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ce Eugene Francis of Savoy–Carignano[1] (18 October 1663 – 21 April 1736) was a field marshal in the army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of the Austrian Habsburg dynasty during the 17th and 18th centuries. He w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military commanders of his time, and rose to the highest offices of state at the Imperial court in Vienna.  

 

Eugène de Savoie-Carignan ou François Eugène de Savoie, surtout connu comme le prince Eugène (en allemand : Prinz Eugen, en italien : Principe Eugenio), 

 

프린스 유진 프란시스 오브 사보이-카리냐노. 불어로 외젠 드 사브와-카리뇽. 르 프린스 외젠. 이탈리로 프린치페 우제니오. 

 

From French Eugène, from Latin Eugenius, from Ancient Greek Εὐγένιος (Eugénios, “well born”), from εὖ (eû, “well”) + γένος (génos, “born”)  

 

유진 외젠. 에우 게니오스. 에우. 잘. 게노스. 태어난. 잘태어남. 에우 가 유 데모니아. 에반젤리칼 은 에우 안겔로스. 좋은 메씬저고. 이름 으로 눈에 띄는데, 

 

이사람은 대체 내셔널리티 를 어디로 봐야해. 

 

프린스 란 타이틀은 외젠의 할배부터 프랑스 코트에서 주는 타이틀이야. 외젠의 내셔널리티 는 프랑스야. 할아버지의 후반인생부터. 그런데 외젠 은 프랑스를 떠나서 오스트리아 코트에서 보낸 사람이야. 외젠의 할배는 사보이 야. 사보이 공작의 동생이고. 

 

그런데 저 유럽사라는게 나라 니 국가 구분이 이게 의미가 없어 보면 볼수록. 쟤들은 내셔널리즘 이란게 없어 이게. 월드워 원투 터지고 20세기 에나 걍 스포츠 하면서 푸는게 네셔널리즘 이야 유럽에선. 

 

의미가 없어 내셔널리티. ㅋㅋㅋ. 내셔널리즘 이란게 얼마나 무지한 집착이냐고 이게. 개미개한 무지능 들이나 신주단지 하나님으로 모시는 내셔널리즘. 이걸 또 극동에선 따로 일본들이 만들어준 민족 주의 라는 별 기괴한 별개의 단어로 ㅋㅋㅋ. 민족주의 라는건 이건 극동에서나 해당하는 에뜨닉 주의야. 이따위 에뜨닉 개념은 슬람이들조차 없어. 흑인샊히들도 없어 저따위 에뜨닉 개념의 민족주의는. 오직 단 두나라 중국 조선. 머때리는겨 이게. 

 

조선식으로 절대 이해가 안되는겨. 쟨 프랑스 입장에선  적폐여. ㅋㅋㅋ. 그런데 프랑스 역사 에서 다뤄야 해 저 인물은. 그렇다고 외젠 개개끼 하는것도 아니고 위대한 외젠 이야. 조선 식으론 반민족주의자 걸랑. 완전히 이완용 보다 더한 애야 조선식으로 보면.

 

이 조선 들 의 역사관이 얼마나 개후지고 미개한 건가를 유럽사 를 보면 알게돼. 세상에 이 조선들 만큼 저지능에 미개함이 없고 이게 그대로 중국사고. 건강보험금을 중국들에게 이조원 이상을 퍼줬다미, 하기사  개표사무원을 중국에 맡기는데 쟤들은 반드시 나라를 중국에 바칠것이고 그것이 꿈일거야 저것들이. 곧 한전도 바칠거고 태양광으로 나무들은 다 베고 중국산 태양광으로 도배를 해대고. 참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민족주의야 ㅋㅋㅋ. 중국 에 철저히 개가 되는 민족 주의. 내셔널리즘 을 이상한 에뜨닉 용어 민족주의 로 따로 만들어내서 완전히 수천만을 죽여버리려 작정하는거지 증극 에 바치면서. 위대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가 서겠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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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은 할아버지 가 중요해. 할아버지 부터 프랑스 와 친한겨. 프랑스 에선 아주 중요한 집안이야 이 할아버지때문에. 이 할아버지 의 핏줄인 사보이-카리냐노 가 사르디냐 킹덤으로 이탈리아를 통일을 해. 이 할아버지 가 사보이 공작과 별개로 프랑스에서 자리를 잡아. 헌데 이 손자 외젠이 반프랑스로 오스트리아 코트로 가서 사보이의 입지를 굳혀줘.

 

Thomas Francis of Savoy, 1st Prince of Carignano (ItalianTommaso Francesco di Savoia, Principe di CarignanoFrenchThomas François de Savoie, Prince de Carignan; 21 December 1596 – 22 January 1656) was an Italian military commander and the founder of the Carignano branch of the House of Savoy, which reigned as kings of Sardinia from 1831 to 1861, and as kings of Italy from 1861 until the dynasty's deposition in 1946.

 

Prince étranger (English: "foreign prince") was a high, though somewhat ambiguous, rank at the French royal court of the Ancien Régime.

 

카리냐노 프린스 사보이의 토마스. 프린스 가 카리냐노 에 붙는 타이틀이고. 손자 외젠 이 프린스 란건 카리냐노 와 상관이 전혀 없어 카리냐노는 외젠의 삼촌한테 가는 자리야. 토마스 가 사보이 가문의 방계 인 카리냐노 의 시작이고, 이 가문에서 사르디니아 킹덤 의 이탈리아 통일 을 만드는겨. 토마스 의 자식들이. 토마스 는 30년전쟁과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 소속이었다가 뒤에 프랑스 로 갈아타고 여기서 프랑스 왕실 집사 짱까지 해. 그리고 이 사람자식들은 프랑스 에서 프린스 타이틀 이야. 공식으론 프린스 에트랑지. 외국인 프린스. 해서 저이후 자식들은 모두 타이틀이 프린스. 프린세스 야. 외젠을 프린스 라고 부를때 이 호칭은 프랑스 코트에서 부여한 명함이야. 

 

Charles Emmanuel I (ItalianCarlo Emanuele di Savoia; 12 January 1562 – 26 July 1630), known as the Great, was the Duke of Savoy from 1580 to 1630. He was nicknamed Testa d'feu ("the Hot-Headed") for his rashness and military aggression  

 

토마스 의 아빠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인데. 사보이 공작. 이 사보이 가 서기 1003년에 움베르토가 백작 시작해서 2백년 지나 샹베리 를 받아 수도로 삼고 2백년 더 지나서 1400년 지나면서 공작이 되고. 에마누엘레1세의 아빠 필리베르토 때에 토리노 로 수도를 옮긴겨. 이탈리안 전쟁 끝날때에 합스부르크 와 손잡은거고. 프랑스 와 결별한거거든 이건. 그리고 에마누엘레1세 부터 저 두나라 사이에서 밀당을 하는겨. 이 사보이 가 스페인애들이 알프스 넘어가는 길목이야. 아주 신경쓰이는 나라야 프랑스 나 합스부르크 나. 이 사보이 는 누가 잡느냐 갖고가느냐 가 유럽사 의 한축이야 또한. 

 

필리베르토 의 부인은 프랑수와1세 의 딸 이야. 필리베르토 가 결혼하고 프랑스와 이별하고 샹베리 에서 토리노 로 온겨.

 

아들 에마누엘레1세 의 부인은 펠리페2세 의 딸이야. 합스부르크와 손잡은겨 사보이가. 토마스 의 엄마가 합스부르크야.

