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eaty of Limerick (Irish: Conradh Luimnigh), signed on 3 October 1691, ended the 1689 to 1691 Williamite War in Ireland, a conflict related to the 1688 to 1697 Nine Years' War. It consisted of two separate agreements, one with military terms of surrender, signed by commanders of a French expeditionary force and Irish Jacobites loyal to the exiled James II. Baron de Ginkell, leader of government forces in Ireland, signed on behalf of William III and his wife Mary II. It allowed Jacobite units to be transported to France, the diaspora known as the Flight of the Wild Geese.
리므릭 조약. 아일랜드 뮌스터 프라빈스 에 리므릭 카운티 의 리므릭. 서기 1691년 10월 3일. 이걸로 1689년 첫 재코바이트 봉기 에서, 1691년 까지의 윌리어마이트 전쟁 아일랜드.를 끝내. 제임스2세 를 따르는 프랑스 군대와 아이리쉬 재코바이트들이 항복을 하고, 아일랜드의 재코바이트들이 프랑스 로 가. 이 아이리쉬 들이 플아이트 오브 더 와일드 기스.
구스 라는 거위.가 게르만애들 마더 구스, 에 저 떠돌이 되는 고지식한 아일랜드 재코바이트들의 구스. 얘들이 보는 이놈의 거위 라는 구스 가 머냐는거지.
거위 라는 구스,는 씸플리톤.에 씰리야, 단순해, 무식해 보여 고지식한겨. 이 거위 가 모노가미야, 자기 짝에 평생을 충실해. 이게 얘들 피델리티 정서에 맞는거야 이 게르만 켈트 애들의. 이스턴이 절대 따라가지 못해 얘들의 이 고지식한 모노가미의 피델리티 는. 나중에 타락을 하게되지만, 그럼에도 이스턴의 근본적 원시적인 하렘에 첩놀이의 피는 없어 쟤들에겐. 이 이스턴 애들은 정말 시안한게, 가장 드럽고 추악한 근본적 피 들이, 도덕 예의 따지는 거 보면 기괴한거야. 너희들은 임대아파트에 살거라, 어머 우리 주인님들 존엄님들은 수억 수십억 아파트 주택에 사셔야쥬. 민들은 장례식이든 머든 입국해서 14일 을 가둬야지만, 우리 디댱님 최고 존엄님의 장례식인데 그 아드님은 바로 장례 참석해야쥬.
이 이스턴들은, 쓰레기야 이게. 민주 라면 모두가 평등한 주인 의식 이어야 하거든. 이런 모랄 이면 훌륭한거지. 그런데, 이 머저리 민들이란 들은, 주인님 은 주인님들만의 권위와 접대 를 당연히 인정해야 해. 주인님들은 특별난거고 지들 민들 만이 주인님들 따라 주인 시다바리 의식 갖고 정의 놀이 하는거거든.
애들이 근본적으로 지들의 주인 님을 떠받들면서, 오직 바닥 들끼리 주인님 밥그릇 외의 밥 갖고 주인행세 하자는겨 저게. 주인 존엄애들도 당연한겨 자기는 수억 수십억 주택에 사는건. 저 방송 해대며 선동하는 애도 수십억 아파트 에 살면서, 니덜 민들은 여인숙에 쳐박혀 살아도 돼! 해도 우왕 우리 위대한 존엄님 위대하셩 ㅋㅋㅋ. 정말 벌레들 세상인데 이게. 이게 조선 오백년 의 양반애들 놀이랑 똑같은겨. 조선 애들이 시안하게 저따위 이념과 동급이 된건 다른게 아냐. 쟤들이 첩들 뺏기고 여자 노비들 뺏기고 억울한걸, 중국 들 땅빠닥에 가서, 인민이 주인이다 라고 하면서 또옥 같은 짓들을 미래설계도라고 그린거야. 어차피 조선 오백년도 민들이여 민들 아끼자, 말로는 저따위 알흠다운 말이 없거든, 말은 번지르르 하면서 지들은 누려요. 이 말장난에 속아난게 조선 오백년이고, 저 말장난을 그래도 따라하는게 지금 조선민국의 벌레 민드리야.
이땅은 걍 망해야 해.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
- To "have a gander" is to examine something in detail.
