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ˈvɪtɡənʃtn, -stn/ VIT-gən-s(h)tyne;[12] German: [ˈluːtvɪç ˈvɪtɡn̩ˌʃtaɪn]; 26 April 1889 – 29 April 1951) was an Austrian-British philosopher who worked primarily in logic,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the philosophy of mind,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1889-1951. 오스트리안-브리티쉬. 비엔나 태생이고, 아들러 도 비엔나 외곽태생이고, 아들러는 1870년생이고. 

 

비트겐슈타인 도 유대인 이야. 재벌의 아들이야. 고조 할아버지 가 비트겐슈타인 이란 곳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한겨. 이때 나폴레옹이 신성로마를 해체한시대고, 성씨 개정을 해서 아빠성을 쓰라고 법제화 하고, 이때부터 비트겐슈타인 씨가 된건데. 나폴레옹이 저런 짓을 한 이유는, 이 독일 땅이, 너무나 너무나 미개한겨 프랑스에 비해. 나폴레옹이 얘들을 근대화 시켜준겨 영지들 이삼백여개 다 통합하고. 이걸 프로이센 이 받아 먹어서 지금 독일 이 된거야. 이 미개한 독일 게르만 애들의 열등감 콤플렉스 로 터진게 일차 이차 세계대전이야. 저 일차대전의 독일애들 작전계획은 그야말로 개멍청한 거야 저건. 러시아 와의 전쟁이 이들이 지들 이전 작전계획대로 왼쪽을 쳐들어가는 상황은 정말 그야말로 코메디야. 이 찐한 열등감 콤플렉스 가 더 쌓여 터진게 나치 의 등장이고 2차 대전이야. 

 

전쟁이란 것은, 열등감 콤플렉스 의 애들이 만드는거야. 아들러 의 열등감 콤플렉스 는 중요한 테마야. 

 

열등감 콤플렉스 의 땅이 이 극동 애들이고. 이 조선 빠닥에서 열등감 콤플렉스 의 인간들이 권력인거고 얘들이 북조선 과 중국과 합해져서 거대한 열등의 지옥을 만들거야. 이들이 만들어내는게 또한 음모론이고. 정신병동이야 이 저열한 극동은. 

 

열등감 콤플렉스 의 대표적인 애가 히틀러여. 열등감 콤플렉스 의 히틀러 를 중심으로 한 당시 독일 게르만 애들이야. 서유럽에서 가장 개미개하고 가장 열등해버린 감정이 콤플렉스 로 집단으로 뭉쳐져서 터진게 2차 대전이야. 히틀러 는 같은 공유된 열등감 콤플렉스 를 이용한 애일 뿐이야. 

 

Adolf Hitler (German: [ˈadɔlf ˈhɪtlɐ]; 20 April 1889 – 30 April 1945) was an Austrian-born German politician who was the dictator of Germany from 1933 to 1945. He rose to power as the leader of the Nazi Party,[a] becoming Chancellor in 1933 and then assuming the title of Führer und Reichskanzler in 1934.  

 

히틀러 도 1889년 생이여. 비트겐슈타인과 동갑이야. 4월 20일 생. 비트겐슈타인이 4월 26일 생이야. 

 

Adolf Hitler was born on 20 April 1889 in Braunau am Inn, a town in Austria-Hungary (in present-day Austria), close to the border with the German Empire.[15] He was the fourth of six children born to Alois Hitler and his third wife, Klara Pölzl. Three of Hitler's siblings—Gustav, Ida, and Otto—died in infancy  

 

히틀러 는 브라우나우 암인. 인 강에 접한 브라우나우. 어퍼 오스트리아 고지대고, 바바리아 랑 접하는 곳이고, 오른쪽이 저지대 오스트리아 에 비엔나 가 있는겨. Inn 인 강이 아래 알프스 의 인스부룩 지나서 흘러가서 독일 파사우 에서 다뉴브 강 만나는 강이고 이 강이 지금 오스트리아 와 독일 경계야. 이 고지대오스트리아 의 수도가 린츠 Linz 여.

 

이, 린츠 에서, 히틀러 와 비트겐슈타인 이, 린츠 의 Realschule 레알슐레, 중학교 를 같이 다닌겨. 김나지움 은 고등학교고. 당시 히틀러 는 일년 꿇었고, 비트겐슈타인 은 일년 앞선겨. 동갑인 히틀러 가 유대인 비트겐슈타인에게 역시나 열등감이 쩔고 쩔은겨. 

