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in particular tracked the careers of potential supporters, like the Catholics Thomas Buchan and Alexander Cannon, also officers in the Scots Brigade and who replaced Claverhouse after his death at Killiecrankie.  

 

제임스2세 가, 형이 킹일때 미리 자기의 스콧 사람들을 경력관리 시키거든. 이걸 현대 인사관리에서 CDP 커리어 디벨럽먼트 패뜨 라고 해. 자기가 카톨릭이야. 토마스 버캔, 알랙산더 캐논 이 둘은 카톨릭이여. 이 둘 이랑 존 그램 과 함께 제임스2세 의 재코바이트 봉기 의 스콧 의 세 인물이야. 그런데 존 그램 은 장로교 인겨. 

 

더하여, 존그램은 클레이버하우스 라는 영지의 영주고 스콧지역의 핵심인사고 잘 살았어. 저 둘과 전혀 다른겨 인생이. 저 둘은 카톨릭 이고, 스콧에서 소수여. 용병으로 입에 풀칠하던 이들이야. 이게 전혀 달라 처지가. 

 

제임스2세가 프랑스 군대 를 끌고 아일랜드로 갈때, 스콧에서 아일랜드로 간 이들이 토마스 버캔, 알랙산더 캐논 이야. 스콧에선 존 그램 이 재코바이트 의 리더 이고, 존 그램이 킬리크랜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죽어, 이 자리를 저 둘이 이어서 받는겨. 이 둘은 각각 1724년 1708년 에 죽어. 죽을때 까지 재코바이트 인겨. 

 

With James' recommendation, in September 1678 Claverhouse was given command of one of the 'Highland' companies employed to police South-West Scotland; unlike the earlier semi-private 'Independent' companies, these were funded by the government. While the primary objective was suppression of illegal Presbyterian field meetings or Conventicles, it was also driven by the conflict between the Presbyterian Earl of Argyll and the equally Presbyterian Macleans over control of Mull 

 

존그램 이 제임스2세가 킹 이전일때 추천으로 1678년에 하이랜드 컴퍼니 들 의 하나의 컴퍼니 를 맡아. 이 하일랜드 는 카톨릭 이고, 하이랜드는 독립 용병회사가 아니고 정부에서 펀딩을 했다. 이 하이랜드 를 앞세워서 불법적인 프레스비테리안들의 모임인 콘벤티클 을 진압하는겨. 즉 저때는 킬링타임 의 시대고, 주교체제를 거부하는 장로교들이 콘벤티클 이라는 소규모 조직으로 움직인다고 했잖니. 이걸 진압군으로 카톨릭 인 하이랜드 의 컴퍼니에 펀딩하면서 쓴겨. 또한 멀 Mull 이라는 곳이 아가일 과 맥클래인 의 장로교 들 가운데 지역이고 이들끼리도 싸우는겨. 아가일 은 이전 크롬웰 편들어서 프레스비테리언들 한테도 척이 진겨. 또한 저들 클랜들 끼리 역시나 앙숙들이야 스콧 클랜들이란게. 

 

Demarcation disputes between Claverhouse and regional magnates such as the Earl of Queensberry meant he had to tread carefully; in December 1678, the regular clergy complained when he told them that he had no orders to apprehend anyone for past misdemeanors.[13] The situation then exploded when Covenanter militants murdered Archbishop James Sharp on 3 May 1679.  

 

클레이버하우스 가 지역 패권을 다투는 이들이 더글라스 가문이야. 더글라스 도 스콧 이름이고, 저지역 앵거스 에 그 위 맥벳 의 머리 에 애버딘 이 이 더글라스 가 또한 패권자야. 여기 방계가 퀸즈베리 백작이고. 그래서 행동이 조심스러워야 했다. 1678년에 교계가 존 그램 에게 불평하다, 존그램이 교계에게 말하길, 자기는 지난과오들에 대한 책임으로 누구도 구속할 권리가 없다. 존 그램은 사람들을 함부로 구속 폴리싱 하지 않은겨. 이 상황이 터져서 커버넌터 병력이 1679년에 제임스 샤프 대주교 를 살해했다. 이 대주교는 에피스코팔리언, 주교체제 인정하는 프레스비테리안 이야. 즉 같은 장로교 애들끼리 암살 열라게 하던거고. 아 이 스콧의 장로교, 존 녹스 가 시작한, 이전 썰, 이 존 녹스  우리 스콧 마리 언니에게 미사한다며 쌍욕질하던. 장로교 가 이 땅의 그리스도 시작이지만 말야 이 반도땅에. 정 안간다 나는. 대체 이땅빠닥에서 칼뱅 이니 존녹스 니 저따위 애들의 행태 를 알고 있는 장로교인들이 몇일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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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ing news of a large conventicle on 1 June 1679, Claverhouse located it near Loudoun Hill but "little to our advantage; for, when we came in sight of them, we found them drawn up in batell, upon a most advantagious ground, to which there was no coming but through mosses and lakes. They were not preaching... They consisted of four battalions of foot, and all well armed with fusils and pitchforks, and three squadrons of horse.