- "What's sauce for the goose is sauce for the gander" or "What's good for the goose is good for the gander" means that what is an appropriate treatment for one person is equally appropriate for someone else.
- Saying that someone's "goose is cooked" means that they have suffered, or are about to suffer, a terrible setback or misfortune.
- The common phrase "silly goose" is used when referring to someone who is acting particularly silly.
- "Killing the goose that lays the golden eggs", derived from an old fable, is a saying referring to any greed-motivated, unprofitable action that destroys or otherwise renders useless a favourable situation.
- "A wild goose chase" is a useless, futile waste of time and effort.
- There is a legendary old woman called Mother Goose who wrote nursery rhymes for children.
- A raised, rounded area of swelling (typically a hematoma) caused by an impact injury is sometimes metaphorically called a "goose egg", especially if it occurs on the head
겐더 를 갖다. 갠더 라는게 수컷 거위야. 구스 는 암컷이야. 자세히 검사하다 로 써. (암컷) 구스 에 쏘스는 수컷 쏘스 이다. 한사람에게 적절한 상대법은 다른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절하다. 누구의 구스 가 쿡 되다 란 뜻은, 고난을 겪었다, 겪을거 같다. 어리석은 구쓰 는 특별히 어리석을 때 쓰는 말. 황금 알들을 낳는 거위를 죽이다. 야생 거위 좇기 는 소용없다는 말, 시간 노력만 낭비하다.
이 구쓰 가 쟤들에게 친숙해. 더하여, 모노가미 야 고지식하고. 저때 재코바이트 들이 떠나면서 야생거위의 비행, 으로 대륙으로 간겨.
아리리쉬 재코바이트 들의 와일드 기스 가 1691년 부터지만, 이전에도 아이리쉬 가 대륙에 이미 있어, 이 아이리쉬 레지먼트 라는 용병들이, 이전에 썰했듯이 80년전쟁 초창기 네덜란드에 레스터백작 더들리 들어올때 들어오거든.
The first Irish troops to serve as a unit for a continental power formed an Irish regiment in the Spanish Army of Flanders in the Eighty Years' War in the 1590s.[2] The regiment had been raised by an English Catholic, William Stanley, in Ireland from native Irish soldiers and mercenaries, whom the English authorities wanted out of the country. (See also Tudor conquest of Ireland). Stanley was given a commission by Elizabeth I and was intended to lead his regiment on the English side, in support of the Dutch United Provinces. However, in 1585, motivated by religious factors and bribes offered by the Spaniards,[citation needed] Stanley defected to the Spanish side with the regiment. In 1598 Diego Brochero de Anaya wrote to the Spanish King Philip III:
레스터 더들리.가 엘리자벳 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친구 오렌지 윌리엄 암살된거에 열받아서 자기재산 다 팔고 용병 꾸려서 네덜란드로 가. 그리고 얘가 네덜란드 총사령권을 쥐지만 리더쉽이 안생겨 저들에게. 그리고 1588 아르마다 로 스페인함대가 격퇴되고서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네덜란드를 지원해. 저때 더들리 는 아르마다 할때 잉글랜드로 가지만, 더들리 애들이 1588전에 거의 패해 네덜란드 에서. 더들리가 올때 같이 온 인간이 윌리엄 스탠리 야. 존 노리스 외에.
The quarrel between Leicester and Norris resulted in a commission for Stanley to act independently of the latter, who had taken over command of the English forces on Leicester's departure, an arrangement that prompted dissent from the States General of the Netherlands. Stanley promptly communicated with the Spanish governor of Zutphen, and Deventer was surrendered by him to the Spanish in January 1587, whereupon he and 600 of his men entered the service of King Philip II. 300 remained loyal to Elizabeth.[1] This occurred the day after the fort of Zutphen had similarly been betrayed by the English commander Rowland York (28 January).