 

이 히틀러 의 타고난 열등감콤플렉스 에 더하여, 이 화살이 유대인 으로 가는건, 당시 레알슐레 에서 만난 유대인 비트겐슈타인 에 의해서여. 

 

이 에겐, 잘난 비트겐슈타인 의 유대인 이 적폐 가 되는겨. 

 

적폐 라고 지적질 하는 그 는, 가장 후진 열등종자 인겨. 마치 상대를 사탄 으로 규정하고, 걔를 이기면 자기는 우월해지는 감정선이거든. 이게 조선 오백년 들 인류 사상 가장 열등한 개미개한 들의 오백년 짓들이었고. 근데 또한 이런 말을 들으면 적폐들의 식민사관이란거지. 실록 의 그 기록들을 못 믿겠다는거야. 조선 오백년은  위대한겨 ㅋㅋㅋ. 이 열등한 애들 도포자락 들에겐. 

 

열등감 콤플렉스 의 인간들을 만나지 말어. 이들은 그야말로 똥이야 똥. 뒤에서 등뒤에서 칼 꽂는 똥이야. 얘들이 곧 전쟁으로 뭉쳐서, 잔혹하게 지워질꺼야. 그리고 인류는 미래로 갈거야. 이놈의 전쟁이란게 대부분 저 열등감 콤플렉스 의 인간들이 일으키는겨 이게. 

 

The Jew of Linz is a 1998 book by Australian writer Kimberley Cornish, in which the author alleges that the Austrian philosopher Ludwig Wittgenstein had a profound effect on Adolf Hitler when they were both pupils at the Realschule (lower secondary school) in Linz, Austria, in the early 1900s. Cornish also alleges that Wittgenstein was involved in the Cambridge Five Soviet spy ring during the Second World War. 

 

린츠의 유대인. 킴벌리 코니쉬 의 1998년 책. 이사람이 주장하는건데, 맞아 이게. 

 

Hitler was reported to have been 5 feet nine (though often given as 5 foot 8″). Today this is a little above average but in his time it was more so. As a youth he was described as a tall boy.  

 

히틀러 가 키가 175여. 지금은 표준 이지만 당시는 큰 키여 저게.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의 남부 사람들 그 박물관 을 가보면 역시나 짝아 집과 탁자들이, 당시 미국인들 표준키가 170이여. 

 

  1. Wittgenstein was responsible for the secret of decrypting the German "Enigma" code being passed to Joseph Stalin, which resulted ultimately in the Nazi defeats on the Eastern Front and liberation of the surviving Jews from the camps 

비트겐슈타인 이 2차대전때 케임브리지 교수였걸랑. 독일 에니그마 를 암호해독해서 스탈린에 넘겼다. 그래서 동부전선은 나치 가 패하고 유대인이 해방되는데 일조 하다. 

 

Likewise at school I found no occasion which could have led me to change this inherited picture. At the Realschule, to be sure, I did meet one Jewish boy who was treated by all of us with caution, but only because various experiences had led us to doubt his discretion and we did not particularly trust him; but neither I nor the others had any thoughts on the matter.

— Adolf Hitler, Mein Kampf, 1943 English translation by Ralph Manheim 

 

히틀러 의 마인캄프. 나의 투쟁 에서의 글. 학교에서도 이런 각인된 이미지 는 변하지 않았는데, 린츠 의 레알슐레 에서, 확실하게 나는 한명의 유대인소년을 만났다, 걔는 우리 모두가 조심스레 대했다, 다양한 경험들이 우리를 만들었다 그의 삐뚤어진 성격을 의심하게끔, 그래서 우리는 그를 특히나 믿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남들도 그 문제에 대해선 어떤 생각도 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비트겐슈타인 에게 후진 열등감이 생겼으면 똑 끄집어내서 저걸 기록을 해. 

 

캄프 라는게 camp 캠프 고. 이 캠프 라는건 전쟁용어여. 

 

From Middle English kampe (battlefield, open space), from Old English camp (battle, contest, battlefield, open space), from Proto-West Germanic *kamp (open field where military exercises are held, level plain), from Latin campus (open field, level plain), from Proto-Indo-European *kh₂emp- (to bend; crooked). Reinforced circa 1520 by Middle French can, camp (place where an army lodges temporarily), from Old Northern French camp, from the same Latin (whence also French champ from Old French). Cognate with Old High German champf (battle, struggle) (German Kampf), Old Norse kapp (battle), Old High German hamf (paralysed, maimed, mutilated). Doublet of campus.  