 

1679년 6월1일에 큰 콘벤티클 이 열린다는 소식에, 던디 가 라우든힐 근처 에 간겨. 이스트 에어샤이어 지역. 진지가 졸 불리해, 우리가 그들이 보이는 시야로 갔을때 우리는 알았어 그들이 가장 유리한 고지에 있다는걸, 거기에 접근하려면 풀숲에 호수들 외엔 없어. 그들은 설교도 안하고 있었어...그들은 네개의 보병 대대병력이었고 잘 무장되었어 퓨실과 쇠스랑들로. 그리고 3개 기마소대들로. 

 

퓨실 fusil 이란게 플린트 락 이야. 이전 화약이야기썰. 성냥으로 키는게 아냐 저때 스콧애들 총기 조차. 

 

저때가 킬링타임 시절이고, 찰스 복귀하고 주교체제거부하는 장로교들이 다시 다시 커너번터 에 콘벤티클 로 등장할때고 이들이 오육년 지나서 전쟁세력이 된겨 이게 럴린그린, 드럼클로그, 보뜨웰 브릭 전투 들이여. 던디 의 저 장면은 드럼클로그 전투 일때여. 

 

The Covenanter force was led by 19 year old William Cleland, who had positioned them at the top of a hill, with a marsh in front; after exchanging fire, the dragoons advanced but became stuck in the wet ground and seeing this, the Covenanters charged. Claverhouse's horse was wounded and maddened by pain, carried him away from the battle, with his troopers following; the Battle of Drumclog was little more than a skirmish but cost the government 36 men and raised Covenanter morale  

 

저 드럼클로그 전투 의 리더 가 윌리엄 클레랜드. 당시 19세. 당시 찰스2세 고 정부군이 던디.여. 이 드럼클로그 는 던디 의 정부군 이 이겼지만 손실도 만만찮아. 던디 는 부상을 당하고, 게릴라 전으로 오히려 커버넌터가 이긴 듯 보이고 할때 이 리더가 윌리엄 클래랜드 인데, 얘 는 더글라스 가문의 게임키퍼, 즉 사냥할때 몰이꾼 인겨. 얘가 이후 보뜨웰 브릭 전투 에도 참여해. 커버넌터 의 핵심이야. 사냥놀이 몰이꾼 하면서 전투력을 배운겨 이 사람이. 그리고는 1688 명예혁명때 오렌지 윌리엄 의 에이전트 를 하고, 오렌지 가 킹 이 되서 오히려 스콧 에서 장교 자리를 꿰차고 영지도 받는겨. 

 

저때 정부군 이었던 던디 는, 오히려 재코바이트 반란군 이 되어버린겨 오렌지 윌리엄 이 킹이 되고. 인간사란게. 

 

그리곤 던디 가 1689년 7월에 킬리크랜키 전투에서 죽어. 승리는 했지만 리더가 죽었어. 이 자리를 받은게 알렉산더 캐논 이야. 바로 8월에 던클드 전투여. 이 던클드 전투 의 정부쪽 리더 가 저 윌리엄 클레랜드 야. 이 윌리엄은 이 던클드에서 죽어. 