존 노리스 는 엄마가 엘리자벳 퀸이랑 친하고, 아빠따라 어릴때 대륙에 와서 더들리보다 더 잘알아. 존 노리스 는 여기 오기 전에 에식스 백작 월터 데버루 지시로, 그 드레이크 랑 같이 아일랜드 맥도날드 클랜을 학살하고 여기 온겨. 더들리 보다 실전에 강한겨 노리스.가. 더들리는 지도력이 없어. 둘 다툼에서 이걸 받은게 윌리엄스탠리.야 이 스탠리 가 데벤터 에서 스페인 플랑드르 군대에 항복을 해. 1587년 1월에. 이때 스탠리 와 6백명은 스페인 편이 확실히 되고, 300명은 엘리자벳 에 남아. 그리고 나서 1588 스페인 아르마다 부터 잉글랜드 가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올때, 윌리엄 스탠리 와 육백명은 스페인 플랑드르 군대에 속해서 잉글랜드 를 적으로 두고 싸우는겨.
윌리엄 스탠리 가, 카톨릭이야. 엘리자벳시대의 레큐전시법의 레큐전트여, 그럼에도 엘리자벳 에 충성한겨, 아일랜드의 반란 시작이, 엘리자벳의 데스몬드 반란 으로 첫 시작을 하는겨 3백년 반란의. 이때 카톨릭 인 스탠리 가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해. 엘리자벳이 스탠리를 아껴 카톨릭임에도. 이 엘리자벳은 품이 넓어 이 여자가. 역사에서 가장 왜곡된 여자야. 저 스탠리 가 더들리 따라서 갔다가,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하고, 아 나 카톨릭이었지? 스페인에 충성할껴. 이때 저 6백명 애들이 아이리쉬 의 카톨릭 이야. 저들이 아이리쉬 레지먼트 이고 얘들이 모두 스페인 카톨릭 플랑드르 군대 로 들어온거야.
Following the defeat of the Gaelic armies of the Nine Years' War, the "Flight of the Earls" took place in 1607. The Earl of Tyrone Hugh O'Neill, the Earl of Tyrconnell Rory O'Donnell and the Lord of Beare and Bantry, Donal O'Sullivan, along with many chiefs, Gallowglass, and their followers from Ulster, fled Ireland. They hoped to get Spanish help in order to restart their rebellion in Ireland,[4] but King Philip III of Spain did not want a resumption of war with England and refused their request.
아일랜드 얼스터지역 타이론의 백작들이, 오닐들이, 반란을 해 이게 아일랜드 9년 전쟁이야. 엘리자벳 말년이고 다음 제임스1세가 스콧애들로 플렌테이션을 하는겨 얼스터를. 이걸로 3백년지나서 북아일랜드 는 영국께 되는거고. 이때 쫓겨난 오닐들 이 대륙으로 가는겨. 이때 제임스 랑 필립3세 가 조약 맺아서 배들 약탈 안하기로 하고 잘지내기로 해서 필립3세가 공식적으론 오닐들을 거부해. 그래도 이들이 또한 아이리쉬 레지먼트 로 플랑드르 부대 에 자원이 되서 80년 전쟁에 30년전쟁 때 카톨릭 스페인편으로 싸워.
Patrick Sarsfield, 1st Earl of Lucan, Irish: Pádraig Sáirseál, circa 1655 to 21 August 1693, was an Irish soldier, and leading figure in the Jacobite army during the 1689 to 1691 Williamite War in Ireland.
아이리쉬 가 세번째로 플라이트 하는게, 리므릭 조약 1691년때야. 이때 아이리쉬 리더 가 패트릭 싸쓰필드. 부유한 카톨릭 집안이고, 찰스2세 의 배스타드 먼머쓰 공작 제임스스튜어트 가 리쿠르트 해서 1674년 네덜란드와 전쟁할때 참전했다가, 주교음모사건으로 카톨릭애들이 군대에서 배격되고, 그러다 제임스2세 즉위하고, 조카 먼머쓰 가 반란할때, 자기 리쿠르트 했던 먼머쓰 를 적으로 싸우는겨 싸쓰필드가. 그리고 1688 쫓겨날때 제임스2세 에 충성충 하다가, 떠나는겨 1691년에
Sarsfield sailed to France on 22 December 1691, leading 19,000 of his countrymen and countrywomen to enter the French service in the first phase of the military denuding of Ireland. Sarsfield's exodus included 14,000 soldiers and around 6,000 women and children. This event began what is remembered in Ireland as the Flight of the Wild Geese. In a poem two centuries later, W. B. Yeats would mourn:
Was it for this the Wild Geese spread
A grey wing on every tide…
Sarsfield's Irish army was regrouped and equipped in their red coats, symbolizing their allegiance to the Stuart king
저때 아이리쉬 들이, 지역 남자들 여자들 해서 2만명. 가족들이 다 가는겨 또한. 프랑스로 가. 이때 프랑스는 9년 전쟁으로 모든 대륙 애들과 전쟁하는거고, 병사 1만4천명, 여자들 아이들 6천명이 떠나 프랑스로. 예이츠 가 시를 써.