 

캄푸스 가 들판 이고, 이게 게르만애들로 가서는 전쟁 전투 가 돼. 전쟁은 들판에서 치루는거고, 막사 캠프 를 만들고, 들판에 대학이 들어서 캠퍼스 야. 캠페인 이 캄파니아 전쟁벌판 이고,

 

Karl and Poldi had nine children in all – four girls: Hermine, Margaret (Gretl), Helene, and a fourth daughter Dora who died as a baby; and five boys: Johannes (Hans), Kurt, Rudolf (Rudi), Paul – who became a concert pianist despite losing an arm in World War I – and Ludwig, who was the youngest of the family  

 

비트겐슈타인 은 9남매 이고, 4녀 5남, 에서 가장 막내 야. 위 네 형들 중에서 세 형들은 각각 자살 들을 해. 아빠가 보헤미안 유대인 인데,  엄격해. 학교에 안보내고 집안에서 교육시킨겨. 그러다 두 형들이 자살하고,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을 린츠 의 중학교 에 보낸겨. 이때 히틀러 를 만나고, 히틀러는 열등질 하는거고. 열등질 하는 애들의 특징이, 애들 놀리는겨. 왕따질 시키는건, 그 들이 못나서여. 후진 들이 왕따 놀이를 하는거야. 

 

On starting at the Realschule, Wittgenstein had been moved forward a year.[64] Historian Brigitte Hamann writes that he stood out from the other boys: He spoke an unusually pure form of High German with a stutter, dressed elegantly, and was sensitive and unsociable.[66] Monk writes that the other boys made fun of him, singing after him: "Wittgenstein wandelt wehmütig widriger Winde wegen Wienwärts"[46] ("Wittgenstein wanders wistfully Vienna-wards (in) worsening winds"). In his leaving certificate, he received a top mark (5) in religious studies; a 2 for conduct and English, 3 for French, geography, history, mathematics and physics, and 4 for German, chemistry, geometry and freehand drawing.[64] He had particular difficulty with spelling and failed his written German exam because of it. He wrote in 1931:

My bad spelling in youth, up to the age of about 18 or 19, is connected with the whole of the rest of my character (my weakness in study).

 

레알슐레 에서 1년 월반한겨. 하이게르만 어를 쓴겨. 고지대 게르만어. 루터 성경이 가운데 독일어고, 이 고지대 게르만어는 촌스러운겨, 말은 우아하지만, 시대에 떨어진거 닥아오는거고. 집에만 있어서 사회성은 없고. 말은 같은 말을 더듬듯 하는거고. 아이들이 놀렸다는거지, 비트겐슈타인은 방황해 바라면서 비엔나로 가려고 거긴 바람도 강한데. 라며 노래하는데, 이겐 비트겐슈타인 이라는 단어 놀이 하면서 파자 로 놀리는거고. 

 

They had 11 children – among them Wittgenstein's father. Karl Otto Clemens Wittgenstein (1847–1913) became an industrial tycoon, and by the late 1880s was one of the richest men in Europe, with an effective monopoly on Austria's steel cartel.[23][29] Thanks to Karl, the Wittgensteins became the second wealthiest family in the Austro-Hungarian Empire, only the Rothschilds being wealthier.[29] Karl Wittgenstein was viewed as the Austrian equivalent of Andrew Carnegie, with whom he was friends, and was one of the wealthiest men in the world by the 1890s.[23] As a result of his decision in 1898 to invest substantially in the Netherlands and in Switzerland as well as overseas, particularly in the US, the family was to an extent shielded from the hyperinflation that hit Austria in 1922.[30] However, their wealth diminished due to post-1918 hyperinflation and subsequently during the Great Depression, although even as late as 1938 they owned 13 mansions in Vienna alone  

 

비트겐슈타인 집안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두번째 재벌이야. 1위가 로쓰차일드 였고. 아빠 형제들이 11명인데, 아빠가 인더스트리얼 타이쿤 이 되었어. 유럽에서 가장 부자중의 하나야 1880년대 말에. 태어날때 최고 부자 재벌 아들인겨 비트겐슈타인이. 그러다가, 1차대전 끝나고 대공황 오면서 폭망한겨. 서기 1938년에 비엔나에 13개 집들만 남았다. 나중에 유산으로 누나들과 법정분쟁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이겼지만 다 돌려주고.

