 뒤진줄 알았거든 미국이란곳은, 바로 생각을 바꿔, 대륙이 백년 이상 뒤진거구나!

 

스트라스부르, 골때린다 이거야. 그레이트니스 라는 박테리아 에 다들 걸린겨 ㅋㅋㅋ. 대게 이름짜 있는 들은 자기의 명성에 취해서 그 시대 그자리에 눌러 산다는거야. 저 도시 를 가보니, 저게 그야말로 중세 천년 의 도시여 저게. 바닥의 독일 신성로마 에 바로 프랑스 의 문화에 다시 독일땅이 된거고, 나름 자부심이 엄청난거야 저 시민들이. 

 

지들이 위대하다 는 질병. 

 

나는 탈출했다! ㅋㅋㅋ. 

 

위대하다 는 애들 치고, 안허접한 애가 없는거지. 

 

쟤들이야 그레이트 한 역사가 너무나 찐해서 그럴만도 해. 

 

 

 

우드차퍼 의 아침이란건, 장작패는 농부 의 아침 이란게 후라이에 돼지고기에 하튼 거하게 차린 무거운 식사여. 저때 식욕이 무지 좋았다는거고. 

 

Saint-Estèphe 쌩테스페 와인 이란게, 이 와인 등급 매기는것도 나폴레옹이 만든거고, 와인 하면 레드 와인이고 다음이 화이트 와인이고, 와인하면, 보르도 에, 지롱드 그 삼각모양 칼날 습지여. 지롱드 중에서도 왼쪽변의 메독 Médoc 이란 곳의 쌩테스페 란 마을 의 레드와인 이 최고여. 저 스트라스부르 시장이, 보불전쟁 1871때 프러시안이 처들어올때 저걸 숨겨놓았다는거고, 저걸 테슬라 에게 대접한겨. 테슬라 는 최고의 미식가여. 자기가 받아본 선물 중에 최고 란거고 그래서. 

 

또 설명안한 구문이 있나? 아 저걸 일일이 다 설명할 수가 없어서리. 모아서 말하는건데 내가. 

세븐 리그 부츠. 라는건 쟤들 동화에 나오는 흔한캐릭. 1리그 가 영어권에선 3마일. 저 부츠 신으면 한걸음 20마일 삼사십키로 가는거고

로즈벨트 패션. 이란건 띠어도어 로즈벨트 고 공화당 이고 테슬라가 자선전 쓰던해 죽었고. 스트레뉴어스 라이프 와 붙어다녀. 뉴욕주지사 일때 한연설. 운동하고 규칙적 활기찬게 아메리칸 이라며. 지금 피트니스 에 달리기 하는 아메리칸 문화 를 만든 인간이고 연설이고 그 단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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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만난 찰스 배철러, 가 에디슨 이 몸무게 재는 얘기의 그 배철러 고, 배철러 는 파리 에 지사 를 관리 하러 미국에서 가끔 오는겨. 에디슨 의 동업자 이면서 참모여. 이 배철러 의 추천으로 직접 에디슨 을 보러 간겨 1884년 28세 에. 그리곤, 몇달 에디슨 밑에서 일하다가, 조오온나게 무식해 에디슨이. 밤낮없이 일하다가, 에디슨이 그 일 성공하면 오만달러 준다고 했걸랑. 얘가 안주는겨. 미국식 농담이라며. 지금 오만달러가 오천만원이면 저때는 오십억이나 기백억 될라나. 바로 나온겨 에디슨 밑에서. 그리고 테슬라 가 된건데. 

 

Just to give an idea of German thoroness and "efficiency," I may mention here a rather funny experience. An incandescent lamp of 16 c.p. was to be placed in a hallway and upon selecting the proper location I ordered the monteur to run the wires. After working for a while he concluded that the engineer had to be consulted and this was done. The latter made several objections but ultimately agreed that the lamp should be placed two inches from the spot I had assigned, whereupon the work proceeded. Then the engineer became worried and told me that Inspector Averdeck should be notified. That important person called, investigated, debated, and decided that the lamp should be shifted back two inches, which was the place I had marked. It was not long, however, before Averdeck got cold feet himself and advised me that he had informed Ober-Inspector Hieronimus of the matter and that I should await his decision. It was several days before the Ober-Inspector was able to free himself of other pressing duties but at last he arrived and a two-hour debate followed, when he decided to move the lamp two inches farther. My hopes that this was the final act were shattered when the Ober-Inspector returned and said to me: "Regierungsrath Funke is so particular that I would not dare to give an order for placing this lamp without his explicit approval." Accordingly arrangements for a visit from that great man were made. We started cleaning up and polishing early in the morning. Everybody brushed up, I put on my gloves and when Funke came with his retinue he was ceremoniously received. After two hours' deliberation he suddenly exclaimed: "I must be going," and pointing to a place on the ceiling, he ordered me to put the lamp there. It was the exact spot which I had originally chosen,

 