 

에마누엘레1세 의 자식들인 다음 사보이 공작 아마데우스1세 의 부인은 프랑스 앙리4세의 딸이야. 루이13세의 여동생이고. 동생인 토마스 의 부인은 부르봉의 마리.여. 부르봉콩데 의 창립자 루이의 직속 손녀여. 사보이 가 프랑스랑 다시 찐하게 손잡은겨 이게. 이때가 80년 전쟁 에,  30년 전쟁이 막 터지고서 공작 후계자와 토마스 가 부르봉들과 결혼을 한거야. 이건 리슐리외 가 적극적으로 도모한겨 사보이가 중요하니까.

 

 

에마누엘레1세 때 80년전쟁에 30년전쟁 인겨. 그레이트 를 붙여준건 이사람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사이에서 잘 버틴거고. 만토바 후계자 전쟁 때 카살레 성 갖고, 스페인 편들었다가 다시 프랑스 편들었다가 그러다 아래 피네롤로 를 프랑스 가 갖고 가. 이 사보이는  이 피네롤로 의 프랑스 가 항상 신경쓰이고 여기가 철가면이 수용되는 프랑스 외진 감옥인거고, 곧 아래 제노바 해변도 나중 백년은 프랑스 아래 들어와 이게.  이사람이 자식이 20명이 넘는데 합법자식은 펠리페2세의 딸과의 자식 5명이고 이중 막내가 토마스 야. 누이들 시집가고 중간형은 추기경하고.

 

에마누엘레1세 가 죽고, 장남 이 사보이 공작이 되고 부인은 부르봉 루이13세의 여동생이고. 사보이는 합스부르크 와 프랑스 줄을 계속 이리 타는거야. 

 

 

Marie de Bourbon (3 May 1606 – 3 June 1692) was the wife of Thomas Francis, Prince of Carignano, and thus a Savoyard princess by marriage. At the death of her brother in 1641, she became Countess of Soissons in her own right, passing the title down three generations of the House of Savoy.  

 

카리냐노 프린스 인 사보이 토마스 의 부인이. 부르봉의 마리.야. 뒤에 스와송의 백작부인이 돼. 오빠가 죽어서 스와송 을 받는겨. 이여자 아빠가 스와송 백작인데, 앙리4세와 사촌이야. 앙리4세 의 아빠가 앙트완 이고, 동생이 콩데 루이야. 즉 스와송백작 인 아빠가 부르봉 콩데 의 직속인겨인겨. 이 부르봉 콩데 는 부르봉과 가장 친한 삼촌가문인겨 나폴레옹까지.

 

부르봉의 마리 가 루이13세 와 사촌간이야 세컨드커즌. 권력의 중심이야 이놈의 콩데는. 친해도 그냥 친한게 아니라 무지 친해. 

 

Thomas' first recorded service is as a commander in the Piedmontese army under his father in the war against France in 1630 (see War of the Mantuan Succession). It was probably around this time that he first encountered Mazarin, who (though his public position was quite complex) was during 1630-32 in effect a French agent at the Piedmontese court. When the new Duke Victor Amadeus I was forced to accept a French occupation of Pinerolo (Peace of Cherasco, 26 April 1631, and associated secret agreements, implemented 1632), there was widespread dissatisfaction in Piedmont, and Thomas, with his brother Maurice,  

 

만토바 후계자 전쟁 중에 아빠가 죽고, 장남이 공작을 받고. 토마스 가 이때 에이전트 를 하면서 협상하는거고, 피네롤로 를 프랑스에 뺏기다시피 한거고 여기서 마자랭을 만나. 이때 마자랭은 리슐리외 가 신임하는 외교사절인 상태고. 결혼은 이 전에 한겨 부르봉의 마리 와. 원래 결혼하면서 프랑스 랑 다시 친한 상태였는데, 프랑스 가 만토바 후계자 전쟁 쳐들어오면서 사보이가 프랑스에 반감을 쎄게 갖는거야. 아빠가 오래살아서 큰형 사보이 공작은 40이 넘어서 받은거고, 토마스 도 30대 중반인겨.

 

그러면서 토마스는 프랑스 를 적으로 두면서 스페인 코트로 가는겨.  30년전쟁터 벨기에땅으로 가. 스페인의 카디널 인판페, 추기경 왕자 페르디난도 가 플랑드르 에 파견할 부대를 이끌로 스페니시 로드를 지나는거고  1634년 에. 토마스 가 지휘관으로 여길 들어오는겨. 스페인이 저런 토마스를 못믿어. 부르봉 콩데와 결혼한 사보이여. 못믿는다고 해서 볼모로 자기 마누라와 자식들을 마드리드로 보내. 그만큼 프랑스가 싫었던겨 이사람은. 

 

토마스 가 1만여명의 부대를 받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다가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고, 로렌의 샤를 공작과 같이하다가, 추기경왕자 페르디난도 의 핵심 사령이 돼. 스페인네덜란드에서 이 추기경왕자 의 부대가 1635년 이후에 거의 전승이야. 프랑스 가 이해에 참전한거고.  프랑스 가 일단 저 돈 을 못이겨. 돈이야 돈. 머니. 파리 까지 쳐들어 가려는겨. 저때 프랑스 는 지워질 수도 있었어.

 

In 1636, the Cardinal-Infante Ferdinand organised a joint Spanish-Imperialist army for a major invasion of France from the Spanish Netherlands, and Thomas was initially in charge, defeating the French army commanded by Soisons, at the Somme, though Ferdinand soon took over supreme command. The invasion was initially very successful, and seemed capable of reaching Paris, where there was a great panic; if Ferdinand and Thomas had pushed on, they might have ended the war at this point, but they both felt that continuing to Paris was too risky, so they stopped the advance. Later in the campaign, Thomas had problems with the Imperialist general Ottavio Piccolomini, who refused to accept orders from the Prince as a Spanish commander, arguing that his Imperialist troops were an independent force  

 

1636년 부터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가 하나가 된겨 스페인네덜란드 에서. 토마스 는 부인 집안 콩데 가 스와송 백작 이야. 이 스와송 의 부대도 토마스 가 물리쳐. 파리는 패닉이야. 페르디난도 와 토마스 가 파리로 쳐들어갔으면 이때 끝난겨 전쟁은. 그런데 오스트리아 쪽 필드마샬 인 오타비오 피콜로미니 가 토마스 가 왜 스페인 병력의 지휘를 받고 왜 내가 쟤 말을 들어야 하냐면서 따로 놀아. 이 피콜로미니 는 피렌체 사람이 오스트리아 용병대장을 하는거고. 이탈리아 인간들이 여전히 유럽 전쟁의 용병대장들을 하는겨 저게. 그러면서 서로  안친해 ㅋㅋㅋ. 

 

프랑스 는 1640년에 아라스 에서 이기고, 1643년 로콰 에서 이기면서 30년전쟁에서 버틴겨. 얘들은 참전하고 오년 지나면서 부터 감잡은거고 이때 중심은 젊은 그랑콩데 에 십년형 투렌 이야. 

 

Louis de Bourbon (1 May 1604 – 6 July 1641) was Count of Soissons. He was the son of Charles de Bourbon, Count of Soissons and Anne de Montafié. He was the second cousin of King Louis XIII of France and held the rank of prince of the blood.  