 

Claverhouse returned to Glasgow, which the Covenanters briefly besieged but could not take without artillery.[14] On 3 June, Claverhouse and his troops headed for Stirling Castle, the strongest fort in Scotland to await the arrival of reinforcements under Monmouth, which included the militia and two regiments of dragoons. He escaped censure for Drumclog but made subordinate to Monmouth; on 22 June, the sides met again at the Battle of Bothwell Brig and this time the Covenanters were routed  

 

던디 가 커버넌터의 모랄이 높은걸 봤어. 그리고 부상당하고 드럼클로그 에서. 글래스고 로 왔는데, 커버넌터들이 포위를 했는데 대포가 없어서 머 걍 가. 던디가 다시 열받아서리 쫓아가는겨. 그리고 먼머쓰 공작 이랑 합류하려하고. 이 먼머쓰도 아가일과 반란 하다 제임스2세에게 죽는거고 나중엔. 이 두 레지먼트 용기병 연대 들이 합세해서 보뜨웰 브릭 전투 를 하고 이번엔 커버넌터스가 진압이 되고, 여기서 윌리엄 클레랜드 는 탈출을 한거고. 

 

Nearly 1200 Covenanter prisoners were held at Greyfriars Kirkyard in Edinburgh; Claverhouse was dispatched to London to protest against Monmouth's alleged leniency towards them. This began his close relationship with James, who in 1680 awarded him the barony of Freuch in Galloway  

 

당시 에딘버러 의 그레이프라이어스 커크야드. 그레이 가 프란시스칸 수도사들 회색 옷이고 여긴 묘지여. 감옥을 여기다 세운거고. 커버넌터 가 1200명 죄수. 먼머쓰가 저 커버넌터 죄수들에게 호의적이었다고 던디 가 제임스 에게 항의를 하고 제임스 는 오히려 이걸 호의적 생각해서 갤러웨이의 배론 자리를 줘. 왜냐면, 던디 가 이전 드럼클로그 에서 당했고 자기 대주교도 암살당하고, 던디 입장에선 완벽히 저건 반란군이야. 

 

In January 1681, he was appointed to the sheriffships of Wigtown, Dumfries, Kirkcudbright and Annandale. In December 1682, he was appointed colonel of a new regiment to be raised in Scotland. He had still greater honours in view. In January 1683, the case of the Earl of Lauderdale was debated in the House of Lords. Lauderdale was proprietor of the lands and lordship of Dundee and Dudhope, and the decree of the Lords against him was issued in March 1683 for the sum of 72,000 pounds. Claverhouse succeeded in having the Castle of Dudhope (part of the property of the defaulter) and Lauderdale's title of Constable of Dundee transferred to him by royal grant in 1684. In May 1683, he was nominated to the Privy Council of Scotland.  

 

커버넌터스 반란이 진압이 되고, 위그타운 덤프리즈 등 의 셰리프쉽. 이쪽은 완전 서쪽이야 아가일 아래. 완전히 실세여 스콧 지역에서. 스콧의 새로운 레지먼트 의 커널로 임명이 돼. 레지먼트 는 이전 썰했듯이 영주 가 짱인겨 중세에. 브리게이드 란건 킹덤 차원에서 운영하는거고, 영주 급이 관리하는게 레지먼트여. 커널 이란게 스페인이 만든 tercio 테르띠오 가 세 컬럼의 줄로 된 부대들이고 한 컬럼의 짱을 커널 이라하고 이게 레지먼트 급의 짱이 된겨 이 단어가. 이게 지금 대령 이여 군대에서. 걍 스콧의 실세 중 실세여. 1683년에 로더데일 백작 사건 이 상원에서 논의되었는데, 이 로더데일 이 찰스2세 가 가장 총애하는 스콧 백작이었고 이를 시기하는 라이벌애들이 권력남용에 사기로 의회차원에서 고발을 한겨. 로더데일이 패소하고 이 로더데일이 던디 와 더드홉 의 상관영주였고, 던디 가 더드홉 캐슬 도 승계받아. 1683년에 스콧의 프리비 카운슬 에 임명돼. 프리비 는 최고비밀자문의 그야말로 실세고. 