이 황야의 거위들의 퍼짐을 향한건가
회색의 날개 모든 물결위의...
.
아, 난 시 를 가장 잘 보는 인간 인데, 아마 현대에서 나만큼 시 에 대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이는 흔치 않고, 이 조선땅에서 시 를 볼 수 있는 인간은 없어. 야, 저 영시 들 번역해놓은거 보면 참 너무나 끔찍한 한심한 수준이야. 쟤들이 영어만 전공한 애들의 저따위 번역 실력이야. 번역 이란건 시 번역 에서 걍 드러나, 시 를 번역을 못해 조선애들이.
아, 이 예이츠 시가 정말 탁월해. 왜냐면, 예이츠 는 자기가 아일랜드 의 나라 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들었거든 자기가. 테러 하지 마세요 전쟁 하지 마세요 하면서 아일랜드를 세운겨 예이츠 가. 예이츠 시는 최고여 진짜. 시 들을 보다 대부분 솔직히 별로 거든, 아 그런데 어떤 시가 좋은겨 저 무게가 저 느낌이, 예이츠 래, 아 예이츠, 최고야 이 인간의 시는.
아, 내가 쟤들 이야길 하려는게 아니라.
Hugh Mackay (c. 1640 – 24 July 1692) was a Scottish military officer who settled in the Netherlands, and spent most of his career in the service of William of Orange (later William III of England).
휴 맥케이. 던디 가 제임스편이었고, 반대편의 스콧 인간을 보려는건데, 얘들을 보려는건 내가, 쟤들이 살아간 인생이란게, 이게 이스턴 마인드 조선 마인드 와 전혀 다른거야. 이 조선 애들은 정말 너무나 편협하고 협소하게 산 애들이거든. 편협한 잣대질 외엔 할 줄 아는게 없어 이 조선 오백년 들에 조선 을 찬양하는 이 들. 오직 소인배 오직 적폐. 이 짓 외엔 할 줄몰라. 자기땅 자기동네 자기네인간 외엔 남들 다른 곳을 몰라. 다른 생각을 할줄 모르고, 대가리가 깨진걸 자랑스러워 하는, 정말 괴기한 집단이 이 조선 애들이고 지금 조선 민국애들이거든. 그래서 쟤들의 저 폭넓은 인생을 몰라, 저 깊고 넓은 사유를 절대 이해할 수 가 없어 저 지능 이. 저 에로스 가. 쟤들 인물사 와 조선 에 위대하다며 평가 되는 애의 인물사 가 비교가 안돼. 던디 나 휴맥케이 는 완전히 유럽에서 듣보잡 취급 받는 애들이야. 그럼에도 이스턴의 대단하단 애의 인생 은 저들 듣보잡 에 조때가리 존물 미세방울 크기도 안돼 ㅋㅋㅋ.
번역이 된 것도 없고, 번역을 할 수가 없어. 저 저들이 겪은 단어들이 무수한 오브젝트 들 이거든. 저 오브젝트들 자체가 각각 , 저 단어들 자체가 또한 무수한 역사들이 있어.
저런게 번역이 안돼. 못해. 저 깊이를 이해할 지능 이 안돼. 유럽사 를 설명한 책들은 모두 사기야.
In 1660, Mackay was commissioned into Dumbarton's Regiment, spending the next few years in England and France, then volunteered to fight for the Republic of Venice in the Fifth Ottoman-Venetian War. He rejoined Dumbarton's in 1672 on the outbreak of the Third Anglo-Dutch War, before transferring to the Scots Brigade in 1673. A long established mercenary unit of the Dutch army, Mackay served with the Brigade for the rest of his career.