 

저당시 흔한 말이 인더스트리얼 타이쿤 인데. 산업자본가 거물로 해석하냐 이것도 별 시안한 단어로 번역되던데. 타이쿤 이란게, 일본말 대군 大君 이여. 이 대군 이란 말이 웃긴데 일본애들이. 왜냐면 극동에서 얘들은 덴노 에 쇼군 이 따로 있잖냐. 외교란게 조선 밖에 없잖냐. 조선 이란 말도 오직 일본 애들만 불러주는 단어여 이게 ㅋㅋㅋ. 이런 말 하는 역사 애 단 하나 없지만서도 ㅋㅋㅋ. 참 이  조선. 

 

日本国王(にほんこくおう)は、日本国王を意味する称号

通常は中世期から近世期において、特に地方の皇族勢力や武家政権の長が対外的に使用した称号を指す。南北朝時代、九州を掌握する南朝後醍醐天皇皇子懐良親王が、太祖から「日本国王良懐(にほんこくおうりょうかい)」の封号を与えられ、日本国王に冊封された。次いで、室町時代室町幕府3代将軍足利義満が、「日本国王源道義(にほんこくおうげんどうぎ)」として日本国王に冊封されて以降、室町将軍の外交称号として使用された。  

 

일본이 중국에는 왜왕 으로 불리다가 사서들에 일본국왕 으로 그냥 쓰이거든 당나라 때도. 저게 정식 호칭이 아녀. 명나라 주원장이 들어설때 일본은 무로마치 들어서는겨. 그러면서 당시 남북조 시대 남조 의 덴노 아들 가네요시 가 주원장으로부터 일본국왕 가네요시 라는 봉호를 받어. 그러다가 무로마치 3대 아시카가 요시미쓰 가 일본국왕 타이틀 을 받어 이게 정식 쇼군 외교호칭이 돼. 저 가네요시 도 주원장에  당차게 대해 저 문서 보면. 왜  우리가 니덜의 국왕이냐 ㅋㅋㅋ 나는 덴노다. 천황이다 이색햐. 아시카가 가 국왕 호칭 받은걸로  비판받아 왜 장게 들의 국왕이냐고. 조선 이성계 는 감지덕지 인데 말이지 ㅋㅋㅋ. 정도전이 이 개 명나라 코트 로 부르거든 오라고 주원장이가. 무서워서 못가 정도전이가 벌벌 떨어. 대신 권근 이 가서 주원장의 깊숙한 질문들에 다 답을해. 쪽팔린 정도전 개가 권근 저 적폐유 죽여유 ㅋㅋㅋ. 이 정도전 이란 애는 정말. 

 

저따위 정도전 을, 공중파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아  위대한 정도전 의 위대한 조선!! 참  코메디도 코메디도. 뒈질때 무서워서, 남집의 첩질 하는 집에가서 바닥에 기들어가 숨고, 태종 의 하인 한테 살려주세유 살려주세유. 

 

저딴 애들이, 조선 의 선비 라는겨. 저런 건 말야, 써번트 한테, 살려주세유 해대는건, 이런건 있을 수가 없어 귀족들 역사에서. 저 조선들은 진짜 

 

저따위 인간이 위대하다며 우리의 정체성의 롤모델로 삼자고  공중파에서 강의질을 하는겨 이 조선 들의 나라에서. 얼마나 얼마나 무지한지 마리야 이 조선 학자 들에 이 언론 권력이란게. 이런 기반에서 저런 미개한 지능의 인간들이 권력을 하는겨 지금. 

 

저런건 팩트야 팩트. 내가  어디 카더라 야설이 아니고. 정사 정사 에 다 있는겨 저런게. 그런데 안갈켜. 정도전이 기면서 살려달라는건, 주작 이라는겨 ㅋㅋㅋ. 이들은 지들 쪽팔린건 주작 이란겨 실록 내용은 ㅋㅋㅋ. 

 

日明関係は1547年(天文16年)の遣明船で断絶したが、1581年(天正9年)と1583(天正11年)に朝鮮国王が日本に送った国書の宛先の「日本国王」とは室町幕府の15代将軍足利義昭であった。  

 