독일인의 철저함과 "효율성"의 개념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는 여기 다소 재밌는 경험을 언급하겠다. 16 씨피 커맨드포스트 초소의 백열등 램프 가 현관에 둬야 하는데, 최적의 위치를 선택하고는 내가 지시했다 정비공에게 배선을 하라고. 잠시 일하더니 그는 결론내렸다 엔지니어한테 물어봐야 한다면서 자기는 여기까지라며. 그 엔지니어는 몇번 반대를 하고는 결국 수락했다 그 램프 는 내가 지정했던 곳에서 2인치 육칠센치 에 달것을, 그리고 일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엔지니어가 걱정을 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감독관 애버덱 이 보고받아야 한다는거다. 그 중요한 사람은 불려져서는 조사하고 토론하고 결론지었다, 그 램프는 2인치 뒤로 이동되어야 한다고, 거긴 내가 마크했던 곳이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애버덱 은 불안해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자기가 그 문제를 알렸다고 자기보다 윗감독관인 히에르모니우스 에게. 그래서 내가 그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는거다. 며칠이 지나고 그 윗감독관이 자기의 일을 다 하고는 마침내 와서는 두시간 토론이 이어졌고, 그는 그 램프 를 2인치 더 멀리 이동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이 마지막일거라는 나의 희망은 흩어사라졌다, 그 윗감독고나이 돌아와서는 나에게 말했다 " 정부위원 푼케 가 아주 특별난 사람이라서, 그의 분명한 수락 없이는 나는 이 램프 의 위치에 대해 감히 지시를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그 위대한 사람의 방문일정이 잡히고, 우리는 청소 를 시작하고 아침 일찍 닦기 시작했다. 모두는 빗질을 했고, 나는 장갑을 끼고, 푼케 가 그의 수행단들과 들어와서 환영식을 받았다. 두시간 숙고 후에 그는 갑자기 소리쳤다. " 나 가야만 해" 그리곤 천장의 한 곳을 가리키면서, 그는 나에게 명령했다 거기에 램프를 달라고. 거긴 내가 최초에 선택했던 바로 그 위치 였다. 

 

So it went day after day with variations, but I was determined to achieve at whatever cost and in the end my efforts were rewarded. By the spring of 1884 all the differences were adjusted, the plant formally accepted, and I returned to Paris with pleasing anticipations. One of the administrators had promised me a liberal compensation in case I succeeded, as well as a fair consideration of the improvements I had made in their dynamos and I hoped to realize a substantial sum. There were three administrators whom I shall designate as A,B and C for convenience. When I called on A he told me that B had the say. This gentleman thought that only C could decide and the latter was quite sure that A alone had the power to act. After several laps of this circulus vivios it dawned upon me that my reward was a castle in Spain. The utter failure of my attempts to raise capital for development was another disappointment and when Mr. Batchellor prest me to go to America with a view of redesigning the Edison machines, I determined to try my fortunes in the Land of Golden Promise. But the chance was nearly mist. I liquefied my modest assets, secured accommodations and found myself at the railroad station as the train was pulling out,. At that moment I discovered that my money and tickets were gone. What to do was the question. Hercules had plenty of time to deliberate but I had to decide while running alongside the train with opposite feelings surging in my brain like condenser oscillations. Resolve, helped by dexterity, won out in the nick of time and upon passing thru the usual experiences, as trivial as unpleasant, I managed to embark for New York with the remnants of my belongings, some poems and articles I had written, and a package of calculations relating to solutions of an unsolvable integral and to my flying machine. During the voyage I sat most of the time at the stern of the ship watching for an opportunity to save somebody from a watery grave, without the slightest thought of danger. Later when I had absorbed some of the practical American sense I shivered at the recollection and marvelled at my former folly. 

 

그렇게 여러 일들이 있고 며칠이 지났고, 무슨 비용이 들던 나는 거기서 성과를 이루어야 했었고, 마침내 나의 노력들은 보상 되었다. 1884년 봄에 모든 차이들은 조정되었고, 그 공장은 공식적으로 승인받았고, 나는 파리로 돌아왔다 즐거운 기대감으로. 관리자들의 한명은 나에게 백지수표 를 약속했었다 내가 성공했을 경우, 내가 그들의 다이나모 에서 이뤄낸 개선사항들을 제대로 고려해본다면 그만큼 또한 물론이고. 그래서 나는 실질적인 두개의 합의 보상을 기대했다. 세명의 관리자들이 있었다, 에이 비 씨 라고 이름짓겠다 편의상. 내가 에이 에게 갔을 때 비 가 답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 신사는 생각했다 씨 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 후자인 씨 는 확신했다 에이 만이 그런 행동할 권력 이 있다고. 돌고도는 생체들의 회전놀이로 이런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나의 보상은 스페인의 성 이라고(꿈). 개발을 위한 자금을 땡기려는 나의 시도가 완전히 실패하는건 또다른 실망이었다. 그리고 미스터 배철러 가 나에게 에디슨 기계들의 재설계를 위해 미국으로 가라고 부추겼을때, 나는 결심했다 나의 인생을 황금이 약속된 땅 에 걸겄을. 그러나 기회는 거의 사라졌다. 나는 내 웬만한 재산을 녹여서 현금화 했고, 숙박시설도 정리하고, 기차역에 역에 있었고, 기차는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 돈과 티켓들이 사라진 것을. 무엇을 해야하나 가 질문이었다. 헤라클레스 는 생각할 시간이 많았지만, 나는 그 기차를 따라 달리면서 결정해야 했다, 내 두뇌에서는 콘덴서 의 진동처럼 정반대의 감정들이 치솟으면서. 내 손기술에 의해서 제시간에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무시할만한 불쾌감과 함께 있을 법한 경험들을 통과한 후, 나는 뉴욕 행에 올랐다, 내 얼마없는 소지품과 함께, 그건 내가 써놓았던 시들 몇개와 논문들, 답없는 적분의 해결책 과 내 비행기계 에 관련 된 한묶음의 계산들 이었다. 그 항해 동안, 나는 배의 후미 에서 대부분 앉아서, 누가 물의 무덤에 빠지면 구할 기회 가 있나 했지만, 위험하단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중에 내가 현실적인 미국인의 감각을 습득하곤 나는 떨었다 그 회상에, 그리고 내 이전의 어리석음에 대해 놀라와했다. 