1660년. 20세에, 덤바튼 레지먼트 에 가서 몇년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보내고, 5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서 자원해서 싸우고, 이게 1669년에 끝나, 1672년에 덤바튼 으로 다시 복귀하고, 1674년 터지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때인 3차 앵글로-네덜란드 에 참전해, 이 직전에 스콧 브리게이드 로 옮겨 1673. 33세. 멕케이는 이 브리게이드 에서 그의 경력 나머지를 보내다.
컴퍼니 가 중대급이고, 배탤리온 이 대대급이고, 레지먼트 는 영주 가 리드했던 강력한 부대여 대대급 이상의. 브리게이드 란건 셋에서 여섯의 대대를 합한겨. 저걸 일본한자로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이라고 일본말을 우리가 쓰는거고.
스콧 브리게이드 가, 더들리가 엘리자벳 반대에도 불구하고 꾸린 부대여. 여기에 나중 아이리쉬 레지먼트 가 윌리엄 스탠리 를 중심으로 카톨릭 스페인으로 투항을 한거고. 덤바튼 레지먼트 란건, 찰스1세 때 만든겨 스콧애들 용병으로, 대륙 30년 전쟁때 카톨릭의 프랑스를 지원하는겨. 이 덤바튼 레지먼트 는 더글라스 애들이 중심이고, 덤바튼 이란 이름도 더글라스 작위 에서 갖고 온거고
Lord James Douglas (1617–1645) was a Scottish nobleman and soldier.
He was born at Douglas Castle, Douglas, South Lanarkshire, the son of William Douglas, 1st Marquess of Douglas, and his wife Margaret Hamilton, a daughter of Claud Hamilton, 1st Lord Paisley.
존 햅번 이 차터를 받아 만들고 3년후에 죽어, 이걸 받은게 제임스 더글라스. 더글라스 클랜 이 12세기에 등장하고, 더글라스 캐슬이 13세기에 만든거고, 이게 싸우쓰 나나크셔 에 있어. 더글라스 라는 도시에.
Clan Douglas is an ancient clan or noble house from the Scottish Lowlands.
Taking their name from Douglas in Lanarkshire, their leaders gained vast territories throughout the Borders, Angus, Lothian, Moray, and also in France and Sweden. The family is one of the most ennobled in the United Kingdom and has held numerous titles.
더글라스 클랜 은, 로랜드야. 저지대여. 라나크셔 의 더글라스. 글래스고 가 이 라나크셔 안에 있는 도시야. 이 더글라스들이, 보어더스, 앵거스, 로디안, 머리, 에 걸쳐 있었어. 보어드스 라는게, 경계들이고, 아래 잉글랜드 와의 국경이 왼쪽 쏠웨이 퍼뜨 에 오른쪽 마샬메도우즈 만.이야. 쏠웨이 퍼쓰 가 왼쪽 아가리고 위텃이 갤로우 아래턱이 컴브리아 이런건 상식으로 알아두고, 여 잉글랜드 경계지역의 마크들이 더글라스 관할이야. 로디안 이란건 에딘버러 있는 퍼뜨 오브 포뜨 의 아래턱 지역이고.
재코바이트 때 이 더글라스 에
In 1689, James Douglas, Earl of Angus raised the Cameronian regiment (Earl of Angus's regiment). Although greatly outnumbered, the regiment managed to defeat a larger Jacobite force at the Battle of Dunkeld. The regiment was victorious under the command of Captain George Munro, 1st of Auchinbowie
앵거스 백작, 제임스 더글라스, 1671년 생인데, 던클드 전투 가 1689년이고, 18세 때야. 스콧 재코바이트 던디 가 죽고서 그다음 던클드 에서의 전투인데, 이때 제임스더글라스 가 캐머론이언 레지먼트 를 발기 하는겨. 커버넌터 리차드 캐머론 이름을 딴거고, 헌데 정작 이사람은 자기가 레지먼트 를 만들고도 던클드 전투에 참전을 못해. 아빠가 걱정이 되서 얘를 공부 마치라고 런던에 보낸겨. 윌리엄 클레랜드 가 이 부대를 이끌고 승리하는거고. 얘가 쪽팔린겨, 아빠한테 나 지금 전쟁해야한다 스콧도 불안하고 지금 대륙에서 9년전쟁이다. 아빠가 오히려 오렌지 한테 청원해서 얘를 우트레흐트 로 유학 을 보내. 자식 안전을 위해.