 

In 1684, he married Lady Jean Cochrane, daughter to William Cochrane, 1st Earl of Dundonald, a staunch Covenanter. Shortly after the death of Charles II in 1685, Claverhouse incurred a temporary disgrace – he stood up for the rights of ordinary soldiers who were being poorly treated – by his deposition from the office of privy councillor; but he was reinstated in May, although his commission of justiciary, which had expired, was not renewed. In 1686, he was promoted to the rank of major-general, and given the additional position of Constable, the dignity of Lord Provost of Dundee. One of his first acts as Provost was to abolish the death penalty for theft under his jurisdiction. In 1688, he was second-in-command to General Douglas in the army which had been ordered to England to aid the falling dynasty of the Stuarts. In the same year, however, he was created Viscount Dundee by James VII while with the Scots army in England. He was also given military command of all the King's forces in Scotland. 

 

1684년 36세 결혼. 던도날드 백작 의 딸 진 코크랜 과 결혼. 강력한 커번넌터 집안. 찰스2세 죽고 던디 가 불명예를 맞다. 자기 부대가 제대로 취급을 못받아. 프리비카운슬에서도 짤려. 져스트 사법직에서도 짤려. 1686년에 그래도 메이저 제너럴, 제너럴이면 별이고 소장급이야. 칸스터블 자리도 받아. 던디 의 프로보스트 로어드. 프로보스트 가 도시의 시장이야. 첫 작업이 도둑질에 대한 사형 폐지. 군대 총사령직 더글라스 에서 두번째 사령직, 1688년, 잉글랜드 로 가서 제임스2세 를 지원하는겨. 아직 킹일때여. 같은 해 제임스2세 로 부터 던디 의 비스카운트 로 임명돼. 이때 된거야 비스카운트. 제임스가 수세에 몰릴때 자기 인간 만든겨 그러면서 스콧의 모든 병력에 대한 총 지휘권을 받아. 

 

Dundee returned to Scotland in anticipation of the meeting of the Convention of Estates in Edinburgh, and at once exerted himself to bolster the waning resolution of the Duke of Gordon, the governor of Edinburgh Castle, with regard to holding it for the King. The Convention proving hostile, he conceived the idea of forming a rival convention at Stirling to sit in the name of James VII, but the hesitancy of his associates rendered the design futile, and it was given up. Prior to this, on 18 March 1689, he had left Edinburgh at the head of a company of fifty loyal dragoons, who were strongly attached to his leadership. 

 

제임스2세 는 떠났고, 오렌지 가 킹이 되었고, 던디는 스콧으로 돌아오고, 스콧이 애매해진겨 상황이. 에딘버러에서 영주들이 모두 모이기로 되었고, 던디가 실세 고 스콧에서, 고든 공작은 카톨릭이고 제임스파야. 던디 는 친제임스여. 고든 이 여기서 안절부절 하는거고, 머뭇대며 친제임스 라고 하며 동지 하나 겨우 만든겨 던디가. 영주 모임도 모두 반제임스야, 던디 는 제임스 에게서 비스카운트 받고 총 사령관도 받은 상태야. 여기서 반 제임스를 못해 이사람은. 다른 영주모임체를 만들려 했는데 던디 의 참모들도 돌아서는겨. 1689년 3월 18일 에 에딘버러 를 떠나다 50명의 충성 용기병들 로 된 하나의 컴퍼니 만 데리고, 이들은 던디에 충성했다. 고든 공작도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항복해 .

 

Dundee retired to Dudhope. On 30 March, despite a letter to the Convention stating that he was not in arms and that he was living peacefully at home awaiting the birth of his first child, he was publicly denounced as a traitor. He had offered to give a bond or parole to no avail and in the latter half of April attempts were made to apprehend him at Dudhope, and at his residence in Glen Ogilvy; but the secrecy and speed of his movements outwitted his pursuers, and he retreated to the north  

 

던디 는 던홉 으로 물러나서 의회에 편지를 써 자기는 비무장이고 집에서 평화롭게 산다 첫아기 가 나오는걸 기다리면서. 그러나 그는 공식적으로 반역자로 낙인되었다. 그는 퍼로울, 이건 전쟁에 참여 안하겠다는 말이야 당시.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고, 더드홉의 그를 구속 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그의 움직임들의 비밀과 속도는 추격자들의 위에 있었고 그는 북쪽으로 갔다. 