 

에디슨 이 역장 아들 구해서 팔자 피기 시작한 이야길 알걸랑. 아마 그것과 연관된 이야기 일거고 물빠지면 사람 구해줄까. 소매치기 당해서, 밀항한듯 보이고 일단 저 문장만 보믄. 걍 완전히 거지 차림으로 온겨 ㅋㅋㅋ. 돈과 티켓 사라진 걸 아는 순간 걍 떠나는 기차 잡은듯 하고. 저때가 1884년. 28세. 사회생활이 끽해야 1882 부터 2년 이야. 

 

I wish that I could put in words my first impressions of this country. In the Arabian Tales I read how genii transported people into a land of dreams to live thru delightful adventures. My case was just the reverse. The genii had carried me from a world of dreams into one of realities. What I had left was beautiful, artistic and fascinating in every way; what I saw here was machined, rough and unattractive. A burly policeman was twirling his stick which looked to me as big as a log. I approached him politely with the request to direct me. "Six blocks down, then to the left," he said, with murder in his eyes. "Is this America?" I asked myself in painful surprise. "It is a century behind Europe in civilization." When I went abroad in 1889 - five years having elapsed since my arrival here - I became convinced that it was more than one hundred years AHEAD of Europe and nothing has happened to this day to change my opinion.

 

내가 이 나라의 내 첫인상들을 단어들로 만들어 본다면. 아라비안 이야기에서 나는 지니가 사람들을 꿈의 땅으로 이동해서 즐거운 모험을 통해 사는 것을 읽었는데, 나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다. 지니 는 나를 날랐다, 꿈들의 세상에서 현실들의 세상 속으로. 내가 떠났던 곳은 아름다왔고 예술적이었고 환상적이었다 모든 면에서; 그런데 내가 여기서 본것은 기계적이었고 거칠고 매력없었다. 건장한 순경이 스틱을 흔들면서 나를 큰 통나무 보듯이 보았다. 나는 그에게 공손히 다가가서 길을 가르쳐주길 요청했다. "여섯 블럭 아래, 그리고 왼쪽으로" 그는 눈에 살의 를 품고 말했다. "이게 아메리카인가?" 나는 고통에찬 놀라움으로 자문했다. "유럽보다 문명에선 한 세기가 뒤쳐졌어" 내가 1889년에 외국에 갈때 -내가 여기 미국 도착한 이후 5년이 지나서- 나는 확신했다 미국은 유럽보다 일백년 이상 앞섰다. 그리고 오늘날 까지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할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컴퍼니 라는 회사 가 문명을 만들었다고, 내가, 오직 내가 말한건데 이것도. 잉글랜드 의 모스크바 컴퍼니 에 레반트 컴퍼니, 저런 이야기가 한글로 된 것도 없거니와, 웨스턴애들이 자기들 역사가 얼마나 대단한 줄 몰라, 자기들의 역사라서.

 

테슬라 가 파리에서 에디슨의 회사에 다니면서 미국인들을 알게 되고, 거기서 커닝햄 이 자기에게 주식회사 만들어서 하자, 라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겨. 미국식 농담이구나. 회사 라는걸 몰라. 미국 이란건, 영국의 카피본 미국이란건, 회사 가 만든거야 저건. 잉글랜드 의 컴퍼니들이 미국에서 그야말로 금융과 엮여서, 도금시대 의 미국 을 만든겨. 이 중심이, 제이피모건 에 제너럴일렉트릭 이고 전기 이야기이고, 저때 등장한 단어가 타이쿤 tycoon 이야. 재벌산업가 여. 여러 투자자들이 얽히고 뭉쳐서 거대 자본가들을 만들고 이들의 힘으로 온갖 산업 시설을 건설하는게, 미국 이란 나라의 길디드 에이지 1870-1900 이야. 

 

이런 개념이 전혀 없는게, 프랑스 여. ㅋㅋㅋ. 이 들은 여전히, 회사 라는걸 몰라. 