 

토마스 의 부인 이 부르봉콩데의 마리 인데. 오빠가 루이 야. 콩데의 직속 손자야. 프랑스가 30년전쟁 참전 시작하고, 태양왕루이 는 꼬마고, 실세는 리슐리외 인거고, 성인인 콩데 루이 와, 루이13세의 동생 그 빌어먹을 오를레앙의 가스통. 우리언니 마드모아젤의 병딱이 아빠, 랑 사촌이거든, 둘이 손잡고 리슐리외 를 쳐내리고 꼬마 루이도 내리고 지들이 킹 하려는겨. 이게 리슐리외 에 발각되고 얜 이후 스페인과 손잡는겨. 이때 역시 토마스 가 제부 인거고. 리슐리외 가 보낸 암살범으로 죽은거로 봐. 그래서 이 스와송 백작 자리가 토마스 부인 인 마리 에게 오는겨 여동생한테. 

 

스와송 의 부르봉 콩데 가 저러면서 토마스 가 일하는 스페인 으로 들어간겨 저때. 펠리페4세 코트 에서 실세여. 오스트리아 피콜로미니 가 불신해서 미안하다며 이후 친해져. 이 둘이 있는 스페인네덜란드 는 스페인의 전승이야 이게. 아직 그랑콩데 티나오기 전이야. 그러다가 큰형 사보이 공작이 병으로 죽어. 1637년에. 꼬마가 공작에 오르고 엄마인 프랑스 여자가 섭정을 하는겨. 꼬마 도 일년만에 죽어 바로. 동생이 이마누엘레2세 야. 형죽고 네살에 오른겨. 

 

The Piedmontese Civil War 1639 – 1642 was a conflict in northern Italy, connected with the Franco-Spanish War of 1635-59 

 

피에몬테 내전.이 토마스 형이 죽고, 꼬마들이 올라서, 프랑스 엄마가 섭정을 하는데, 저기로 스페니쉬 로드 를 통하니까 리슐리외 의 관심이 저기야. 이탈리아 북부 가 프랑스 스페인 전쟁의 중심이야 또한. 섭정은 루이13세의 여동생 크리스틴 이야. 저따 오른쪽 밀라노 는 스페인 꺼고 이 상위법은 신성로마 인데, 스페인이 저걸 사보이 에 맡긴거걸랑. 사보이 공작이 토리노 에 밀라노 도 갖고 있는겨. 프랑스가 이 섭정권을 자길 달라는거고, 사보이로 시집온 크리스틴 은 사보이 여자야 이제. 

 

시집간 여자 가 정체성이 바뀌는게 아냐.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에서 잉글랜드 킹이 되는 오렌지 도 잉글랜드 화 되는겨 ㅋㅋㅋ. 

 

사보이 의 역사가 그만큼 만만찮은겨. 사보이는 저때 6백년 이상의 정체성이고 내셔널리티야. 저걸 쉽게 프랑스에 못줘 크리스틴이 시집왔다고. 이런게 참 재밌는건데. 

 

저러면서 저지역이 스페인과 프랑스 두 세력이 다투는겨. 꼬마자식은 죽고, 동생이 네살 되서 오르고 엄마는 프랑스 여자고. 오른쪽은 스페인애들이 와서 먹고 왼쪽은 프랑스 가 먹고. 

 

토마스 가  자기는 스페인코트에서  전승 중인데, 자기 고향이 저리 되가니까. 

 

After seeking Spanish support late in 1638 for action against Regent Christine Marie, Madame Royale, Thomas went to Spanish Milan early in 1639, and alongside Spanish forces invaded Piedmont, where many towns welcomed him. He took Turin by trickery, but the French continued to control its citadel. In 1640, he held the city in the multi-layered siege of Turin. After repeated bouts of negotiations with the Regent and the French, Thomas made peace with both in the first half of 1642, and unblushingly changed sides and started fighting with the French against the Spaniards.  

 

공작의 꼬마장남 죽고 바로 간겨 1639년에. 프랑스 입장에선 토마스 가 저기 오면 안돼. 크리스틴을 시켜서 토마스 보고 오지말라고 편지쓰게해 강압적으로. 모든 도시들 성벽들이 꽁꽁 문 닫은겨. 어디는 프랑스 어디는 스페인이 먹고. 그런데 토마스 가 가니까 시민들이 반가이 맞아서 열어주는겨. 토리노 도 갖고 와. 저때 다 뺏긴겨 양쪽에. 

 

The 1640 siege of Turin (22 May–20 September 1640) 

 

토리노 포위 1640년. 토리노 를 이때 프랑스 가 갖고 있던거고, 스페인의 토마스 가 에워쌓은걸 아예 토마스 가 그냥 들어간거야. 저때 토리노 에 있던 프랑스 지휘관이 투렌 이야. 막 나이 30이야. 토마스 가 다섯살 많아. 그리고 여기서 협상을 하면서, 토마스 가 프랑스 에 발담구는겨 ㅋㅋㅋ. 아무런 부끄럼없이, 언블레슁리, 

 

만토바 후계자전쟁 때 협상하면서 프랑스에 반감을 갖아. 저게 딱 10년 된거야. 

 

스페인 코트 에서 전쟁하고 스페인 애들과 지내면서, 스페인에 대한 느낌이 안좋았던겨 이사람은. 스페인이 먼가 시대에 쳐진거야 저때부터. 또한 저런걸 리슐리외 가 외교적으로 거든거고. 리슐리외 를 이런면에서  잔머리쟁이로 보는거고.

 

이사람이 이때부터 철저한 친프랑스 가 돼. 프랑스 가 비록 돈은 없지만 스페인을 이기는 먼가를 본겨. 프랑스 가 스페인에 오스트리아에 맞선다는건 말이 안되는겨 저때. 프랑스는 조또 아무것도 없는 애들이야. 로마 역사 외에는. 헌데 저 정신으로 이긴겨 프랑스가. 이후 리슐리외 도 죽고 마자랭이 잡고 프롱드의 난이야. 토마스 는 반프롱드야. 그랑콩데 도 스페인으로 갔어 프롱드로 엮이고 

 

The Grand Master of France (French: Grand Maître de France) was, during the Ancien Régime and Bourbon Restoration in France, one of the Great Officers of the Crown of France and head of the "Maison du Roi", the king's royal household. The position is similar to that of Lord Steward in England.  

 

토마스 가 받은 자리가 프롱드때 어린루이 옆에서 지키면서 그랑메트르. 그랜드 마스터 야. 프랑스 왕실 집안 최고 집사야. 권력 최측근 자리야. 

 

사보이 도 이 토마스 가 유지를 시켜준겨. 카리냐노 의 이 토마스 가. 

 

토마스 가 그랑메트르 자리를 1654년에 받고 2년 후에 죽어. 60세. 

 

Eugene Maurice of Savoy (French: Eugène Maurice de Savoie; 2 March 1635 – 6 June 1673) was an Italian-French general and nobleman. A count of Soissons, he was the father of imperial field-marshal Prince Eugene of Savoy

 

아들이 사보이의. 외젠 모리스. 토마스의 카리냐노 타이틀은 장남이 갖고가는거고, 동생 외젠 모리스 가 스와송 백작 자리를 받아. 프린스 외젠 의 아빠야. 형인 2대 카리냐노 는 귀머거리야. 데스테 가문여자와 결혼하고. 

 

Olympia Mancini, Countess of Soissons (French: Olympe Mancini; 11 July 1638 – 9 October 1708) was the second-eldest of the five celebrated Mancini sisters, who along with two of their female Martinozzi cousins, were known at the court of King Louis XIV of France as the Mazarinettes because their uncle was Louis XIV's chief minister, Cardinal Mazarin. Olympia was later to become the mother of the famous Austrian general Prince Eugene of Savoy. She also involved herself in various court intrigues including the notorious Poison Affair, which led to her expulsion from France.