The Marquess of Douglas still fearing for his sons safety at home had no objection to his son going hence from Great Britain. The King's permission was granted and Angus obtained as far as the University of Utrecht.
Before too long at Utrecht, Angus started to hear whispers, that it was unseemly for a Colonel to be away from his regiment whilst they were at war. The regiment at this time was fighting in the armies of King William against Louis XIV of France. In By 1692, Angus was desperate to prove himself, as is attested by a letter home to his father begging him leave either to return to his men or return to obscurity in Scotland. It is not apparent what his father's reply was but James Douglas, Earl of Angus took command of his regiment, and died leading his men into action at the Battle of Steenkerque on the 3rd of August of that year.
자기가 만든 레지먼트 의 커널인데 여전히, 야 너 지금 여전히 전쟁인데 니 혼자 가냐? 이때 9년 전쟁이야 프랑스와. 1692년, 21세 에 아빠한테 편지를 보내서, 아 나 스콧으로 내가 만든 부대에 돌아가게 해줘요. 아빠 답장이 어떤지는 모르다. 벨기에 땅 스틴커크 전투, 9년전쟁 중의. 이 해에 죽다.
명예 로 죽은거지 머. 나이 21세.
Clan Mackay (/məˈkaɪ/ mə-KY; Scottish Gaelic: Clann Mhic Aoidh [ˈkʰl̪ˠãũn̪ˠ vĩçˈkʲɤj]) is an ancient and once-powerful Highland Scottish clan from the far North of the Scottish Highlands, but with roots in the old Kingdom of Moray. They supported Robert the Bruce during the Wars of Scottish Independence in the 14th century. In the centuries that followed they were anti-Jacobite. The territory of the Clan Mackay consisted of the parishes of Farr, Tongue, Durness and Eddrachillis, and was known as Strathnaver, in the north-west of the county of Sutherland.
휴 맥케이 는 맥케이 클랜. 이들은 사는 지역이, 하이랜드 저 끝 북쪽이여. 오른쪽 머리킹덤에 뿌리를 두다. 로버트 브루스 를 지원. 이 브루스(로버트1세) 아들이 데이빗2세 고 다음이 스튜어트 시작 로버트2세 야. 로버트 2세 의 엄마가 데이빗2세 의 배다른 누나야. 스튜어트 도 절반이 브루스 여. 재코바이트 에 반대 한 이들이고. 이들 영토가 파르, 텅, 더니스, 스트래뜨네이버. 써덜랜드. 여기가 모두 스콧의 북쪽 가운데 끝이야.
However, it was not until 1829 that Strathnaver was considered part of Sutherland when the chief sold his lands to the Earls of Sutherland and the Highland Clearances then had dire consequences for the clan. In the 17th century the Mackay chief's territory had extended to the east to include the parish of Reay in the west of the neighbouring county of Caithness. The chief of the clan is Lord Reay and the lands of Strathnaver later became known as the Reay Country.
써덜랜드 오른쪽 스콧의 북동쪽 삐쭉 지역이 캐이뜨니스. 써덜랜드 의 왼쪽을 로쓰 Ross 라고 해. 로쓰 에 레이 Reay 가 있고. 써덜랜드 의 북쪽 해변지역을 스트래뜨네이버 라고 해. 네이버 가 네비게이터 에서 재들 이름을 따온듯한데, 네이버 라는 Loch 로크 가 저기에 있어. 로크 라는게 레이크 라는 스콧게일어고, 얘들은 바다의 깊숙한 만도 로크 야. 스트래뜨 Strath 는 좁고 깊은 계곡 이야. 반대가 glen 글렌 이고, 게일말들이고,
Sea-inlet. 바다의 해변을 씨 인렛. 씨 로크 라 하는데, 인렛은 완만한 해변이고, 피요르드, fjord 피요르 하는게 험한 주상절리의 해변이야. 이 바이킹 애들의 이런 피요르드 가 또한 사람 기질을 다른 애들과 달리 가게 하는 듯해.