 

잉글랜드 라는건, 그래서, 정말, 위대한 나라야. 컴퍼니. 이 컴퍼니 가 현대 문명을 만든거고, 이 컴퍼니 의 시작은 잉글랜드야. 헨리 7세 는 위대한 인간이야. 뒤를 이은 헨리 8세. 얘들이 저 플랑드르 에 자기들만의 컴퍼니 를 짓는겨. 사람들에게 컴퍼니 만들어서 돈벌라. 사법시스템도 돈이야. 얘들만큼 사법시스템이 발달한 곳이 없는겨 그래서. 

 

위대해 저놈의 잉글랜드는. 니덜은 모를텐데 이 느낌은. 보면 볼수록. 

 

이 회사 를 혐오하는 , 회사를 적폐 시선으로 두는, 이 조선 민국 이란 곳은, 정말, 망해야 해. 

 

정부가 주도 해서 하는 나라는, 필멸 이야. 

 

문명이란건 하나의 권력이 중심에서 법을 만들고 따라라, 해서 만들어지는게 절대 아냐. 

 

자유 야 자유. 자유 에 의해서, 합의 된 최적의 법 에 따랐을 뿐이야. 이 시스템이 가장 잘 드러난게, 저 19세기 말이야. 세계의 모든 표준들이 정해지기 시작하는게, 또한 저 시대야. 

 

Pope and Edison founded their own company in October 1869, working as electrical engineers and inventors. Edison began developing a multiplex telegraphic system, which could send two messages simultaneously, in 1874.  

 

에디슨 이 처음 회사를 세워보는게, 포프 라는 7세 연상의 개발자 와 함께 서기 1869, 22세 때 세워. 역장 아들 구해준 인연으로 통신사 하다가 AP 연합 통신회사 에 파견 나가서 밤에 실험하다가 사장실에 황산 쏟아서 짤리고 만든 회사야. 그리고 멘로 파크 로 가는게 1876년. 29세 여. 그리고 네개 회사들을 돌리고, 이게 하나로 합치는게 1890년. 요게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이야. 43세. 네 회사 중에 조명회사 로 백열등 만드는거고, 에디슨 머신 웍스 가 다이나모 트랜스포머 등 발전기 변압기 이런걸 만드는거고, 테슬라 가 다니던 파리 회사 가 이 회사여 이름이걍 대륙의 에디슨 회사 일껴. 네개 회사들이 1890년 에서야 에디슨 지이 GE 가 되고, The Thomson-Houston Electric Company was formed in 1882  톰슨 휴스톤 회사 와 에디슨 지이 가 합병해서, 2년후냐 에디슨 지우고 그냥 제너럴 일렉트릭 이 되는겨. 에디슨 은 교류에 패해서 물러난거야 전기사업에선. 

 

머신웍스 가 서기 1881년 정도로 봐, 톰슨 휴스톤 도 저게 다이나모 같은 발전기에 부품 만드는업체여. 이들이 1881년 1882년 이야. 

 

 

Allmänna Svenska Elektriska Aktiebolaget (English translation: General Swedish Electrical Limited CompanySwedish abbreviation: ASEA) was a Swedish industrial company. 1883 

 

Brown, Boveri & Compagnie (BBC) was a Swiss group of electrical engineering companies. It was founded in Zürich, in 1891 by Charles Eugene Lancelot Brown and Walter Boveri who worked at the Maschinenfabrik Oerlikon  

 

서기 1883년 에 스위든 의 전기 회사가, 알메나 스벤스카 엘렉트리스카 악티에볼라겟. 제너럴 이라는 알메나 는 스위든 이 먼저 쓴거야.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은 1890년 에 네개 회사 합쳐서 만든거니까. 이때 제너럴 은, 장군 직함 이었던 인간이 투자 해서 제너럴 했다는 설이 있걸랑. 전기 총괄 하는 제너럴 은 스위든이 처음인거지. 

 

톰슨-휴스톤 전기 회사 가 1882년 이지만 저 이전에 두세개 회사 가 합친겨. 전기 회사들이 먼저 들 이렇게 자잘하게 있었어.

 

스위스 에 1891년 에 브라운 과 보베리 가 만든 회사 BBC 야. 스위든 의 ASEA 와 스위스 의 BBC 가 합쳐

 

ABB Ltd (GermanABB AGFrenchItalianRomanshABB SA),[1] formerly ASEA Brown Boveri, is a SwedishSwiss multinational corporation headquartered in Zürich, Switzerland,[7] operating mainly in roboticspower, heavy electrical equipment, and automation technology areas. It is ranked 341st in the Fortune Global 500 list of 2018 and has been a global Fortune 500 company for 24 years.[8] Until the sale of its electricity division in 2020, ABB was Switzerland's largest industrial employer.[9] ABB is traded on the SIX Swiss Exchange in ZürichNasdaq Stockholm and the New York Stock Exchange in the United States  

 

ABB. 서기 1988년. GE 처럼 가전제품부터 전기관련 엔진 장비 맹그는겨. 스위든 ASEA 부터면 140년 된 회사여. 본사 가 취리히 여.