 

외젠 모리스 와 결혼하는 여자가, 문제의 올림피아 만치니.야. 이여자는 엄마 가 마자랭 추기경의 여동생이야. 마자랭 외삼촌 빽으로 태양왕 루이 코트 에 드나드는거야. 루이 랑 동갑이야. 외젠 모리스 와 1657년 에 결혼을 해. 19세에. 

 

 At court, the Count of Soissons (comte Soissons) was addressed as Monsieur le Comte. As his wife, Olympia was referred to at court as Madame la comtesse.  

 

스와송 백작은 므슈 르 콩트. 신랑덕에 여기 백작부인이 되었어. 마담 라 콩테스. 므슈 니 마담 이니 이런게 루이13세 동생 오를레앙 가스통 부터 티나오는 용어야. 이사람딸 마드모아젤에. 이전 썰. 

 

마자랭 외삼촌에, 결혼으로 스와송의 백작부인이 된겨. 이 스와송 백작 인 외젠 모리스 는 아빠 토마스 는 별개로 엄마가 부르봉 콩데의 마리야. 부르봉의 최고 집안이야. 이 여자가 젊은 태양왕 루이 코트에서 루이가 아직 결혼도 안한겨. 레이디 들 중에 최고 자리야 결혼한 유부녀 가. 추파를  던지는겨 이여자가. 그러다가 루이가 마리아테레사 랑 결혼하고 여기 레이디 코트 로 드가는거야. 

 

Surintendante de la Maison de la Reine ("Superintendent of the Queen's Household"), or only Surintendante, was the senior lady-in-waiting at the royal court of France from 1619 until the French revolution. The Surintendante was selected from the members of the highest French nobility.  

 

올림피아 가 받는 자리가 레이디 코트에서 쉬르 앙탕당트. 앙탕당 이 돈걷는자리에서 재무관 이 된다 했잖니 콜베르 할때. 퀸 살림살이 의 최고재무관 인겨.

 

 There were rumours that prior to her marriage, she was briefly the mistress of Louis XIV. While not exactly beautiful, Olympia was described as possessing great charm and indisputable fascination. Her hair was dark, her complexion brilliant, her eyes black and vivacious, and her figure plump and rounded.[3] After her marriage, she allied herself with Louis' sister-in-law, Henriette, Duchess of Orléans, who was known at court as Madame, and with whom he had (allegedly) fallen deeply in love. Their relationship is highly unlikely to have been sexual, although the Queen Mother was deeply concerned about it.[4] When Henriette and Louis sought to hide their relationship from others, Olympia is said to have introduced one of Henriette's ladies-in-waiting, Louise, Mademoiselle de La Vallière, to the King so that he might claim that his attendance upon Henriette and her ladies was based on his affection for Louise and not Henriette. Olympia turned against Louise, however, after the King fell in love with the latter at the expense of Henrietta Anne.  

 

올림피아는 아주 이쁘지는 않았는데, 굉장한 매력이 있고 홀리는 맛이 있어. 머리는 다크하고 안색은 밝아 눈은 까망에 빛이나. 체형은 둥글둥글하고. 결혼하고 죽이 맞는 여자가 루이 의 동생 필립의 마누라 헨리에타 야. 찰스1세의 딸이야. 그런데 루이가 자기 동생마누라 에 깊이 빠져. 섹슈얼한 관계 는 아닌것으로 보인다. 올림피아 가 이걸 막으려고 헨리에타 의 레이디코트의 여자 루이즈, 를 킹에 소개시켜줘. 킹이 헨리에타 를 멀리 하고 이 루이즈 에 빠져서 연인이 돼. 이때 루이는 결혼 을 막 한 상태야. 

 

올림피아 는 결혼전에 루이 의 미스트리스, 애인이었다 는 루머에, 머 당시 레이디 코트 여자들은 킹이랑 엮이고 싶은 마음들도 많을 테고. 올림피아 가 루이즈 라는 여자를 소개시켜줬는데 루이가 저여자에게 빠진겨. 

 

Olympia was accused in 1679 in the Affaire des Poisons of having plotted with La Voisin to poison Louise de La Vallière. She was even said to have threatened the King himself with the words, "come back to me, or you will be sorry". In addition, she was suspected of poisoning her own husband, and also on 12 February 1689 Queen Maria Luisa of Spain, the daughter of Henriette and niece of Louis XIV whose confidence she had gained after having taken up residence in Spain following her expulsion from France as a result of the Poison Affair  

 

그러다가 1679년에 독약 스캔들 로 기소가 돼. 이때 아들 외젠 은 16세 고 신랑은 죽었어 40이 안되서. 자식들을 많이 낳았고. 드라 발리에르 의 루이즈 를 독약으로 죽이려 했다는 거고, 킹에게 협박을 했다는겨, 나에게 돌아와라 그렇지 않으년 당신은 쏘리 될거다. 더하여 이전에 남편이 죽었는데 아마 독살시킨거일거다. 

 

The Affair of the Poisons (l'affaire des poisons) was a major murder scandal in France during the reign of King Louis XIV. Between 1677 and 1682, a number of prominent members of the aristocracy were implicated and sentenced on charges of poisoning and witchcraft. The scandal reached into the inner circle of the king. It led to the execution of 36 people.  

 

이게 저당시 독약 스캔들.인데. 라페르 디 포이종. 1677-82. 이전 1675년 에, 프랑스 귀족여자가 애인과 공모해서, 유산을 받으려고 자기 아빠와 남자형제들을 독약으로 죽인거로 재판받고 죽어. 이 여자가 병원에서 가난한 이들 독살시켰다는 소문도 나고. 이 사건이 계속 이어져서, 주술사 들이 잡혀. 무당들. 여기에 드나드는게 코트의 귀족 여자들이야. 이 불똥이 루이의 레이디코트에도 튀고, 몽테스판 마담 도 자기가 사랑독차지할래 라이벌 죽여줘 해댔다고도 하고. 

 

저당시도 오컬트야 이 코트가. 저 분위기가 20세기 초 러시아 코트 까지 가는거고. 이 오컬트 가 이게 장난이 아냐 저때도. 

 

이 조선민국은 지금도 여전히 오컬트 고 ㅋㅋㅋ. 

 

무당의 천지야 이놈의 나라가. 드라마 의 캐릭이 무당이고. 

 

무당 찾는 나라는. 끝이야 저건. 걍 짐승의 세계야. 답이 없어 저게. 

 

올림피아 가 사실이든 아니든 하여튼 저때부터 프랑스 에 못가 ㅋㅋㅋ. 벨기에 땅 가서 사는겨. 

 

외젠 이 저 런 엄마 의 독약 스캔들 분위기 에서 16세 를 보내고 막 이십대로 접어드는겨. 

 

이사람은 성직자의 길을 가려다가, 갑자기 길을 틀고. 루이한테 가서 나 군인으로 당신 코트에서 충성하겠다고 말해. 그러잖아도 올림피아 때문에 기분이 열라 나빠. 올림피아 가 저때는 나이 40이 되어가는거고, 동갑인데다가 애정이 증오로 바뀌어서 먼말인들 못할 사이도 아니었을거고 협박도 했을기고 아 졸 싫은겨 올림피아 에 저 자식도. 

 

이 졸 못생긴게 힘도 없어보이고, 니가 먼 군인을 해. 꺼져.