바다 사람들은 밀물썰물에 마음도 움직이는거야. 더구나 쟤들의 험한 해변. 이건 또한 다른 곳과 달라. 이 게르만 이 시작한 스칸디나비안 이란게 독특한 이유가 저 입슨 이 지적한 저 말에, 저런 남다른 지형이 한몫했을 듯해. 반면 조선 땅에 바다는 모든게 흐리멍텅 한거지. 인간들도 흐리 멍텅 한거고. 높은 산도 없는거고. 가파를 해변도 없는거고 쟤들에 비하면.
하이랜드 클리어런스 가. 저기 하이랜드와 섬들 에 세워진 나라 급 들 영지 급들의 땅이야. 저런 험한 곳 곳에 또한 스콧애들이 문화를 이루고 산겨. 오른쪽 오크니 제도, 더 가서 솃랜드 제도, 왼쪽에 아웃 허브리즈 라는 웨스트 아일랜드즈. 아 골때리 저 스콧. 영국 이란 나라는 잉글랜드 가 중심이지만, 이 스콧 도 엄청난겨 이게.
휴 맥케이 가 저런 맥케이 클랜에서, Scourie. 스카우리, 써덜랜드의 아주 맨끝 해변에서 태어났어. 여기가 북위 58도야. 바이칼 호수 가 53도여.
여기서 태어나서, 1660년 찰스2세 왕정복위하는게 맥케이 20세, 이때는 찰스2세 보디가드 부대, 2차 앵글로-네덜란드 전쟁 할때 네덜란드를 적으로 싸워. 그리고 오스만이 베네치아 크레테 섬을 막바지 먹는 시점에 가는겨 베네치아 부대로 자원해서, 그리고 크레테섬은 오스만에 뺏기는거고, 와서리 3차 앵글로-네덜란드 때는, 이때 프랑스 가 네덜란드 쳐들어가면서 찰스2세 때문에 사람들이 헷갈려져 버리거든, 대체 우리가 왜 카톨릭 편에서 싸워야 하냐며, 맥케이 는 독실한 프레스비테리언 이야. 맥케이는 이전엔 2차때 네덜란드를 공격했지만 경제전쟁으로, 3차때는 네덜란드 편에서 앵글로-스콧 브리게이드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싸우는겨. 맥케이 는 네덜란드땅의 앵글로-스콧 브리게이드 에 있는거야
저 브리게이드 를 제임스2세 가 갖고 오려는 걸 오렌지한테 거절 당한거고.
1688 때 제임스가 쫓겨나고 다음해 3월에 제임스가 프랑스 군대 에 아이리쉬 떨거지들 레지먼트 대륙에 있던 애들을 데리고 온겨 아일랜드로. 스콧에선 던디 가 제임스 편 을 든거고, 이때 스콧에 오렌지편으로 세운게, 던디 는 제임스로 가고, 이 맥케이 야. 헌데 맥케이가 병이 들어서 스콧에 늦게 들어온겨.
Mackay had 1,100 men from the Scottish regiments in Dutch service; recruits increased his numbers to over 3,500 but many were only partially trained. On 16 May, Dundee reached Glen Roy, where he was joined by 1,800 Highlanders recruited by Ewen Cameron of Lochiel. After failing to tempt Mackay into an ambush, Dundee returned to Glenroy on 11 June.
맥케이 는 네덜란드에서 스콧레지먼트들 1100명을 데려오고, 더 모빕해서 3500명. 대부분 훈련은 제대로 안되고 리쿠르트된 애들은. 던디 가 글렌 로이 에 가서 1800명 하이랜더들과 합류해. 하이랜더들은 카톨릭이고, 글렌로이는 저 북서쪽 끝이고. 로크 아바르 지역이면 해변이거든. 저 북서쪽 끝에 까지 던디가 가서리 다시 동남쪽으로 글래스고 쪽에 에딘버러로 다시 가는겨 던디가. 졸 불쌍 .