 

In 1689, after the overthrow of King James VII, he continued to support the Stuart dynasty in his capacity as commander-in-chief of all Scottish forces. On 13 April, Dundee raised the Scottish Royal Standard on Dundee Law in support of his king, country and the Jacobite cause. However, in spite of his subsequent association with the city of Dundee, he was to face what the historian of Jacobitism, Bruce Lenman, has described as a "stony faced" reception from its townsfolk. It is claimed that Dundee's association with the city was brief and unpopular as he was seen as the representative of an arbitrary authoritarian monarchy that was eroding the self-autonomy the burgh had enjoyed  

 

던디는 1689년에 스콧 병력의 총사령으로서 스튜어트 조 를 지원했다. 던디로 가 언덕이름이고, 여기서 스콧 로얄 기준군대 를 만든거고, 그런데 자코바이티즘 역사가 브루스 렌맨 에 의하면, 던디 타운스포크, 도시의 중류층이여, 스토티 페이스트. 인상이 차가운겨. 따뜻한 인상의 인간이 아닌 취급을 받았다 시민들에겐. 던디가 그 도시에 짧게 비스카운트 였고 그래서 인기가 없었고, 단지 멋대로 온 권위적 군주제의 대표 로써 자기들 자치 를 훼손 했다는거지. 당시 버러 는 자치를 즐겼고. 

 

클레이버 하우스 는 던디 라는 도시 의 북쪽 지역이고, 던디 라는 도시의 비스카운트 가 되자 마자 1688이 온거야. 

 

던디 의 행동들의 인상이 아니라, 저건 시민들의 어찌할 수 없는 선입견 이야.

 

더하여, 제임스 가 카톨릭 이면서, 중세에 저런 영지 할당에 영주 를 박는 건 이미 구태적인겨. 17세기여 이제. 근대여 근대. 카톨릭 에 마음을 둔 군주들은 중세 봉건 체제 에 마음바닥이 있거든. 머 그렇다고 주는걸 안받겠어?

 

Indeed, when he returned to Dundee with a small troop of horse (Dundee Law at that time lay outside the burgh walls) he was to find the walls guarded and the gates firmly shut.[17] The city was heavily garrisoned by Williamite forces at the time which may better explain why the gates were barred to him.[18] The fact that the large force in Dundee made no attempt to give battle or capture him may actually suggest they were to some degree sympathetic to his cause. Later events show that cavalry based in Dundee at the time later attempted to defect and join his forces. For four months he rallied support in the hope that King James would return from Ireland, showing considerable skill in letter-writing and diplomacy and deploying successful skirmishing tactics to buy himself time  

 

던디로 돌아왔어 작은 기병들로. 던디로 는 당시 버러 의 성벽 의 바깥에 있었다. 왔는데, 성벽이 닫혔어. 도시는 윌리어마이트 들이 이미 지키고 있어. The Williamite War in Ireland (1688–1691) 저당시를 또한 아일랜드의 윌리어마이트 전쟁 하거든. ite 아이트 라는게, 따르는 자들 이야. 윌리엄을 따르는 자. ites 그리스어 이테스 이고, levite 레위기 의 레위족 을 리바이트, 리바이 를 따르는 자들 이야. 가보니 걍 애들이 자기를 적으로 둔겨.  황당한겨 이건. 그렇다고 설명도 안해. 그렇다고 머 전쟁하려고도 안하고 던디를 잡으려고 도 안해. 아마도 던디 에 대한 동정적 공감적 정서 가 있었을 듯. 나중에 던디 도시 안에 카바예로 들이 항복하고 그에게 합류했다. 네달동안 그는 분전했다 제임스 킹이 아일랜드에서 스콧으로 올거야 라는 희망과 함께 서류 작성이나 외교 에 굉장한 스킬을 보여주었고 게릴라 전술에 성공적 이었다. 

 

The Battle of Killiecrankie (Scottish GaelicBlàr Choille Chnagaidh), also referred to as the Battle of Rinrory, took place on 27 July 1689 during the 1689 Scottish Jacobite rising. A Jacobite force under John Graham, Viscount Dundee defeated a government army commanded by Hugh Mackay.  

 

던디 성벽에 온게 1689년 사오월 이여. 그리고 7월 27일 이 킬리크랜키 전투야. 여기서 죽는겨 던디 존 그램이. 던디 의 병력은 2천여명, 정부군의 휴맥케이, 역시나 스콧 사람이야. 병력이 4천여명이야. 정부군이 2천명 가까이 죽거나 다쳐. 던디 부대의 승리여. 던디쪽도 반가까이 사상자가 나지만. 