 

태양왕 루이한테 욕먹고, 레오폴트1세 황제를 찾아가.

 

"I have warned you that you are dealing with an enterprising young prince," wrote Louis XIV to his commander, "he does not tie himself down to the rules of war."

 

1701년 카프리 전투에, 루이가 필드마샬 자기 근위대 출신 니콜라 카티나.에게 쓴 편지야. 야 니가 상대하는 프린스 외젠은 말이야. 내가 너에게 경고했지만, 걘 엔터프라이징 영 프린스 야. 그는 전쟁의 룰 들에 얽매이지 않는 시안한 놈이야. 

 

엔터프라이징 이.  entreprendre (“to undertake”), from entre (“in between”) + prendre (“to take”), from Latin inter + prehendō, see prehensile. 엔트레 프렌드레. 사이에서, 프렌도, 프리헨도. 취하는겨. 빈틈을 노려서 쟁취하는겨. 모험심이 강한거고.  창의적 자유분방한 프린스 니까 조심해 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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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젠 은 어마어마한 인간이야. 그러면서도 자기 이야기 를 안남겨 남들처럼. 잘난척 뭔가를 쓰고자 한 것도 없어. 

 

Prince Eugene Francis of Savoy–Carignano[1] (18 October 1663 – 21 April 1736). 1736년 73세 에 죽는데, 나이 20에 비엔나 전투 에 참전하면서 대투르크전쟁 시작부터 출발해서. 9년 전쟁. 스페인후계자전쟁. 라코치 독립전쟁.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 엮이는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 쿼드러플 연합전쟁. 폴란드 후계자 전쟁. 

 

저 당대의 유럽의 역사 를 외젠 을 빼놓으면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오스트리아 와 헝가리 에선 위대한 인간이고, 이탈리아 는 사보이 가 통일한건데, 이런 사보이 도 외젠 할배 토마스 가 세워준거고, 외젠이 저당시 오스트리아 편에서 전쟁하면서 사보이 가 사르디니아 를 갖고 오면서 얘들이 이탈리아를 통일하는겨 뒤로가서. 

 

엄청난 인간이야. 오스트리아 는 돈도 없는 애들이야. 완전히 이사람이 창의적인 엔터프라이징 영 프린스 의 기운으로 헤쳐나간겨. 이사람이 유럽을 만든겨 저당시에. 그런데 이런건 역시나 어디서 나와? 책에서 나오는겨 이사람이 읽은. 그리고 인문학에서 나오는거고. 비엔나의 페이트리온 후원가 로 건물 세운것도 외젠 이야. 

 

In the years following the Peace of Rastatt Eugene became acquainted with a large number of scholarly men. Given his position and responsiveness they were keen to meet him: few could exist without patronage and this was probably the main reason for Gottfried Leibniz's association with him in 1714.[125] Eugene also befriended the French writer Jean-Baptiste Rousseau who, by 1716, was receiving financial support from Eugene. Rousseau stayed on attached to the Prince's household, probably helping in the library, until he left for the Netherlands in 1722.[126] Another acquaintance, Montesquieu, already famous for his Persian Letters when he arrived in Vienna in 1728, favourably recalled his time spent at the Prince's table. Nevertheless, Eugene had no literary pretensions of his own, and was not tempted like Maurice de Saxe or Marshal Villars to write his memoirs or books on the art of war. He did, however, become a collector on the grandest scale: his picture galleries were filled with 16th- and 17th-century Italian, Dutch and Flemish art;[127] his library at the Stadtpalais crammed with over 15,000 books, 237 manuscripts as well as a huge collection of prints (of particular interest were books on natural history and geography). "It is hardly believable," wrote Rousseau, "that a man who carries on his shoulders the burden of almost all the affairs of Europe … should find as much time to read as though he had nothing else to do."[128] At Eugene's death his possessions and estates, except those in Hungary which the crown reclaimed, went to his niece, Princess Maria Anna Victoria, who at once decided to sell everything. The artwork was bought by Charles Emmanuel III of Sardinia. Eugene's library, prints and drawings were purchased by the Emperor in 1737 and have since passed into Austrian national collections.  

 

외젠은 많은 학자들을 알게 돼. 대부분을 후원해줘. 라이프니츠 는 큰형뻘이고 법의정신 쓴 몽테스키외 는 아들뻘이고. 

당시 프랑스 극작가 장-밥티스트 루소.가 1716년에 외젠으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받아서 외젠의 집에 머물렀어. 도서관에서 머 도와줄거 없나 하고. 이때 외젠은 네덜란드로 가 있는 상태고. 그의 도서관은 15000 이상의 책들에, 237개의 원고에 거대한 량의 프린트물이 또한 있었고, 내추럴 히스토리 와 지리 에 관련된 책들이 특히 많았다. 

 

루소가 썼다 "믿을 수 없다, 한 사람이 그의 양어깨위에 유럽의 거의 모든 일들을 지고 있으면서, 자기와 상관 없는 것들조차도 시간들을 내서 이렇게 읽었다는 건데." 

 

외젠이 죽고 그의 소유물들과 땅들은, 헝가리 의 것을 제외하고 그의 조카 에게 갔는데 모두 팔았다. 예술품은 사르디니아 의 에마누엘레3세 가 샀다. 외젠의 도서물들은 황제가 구입했다 이건 오스트리아 국가 차원의 소유물로 들어갔다. 

 

유럽 인간들은 칼잽이 가 펜잽이야. 문무 의 구분 이란건 이스턴이나 있던거고. 쟤들 모두는 다 책읽은 애들이고 책 쓰는 애들이야. 문민정부 ㅋㅋㅋ. 참 한심한 소리지 진짜. 조선 양반 들의 저 조선 정신 을 전혀 벗어나 지 못해 이 조선 들은. 돈키호테 의 부르짖음이야. 어드래 칼 과 펜을 따로 생각하는가? 

 

당시 작센의 모리스 나 프랑스 마샬 빌라르 도 전쟁관련 책을 썼는데, 외젠은 그런 유혹도 없었다. 

 

저런 수준의 애들도 나름 지들 전쟁학 이라며 글을 쓰는데, 외젠은 그짓도 관심이 없는겨. 

 

 

From the age of ten, Eugene had been brought up for a career in the church; a personal choice of the King, basing the decision on the young Prince's poor physique and bearing. Certainly Eugene's appearance was not impressive — "He was never good-looking …" wrote the Duchess of Orléans, "It is true that his eyes are not ugly, but his nose ruins his face; he has two large teeth which are visible at all times."[5]  

 

열살때 교회로 보내. 루이의 선택이야. 외젠이 체격도 왜소하고 앤 딱 성직자 길이 맞아. 외젠의 외모는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좋은 인상이 아니었어. 오를레앙 공작녀가 썼다. 루이동생 필립의 둘째 마누라. 그건 사실이야 그의 눈은 못생기지는 않았어 그런데 코가 얼굴을 망쳐. 두 커다란 이빨은 항상 보이고. 

 

엄마는 킹 코트에서 노는거고 아빠는 프랑스 편에서 전쟁길에만 다니는데 별볼일 없고. 걍 형제들끼리 지내는겨. 부모의 애정이란건 없어. 

 

Whatever the truth, Olympia, rather than face trial, subsequently fled France for Brussels in January 1680, leaving Eugene in the care of his father's mother, Marie de Bourbon, and her daughter, Hereditary Princess of Baden, mother of Prince Louis of Baden 

 

 

그러다 엄마 올림피아 가 독약스캔달로 도망을 가. 브뤼셀에서 지내다 죽어 엄마는. 이때 외젠은 십대 후반이고, 고모 집으로 가. 이 고모 가 시집간 곳이 바덴바덴 이야. 이 바덴바덴 후작이 외젠과 사촌이고 열살정도 많고. 또한 비엔나 에서 미리 이 사촌형이 코트에 있던겨 나중에.