 

Jonas Wenström (born August 4, 1855 in Hällefors, died December 22, 1893 in Västerås) was a Swedish engineer and inventor. He invented the three-phase electric power system, the basis for ASEA (later ABB).[1]

About the invention of electric light, Wenström wrote: "Edison's new invention of electric light: a glowing carbon strip, is the same thing that I discovered a year ago ... If I had his laboratory, and resources, I would have done the same and better ... a graphite strip between two mica plates provide a more effective light than Edison's."  

 

요나스 벤스트룀. 스위든 핼레포쉬 에서 나서 베스터로스 에서 죽어. 서기 1855-93. 테슬라 보다 한살 어려. 38세에 죽었는데, 이사람은 3상 전력 을 개발했거든. 테슬라 는 2상 전력이야. 페라리스 는 3상 전력이야. 대륙은 3상 이고 미국 테슬라 는 2상 이야. 같은 교류 진영이고. 요나스 벤스트룀 은 스위든 의 ASEA 에서 일했던겨. 쓰길 "에디슨의 전기 조명 발명은, 내가 1년전에 개발했던 것과 같아..나도 그의 실험실을 갖고, 자원을 갖았다면, 똑같은 그리고 더 좋은 것을 개발 했을 텐데..." 

 

유럽 대륙에 말이야, 저때 모든 사상들이 터진거고, 자연과학적 개발들이 저렇게 동시대에 따로들 그냥 터진겨 저게. 

 

한 사람이 없었어도, 다른 사람이 했어. 

 

에디슨 이 없었어도, 테슬라가 없었어도, 다른 누군가가, 했어. 왜냐면 저 웨스턴 문명이란건, 그 바닥의 역사 의 물결 이 만들은 거야. 저건 절대 우연이 아냐. 그리스 로마 를 익힌 중세 천년에 근대 4백년 이 만든게 19세기 라는거야. 저들만의 역사 가 무수수한 인간들을 동시대에 배출 했을 뿐이야. 

 

조선 같은 극동, 조선 중국 인도 극동에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에는, 인간 인물이 나올 수가 없어. 

 

역사 자체가 후진 역사 걸랑. 

 

후진 역사를 그레이트 하다고 떠받드는 들이 권력집단을 쥐고 있걸랑. 걍 세균  똥 떵어리야 이 아시아 란건. 일본 빼고. 참 대단한겨 저 일본 이란 동네가. 이런 후진 정신 에서, 어떻게 저런 애들이 나왔는지 말야. 메이지 유신 의 역사 라는건 엄청난거야 저게. 왜 저런 일이 발생했냐면, 일본 애들은, 지능 이 된거야. 자기들이 그레이트 하지 않구나 너무나 후지구나 라는 자기를 반성할 진단할 지능이 그나마 된거야. 하비에르 이후 4백년 간. 이 지능도 역시나 웨스턴 애들껄 삼사백년 지나면서 생긴 지능이야. 

 

Mikhail Osipovich Dolivo-Dobrovolsky (Russian: Михаи́л О́сипович Доли́во-Доброво́льский; GermanMichail von Dolivo-Dobrowolsky or Michail Ossipowitsch Doliwo-DobrowolskiPolishMichał Doliwo-Dobrowolski; 2 January [O.S. 21 December 1861] 1862 – 15 November [O.S. 3 November] 1919) was a Polish-Russian engineerelectrician, and inventor.  

 

미하일 오시포비치 돌리보-도브로볼스키. 돌리보-도브로볼스키. 1862년 생. 테슬라 보다 6년 어려. 이사람도 독자적으로 교류 3상 전력 발전기를 만든 사람이야 졸 어린 나이에.

 

 After secondary school he went to the Riga Polytechnic at the age of 16. At the end of the 1870s, after the murder of Tsar Alexander II, a wave of repression broke out, with which all progressively oriented students were expelled from their university, which was equivalent to a study ban in all of Russia. Among them was Dolivo-Dobrovolsky. After his forced exmatriculation in Riga in 1881, he left his homeland in 1883 and went to Germany.  

 

아빠쪽은 폴란드 엄마쪽은 러시아 귀족이야. 오뎃사 에서 학교 다녀. 이 우크라이나 오뎃사, 고대그리스 부터 최고여 여긴 의외로. 이 슬라브 진짜 웃기단 말이야 이게 보면 볼수록. 이 슬라브 가 없었으면, 웨스턴 이  심심한거고, 지금 문명이 약해. 슬라브 가 엄청난 재료를 대준겨 게르만 애들에게. 

 

러시아 에 1881년 3월 13일 에 폭탄 테러 가 발생해. 황제 알렉산더2세 가 일요일마다 승마장에 군부대 점호 하러 갔거든. 이사람 훌륭해. 알렉산더2세 전이 아빠 니콜라스1세 고, 니콜라스 1세 의 형이 알렉산더 1세 여 나폴레옹 한테 짜진거고. 그래서 니콜라스 1세 와 그 아들 알렉산더2세 가 개혁을 철저히 하는겨 품이 좋아 이들이. 도톱이 형님이 죽다가 살아난 건 니콜라스1세 여. 니콜라스 의 말년 5년 을 수용소 에서 보내고, 석방될 때, 아들 알렉산더2세 가 취임한겨. 도톱이의 작품들은 모두 이 알렉산더2세 일때 나오는겨. 도톱이가 1881년 2월 에 죽고 바로 다음달에 황제가 죽은겨. 