 

그리고 던디는 여기서 죽은겨. 

 

던디 는, 승리 한 전투 에서 죽었어. 

 

던디 는, 킬링타임 시 드럼클로그 전투 보뜨웰 브릭 전투 의 원흉인겨 커버넌터스 에겐. 이 프로테스탄트 사가들이 드러운건, 저 제임스2세 쫓겨날때 스콧의 장로교들 엘더들 125명이 모일때 프레스비테리언 75명 에피스코팔리안 50명이야. 절반 가까이가 에피스코팔리언 이라는 장로교고. 결국 윌리엄 오렌지 가 재위하고 여기 스콧은 이게 의미가 없어 주교 체제냐 아니냐. 거의 에피스코팔리안이 돼. 조직도 가 먼상관이야 지들 지저스 갓 믿는데. 

 

지들 모두 에피스코팔리안이 되면서 당시 절반이 에피스코팔리안이면서, 이걸 인정안하고 암살에 전쟁 한 커버넌터스 콘벤티클 을 진압했다고 던디 를 역사적으로 죽이는거고, 더하여 카톨릭 제임스 를 지지했다고 죽이는겨 역사가.

 

치사한 인간들이야. 특히나 저기에 동조하는 저 스콧 사가들. 왜? 사가 애들이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여 이게. 반카톨릭인겨. 카톨릭이 한건 모두 악이야. 

 

존녹스 그 개색끼가 결국은 스콧마리를 죽인겨. 저 장로교 개 우두머리 시조. 

 

던디 는 스콧 의 내셔널리티 입장에서는 가장 위대한 인간인겨. 스콧의 맥알핀에서 나온게 저 스튜어트 까지여. 같은 핏줄이야. 어떻게 8백년 된 다이너스티 자기들 상징을 그리 쉽게 보낼 수 가 있겄니. 저런 사람이 있어야 해! 

 

유일한 사건이야 1688년 자기 킹 상징이 부랴부랴 쫓겨난건, 자기 사람들에 남의 군대가 와서 피한방울 없이. 

 

이건 인류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고, 앞으로도 없어 이런건. 

 

저걸 그냥 두고 봐선 안되는겨. 

 

그 다음을 잇는 토마스 버캔 과 알랙산더 캐논 과는 전혀 전혀 달라 던디는. 저 둘은 당연히 해야하는 카톨릭 에 허섭한 인생이여  딱까놓고 비교하면 던디와. 던디는 그야말로 최고 의 자리여. 그걸 머 아무 해서 받은 자리도 아녀! 오히려 저 던디 를 지가 이용하려고 제임스가 비스카운트 걍 하나 얹어준 것일 뿐이야. 던디는 프레스비테리언 이여. 안해도 돼. 저당시 모~~~두들 반제임스 로 돌아선거야. 던디 도 반 제임스 하면돼! 어차피 저 컨벤션 의 로어드 들이란게 모~두 찰스2세 제임스2세 때 의 로어드 영주 들이었거든.

 

역사란건 너무나 치사한거야 사후의 역사 평가라는건. 

 

던디 는 스콧 의 내셔널리티 입장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인물이야. 하물며 그레이트 브리튼 의 입장에서 조차 영국 차원에서도 저런 인물이 있어야만 해! 그래서 저런 사건 을 겪어야만 해! 그래야 자기들 내셔널리티 가 탄탄해지는겨. 그래서 후일에 스콧에서 어마어마한 인물들이 나온거고 영국이 위대한거고 미국을 낳은거야. 

 

지금 일본 을 만든건 그래서 신센조 애들인겨. 신센조 가 없었으면, 신센구미 의 마지막 발악이 없었으면 지금 일본이란건 없어! 신센구미 의 히지카타 도시조 는 그야말로 위대한 애야. 일본 의 두 인물 은 오쿠보 도시미치 와 히지카타 도시조. 이 두 애야. 이렇게 볼 줄 아는 애도 이스턴 특히 일본에도 없어. 이게 맞아 이렇게 보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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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사가들은 던디 를 재평가 하도록 해. 

 

니덜 역사 평가 하는거 보면, 정말  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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