 

In February 1683, to the surprise of his family, Eugene declared his intention of joining the army. Now 19 years old, Eugene applied directly to Louis XIV for command of a company in French service, but the King—who had shown no compassion for Olympia's children since her disgrace—refused him out of hand. "The request was modest, not so the petitioner," he remarked. "No one else ever presumed to stare me out so insolently."[6] Whatever the case, Louis XIV's choice would cost him dearly twenty years later, for it would be precisely Eugene, in collaboration with the Duke of Marlborough, who would defeat the French army at Blenheim, a decisive battle which checked French military supremacy and political power. 

 

1683년. 20세 에. 2월에 깜짝 선언을 해. 군대에 들어가겠다고. 이 해에 비엔나 전투야. 프랑스 루이는 리유니온즈로 알자스 먹고 룩셈부르크 포격하다 쉬는거고. 외젠 은 프랑스여 정체성이. 할아버지 가 자리잡으면서. 할머니는 부르봉 콩데 직속 장자집안의 여동생이고. 그런데 이때 엄마 독약스캔들로 이미 버려진 분위기거든. 루이가 거절해. 루이 가 하는 말 "외젠의 요청은 겸손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탄원자 의 간곡함은 아니었다" ㅋㅋㅋ. 지 엄마 잘못을 용서해달라며 빌면서 프랑스 군인이 되게 해주세요 해야하는데 그리 안뵈었다는거지. "아무도 나를 무례하게 건방지게 응시한 적이 없었다" 외젠이 말은 공손하게 했는데 눈은 걍 째려 봤나봐. 이 루이가 기분이 나쁜거지 ㅋㅋㅋ. 아 하튼 얜. 

 

어찌되었든간에, 루이의 선택은 20년 후에 단단하게 치뤄진다. 왜냐면 외젠은 말버러 공작과 함께 스페인후계자전쟁에서 프랑스 병력의 압도적임과 정치적 힘을 막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블린트하임 전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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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이 프랑스 코트에서 바로 거부당해. 그런데 외젠 의 형이 오스트리아 쪽에서 저당시 오스만애들과 전투하면서 죽어. 트랜실베니아 를 중심으로 저때 쿠루츠 에 반오스트리아 가 항상 반란을 하던 시기여. 그리고 저때 비엔나를 쳐들어오는걸 알아. 외젠이 바로 비엔나 로 가는겨. 할아버지 는 펠피페2세의 딸이 엄마였어. 오스트리아 도 자기 정체성의 일부야. 

 

Maximilian II (11 July 1662 – 26 February 1726), also known as Max Emanuel or Maximilian Emanuel,[1] was a Wittelsbach ruler of Bavaria and a Prince-elector of the Holy Roman Empire.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바리아 선제후 막시밀리안2세 도, 외젠의 사촌형이야. 이사람의 엄마는 외젠의 할아버지 토마스 의 큰형 사보이 공작의 딸이야. 바바리아 선제후 에 바덴바덴 후작 이 모두 이 사보이 인간들인겨. 

 

아이  루이 니가 거부하면 오스트리아 가믄 되지.

 

By May 1683, the Ottoman threat to Emperor Leopold I's capital, Vienna, was very real. The Grand VizierKara Mustafa Pasha—encouraged by Imre Thököly's Magyar rebellion—had invaded Hungary with between 100,000–200,000 men;[8] within two months approximately 90,000 were beneath Vienna's walls. With the 'Turks at the gates', the Emperor fled for the safe refuge of Passau up the Danube, a more distant and secure part of his dominion.[9] It was at Leopold I's camp that Eugene arrived in mid-August.  

 

레오폴트1세 의 비엔나 는 저때 심각한겨. 퇴켈리 가 쿠루츠 의 리더로 파샤이자 그랜드비지어 의 빽으로 반란하고 헝가리로 쳐들어왔어 10만 병력으로. 이미 오스만이 전쟁선포는 작년에 한거야. 얘들이 이미 선발진이 움직인겨 저때 퇴켈리와 저쪽 에얄레트 의 파샤 는. 비엔나 성벽안에는 9만명의 시민들이 있어. 이전에 흑사병을 막 겪은 이들이야. 그리고 왼쪽 파사우 로 같이 떠난겨 시민들과. 이 파사우 로 외진이 8월 중순 에 온거야. 9월 12일에 비엔나 전투고. 

 

쟤들은 시민들과 같이 떠나잖니. 페르시아 가 아테나이 쳐들어오면 다 같이 살레미스 섬으로 가고.

 

조선 들은 지들만 도망쳐 새벽에 몰래. 지들 창년들만 데리고. 

 

세상 역사에 저런 것들이 없어 인류역사에.

 

위대한 조선을 어찌 압니까요? 사쿠라들이? ㅋㅋㅋ. 

 

 

저 사학자 들에 민족 해대는 저 지식인자연 하는 그야말로 머들. 저것들이 결국 중국에 주권을 넘길거다 저거.

 

 

 

Though French was his favored language, he communicated with Leopold in Italian, as the Emperor (though he knew it perfectly) disliked French. But Eugene also had a reasonable command of German, which he understood very easily, something that helped him much in the military.[12]

Eugene was in no doubt where his new allegiance lay—"I will devote all my strength, all my courage, and if need be, my last drop of blood, to the service of your Imperial Majesty."[13] This loyalty was immediately put to the test. By September, the Imperial forces under the Duke of Lorraine, together with a powerful Polish army under King John III Sobieski, were poised to strike the Sultan's army. On the morning of 12 September, the Christian forces drew up in line of battle on the south-eastern slopes of the Vienna Woods, looking down on the massed enemy camp. The day-long Battle of Vienna resulted in the lifting of the 60-day siege, and the Sultan's forces were routed and in retreat. Serving under Baden, Eugene distinguished himself in the battle, earning commendation from Lorraine and the Emperor; he later received the nomination for the colonelcy of the Dragoon Regiment Kufstein  

 

저게 참 웃긴게 말이야. 전쟁경험이 전혀 없는. 20세 인간이야. 황제도 머 고맙긴 해. 헌데  쟤가 멀알아. ㅋㅋㅋ. 바바리아 선제후 에 바덴바덴 후작 이라는 사보이 빽으로 직접 인사도 해. 오스트리아는 당시 프랑스를 혐오해. 쟨 프랑스 인간이야. 프랑스어 도 듣기싫어해. 프랑스어 쓰면 안돼 ㅋㅋㅋ. 그는 레오폴트 와 이탈리아어 로 대화했다. 황제가 프랜치를 혐오했기 때문에. 그러나 외젠 은 또한 마침 멘토 인 사수 게르만 인간을 잘 만났어, 이 게르만이 외젠을 잘 도와준겨. 외젠이 이사람한테서 배운거고. 누군지 안나오는데. 

 

"나는 내 모든 힘, 내 모든 용기, 그리고 필요하다면 내 마지막 피한방울 까지도, 그대 임페리얼 마제스티 를 위한 일에 바치겠소." 이 로얄티는 바로 테스트 되었다. 바로 비엔나 전투여. 로렌 공작에 소비에스키 킹과 함께 저 대전투를 치룬겨 ㅋㅋㅋ. 사촌형 바덴바덴 후작밑에서 그래도 안꿀린겨. 칭찬도 받아. 