When Jacobite reinforcements under Sir Alexander Maclean arrived at Blair on 25 July, Murray withdrew. Mackay left Perth with around 3,500 men and moved north to his support, entering the Pass of Killiecrankie on the morning of 27th. Finding Dundee's forces positioned on the lower slopes of Creag Eallich to the north, he faced his troops uphill, their line only three men deep to maximise firepower.[21] The Jacobites began their assault shortly after sunset at eight pm; volleys from Mackay's left flank killed nearly 600 but the effectiveness of their fire was masked by a shallow terrace, while the right flank fled without firing a shot. Highlander tactics consisted of firing a single volley at close range, then using axes and swords in hand-to-hand fighting
킬리크랜키 전투 가 저해 7월 인데, 여기가 퍼뜨셔 고 이 오른쪽이 앵거스에 위가 애버딘이고, 둘이 서로 가운데서 붙은겨. 던디 가 좋아하는게 매복에 습격이야. 해떨어지고 8시에서 단 30분동안 끝난건데, 맥케이가 가다가 걍 습격당한겨.
발리 라는게 동시사격이야, 저때의 전쟁술이, 총이란게 플린트락 이 나오고 했지만 아직도 재장전 이 늦고 저격율이 약해. 같이 한방 들 쾅 하면서 대포 소리 나듯이 쏘고, 다음 열이 이어서 또 쏙, 그 다음열이 또 쏘고, 그 사이 로딩 하고, 이게 안되요 잘. 그 시간에 쟤들이 그냥 뎀벼 처들어오거든 착검 하고, 이게 플러그-보이오넷 이란겨. 왼쪽은 저런 발리 숏에 맥케이의 훈련된 왼쪽부대가 600명을 죽여. 그런데 갓 소집된 오른쪽 부대는 발리 저격없이 그냥 도망가. 하이랜더 애들이 한방의 동시사격 하고 바로 도끼나 칼들고 백병전을 하는거여. 여기에 겁을먹어
저기서 맥케이 가 대패를 당해. 원래 던디 의 제코바이트가 이긴겨 저건. 던디는 저때 죽고. 얘들이 밀어붙이면 되는데, 리더 가 사라진겨. 더하여, 병참 보급이 안되는겨 제코바이트 쪽은. 전쟁은 병참 이거든. 맥케이 가 바로 수습해서 재코바이트 들을 진압하는겨. 그리곤 아일랜드 로 가서 싸우는거고. 아일랜드 에서의 재코바이트 전쟁이란건 프랑스 루이14세 가 지원하는거고, 루이는 비용대비 효과 측면에서, 버린겨 아일랜드를, 그냥 아일랜드 파견 부대 에 저 아이리쉬 애들을 데려와서 대륙에서의 9년전쟁 의 저 대동맹 애들을 상대하는게 나은거야. 그래서 리므릭 조약 을 루이 가 맺은겨. 그래서 아이리쉬 와일드 기스 가 날라온거고. 참 불쌍한겨 이 아이리쉬 애들은. 패트릭 싸쓰필드도 프랑스 9년전쟁에서 1693년 죽는거고. 저 스콧의 제임스 가 대체 멀 지들한테 해준게 있다고, 카톨릭이니까니 어쩌고. 참 한심하면서도 참 안타까운게 저때 아이리쉬여 저게.
The Battle of Steenkerque (Steenkerque also spelled Steenkerke or Steenkirk) was fought on 3 August 1692, as a part of the Nine Years' War. It resulted in the victory of the French under Marshal François-Henri de Montmorency, duc de Luxembourg against a joint English-Scottish-Dutch-German army under Prince William of Orange.
맥케이 는 그리고나서, 대륙의 9년전쟁에 반프랑스 로 참전하는거야 다시. 1692년 스틴커크 전투. 저 어린 앵거스 더글라스가 21세 때 죽은, 여기서 죽어. 상대가 륑상부르 여. 천하무적이여 이 인간은. 맥캐이 52세.
던디 가 1648년생이고 킬리크랜키 1689년 41세에 맥코이 와의 전투에서 이기고도 죽어.
던디와 맥케이는 둘이 같이 네덜란드의 앵글로-스콧 브리게이드 에 있었어. 세네페 전투 1674년 도 같이 있던겨. 둘이 한편이야. 둘이 친했음에 분명해.
그리고는 둘이 적이 되서리, 여덟살 어린 던디가 이겼지만, 죽었어.
둘다 같은 스콧에 프레스비테리언 이야.
누가 옳고 그르고, 할게 없어 저게.
전쟁이란건 병참이고, 후속군이 계속 지원이 되어야 해. 반란 이란게 대게 실패하는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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