 

톨스토이 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도 모두 알렉산더 2세 때 나온겨. 이 때가 러시아 의 황금기여 이게. 니콜라스 1세 와 아들 알렉산더2세 의 러시아가. 알렉산더2세 가 저때 진보애들에 의해 암살 당하고, 러시아 는 끝 이난겨. 이 러시아는 지금도 그래서 희망이 없어 이게. 저 아들이 3세 고, 그 아들 니콜라스2세 가 가족 총살 당하면서 끝난겨 사진 한장 찍어주고 바로 드르르륵 갈기걸랑. 인민 노동 사회, 이 세글자 가 합쳐 지는 그 나라 그 집단 은, 지옥 이 돼. 아무런 법이 없어. 적폐만을 위한 법이고 자기들은 법의 위야. 이 조선 빠닥이 곧 경험 하게 될. 

 

 

 

알렉산더 2세 암살 당하고, 진보적 애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는겨. 얘들은 고대 나 근대 나 현대 나, 사람 죽이는 것 외엔 할 줄 아는게 없어. 아들 3세 가 조지는겨. 강력한 중앙집중으로 가는겨. 그에 대한 반발로 다음 니콜라스2세 때 에 레닌 이라는 희대의 하치리가 등장 했을 뿐이야 이게. 

 

돌리보-도브로볼스키 도 리가 에서 쫓겨나. 이사람이 가는 곳이 독일땅이야. 

 

He studied electrical engineering at the Department of Electrical Engineering and Information Technology of the Technische Hochschule Darmstadt (TH Darmstadt) in Germany from 1883 to 1884.  

 

17세 에, 테크니셰 호크슐레, 기술대학교 여. 담슈타트 에 있는. 헷세 가 쪼개져서 카셀 이 선제후권이 되고, 이 담슈타트 는 대공작이 돼. 아마 유일하게 나폴레옹 이후로도 대공작 타이틀을 안버려. 왜냐면 있어보이걸랑. 

 

In 1887, AEG Director General Emil Rathenau offered him a position, whereupon Dolivo-Dobrovolsky remained associated with the company until the end of his life. At the AEG, Dolivo-Dobrovolsky initially made an effort to further perfect direct current technology.  

 

이사람이, 1887년, 25세 에, AEG 에 들어가서 일하는겨. 회사 가 있어야 문명 이 있어. 회사 의 배경으로 발명 을 하는겨. 이게 중세 중앙코트 영지체제 와 전혀 다른겨 이게. 베토벤 도 모차르트 도 스스로 돈을 벌어야 음악할 수 있어. 고흐 가 스스로 돈벌어야 그림 그릴 수 있어. 자기가 개인사업주 가 안되면, 법인의 회사 규모 가 있어줘야 큰 규모의 발명을 할 수 있는겨. 

 

그래서, 스위든 의 저 요나스 벤스트룀 의 말은, 안타까운게 아냐. 능력없는 이의 푸념일 뿐이야. 에디슨 은 어마어마한 인간이야. 자기가 발명하기 위해서  꼬마일때부터 앵벌이 하며 돈 벌이 한 인간이여 저게. 자기가 번돈으로 발명한겨 저게. 

 

돌리보-도브로볼스키 도, 독자적으로 3삼 전력의 발전기를 만들어. 다들 저게 동시에 터진겨 

 

Allgemeine Elektricitäts-Gesellschaft AG [2] (AEGGerman for 'General electricity company') was a German producer of electrical equipment founded in Berlin as the Deutsche Edison-Gesellschaft für angewandte Elektricität in 1883 by Emil Rathenau. After World War II, its headquarters moved to Frankfurt am Main.  

 

AEG . 서기 1883년 에 세운거고, 에밀 라테나우 가 베를린 에 세운건데, 회사명이, 독일 에디슨 회사 여. 전기를 응용하는 독일의 에디슨회사 ㅋㅋㅋ. 게젤샤프트 가 회사 고. 미국 에디슨 회사의 지사 여. 5년 후에 에디슨 을 벗어나서, 영어로 정확하게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 의 독어인 회사를 세운겨. 전기 관련된 건 뭐든지 다 한다는겨. 시안하게 제너럴 이 이 전기 회사들 시작인데 유럽 미국이 동시에. 

 

AEG 가 에디슨 과 이별하게 되는게 저 돌리보-도브로볼스키 의 채용 이야 25세 된. 이사람도 교류여. AEG 도 교류에 꽂힌거고, 

 

 The power output of the motors, which had previously been in test operation, was still only 2 to 3 hp. Nevertheless, the plant was put into operation on the evening of 24 August 1891, and a test committee determined that 75% of the energy generated in Lauffen arrived in Frankfurt. 

 

1888년 26세 에 3삼전력을 만들어내고, 1891년 에, 넥타르 강의 라우펜 에서 생긴 교류전력을 프랑크푸르트 로 송전 하근게 성공을 해. 1891년 수력발전소 의 교류전기 발전에 전송 이 성공한겨. 여긴 3상 전력 이야. 