조선에서 아시카가 요시아키 를 수신자로 보낸 호칭도 일본국왕 으로 되어있어. 쇼군 이 국왕인겨 이게. 조선 이란애들이 쇼군 이 머고 덴노 가 먼지 몰라. 그게 풍신수길 편지 받은 선조 때 실록 대사여. 야 대체  장군 이 머고 천황이란건 머냐 니네. 영조 때도 똑같은 대사. 얘들은 관시미가 없어 왜놈들에겐. 얘들은 일본 이 걍 빨가벗고 다니는 식인 원주민 으로 아는겨 이 조선애들은. 그래서 이 감정으로, 저런 허섭 미개한 것들에 나라를 빼앗겼다는겨. 이게 지금도 그런거고. 지독한 열등한 애들이, 아무런 근거 조차 없이 지들만의 우월감 으로 지들의 못남을 포장질하는겨 이게 ㅋㅋㅋ. 이 조선 애들은 현실 감각 이 전혀 없는겨 이게. 지금도 여전히 외교가에서 시안하게 보는겨 저 조선민국애들을. 전혀 주변 정세를 읽을 지능이 안되는겨. 오직 미제국주의 개개끼여 얘들 대갈빡은 ㅋㅋㅋ. 

 

「茲に特に爾を封じて日本国王と為す」の一文があった。임란때 만력제 가 풍신수길한테 쓴 문서 가, 코코니 토쿠니, 이에 특별히 너를 봉한다 일본국왕으로 해대면서 히데요시가 머 열받아서 저걸 찢어버렸다 하지만 저 문서가 지금 박물관에 있고. 이때도 일본국왕 이야. 

 

그런데, 쇼군애들이 왕 이 아니거든. 덴노 가 왕 도 아니거니와 쇼군 은 걍 장군 이야. 조선과의 문서 교류에서 쇼군 을 대군 으로 호칭을 변경하는겨. 그러다 조선통신사 가 오는데, 대군 이 조선왕의 자식 을 대군 으로 불리는걸 안거야. 다시 국왕 으로 바꿔달라하다가 걍 다시 대군 으로 돌아와. 아무래도 지들 쇼군 이 왕 은 아니거든. 

 

日米和親条約締結以降は、欧米諸国に対応するために条約の和文などにおいて「日本大君」「帝国日本大君」「帝国大日本大君」などが用いられ、1868年明治元年)、天皇が外交権を接収するまで続いた。もっとも、「大君」 

 

일본이 외교 관계 를 조선 과 갖다가, 미국 이랑 강압적 조약 맺으면서, 이때 일본 협상자는 쇼군 이거든. 쇼군의 호칭 을 대군 으로 쓴겨 영어로 이걸 타이쿤 하는거고. 저때 대군 이란건 쇼군 이야. 유럽애들도 걍 일본애들의 짱은 타이쿤 인겨. 그러다 메이지 가 덴노 가 되고, 오키미 가 정식 호칭이지만, 타이쿤 도 덴노 의 호칭이 된겨

 

明治以降は「大君」(おおきみ)が天皇の非公式な尊称のひとつとして使われる事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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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타이쿤 이 인더스트리얼 에 붙어서 자본으로재벌된자 가 된겨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때 이 단어들이 열라게 쓰여 쟤들 리터러쳐 보면. 

 

비트겐슈타인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의 가장 큰 재벌 자식인데. 그럼에도 1차대전 참전해서 창창한 20대를 보낸겨 전쟁 속에서. 이사람은 몸이 안좋고, 당시 징병기준에서 면제 여. 약해 몸이. 그런데 지원해서 들어가. 1차대전 발발하고 바로. 

 

The Rothschild family (/ˈrɒθsld/) is a wealthy Jewish family originally from Frankfurt that rose to prominence with 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 a court factor to the German Landgraves of Hesse-Kassel in the Free City of Frankfurt, Holy Roman Empire, who established his banking business in the 1760s 

 

로쓰차일드.도 역시나 유대인 가문인데, 프랑크푸르트 에서 시작한겨. 마이어 암셸 로쓰차일드. 서기 1744-1812. 헷세-카쎌 의 코트 은행가 인겨. 코트의 유대인재무관리 를 코트팩터 라고 해. 이사람 아들들이 다섯명 이야. 이 다섯이 유럽 전역에 깔려서 서로 정보 주고 받으면서 시장동향을 먼저 캐취하고 투자를 해.

 

다섯자식이, 프랑크푸르트, 비엔나 런던 나폴리 파리 에 거점을 두고 떼돈을 버는겨 이게. 이 로쓰차일드 헤럴드리가 손으로 다섯개 화살들을 쥐어잡은거걸랑. 다섯 화살이 뭉치면 안뿌러지는거고. 일본애들 조슈 이야기 할때도 같은 이야기 나오고. 비엔나 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저들 다음의 부자 였다는거고. 