 

The Siege of Belgrade in 1688 was the fourth siege of that city, taking place during the Great Turkish War.  

 

저 기세로 바로 5년후에 베오그라드 까지 먹는겨. 그리고 2년후에 다시 오스만이 점령하고, 이 베오그라드 는 이후 오스트리아-터키 전쟁 때 1717에 갖고와 다시 합스부르크가. 이걸 20년 후에 다시 오스만이 갖고 가고 다시 오스트리아 가 갖고 가고 이걸 세르비아 가 갖고가는게 18세기 베오그라드 역사야. 

 

1688년에 베오그라드 갖고 오는건 바바리아 선제후 고, 사촌동생 외젠 이 25세 에 참전한겨. 1717년에는 외젠이 필드 마샬로 저걸 갖고 온거고. 

 

The Battle of Zenta (also known as the Battle of Senta), was fought on 11 September 1697,  

 

젠타 전투 가 1697년 이야. 2년 후에 대투르크전쟁 이 끝나는 조약이고. 이 젠타 전투의 총사령이 외젠 이야. 1683년 나이 20세 에서 저대 34세여. 비엔나 전투에서 부터 시작해서 저기서 전쟁을 현장에서 익히면서 마무리를 필드마샬로 자기가 마무리한겨 이게. 그리고 20년 지나서 아래 베오그라드 를 다시 갖고 오는게 외젠이야. 

 

The Nine Years' War (1688–1697). 9년 전쟁이 베오그라드 를 갖고 올때 시작을 한겨. 그래서 오스트리아 가 더이상 못 쳐내려가고 서쪽으로 간거야. 이게 2년후에 베오그라드가 그래서 다시 넘어간거고. 

 

The Battle of Staffarda, 18 August 1690, was fought during Nine Years' War in Piedmont-Savoy  

 

외젠 이 원적은 사보이야. 당시 사보이 공작이 아마데우스2세 이고, 꼬마형죽고 네살때 받은 에마누엘레2세 의 아들이야. 사촌이교. 스타파르다 전투. 이전에 선제후랑 마인츠 전투 하고 이리로 온겨 자기 할배고향으로. 여기에 오스트리아 황제 병력이 지원하는거고. 살루초 지역. 피에몬트 서쪽 변경이야. 이 전투장소 를 외젠이 거부해 여기서 맞서면 필패라고. 가장 중요한게 이 전쟁터 를 결정하는거거든. 여기서 니콜라 카티나 의 프랑스에 참패를 하고, 외젠 이 사촌 공작을 겨우 구출해서 후퇴한겨. 그리고 황제 에게 당시 마샬의 무능을 질타하고 외젠이 마샬로 승진을 해. 이전에는 기병대장 이었거든. 그리고 사보이 가 빼앗긴 지역을 되찾는겨. 이때 사보이 공작 사촌이 무서운겨 외젠 의 저 오스트리아 가. 오히려 얘가 프랑스 랑 손을 잡아 이때 ㅋㅋㅋ. 외젠이 기분나빠하지만 그래도 욕질은 안해. 

 

그리고 나서 9년 전쟁 이 끝나고 다시 오스만 대투르크 전쟁터로 가는겨. 이 마무리가 젠타 전투야. 이걸로 외젠이 대 스타가 되는거고. 1697년 에.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 바로 스페인 후계자 전쟁이야. 9년 전쟁은 외젠이 마인츠 갔다가 주로 북이탈리아 의 사보이 에 있었던거고. 스페인 후계자 전쟁은 단연 이 외젠 이 오스트리아 를 대변하는겨.

 

 

오스트리아 가 대투르크 전쟁에 9년 전쟁에 스페인 후계자 전쟁을 하는거지만

 

저게 원래 프랑스에 상대가 안되는겨. 말이 좋아 신성로마제국 이지 아무것도 아녀 저게. 일단 돈이 없어. 저때 프로테스탄트들이 오히려 도와준거고 대투르크전쟁은. 

 

프랑스 는 태양왕루이 가 성인이 되면서 강력해지는겨. 이전에 리슐리외 의 공이 절대적이야. 국가 이익 이라는 레종데타 를 리슐리외 가 시작한겨 프랑스에서. 이미 이전에 프랑스 영지들은 킹덤 직속이 많아지고, 이게 달라 다른 유럽과 프랑스가. 그러면서 킹덤 직속으로 돈이 더 잘걷혀. 돈 걷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든거고, 세금 을 다시 손본게 리슐리외야. 얘들은 스페인처럼 밖의 것이 없어. 안에서 바닥바닥 긁어야해. 이게 루이가 성인이 되서 열매를 맺는겨. 오히려 돈이 많아져 프랑스가. 땅이 넓어지고 세금이 걷혀 진짜. 콜베르 의 공산당식 경제정책도 초반에 먹히는거고. 

 

스페인은 빚쟁이야. 저 많은 금은이 대체 어디간겨. 오스만애들을 바다와 육지에서 막으면서 다 쓴겨 이걸. 더하여 종교전쟁 개입하면서 쓴거고, 플랑드르 군대 운영하면서 쓴거고. 이 스페인 돈들이 유럽 전역에 흩어지면서 유럽이 근대가 선겨 ㅋㅋㅋ. 물가 는 폭등 안해. 돈이 그만큼 풍부해지면서 전반적으로 다 모두 쓰인겨 돈이. 오스트리아 라는 내륙은 전혀 달라 저긴 거지야 거지. 스페인도 돈 다 쓰고 거지되었어.

 

프랑스 는 완벽한 중앙집권이 제대로 작동을 한겨. 중앙코트는 바로크 양식의 태양왕 놀이하는 루이야. 연극 음악 쟁이들이 넘쳐나고 건축가도 이리로 몰려. 중앙 코트에서 얘만큼 부자가 없어 이때는. 데볼루션 전쟁부터 전쟁만 하면 전승이야 프랑스는. 그랑콩데 와 루이 가 위대한겨. 이 후예들이 이후 9년 전쟁과 스페인후계자 전쟁을 하는겨. 돈 과 인물 이 저 프랑스 는 루이 가 성인이 되서 최강이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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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에레 공작, 루이 드 크레방. 부플레 공작 루이. 로지 공작 기 알동스. 니콜라 카티나(카치나) 저때 사보이 스타파르다 전투를 이긴. 빌러롸 공작 프랑스와. 빵빵해 얘들이. 모두 그랑콩데 와 투렌 에서 배운 애들에 그랑콩데 카피본 뤽상부흐 에 배운이들에. 

 

Louis Joseph de Bourbon, Duke of Vendôme, often simply called Vendôme (1 July 1654 – 11 June 1712) was a French general and Marshal of France. One of the great generals of his era, he was one of Louis XIV's most successful commanders in the War of the Grand Alliance and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방돔공작 루이조제프. 프랑스 에서 가장 탁월한 군인 중 한명이야. 외젠 보다 9년 연상이야. 스페인 후계자전쟁 때 카사노 전투 롬바르디아 에서 외젠을 이겨. 다음전장에선 마샬 밑에서 싸워서 지고. 뤽상부흐 밑에서 배운겨 이사람은. 

 

Claude Louis Hector de Villars, Prince de Martigues, Marquis then Duc de Villars, Vicomte de Melun (8 May 1653 – 17 June 1734) was a French military commander and an illustrious general of Louis XIV of France.[1] He was one of only six Marshals to have been promoted Marshal General of France.  