 

미국 은 에디슨의 직류 여. 유럽은 교류 발전기 가 1891년 에 세워지고 가동이 돼.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가 교류냐 직류냐 결정 이 1892년 이야. 이걸 2상 전력 3상 전력 이냐 도 갈리는겨. 테슬라 가 2상 전력이 미국에선 유리하다며 웨스팅하우스를 꼬셔서리 결국 2상전력의 교류발전기 의 나이아가라 수력 발전 이 되는겨. 

 

 In 1878, the world's first hydroelectric power scheme was developed at Cragside in Northumberland, England by William Armstrong. It was used to power a single arc lamp in his art gallery.[9] The old Schoelkopf Power Station No. 1, US, near Niagara Falls, began to produce electricity in 1881. The first Edison hydroelectric power station, the Vulcan Street Plant, began operating September 30, 1882, in Appleton, Wisconsin, with an output of about 12.5 kilowatts.[10] By 1886 there were 45 hydroelectric power stations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and by 1889 there were 200 in the United States alone. 

 

수력으로 전기 발전하는건, 최초 가 잉글랜드 1878년 이고, 이건 개인 이 작게 해서 아크 램프 켜기 용도 로 만든거고, 나이아가라 에 발전소 가 1881년, 뒤이어 1882년. 이건 직류 여. 1886년 만해도 미국과 캐나다 에 45개의 발전소 들이 있었고 1889년 만해도 200개 가 미국에 있었다. 저게 모두 직류여. 

 

최초의 3상 전력 수력 발전소 는 AEG 의 돌리보-도르보볼스키 의 1891년 라우펜 암 넥타르 이고, 최초의 2상 전력 수력발전소 는 1895년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의 웨스팅하우스 여. 전력 시스템 만든 곳은.

 

Siemens & Halske was founded by Werner von Siemens and Johann Georg Halske on 1 October 1847. Based on the telegraph, their invention used a needle to point to the sequence of letters, instead of using Morse code.  

 

지멘스 라는 독일 회사 가 뮌헨 이 본사인데, AEG 는 베를린 이고, 지멘스 는 1847년 에 전신 회사로 시작해서, 삼사십년 지나면서 전기 발전기 에 조명들을 만들기 시작해 

 

In 1867, Werner von Siemens described a dynamo without permanent magnets.[14] A similar system was also independently invented by Ányos Jedlik and Charles Wheatstone, but Siemens became the first company to build such devices. In 1881, a Siemens AC Alternator driven by a watermill was used to power the world's first electric street lighting in the town of Godalming, United Kingdom. The company continued to grow and diversified into electric trains and light bulbs. In 1887, it opened its first office in Japan.[15] In 1890, the founder retired and left the running of the company to his brother Carl and sons Arnold and Wilhelm. 

 

1867년 에 다이나모 를 시도하고, 회사에서 만들어내는건 유럽에서 여기가 처음이란거고. 1881년 엔 올터네이터, 는 직류를 교류로 바꾸는 장치고, 이걸로 길거리 가로등을 밝히는데 사용하다 영국 도시에. 지멘스 가 1816년 생이여. 테슬라 보다 40년 위고, 가족 들이 운영해. 

 

Alexander Graham Bell (/ˈɡreɪ.əm/; March 3, 1847 – August 2, 1922)[3] was a Scottish-born[N 2] inventor, scientist, and engineer who is credited with inventing and patenting the first practical telephone. He also co-founded the 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 Company (AT&T) in 1885  

 

전화기 그레이엄 벨. 이 테슬라 보다 한살 어려. AT&T 회사 만드는게 1885년. 쟤들은 회사 아니면, 쏘사이어티 단체, 에 학교 가 이게 삼자 가 연합해서, 특허 라는 제도 로 보장하면서, 저런 문명들을 만들어 낸겨 아주 독보적으로. 

 

The first International Exposition of Electricity in Paris ran from August 15, 1881 through to November 15, 1881 at the Palais de l'Industrie on the Champs-Élysées. It served to display the advances in electrical technology since the small electrical display at the 1878 Universal Exposition.[1] Exhibitors came from the United KingdomUnited StatesGermanyItaly and the Netherlands, as well as from France. As part of the exhibition, 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f Electricians presented numerous scientific and technical papers, including definitions of the standard practical units voltohm and ampere.[1]  

 

 

1881년 8월 15일. 테슬라 가 부다페스트 에 파리 를 1882년-84년 이야. 요 직전에, 최초로 국제 전기 박람회.가 파리 에서 열려, 세달 동안. 샹제리제 거리 의 산업 팰리스 에서. 영국 미국 독일 이태리 네덜란드 에서 진열자들이 와. 동시에 최초로 국제 전기위원들 모임 을 하고, 전기 관련 용어들의 표준을 채택해. 볼트 옴 암페어 같은. 

 

이런, 기술적 표준 작업들이, 이 19세기 말에 하는겨. 이런게 이전엔 듣보도 못한겨 이게. 레일 까는거에, 레일 규격, 국제법이란게 국제표준과 함께 이때부터 시작하는겨. 