 

시작이 프랑크푸르트 여. 괴테의 도시고, 하이디 의 배경이고. 데카르트 가 보는 황제대관식 도 이 도시고. 

 

The name is derived from the Franconofurd of the Germanic tribe of the Franks; Furt (cf. English ford) where the river was shallow enough to be crossed on foot.  

 

프랑크족 이 푸르트, 포어드, 여울 을 건넌겨. 여기를 건너서 서쪽으로 가서 프랑스 를 만든겨. 이 프랑크 로 만든 워드들이 다 의미가 고급이고 밝고 좋아 이게.

 

푸르트. 가 포어드. 기고 얕은 여울 이걸랑. 

 

In Jainism, a Tirthankara (Sanskrit: tīrthaṅkara; English: literally a 'ford-maker') is a saviour and spiritual teacher of the dharma (righteous path).[1] The word tirthankara signifies the founder of a tirtha  

 

자이나교 의 교주 를 티르딴카라. 라고 해. Mahavira 역사적 인물이 마하비라 이고, 싯달타 보다 윗세대야. 띠르타 를 만든자 여. 띠르타 가 푸르트 포어드 라는 여울이야. 여울을 만든자 가 마하비라 라는 티르딴카라 여. 이 티르따 라는 여울 은 바퀴 와 상통하는겨  

 

Jainism postulates that time has no beginning or end. It moves like the wheel of a cart. The wheel of time is divided in two halves, Utsarpiṇī (ascending half cycle) and Avasarpiṇī (descending half cycle).  

 

바퀴 가 굴러가는게 오름과 내림 이고 시작도 끝이 없다거든. 이건 자이나교 의 특허가 아니고, 삼사라 라는 윤회 시스템의 힌두교 에 불교 도 또옥 같은겨 이게. 여울을 만들어서 건너는 자.로 자이나교에서 쓰는겨. 

 

The dharmachakra (Sanskrit; Pali: dhammacakka) or wheel of dharma is a widespread symbol used in Indian religions such as Hinduism, Jainism, and especially Buddhism.[1][2]  

 

다르마차크라. 다르마의 바퀴. 이걸 법륜 이라 번역한거고. 부디즘 에서 잘 쓰는거지만, 힌두교 에서 그대로 온겨 

 

Ratha (Proto-Indo-Iranian: *Hrátʰas, Sanskrit: रथ, rátha, Avestan: raθa) is the Indo-Iranian term for a spoked-wheel chariot or a cart of antiquity.

 

라따. 바퀴살있는 수레의 마부 또는 수레. 여기서 수레바퀴 가 또한 핵심이고. 힌두용어에 아베스탄 에서 온거고. 바퀴달린 마차 를 타고, 윤회 를 건너는겨 이게. 자이나 에서 푸르트 를 만들어 건너기 쉽게 여울을. 역시 이 여울을 타고 넘어가는건 머여? 바퀴달린 마차 이고 바퀴 여. 바퀴 가 윤회 의 상징이자 법의 상징이자 건넘의 상징이야. 

 

신묘장구 대다라니 가 그게 힌두교 인 인도 신들 을 호명하는겨 그게. 거기에 자가라욕다야 사바하 하는게 바퀴지닌이여 아멘 하는기고. 

 

할때 쟤들의 바퀴건너는 곳이 프랑크푸르트 여. 그리고 프랑크가 통일해서 중세 유럽 천년을 맹근겨. 

 

비트겐슈타인 이 1929년, 나이 40세부터 거의 20년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 하고 여기서 죽걸랑.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삶에  회의적이야. 형제들도 자살들 한거고, 1차 2차 대전을 겪은겨 이사람은. 1차대전은 직접 참전하고. 

 

케임브리지 의 집 이, 걍 단촐해. 책상 침대. 이게 다여. 강의 끝나고 극장가서 헐리웃 영화 보는게 전부고. 

 

아, 나는 이미 옌날에 영화들 다 보고 떼고 미드 영드 도 이젠 안보는데. 영화는 너무나 재미없고 이제. 

 

삶이, 산다는게, 이 조선 땅에서, 아 끔찍하다 이 모멸감, 내가 이 조선 의 땅에서. 

 

아무런 힘이 안생긴다. 그야말로 무기력 그자체.

 

I ought to have ... become a star in the sky. Instead of which I have remained stuck on earth.[60]  

나는 되야한다..하늘 속에서 한 별이, 이 땅떵어리에 딱 붙어서 남겨지는 대신. 

 

니덜이라도, 재미께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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