 

빌라르 공작 클로드 루이 헬토르. 빌라르 라고 불러. 바바리아 선제후 랑 친구야. 

 

저들 이 9년전쟁을 모든 유럽애들이 사방에서 다 막은겨 저 프랑스가. 

 

빵빵해 빵빵해 인물들이. 그리고 돈 이 많아. 리슐리외 에 마자랭 이 프랑스 애들은 사탄규정하지만 저들의 생각이 빛을 발한게 이 루이가 성인이 되서야. 이걸 루이가 저렇게 고대와 중세 개념의 전쟁에 다 낭비를 한겨. 

 

저들을 상대하는 오스트리아 의 거대한 한 축이, 스페인 후계자 전쟁에서는, 우습게도, 프랑스 인간 인 외젠 이야. 

 

그런데, 저때 오스트리아의 군권을 외젠이 쥐지만, 이전의 전쟁들도 그렇고, 오스트리아 의 지원이 졸라게 열악한거야. 오스트리아 는 거지야 거지. 그 상황에서 외젠이 저렇게 나마 버틴겨. 외젠이 전투에서 지는건 반대로 그만큼 오스트리아 의 지원이 너무나 열악했던거야. 

 

저때 유일하게 프랑스 편인게 라코치 여 동쪽에서 ㅋㅋㅋ. 헝가리 독립한다면서 오스트리아 시선을 좀 돌리고. 

 

바바리아 선제후 도 바닥은 합스부르크 가 졸 싫어. 얘들도 초기엔 프랑스랑 손잡았어. 

 

사보이 도 프랑스 랑 손잡았잖아. 초기엔 프랑스야 스페인 후계자 전쟁에. 그리고 다시 다 등돌리고 오스트리아 로 가서리 사보이는 시칠리아 를 먹은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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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1세 황제가 1705년 에 죽어. 외젠이 20세 일때 처음 본 사람이고, 외젠을 기특해했지만, 결론적으로 잘 안맞는겨. 레오폴트가 적극적 지원을 안해. 아들 요세프 가 황제가 되서 외젠을 적극적으로 서포팅 하는겨. 

 

The Battle of Blenheim (German: Zweite Schlacht bei Höchstädt; French Bataille de Höchstädt), fought on 13 August 1704, was a major battle of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5] The overwhelming Allied victory ensured the safety of Vienna from the Franco-Bavarian army, thus preventing the collapse of the Grand Alliance.  

 

스페인후계자 전쟁에서 1704년 블린트하임 전투. 바바리아 서쪽 지역이고. 바바리아 선제후 가 프랑스 편이고, 외젠 의 사촌이랑 외젠이 적으로 만나는겨 이건. 이걸 잉글랜드 말버러 공작과 외젠 의 합으로 이기는겨. 이걸로 비엔나 가는길 막고 연합군 굳히고 프랑스 는 변방 수비만 해야 하던거야. 각각 오만 병력의 대규모 전투야. 

 

저 이후 프랑스 도 오스트리아 도 답이 없는겨. 전쟁을 할 여력도 없어 특히나 오스트리아는. 루이는 조건이 안맞는거고. 이걸 결국 잉글랜드의 퀸 앤 이 마무리 시키는게 스페인후계자 전쟁이야. 외젠 이야 고마운거고 저놈의 의미없는 전쟁질.

 

그리곤 바로 오스트리아 터키 전쟁 1716-18 하러 가서 베오그라드 를 먹은겨.

 

The War of the Quadruple Alliance (1718–1720) 바로 터진게 쿼드러플 동맹 전쟁. 4국 동맹. 스페인이 힘을 회복하고. 이전 스페인후계자전쟁때 이탈리아 를 모두 오스트리아 에 뺏기고 스페인네덜란드 도 빼앗겼어. 머래도 갖고 와야해. 사르디니아 를 갖고 오고 시칠리아 도 갖고오려해. 전쟁이야. 이전의 프랑스 웬수들이 서로 뭉쳐. 외젠이 여기 시칠리아 에 참전하러 가. 헌데 바뀐 황세 카를 과 사이가 벌어졌어. 

 

The War of the Polish Succession (PolishWojna o sukcesję polską; 1733–35) 폴란드 후계자 전쟁. 여기도 오스트리아 코트에서 군권은 외젠이야. 이사람 나이가 70이 넘었어. 오스트리아 군사력도 없는게 저기 끼는겨. 수비에 치중해야해. 

 

 

Eugene's monument in Heldenplatz, Vienna, by Anton Dominik Fernkorn.

 

Napoleon considered Eugene one of the seven greatest commanders of history.[129] Although later military critics have disagreed with that assessment, Eugene was undoubtedly the greatest Austrian general.[130] He was no military innovator, but he had the ability to make an inadequate system work.  

 

나폴레옹이. 외젠을 역사의 가장 위대한 사령관 일곱 의 하나로 여겼다. 후반의 군권에 대한 평가는 불일치가 있지만, 외젠은 의심할바없이 가장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너럴 이다. 그는 군사적 혁명가 는 아니다. 불충분한 시스템을 작동하는 능력을 갖았다 ㅋㅋㅋ. 허섭한 병력과 물자로 버티거나 이기는게 이사람의 콸리티야 ㅋㅋㅋ. 

 

"The important thing," wrote Maurice de Saxe in his Reveries, "is to see the opportunity and to know how to use it. Prince Eugene possessed this quality which is the greatest in the art of war and which is the test of the most elevated genius."  

 

있는 것을 갖고 어떻게 활용해 쓰느냐 가 중요하단거고 그런면에서 가장 탁월하다는거지. 너무 없으니까 ㅋㅋㅋ 있는거라도 어떻게 최대한 활용하는가 의 능력이 발달했다는건지. 

 

Eugene was a disciplinarian—when ordinary soldiers disobeyed orders he was prepared to shoot them himself—but he rejected blind brutality, writing "you should only be harsh when, as often happens, kindness proves useless"  

 

외젠은 엄격주의자였다. 사병들이 명령을 거부하면 그는 그들을 자기스스로 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맹목적 야만성은 거부했다. "친절함이 쓸모없음이 증명될 때,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그때는 거칠잔인 해져야 한다. 

 

It is inscribed on one side, 'To the wise counsellor of three Emperors', and on the other, 'To the glorious conqueror of Austria's enemies'. 

 

비엔나의 저 기마상에 쓰여진 글. 세황제들에겐 현명한 카운셀러. 오스트리아 의 적들에겐 영광스런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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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은 인물사 하나를 제대로 정리하려면, 역시나 모든 유럽이 엮이고 모든 사건들이 얽혀서 제대로 정리 된 게 없고.

 

외젠 을 하나 정리해보려다, 니덜한테 너무나 버거운 말들이라 이걸로 끊자

 

니덜이 본다고 멀 알겄니. 

After playing cards at Countess Batthyány's on the evening of 20 April he returned to his bed at the Stadtpalais. When his servants arrived to wake him the next morning, 21 April 1736, they found Prince Eugene dead after choking from phlegm in his throat, presumably after suffering from pneumonia. Eugene's heart was buried with those of others of his family in Turin. His remains were carried in a long procession to St. Stephen's Cathedral, where the body was interred in the Kreuzkapelle

카드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침에 서번트들이 깨우러 갔는데 죽어있었다. 아마도 폐렴으로 가래가 올라와 기도를 막은 질식사 로. 심장은 토리노 의 가족묘로 보내지고 시신은 비엔나의 성당에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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