 

테레비 예전 보다가, 구한말 때 일본들이 멀 하잖냐 ㅋㅋㅋ. 머 해안선을 어쩌고 재는지, 늑약 이라메 머 강제 조약이래. 여러분,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사람들 침묵, 뭔대욤? 국제법 위반이예욧!! ㅋㅋㅋㅋ 아 저거 채널돌리다 보면서  웃기던데. 대체 무슨 국제법 그 이름의 몇 조 몇 항이냐고 ㅋㅋㅋ. 그때  그따위 합의된 법들이 어딨으며, 조선 이란게  혼자서 고립되서 인간들 학살하던 것들이 먼  국제법 운운을 하니. 조선 이란 것 자체가 자연법 사상으로 불법 이야 ㅋㅋㅋ. 포지티브 로 실정법 으로도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그게. ㅋㅋㅋ. 

 

엑스포지션 이라고 단어를 썼는데. 저 박람회 라는게 시작이, 프랑스 여. 

 

The Exposition des produits de l'industrie française (Exhibition of Products of French Industry) was a public event organized in Paris, France, from 1798 to 1849. The purpose was "to offer a panorama of the productions of the various branches of industry with a view to emulation". It was a precursor to the Great Exhibition of 1851 in London. 

 

프랑스 산업 생산물의 박람회. 엑스포지숑 이 영어로 가서 엑시비션 이 된건데. 이게 처음엔, 프랑스 1789 대학살 하고, 5년후에 로베르피에르  목짤라 죽이고, 인민정부 가 총재 정부 인 딕셔너리 가 다스리면서, 민심 수습용으로 할 거 없을까 해서 만든겨. 내전  하고 서로 열나게 죽고 죽이고, 쇼 를 해야 해. 그래서 만든겨. 나폴레옹 3세 가 선거로 되고 황제정으로 돌리면서 없앤겨 저따위 쇼 그만한다면서. 요걸 빅토리아 가 갖고 오는겨. 그래서 1851년에 최초의 런던 박람회 가 생기고, 요걸 받아서 1855년에 파리 박람회 가 벌어지는거고. 따로 만든게 전기 박람회 야. 

 

그러면서 문명의 향연 이 펼쳐지는거고, 19세기 후반에 문명이 터지면서 저게 국제적 쇼 가 되면서, 완벽히 현대 문명이 들어서는겨 저게. 

 

물론 극동 빼고. 조선 빼고. 이 조선 은 여전히, 혼자서, 공자 왈 맹자 왈 주자 왈 하면서, 지금도, 유교 만세 조선 만세 이짓 하는 들이 위인 인거고. 

 

Gustave Pierre Trouvé (2 January 1839 – 27 July 1902) was a French electrical engineer and inventor in the 19th century.

Trouvé was born on 2 January 1839 in La Haye-Descartes (Indre-et-Loire, France) and died on 27 July 1902 in Paris. A polymath, he was highly respected for his innovative skill in miniaturization. 

 

Marcel Deprez (12 December 1843 – 13 October 1918) was a French electrical engineer. He was born in Aillant-sur-Milleron. He died in Vincennes.  

 

Zénobe Théophile Gramme (4 April 1826 – 20 January 1901) was a Belgian electrical engineer. He was born at Jehay-Bodegnée on 4 April 1826, the sixth child of Mathieu-Joseph Gramme  

 

프랑스 에도 저 당시, 구스타브 트루비, 마르셀 데프리, 지노브 그람. 등이 있걸랑. 앙페르 에 픽시 도 있고, 그람 같은 경우는 다이나모 만들어서 자기이름의 회사 를 차려. 

 

 

그런데 대부분 저걸 주욱 보면, 이 프랑스 가 회사 가 없어 이게. 쏘사이어티 에 과학 아카데미 도 잉글랜드 가 먼저고, 프랑스 가 뒤를 잇거든. 이 아카데미 에 소사이어티 가 유럽 전역에 바로 다들 카피를 해서 세워. 얘들은 중앙 차원의 이 쏘사이어티 가 자연과학 을 키운겨 한편으론. 이 자리 가 명예중 명예고. 그런데, 프랑스 는, 정치 자체가 1789 대학살로 절정을 이루면서 개판이 되고, 자유의 파리 라 고 하지만, 남들 을 위한 자리 제공이지, 얘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게 없어. 

 

에디슨 도, 테슬라 도, 회사 가 만든 인간들이야. 

 

타이쿤 이라는 산업 자본괴물들이라고 역사 처진애들이 비하시 해대는, 저들이, 19세기 를 만든겨 저게. 

 

저들의 물량 으로, 거대한 실험 을 할 수 가 있었어. 저런 지원 이, 저런 배경이 없으면, 만들어 낼 수 가 없고, 문명이란 없는겨. 

 

전쟁 한번 없었던 조선 같은 나라는, 문명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도덕은 동물  수준이고. 사람 죽이길 즐기고, 그러면서 역사 포장질 해대는겨 위대한 조선이라며 ㅋㅋㅋ. 여긴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야. 

 

테슬라 가 만났던 미국인들이 주식회사 만들자 라는 말에 미국식 농담 인줄 알았다는 문장이 남아서 재미없는 이야기 함 정리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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